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를 안다. 나는 매우 이기적인 인간이다. 대의에 의해 움직이기보다는 철저히 나 자신에 의해 움직인다. 그런 사람이라는 사실을 어릴 적에는 몰랐고, 대의에 의해 움직이고 싶어 했고, 그게 온당하다고 믿었다. 그렇지만 나이가 들면 들수록, 나는 나 중심적인 인간이 되어 간다. 내가 즐겁고, 내가 좋아하고,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면서 사는 것이 옳다 믿는다. 다만, 즐거움을 느끼는 것,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 을 좀 더 바르게 가꿔나가기 위해 나 자신을 끊임없이 추스르고 타인으로부터 끊임 없이 배워야 한다는 사실 정도는 잊지 않는다.
채식은 사실, 2005년쯤에 한 번 시도한 적이 있다. 그 때는 대의에 의해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환경과 축산업, 동물의 권리, 뭐 이런 것들에 대해 고민했고, 그런 책들을 읽으며 채식을 '결심'했다. 말 그대로 '결심' 이었다. 두달쯤 했고, 도저히 할 수 없어 포기했었다. 동력이 나 자신이 아니라 대의였기 때문에 포기해버린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의지가 약한 사람이다.
그러다가 다시 채식을 시작한 건, 집을 나오고, 도시락을 싸기 시작하면서, 편리하게 한 끼를 먹기 위해 햄이나 돈가스, 소세지 같은 것들을 집에 쟁여놓고 먹는 나 자신을 어느 순간 발견했기 때문이다. 아, 내가 지금 뭘 먹고 있는 거지? 근본없는 남의 살들이 내 몸속에 너무 많이 들어온다고 생각했을 때, 갑작스레 경각심이 들었다. 적절히 줄일까, 생각했으나 도무지 절제할 자신이 없어 그냥 끊어버리기로 했다. 나는 적정선을 찾는 건 엄청 못하는데, 끊는 건 비교적 잘하는 편이다.
채식을 결심하고 읽은 책은 이 책이었다. 나는 조너선 사프란 포어를 믿었다. 그의 표현력.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에서 만났던, 타인의 감정을 움직일 줄 아는 그 능력. 그 능력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지만, 나는 그 능력이 필요했고, 그라면, 마지막 남은 나의 고기를 향한 열망을 싹 잠재워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누군가, 이 책을 읽고 채식을 결심했느냐고 물었으나, 그건 스물 다섯의 내가 했을 법한 일이다. 나는 서른 두살이고, 책 한권에 흔들흔들하는 일은 여간해서는 없다. 채식을 결심하지 않았다면 이 책을 읽지 않았을 거다. 편하게 먹고 싶었을테니까. 이 책을 집어든 나의 목적은 딱 한가지였다. 나의 비위를 상하게 하는 것. 그리고, 결과는 성공이었다. 너무 고기를 안먹으면 힘들테니 닭, 정도는 먹을까 생각했으나 이 책을 읽고 나니 오히려 닭을 먹는 게 제일 내키지가 않는다. (그래도 의지박약 인간이라 달걀은 먹는다.) 이 책을 다 읽고, 고기를 먹고 싶은 마음이 거짓말같이 사라졌고, 집에 남아있던 육류란 육류는 다 버렸다. 회사에서 준 목우촌 햄만 좀 아까워서, 교회에 가져가 반찬으로 기증했다. 그렇게 시작한 지 어느덧 한 달이 지났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비건' 정도의 채식은 해야 될 것 같지만, 나는 절대 그럴 분이 아니다. (응?) 일단 비건의 메뉴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 아. 일단 혹, 설명이 필요할지도 모르는 분들을 위해 기억나는대로 대충 설명하자면, 채식의 단계는 아래와 같다.
세미 베지테리언 / 빨간 육고기만 안먹는다. 닭은 먹음
페스코 / 육고기와 닭은 안먹는다. 생선은 먹음
락토오보 / 생선까지 안먹는다. 우유와 유제품, 달걀 먹음
락토 / 달걀까지 안먹는다. 우유와 유제품은 먹음
비건 / 우유와 유제품까지 안먹는다
아래로 내려올수록 대략 독한 인간이라고 보면 된다. 비건이라는 말은 단어의 어감도 뭔가 비장하다. -_- 나는 비건은 어림도 없고, 페스코 수준의 채식인데, 사실 페스코도 육수조차 먹지 않아야 진짜지만, 내가 또 거기까지는 못하겠어서, 육수는 먹는 페스코다. 하하하하하. 뭐 이런 게 다 있담. ㅋㅋ 얼마 전에 어떤 책에서 봤는데, 동물성 지방에 몸속의 중금속을 분해하는 성분이 있어서, 채식주의자가 중금속 중독으로 사망했다는 에피소드가 다뤄졌었다. 그걸 보고 동물성 지방까지는 먹어야지, 생각한 건 아닌데 도무지 그것까지 안먹으면 먹을 게 없어서, 거기까지는 먹고 있는 중이다. 음식이라도 잘하면 모르겠는데, 제대로 무칠 줄 아는 나물 하나 없으면서 채식을 하겠다니, 좀 웃기고 모순적이라는 생각은 든다.
채식을 하면서 결심한 것 중 하나는 스스로 '저 채식하니까 다른 거 먹죠' 라는 말은 절대 절대 하지 말아야지, 라는 것. 어쨌든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결심을 했으면, 그 불편함을 감당하는 것은 내 몫이지 타인의 몫이 아니다. 회식 자리에서 10명을 나 하나 때문에 고기를 못먹게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내가 채식의 당위성을 내세우며 그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 이유도 없다. 그냥 나만 티 안나게 안먹으면 그만인데, 생각보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뭘 먹는지, 먹지 않는지에 관심이 그다지 없다. 그냥 젓가락을 놀리며 밑반찬과 기본 안주와 함께 술잔을 기울이다 보면 고기는 줄어들게 마련이고, 배는 불러오게 마련. 치킨집에서 치킨 안먹기, 고기집에서 고기 안먹기, 심지어 워크샵 가서는 고기만 굽기까지 다해봤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눈 앞에 있는 스테이크도 외면했었고, 순대 곱창볶음에서 야채만 주워먹기도 했다. 얼마전에는 우리집에서 치킨과 족발을 시켜먹는데, 배고파서 혼자 감자를 구워먹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내 식습관을 배려해 달라고 할 생각이 전혀 없다. 내 살 길은 내가 모색하는 거고, 그게 너무 지쳐서 못하겠으면 그만두면 그만이라는 생각이다.
게다가 사실, 육수도 먹는 페스코정도의 하급 채식인의 삶은 정말 어렵지가 않다. 돈가스 집에 가면 생선가스를 시키면 되고, 고기집에서도 김치찌개를 시켜먹으면 된다. 육수를 안먹는 페스코였다면, 그 김치찌개도 먹을 수 없었겠지만, 나는 육수는 먹는 페스코니까 ㅋㅋㅋㅋ 심지어 만두도 해산물 만두가 있다. 도시락 반찬으로는 버섯이나 두부가 자주 등장하고, 얼마전에는 한살림에서 가을 전어도 주문했다. 오히려 스팸이나 비엔나 소시지를 구워먹던 때보다 먹는 일이 더욱 즐겁고, 고기가 메인 메뉴인 자리에서 고기를 안먹으니, 섭취 칼로리도 줄어들었다. 게다가 매일 성취감도 느끼니, 완전 일석 몇조인지. 그러다가 고기가 먹고 싶어지면 언제든 배교할 생각이지만 다행히 먹고 싶어지지 않고, 시간이지나도 바뀌지 않는다.
사실 지난 주에는 너무 기운이 없어서 단백질 부족 탓인가, 막 혼자 자책도 했었다. 너무 탄수화물 위주인가, 생각하다가 잘 안먹던 두유도 먹기 시작하고, 의식적으로 단백질을 섭취하려고 애써보기도 한다. (방금 쿠팡에 저칼로리 두유가 있길래 살까 하다가, 단백질이 3g인 것을 보고 헉! 하고 안샀다는 -_- 두유에는 보통 6g 정도의 단백질이 들어있다... 그걸 먹자고 안먹는 두유도 먹고 있네) 아직까지는 고통이 아닌 즐거움이라 계속 할 수 있는 일이다. 물론 가끔 먹을 게 너무 없어서 괴로울 때도 있지만, 그걸 이겨낸 뒤에, 스스로의 원칙을 지켰다는 즐거움이 더 크다. 그리고 나는, 이 즐거움이 고통이 되는 순간, 언제고 그만둘 작정이다. 이러다가 또 '근본 있는 고기만 먹겠다' 정도로 노선을 수정할 지도 모를 일이지만 (한살림 고기라던가...) 먹기 시작하면 또 선이 모호해질 것 같아, 아직까지는 이 선을 지키고 있는 중이다.
암튼, 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 남을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 나 즐겁고, 나 건강하자고 하는 거라 생각보다 재밌다. 처음은 그냥 한 달만 결심했었는데, 잘 해왔으니, 또 다시 잘 해볼 작정이다. :) 지난 한달간의 나에게 상이라도 주고 싶은 마음이다. 흐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