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ott님이 추천하신 영화 <더 킹: 헨리 5세>를 보고 예전에 읽었던 이 책이 생각났다. 술술 읽히는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다. 셰익스피어가 1500년대 말에 <헨리 5세>를 써서 영국민의 사기를 진작했다면 찰스 디킨스는 1800년대에 어린이를 위한 영국사(A Child's History of England)를 자신의 관점으로 쓴 이 책에서 헨리 5세를 긴 영국사의 한 장으로 다루었다. 이 책은 20세기 말까지 영국 초등 교과에 실려 있었다고 한다. 디킨스는 이 책에서 알프레드왕을 최고 성군으로 쓰고, 존 왕을 비열하고 짐승같은 인물이라고 쓴다. 존 왕은 1214년 6월 15일 귀족들 앞에서 대헌장에 서명하고 약속을 하나도 지키지 않았다. 그 외에도 셰익스피어와 어깨를 나란히한 대문호다운 올바른 사심을 곳곳에서 드러낸다. 권력자들의 추악한 뒷마당과 살육을 일삼은 왕들의 이야기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 상상을 부추기는 생동감 나는 장면들, 헐벗은 백성들 편에서 바라보는 시선을 견지하는 편이다. 


1412년 재위해 10년간 통치하다 36세의 나이로 죽은 실제 인물과 각기 다른 시대를 산 문호의 글로 드러나는 인물, 2019년 영화로 재창조된 인물이 나란히 겹쳐왔다. 어느 인물에 대한 시선에 오해는 필수 과정인 것 같다. 그런 것들이 모여서 그걸 넘어서는 어떤 지점이 드러나겠거니. 평가는 후세의 몫이라지만 그 또한 각기 다른 프리즘을 통과하는 일이니 감안해야 할 듯. 


이 책 20장에서 랭커스터가 최초의 왕, 헨리 4세, 영화 속에서 장남인 할과 반목하는 아버지 왕에 대해 쓴다. 적을 화형에 처하는 방법을 도입한 왕이었고 백성의 신뢰를 잃어가는 왕이었다. 스코틀랜드 공격과 퇴각 시 부대가 마을을 태우거나 사람을 죽이는 일이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고도 하는데 이는 헨리 4세가 병사들에게 그렇게 지시했기 때문이라고. 전쟁 중에도 평범한 백성의 안위와 목숨을 등한시하지 않은 점은 부자가 비슷한 것 같다. 치세 동안 잉글랜드는 평온한 편이었지만 헨리 4세는 왕위 찬탈에 대한 자괴감과 망나니 아들 때문에 행복하지 않았다고 쓴다. 재위 14년, 46세로 기도 중 사망한다. 


역사적 사실로 알려진 할은 망나니라기보다 13세때부터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전장터의 경험을 쌓았고 용감하고 지혜롭고 영특했다. 그래서 아버지로부터 다소 경계의 대상이었다고. 영화 <더 킹:헨리 5세>의 할이 주색잡기에 빠져 있다가 갑자기 왕의 면모로 돌변한 것처럼 보이는 건 실제 헨리 5세의 드러내지 않은 내면을 이해하지 않으면 설득력이 없을 것 같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지만 저리 변하나 싶은. 원래 있던 성정이 기회와 맞아떨어질 때 드러나는 것이다.  용감하다는 건 나중에 권력을 굳건히 하기 위해 과감히 사람을 쳐내는 과정에서 잔인함으로 평가받지만 찰스 디킨스는 그를 인자하고 공정한 통치를 한 왕으로 쓴다. 왕세자 시절 방탕한 시절을 함께한 친구들은 변함없이 신의와 충직함을 지키겠노라 했지만 헨리 5세는 그들을 멀리했다. 예를 들어 존 폴스타프는 이 영화에서 충성심과 혜안을 발휘하고 아쟁쿠르에서 장렬히 죽음을 맞이하지만 실제로 셰익스피어의 <헨리 5세>는 왕 위에 오르자 그를 제거하는 것으로 쓴다.


찰스 디킨스는 이 책의 21장에서 권력의 정점에서 죽은 헨리 5세를 다루는데, 프랑스와의 전쟁 중에 병사들이 식량부족에 시달리면서도 양순한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을 존중하지 않는 병사는 죽음을 각오하라는 왕의 엄명을 따라야했다고 쓴다. 그리고 누구의 승리가 됐든 전쟁은 참혹한 것이다. 끔찍하지 않은 전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개탄한다. 



레놀드 엘스트랙이 그린 헨리 5세의 삽화. 좌측은 1618년에 그린 것이고 우측은 시기 미상. /출처= ⓒhistoricalportraits.com

레놀드 엘스트렉이 1618년 그린 헨리 5세 삽화.                               연대 미상. 인상이 좀 다르다.



190cm 장신에 얼굴 왼쪽에 큰 상처가 있다는 헨리 5세는 26세에 즉위하여 10년 후 세상을 떴다. 영화는 한 사람의 성장을 담지만 실제로 36세 이후의 삶이 없으니 온전한 성장 이전 활짝 핀 청년의 삶만 살아남았다. 

두 편의 <헨리 5세>가 이전에 나와 있었지만 보지는 못했고 포스트만 본 적이 있다. 1944년 로렌스 올리베에의 헨리 5세, 1989년 나온 1960년생 케네스 브래너의 헨리 5세보다 1995년생 티모시가 그런 면에서는 더 헨리 5세에 가닿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인물에 생명감을 불어넣고 후대 사람의 바람을 담아 새로이 조명한 이 영화에서 헨리 5세가 병사들 앞에서 웅변하는 장면에 대사가 살짝 황당하게 시적이다. 울분에 차 울 듯 말 듯한 얼굴로 "Make it England!"라고 소리지르는 너무 어른스럽지는 않은 청년을 보는 것 같아 오히려 그럼직했다. 셰익스피어가 명연설로 기록한 이 대목은 영화에서는 조금 다른 어조로 변형되어 감수성을 자극한다. 수적으로 열세였으나 프랑스군인의 답답한 갑옷과 비온 후 진흙탕이 된 들판이 도움이 되었던 아쟁쿠르 전투(1415)에서 승리 후 헨리 5세가 샤를 6세를 독대하는 장면에서 깊이 공감되는 대사가 시적으로 또 흘러나왔다. 샤를 6세는 왕위계승권을 헨리 5세에게 내어주며 한 가지 조건을 건다. 공주 까뜨린느를 거두어 줄 것, 결혼할 것. 역사를 움직이는 건 가족일 수 있다는 내용의 말을 덧붙인다. 나는 후반부 이 짧은 대화 장면이 마음에 또 남는다. 화려한 궁정이 아닌 소박한 공간, 샤를 6세 뒤로 햇살 비치는 창문인가가 있고 카메라는 샤를 6세를 정면으로 비춘다. 반면 헨리 5세는 그 앞에 조금 낮게 앉은 구도를 취한다. 전투에는 이겼으나 헨리 5세의 현명하고 인간적인 면모가 드러나는 자세였다. 감독의 섬세한 면모가 드러나는 장면들 중 하나이기도 하고.


"Family moves us. Family consumes us."였던가. 이 말은 1392년부터 정신병을 앓았던 가엾은 샤를 6세의 입에서 나온 진실한 말이었다. 미친 사람이기에 자주 진실을 말할 수 있다고 헨리 5세에게 던지는 딸 까뜨린느의 말에는 참하고 영민한 마음의 눈이 비치었다. 거대한 역사의 줄기 속에서 우리를 움직이고 우리를 소모하는 존재는 가족이라는, 한 사람의 군주이자 아버지의 말에서 백성의 아버지로서의 군주와 우리네 아버지에 대한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런 말을 하는 영화의 진심이 좋았다. 자신의 안위와 이익을 위해 거짓을 말했던, 충신인 줄 알았던 윌리엄을 단칼에 처단하고 헨리 5세는 까뜨린느의 양손을 맞잡는다. 앞으로도 진실만을 말해달라고 하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난다. 


실제로 샤를 6세와 헨리 5세가 죽은 연도는 모두 1422년이지만 프랑스 원정 중이었던 헨리 5세가 갑작스런 병으로 두 달 먼저 뜬다. 프랑스 왕위 계승권에 관한 트루아조약(1420)은 무효화하고 역사는 또 다른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누구든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 외엔 아무것도 예상할 수 없는 것!


똑똑한 까뜨린느 역의 배우가 조니 뎁의 딸이다. 티모시 살라메는 '작은 아씨들'에서는 그다지 발하지 못한 호감도가 이 영화에서 훨씬 살아난다. 키도 작아 보였는데 실제로는 크네. 비교적 야위어서 그렇게 보이나 보다. 연기천재 학생을 연기한 <미스 스티븐스>도 같은 해 나온 영화다. 여리여리한 이미지 밖으로 나와 고뇌하며 성장하는 군주의 역할을 잘 해낸 것 같다. 재창조한 인물로 감독이 잘 캐스팅된 듯.  시종 끊이지 않고 계속 깔리는 음악은 좀 거슬렸다. 


그런데 티모시 살라메, 2019년 부산국제영화제에 감독 데이비드 미쇼와 각본에도 참여하고 존 팔스타프 역을 한 배우 조엘 에저튼과 왔었구나. GV도 했네. 이쁨! 그해 시월 책 준비하느라 바빠 BIFF에 가보지 못하고 보냈는데 아까워라. 올해도 마무리 임박한 임무에 26회 BIFF 지금 개최 중인데 뉴스만 보고 있다. 에너지가 달리지만 내일쯤엔 영화의 전당 부근에 분위기나 보러 한번 나가보려고 한다. ^^ 스캇님, 영화 소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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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1-10-11 16:1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스캇님 서재에서도 넷플에서 찾아 봐야겠다!!생각 했었는데...프레이야님 마저도~^^
읽던 책 다 읽고 나면 폐인이 되더라도 꼭 봐야 겠어요.

프레이야 2021-10-11 16:19   좋아요 4 | URL
샤방샤방한 티모시 보는 것만으로도 시간 건지실 거에요 ^^ 그동안 못 보았던 카리스마가… 배우는 이렇게 변신해 볼 수 있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흐흐

scott 2021-10-11 16:2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디킨즈가 쓴 영국사 책 어렵게 서술 하지 않아서 좋아 합니다 실제로 장신이였던 헨리 6세 이십대 중반의 모습을 티모시가 완벽하게 연기 했죠. 넷 플릭스에서 가장 추천하는 작품입니다. 영화 속에서 햄릿 스러 웠던 헨리 5세가 서서히 피를 뭍혀 나가면서 권력을 쟁취해나가는 과정을 영화에서 상세하게 보여 줬죠, 로버트 페터슨의 연기력도 빛이 나서 이작품 명작 입니다.!

프레이야 2021-10-11 17:05   좋아요 3 | URL
댄. 보봐리부인 낭독하는 거 듣고 왔어요.
다른 거도 많네요. 영화에선 로봇이라 목소리가 처음에 좀 웃겼는데 ㅎㅎ 내용은 다 알아듣지 못하지만 크흐 목소리 좋아요. 깐깐함이 묻어나는 목소리.

프레이야 2021-10-11 17:22   좋아요 3 | URL
로버트 갑옷 입고 자꾸만 자빠지던 장면에서 우습고 안타깝고 그렇더군요.ㅎㅎ
프랑스 측에서 보면 엄청난 모욕감이...

scott 2021-10-11 17:32   좋아요 1 | URL
프랑스 군의 갑옷은 전쟁 패배에 가장 컸죠!

프레이야 2021-10-12 00:07   좋아요 2 | URL
네. 그렇대요. 가벼운 게 최고입니다. 너무 중무장하는 것도 악재가 되니. ㅎㅎ
비가 온 다음날이라 득. 폴스타프가 비가 오면 붙자고 한 대사 신의 한수에요. 각본을 쓴 거지만요.

지유 2021-10-11 23:57   좋아요 1 | URL
헨리 5세 보다가 주인공 매력없다고 보다 말았는데 다시 봐야겠네요. ㅎㅎ

프레이야 2021-10-12 00:12   좋아요 2 | URL
지유 님 좋아하시는 타입이 아니면 그럴 수도요. 다시 이쁘게 한번 봐주세요 ^^

mini74 2021-10-11 17: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영화도 보고싶고 책도 읽고싶고 ㅎㅎ 멍 때리다가 다시 의욕이*^^*

scott 2021-10-11 17:29   좋아요 2 | URL
영화 ! 강추 .🖐 ^^ 합니다 ^^

프레이야 2021-10-11 17:56   좋아요 3 | URL
저도 보시라고 뽐뿌질해요.^^

서니데이 2021-10-11 20:5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조니뎁 딸 사진을 전에 본 적이 있는데, 그 때는 모델이었던 것 같았어요.
이 영화에도 출연하는 거군요.
오늘은 대체휴일이었는데, 편안한 하루 보내고 계신가요.
여긴 오늘 조금 추웠습니다. 프레이야님, 좋은 하루 되세요.^^

프레이야 2021-10-11 21:42   좋아요 2 | URL
여기도 오늘 흐리고 빗방울 떨어질락말락 했어요. 아직 전 선풍기 가끔 돌린답니다. 제가 더위를 타는 건지 ^^. 편안한 저녁 보내세요.

바람돌이 2021-10-11 21: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넷플릭스에서 바로 예고편 보고 왔는데요. 헨리 5세역의 티모시 너무 여리여리한거 아닌가요? 샤방샤방해서 좋긴 한데 저 몸으로 중세의 갑옷입고 칼이나 휘두를 수 있었을지 갑자기 걱정이.... ㅎㅎ 저도 다음 주말에는 이 영화 봐야지 하면서 찜해놓고 왔습니다. ^^

프레이야 2021-10-11 21:41   좋아요 2 | URL
그쵸 ㅎㅎ 카메라 각도에 따라 이미지는 달라지는 측면이 있는 거 같아요 누구든. 칼을 탁 땅에 꽂고 돌아설 때 카리스마 넘쳐요. 포로들을 모두 죽여버리라고 할 땐 잔인하게 느껴지지만 암튼 강하면서도 인간적인 양면을 잘 보여주려고 한 영화는 진심 그렇게 느껴지더군요 ^^

희선 2021-10-13 0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젠가 이 영화 <더 킹 : 헨리 5세>를 보고 쓴 글을 봤는데, 그때가 언젠일지... 2019년이었을지... 내용은 잊어버렸지만 그런 글을 봤다는 건 기억해서 다행인지... 왕이 되기 전과 뒤가 많이 다르다니, 왕이 되기 전에는 죽을 수도 있으니 그러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렇게 오래 살지는 못했군요 그래도 열해 동안 자기 뜻을 펼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희선

프레이야 2021-10-13 10:46   좋아요 1 | URL
2019년이었겠네요 희선 님.
네, 우리나라 왕 중에도 왕위에 오르기 전에는 그런 경우가 있었듯이요.
아버지 헨리4세가 경계한 아들이어서 반발심이 생겼을 수도 있겠죠.^^
사람도 제 자리, 제 몫이 있는 거 같아요. 그게 맞아떨어질 때 능력이 활짝 꽃을 피우는 것일 테죠.
제 자리가 아닌 곳에서 허세와 욕망으로 아등바등거리는 경우도 있는데 본인도 괴롭지 않을까 싶어요.
헨리5세는 영국민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왕으로 기억되니 36년의 삶이 나쁘지 않았네요.^^

그레이스 2021-10-13 1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영화 둘다 저장하고 갑니다.

프레이야 2021-10-13 19:20   좋아요 1 | URL
보시기에 나쁘지 않을 거에요.
친구1일^^ 반갑고 고맙습니다.

그레이스 2021-10-13 19:21   좋아요 0 | URL
저두요
감사합니다 ~
 
걷는 독서
박노해 지음 / 느린걸음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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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해 시인은 사진으로도 대단한 존재감을 발휘한다. 세계의 오지을 다니며 노동하는 사람들을 담은 흑백사진을 보고 너무 마음에 들어 흥분되었던 기억이 있다. 풍경 속 바람과 인물의 입김이 느껴지는 듯 생생하면서 아름다운 시선이었다. 그때는 제법 날이 추웠던 어느 해 겨울이었다. 서울 사는 친구와 서촌을 돌아다니다 먼저 보내고 나 혼자 청운동 윤동주문학관과 거기서 우회전해 조금 위쪽 오르막길에 있는 라카페갤러리에 갔다. 박노해 사진전을 상시 한다는 걸 알고 갔는데 전시를 보러 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올해 유월에는 컬러 사진들 54점을 모아 아포리즘을 붙여 두꺼운 책이 나왔다. 덮어놓고 냉큼 샀는데 깜짝이야. 책 판형은 생각보다 아담하고 사진크기는 너무 작은 거다. 그런 줄 알았어도 샀겠지만.

올해 마지막 날까지 라카페갤러리에서 전시도 한다. 원래 9월까지였는데 연장한 모양이다. 이 해가 가기 전에 가서 봐야 겠다고 생각한 건, 책에 사진이 너무 작은 크기로 실려 있어서다. 글도 글이지만 사진이 보고 싶었던 나 같은 사람은 아쉬울 수밖에. 사진은 전시장 가서 보는 걸로 하고... 시인의 혜안과 통찰이 담긴 묵시적인 문장에 좋은 한영번역문이 달려 있어 우리말과 또 다른 느낌을 전한다. 외국인 독자에게도 좋을 듯하다. 패브릭 양장본으로 색도 만듦새도 이쁘다. 880페이지가량 된다. 간혹 몇 장의 사진은 페이지에 꽉 차게 들어 있다.

 
표지에 걷는 독서를 하고 있는 사람은 마치 수도승 같이 보인다. 실제로 찍은 사진 속 인물이고 본문에 들어 있다. 그리고 멋진 이 사진은 오랜 세월의 길 위에서 읽으며 나아간 시인의 페르소나이기도 하다. 책표지 안쪽에 적힌 시인의 이력을 다시본다. 1991년 사형을 구형받고 "무기수로 감옥 독방에 갇혀 침묵 정진 속에 광활한 사유와 독서와 집필을 이어가며 새로운 혁명의 길찾기를 멈추지 않았다. 7년 6개월 만에 석방된 후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복권되었으나 국가보상금을 거부했다. 그후 20여년간 국경 너머 가난과 분쟁의 땅에서 평화활동을 펼치며 현장의 진실을 기록해왔다."라고 적혀 있다. 걸어온 길처럼 그의 사진은 뜨거움을 뿜고 있어서 가끔 사는 데 중요한 게 뭔가 잊을 만하면 봐줘야 할 글과 사진이라 생각한다. 

그나저나 라카페갤러리, 좋아하는 곳이다. 
가보시면 알아요 ^^ 갈 때마다 사람이 별로 없고 조용하다.
2016년 여름 큰딸 졸업식 마치고 갔던 게 가장 최근이다.
당시 전시명은 '칼데라의 바람'. 아래 사진은 그때 찍은 것이다. 







뼈 아프고 고독할 때 감사하라.
내 사람이 크고 있는 것이니.

When in pain and lonesome,
give thanks.
Within you are great. - P763

키 큰 나무 숲을 지나니 내 키가 커졌다.
깊은 강물을 건너니 내 영혼이 깊어졌다.

As I walked between tall trees, I grew taller.
As I crossed a deep river, my soul grew deeper. - P7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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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10-10 21:0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 이때 전시 2016년 저도 갔었는데 오프닝때 가고 한적 할때 가서 사인도 받고 사진도 찍었습니다 박노해님 사진 글 시 전부 좋죠 ^^

stella.K 2021-10-10 21:12   좋아요 2 | URL
그걸 어떻게 믿죠? 인증사진 보여주세욧!

프레이야 2021-10-10 21:16   좋아요 1 | URL
아흐 그해 팔월에 딸이랑 옆지기랑 갔었네요. 카페에도 전시장에도 아무도 없고 우리가 통째로 앉아서 쉬다 왔네요. 칼데라의 바람은 그보다 전의 어느 해 겨울이었구요. 우리가 만날 확률은 얼마일까요. 뵐 수도 있겠어요^^ 전 시인은 못 만났고 사인도 못 받았구요 ㅎㅎ

프레이야 2021-10-10 21:17   좋아요 2 | URL
스텔라 님 때메 빵터졌어요.

페넬로페 2021-10-10 21:46   좋아요 2 | URL
scott님, 저 방금 카카오스토리 가서 확인하니 저도 2016년 5월 말에 라갤러리 다녀 왔더라고요^^

페넬로페 2021-10-10 21:3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몇년전에 저도 가서 사진보고 카페에서 커피 마셨는데 기억이 새로워요.
박노해시인은 참 열심히 글을 쓰는 것 같아요^^

프레이야 2021-10-11 01:07   좋아요 2 | URL
어머 그러셨군요. ^^
국가보상금도 거부했다는 데 놀랐어요.
요즘은 질본에 저항한다죠. 가장 최근 전시 ‘길‘도 가보고 싶었는데 못 갔네요.

서니데이 2021-10-10 21: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시공간의 사진이 색이 예쁜데요.
언제 서울 오셨나요, 하려고 했더니 그게 2016년이었네요.^^
사진 잘 봤습니다.
프레이야님, 좋은 주말 보내세요.^^

프레이야 2021-10-10 22:05   좋아요 3 | URL
네 ㅎㅎ 어느새 오 년이 후루룩~
갯마을 차차차 보고 굿나잇하세요. 이 드라마 색감이 너무 좋네요.

그레이스 2021-10-13 19: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에 부암동 카페에서 전시할때 가봤습니다
반갑네요

프레이야 2021-10-13 19:16   좋아요 2 | URL
반갑습니다. 그레이스 님 ^^
라카페 많이들 아시네요. 전 멀리서 가서 봐서 감흥이 더했던 거 같아요.^^
 

요즘 이런 분들 많겠지만 나는 안구건조증이 심한 편이다. 노트북이나 폰을 안 보면 확실히 덜하겠지만 그럴 수도 없고, 실은 노트북이나 폰 안 본다고 건조증이 덜하다는 말이 딱히 맞는 것도 아니다. 책 보는 때도 그렇고 햇살도 건조증에 안 좋은 것 같아 밖에 나갈 땐 반드시 선글라스를 써야 하는데, 어제는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그동안 마스크를 쓰고 말을 오래 하면 눈이 더 건조하고 뻑뻑해지는 걸 느꼈는데 나만 예민하게 느끼는 건가 싶어 아무에게도 말 못했다. 어제 도서관의 송이샘이 그런다. 쉬는 시간에 내가 눈을 껌뻑대고 있으니까 눈 건조하냐면서 친구도 마스크 쓴 이후로 눈이 더 건조해져서 너무 힘들다고 한다고. 헉. 그랬구나 맞았어 내 느낌이. 이유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그렇다. 입과 볼 부분도 더 건조하다고 나는 느끼는데 나의 친구는 더 촉촉해지지 왜 건조하냐고... ㅎㅎ 다들 사정이 있는 건데. 친구는 녹내장 진단을 받고 약물로 관리하고 있다. 


엄살쟁이 투덜이 나는 올해 3월에 백내장 수술과 다초점렌즈 삽입 후 안구건조증이 더더 심해진 경우다. 백내장 수술은 4년을 고민하다 더는 미룰 수 없어 하게 되었다. 겁이 났지만 수술은 간단했고 안대를 푼 당일은 완전히 새 세상이어서 놀랐다. 세상이 이렇게나 선명한 색으로 들어오다니... 그동안 뿌연 세상에서 살았다니... 그런데 차츰 이후가 쉽지 않네. 


정기검진을 가면 의사는 눈이 좀 어떠냐고 물었고 나는 여전히 시리고 서걱거리고 뻑뻑하고 자주 눈물이 한가득 어려서 앞이 흐리다고 말했다. 검사를 해보더니 눈물층이 불안정하다고 의사는 말했다. 안구건조증은 눈물이 부족한 것만이 아니란 걸 알았다. 눈물샘이 분비하는 눈물이 쉽게 마르거나 흐르지 않아 안구 표면이 쉽게 손상되는 증상이다. 배수구로 물이 흘러내려가듯 통해야 하는데 눈물이 잘 흘러가지 못해 고이거나 너무 빨리 말라버린다는 말이다. 물이 말라도 고여도 위험하군. 다행히 결막이 손상된 정도는 아니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해서 또 눈물약이나 몇 박스 받아 돌아왔다. 습기를 꾸준히 공급하고 유지하도록 생활 속 지혜를 발휘해야 할 듯. 세수할 때 눈을 뜨고 눈을 씻어주는 것도 좋다고 들었다. 80세에 시력도 좋고 눈건강도 좋은 어느 분이 평생 관리해온 비법 중 하나란다. 레이저요법 6회 받아도 소용없고 그냥 메리골드차, 아로니아액, 결명자진액 이런 거 마시며 버티는 중. 차츰 나아지겠지^^ 나물 삶고 난 냄비에 고개 박고 스팀 흡수하는 것도 일시적이지만 좋다. 


하반기에 성인 시각장애인 대상으로 '테마가 있는 시 감상' 수업을 하고 있는데 어제는 어느새 7차시였다. 

불편한 몸으로도 한 번도 안 빠지고 오시는 분들 만나러 가는 길이 즐겁다. 처음 시를 대하는 분도 있고 평소에 시에 관심이 많은 분도 있는데 새로운 발견이라며 좋아하시니 얼마나 고마운지. 준비한 자료를 드리긴 하지만 내 목소리를 통해 듣는 시로 감상을 하시게 되니 전달에 신경을 쓰게 된다. 어제는 '동물, 함께하는 생명'을 테마로 여러 시를 소개하고 들려드렸는데 의외로 이런 재미난 시를 발견했다. 




낙타라도 될까요  


                                모현숙



의사 선생님, 눈이 너무 뻑뻑해요

 

낙타처럼 긴 속눈썹이 없는 환자분,

안구건조증이 심각하네요

건조해질 대로 건조해진 그리움이

눈 속에서 모래처럼 굴러다니네요

눈이 온통 사막이네요

 

의사 선생님, 눈이 뻑뻑해서 잘 보이지 않아요

 

그리움이 굳어서 노안이 되신 환자분,

샅샅이 모두 다 보려고 하지 말아요

뻑뻑한 그리움엔 인공눈물을 처방할게요

인공눈물 넣고 3일 후에 다시 나오세요

 

의사 선생님, 사막에서 엄청 울다가 다시 올게요

낙타를 타고 오든지

그리움을 안고 오든지

새파랗게 젊어져 오든지

 

 

 - 출처 : 詩공간 동인지 <가을전어와 춤추다> 중에서 (북랜드, 2020년)

 



사막에서 모래바람을 맞으며 가까이서 보았던 낙타는 정말이지 눈이 크고 순하고 속눈썹이 길었다. 

내 속눈썹은 오늘도 내 눈을 찌르는데, 다자이 오사무를 엄살계의 대부라고 부르며 엄살쟁이는 엄살쟁이를 한눈에 알아보는 법이라고 귀여운 멘트를 날리는 박 시인은 속눈썹 위에 '당신'이라는 현란하게 흘러가는 생을 올려놓고 긴 속눈썹처럼 긴 여운으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유희한다. 파주에서 살며 일주일에 세 번 발레를 배우고 있다는 1980년 생 시인.



 












2007년 1월 나온 박연준 시인의 첫 시집 중,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



내 나쁜 몸이 당신을 기억해

온몸이 그릇이 되어 찰랑대는 시간을 담고

껍데기로 앉아서 당신을 그리다가 

조그만 부리로 껍질을 깨다가

나는 정오가 되면 노랗게 부화하지

나는 라벤더를 입에 물고 눈을 감아

감은 눈 속으로 현란하게 흘러가는 당신을

낚아! 채서!

내 길다란 속눈썹 위에 당신을 올려놓고 싶어

내가 깜박이면, 깜박이는 순간 당신은

나락으로 떨어지겠지?

내 이름을 길게 부르며 작아지겠지?

티끌만큼 당신이 작게 보이는 순간에도

내 이름은 긴 여운을 남기며

싱싱하게 파닥일 거야


나는 라벤더를 입에 물고

내 눈은 깜빡깜빡 당신을 부르고

내 길다란 속눈썹 위에는

당신의 발자국이 찍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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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10-09 15: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눈! 스맛폰으로 인해 ‘눈‘이 건강 상태가 가장 큰 문제 인것 같습니다. 하루에 단 몇 분이라도 ‘멍!‘때려야 하는데 가을, 읽고 싶은책, 쌓여가는 책탑에 눈동자는 쉴틈이 ㅎㅎ 프레이야님 주말 행복한 시간, 눈 휴식의 시간을~*

프레이야 2021-10-09 15:30   좋아요 2 | URL
그러게요. 눈감아 줘야 하는데 그러다 봐야할 것들은 언제 다 본대요. 폰이나 컴, 영상과 책과 문자들. 눈감고 가만히 멍 요거 참 어려운 거 같아요. 눈은 특히 안 좋아지기 시작하면 복구가 어려우니 미리 잘 관리해 예방하는 게 좋을 듯요. 눈을 안 깜박이고 오래 쳐다보는 게 눈을 마르게 한다죠. 책 볼 때도 전 자주 안 깜박이는 거 같아요. 자주 깜박이며 보세요, 스캇 님^^

서니데이 2021-10-09 17: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마스크 쓰면서 얼굴이 더 건조한 느낌인데요. 저만 그런 건 아니었네요. 인공눈물을 손이 건조할 때 핸드크림 바르는 것처럼 쓰는 거라고 하시더라고요. 자주 써도 병원처방해주시는 것이라면 괜찮은 것 같아요. 프레이야님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프레이야 2021-10-09 17:59   좋아요 3 | URL
눈물생성약이랑 인공눈물약이랑 바쁘네요. 얼굴도 그렇지만 눈이 왜 더더 건조해질까요. 어두워지려고 하늘이 흐려집니다. 고요하고 평안한 저녁이에요^^

stella.K 2021-10-09 18: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남의 얘기 같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언제 이렇게 나이를 먹어서...ㅠㅠ
백내장은 시간 문제라던데.
저도 안경 쓴지가 5년쯤 되는 것 같습니다. 독서용 안경요. 이게 안 쓰는 것 보다 난데
쓰면 몇 시간 뒤엔 눈이 뻑뻑하더군요.
몸이 천냥이면 눈이 9백냥이라던데. 일을 안 할 수도 없고.ㅠ
모현숙의 시는 프레이야님을 정말 잘 대변해주는군요.
모쪼록 눈을 사랑해 주세요. 흐흑~

프레이야 2021-10-09 23:10   좋아요 2 | URL
반가워요 스텔라 님. 제가 그동안 눈도 아프고 해서 많이 적조했지요. 편집교정 임무까지 더해 더 그런 거 같아요. 안구건조증도 다 노화의 일종이라죠. 아흐.
저도 수술했어도 책 볼 땐 돋보기, 영상이나 모니터 볼 땐 블루라이트 차단 안경 그래도 불편해서 안 쓸 때가 많답니다. 진짜 진짜 소중한 눈 많이 사랑해 주자구요 ^^

책읽는나무 2021-10-09 21: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의 소중한 눈!!!!!
관리 잘 해주세요^^
제친구중엔 학창시절부터 찬바람만 맞음 눈물 흘리듯 하던 친구가 있었는데 몇 년 전 눈물샘이 막혀 있었다고....시술하니 눈에 물이 안고여 좋다더라구요.걔는 눈에 물이 흘러 그걸 닦느라고 손수건을 늘 들고 다녔던 건데...전 그 친구가 참 여성스러워서 그런 줄 몇 십 년이나 지나 진실을? 알게 된 후...좀 미안터라구요.
본인만이 느끼는 불편함은 참 난감한 일이지 싶어요...저는 책을 오래 읽으면 눈도 아프지만 머리가 어지러워서 안경 노안 도수를 또 교정하러 가야 하나?고민중이네요.이러다 시력이 어디까지 내려갈려는지??
암튼 모두들 눈 건강 잘 지켜내어 이곳에서 오래오래 보았음 좋겠습니다.^^

프레이야 2021-10-09 23:09   좋아요 1 | URL
눈 아프면 머리도 아프더라구요. 안경은 자기 눈에 맞아야 하니 잘 맞추어야겠죠. 눈 검사 자주 하며 돌보세요. 그 친구 저랑도 비슷하고 울엄마하고도 같네요. 모두 눈의 노화 증상이라는데 안 그런 사람도 있고. 누구든 약한 부분이 다르니까 그런가 봐요. 보이는 게 다가 아니란 건 진짜 사람들 말 못하는 고충이 다 있으니까요. 눈 관리 잘 할게요. 그래야 시각장애인 위한 낭독봉사도 계속 하는데 말이죠. ^^

mini74 2021-10-09 22: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남일같지 않아요 ㅠㅠ 저는 예전 렌즈삽입술~ 각막 얇아서 렌즈삽입만 가능해서 ㅠㅠ~ 했는데 이제 노안이 와서 ㅠㅠ 나물 삶고 난 냄비에 고개 박는다는거에 웃었어요. 저도 그러거든요. 밥 다 되면 좀 쐬기도 하고요 ㅎㅎ

프레이야 2021-10-09 22:07   좋아요 1 | URL
히히 저두요. 밥 새로 해서 밭솥 뚜껑 열 때마다 훅 수증기 흡입시켜요. 눈이랑 얼굴이랑 두 마리 토끼요. 우리 몸에 암튼 이물질이 들어온 거니 편하지 않은가 봐요. 적응기간이 더 필요하겠죠. 노안 에구 ㅠ

바람돌이 2021-10-10 0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프레이야님 우리 오랫만이죠? 너무 너무 반가워요. 오랫만에 프레이야님이 알려주는 시를 보는 것도 좋구요. ^^
눈이 점점 기능이 떨어지는건 정말 공감 백퍼입니다. 오래 오래 책 보려면 눈 관리 잘해야 하는데 말이죠. ^^

프레이야 2021-10-10 08:47   좋아요 0 | URL
반가워요 바람돌이님 ^^
근데 시간이 새벽 세 시 넘어. 토요일이라 그러신 거죠. 밤잠 안 자면 이제 못 버티겠더라구요. 되도록이면 안 그러려고 하는데 저도 한두 시까지 어슬렁거리는 습관이 있어요. 12시 전엔 자야지 하면서도 에구.
오랜 둥지가 참 좋아요. 우리의 역사가 고스란히 있는 곳. 눈 잘 보살피며 오래 책 읽고 글 쓰고 그러자구요. 진짜로 건강이 다인거 같아요.
가을을 느끼며 ^^

페크pek0501 2021-10-10 12: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안구건조증이 있어서 책상에 가습기가 있을 정도인데, 저보다 더 심한 분이 계셨군요.
올해 3월에 백내장 수술과 다초점렌즈 삽입... 몰랐습니다. 저는 안구건조증 때문에 책 보는 중간 중간에 딴 일을 합니다.
책 보고 화초에 물 주고 책 보고 뉴스 보고 이런 식. 그런데 눈 컨디션이 좋아 서너 시간 책을 읽어도 괜찮은 날이 있어요.
어제가 그랬어요. 이런 날이 계 탄 날이죠.
저만의 비법은 세수를 할 때마다 여러 번 뜨거운 물을 손으로 받아 감은 눈 위로 대는 거예요. 의사한테 말했더니 좋은 방법이라고 해요. 원래는 뜨거운 물수건을 대고 있는 게 좋다는 데 그게 귀찮아서 뜨거운 물을 끼얹는 거죠. 훨씬 나은 느낌이에요.
눈 건조하다고 느낄 때마다 이 방법을 권합니다. ^^

프레이야 2021-10-10 18:02   좋아요 1 | URL
진짜 계 타셨네요. 저도, 원래는 세수를 찬물로 마무리하는데 그게 건조한 눈에는 안 좋대서 더운물로 눈에 그렇게 해요. 그래도 마무리는 찬물로 해야 정신 나고 탄력도 유지하는 건데ㅎㅎ 서너 시간 책 보는 거 수술 후 할 수가 없어요 ㅠ 낭독녹음 오래 하면서 눈이 많이 나빠진 거 같아요. 녹음실 한번 앉으면 너댓 시간 안 일어났거든요. 눈도 최대한 안 깜박거리고 글자에 눈 꽂고 ㅠ 요샌 영화 한 편 보고 나도 눈이 어찌 아픈지. 책 보는 중간에 저도 자주 접어요. 늙어가나 봅니다. ㅎㅎ 주저리주저리 이런 말 그만해야 하는데 말이죠. 화창한 일요일이네요. ^^
 












몇 년 전 알라딘이 아니라 이곳 도시의 바다를 낀 서점 'Eternal Journey'에서 골라 야곰야곰 먹던 책이다.  무민과 토베에 대한 거의 모든 걸 담아낸 멋진 책이라 단숨에 끌렸다.

나는 실제 인물을 다룬 영화를 좋아하는 편이다. 특히 관심 가는 예술가의 삶과 영혼을 다룬 영화에는 무조건 끌린다. 울타리를 넘어 새로움을 시도하고 뚜렷한 족적을 남긴 위대한 인간에 대한 탐구는 이리저리 편집되어 복제되기에 한 인물의 총체를 온전히 들여다보기엔 제한적이다. 누군가의 삶을 한마디로 재단하는 것은 무례한 일일 테지만 어느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한 인물의 정수를 오히려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는 장점이 된다. 위대한 인간의 박제된 삶과 시대를 오늘날 생생하게 살려보려는 시도는 쉽지 않기에 어떻게 그려냈을까, 어떤 면은 베일을 벗기고 어떤 면은 여전히 베일에 가렸을까, 즉 감독의 개성 있는 관점이 궁금해지는 것이다. 섣부른 평가나 판단이 아니라 섬세하게 이해하려는 노력을 바탕으로, 한 사람에 대한 경외에 동참하게 된다.

 




토베 얀손Tove(자이다 베리로트 2020)


 

 2021826일 개최한 제23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개막작이다. 감독과 각본가, 촬영감독을 비롯한 대부분의 스태프가 여성이라는 점은 영화의 시선이 어떨지 짐작되는 대목이다. ‘영화의 전당에서 상영하기에 예매를 해 두었는데 그날 시아버님이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았다. 이미 의식을 잃고 호흡기에 연명해 이틀을 중환자실에서 사투하다 영이별하셨다. 인연의 가닿지 못한 거리와 여전한 일상의 배경 사이에서 멍하니 추석 연휴를 보내고 한 사람의 생에 대한 숱한 생각에서 채 빠져나오지 못한 날, 미루어 두었던 영화 두 편을 연이어 보러 갔다

 

<토베 얀손>은  무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놓칠 수 없는 영화다. 피터 래빗 다음으로 내가 좋아하는 무민의 원화전이 핀란드 독립 100주년 기념으로 대구에서 열리고 있던 3년 전 새봄, 한 시간가량이면 도착하는 기차에 올랐다. 전시장은 허술하고 짜임새가 덜했지만 1945무민 가족과 대홍수를 시작으로 1952년 출판되어 당시 그림책 시장에 신선한 반향을 일으킨 첫 번째 그림책 무민, 밈블 그리고 미이에 관한 이야기부터 1970년 무민 시리즈 중 마지막 소설책으로 출판된 늦가을 무민 골짜기까지 토베가 창조한 특별한 세계를 맛 볼 수 있었다. 무민은 오동통한 하얀 몸에 호기심이 강하고 다정하고 친구들 특히 단짝 스너프킨과 함께 여행하며 모험하기를 좋아한다.


싱크로율 100%의 배우 알마 포위스티는 이 영화에서도 중요하게 재현된 무민 연극 초연에 참여한 조부모를 가족으로 둔 배우다. 무민 연극의 각본 제의를 연인 비비카에게 받고 무대에 올린 토베는 이후에도 그림뿐만 아니라 소설가, 극작가, 일러스트레이터, 무대연출가 등 다양한 예술 활동을 한다. 십 대에 탄생시킨 무민트롤의 평생 이어지는 기나긴 서사도 그런 역량에서 가능했으리라. 따스한 색감, 경쾌한 춤과 음악이 이어지는 이 영화는 덜 알려진 토베의 내적갈등과 분방한 사생활, 무민이라는 개성 넘치는 캐릭터의 탄생과 진화를 전기영화의 무거움을 벗고 그런대로 잘 그려낸다.


토베 얀손이라는 다재다능한 예술가의 불꽃 같은 긴 삶 중에서도 정점을 이룬 1944년에서 1962년까지의 시간에 집중한다. 무민 가족과 주변 인물을 통해 토베의 성적 정치적 정체성과 예술관이 격변과 성장을 이루던 시기였다. 어린이를 위한 무민 이야기를 그만두고 다른 작업에 몰두한 인생 후반의 이야기는 ‘...행복하게 살았다로 영화는 과감히 생략했다. 실제로 토베는 8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 스스로 자신의 삶을 두고 비록 고달프긴 했어도 흥미진진하고 파란만장한 삶이었고 아주 행복했다고, 살면서 가장 중시한 건 일과 사랑이었노라고 회상했다.


1944년 핀란드는 제2차 세계대전의 전황에 뒤늦게 휘말려 소련과 독일 사이에서 국가적으로도 혼란스러웠던 시기였다. 1914년생 토베가 서른 살이던 해, 이미 국민 예술가로 추앙받던 조각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화가에 대한 고정관념과 결핍된 부성애로 박탈감에 몸서리치던 토베는 정신적 도피처 정도로 무민을 그렸지만 애정은 남달랐다. 겁이 나면 무민마마를 찾기도 하지만 모험하기를 멈추지 않는 무민을 자신의 또 다른 자아 정도로 여겼으니까. 1945년 무민의 매력을 알아본 연극연출가이지 시장의 딸 비비카의 도움으로 무민이 세상에 공개된다. 두 사람은 각자 토프슬란, 비프슬란이 되어 사랑의 은어를 주고받으며 명랑한 시절을 보내고 격정과 이별, 고뇌와 성장이 토베의 삶을 밀고 나아간다.


<토베>는 자유영혼을 지닌 예술가의 고민과 솔직한 욕망, 타인의 기준에 굴하지 않고 욕망을 실현하고 성취해 나가는 과정을 활력 있고 섬세하게 조명한 영화다. 삶은 모험이라고 선언한 토베는 비비카에게 이별 통고를 받고 후에 무민 시리즈에 '투티키'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다른 동성 연인 툴리키 피에텔레와 거의 반세기 동안 행복하게 살았다. 색안경 낀 세상은 토베의 그런 흔적은 지워 버리고 혼자 외롭게 살다간 사람으로 기록하기도 했다.


토베의 생기 넘치는 내면을 대변하듯 영화는 실제 토베와 배우 토베의 춤을 살려내었다. 술과 파티, 댄스가 자주 등장하고 토베가 그랬듯 사람들은 어떤세계를 바랐다. 어두운 현실 속에서도 밝고 씩씩하게 모험과 도전을 이어가는 무민 가족의 세계에 토베는 창조자이자 거주자로 스스로 몸담았고 사람들의 바람에도 부합하였다. 억압적 존재이기만 했던 아버지가 딸이 구현한 무민 세계와 성취들을 남몰래 스크랩한 것도 그런 마음이 담긴 응원이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죽은 후 그 스크랩 노트를 보고 오열하는 토베를 멀리서 잡은 너른 시선도 기억에 남는다

 

 ps:  그날 본 다른 영화는 <아임 유어 맨>이었다. 

      알고리즘 행복의 조건에 대해 생각을 던져 주는 흥미로운 영화였다.

      모든 걸 이해하지만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는 '맨'을 통해 주인공 박물학자 여성은 행복이란 

      완벽하게 셋팅된 조건에서 온다기보다 갈망하며 찾아가는 과정에 그 열쇠가 있다는 걸 느끼게 된다.

      하지만 단정하긴 이르고 "아임 유어 우먼"으로서 동반자와 살게된 어떤 외로웠던 남자는 아주 

      행복해 하고 만족한 삶을 살고 있다. 얼마나 오래 가는지까지는 영화가 보여주지 않아 장담할 수

      없지만. 가보았던 독일 페르가몬박물관에서의 장면은 반갑기도 놀라기도^^ 


토베는 새로운 사랑을 풍성하고 따듯한 경험으로 묘사했다. 새로운 풍경을 찾아 떠나는, 믿을 수 없는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여행 같았다고 했다. "속속들이 안다고 자신했던 자기 옛집에서 굉장한 새로운 방을 발견하는 일 같아. 그리고 거기에 그냥 들어가는 거야, 그 방을 여태 몰랐던 걸 신기해하면서." - P110

토베는 자신이 쓴 책에 어떠한 교육적 의도도 없다고 주저 없이 밝혔다. "재미있으라고 쓴 거에요. 가르치려고가 아니라요." 자기에게는 철학도 정치 성향도 없다고 했다. 그저 자신을 매료시킨 것이나 무섭게 만들었던 것에 대해 쓰고 싶었고, 그 모든 사건이 ‘이를테면 무해한 혼란스러움, 그리고 자기들을 둘러싼 세계를 받아들이는, 또 서로 굉장히 사이가 좋다는 걸 가장 큰 특징으로 갖는 한 가족을 중심으로 벌어지도록 설정했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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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10-07 16:5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춤이 나온단 말이죠?^^ 토베 얀손도 좋아하고 춤도 좋아하니, 꼭 봐야겠는데요^ ^

프레이야 2021-10-07 18:40   좋아요 5 | URL
네. 과감한 장면도 나오고 전체적으로 밝고 유쾌해요. 자기기 원하는 삶을 살다간 점이 좋아보였어요. 댄스도 귀여워요 토베. ^^

mini74 2021-10-07 18:4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무민 어머님 이야기인가요. 아 저도 급 끌립니다 ~

프레이야 2021-10-07 19:42   좋아요 5 | URL
무민을 탄생시킨 전천후 예술가 토베 얀손의 이야기에요. 전 생애를 모두 보여주진 않지만 무민이 유명해지기까지의 시기에 초점 두고 흥미롭게 보여줘요 ^^ 무민 엄니 이야기 맞네요.

행복한책읽기 2021-10-07 22:4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지두 완전 끌립니다. 찜찜^^

프레이야 2021-10-07 22:43   좋아요 4 | URL
넵! 보시고 이야기 올려 주세요 ^^

scott 2021-10-08 21: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민 사릉하는 저 🖐!

책과 영화 모두 찜!👆

프레이야님 주말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 ^^

프레이야 2021-10-08 21:49   좋아요 2 | URL
전 무민 스릉요 ㅎㅎ
즐겁고 편안한 주말 보내세요.

서니데이 2021-10-08 23: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민은 캐릭터 디자인이 예쁜 것 같아요.
요즘 부산은 영화제 한다고 들었는데, 여기 영화는 다른 영화제네요.
프레이야님, 즐거운 주말과 기분 좋은 금요일 되세요.^^

프레이야 2021-10-08 23:14   좋아요 1 | URL
네. 26회인데 코로나로 열기가 덜하다가 올해는 다시 뜨겁네요. 뉴스만 보고 있고 아직 현장엔 못 가봤어요. 올해엔 예매해서 관람도 못 할 거 같아요. 요즘 바쁜일들이 몰려 있는 상황이라 마음의 여유가 덜하지만 마음은 그쪽에 가있어요. ^^ 무민이랑 피터래빗 완전 좋아합니다.

희선 2021-10-08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무민 잘 몰라요 무민이 있는 수첩을 쓰기는 해요 예전에 그게 무민인지 모르고 샀던 것 같아요 나중에 그게 무민이구나 했어요 무민뿐 아니라 토베 얀손도 잘 몰랐습니다 그나마 피터 래빗은 조금 아는군요

세상이 토베 얀손을 힘들게 했을 것 같기도 한데, 나름대로 자유롭게 즐겁게 살았겠지요 그랬기를 바랍니다


희선

프레이야 2021-10-09 11:19   좋아요 1 | URL
희선 님 바람대로 그렇게 살다 간 인물로 보여요. 그게 참 부러워보였답니다.
무민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건 서른 즈음이었지만
열네 살부터 무민을 창조하고 만들어갔어요. 억압적인 아버지 밑에서 탈출구였기도 하여
안쓰러웠답니다. 뭐든 좋은 계기를 만나야 빛을 발하게 되는 것 같아요.
편안한 주말 보내세요^^

등대지기 2022-07-16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넘 뒷북인가요? 저 요즘 이 책 읽고 있어요ㅎㅎ
읽는 내내 가슴이 찡할 거 같은 예감이에요.
아버지랑 관계가 짠하더라구요.

글 잘 읽고갑니다 :)

프레이야 2022-07-17 09:19   좋아요 1 | URL
무민 좋아하시면 토베도 무척 좋아지실 거에요. 소설까지. 삶이 대단한 여성이고요. 아버지와 딸의 관계 참 그래요. ㅠ
반가워요 등대지기 님 ^^
 

아버지는 올해 구순이고 천식이 있지만 총기와 다른 건강은 괜찮고

시아버님은 82세를 일기로 얼마전 추석연휴를 며칠 앞두고 세상을 뜨셨다. 

남은 날이 그리 많지는 않다는 걸 어른들을 뵈며 다시 생각하게 된다. 

노인으로 사는 삶과 그 삶에서 떠나버린 노인의 마지막 얼굴은 모두 

삶이 소중하다는 걸 잊을 만하면 깨우쳐 준다. 

92세의 나이로 2년 전 영면하신 고교친구의 아버지이자 원로작가였던 선생님을 추모하며 

평생 교육자로서 수필가로서 순한 삶을 살다가신 선생님의 세계를 발표했던 글이다. 

잘 살아가는 삶, 잘 죽기 위한 삶에 대해 부쩍 생각해 보게 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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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회 수필낭송회 / 이병수 수필가 작품세계 _ 2019.06.07. 금 _ 배혜경 발표원고

 

 

 

한 편의 수필이 완결되는 순간


  

 

수필은 어느 문학장르에서보다 작가의 가치관과 인생관이 잘 드러나는 글쓰기 방식이다. 작가의 삶과 세상과 인간을 대하는 태도도 여실히 드러낸다. 사람 따로 삶 따로 글 따로인 경우가 허다하지만, 글이 사람을 속일 수 없고 사람이 글을 속일 수도 없다는 쪽에 믿음을 두고 싶다. 그러한 사실이 증명되는 것은 또 다른 일이라 삶을 이어나가는 중에는 정확히 말할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삶은 도덕적으로 올바르기를 본능적으로 채찍질하지만 방심의 순간에 곳곳에 도사린 유혹이 손을 뻗친다. 열심과 욕심의 경계가 모호하고 겸손과 교만의 경계도 교활하게 눈웃음친다. 그러니 수많은 수필가가 수필을 쓰며 숨을 쉬고 있는 중에는 결코 완결될 수 없는 글이 수필이 아닐까.


현봉 선생의 글을 다시 읽으며 시간을 거꾸로 돌려본다.


올해 2월 초 장례식장에서 뵌 영정 이전, 1월에 병원에서 정갈하게 환자복을 입고 계신 모습을 뵈었다. 그보다 한 해 전 2018년에는 望百기념문집이 내게 왔다. 증정이라는 도장을 꽝 찍어서 보내오신 그 책에는 가족사진과 여러 행사에서 찍은 사진들이 실려 한 사람의 역사를 축약해 주었다. 특히 오래된 흑백사진 속 청년 이병수의 형형한 눈빛과 맑은 얼굴이 애잔해 한참 들여다보았다. 20178월에 친구는 아버지가 망백을 앞두고 책을 내고 싶어한다고 전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장외손녀(친구의 맏딸)의 결혼식에서 선생님을 뵈었는데 온화하고 다감하게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늘 그렇듯 깊은 감명을 받았다. 기뻐하시던 얼굴이 어제 뵌 듯 생각난다. 일찍이 20088월 통영에서 열린 제1회 연암수필문학상 시상식에 선생님은 사모님과 동행하셨다. 그때는 여고 3년을 한반에서 공부한 친구의 아버지인 줄 몰랐으니 모든 것은 나중에 드러난다는 걸 그때는 알지 못했다.


이병수 수필가의 수필은 미사여구나 과시, 허방을 짚는 감상주의를 경계한다. 이는 그의 삶이 그러하듯 성실하게 주어진 임무를 다하고 깨어있는 정신으로 하루하루를 성찰하며 살아가는 인생길과 나란하다. 겸허하게 자신을 돌아보고 매사 베풀고 살아가려는 마음자세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최근작 <인생 하산길>나의 산행 이력을 회고하면 40년이 넘는다.”로 첫 문장을 시작해 나의 인생 하산길은 무언가를 베풀면서 올바른 사회발전에 한 줌의 부엽토가 되고 마지막 인생에 향기 나는 여운을 남기는 과정이고 싶다.”로 종결문을 짓는다.


<내 이름에 서린 사연>(20036)에서는 네 가지 이름 아명(증도), 호적명(병수), (화열), 아호(현봉) -을 들어 자신에게 주어진 이름대로 인생을 살아내려는 정성을 피력한다. 특히 가장 마음에 들어 하신 和烈을 두고 이렇게 쓴다. “밖으로는 부드럽고 안으로는 매섭게 대하라는 처세훈을 암시하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아버지의 숨은 소망이 DNA로 전달되었음인지 나는 평소에 남에게는 될수록 부드럽게 하고 나에게는 엄격하게 대한다는 생활방식을 나름대로 실천하려 노력하고 있다.”


이런 태도는 단수필 <잔디와 클로버>에서도 격앙된 거센 말 한마디는 평생 원수를 낳고 부드러운 말 한마디는 천냥 빚도 소멸시켜 준다.”고 쓰며 자신을 다잡는다. 40대 초에 성전암에서 삼천 배를 드리고 성철스님에게 얻은 법명 현봉을 정년퇴임 동기회에서 얼떨결에 아호로 쓰시기 시작하고는 큰 봉우리라는 뜻도 담긴 이름에 부끄러워하였다. 그리고 인생의 황혼기에 서서 이름에 얼마나 부응하였나 되돌아보기를 반복하였다.


이병수 수필가는 60대부터 여생을 깊이 생각하고 정갈하게 죽음을 준비하였다. 웰 다잉Well-dying의 길은 웰빙Well-being이 아니라 웰 리빙Well-living에 있다. 평균수명이 연장되었지만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인간의 건강과 수명은 생활자세와 마음자세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매사 감사하는 마음, 사랑을 나누고 베푸는 삶에서 삶의 질이 달라진다.


최근작 <나의 ‘92세 생존수명론을 되돌아보며>에서 선생님은 나는 이제 정말 살 만큼 살았다는 만족감을 느끼고 있으니 염라대왕에게 감사하다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고 밝혔다. 가야 할 때를 예측하고 받아들이는 유순한 마음자리에 존경심이 인다. 현자의 자세가 아닐까. 일찍이 1991년에 쓰신 <고사목을 바라보면서>에서는 이제 인생의 정리기에 접어든 나는, 여기에서 우리 사람도 저 고사목처럼 자연의 섭리를 좇아 아무런 불평을 하지 아니하며 마지막 순간까지 욕심을 부리지 아니하고, 주어진 분수대로 성실히 살다가 조용히 사라져갈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라고 썼다.


현봉 선생은 1946115일 이후 199222940여 년의 교직생활을 퇴임한 후 수필가로 등단하여 이모작 삶이 아름답다고 여겼다. 2009년 같은 제목의 글에서 하잘것없는 쑥부쟁이 한 송이도 폭염과 풍우를 견딘 끝에 꽃을 피우고 맺듯, 우리 인간도 청장년 시절의 일모작 인생도 값지지만 그 이후 이모작의 삶에서 보다 알찬 결실로 마무리할 수 있는 것이니 이모작의 삶이 더 아름다울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로 맺으며 글쓰기의 열망과 인생 후반기 삶의 열정을 피력했다. 그러면서도 늘 욕심이 아닐까 자신을 절제하고 현실적으로 돌아보며 과하지 않은 삶의 양식으로 후배들의 귀감이 되었다.


선생이 글을 쓰는 시간을 얼마나 행복해 했는지는 <내가 글을 쓰는 시간>에 잘 드러난다. 2010년의 이 글에는 내가 글을 쓰는 시간은 마음을 비우고 나를 성찰하고 참회하는 시간이다. 내가 어디로 어떻게 걸어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상념을 가다듬는 시간이니 경건한 시간이요, 자신과 소리없이 싸우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어쩌면 나에게 있어 가장 진실한 시간이요, 값진 시간이기도 하다. (중략) 특히 수필은 몸소 자신의 내면세계를 드러내 보이는 욕구의 발로로 쓰는 것이며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문자로 표현해 독자에게 공감을 주고자 하는 데 목적이 있으니 즐거움과 보람을 함께 누리는 시간이다.”라고 썼다. 건망증으로 정신이 종종 흐려지는 자신을 인지하며 <문인의 절필에 대하여>에서 문인의 절필은 계획적인 게 아니라 자연발생적으로 하게 되니 지금 당장 아예 절필을 택하기보다 원고의 양을 조금씩 줄이고자 했다. 선생은 자기 체험의 아름다운 서정과 지성을 조화롭게 표현하는 문학이 수필이라고 생각했고 그런 점에서 당신의 글이 독자에게 누가 되지 않기를 바랐다.


단수필 <노래방 갑시다>에서 사명감적 인생관에서 낭만적 인생관으로 전환한 노년의 자신을 짚으며 이마저도 노탐이 아닌가 스스로 생각해 보는 겸손함을 잃지 않던 현봉 선생, 3대째 훈장이었지만 고리타분하게 가르치려 들지 않고 오로지 자신에게만 회초리를 드신 선생은 이제 시간을 거꾸로 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 고향 산청 생비량면의 느티나무처럼 넉넉한 인품과 순수한 마음으로 아름다운 마무리를 실천한 이병수 선생님의 수필은 비로소 완결되었다. 살아오신 삶의 궤적이 그것을 빛나게 완결시킨 것이다.

 

나도 이제 공직생활에서 물러나 희수도 팔순도 지나고 이제 백수를 바라보면서 의젓하고 포용력 있고 베풀면서 살아가는 느티나무처럼 살다 가기를 희구하면서 여생을 마무리했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을 가져본다.” - 이병수, <느티나무처럼> 20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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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1-10-07 02:3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나이를 먹으면 아프기도 하고 그렇다는데, 그럴 때 잘 살아갈지 모르겠네요 얼마전에 이런 생각을 했어요 아프지 않고 살다가 어느 날 죽으면 좋겠다고... 아픈 사람을 보다보니 그런 생각을 했나 봅니다 시아버님이 추석 연휴를 앞두고 세상을 떠나셨군요 시아버님 명복을 빕니다 이런 인사 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현봉 선생은 글을 쓰고 자기 마음을 닦으셨네요 살았을 때 잘 살면 죽었을 때 좋은 기억으로 남기도 하겠지요 현봉 선생은 그렇게 살다 가신 듯합니다 잘 죽으려면 잘 살아야겠습니다

프레이야 님 오늘 좋은 하루 보내세요


희선

프레이야 2021-10-07 11:08   좋아요 3 | URL
따뜻한 말씀, 감사합니다 희선 님.

막시무스 2021-10-07 08: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삼가 고인의 명복을 기원드립니다!

프레이야 2021-10-07 11:08   좋아요 2 | URL
막시무스 님 감사합니다.

mini74 2021-10-07 09: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마음의 자세 삶의 자세, 다잡아 봅니다. 삼가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프레이야님 좋은 글 올려주셔서 고맙습니다.

프레이야 2021-10-07 11:10   좋아요 2 | URL
네, 자주 잊고 살다가 이렇게라도 짚고 가네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