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올 여름 가장 덥다는 그 일요일이었다. 수원에 사는 후배와 저녁 약속이 있어 수원행 지하철을 갈아타기 위해 금정역에서 막 내렸을 즈음이었다. 뭔가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고, 뭔가 큰소리가 나는 것도 같아 그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멀리서 보니 덩치 큰 아저씨가 위압적인 느낌으로 토스트 가게 앞에 서 있는 것 같았고, 토스트 가게 아주머니는 뭔가 쩔쩔매는 듯, 급하게 토스트를 만들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라고 생각하며 나는 그 쪽으로 걷고 있었고, 슬그머니 화도 나기 시작했다. 왜 사람들은 고급스러운 매장에서는 오히려 고분고분 큰소리도 일으키지 않으면서, 이렇게 작고 힘없는 매장에서는 의기양양인거지? 라며, 소심해서 발현도 못할 의협심으로 가득차 가까이 다가갔는데.
아뿔싸. 아무 일도 아니었던 것이다. 웅성웅성도 나의 착각이었고, 위압적인 느낌도 나의 착각이었다. 그러니 슬그머니 화를 내며 의협심에 불타올랐던 건, 한마디로 생오버의 극치였던 셈이다. 순간 멍해졌다. 아. 나는. 정말. 왜 이 모양인 걸까.
2
누구나 그랬듯, 스무 살 때는 뭐든 혼란스러웠고, 정말 도무지 아무것도 알 수 없어서 나는 제발, 제발, 뭔가 좀 확고해졌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을 했다. 그렇게 길을 찾아 마구 헤맸었고, 그 노력은 다행히 아주 헛되기만 한 것은 아니었는지, 어떤 사안 앞에서 그래도 꽤 그럴듯한 판단 정도를 내릴 수 있는 삶의 내공 정도는 쌓이게 됐다고 '스스로' 교만한 자가진단을 시작했을 즈음에는, 난, 세상을 이분화해서 보는 굉장한 오류에 빠져 있었다. 어쩐지, 이 사안을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이기적이거나, 보수적이거나 한 사람인 것만 같았다. 계급이나 이데올로기라는 틀을 통해 사람을 바라보는 건, 어찌 보면 매우 편리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도 모르게 사람을 개체가 아닌 덩어리로 보게 되고, 스스로 '옳다'라는 자의식을 가진 사람들은 그 의식이 지나친 나머지 자신을 제외한 상대방들을 옳지 않음의 부류로 집어넣게 되는 일이 종종 있으며, 따라서 상대를 공존의 대상이 아닌, 계몽, 혹은 선동의 대상으로 보는 우를 범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혹은 자신과 같은 방향성을 지니지 않은 사람이 이유 없는 악인으로 그려지는 상황에 대해 어색함을 느끼지 못한다. 그것은 자신의 인식의 틀 안에서는 어색한 일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고백컨대, 그 흔적은 마음 어딘가에 여전히 남아 있어 불쑥 불쑥 튀어 나와 삶의 현장에서, 종종 그러한 우를 범하게 한다. 토스트 가게 앞에 있는 아저씨가 토스트 가게 아줌마에게 화를 내는, 못된 사람일 거라고 '아무 이유 없이' 지레짐작했던 것처럼 말이다. 아, 이 사고 구조는, 정말이지, 얼마나 단순한가. 그리하여 인간을 얼마나 단순한 존재로 환원하는가.
3
영화 <킹콩을 들다>가 최근 극장가에서 훈훈한 영화로 조용한 찬사를 받았다. 10억 남짓의 적은 예산으로 만든 영화가 이 정도로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영화업계에서도 매우 고무적인 일일 것이다. 친구 한 녀석이 이 영화를 자신의 인생의 영화로 꼽으며 함께 하는 독서토론 모임에서 책 대신 이 영화를 발제하겠다고 나서 몇몇 사람들과 함께 늦은 밤 극장을 향했다. 그냥 재미로 본 영화라면 웃으며 나올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영화를 보는 도중에는 꽤 많이 웃기도 하고, 어떤 친구들은 많이 울기도 했다. 하지만 소중한 친구의 인생의 영화라는데, 헐렁헐렁한 눈으로 볼 수는 없었다. 하여, 나와 친구들은 이 영화를 곱게 볼 수만은 없었다. 우리는 결국 1년도 더된 모임 역사상 최장 시간 토론 기록을 세우고야 말았다. 바로 이 킹콩을 이야기하다가.. (아래 쓰는 이유들은 나와 함께 토론했던 친구들의 의견을 종합한 것이다, 영화 내용은 씨네 21기사 참조)
일단 이 영화가 곱게 보이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이 영화의 캐릭터가 너무나 단선적이라는 것이었다. (이 점은 소설가 김중혁 역시 씨네 21을 통해 지적한 바 있다) 뚱뚱하고 못생긴 친구들은 그 캐릭터 그대로 희화화되기 일쑤이며, (웃겨서 웃긴 웃는데, 웃다 보면 미안해진다. 뚱뚱하고 못생긴 친구는 왜 역기를 들다가 똥까지 싸야하는가, 라며 나는 분노했다.) 삶 속에서 이렇다 할 미덕을 보이지 않았던 한 선생님이 선한 인간으로 변모하기까지의 중요한 계기나 과정들은 생략된 채 한없이 착하게만 그려진다.
이 선생님의 선량함과 대조되는 인물로 등장하는 고등학교의 코치 역할은 반대로 이유 없이 한없이 악하고 나쁜 캐릭터로 그려진다. 그리하여 아이들을 고등학교에 보내고 나서도 고등학교 역도부로 보내지 않고 계속 자신이 가르치는 선생님의 행위는 응당 옳은 것으로 비쳐진다. 이것이 두 번째로 마음에 걸렸던 점이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리더란, '내가 아니면 안 돼' 라는 자세로 끝까지 책임져주는 리더가 아닌, 자신의 위치와 책임의 범위를 알고, 다음 세대의 리더에게 적절한 시기에 넘겨주고, 다음 세대를 키우고 준비할 줄 아는 사람이다. 내가 졸업한 포항 모 대학의 총장님처럼 대안이 없다고 해서 학교라는 크고 중요한 공동체를 10년 이상 자신 이외의 다른 대안을 생각할 수 없는 상황으로 방치해두는 것은,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십자가로 끌어안는 것은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좋은 리더의 자세가 아니다.
한 가지 더 이야기하고 싶은 건, 사춘기 소녀들의 마음 역시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의식주에 대한 인간의 기본권은 중요한 것이지만, 누군가는 자신의 둘러싼 환경이 그것을 해결해줄 수 없을 때 그것을 향한 누군가의 선의에 오히려 수치심을 느낄 수도 있는 문제이다. 얼마 전 서울시에서 도입한 무료 급식 전자 카드가 오히려 아이들에게 수치심을 준다는 문제가 제기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기사 참조) 하지만 영화속 캐릭터는 그 부분을 배제하고 있다. 또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과정은 어떠한가. 문제 해결을 위해, 학교와 장학사를 속이고 거짓말을 해야만 했으며, 그 과정에서 역도를 할 줄도 모르는 학생들이 부상의 위험을 무릅쓰고 대회에 출전해야만 했다. (그 위험성에 대해서는 주인공이 자신의 입으로 설파한 바 있다)
물론 이 영화는 모든 캐릭터에 전형성을 부여했고, 그리하여 아이들은 밥을 먹고, 잘 곳이 생겨 매우 감사하고 기뻐했으며, 전형적인 나쁜 캐릭터로 그려진 다음 세대의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굉장한 악영향을 끼쳤고, 주인공의 행위는 결론적으로 선한 결과를 낳았기에 그의 '옳음'을 입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삶은 영화가 아니고, 인간은 전형성을 가진 존재가 아니다. 하여 이 영화에서 그린 모습들이 스크린을 빠져나와 삶의 문제로 치환되었을 때, 그것은 어느 정도 위험한 지점을 담보하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그 친구에게 이토록이나 존재의 단순화를 통해 그려냈기에 가능했던 이야기들이 삶이 된다면 그 삶 속에서 직접 부딪치게 될 문제들은 영화보다 훨씬 녹록치 않을 거라고, 어쩌면 그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타인의 사고의 영역을 자신의 틀 안에 가두는 우를 범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그것은 타인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 지점의 발생을 필연적으로 불러오게 될는지도 모르겠다고, 그래서 영화 속 주인공보다 더 치열하게 노력하고,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더 폭넓게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그렇게 이야기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나도 아직 그런 것들로부터 온전하게 자유롭지 못하니까 말이다. 아마, 그 날 새벽 2시까지, 목에 핏대 세워가며 결국 택시를 타고 돌아갔던 다섯 명의 친구들 모두 비슷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듣고 있나 킹콩? 트라우마는 이제 버리시게.
(이 글 때문에 킹콩의 트라우마는 증폭되었다는 후문을 전한다
물론 개인적으로 만나 다 풀었다지만, 그 이후엔 나의 트라우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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