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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6펜스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평점 :
지난 가을, (그러고 보니 이것도 벌써 1년 전이구나.) 20대의 나를 설레게 한 마지막 남자는 슬프게도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였다. 아. 쓰고보니 굉장히 비참하다. 강마에라니. 왜 나는 하필 그 가을에, 그 드라마를 봤을까. 그 드라마만 보지 않았더라면, 적어도 손에 잡히지 않는 누군가로 인해 가슴설레하는 일로 20대를 마무리하지 않아도 좋았을텐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당시 같은 증상을 앓고 있는 것은 나 뿐만은 아니었다. 수많은 언니동생들이 하트뿅뿅 가득한 눈으로 브라운관을 보며, 사랑해요 강마에,를 외쳐댔고, 극중 강마에의 상대역이었던 두루미 빙의 현상을 여실히 느꼈으며, 강마에 역을 연기한 김명민의 부인에게 혹시 전생에 은하를 구하셨냐고 물으며 절규했으니 말이다. 지금은 10아시아로 이름이 변경된 매거진T의 모 기자는 이러한 우리의 증상을 단칼에 정의해 주었다.
박복에 이르는 병이라고
아. 인정하면 지는 거다. 인정하면 지는 거다. 하면서도 나는 그 병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세상에. 박복에 이르는 병이라니. 이토록 정확한 정의가 또 어디 있겠는가. 그렇다. 이 증상은, 진정 알면서도 앓을 수밖에 없는 박복에 이르는 병인 것이다. 모르는 게 아니다. (흥!) 게다가 이 병은 한 번 앓기 시작하면 완치율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그러고보면 참 재밌는 현상이지. 이 책 달과 6펜스에서도, 폴 고갱을 모티브로 한 인물인 스트릭랜드의, 도무지 도덕적으로는 용납하기 어려운 그의 삶을 지탱해주는 것도, 이 '박복에 이르는 병' 환자들인 것이다. 대표적인 인물로 꼽을 수 있는 스트로브. 한순간도 자신을 존중해주지 않는 심한 인격 모독적 언사의 반복에도 불구하고 절대 그의 곁을 떠나지 못한다. 스트릭랜드의 천재성을 알아보는 유일한 인물로 그려진 그의 병은 스트릭랜드가 아파 죽을 지경이 된 후에 급기야 그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오는 장면으로 미루어볼 때 중기를 지나 말기에 막 들어선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그 집에 한 명의 환자가 더 있었으니 바로 스트로브의 아내. (이 병, 혹시 전염되기라도 하는걸까?) 반듯하고 착하나 단조로운 그의 남편에게 아무런 매력을 느끼지 못하던 그녀는 남편이 스트릭랜드를 집으로 데려오겠다는 이야기를 하는 순간 그녀의 마음을 직감했는지도 모른다. 결국 이 병은 한 가정을 파국으로, 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가기까지 한다. 정말 무서운 병이다.
타히티에서도 역시, 박복에 이르는 병 환자들 덕에 그의 삶을 유지해 나간다. 그의 아내였던 아타는 "내가 너를 때릴텐데" 라는 스트릭랜드의 말에 "그러지 않으면 제가 사랑받는 줄 모르잖아요" 라는 말로 응수해, 자신이 이전의 다른 환자들보다 한층 숙달되고 업그레이드 된, 하여 롱런이 예고된 환자임을 스스로 밝힌다. 사랑의 정의를 재창조해내는병이라니... ㄷㄷ 결국 그녀는 나병으로 스트릭랜드가 사망하기까지 그의 옆을 지킨 마지막 여인이 되는데, 스트릭랜드의 타히티에서의 삶과 예술은 아마도 그녀가 없었으면 불가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왜 우리는 반듯한 것으로부터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걸까. 스트릭랜드의 첫번째 아내처럼, 왜 우리의 그러한 양상은 나 자신을 바꾸어내는 데 이르지 못하고 그러한 자들에게 맹목적인 열광을 보내는 방식으로, 그리하여 그들의 삶에 기여함으로써 스스로의 보편성을 이루는 한 부분을 위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일까. 달과 6펜스를 읽은 많은 사람들은 위대한 예술가의 괴이한 예술혼과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나는 도대체 왜 여기 이 수많은 동변상련의 동지들의 모습이 자꾸만 마음에 밟히는 걸까. (사실 이 병에도 나름 부류가 있는지, 스트릭랜드는 딱히 내 타입은 아니다 ㅋㅋㅋㅋㅋㅋ 그에게는 괴팍, 괴이만 있지, '우수'는 없지 않은가 ;;)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앞으로 어떤 예술 작품을 볼 때에는 그 작품을 만들어낸 수많은 예술가들의 위대한 영혼, 그 뒷편에 가려진, 우리 박복에 이르는 병 환자들의 평범하디 평범한,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그리하여 우리는 그저 상상할 수밖에 없는, 하지만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그 마음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겠다, 라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이 책은 미국에 있는 민정언니와의 지속적인 교감을 위해, 언니와, 언니의 지인들과, 또 언니의 지인의 지인들과 함께 세계 문학을 읽기로 한 <내가 읽는 책 이야기>의 첫번째 도서였는데, 놀랍게도 다른 분들의 리뷰를 읽으니, 그 분들은 이러한 병증으로부터 너무나 자유로운 것만 같아 보인다. 그러니 개중 어린 편에 속한 나는 도대체 어느 정도 삶을 더 살아내게 되면, 그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지, 흥, 할 수 있게 될지 궁금한 것이다. 최근 박복에 이르는 병 치료를 위해 무던히도 노력하고 있는 웬디씨께서는 <내가 읽는 책 이야기> 동지들에게 묻고 싶다. 어떻게 그 병으로부터 자유로워졌나요? 네? 처음부터 그런 병 따위는 앓았던 적이 없었다고는 부디 말하지 말아주세요. 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