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던 용산 평화 발자국 2
김성희 외 지음 / 보리 / 2010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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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어떻게 소개해야 할까, 한참 고민을 하다가, 얼마전 읽은 황정은의 <백의 그림자>를 떠올려낸다.

   
  나는 이 부근을 그런 심정과는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가 없는데 슬럼이라느니, 라는 말을 들으면 뭔가 억울해지는 거에요. 차라리 그냥 가난하다면 모를까, 슬럼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치 않은 듯해서 생각을 하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라고 무재씨는 말했다.
언젠가 밀어 버려야 할 구역인데, 누군가의 생계나 생활계, 라고 말하면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아지니까, 슬럼, 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해버리는 것이 아닐까

/ 황정은 <백의 그림자> 중
 

내가 살고 있는 곳도, 슬럼이다. 언젠가 밀어버려야 할 구역. 경제특구로 지정되었다는 곳, 서울의 떠오르는 구역, 즉, 언젠가는 사라질 동네, 그리하여 투자 가치는 1순위이지만 투자한 이는 아무도 살지 않는 곳, 세입자들이 드글드글 거리는 곳. 집주인들은 언제 재개발이 되려나, 설레이며 기다리고, 세입자들은 재개발이 되면 어디로 가야하나 떨면서 기다리는 곳. 확실히, 서울의 중심이나, 전혀 중심답지 않은 이 곳에는 묘한 기운이 흐른다.

그저 잠을 자고 생활을 꾸려나갈 뿐인 나도, 집보러 다니는 것이 까마득하고, 이사할 일이 까마득하고, 이만한 집을 또 구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이 지역이 언제 재개발되려나, 언제쯤 사라지려나, 하는 두려운 마음에 괜히 평소엔 관심도 없던 부동산 뉴스를 들여다보곤 한다. 허나 내 맘은 그뿐이다. 이 곳이 사라지는 날, 이사의 불편함을 감수하며, 새 집을 찾는 귀찮음을 감수하며, 이사짐 센터의 구박을 한몸에 받고도 남을 책짐들을 꾸려, 그저 조금의 아쉬움과 추억을 가지고 손 흔들고 떠나면 될 뿐이다. 조금 눈물을 흘릴지도 모르겠지만, 아마도 금세 마르겠지. 그리고 몇년 후 번쩍번쩍해진 동네를 보며, 아, 저기 내 첫 보금자리가 있었지, 아련해 하며, 개발 미워, 라는 포즈를 취하면서, 그 번쩍번쩍한 건물의 깔끔한 식당과 카페 등을 아무렇지도 않게 이용할 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걸고 있는 것은 생활이지, 생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난, 내가 존재했던 한 공간이 사라진다는 것이 참 눈물겹다. 처음 내 손으로 마련한 보금자리, 그 곳에서 보냈던 시간들, 함께한 사람들, 기억, 추억, 뭐 그런 것들이. 가끔 버스를 타고 지나다, 이 곳이 그리워질 그 언젠가를 생각하면 벌써부터 아련해지곤 한다. 하물며, 망루에 올랐던 사람들은 어떨까.

"살려고 오른 사람들을 죽이기야 하겠어"

라고, 망루에 오른 사람들은 끝까지 그렇게 믿었다. 살기 위해 망루에 올랐다. 재개발과 함께 사라지는 것은, 단순한 생활이 아닌, 생계였고, 희망이었다. 노점상을 하던 아들과 함께 호프집을 하며, 상가 옥상에서 생활하던 할아버지도 있었고, 삶의 마지막 도전이라는 심정으로 복집을 낸 복집 사장님도 있었다. 개발을 할 거라면, 그저 그 곳에 살던 사람들이 살 수 있도록 개발을 해달라는 이 당연한 외침이, 너무나 큰 바람일 수 밖에 없는 곳, 2000년대의 서울.

더 가슴이 아픈 건, 용산 참사 사망자 중 3명이 용산 주민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나는 몰랐다.) 전쳘연(전국철거민연대) 소속의 다른 지역 철거민들. 그 중에는 본인의 집을 철거당해 판자로 된 집에 살면서, 다른 이들의 불행을 두고 볼 수 없다며 함께 망루에 오른 이성수씨도 있었다. 이성수씨의 바람이라면, 그저, 바람이 들지 않는 집에, 벽이 제대로 갖춰진 집에 사는 것이었을 뿐이었다. 자신의 코가 석자면서, 자신의 일도 아니면서, 그렇게 함께 망루에 오른 이성수씨의 마음 앞에선, 심장이 뻐근해진다.

"상현아, 아버지는 평생을 정직하게 살려고 애썼다. 정직한 게 죄라면 지금 우리가 벌을 받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구나, 근데 상현아... 세상에는 지금 우리처럼 고통 받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 우리가 서로를 돕지 않으면, 누가 우리를 도와주겠니...아버지는 미련하게도 그냥 두고 볼 수가 없구나..."



나도 알았다. 거기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걸. 그 망루 위에 올라간 것이 사람이었다는 걸, 그저 그들은 살기 위해 올라갔다는 걸. 그런데, 나는 '잘 몰랐다' 거기 살고 있었던 게 '사람'이었다는 걸, 그 망루 위에 올라간 게 '사람'이었다는 걸. 그들은 그저 '살기' 위해 그 곳에 올라갔었다는 걸. 그들은 이 곳에 '생계'가 걸린 '사람'이었다는 걸.

나의 교만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모르면서도, 이미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너무나 많다는 것. 이 책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언어로 나의 교만함을 일깨워준다. 그저, 옆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으로. 그들이 누구였는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아는 것만으로도 나는 그들에게 조금 덜 무례해질 수 있는 것이다. 알았다고 생각했기에 관심은 갖고 있었지만, 알았다고 생각했기에 그저 비판의 목소리들에 몇마디 보태긴 했지만, 그 목소리는, 그 관심은, 지극히 이성적이고도 메마른 것이었다. 나는, 알았다고 생각했기에 함께 분노할 수는 있었으나, 사실은 몰랐기에, 함께 울어주지 못했다.

이 리뷰를 읽는 많은 분들은, 나보다는 나은 사람들일테니, 나만큼 무지하고 무심하지는 않았겠지만, 그래도 혹여나, 나처럼 무지했기에 함께 울어주지 못했던 분이 계시다면, 온맘으로 이 책을 한 번 읽어주실 것을 권한다. 책 한 권을 낼 때 나무 한 그루를 벨 가치가 있는지 생각하며 만든다는 보리출판사에서 만들었다. 내가 나무라면, 이 책으로 다시 태어나도 좋겠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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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08-16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웬디양님이 나무라면 이 책으로 다시 태어나도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니, 이 리뷰에 영향력이 생기도록 추천했어요. 불끈.

웽스북스 2010-08-16 23:20   좋아요 0 | URL
여러분. 이것은. 알라딘의. 다락방님이 추천한. 리.뷰.입.니.다.

굿바이 2010-08-16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의로운 언어가 없어서, 정치적인 구호가 없어서 세상이 이지경인가,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묻고 또 물었어.
자신들의 목소리만을, 자신들의 욕망만을 관철하려는 사람들 덕에 국가에 의해 살해당한 용산의 '사람'들에게 나는 조문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고, 이 책을 건내준 신부님은 용산에서 목이 쉬고 말을 잃으신 것 같았어.
우리의 언어는 점점 격렬해 지는데, 죽은 그들은 어디에서도 위로받지 못하고, 다음에 또 죽어나가야 할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번호표를 받고 있는 이 땅에, 나는 죽어도 다시 사람으로는 이 땅에 태어나지 않을 것이야.

영향력 없는 리뷰어라 이 책을 알릴 수는 없지만, 나는 아무 영향력도 없기에, 무자비한 배반은 하지 않을 것이고, 기어이 목이 메는 날이면 어디서든 울것이야, 그것만으로도 다행이야.

웽스북스 2010-08-17 23:59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또 들려오는 PD수첩 결방 소식에 화가 나네요.
이러면 더 보고 싶잖아요.

좀 어이가 없는 밤.

프레이야 2010-08-17 0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웬디양님 끝문장까지 감동이에요.
저도 추천 누르지 않을 수 없어요.
바구니에 담아갑니다^^

웽스북스 2010-08-18 00:46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프레이야님 바구니 속 이 책은
프레이야님께 어떤 이야기들을 이끌어낼까,

매우 궁금해요.

누구엄마 2010-08-17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참으로 아름다운 리뷰여요ㅡ
꼭 읽어야지, 하고 다짐하게 만들어버렸어요~

웽스북스 2010-08-18 00:47   좋아요 0 | URL
아이고나. 이런 극찬을.
고마워요. :)

우리 별이가 사는 세상은 좀 더 아름다웠으면 좋겠네.

風流男兒 2010-08-17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어요. 좋은 리뷰를 만들어 낸 그 슬픔들이 가슴을 조금 아련하게 만드는 그런 오전이에요. 그래도 잊지는 않고 추천. 꾸욱.

웽스북스 2010-08-18 00:48   좋아요 0 | URL
그렇죠. 고마워요. :)
오전에도, 오후에도.

레와 2010-08-17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록 한번뿐인 추천이지만, 힘을 모아서 눌렀어요!

웽스북스 2010-08-18 00:49   좋아요 0 | URL
힘을 모아 눌러도 1만 올라가던가요?
아. 야속한지고. ㅋㅋ

고마워요 레와님.

루체오페르 2010-08-17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웬디양님의 마음이 느껴지는 리뷰입니다. 추천!

웽스북스 2010-08-18 00:50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루체오페르님.
요즘 자주 뵈어 좋아요.

순오기 2010-08-17 1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올 여름 책따세 추천도서라 7월말에 사놓고...독서마라톤에 만화는 인정해주지 않아서 잠시 잊고 있었어요. 얼른 보고 리뷰를 써야 겠지요.
보통 결혼하기 전에는 어른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웬디양은 진짜 어른이에요. 추천~

웽스북스 2010-08-18 00:51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읽어보세요.
금방 읽어요

순오기님 남동생도 좋아하는 책일걸요. (멋대로 추측)

순오기 2010-08-20 22:57   좋아요 0 | URL
남동생이 그 만화가를 말하는 거임?ㅋㅋㅋ
좋아하겠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