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이곳 도시는 빗방울이 떨어지다 말다 잔뜩 흐리고 바람은 선선했다. 가까운 송정 바닷가 뷰맛집 식당에서 친구가 한 턱을 내기로 하여 셋이 모여 앉았다. 고만고만 같이 자랐던 조그맣던 애들이 어느새 자라 좋은 곳에 취업도 하고 각자 자기 자리에서 열심인 청년이 되었다. 고마운 것들. 영화의 전당 분위기는 다른 날 가서 보기로 하고 돌아왔다. 할 것들이 많다. 사진은 투썸에서 내려다본 송정바다 서퍼들, 까만 점들 보이나요. 좋은 파도를 탈 줄 아는 사람들 보는 것으로 대리만족하며 같이 나이 들어가는 여자끼리 수다 떨고 오니 착한 고양이 모꾸가 야옹하며 나오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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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맏아들은 요즘 툭하면 울컥하고 멍하니 그런다. 맛있는 걸 먹다가도 드라마를 보다가도. 얼마전 '인간실격'에 장례식장이 나오길래 보다가 앗차싶어 얼른 채널을 돌렸다. 오늘 아침에는 주방에서 커피콩을 그라인딩하며 훌쩍이는 게 아니라 엉엉 울고 있었다. 놀라서 왜 그러냐고 묻다가 앗차 그렇구나 싶어 모르는 척했지만 나도 눈시울이 붉어지고 말았다. 그 마음 안다. 시간이 걸리는 일일 거다.
아래 글은 엊그제 모 계간지에 '선글라스'라는 제목으로 보낸 글이다. 마침 테마가 '아버지'였고 더 퇴고할 것도 없이 마음에 있는 그대로 단숨에 써서 보내었다. 자꾸 들여다보며 다듬다보면 자가검열에 걸릴까 봐... 글은 참 중요한 것 같다. 당신은 이메일 서랍 속 다섯 개의 편지로 영원히 남아 계신다. 당시 몇 가지 이유로 답장을 드리지 않았고 지금에야 이 글로 답장을 대신한다. 별난 성미로 자식 마음 아프게 해서 미안하다는 문장 하나만 내 마음에 간직하고 나머지는 다 떠나보냈다. 편히 영면하시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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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날이 지나고 하루가 또 저물어간다. 베란다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땅과 하늘 사이 똑같은 성냥갑 속 11층에 부양(浮揚)한 나를 발견한다. 지상에 가로등은 누가 점등하는 걸까. 한 사람의 존재가 하늘 아래 실제로 있다는 생각과 없다는 생각은 실상 큰 차이가 있다는 걸 영이별을 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사실 아버님과의 이별은 8년 전에 하였다. 그날 친정 부모님을 모욕하는 실수까지는 하시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테지만 이미 주워 담을 수 없는 말이었고, 나는 견딜 수 없는 충격에 마음문을 과감히 닫아버리고 도망했다.
추석 연휴를 앞두고 위독하다는 전갈이 왔다. “아버님, 저 왔습니다.” 중환자실에서 혼미한 의식에 매달려 호흡기에 연명하고 계셨지만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수개월 동안 남편과 어머님이 목욕과 수발을 맡았고 결국 요양병원에 모신 지 얼마 안 된 시점이라 너무 놀랐다. 내가 알던 아버님의 몸피가 아니었고 얼굴이 아니었다. 그렇게 나는 ‘언젠가는’ 이라며 유예한 긴 시간을 돌아왔다.
아버님의 건강에 적신호가 보인다는 소식이 들린 건 몇 년 되었다. 길을 가다가도 집에서도 잘 넘어져 정형외과를 찾는 일이 잦고 수면을 하지 못하고 감정이 불안정하다고 들었다. 음주에 불면증으로 수면제와 신경안정제를 복용하신 지 오래라 그런 부작용인가 싶었다. 어느 날부터는 아버지와 대화가 잘 안 된다고 남편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파킨슨이 육신을 야금야금 점령하고 있었다는 걸 알지 못했다. 병원을 모시고 가 보았지만 약을 처방해 줄 뿐, 어디서도 병명을 잡아내지 못하고 수년을 보내며 최근에 병세가 급격하게 진행되어 버린 것이다.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마지막 고갯길을 넘고 계시는 동안, 맏아들인 남편은 병원 복도에서 영정으로 모실 사진을 골랐다. 선글라스를 쓴 사진을 굳이 보여주길래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남편은 두 해 전 여든 생신 때 직접 찍어드린 사진이 마음에 당기는 눈치였다. 최근의 가장 건강한 모습이었고 아버지를 잘 보여주는 이미지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면 셔츠에 연한 풀색 캐주얼 재킷을 걸친 사진 속 아버님은 짙은 검은색 선글라스를 쓰고 턱을 살짝 치켜들고 입술을 고집스레 앙다물고 있었다. 스타일을 중요하게 여기고 멋쟁이라는 말을 들으면 그렇게나 좋아하셨던 분이다.
빈소에서 아버님은 선글라스를 쓰고 우리를 지켜보았다. 울다가 웃다가 밥도 먹고 떡도 먹고 문상객을 맞이하고 밤이면 잠을 자는 아내와 아들, 며느리와 손자들을. 생전에 다니던 교회에서 온 신도들과 예배도 함께하였다. 그분들이 당신의 청년다운 활기와 유머를 회상하며 은총의 기도를 하고 찬송가를 부르는 광경을 예의 그 미소로 바라보았다. 부리부리한 눈을 감춘 저 선글라스는 이미 육신의 감옥에 갇혀 거동이 어려운 상태로 요양병원에 가실 때 챙겨 가신 물건이다. 선글라스 쓴 영정이 정말 멋지다는 말을 남기고 문상객이 모두 가고 나면 남편은 아버지가 좋아했던 엔카와 남인수 노래를 들려드렸다.
문상객을 맞는 중에 나는 빈소를 오가며 영정을 무시로 바라보았다. 아버님과의 인연은 당신이 마흔일곱 살, 내가 스물한 살 때 시작되었다. 상복을 입은 오십 대의 내 기억 속엔 자꾸만 그때 그 시절, 그러니까 지금에야 드는 생각인데, 저무는 해가 수평선 위에서 마지막 정념을 태우듯 뜨거운 빛을 사르고 있었을 오십 대까지의 아버님이 떠올랐다. 주어진 생을 건사하며 참 고단하였을 한 사람의 눈물겨운 일생과 못다 한 꿈을 나는 떠올렸다. 평생 청춘을 간직하고 싶었을 열망에 마음이 저릿해왔다. 그동안의 일들이 머릿속에서 어제 일인 듯 스쳐가고 좀 더 가닿지 못한 인연의 거리에 서글픔이 하염없이 밀려왔다. 나는 아버님의 조건 없는 애정을 바랐던 것이고 아버님 또한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철없던 그때의 나는 이해해 드리지 못했던 비교적 젊은 날의 초상 앞에서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생각해 본다. 생각한다고 해서 알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건 생의 지엄한 운명이다. 세상에 이루어 놓은 건 없고 꿈도 청년도 사라져가고 육신은 스러진 풀잎 위 새벽이슬처럼 점점 기울어져 가는 시절, 절박하게 붙들고 싶으셨던 게 있지 않았을까. 정(情)에도 욕심이 많았던 분인데 나는 일종의 심리조종 같은 걸 느꼈고 거부감이 들었다. 주부가, 여자가, 교회에, 이런 말은 친정아버지한테서는 들어본 적이 없었던 말이다. 반발심이 생기고 내 정신과 생활에 강력한 억압이 되었다. 지나치게 잦은 전화와 간섭에 어디에 나가 있기도 자유롭지 못하고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다. 과감히 도망쳐 나와 떨어져 있는 여러 해 동안 나는 수시로 낯선 땅을 밟으러 다니고 제사도 손 놓고 책을 세 권 발간했다. 영육을 결박하려는 어떤 것으로부터 탈출을 시도한 셈이고 완벽하진 않지만 적잖이 실행했다고 여긴다. 무엇보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못난 점도 인정하고 이해해 주셨더라면 상황은 달랐을지 모르지만, 내가 아버님에게도 그랬어야 한다는 걸 이제야 느낀다.
입관 전에 뵌 아버님 얼굴은 여태 본 얼굴이 아니었다. 그렇게나 맑고 순하게 바뀌어 있을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마지막 가시는 길에 고운 화장을 한 까닭도 있겠지만 하얀 분가루와 붉은 입술연지만으로 그렇게 보일 거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선글라스를 벗은 두 눈은 고요한 봉분 아래 단정히 감겨 있었다. 정한(情恨)도 너무 짙으면 탐욕의 숲에서 그늘이 길어진다. 그 모든 집요와 집착의 그늘을 걷고 순연히 길 떠나는 얼굴은 안식과 평화의 풍경이었다. 가벼운 걸음으로 가시길 빌며, 삼베옷 한 벌 입고 작은 나무집 한 칸에 귀만 열고 하늘을 향한 얼굴에 우리는 작별인사를 했다.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사흘은 금방 흘러갔다. 집에 돌아와 몇 날이 몸도 마음도 뭔가 쓸려 빠져나간 듯 멍하니 또 흘러갔다. 남편은 식탁에서 밥을 먹다가도 티비를 보다가도 울컥했다. 무엇보다 치부를 씻겨드리는 일은 없었어야 했다고 말했다. 아버지의 권위와 허세 사이 그 어디쯤을 아들로서 지켜드리지 못한 걸 괴로워했다. 아들에게 치부를 맡길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도 어떤 심정이셨을지 생각하면 죽음의 그림자가 덮쳐오는 육신의 연약함에 아뜩해진다. 우리 삶은 어떻게든 후회가 남는 거라는 말로 위로했다.
며칠이 지나, 오래 닫아두었던 이메일 서랍을 열었다. 우리 사이에 극단의 일이 있기 이전 2013년 2월에 아흘 간격으로 받은 두 개의 이메일을 나는 고스란히 간직해 두었다. 잊고 있었지만 그 이전에도 2011년, 2010년, 2007년에 보내오신 편지가 3개 더 있었다. 아버님은 당시 복지관에서 컴퓨터를 배워 이메일도 워드도 능숙했다. 노년으로 접어든 삶의 언저리에서 드는 회한, 내 성정에 대한 은근한 질책과 맏며느리를 옥죄는 부담스러운 당부, 장남에 대한 자부심과 기대, 별난 성미로 또 자식 마음을 아프게 해서 미안하다는 후회와 사과의 말 그리고 우리 가정과 당신의 자손들을 위해 새벽에 드렸다는 기도의 말씀을 다시 보며 미진함이 숙명인 우리 삶과 못다 한 인연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아버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았던 게 아니었다.
선글라스는 다른 유품들과 함께 아직 어머님에게 있지만 조금 지난 후 장남의 책상 서랍에 고이 모실 것이다. 애도의 시간은 정말 이제부터인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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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장영희 책 중,
이별을 고하며 / 월트 휘트먼
나는 공기처럼 떠납니다. 도망가는 해을 향해 내 백발을 흔들며.
내 몸은 썰물에 흩어져 울퉁불퉁한 바위 끝에 떠돕니다.
내가 사랑하는 풀이 되고자 나를 낮추어 흙으로 갑니다.
나를 다시 원한다면 당신의 구두 밑창 아래서 찾으십시오.
처음에 못 만나더라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어느 한 곳에 내가 없으면 다른 곳을 찾으십시오.
나는 어딘가 멈추어 당신을 기다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