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31 | 3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펭귄의 우울
안드레이 쿠르코프 지음, 이나미.이영준 옮김 / 솔출판사 / 2006년 8월
평점 :
절판


펭귄의 우울, 사실 책 제목을 듣는 순간, 동물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우화집일 거라고 생각했다. 지구 상에 존재하는 동물 중, 사람과 비슷하지만 또 그만큼 사람과 연결시키기가 어려운 동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펭귄을 키우는 사람이라니, 단 한 번도 내 생각의 범주에 들어왔던 적이 없는 발상이다
 
사실 그래서 시작부터가 독특하게 느껴졌다. 기껏해야 펭귄 세계들간의 이야기, 펭귄들의 대화, 뭐 이런 게 아닐까 싶었던 생각의 범주가 펭귄을 키우는 사람의 이야기- 까지로 넓어졌으니까
  
그러나, 사실 펭귄은 하나의 상징적 존재일 뿐, 이 책의 주인공은 아니다. 이 책의 주인공은 펭귄 미샤를 키우며 살아가는 주인, 빅토르이다. 여기까지 생각하면, 또 아- 그럼 만화 cat이나 당근있어요? 처럼 애완동물을 기르는 에피소드? 이렇게 생각하기 쉽겠지만, 또 그건 아니다. 주인공이 펭귄을 키우는 건, 그저 사건의 모티프를 제공해 주고 있을 뿐이다
 
아, 그럼 도대체 이 책의 핵심 내용이 뭔데? 라는 궁금증이 생겼을 것이다. 이 책에서 가장 핵심적으로 다뤄지고 있는 부분은 바로 주인공 빅토르의 독특한 직업이다. 빅토르는 단편소설가이지만, 주류 소설가는 아니다. 그저 근근히 소설을 쓰며 연명해가는, 가난한 작가일 뿐이다. 

그런 그에게 다가온 새로운 기회는, 바로 신문에 사람들의 조문을 쓰는 것이다. 죽은 사람의 조문을 쓰는 것이 아니라, 죽을 사람들의 조문을 쓰는 것. 처음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겼으나 점점 상황은 심각해지고, 본인이 굉장한 일에 휘말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만 그는 빠져나올 방도를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 역시 결국 그 조문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게 된다.
 
그럼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할 것이다. 아니, 제목이 왜 펭귄의 우울인데? 그 수많은 동물 중 펭귄이 선택된 첫번째 이유는 펭귄의 외모에서 풍기는 상징성이다. 흰색과 검은색으로 이루어져있어, 남극의 신사 라고도 불리는 펭귄의 정장스러운 모습은 이 소설의 핵심 키워드인 '죽음'과 맞닿은 '장례식'과 어울리는 모습이다. 실제로 펭귄미샤는 후에 장례식에도 이리저리 끌려다니게 된다
 
그리고 두번째 이유는 펭귄의 타자성이다. 남극에 살고 있다가 이 책의 지리적 배경인 키예프로 오게 됐기에 펭귄은 이 곳에서는 늘 영원한 타자일 수 밖에 없다. 기후도, 먹거리도, 환경도, 그에게 맞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결국 우울증에, 선천적 심장병까지 악화되게 되는데, 이러한 타자성 역시 주인공인 빅토르 역시, 주류에 이용당할 뿐, 이 소설에서 한 번도 주류인 적이 없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일 것이다
 
이러한 펭귄의 두 가지 특성은, 이 소설에서 상징적 의미를 갖기도 하지만, 후에는 빅토르를 위기로 몰아넣는 소설적 장치로 이용되기도 한다. 미샤가 장례식장에 불려다녀, 결국 병을 얻게 되고, 그 펭귄의 병을 치료해 주는 것을 '호의'로 받아들였으나 그것은 나중에 그의 '십자가'에서 그를 정죄하게 되는 중요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보여지는 가족의 모습 또한 흥미롭다. 처음에는 애완동물 미샤와 둘이 살아가던 빅토르는 우연찮은 계기를 통해 자꾸만 새로운 가족을 만나게 되는데 그 구성도 참 재밌다
 
빅토르 (본인)
소냐 (두번쯤? 만난 '펭귄아닌' 미샤의 딸)
니나 (소냐의 보모)
미샤 (애완동물)
 
정말 피라고는 한 방울도 섞이지 않는 이 네 개체가 (미샤는 사람이 아니므로) 제법 그럴듯한 가족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김태용의 '가족의 탄생'이 생각났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이러한 대안가족의 모습은, 정작 마음 깊은 곳은 달래주는 역할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미샤를 지극히 아끼던 소냐는 새로운 관심의 대상(니나)이 나타나자 관심을 다른 곳으로 옮기기도 하고, 빅토르를 위하고 사랑하는 것 같던 니나는 정작 그의 어려운 상황을 깊이 공감하지는 못한다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 일을 대하던 빅토르의 태도이다. 처음에는 굉장히 열성적으로 자신의 일을 하려고 하지만,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자신의 뜻대로 될 수 없는 어떠한 큰 구조 속에 들어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는 고민하지만 이내 체념하게 된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좋지 못한 결과를 불러오고 있음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이 상황의 문제성을 어느 정도 알게 되지만 그는 그 상황 속에 좀더 머무르기로 한다. 그냥 생각하지 말자, 평온한 길을 택하자. 하지만 이런 생각이 결국 그를 절망의 길로 인도하게 되는 것. 이게 우리 대부분의 직장인들의 모습은 아닐까, 하는 생각 역시 해본다.

큰 구조 속에서, 내가 나도 모르게 저지르게 되는 옳지 못한 일들, 어쩔 수 없어- 먹고 살기 위한 거잖아, 라고 스스로를 합리화시키며,  애써 생각하려 하지 않는 것들- 그저 편안하게 생각하려는 것들이 결국 우리의 삶을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나 역시 크게 양심을 거스르는 일을 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좀 더 민감해지고, 좀 더 예민해져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이건 뭐 굳이 작가가 의도한 게 아닐 수도 있겠다만 ㅎ)
 
암튼, 러시아의 현대 문학 작품은 처음 접했던 것 같은데 생각보다 괜찮은 시작이었던 것 같다.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들과 함께 소설적 재미도 충분했다. 펭귄의 느릿느릿한 걸음처럼 이 소설의 진행도 빠르지는 않지만 느린 진행에도 불구하고 묘한 긴장감이 있는 듯하다
 
이야기의 결말 부분 역시 내게는 매우 흥미로웠다-
 
안드레이쿠르코프의 다른 책 '펭귄의 실종'도 곧 출간될 것 같던데 ^^
그 책도 한 번 읽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1세기에는 바꿔야 할 거짓말 인터뷰 특강 시리즈 3
김동광, 정희진, 박노자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06년 9월
평점 :
품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거짓말로 둘러싸여져 있다. 알고 하는 거짓말, 모르고 하는 거짓말,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짓말. 사실 어떤 거짓말도 합리화될 수 없고, 또 이 단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 역시 없을 것이다. 

이 책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거짓말에 대한 이야기이다. 개인적으로는 김동광, 김형덕, 프라풀 비드와이 님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평소에 좋아하고, 그 분들은 나라는 존재를 전혀 모르지만, 혼자 괜히 맘속으로 친하게 느껴지는 것 같은 그런 저자들이어서, 이 책의 출간이 더욱 반가웠었다. 이제 김동광, 김형덕, 프라풀 비드와이 님도 이 책을 읽고 나서 맘적으로 좀더 친해진 느낌이 든다. 하하하. 뭐 혼자만의 착각이긴 하지만 이게 또 독서의 매력이니까 ^^
 
한겨레에서 매년 봄마다 준비하는 강의는 늘 알차고, 부럽다. 시간에 맞춰 참여하기 힘든 직장인 입장에서는 더 그렇다. 작년에는 김갑수 씨가 사회를 봤었는데, 올 해는 영화배우 오지혜 씨다. 개인적으로는 부드럽게 강의를 진행해 나가는 오지혜씨 스타일이 더 좋았다.
 
강의의 포문은 정혜신 씨가 열었다. '젊은 날의 깨달음'이라는 책을 통해 정혜신씨를 처음 알게 됐는데, 정신과 의사가 되기 전, 내적치유를 거치는 과정이 인상적이어서 이후 저서인 삼색 공감 등도 읽고 칼럼 등도 관심 있게 읽어 왔던 저자이다. 

정혜신씨는 사람에 대한 거짓말, 그 중에서도 특히 자기 자신에 대한 내사와 투사에 대해 이야기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내사'형 인간인지라 또 스스로를 어느 정도는 비춰볼 수 있었던 계기가 됐던 것 같다. 주위의 투사형 인간에게 권해주고 싶다. 하하. 사회자 오지혜씨의 지적대로 부부간의 문제를 인문학의 위기로까지 연결지어 해석한 부분은 나도 굉장히 탁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동광씨는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저자인데, 과학적 상식이 워낙 없는지라 이 챕터는 처음에 읽으며 적응하는 데 조금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하지만 일정량 이상을 읽으니 어느 정도 몰입해 읽을 수 있었다. 특히 올 초 진행된 강좌라 황우석씨 관련 얘기가 여러 사람의 강의 곳곳에 드러났는데, 그 문제에 대한 진행 관점은 역시 과학 사회학자, 라는 다소 특이한(하지만 앞으로는 점차 많아져야 할) 직함 때문인지, 가장 탁월했던 것 같다. 과학을 과학 그 자체가 아닌, 거대한 산업 구조 속에서 이해했으며, 이는 결코 맹신의 대상이 아님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는 부분이었다.
 
한홍구, 박노자 선생님- 두 분은 워낙 유명하시고, 한겨레 21 칼럼을 통해 이 분들의 칼럼을 즐겨 읽어 왔기에... 함께 하신다는 강의가 기대됐다. ^^ 한국사의 거짓말에 대한 논쟁. 그 중에서도 특히 전쟁이라는 커다란 사회악이 우리 역사에, 또 우리 인식 속에 어떤 거짓말을 해왔는가를 알 수 있었던 부분이다. 나 역시 많이 생각이 열렸다, 라고 생각하면서도 국가 중심적인 폭력적인 생각에 아직도 어느 정도 젖어 있음을 느끼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김두식 교수님은 경북대로 가기 전, 내가 다녔던 모교의 선생님이었다. 법학과에 계셨던 관계로 전공이 다른 나는 그분의 강의를 들을 기회가 많지 않았지만, 가끔 열리는 특강 및 학교 신문에 쓰는 칼럼, 한겨레 신문에 쓰는 칼럼, 저서 등을 통해, 또 주위 사람으로부터 듣는 이야기 들을 통해 어떤 분인지, 충분히 알고, 또 평소에 존경해왔던 분이다. 거짓말 권하는 사회, 라는 제목의 이 강의는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우리 사회의 구조에 대한 이야기이다. 구조적 억압으로 인해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하게 되는 거짓말을 합리화시켜서도 안되며, 끊임없는 자기 성찰 및 인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 역시 크리스천인데, 여러 가지 민감한 기독교 사안들에 대한 열린 시각을 제시해, 속이 시원한 부분들도 많이 있었다. 

김형덕씨 역시 처음 알게 된 분인데, 북한에서 남한으로 내려온 소위 '탈북자' 출신의 운동가이다. 새로운 부분이 참 많았지만, 특히 통일론에 대한 부분에서,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관점들- 통일을 하면 국력이 나아지겠지, 하는 기대들에 대한 일침을 놓았다. 통일은 국력을 위한 것이 아니라, 평화를 위한 것이며, 국력을 위한 통일은 또 하나의 전쟁을 향한 폭력이라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정희진씨는 한겨레에서 칼럼을 읽은 후 시원시원한 문체에 반해 곧바로 그의 저서인 페미니즘의 도전을 사서 읽게 만들었던 사람. 역시 거침 없는 말하기가 돋보인다. 페미니즘의 도전 책과 많이 다르지 않은 내용이면서도 그 내용이 함축적으로 들어있다고 보면 된다. 기존 가치에 정면으로 대치하는 것을 얘기하면서도 거부감 없이 이해하기 쉽게 강의를 이끌어나가는 것 역시 그녀의 탁월한 능력이라 할 수 있겠다. 성별 문제에서는 타자인 나는 또 내가 주류로 있는 다른 어떤 문제에서 '몰랐다'는 이유로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사람일 수 있음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프라풀 버드와이씨의 강의. 사실 공감하는 부분이 그렇게 많지 못했던 건 '인도에 대해 잘못 알려진 것'에 대해 얘기하는데, 내가 기존에 인도에 대해 어떻게 알려졌었는지에 대한 기본적 관심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 역시 정희진씨의 말대로 하면 하나의 폭력이겠지. 하지만 인권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통한 세계 평화에 대한 그의 논지를 읽을 수 있었다. 

이들 강사들이 하나같이 결론으로 내건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과 이해이다. 이러한 거짓말을 하지 않기 위해, 또한 거짓말로부터 속지 않기 위해, 자기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알 수 있는 능력이 가장 기본이 된다는 것이다. 

현장에서 듣는 것 같은 생생한 느낌, 특히 내가 재밌다고 생각한 부분에 여지 없이 들어 있는 (청중 웃음)은 나로 하여금 독자가 아닌, 청중으로서 책을 읽을 수 있게 만들어줬고, 강의를 듣지 못해 늘 한쪽에 아쉬움을 가지고 사는 직장인에게는 이 책이 참 고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람아 아, 사람아!
다이허우잉 지음, 신영복 옮김 / 다섯수레 / 201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뭐랄까, 이 책은 진흙 속에서 찾은 진주 같았다고나 할까? 중앙공원에서 벼룩시장을 하는데 꼬마 아이가, 책을 여러 권 팔고 있었다. 오래된 책 한 권이 눈에 띄어 보니 제목도 작가도 내겐 생소했다. (이렇게 유명한 책인줄 몰랐던 거다 -_-) 다만 역자인 신영복 선생님을 믿고, 또 함께 있던 지현선생님의 추천을 믿고 산 책, 아니다, 사려고 했다가 선물 받은 책이다

책값은 단돈 500원

책꽂이에 꽂아놓고 시간이 없어 계속 읽지 못하다가 그로부터 몇 개월이 지나 이 책을 들었다. 책을 펴는 순간부터 빨려 들어가는 스토리 전개- 정말 잘쓴 소설이었던 거다 . 의외의 수확에 정말 감동하며 모처럼 즐거운 독서를~ 

표지에는 작가인 다이호우잉을 '중국 현대 휴머니즘 문학의 기수'라고 표현했다. '휴머니즘 문학'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또 '사람아 아 사람아!'라는 제목에 부응하게 이 책은 철저하게 사람에 대한 책이다. 표면적인 주인공은 호 젠후, 그리고 손 유에. 이들은 문화혁명시기로 대표되는 중국의 한 시기를 살아오면서 사상을 믿고, 이념을 믿었던, 하지만 그러기에 서로에 대한 사랑은 표현하지 못할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

호 젠후와 손 유에의 사랑 이야기는 이 소설을 이루는 매우 중요한 축이지만 사실 이 책은 이 두 사람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각각 이 시기를 다른 방법으로 살아온 11명의 사람들이 모두 1인칭 시점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완벽한 이상에 젖었던 사람, 그 이상을 현실과 타협하며 살아가는 사람, 그 이상을 이용하며 살아가는 사람, 그리고 그 세대가 겪었던 것들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며 새로운 각오로 살아가는 패기넘치는 젊은이, 그런 것과 전혀 상관 없었지만  그로 인해 삶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던 소시민까지- 이 사람들은 이 시기의 중국을 살아온 사람들의 전형이다

내가 산 중고책의 원주인이었던 사람도 중문과라고 쓰여져 있는데, 아마 수업의 교재로 이 책을 활용했던 것 같다. 그 시대, 그리고 그 때 그 사람들을 간접적으로 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손 유에라는 인물이 참 매력적이었다. 그녀와 함께한 결혼 생활을 그녀의 전 남편인 자오 젠 호안이 되새기는 모습을 보며

옛날처럼 그녀와 나란히 강가나 거리를 거닐며, 이상을 논하고, 문학과 예술을 이야기하며, 신문에 실린 뉴스에 관하여 의견을 나누고 사랑과 증오를 이야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으아- 이거 완전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결혼인데' 이렇게 책 옆에 적어놨다는 ㅋ

 
그녀의 유고 시집인 연인아 연인아, 그리고 그녀와 남편의 이야기를 적은, 그러나 지금은 절판되어 버린 시인의 죽음까지 힘들게 찾아서 구매했을 정도로 특별한 느낌으로 다가왔던 책, 추천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속도시
하비 콕스 지음, 구덕관 옮김 / 대한기독교서회 / 199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연극을 전공하는 친구가 있다. 고등학교 동창인 이 친구가 연극과로 진로를 선택한 후 나는 이 친구의 공연을 매번 꼭 보러 가리라 다짐했었다. 그러나 포항이라는 지리적 제약은 나의 결심을 쉽지 않게 만들었고, 결국 시간이 지나고 3학년이 되어서야 이 친구의 첫번째 공연을 볼 수 있었다.

그 때 관람했던 작품이 바로 미국의 극작가 ‘아서 밀러’ 의 ‘시련’(The Crucible)이었다. 원작은 1950년 미국 공화당 매카시 상원위원이 반대파를 공산주의로 몰아 이념 공세를 펼쳤던 매카시즘(McCarthyism) 열풍에 대한 비판을 목적으로 쓰여진 작품이었다. 중세 미국의 메사추세츠 주 세일럼이라는 마을에서 비밀리에 악령을 부르는 의식을 준비하다가 목사에게 발각된 소녀들은 악령이 나타났다고 거짓 증언을 하게 되고 이 때부터 목사와 지주를 중심으로 마을 사람들에 대한 심문이 시작된다. 이른 바 ‘마녀 사냥’ 이 시작된 것이다. 선량한 주민들은 소녀들이 지어낸 주장으로 인해 가진 자들의 폭력에 땅과 아내를 빼앗기게 되며 신과 악마라는 이분법적인 구분으로 약자들은 ‘악마의 추종자’ 로 낙인찍히게 되고, 결국 소녀들에 의해 거명된 사람들은 차례로 법정에 끌려나와 교수형을 선고 받는다. 작품의 중심은 결국 강요되는 침묵의 시대에 진실과 존업성을 위해 싸우는 평범한 사람인 주인공 프락터에 맞춰져 있었으며 억압적인 이데올로기들이 얼마나 평범한 사람을 비검하게 만들고 개인의 삶을 얼마나 철저하게 파괴시키는 지에 대해 현대인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큰 작품이었다.

작품이 주는 핵심적인 메시지도 인상적이었지만 그보다는 다른 생각이 그 후로 한참동안이나 내 머리 속을 지배했었다. 당시 연극을 통해 느껴지던 ‘중세’ 라는 배경이 너무나 답답하게 느껴져서 가슴을 턱! 턱! 치면서 혼자 눈물을 흘리며 봤던 기억. 진리가 진리라 통하지 않는 세상이 지구상에 너무나 오래 존재해왔구나, 라는 안타까움. 저들이 믿는 하나님도 내가 믿는 하나님과 다른 분이 아닐진대 명백한 불의를 진리요 하나님의 뜻이라 여기며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내 가슴을 정말 먹먹하게 만들었다. 하나님을 위해 행한다는 청교도 정신에 의한 강력한 신권정치와 성서에 기준한다고 믿고 있던 그들의 가치관, 세상에 물드는 것을 죄악으로 생각하며 지나치게 정적으로 경건하고 도덕적인 삶을 최고의 삶이라 생각해 왔던 그들. 하나님의 대적하는(것으로 느껴질만한) 것들은 모두 악의 세력으로 규정하며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존재로 보아온 그들의 모습. 그러나 수년이 흐른 지금 내가 보기에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는 바도 아니었으며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기준으로도 명백하게 그른 일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 또한 500년 후의 사람의 눈으로 봤을 때 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우며 명백하게 옳지 않은 가치관들을 갖고 사는 건 아닌지, 내가 판단하고, 지금 내가 속한 한국 교회의 눈으로 바라보는 이 세상은 과연 옳은 것인지, 어쩌면 내가 중세의 사람들을 바라보는 그 답답한 눈길로 미래의 후손들이 나를 바라보는 건 아닐지, 그들처럼 나 또한 어리석다 여겨지는 과거의 사람이 되어 있지는 않을런지에 대한 고민을 하니 가슴이 더욱 답답해졌다. 하나님의 생각에 가장 가까운 생각을 하고, 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싶은데 내 자신이 아예 틀린 틀 속에 들어있으면 어떻게 하지, 라는 고민. 그 때부터 ‘진리’ 에 대한 갈급함이 생겼고, 삶에 있어서 이루어 나갈 목표는 내가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고 행동하여도 도에 어긋남이 없는 ‘종심소욕불유구(從所心欲不踰矩)’ 의 경지라 설정하게 되었다. (공자님도 70세가 되어서야 이르신 경지를 과연 내가 이를 수 있을 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마음에 가장 가까운 생각을 하고 싶다고 결심하고, 부디 어리석은 조상(?)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여러가지 노력을 기울이며 살아가고 있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그 때 시작해서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는 나의 고민들이 떠올랐다. 연극을 보며 답답해 가슴을 턱! 턱! 치던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무릎을 탁! 탁! 쳤다. 현재 교계에서 소위 ‘세속적’ 인 것이고 하나님의 뜻에 위배된다며 무조건 금하고 옳지 않은 것이라 했던 것들, 하지만 그 과정에 하나님의 뜻 안에 있고 우리는 그것이 올바르게 갈 수 있도록 대안을 제시하는 비판적 창조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저자의 명쾌한 논리는 막막했던 나의 고민에 신선한 청량제와도 같았다. 물론 저자가 살고 있는 세상보다는 진일보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세속화의 물결에 들어가서 옳고 그름을 판단해 세상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게 한다기 보다는 그것들을 두려워하고 무조건 옳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여 정죄하며 피하고 있다는 부정할 수 없는 현재 교회의 모습은 중세의 그것과 강도에 있어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기본적으로는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정작 그리스도께서는 속된 세상에 세상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믿는다고 고백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저자가 인용한 문구 중에 교회는 “전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를 잠정적으로 보여주는 곳” 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 말을 듣고 나니 정말 하나님께 부끄러워서, 당신의 의도를 구하기도 전에 먼저 판단하고, 지금까지 있어왔던 기준으로 이것은 옳지 않다고 함부로 말해 버리는 한국 교회가, 그리고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서 정말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서 숨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책이 쓰여진 것이 1965년이다 보니 사실 이 책에서 세속화된 미래 사회에 대해 예견한 모습들을 보며 40년이 흐른 지금의 현실과 맞춰 가면서 읽는 재미가 있었다. 이 과정에서 느낀 것은 저자의 통찰력이 매우 뛰어났다는 사실이다. 물론 일부는 동의할 수 없는 부분도 있었다. 익명성을 단순히 ‘자유’ 로 규정한 저자의 생각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물론 익명성으로 인해 지연, 혈연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로워지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현대에 와서의 지나친 익명성은 인간 소외 현상으로 드러나는 등 오히려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으며 이는 단순히 자유와 해방의 개념만으로 바람직하다고 볼 수는 없는 문제인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약간은 지엽적인 부분을 제외한 전반적인 작가의 논지에는 동의를 보낸다. 혹자는 하비 콕스의 이런 논리가 너무 급진적이고 너무 앞서 나간 것이 아닌가 하는 사람도 있고 그가 의도한 것보다 더 급진적으로 그의 논리를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난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의 생각과 논지는 너무나 타성에 젖어 있기에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했던 교계에 경종을 울렸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군데군데에는 아직도 잘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있지만, 그래도 많이 이해하고, 또 많이 공감하고, 많이 배울 수 있었다.

특히 공감할 수 있었던 부분은 내가 처한 상황 때문인 지 직업과 대학교에 관한 부분이었다. 직업에 대한 부분을 먼저 살펴보면 저자는 세속화가 진행됨에 따라 일하는 장소와 거처하는 장소를 갈라놓았으며 우리가 일하는 곳에 관료주의적 색채를 띠게 했으며 우리의 일이 종교적인 성격을 가질 수 없게 됐다고 말한다. 이 중 세 번째 사실은 약간 충격적이었다. 한동대 와서 수없이 들은 말과 수없이 해왔던 말이 바로 “당신의 비전은 무엇입니까?” 라고 묻는 말이었다. 비전이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그 비전을 어떻게 주셨는지를 상세히 간증하고, 비전이 없는 사람들은 “꼭 제 비전을 찾을 수 있도록 기도해 주세요” 라는 말을 하곤 했다. 나 또한 분명 하고 싶은 일이 있고, 내가 두려웠던 건 그 일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을 듣지 못했다는 사실. 다들 뭔가 뚜렷한 확신 속에 있는데, 난 단지 흥미와 약간의 적성을 고려한 단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원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내가 저들보다 덜 경건하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심리적 부담감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내가 비전을 위해 열심히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주시는 일이 내가 원하는 일이 정말 아니면 어떡하지? 라는 고민까지 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일터로 불러내시는 분이 아닌, 일을 통한 감사와 환희에로 불러주는 분이라는 사실과 우리는 세속화를 통해 일 속에 있는 노이로제적 강제성과 종교적 신비감을 배제하여 사람이 자유롭게 일을 해 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점은 그런 생각으로부터 나를 구해주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나에게 부여된 재능과 흥미로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면 된다는 생각에 마음도 한결 가벼워지고 말이다.

기독교 대학의 부분을 읽으면서 역시 참 많은 고민을 했다. "교회는 대체로 대학교가 기독교적이거나 교회적인 것이 못되기 대문에 비판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대학교는 대학교 답지 못할 때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라는 저자의 말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내가 졸업한 학교를 바라보는 교계의 시선을 볼 때 교계는 우리 학교가 대학의 역할을 감당하길 원한다기 보다 교회의 역할을 감당하기 원하며, 우리 학교의 학생들도 학교에 닥친 여러 문제들에 직면할 때 참 대학생답지 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기에, 내가 선택한 학교를 절대 합리화 시켜주지 못하는, 하지만 예전부터 계속 들어왔던 이러한 생각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우리 학교도 많은 교회들이 시도하려 했던 대학교의 모습들 중 하나의 모델일 뿐이었던 것이다. 결국 우리 학교는 그저 또 하나의 기독교 대학의 실패한 모델이 될 것인지, 아니면 저자가 회의적으로 바라봤던 진정한 의미의 기독교 대학이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대한 대안으로 존재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할 것이며 그것은 전적으로 구성원들의 역량에 달린 몫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부디 구성원들의 역량으로 그 역할을 감당해 낼 수 있길 바랄 뿐이다. 이기적인 생각일 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내가 선택한 학교니까. 합리화의 기제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결국 이 책을 읽으며 내가 느낀 것들은 내가 너무 경건하지 못한 건 아닌가, 나의 생각이 잘못된 것일까, 라는 ‘하나님의 뜻’ 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억압했던 심리적 기제들에 대한 돌출구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기독교인으로서 경건해야 하고, 그것만이 옳은 것이라는 심리적 부담감이 많이 해소되었고, 오히려 세상의 일을 판단할 때 기존의 타성에 젖은, 교회에서 판단한 하나님의 기준이라 스스로 부여하는 가치가 아닌, 정말 하나님의 정말로 원하시는 바를 조금씩 알아가야만 할 것 같다는 즐거운 부담감이 생긴다. 물론 내가 이 세상을 떠나는 날 하나님의 뜻을 모두 알고 통달한(?) 경지에서 하나님 곁으로 달려갈 수 있다면 그보다 더 감사하고 행복한 일은 없겠지만 꼭 그렇지 않아도 상관 없다. 지금의 내 모습 또한 저자가 말했던 것처럼 결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무엇인가를 향한 과정으로 존재하기에! 이제 예전에 해 오던 “세상적인 것들을 모두 버리고 오직 하나님 바라보며 나아가도록 해주세요” 라는 기도는 더 이상 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 가운데서 오직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 나갈 수 있는 자녀가 되게 해 주세요” 라고 기도해야겠다. 아멘!


댓글(3)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람결 2007-08-05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것도 추천해야겠군요;;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웽스북스 2007-08-05 21:13   좋아요 0 | URL
앗, 감사드려요 ^^

yamoo 2009-01-30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 하비콕스의 세속도시를 아직도 못읽었네요...아직도!! 멋진 리뷰 잘봤습니다~~ㅅㅅ
 
성경과 여성 여성신학 시리즈 2
앨버라 미켈슨 지음 / 기독교문서선교회(CLC) / 199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기독교 공동체에 속한 경험이 많았던 나는 그 안에서의 남녀 관계에 있어 남학생들이 자신의 권위를 주장할 때보다 여성들이 이러한 성경의 해석에 절대적 권위를 부여하며 자신의 삶에 있어서 주체적이지 못하고, 남성들에게 리드당하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모습을 볼 때 더 가슴이 답답했다. 그래. 답답했다. 그건 내가 그 말에 대해 충분히 반박할 논거를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결국 무지했던 나는 이렇게 답하는 수 밖에 없었다. ‘잘 모르겠지만 내가 아는 하나님은 절대 그런 의도로 말씀하셨을 리가 없어.’ 하지만 이미 문자화된 성경의 권위 앞에서 나는 너무나 무력했다.

내게 이 책이 좋았던 건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면서 그 안에서 성경 해석에 대한 다른 방향을 제시해 주었던 것이다. 페미니즘이 극단으로 빠져들게 되면 결국엔 성경의 권위를 부정하게 되는 일이 많이 발생하는데, 그건 나 또한 원한 바가 아니었기에, 속으로 가슴만 답답해 하고 있었다. 이 책은 물론 100%의 정확한 해답을 제시하지는 못하지만 어느 정도 우리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성경을 객관적으로 해석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것들을 또한 객관적인 방법으로 전달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이었다. ‘케팔레’ 라는 단어 하나만 놓고도 그 지역과 시대의 상황과 언어적 특징 등을 모두 고려해서 그 정확한 뜻을 파악하는 과정에 있어서 참 조심스러웠던 건 그 정의에 대한 신뢰감을 더해줄 수 있었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우리가 한 권의 소설을 읽는다 해도 그 시대와 상황을 고려해서 읽어야 하는 거였는데, 지금부터 수천년전에 쓰여진 성경을 읽으면서 성경을 문자 그대로만 보려 했고, 그 시대와 상황을 전혀 보려 하지 않았다니 말이다. 시대와 상황이 다르다고 진리가 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진리를 어떻게 표현하는 지에 대해서는 그 시대와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인 것인데, 우리는 너무 눈에 보이는대로, 그것도 수없이 많은 번역 과정을 거친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려 했던 것은 아닌지, 하는 안타까움이 일어났다.

우리는 황석영의 ‘손님’ 이라는 책을 읽으며, 또 여러 상황들을 직/간접적으로 겪으며 성경의 권위라는 것이 자신의 이기심을 위해 사용될 때 얼마나 무서운 폭력적인 결과를 낳는지에 대해 이미 뼈저리게 느껴왔다. 생각해 보면 예수님이 오신 이래로 그러니까, 성경이 쓰여진 이래로 여성은 번도 기득권의 입장에 서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성경을 해석하는 작업에 참여하는 기회가 거의 없었을 것이고, 성경에 남성의 기득권을 보장하는 내용에 대한 해석은 당연히 남성 위주로 이루어졌을 것이기 때문에 여성들이 성경에 쓰여진 문자적 사실들로 인해 이러한 억압을 받아오게 된 결과는 당연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참 안타깝지만 말이다. 이건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없는 일인 것 같다. 아니, 지난 책임을 묻는다기 보다는 나름대로 여권이 많이 신장되었다고 하는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여성들이 동참해서 바꿔야 하는 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책에서 있었던 포럼에서도 여성 신학자들의 참여가 두드러졌던 것처럼 말이다.

이 책에서 인용된 여성이 당하는 불합리함이 타락에서 비롯한 것이라면, 이제 예수님의 구속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런 것들은 사라져야 한다고 하는 견해는 정말 탁월했다. 물론 그럼에도 풀리지 않은 문제는 있지만,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앞으로의 숙제로 남겨놔도 무방할 것 같다. 케팔레에 대한 정의도 꽤 많은 연구 작업을 통해 상당히 진전된 부분을 보면서 앞으로 성경의 많은 부분들이 이렇게 재해석되고 또 연구 된다면, 적어도 성경으로 인해 그 성경의 권위를 신뢰할 수 밖에 없는 우리들이 억압받는 상황은 오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바울이 여성들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지 않았던 건 그 당시에는 여성의 권리가 보장되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말 역시 내게는 시원하게 다가왔다. 그러한 시대적 상황은 이해하려 들지도 않은 채 성경에 적혀져 있는 것만 보고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해 온 남학생들에게 이제는 시원스레 말을 해줄 수 있게 된 것 같아 개인적 차원에서는 정말 그게 기쁘고 감사했다. ^^

이 책을 읽고 서평을 쓰면서는 정말 괴로웠던 순간과 정말 시원했던 순간이 함께 존재했는데, 정말 인정하기 싫은 말이 그 신학자의 중심견해였기 때문에 그 말을 타이핑해야 했을 때는 정말 괴로웠다. 게다가 써머리의 과정에서 주어를 ‘나는’ 이라고 사용했기 때문에 그렇게 치면 이게 정말 내 의견이 되어 버릴 것 같아서 도저히 기쁜 마음으로 타이핑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그런 의견에 대한 멋진 반박을 해 주는 비평문이 있을 땐 너무 시원한 맘에 자고 있는 방순이들에게 미안할 정도로 타타타탁! 타이핑을 하는 내 모습을 바라보면서, 아, 내가 이 책에 정말 감정이입을 많이 하고 있구나, 하는 사실을 자각했다. 그렇다. 이 책이 좋았던 한 부분은 논문의 발표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비평을 함께 실었다는 점이었다. 문자화된다는 것 역시 권력의 한 일환이라고 할 수 있고, 그게 독자들에게 읽혀질 때는 비평적 읽기가 불가능한 독자라면 그 말이 절대화 되서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상황인데, 이 책은 특히 지식이 전달되는 차원이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이 훨씬 많아 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견이 제시된다면, 이러한 의견 역시 제시될 수 있다는 것 역시 함께 실어 논문에 쓰여진 내용들을 절대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비평적 시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던 것 같다. 또한 읽으면서도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왠지 맘으로 수긍되지 않았던 부분에 대해 내 맘을 나보다 더 잘 아는 듯이 해 놓은 탁월한 비평들은 나로 하여금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절대적일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이 책은 그 사실을 인정한 것 같아서 참 마음에 들었다.

이 책이 내 책꽂이에 꽂혀져 있는 것을 보고 많은 학생들이 와서 얘기했다. “이 책이 성경의 이해 서평 책이라구요? 잘됐어요! 남학생들도 이런 책을 좀 읽어야 된다니까요!” 라고 말이다. 나 역시 그 말에 기쁘게 동의한다. 그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이해하고 싶은 대로 이해했던 남학생들에게 이 책을 읽어 본다는 작업은 분명 의미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또 한가지 의문이 드는 것은 성경도 그렇게 자신이 해석하고 싶은 대로 해석하고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데 사용했던 남성들 중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고 또 반성(?)할 수 있는 사람은 또 과연 얼마나 될 것인지. 그래서 꼭 다짐했다. 선생님께 이렇게 말씀드리기로!

“이 책을 제대로 읽고 올바로 이해해서 서평을 쓴 남학생이 있다면, 소개시켜주세요 ^^”

댓글(1)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7-08-03 1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31 | 3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