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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독서
박노해 지음 / 느린걸음 / 2021년 6월
평점 :
박노해 시인은 사진으로도 대단한 존재감을 발휘한다. 세계의 오지을 다니며 노동하는 사람들을 담은 흑백사진을 보고 너무 마음에 들어 흥분되었던 기억이 있다. 풍경 속 바람과 인물의 입김이 느껴지는 듯 생생하면서 아름다운 시선이었다. 그때는 제법 날이 추웠던 어느 해 겨울이었다. 서울 사는 친구와 서촌을 돌아다니다 먼저 보내고 나 혼자 청운동 윤동주문학관과 거기서 우회전해 조금 위쪽 오르막길에 있는 라카페갤러리에 갔다. 박노해 사진전을 상시 한다는 걸 알고 갔는데 전시를 보러 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올해 유월에는 컬러 사진들 54점을 모아 아포리즘을 붙여 두꺼운 책이 나왔다. 덮어놓고 냉큼 샀는데 깜짝이야. 책 판형은 생각보다 아담하고 사진크기는 너무 작은 거다. 그런 줄 알았어도 샀겠지만.
올해 마지막 날까지 라카페갤러리에서 전시도 한다. 원래 9월까지였는데 연장한 모양이다. 이 해가 가기 전에 가서 봐야 겠다고 생각한 건, 책에 사진이 너무 작은 크기로 실려 있어서다. 글도 글이지만 사진이 보고 싶었던 나 같은 사람은 아쉬울 수밖에. 사진은 전시장 가서 보는 걸로 하고... 시인의 혜안과 통찰이 담긴 묵시적인 문장에 좋은 한영번역문이 달려 있어 우리말과 또 다른 느낌을 전한다. 외국인 독자에게도 좋을 듯하다. 패브릭 양장본으로 색도 만듦새도 이쁘다. 880페이지가량 된다. 간혹 몇 장의 사진은 페이지에 꽉 차게 들어 있다.
표지에 걷는 독서를 하고 있는 사람은 마치 수도승 같이 보인다. 실제로 찍은 사진 속 인물이고 본문에 들어 있다. 그리고 멋진 이 사진은 오랜 세월의 길 위에서 읽으며 나아간 시인의 페르소나이기도 하다. 책표지 안쪽에 적힌 시인의 이력을 다시본다. 1991년 사형을 구형받고 "무기수로 감옥 독방에 갇혀 침묵 정진 속에 광활한 사유와 독서와 집필을 이어가며 새로운 혁명의 길찾기를 멈추지 않았다. 7년 6개월 만에 석방된 후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복권되었으나 국가보상금을 거부했다. 그후 20여년간 국경 너머 가난과 분쟁의 땅에서 평화활동을 펼치며 현장의 진실을 기록해왔다."라고 적혀 있다. 걸어온 길처럼 그의 사진은 뜨거움을 뿜고 있어서 가끔 사는 데 중요한 게 뭔가 잊을 만하면 봐줘야 할 글과 사진이라 생각한다.
그나저나 라카페갤러리, 좋아하는 곳이다.
가보시면 알아요 ^^ 갈 때마다 사람이 별로 없고 조용하다.
2016년 여름 큰딸 졸업식 마치고 갔던 게 가장 최근이다.
당시 전시명은 '칼데라의 바람'. 아래 사진은 그때 찍은 것이다.
뼈 아프고 고독할 때 감사하라. 내 사람이 크고 있는 것이니.
When in pain and lonesome, give thanks. Within you are great. - P763
키 큰 나무 숲을 지나니 내 키가 커졌다. 깊은 강물을 건너니 내 영혼이 깊어졌다.
As I walked between tall trees, I grew taller. As I crossed a deep river, my soul grew deeper. - P7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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