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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전
김규항 지음 / 돌베개 / 2009년 4월
평점 :
얼마 전 다녀온 전주 국제영화제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영화는 국내에 <카모메식당>, <안경>이라는 영화로 잘 알려진 오기가미나오코 감독의 <요시노 이발관>이었다. 영화는 일본의 한 마을을 배경으로 만들어졌는데, 이상하게도 그 마을의 남자 아이들은 모두가 바가지 머리를 하고 있었다. 이것은 마을에 전해져 내려오는 오랜 전통으로, 그 마을에 사는 남자 아이들이라면 모두 예외 없이 그 전통을 따라야만 했다. 아이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바가지 머리' 외에 다른 머리는 선택할 수 없었기에, 누구도 자신들이 왜 바가지 머리를 하고 있어야 하는지 의문을 품지 않았다. 그 마을에서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마을에 멋진 염색머리를 한 전학생이 오면서 시작된다. 그는 자신에게 강요되는 바가지 머리를 거부하고, 최선을 다해 저항한다. 바가지 머리는 인권에 대한 침해라며. 그제야 아이들은 의문을 갖기 시작한다. 우리는 왜 꼭 바가지 머리를 하고 있었어야만 했던 것이지?
김규항의 <예수전>은 바가지 머리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 한 번도 제 스스로 의문을 가지거나 되돌아본 적이 없는, 성찰을 잊은 신앙을 가진 이들에게 제발 한 번 쯤은 '왜?'라고 묻길 바란다며 다그치는, 그리고 제 스스로 몸소 저항하는 그 평화로운 마을의 전학생 같은 책이다. 오늘날의 교회는, 오늘날의 성도들은 자기들이 믿기에 편한 예수의 모습을 정하고, 그에 걸맞게 예수의 삶을 재규정해 나간다. 믿기 편하게, 적절히 자신들의 부를 향한 욕망을 합리화시켜주는, 제 입맛대로의 예수를 믿으면서도 그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되묻는 불편한 작업은 굳이 하지 않는다. 저자는 이러한 마몬의 신앙은 사람을 직접적으로 해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조금씩 물질적인 욕망을 심어 주기에, 그리하여 행복의 기준을 돈과 물질로 천천히 바꾸어 버리기에 스스로를 해치는 위험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는 '부'라는 것은 정당한 방법으로 쌓은 것인가의 여부를 떠나 '가난한 이들이 존재하는 한' 부끄러운 것이라 이야기한다.
그는 예수가 정치적 혁명가가 아니었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예수가 지배 체제에게 사형 당한 이라는 사실을 절대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또한 예수와 관련한 모든 해석들은 이 점을 설명해낼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수는 당시 폭동과 살인을 가한 정치적 테러범이었던 바라빠보다 더 위협적으로 간주되던 인물이었으며, 그것은 곧 예수가 혁명적 인물이었음을 반증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교회는 ‘죽음으로 내 죄를 대속한 그리스도’ 즉 신학과 교리 속에 갇힌 예수만을 선택하고, 그와 다른 견해를 배척하는 것을 마치 타협 없이 예수를 섬기는 순수한 신앙의 결정체인 양 자위하고 있다. 저자는 그런 이들에게 한낱 자신이 존경하는 사람의 생각을 전할 때도 그의 본디 생각에 미치지 못할까 걱정하면서 어찌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부분에 있어서 자신이 미처 헤아리지 못한 것이 있음을 겸손하게 인정하지 못하느냐고 물으며, 앙상한 교리와 신학을 내세워 자신이 하느님의 뜻을 위임 받은 양 구는 태도는 하느님을 섬기는 태도가 아니라고 강하게 말한다. 예수는 가난하고 못난 사람들, 죄인, 여성, 아이들이 사람 취급 받는 세상을 관념 속이 아닌,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안에 만들고자 하는 이였으며, 자선과, 적선이 아닌 ‘나눔의 체제’로 변화함으로써 이러한 사회를 가능케 하기 위해 몸소 보여준 분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의 예수가 어떤 이들에게는 퍽 새롭고 신선할 지는 모르나, 아마도 이 책을 읽을 이들의 상당수에게는 ‘전혀 새로운 것’만은 아닐 것이다. 이 책에서 다뤄진 예수에 대한 견해는 이미 여러 진보적 신학 혹은 신학자들을 통해 이야기되어 왔으며, 특별히 교회의 장로가 대통령이 되어 마몬 신앙의 대표 선수를 자원하며 보여주고 있는 여러 모습에 대한 반증으로 최근 들어 더욱 대두되고 있는 하느님 나라 운동과도 맥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은 여기에 머무르지만은 않는다.
예전에 친구와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대부분의 좋은 책들은 정작 그 책을 읽어야 할 사람들은 읽지 않고, 이제는 읽지 않아도 될 사람들이 계속 읽게 되는 것 같다고. 사실 이 책의 첫번째 타겟 독자일, 여전히 바가지 머리를 하고 있으면서 자신이 바가지 머리를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 이들의 상당수는 아마도 이 책을 읽지 않을 것이다. 김규항을 알고, 좋아하며, 이 책을 읽을 이들의 상당 수는 어떤 방법으로든,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신앙이 바가지 머리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을 기회가 있었던 이일 확률이 높다. 저자 역시, 경험이나 직관을 통해 이 책을 실질적으로 읽게 될 자가 누구인지를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여 이 책의 많은 부분은 사실 그들 중 일부를 향해 쓰여졌고, 더욱 힘주어 쓰여졌다. 예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그리 하셨듯,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회적 비판이 반드시 그 시대의 가장 악한 세력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는 자신의 말을 스스로 증명해내듯.
저자는 그들 중 상당수가 서 있을 묘한 지점을 간파해낸다. 변화를 이야기하지만, 변혁이 아닌, 변형 정도에 그치는 변화를 말하는 것, 끊임 없이 현실과 타협하는 대안을 만들어내는 것은 대단한 변화를 일으키는 듯하지만 실은 현실의 모순을 순화하고, 정당한 분노를 누그러뜨려 진짜 변화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벽이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알고 있지만 자본주의가 절대 극복될 것이라 믿지 않으며, 자본주의의 극복을 바란다기 보다는, 자신이 자본주의의 비인간성을 반대한다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고 확인하는 일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는 종류의 사람이다. 저자는 되지도 않는 논리로 제 탐욕과 이기심을 드러내며 자본주의를 찬미하여 인민들로부터 반감을 사는 사람들보다, 이러한 이들, 즉 입만 벌리면 자본주의의 비인간성을 지적하고 비판해 많은 인민들에게 양식을 가진 사람들로 여겨지고 있는 사람들이 자본주의 체제를 오히려 공고히 지키고 있다며 그들을 향한 일침을 가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말하는 소위 ‘진보’ 혹은 ‘사회적 변화’라는 것 역시 실은 진정한 변화를 위한 움직임이라기보다는 스스로 ‘나의 삶을 더욱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한 그 무엇’이 아니었는가, 철저하고 처절하게 돌아볼 일이다. 이제는 거의 전국민적 ‘교양’ 덕목의 수준으로 자리잡은 ‘쿨함’을 지향하느라 진짜 변혁을 위해 한걸음씩 내딛는 누군가의 뜨거운 시도를 촌스럽게 여기며 조소를 보내지는 않았는지. 멀리 갈 것도 없다. 사실 이것은 바로 나 자신의 문제로 귀결된다. 하나님을 위해 살겠다고 이야기하면서, 또 다른 방식으로 나 자신의 욕망을 채워나가지는 않았는지. 작은 행동, 작은 변화를 통해 실은 잘 살지 못하고 있는 스스로를 위로하는 데만 급급하지는 않았는지, 겨우 바가지 머리에서 벗어나 또 다른 형태의 바가지 머리를 하고 있는 자신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이 책은 끊임 없이 나를 다그치고,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 이젠 삶으로 그 물음들에 성실히 응답하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