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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1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평점 :
시를 읽다 보면 가끔 내가 한국인이라는 걸 참 고맙게 만들어주는 작품들이 있는데, 이를테면 백석의 시같은 것이 특히 그런 것 같다. 누긋한, 이라는 표현이나, 눈이 푹푹 나린다, 뭐 이런 표현들은 도무지 번역으로는 전해질 수 없는 느낌. 그런데 또 그렇게 생각하다보면, 나는 갑자기 얼마나 억울해지는지 모른다. 번역이라는 매개를 통해서만 다른 언어로 쓰여진 작품을 만날 수 있는 내가 놓치고 있을, 그 절묘한 표현들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정말이지, 너무나 억울한 것이다.
이 작품을 읽는 많은 사람들은 모두가 같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번역자를 탓함이 아니다. 애초에 번역이 가능한 영역이 아니었을 것이다. 결국 공연한 원망의 눈초리를 바벨탑을 쌓은 인간들을 향해 허망하게 보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작품 속 문장들은 아름답다. 서정적이고 유려하게 표현하면서도, 일본 특유의, 단칼에 자른 듯한 절제미가 함께 어우러져있다. 공존하기 어려운 것들을 함께 녹여내는 아름다운 문장들이 종종 나의 탄식을 자아내니, 아, 원래는 얼마나 아름다웠던 것일까. (역시나 나는 억울한 거지)
열차가 접경의 긴 터널을 지나, 눈의 마을로 들어서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 작품을 읽으며 무진기행을 떠올린 것은 나뿐이었을까. 희뿌연 안개가 자욱해, 그 무엇도 손에 잡히지 않는 듯한 느낌이었던 무진만큼이나, 눈으로 가득했던 그 마을은 몽환적이고, 뿌옇고, 아무것도 잡을 수 없는, 그런 곳이었다. 그 곳에서 주인공은 각자 다른 매력을 지닌 두 여인에게 묘하게 이끌리게 되나, 결국은 누구의 삶에도 개입하지 않은 채, 끝내 방관자로 남게 된다. 아니, 방관만 할 뿐인가. 자신을 향하는 고마코의 모든 애정을 헛수고로 여기는 잔인함도 잊지 않는다. 당신을 만날 때마다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고 싶어서 옷을 새로 빌리기까지 했다던 고마코의 마음은 (이 부분을 읽으며 사랑은 매일 새로운 옷을 입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구나, 생각했다) 그에게는 그저 의미 없는 헛몸짓에 지나지 않았을 뿐이다. 그 무엇도 바꾸고 싶지 않았을 그에게, 어떤 존재를 받아들이는 일은 매우 버거운 일일 뿐이다. 그러고보니, 이 남자, 60년대식 원조 초식남이구나.
요코의 시신을 안고 절규하던 그녀를 남겨둔 채, 그는 다시 그곳을 떠날테고, 잊을만 하면 다시 그 곳을 찾았을테고, 자신의 짐이던 요코가 사라진 뒤의 그녀의 삶은 가벼워지기는 커녕, 덕지덕지 다시 더께가 내려앉았을 생각을 하니, 다시금 그녀의 간절함이 마음에 밟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