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킥이 끝났다. 아. 지난 몇개월간, 나는 거의 하이킥 '당일보기' 원칙을 매일 매일 지킬만큼, 하루의 끝을 하이킥과 함께했었다. 오늘의 하이킥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 :)
어제 하이킥이 막방인지도 모르고, 나는 금요일 하이킥 본방사수를 어찌해야하나, 집에 얼른 들어가서 IMBC로 봐야하나, 10.1인치 갤럭시탭을 빌릴까, 암튼 약속은 없어야하고, 요가는 목요일에 미리 가야한다며 나름 원칙을 정해두고 목요일에 야근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트위터에 하이킥 막방이 오늘이라며 ㅠ 부랴부랴 아이폰 앱을 켜고, 중간부터 보기 시작했다. 결말을 다른 누구로부터 들을 수는 없다는 강렬한 의지.
(여기부터는 스포스포-뭐 세상에 널리고 깔린게 하이킥 스포이지만)
여기까지가 소설 짧은 다리의 역습의 끝이다.
소설이라기보단 전부 실화죠. 마지막 에필로그만 뺴고. 마지막 에필로그는 그저 저의 상상입니다.
하이킥은 내레이터였던 이적의 소설이 마무리되는 것으로 결말을 짓는다. 처음에는 당연히 '여기까지'가 소설이라고 생각했고 '마지막 에필로그'가 승윤 부분이라고 생각했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이킥의 결말이 줄 충격을 기대하고 두려워했는가. 그런데, 아무것도 뚜렷한 결말을 보여주지 않는 밋밋한 결말. 어떻게 보면 결말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은 거고, 사실은 그것이 현실에 가깝겠지, 라고 생각을. 삶을 흐르게 두는 일이 쉬운가. 하지만 삶은 흐르는 것이지. 오히려, 명확한 종지부를 찍는 일은 쉽지. 하지만 그는 그럴 수 없는 영혼. 그러면서도, 지원이 학교를 나가는 부분이나 하선과 지석의 이별과 재회 장면이 좀 더 설득력 있게 그려졌으면 어떨까 라는 아쉬움이 살짝 남았었다. (한국과 미국이 그렇게 멀었던가. 2개월이 그렇게 길었던가) 주변에 오늘 마지막회 자체가 에필로그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나는 그런 여지가 별로 없다고 봤었다.
암튼, 허전한 마음으로 디씨인사이드 하이킥3 갤을 들어가서 이런저런 글들을 살펴보다가,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누군가의 글에 이렇게 써있는 것을 봤다.
"하이킥 결말을 보니, 영화 <어톤먼트>가 생각났어요"
이 글을 보는 순간, 쨍, 하는 느낌이 든 거다. 아. 어톤먼트. 그 순간 마지막회가 다시 짜맞춰지기 시작했다. 확인을 위해 다시 한 번 마지막회를 다운로드 받아서 봤다. 하선이 공항으로 들어가고, 문이 닫힌다. 그리고,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라고 지석이 말한다. 사실은 거기가 실화의 끝, 이고 오늘 에피소드 전체가 에필로그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렇게 문이 닫히는 장면으로, 마지막화는 시작되었고, 그래서 평소와 분위기가 좀 달랐고, 조명은 한 톤 다운 되어 있었던 거였던 걸까.
사실 나는 영화 어톤먼트를 보지 못했다. dvd는 사놨는데 노트북이 고장나고 맥북을 사는 바람에. 대신 이언 매큐언의 원작 소설 <속죄>는 매우 인상적으로 봤었다. 사실 볼 때보다, 보고 나서가 계속 기억나는 작품인데, 그건 다 마지막 부분, 브리오니의 독백 때문이었던 것 같다.
(여기부터는 <속죄> 스포스포 ㅠ)
'속죄'에서의 해피엔딩은 결국 주인공이 자신이 젊은 시절 그들에게 저지른 잘못에 대한 하나의 속죄의 의식이었다. 의지적으로, 그렇게라도 그들의 삶을 아름답게 남겨두고 싶었던 것. 그들의 사랑은 실제로는 아름답게 이루어지지 못했고, 삶은 비극적이었지만, 그들에게는 행복을, 독자들에게는 만족감을 주기 위해 그러한 선택을 한 것. 그러니까 <속죄>라는 소설로서의 이 결론은 결국 앞의 소설 전체를 부정하는 게 되지만, 그럼으로써 오히려 그들의 삶을 긍정해주는 듯한, 그러면서도 매우 냉정하고, 바늘하나 들어갈 것 같지 않게 서늘한, 그러니까 한마디로는 설명할 수 없던 그 마지막 부분을 읽었을 때의 감흥은 잊혀지지가 않는다.
그러나 이제 나는 독자들에게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로비 터너가 1940년 6월 1일 브레이 듄스에서 패혈증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혹은 세실리아가 같은 해 9월 밸엄 지하철역 폭격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할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해에 내가 그들을 만난 적이 없다는 사실을, 런던을 가로지르는 나의 도보여행은 클래펌 커몬의 그 교회에서 끝이 났다는 사실을, 겁쟁이 브리오니는 그 둘을 마주 대할 용기가 없어서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병원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연인들이 주고받은 편지는 지금 모두 전쟁박물관 문서보관소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할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런 일들이 어떻게 결말이 될 수 있겠는가? 그런 일들에서 독자가 희망이나 만족감을 얻을 수 있겠는가? 연인들이 두번 다시 만나지 못했고, 사랑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을 누가 믿고 싶어할까? 냉혹한 사실주의를 구현한다는 것을 빼면 그런 결말이 가져올 장점이란 과연 무엇인가? 나는 그들에게 그런 짓까지 할 수는 없었다. 나는 너무 늙었고, 너무 겁을 먹었고, ...... (중략)
연인들을 살려두고 마지막에 다시 만나게 한 것은 나약함이나 도피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 아니라 마지막으로 베푼 친절이었고, 망각과 절망에 맞서는 투쟁이었다고 생각하고 싶다. 나는 그들에게 행복을 주었지만 그들이 나를 용서하게 할 만큼 이기적이지는 않다. 그럴 만큼 이기적이지는 않다. 아직 그만큼은 아니다. (이언매큐언, 속죄)
하이킥과 어톤먼트가 연결이 되는 순간, 퍼즐이 풀리듯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굳이 스토리텔러이자 내레이터로 소설가인 이적이 등장해 이야기를 시작한 건, 처음부터 이런 마무리를 하기 위한 거였구나.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은 이적이 그의 젊은 시절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고, 사랑하는 아내의 소중한 순간들을 함께한 사람들에게 보내는 마지막 선물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짧은 다리를 가진 사람들은 역습을 하기엔 다리가 너무 짧았지만, 그래서 어쩌면 안내상의 사업은 안쓰럽게 끝났을지도 모르고, 지원은 학교를 박차고 나오지 못하고 결국 르완다로 떠나지도 못한 채 살아갔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하선은 결국 돌아오지 못하고, 지석은 다시 그녀를 볼 수 없었을 지도 모르지만, 소설에서는 그들에게 아름다운 결말을 선물함으로써, 최소한 불꽃을 터뜨리게 함으로써, 최소한 학교를 뛰어나오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최소한 둘을 다시 만나게 함으로써, 어떤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으로 그들의 삶을 감싸주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어젯밤에는 이 결론에 확신을 갖고, 내가 마지막회를 오독했다고 생각했고, 확신을 갖기 위해 김병욱이 이언매큐언을 좋아한다는 증거를 찾아 헤맸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ㅜㅜ 아침에 일어나니, 이 해석이 좀 과도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긴 했는데, (심지어 저녁에 본 기사에는, 제작진이 상상한 부분은 '승윤 대통령 에피소드'였다고 콕 찝어줌) 그래도 나는,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을 이렇게 기억하는 편이 훨씬 아름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아직도 한편으로는 그런 의도가 조금은 있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하고 있다. 적어도, 세번의 하이킥을 통해 김병욱 월드를 만났던 사람이라면, 이렇게 해석하는 일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아는 김병욱은 지독한 사실주의자였으니 말이다.
우리가 살면서 갖는 꿈들은 어쩌면 그 샴페인처럼 그냥 환상일지도 모른다. 실제는 별 것도 아니거나, 끝내 도달할 수 없는. 내게 김지원도 명인대도 그런 하나의 환상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그 환상이 있어, 사람들은, 달린다. (하이킥 마지막회, 종석의 대사)
어쨌든 변함없는 건, 하이킥은 다리가 길던 짧던, 알고보면 별 것도 아니거나, 끝내 도달할 수 없는 그 무엇일지라도, 달려보는 것 그 자체를 응원하고, 그게 삶의 과정이고, 본질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 사실 끝까지 달려도 결론이 나지 않는 삶이 대부분이니까. 우리는 대부분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죽으니까. 이런 결말을 수긍할 수 없다는 사람들도, 사실은 다들 그렇게 살고 있으니까. 어떤 결말이건 간에, 결국엔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으니. 우리의 삶처럼.
어찌됐건, 나는, 이번에도 하이킥의 결말이 반갑고 고맙다. 실은 어떤 결말도, 그렇게 반갑고 고맙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던 사람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여전히, 그의 새로운 이야기를 기다리고, 또 기대한다 :)
그리고, 덕분에 이 작품도 다시 기억했고 :) 또 다시 만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