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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락의 시간 - 도시락으로 만나는 가슴 따뜻한 인생 이야기
아베 나오미.아베 사토루 지음, 이은정 옮김 / 인디고(글담) / 2012년 7월
평점 :
절판


 

 

이렇게나 예쁘고 맛깔난 책이라니! 이런 책은 포토리뷰로 해야하는데, 아쉽다. 여기 나온 39가지 평범한 사람들의 도시락을 사진 없이 보여주려니 표현의 한계에 부딪힐 것 같다. 그냥 도시락 먹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이런 책은 단숨에 보는 것보다 한 꼭지씩 야곰야곰 맛보는 게 좋다. 39명 더하기 아베 부부와 어린 딸의 '사람사는 이야기'는 담담하면서도 빛나는 생의 지혜가 엿보인다. 게다가 사진과 편집이 좋아 전체적으로 산뜻한 책이다.

 

부제 '도시락으로 만나는 가슴 따뜻한 인생 이야기'는 이 책을 간단하고 정확히 말해준다. 아베 부부가 인터뷰하고 사진 찍은 39명의 인생을 도시락과 함께 엿듣는 재미가 도시락 먹는 것만큼이나 흐뭇하다. 이 책의 미덕은 사진에 있다. 인물사진과 도시락 사진이 주로 차지하고 풍경사진도 있다. 이 책은 도시락이 주인이 아니라 도시락을 싸고 먹는 사람이 주인이다. 요리연구가의 도시락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도시락이니 비슷비슷 고만고만하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제각각의 이야기와 더불어 정성어린 일상의 손길이 엿보여 하나밖에 없는 귀한 도시락이 된다.  

 

어느 날 도시락 사진을 찍겠다고 마음 먹은 아베 사토루, 그가 찍은 인물사진은 정직하다. 정면을 향하고 반듯하게 선 인물의 무심한 표정과 배경에서 엿보이는 직업, 인물의 몸 전체에서 느껴지는 살아있는 기운은 도시락을 먹는 옆모습을 찍은 사진과 조금 다른 느낌을 준다. 전자가 사회적인 자세라면 후자는 좀더 개인적이고 사적이다. 그 중 첫번째 사진, 주먹밥을 한입 가득 미어터지게 베어무는 남자의 사진은 애잔하기까지 하다. 도시락을 먹으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웃음 짓는 얼굴에는 녹록하지만은 않은 생을 살며 둥글려진 생활의 기술이 엿보인다.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에서 박찬일은 랍스터를 휘지 않게 잘 삶기 위해 가슴에서 배로 찔러 넣는 부젓가락 이야기를 하며 "당신 접시에 오른 랍스터가 반듯한 것은 결코 그 녀석의 본성이 아니다."라고 호쾌하게 정곡을 찔렀다. 아베 부부는 도시락 사진에다 그 사람이 지나왔고 현재 살아가는 시간을 간결하게 담아낸다. 굳이 도시락이 아니어도 평범한 이들의 이야기를 취재할 수 있겠지만 도시락을 매개로 벽을 넘어가기 수월했을 듯. '도시락의 시간'은 '도시락에 담긴 시간' 혹은 '도시락이 먹은 시간', 더 평이하게는 '도시락과 함께한 시간'이 되겠다.

 

이 책이 더 흥미로운 건 39가지 특이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덕분이다. 직업이 특이하다는 건 내 소견일 테다. 세상에 존재하는 직업의 수는 엄청나다고 들었지만 내가 처음 들어본 직업도 많았다. 대충 열거하자면 집유원, 해녀, 산사음악연주자, 증류소직원, 말 체중 측정 담당자, 수타면 장인, 모래찜질온천 직원, 관광마차 마부, 원숭이 재주꾼, 아이누 예술인, 사찰승려, 북 연주자, 가야부키(일본 전통 초가집) 장인, 옛날이야기꾼, 스키 투어 가이드 등등.  각자의 직업과 관련한 구체적인 이야기가 재미있다. 그냥 할머니, 고등학생, 유치원생도 있다.

 

생활과 가족을 말하며 그들 직업에 서린 애환을 즐거움으로 승화해 들려주는 이야기가 진솔하고 밝다. 도시락에 담긴 애정과 배려, 감사의 마음이 느껴지는 대목들에서는 어김없이 훈훈한 마음에 젖게 된다. 첫 새벽에 출근하는 남편은 "아무리 부부라도 서로 힘들게 해서는 안 되는" 거라며 손수 자신이 먹을 주먹밥을 싸고, 또 첫 새벽에 출근하는 역무원 아내를 위해 어떤 남편은 손수 아내가 먹을 도시락을 싼다. 아이들 도시락을 손수 싸주는 아버지, 하트를 보면 행복 모양이 떴다고 좋아하는 유치원생 아이에게 하트모양 계란말이를 꼭 싸주는 일하는 젊은 엄마, 먹은 상태를 보려고 도시락을 씻지 말고 가져오라는 아내, "내 나이 때는 뭐든 조금만 있으며 되거든"이라고 말하며 멀리 있는 딸이 보내주는 고기로 도시락을 싸는 놀빛 할머니, 세상에서 하나뿐인 '스카보로 페어 베이컨'을 손수 만드는 철도 운전사 등등...

 

문어잡이 항아리를 연구 중인 디자인학과 교수는 손수 자신의 도시락을 준비한다. 고양이가 남긴 참치로 김밥을 싸오고, 고양이가 남긴 게 없는 날은 학교식당에서 200엔 하는 매실 미역 우동을 먹는 그의 이야기는 신기하다. 문어잡이 항아리가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문어잡이 항아리는 구멍이 뚫려 있어서 문어가 도망치려고 맘만 먹으면 언제든지 도망칠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잡히면 문어의 책임이 된다는 점이 무척 공정하게 느껴지죠. 문어도 적당한 곳에 몸을 숨기고 싶은 게 아닐까 싶어요.

작년에 그렇게 바라던 금과 은으로 된 문어잡이 항아리를 만들었습니다.

높이가 2미터 정도 되고 무게가 약 360킬로그램이나 나가는 거대한 항아리였죠. 만들고 나서 안에 들어가 봤는데,

문어의 기분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더라고요. 나오기가 싫었거든요. 다시 태어난 기분이 들었습니다.

금 항아리 안쪽에는 옻칠을 해놔서 바닷속에서 보면 마치 블랙홀처럼 보일 거에요.

은 항아리 안쪽은 형광도료를 발랐기 때문에 번쩍거리고요. 제 숙제는 이것을 어떻게 바다로 옮길 것인가랍니다

      - p45

 

 

"도시락은 두 사람이 먹는 것"이란 말이 좋다. 혼자 먹지만 싸준 사람과 함께 먹는 것이니.

"사람에게서 삶의 활력소와 건강을 얻었다"고 믿고 말하는 증류소 직원의 말도,

"오늘도 좋은 스님이 아니었다. 하지만 내일도 스님으로 있자."라고 말하는 사찰승려도 참 좋다.

육덕진 체구의 이 사찰승려는 초등학교 때 사용하던 알루미늄 도시락을 지금도 쓰는데 4학년 때 어머니가 한천을 만들 때도

그 도시락을 써서 바닥에 칼자국이 나 있다. 그런데 일본의 사찰승려는 결혼을 하나 보다. 지금은 아내가 이 도시락에

밥을 싸준다니. 반찬도 절반 나눈 삶은 달걀 한 개와 생선구이가 보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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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는재로 2012-09-25 1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시락은 두사람이 먹는것 진짜 좋은 글귀네요 싸준사람과 먹는 사람 두사람의 정이 통한다는 뜻이 겟죠

프레이야 2012-09-26 18:49   좋아요 0 | URL
고등학생 때 엄마가 싸주신 도시락 두 개가 생각납니다.
한 개는 1교시 전에 이미 먹고 없었어요. 모양새는 투박해도 정성이 담긴 도시락이라야 진짜겠지요.

책읽는나무 2012-09-25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낼모레 또 도시락을 싸야하는데 말이죠~
귀.찮.다.라는 생각이 먼저였는데,이젠 그러지 말아야겠단 생각이 문득 드네요.^^
포토리뷰 다시 한 번 올려주세요.ㅋ

프레이야 2012-09-26 18:50   좋아요 0 | URL
내일 도시락 예쁘고 맛나게 싸시겠네요.^^
갑자기 다른 사람이 싸준 도시락이 먹고 싶어진다능ᆢ 포토리뷰는 아무래도 패스에요.ㅎㅎ

블루데이지 2012-09-26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책을 읽고는 평범한것들에 이렇게 맘이 짠하게 묵직하게 울려도 되나 싶을정도로 저도 이책 너무 좋았어요!
이 책을 읽은사람으로서 프레이야님의 리뷰를 읽으니 복습되고, 읽을때의 감동도 다시 살아나서 너무 좋아요!
프레이야님께서 느끼신걸 저도 느꼈다는게 너무 기분좋으네요!
프레이야님을 지극히 애정합니다...

프레이야 2012-09-26 16:42   좋아요 0 | URL
우리 같이 느꼈군요.^^ 고마워요, 블루데이지님 :)
지극히 평범하고 소소한 것들이 결코 작은 게 아니란 것.
그런 것들이 쌓이고 모이고 이어져서 의미가 되는 것 같아요.

자목련 2012-09-26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시락'말로 함축한 삶을 만나셨군요. 엄마가 싸주셨던 설탕을 살짝 뿌려서 라면 봉지에 담았던 누룽지가 생각나요.
39가지의 직업과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정말 정겹고 따뜻할 것 같아요.
음식에 대한 책들이 많이 쏟아져서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이 책은 색다른 맛을 안겨줄 것 같아요.
프레이야님 글 덕분이겠지요?

프레이야 2012-09-26 16:44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자목련님. 인터뷰이들의 얘기가 장황하지 않게 나오는데
'도시락' 안에 많은 게 함축되어 있어요. 행간에 엿보이는 어떤 것들이요.^^
설탕 뿌린 누룽지는 먹어봤지만 그걸 라면봉지에 담아서 주셨군요, 엄마가요. ㅎㅎ
한 맛 더 났겠다 싶어요.
이 책은 정말 책 자체가 예뻐요.

페크pek0501 2012-09-27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시락은 싸준 사람과 둘이 먹는 거군요. 멋진 표현이에요.^^

프레이야 님은 신간평가단으로 다양한 책을 읽을 수 있겠네요. 저는 책은 탐나지만 이렇게
부지런히 리뷰 쓸 자신이 없어서 엄두를 못 내요. 더군다나 이렇게 성실하게 쓴 긴 리뷰는...

저, 추석 쇠러 2박3일로 대구에 간답니다. 추석 연휴, 잘 보내세요.

2012-09-27 1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2-09-27 20:47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종파에 따라 다르군요.
페크 님의 생각처럼 오히려 믿음이 갈 거 같은걸요, 저도. ^^
대구면 이곳에서 그리 멀지않은 도시에요.
추석 맛난 거 많이 드시고 몸도 마음도 편안할 수 있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일은 적당히 분배해 하시구요ㅎㅎ 리뷰는 저도 맨날 하루 늦거나 마지막날ᆢ
벼락치기 공부하던 버릇이 아직ㅎㅎ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 - 박찬일 셰프 음식 에세이
박찬일 지음 / 푸른숲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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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이 남다른 저자들이 많은데 박찬일도 이력이 남다르다. 기자 출신답게 군더더기 없이 치고 나가는 문장이 힘있고 맛깔져 읽는 재미가 있다. 인간관계도 전방위 같은데 김중혁 등 문학계 사람들은 물론 기자 시절 이탈리아 영화에 매료되어 이탈리아로 음식 유학을 갔을 정도이니 셰프들과의 관계도 그렇고, 달걀을 몸서리치게 좋아하고 술 잘 마시고 새로운 음식 먹는 것도 좋아하고 두루 호쾌한 사람 같다. 특히 음식을 만드는 사람은 미각만이 아니라 상당히 예민한 감각을 본능적으로 지니고 있어야 될 것 같은데 저자가 그런 느낌을 준다. 섣부른 판단일 수도 있지만 에세이는 어떤 식으로든 글쓴이가 보여서 읽는 이와 쓴 이의 거리가 상대적으로 가까운 글쓰기 방식이라 좋다.

 

'맛'에 대한 이야기다. '인생 앞에 놓인 수많은 맛의 강물을 건너는 당신에게'라는 헌사로 서문을 시작한다. 음식의 맛에 대한 이야기이고 추억의 맛에 대한 이야기다. 글쓴이의 맛의 추억이 읽는 이에게도 위로의 맛이 될 수 있다니, 맛난 책이다. 단순히 남의 이야기를 읽는 것에서 그친다면 부족하겠다. 언급된 어떤 재료든 맛나게 조리할 수 있는 '비법'이라든지 쉽고도 자신있게 해볼 수 있는 자신만의 조리법도 제공하고 있다. 유머와 농담을 섞어가며 엽기적인 먹을거리 후일담을 늘어놓고 잠시 사색에 빠지고 철학하다가고 아무렇지 않은 척한다. 참새머리 오도독 씹기나 죽어도 다리에 남아있는 신경의 꿈틀거림으로 생존을 항변하는 블랙유머의 주인공 산낙지 아니 죽은 낙지의 추억 같은 것.

 

저자에 의하면 음식의 맛이란 지구시계의 1년을 기준으로 12월 31일 오후 다섯 시의 존재, 그 인간시계의 오후 다섯 시에 나타났다. 오후 다섯 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 해거름을 준비하는 시간이잖은가. 음식의 맛을 위해 공을 들이는 일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란 얘기인데 나로서는 쓸쓸하고도 충만하게 지는 해를 가슴으로 맞을 준비를 하는 시간과 그 이전 시간의 추억을 곱씹는 재미도 더했다. 돌이켜보면, 음식을 만드는 일도 먹는 일도 그렇게 거룩했다.

 

세 개의 장으로 나뉜다. 1부는 우리 땅에서 몸에 지문처럼 새겨진 맛의 추억, 2부는 외국 땅의 낯선 맛의 추억, 3부는 문학작품 속에 등장하는 음식과 맛의 추억이다.

 

1부에서는 21가지 우리 음식이 불러오는 추억을 이야기한다. 어린 시절 수박 화채 속에 둥둥 떠 있던 송곳으로 깬 날카로운 예각의 얼음맛, 스러져간 가부장의 권위가 서글픈 닭백숙의 기억, 각자의 입안에서 이질적인 맛의 창조를 찾아내는 아름다운 공간 배열의 남도 한상 차림, 어머니가 쌓은 찬합의 높이로 추억하는 운동회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전은 지구전(持久戰)이다,에서는 전을 대표 슬로 쿠킹으로 부르며 명절이면 소쿠리 가득 하루 종일 전을 부쳐야하는 여자들의 힘든 노동을 알아주는 대목이 나온다. 명절이면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픈데 그걸 알아주는 남자가 여기 있다.

 

경북 내륙지방의 배추전에 대한 추억이다.

 

전은 기름막이 있는 듯 없는 듯 바른 팬에서 천천히 요리해야 하는 음식이다. 손님이 아무리 난리를 쳐도, 후딱 만들어서는 안 되는 음식이다. 그래서 전은 지구전이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워 학대하면서 만드는 음식이다. 그걸 아는 집을 여간해서는 찾기 어렵다. 역시 늙으신 어머니를 다시 졸라야 하나.   - p83

 

 

2부에서는 15가지 외국음식의 추억을 불러온다. 나는 이 장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치즈, 랍스터, 소 내장 요리, 라멘, 바칼라, 딤섬, 이슬람의 할랄푸드 등 다른 문화를 맛과 함께 받아들이는 이야기가 흥미롭고 유익하다. 이탈리아적인 서사로 기억한다는 '대부'에 매료되어 시칠리아 섬으로 간 저자가 카놀리와 토마토소스를 첫 순서로 말하는 건 당연한 일.

 

시칠리아 유학 당시 스승, 주세페가 전하는 초콜릿 소스 토끼요리는 특별하다. 공정무역으로 들여온 카카오 초콜릿으로 '가장 순수하고 가장 품질 좋은' 초콜릿을 만든 그의 초콜릿 소스에는 마성이 깃들어 있다고 느낀다니. 주세페는 말한다.

"대지의 기운, 흙냄새, 먼지바람, 새벽이슬 같은 게 카카오의 본래의 맛과 냄새야. 잘 맡아봐. 아프리카의 카카오는 무언가 건조하고 대륙적이고, 아메리카의 카카오는 습하고 진하며 나무냄새가 많이 나. 둘 다 태양을 닮은 맛이라는 건 공통점이지." (p194) 

 

저자가 마음에 새긴 주세페의 말은 삶을 살만 한 것으로 만든다.

 

"초콜릿소스의 토끼 고기 같은 건 이제 먹지 않을 줄 알았어. 이탈리아에 맥도널드가 들어오고 나서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지. 그렇지만 나는 아직도 그걸 만들고,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알아? 낙관하는 거야.

희망이 없으면 삶이 무슨 소용이지? "   - p195

 

 

이슬람의 할랄(허용,이란 뜻) 푸드에 대한 구절은 새삼 놀라운 각성이다.

 

 

할랄 푸드와 수식(手食)은 강제된 것은 아니지만,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 교차점을 맞붙이고 있는 것 같다. 오직 오른손을 써서, 살과 소스를, 할랄의 고기를 꾹꾹 뭉쳐 먹는 온전한 手食은 지상에서 가장 경건한 식사법이다. 신이 주신 모든 먹을거리는 손을 통해 그 존재의 각성을 불러온다. 따뜻한 음식을 체온으로 집을 때 그것은 비로소 내 몸이 될 것이란 확신을 얻곤 한다. (중략)

"손 있는 자, 그대 손으로 음식을 집으라. 신이 거기 있으리라."   - p229

 

 

 

3부에서는 황새치가 나오는 <노인과 바다> 등 9편의 작품을 통해, 한때 이러저러한 소재로 소설쓰기에 도전해봤던 고백도 있고 문학에 대한 그의 끊이지 않는 애정을 엿볼 수 있다. 문학작품 속에서 음식과 관련한 이야기를 끌어온다. 백영옥의 '스타일'을 들어 쓴 '고기 권하는 사회'에서도 아버지가 생각났지만, 박완서 '그 남자네 집'에서 저자가 길어올린 민어의 추억이 맛나다. 여기서 '포만감'에 덜커덕 걸려든 것이다. 저자는 우리가 먹는 행위를 통해 얻는 만족감은 혀에서 두루 느껴지는 화학적 반응에만 기대는 게 아니란 걸 집어낸다. 포식가들의 손을 들어주는 그는 진정한 미식가이지 않은가. 미식가들이야 여러가지 음식을 소량 맛보며 맛에 대한 평론까지 해야할지 모르지만 대개의 우리는 음식이 내 손을 거쳐 식도를 타고 내려가 위장을 부풀려주는 그 포만감에 흡족해 한다. 재료는 두툼해야 하고 양도 적어서는 안 된다. 혀의 오르가슴을 더해주면 금상첨화지만 절정의 감각은 일순간의 것, 그 순간이 지나면 체감되고 망각된다. 그에 비해 포만감은 상대적으로 좀더 오래간다.

 

민어는 식도를 자극하는 통쾌한 맛이 있었다. 두껍게 썰어 질감을 살린 횟점이 식도를 넘어가며 위에 포만의 자극을

시작한 셈이었다. 미각이란 때론 화학적 반응을 넘어 물리적 현상으로도 읽을 수 있는 것일까.   - p272

 

 

내 아버지는 고기대왕이다. 생선보다 육류의 살점을 즐기는 당신은 여든이 넘은 생, 평생 몸을 키우고 만들고 그 몸으로 일하고 늙어가는 생명의 재료로 고기를 드셨다. 우리 삼남매는 당신 몸의 등골을 빼먹고 자랐다. 아버지가 먹은 소를 일렬로 세운다면 그 길이가 얼마일지 가늠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런 얘길 하며 웃곤 하시는데 지금은 드시는 양 자체가 줄었다. 어린 시절 기억에도 고기가 오르지 않은 밥상은 한번도 없었다. 채식을 하면 소화가 안 되니 상추 같은 채소가 곁들여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생마늘이나 생양파가 채소를 대신한다. 고기는 무한정 소화가 되니 특이체질도 그런 체질이 없다. 그래도 혈압도 정상이고 성인병이라곤 없다. 아버지는 고기를 얇고 잘게 썰면 싫어하신다. 두툼한 고기살의 붉은 기운이 가시기 전에 지글지글 매 끼니 드시니 주방엔 늘 기름기가 배어있었다. 식탁도 바닥도 주방 벽지도 누렇고 찐득거려 육식을 좋아하지 않는 어머니는 힘드실 수밖에. 그래도 밑반찬 요것조것 해야하는 상차림보다 수월하다고 하신다.

 

낚시에 걸린 민어를 바라보며 저자는 요리와 생명과 먹는 일의 숙명적 관계를 이렇게 쓴다.

 

 

고기가 사후 경직이 일어나듯 생선도 그렇다. 붉거나 푸르거나 선명한 색채의 몸통 빛이 서서히 사라지고, 산소 부족으로 청색증이 돌듯이 사악하고 창백한 푸른 기운이 돌기 시작한다. 그것은 그로테스크하기까지 하다. 생명이 사라지는 과정이다. 요리는 생명을 위해 복무하지만, 그 재료는 아이러니하게도 생명에서 얻는다. 육식하는 사람의 태생적인 딜레마랄까. 번민은 그렇게 시작될 것이다.  - p268

 

 

음식의 맛, 추억의 맛은 오후 다섯 시의 맛이란 말에 끄덕거려진다. 추억의 절반은 맛이라고 하니, 나머지 절반은 무얼까.

먹어서 '내가 된' 저자처럼 해거름에 서서 맛을 추억하는 아버지와 나, 그리고 멀가까운 인연들을 생각한다.

 

 

 

 

 

 

 

ps)  좋은 책에 오자가 둘 있어 아쉽다.

       p194 /아프리카 사람들은 뱀을 숭상한다. 대지를 배고 훑고 다니면서 어머니 대지와 동거한다. (배고 --> 배로)

       p263 /소설 속의 새댁은 아마도 작가의 어릴 적 분신은 혐오의 기분까지 한껏 내비치고 있었다. (분신은 --> 분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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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2-09-25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식의 맛은 추엇의 맛이기도 하다는 말에 전적으로 공감이되는 글입니다. 이번 명절이 지나고 프랑스로 유학을 가는 녀석에게 사람의 마음을 치유할 수 있고, 풍요롭게 할 수 있는 파티쉐가 되어서 오라고 하면서 선물한 책입니다.

프레이야 2012-09-26 16:49   좋아요 0 | URL
추억을 불러주는 음식, 누구에게나 있겠지요.
맛깔나게 쓰느냐의 문제는 다른 문제겠지만요.
이 책은 벗에게 좋은 선물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LAYLA 2012-09-26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를 보고 어찌 책을 사지 않을 수 있겠어요...바로 사러 갑니다 ㅎㅎㅎ

프레이야 2012-09-27 07:43   좋아요 0 | URL
홍홍! 사셨어요?ㅎㅎ
맛나게 읽으실 거에요. ^^

페크pek0501 2012-09-27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세이는 어떤 식으로든 글쓴이가 보여서 읽는 이와 쓴 이의 거리가 상대적으로 가까운 글쓰기 방식이라 좋다."
저는 글에서 저를 숨기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 배워야겠군요. 잊고 있었어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알아? 낙관하는 거야. "
이것도 배워 갑니다.^^

프레이야 님, 저도 오후 다섯 시부터 어두워지기 직전까지의 시간을 좋아한답니다.
요즘 이 시간에 산책을 하면 죽이죠. ㅋㅋ

프레이야 2012-09-27 20:47   좋아요 0 | URL
낙관이 때론 위험하단 생각을 하먼서도 그럼에도 그게 최선의 태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귀착해요. 페크 님도 해 넘어가는 그 시간을 좋아하시는군요. 와락 반가워라. 님이랑 저는 기가 비슷한 거 같다능ᆢ 호호~~~ 개와 늑대의 시간이기도 한 그 시간, 공원산책 하며 저도 호흡 좀 가다듬어야겠어요. 산책! 이 말 참 좋아요^^
 

 

 

 

 

 

 

 

 

 

 

2012년 8월 29일 녹음 시작, 총 12시간 소요 완료

 

 

 

 

<당신을 위해 지은 집>은 기본적으로 건축가의 입장에서 집짓기의 철학과 집짓기의 욕망을 해부한다.

고객 중 자신이 어떤 집에서 살고 싶은지 어떤 집을 짓고 싶은지를 모르고 의뢰하는 부류가 가장 어렵다고 한다.

남들이 다 좋다고 하는, 인테리어 잡지에서 본 누구누구의 집 비슷하게, 이런 주문을 하는 부류는 건축 후 만족도도

낮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집'은 하나의 은유로도 많이 쓰이는데 '집'을 '짓다'라는 의미에 많은 걸 대입할 수 있다.

저자 함성호는 개인적 차원의 집짓기뿐만 아니라 사회적, 공공적 집짓기에 대해서도 바람직한 생각을 갖고 있다.

 

글을 읽을수록 저자가 상당히 반듯하고 온기있는 품성을 지녔다는 걸 느낀다. 편견에 사로잡히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있는 점도 마음에 든다. 예를 들어 무작정 도시보다 시골을 예찬한다든가, 유기농 채소가 무조건 좋다든가,

이런 틀에 잡히지 않는다. 감성적인 부분에서는 감성적으로, 지적으로 통쾌하고 정확한 부분에서는 또 그렇게 해박하다.

학창시절 어느 수학 선생님의 이야기나 건축현장에서 목수와 반목했던 이야기는 가슴을 둔중한 무엇으로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다. 사람에 대한 애정이 많은 '척' 하지 않고(그렇다도 애정이 적은 사람이 아니라 표현이 적은 사람 같다)

인간적으로 모자람에 솔직하고 자신을 돌아볼 줄 아는 사람 같다. 생각이 깊고 공정하고 강직하면서도 여린 심성을 가진

사람으로 보인다. 글쓴이가 잘 보이는 에세이라서 믿음직하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당신을 위한 집 이야기와 집을 통해 본 사랑과 문학과 문화에 대한 답사기!"

 

이 구절은 책 뒷표지에 적힌 부제 아닌 부제다. 다 읽고 나니 그다지 맞다고도 틀리다고도 말할 수 없는 구절이다 싶다.

건축가 함성호는 실제로 늘 두 가지 이상의 길을 동시에 갔다고 고백한다.

프루스트의 '가지 않은 길'은 그래서 없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프루스트는 갈림길에 서 있었던 어느 한 시절의 가지 않은 길을 노래했지만, 사실 우리가 가지 않은 길은 없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길로 이미 우리의 그리움과 망설임의 또 다른 나를 가게 했다.

'나'는 실은 단수로서의 '나'가 아니라 수많은 복수로서의 '나'가 모인 우리이다. 그 수많은 '나'들은, 잃어버리고

새로 나타나는 생의 수많은 갈림길에서 만나고 헤어진 '나'다. 우리가 타인과 만나 이야기 할 때, 그 타인은

어쩌면 우리가 가지 않은 길이라고 믿고 있던 그 길로 보낸, 또 다른 나일지도 모른다.      - p145

 

 

저자는 건축가 외에도 시인, 만화광, 공연연출가, 여행가이지만

나는 철학자라는 이름을 하나 더 주고 싶다.

 

마지막 장의 '행복의 조건들'에서 그가 중요하게 말하는 '경험'이란 말에 집중하게 된다.

바깥으로 우리의 경험을 이끈 다음에야 파랑새를 보여주는 행복을 넘어 이제는

구체적으로 행복을 말하는 습관을 들여야한다는 그의 조언이 귀담아 들린다.

아주 소소하고 평범한 것들에서 감동할 줄 아는 삶의 경험을 찾을 때 행복을 느낀다는 말이다.

사람의 의지가 개입한 결과에 가까운 '만족'과 인간의 의지보다는 어떤 큰 흐름을 뜻하는 '행복',

둘의 차이에 대한 구절이 내 마음 깊이 와닿는다.

 

 

만족한다는 것은 한계를 미리 정해 놓고 거기에서 안주하는 것이 아니다.

만족한다는 것은 모든 가능성을 다 뒤져보았다는 것이다. (중략)

그래서 만족은 꼭 기쁨으로 오지는 않는다.

어쩌면 그것은 짙은 슬픔으로 우리를 집어넣을지도 모른다.

거기서 우리가 무엇을 경험하는지에 따라 나는 내 것이 아닌 게 어떤 것인 줄도 알게 될 것이다.

내 것이 아닌 것이 나를 행복하게 할 리가 없다.    - p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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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2-09-23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가 가지 않은 길은 없다....정말 그런 것 같아요...
찾아보니 당신을 위해 지은 집을 비롯해 철학으로 읽는 옛집에도 마음이 끌려요. 얼른 찾아 읽어봐야겠어요.

프레이야 2012-09-23 18:41   좋아요 0 | URL
아, 아른님, 역시 함성호는 철학가군요.
철학으로 읽는 옛집,도 전에 제목만 보고 담지 않은 책인데 바로 담았어요.
아주아주 좋아보여요.^^

박찬일의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를 읽는데 함성호의 시가 몇 번 나와 반가웠어요.
두 사람이 막역한 사이인가? ㅎㅎ

2012-09-23 19: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9-23 2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sslmo 2012-09-24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늘 그렇지만...
'애정이 적은 사람이 아니라 표현이 적은 사람'이라는 님이 표현 좋아요.
참 많은 걸 생각하게 해요.
저, 표현이 적은 사람이랑 살면서 애정이 적은 사람이랑 사는 줄 착각하고 툴툴거린 날들을 돌아봤어요.
프레이야님, 감사~!
여긴 가을 햇살이 참 넉넉해요.
거긴요~?

프레이야 2012-09-25 11:12   좋아요 0 | URL
님, 저도 늘 툴툴거리며 살아요.^^ 생각해보면 참 많은 걸 가지고 누리고 사는데도 말이죠.
여기도 가을 햇살이 밝고 넉넉해요. 마음에서 분노나 불만이 일어날 때면 그건 사실과는 달리
무의식의 기억이나 상처가 일어나는 것이라고 하네요. 사실과 기억은 다를 수 있다는 것,
그걸 깨닫고 멈추면 되는데.. 브레이크 작동 잘 하며 살아야겠어요.^^
 
라이팅 클럽
강영숙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오래전 폴 오스터의 어느 책표지에서 본 이후로 나는 표지나 삽화에 실재하는 수동타자기라면 사족을 못쓴다. 수동타자기의 추억은 그보다 더더 오래전 이십대 초반으로 거슬러 간다. 신입생이 된 나는 영문타자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학교 앞 타자학원에 등록했다. 여름으로 접어들어 한낮의 열기가 제법이었던 어느 날, 작고 낡고 후텁지근한 공간에 앉아 거리로 난 창문을 활짝 열고 차소리를 들어가며 타.닥.타.닥 ...  내 촉수는 온통 타자기 소리로 뻗치고 한두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나 몰랐다. 한달 후 강사에게 물어보니 집으로 가져가서 연습할 수 있게 타자기를 대여해 준다는 것이다. 학원은 한 달이면 충분했고 집에서도 한 달이면 되었다. 한글타자보다 영문타자가 훨씬 쉽다. 받침이 없으니.

 

한글타자기도 그 후 대여해 와 집에서 연습했다. 몸으로 익힌 건 잊어먹지 않는다더니 지금도 영문타자를 더 잘 친다.  이후 개인용 컴이 보급화되고 누구나 부드러운 자판에 미끄러지듯 손가락질을 하지만 나는 그때 그 수동타자기의 촉감과 소리가 참말 좋다. 먹끈를 갈아끼우며 손이 시커멓게 되던 일, 한 행을 치면 왼쪽에 달린 막대를 조작해 덜커덩 행을 내려주고 종이 한 면을 다 치고 나면 레버를 돌려 종이를 빼고 새 종이를 갈아끼우고. 종이가 자주 끼이기도 하고 먹끈이 감기기도 하지만, 한 타 한 타 내려칠 때마다 톡.톡... 활자판이 튀어나가 종이에 찍히는 기막힌 광경을 쳐다보며 글을 쓴다는 건 말할 수 없는 희열이다. 한 자 한 자 내 생각과 마음이 곧바로 교감과 이해를 얻는 듯 눈 앞에서 내 눈을 보고 맞장구 쳐주는 것과 같은 그런 기분이랄까. 지금도 집에 골동품 같은 수동타자기가 있다. 외국 것이라 영문타자기인데 가끔 자판을 몇 개 탁.탁. 쳐본다. 고장나 작동은 안 되고 둔탁한 소리를 내지만 오래 갖고 있고 싶은 물건이다.

 

수동타자기의 낡은 기억을 늘어놓은 까닭이 있다. 강영숙의 소설 <라이팅 클럽>이 끌렸던 건 다분히 저 표지의 수동타자기 때문이다. 그리고 '라이팅'이라는 낱말에도. 예를 들어 '글쓰기 수업'이라고 제목 짓지 않은 건 어떤 효과가 있는 것 같다. 이야기를 다 읽어보면 왜 우리말 제목을 짓지 않았는지 수긍된다. 분명히 내가 이 소설을 읽게 된 건 또 행운이었고 인연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작년이었던가? 어느 모임에서 '내 삶의 키워드'를 발표하는 기회가 있었다. 나는 바로 '글쓰기'를 떠올렸지만 발표는 잘하지 못했던 것 같다. 내 진심이 잘 전해졌는지 모호하다. 말이든 글이든 쉽지 않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런 것이다. 진실과는 다르게 들릴 수도 있고 지나친 자기검증과 겸손의 책무로 덜 전해지기도 하고 잘못하면 과시나 자만으로 들릴 수도 있고, 아무튼 말과 글은 늘 오해의 소지를 그림자처럼 달고 태어난다. 그렇다고 주눅들지 말자. 글쓰기는 삶의 방식이고 양식이며 삶 그 자체라고 <라이팅 클럽>이 자신있게 응원하고 있으니.

 

 

중요한 건 의지가 아니라 테크닉이다. - 9p

 

 

<라이팅 클럽>을 여는 첫 문장이다. 눈치 챌 수 있겠지만 라이팅을 리빙 정도로 대입한다면 삶은 의지만으로 충분한 게 아니라 테크닉이라는 말이 된다. 이 소설은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은 물론 글쓰기를 시작하는 사람, 중도에 딜레마에 빠져있는 사람, 삶이 충분히 풀리지 않는다고 여겨져 의기소침한 사람 모두에게 적절한 보람을 준다. 작가는 글쓰기에도 삶에도 기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적지 않은 세월을 살아왔고 지금도 늘 요령 부득으로 살고 있는 나는 이 말에 공감한다. 소설 속 김 작가와 딸(주인공)은 지지부진한 삶과 글쓰기를 병행하며 결국 삶의 테크닉, (세상과 사람과의)관계의 테크닉, 글쓰는 일의 테크닉을 몸으로 익힌다. 내가 얻은 결론은 누구나 자기 삶의 승리자이고 패배자는 없다는 사실이다. 삶이건 글이건 테크닉이라고 하니 거창한가. 그렇지도 않다, 사실은. 우리가 대체로 알고 있는 구체적 글쓰기의 테크닉도 알고 있어도 잘 작동하지 않는다. 중요한 건 테크닉보다 연습이 아닐까. 시행착오와 전쟁과 아픔과 상처의 나날을 거듭하는 연습. 죽기와 살기를 반복하는 지난한 연습. 글쓰기의 과정만 놓고 봐도, 아무리 허섭스레기 같은 초기의 일기류 글과 구구절절이라 해도 그것을 월반해서는 다음 단계가 오지 않는다. 그런 지리멸렬한 과정을 거쳐, 결국 치를 것은 다 치러야 '그 다음'이란 게 있다. 삶도 그런 것이다.

 

 

비유로, 거짓말로 구질구질한 실존의 고통을 비켜 갔다 - 269p

 

 

한 때 나는 잡문이든 아니든 왜 깊은 밤 잠 안 자고 글을 쓰고 있나, 자문한 적이 있다. 답은 쉽게 나왔다. 고통을 비켜 가기 위해. 배설이라도 나쁘지 않다. 痛하고 慟해야 通하니까. 저 인용 구절의 '비유'는 시로 '거짓말'은 소설로 범위를 좁힐 수 있다. 글쓰기를 통해 구질구질한 실존의 고통을 비켜가고 싶은 무의식의 욕망이 작용한 것이다.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한다. 그걸 나무랄 수 없다. 자신의 것을 다 토해내야 남의 것도 들어온다. 대개 우리는 남의 이야기에는 오래 집중하지 못하는 법이다. 그러나 너머의 너머 세상으로 가기 위해선 타인의 일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단계가 온다.

 

 

자, 이제 우리의 수업 방향을 좀 바꿔야 해요. 특정한 사물이나 현상, 혹은 이미지로부터 얘기를 만들어나가는 훈련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에 왔어요. - 173p

 

 

시간과 공간, 이 두 가지 중 어떤 것이 더 중요할까, 라는 우문에 접한 적이 있다. 공간설정이야 말로 이야기의 상당히 중요한 조건이다. 강영숙 작가는 공간을 관찰하는 정도가 아니라 탐구하라고 한다. 누구나 느끼겠지만 공간이 나를 지배한다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자신을 낯선 공간에 두고 싶은 열망에 여행을 하고 생경한 공간에 자신을 두어 다르게 물들어가는 그 순간의 마음에 집중해보기도 한다. 그 공간은 점멸등처럼 기억의 스위치를 켰다껐다 반복하고 공간마저 잠식하는 시간의 잔인함을 이기는 힘이 된다. 다음 팁은 소설은 물론 다른 장르의 글을 쓰는 사람 모두에게 유효하다.

 

 

나는 그때 뭔가를 자세히 들여다본다는 것,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간을 탐구하는 것이 글을 쓰는 데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라는 걸 감각적으로 알게 되었다. 공간을 제대로 설정하라. 그러면 글은 생각보다 훨씬 더 자연스럽게 써지고 훨씬 더 힘 있게 진행된다!   - 199p

 

 

주인공을 빌어 작가는 글쓰기 모드의 필요조건으로 날씨가 너무 더워선 안 되고 배가 너무 고파도 불러도 안 된다고 썼다. 배가 부르면 문제의식을 상실하고 배가 고프면 꼬르륵거리는 소리 때문에 글 쓰는 데 집중을 못 한다고 우스개처럼 말한다. 이 소설은 가벼워 보이는 화법을 쓰지만 그렇지 않다. 블로그의 시대, 누구나 글을 쓰는 시대에 우리의 욕망이 어디로 어떻게 투사되는지 그리고 그 방향성은 어떠해야할지도 생각해보게 하는 소설이다. 술술 잘 읽히는 멋내지 않은 문장으로 날강날강한 삶의 이면을 측은하게 바라보게 하면서 결국 눈물나게 따뜻하고 힘찬 기운을 주는 강영숙 소설가의 다른 작품을 찾아보게 만드는 소설이다.

 

 

 

-------

 

이 소설에 언급된 책 15권을 메모해둔다. 언젠가 찾아읽고 싶은 책들.

작가는 '어떤 경우 책은 너무 많은 걸 감춰주는 보호 장치의 역할도 한다'며, 책을 읽는 상대의 첫번째 좋은 이미지 속으로 쏙 들어가 모든 걸 덮어버린 결과는 오해나 착각을 불러왔고 대부분 좋지 않았다고 주인공을 고백한다. 그래도 책읽기는 글쓰기와 도반인 걸. J작가가 주인공 영인에게 준 읽어야할 책 목록을 보물처럼 간직하고 읽고 읽었듯. 읽고 쓰고, 쓰고 읽고, 생각하고 구축하고, 그리고 넘어서기!

 

1. 노동일기/ 시몬느 베이유

2. 형태의 삶/ 앙리 포시용

3.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하인리히 뵐

4. 제8요일/ 마렉 플라스코

5. 닥터지바고/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6. 자기만의 방, 댈러웨이부인/ 버지니아 울프

7. 디 아워스

8. 더 이상 어머니는 없다/ 에이드리언 리치

9. 티보가의 사람들

10. 캬라멜 공장부터/ 사다 이네코

11. 강철군화/ 잭 런던

12. 인간은 모두가 죽는다/ 시몬느 보봐르

13. 돈 키호테/ 세르반테스

14. 파울라/ 이사벨 아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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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2-09-21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탁탁탁...타자기 두드리는 소리를 좋아하셨구나...
저도 그 타자기 소리와 관련된 페이퍼를 언젠가 한번 올려야겠어요.
강영숙 작가 글 좋아요. 이 책 말고 다른 책들도 제가 읽어본 것들은 다 좋았어요.

프레이야 2012-09-22 18:50   좋아요 0 | URL
나인님의 리뷰로 얼핏 이 책을 본 것 같아요.
다른 작품을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페크pek0501 2012-09-21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이 쓴 리뷰를 맛있게 음미하다가 내려오니 벌써 다 읽고 말았다는...ㅋ

14권의 목록은 저도 어디다 적어 놓고 싶군요. 전 이중 세 권만 읽었네요.
잘 읽고 갑니다. 자 알...


프레이야 2012-09-22 18:51   좋아요 0 | URL
그 중 세 권이나요!! 전 한 권 달랑.^^
맛있게 읽어주셔서 고마워요, 페크님.

하늘바람 2012-09-21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재미나게 읽었어요 리뷰를 볼

프레이야 2012-09-22 18:52   좋아요 0 | URL
하늘바람님, 읽으셨군요, 이 소설.
산후조리 잘 하셔야 해요.
마침 계절이 참 좋은 때라 행운이에요. 반디도 엄마도^^

자목련 2012-09-23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영숙의 소설, 좋아요. 특히 이 장편은 정말 재미있게 읽었어요.
단편집 <아령 하는 밤>, <빨강 속의 검정에 대하여>도 좋았어요.
한데 프레이야님의 리뷰는 더 좋아요!!

프레이야 2012-09-23 18:04   좋아요 0 | URL
역시 문학을 사랑하시는 자목련님^^
권해주신 강영숙의 단편집도 담아둡니다.
고마워요~~~~
 
지금, 내 곁에 있는 책 52쪽의 다섯 문장

그것을 '공장'의 범주에 집어넣는 데 결코 반대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솔직히 말해 그건 공장 외의 다른 무엇이라고도 할 수 없다.

 

일종의 공장인 결혼식장, 혹은 '결혼식장'이란 이름의 공장에서 사용하는 원료는 아름아닌 신랑 신부로 불리는

한 쌍의 남녀이며, 그 기계적 추진력은 전문적 노하우와 숙달된 서비스, 주된 부가가치는 감동

(좀더 소극적으로 표현하면 정서의 고양), 그 수요를 뒷받침하는 것은 세상 일반의 '관례, 상식, 습관'이다.

그런 식으로 결혼식장에서는 오늘도 흉일만 아니면 한 회 또 한 회, '의식'이라는 이름의 휘황찬란한 상품이 생산되고 있다.

 

그렇다고 내가 이런 '결혼식 공장'과도 같은 결혼식장의 성격을 비판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무슨 책의 구절인지 아실 것 같아요. 많은 분이요.^^

저는 도서관에서 빌려와 재미나게 읽은 책인데 지금 컴 옆에 제일 가까이 있는 책입니다.

반납 기일을 못 지키고 이러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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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 2012-09-20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ㅠㅠ 헉 저는 왜 모르겠죠?

프레이야 2012-09-21 09:59   좋아요 0 | URL
서늘한달빛님, 반갑습니다.^^
근데 모르셔도 좋아요. 세상에는 책이 너무 많은데 그걸 어떻게 다 읽어요? ^^

2012-09-21 15: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춤추는인생. 2012-09-20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주를 즐겨마시고 달리기를좋아하는. 아시아 최고의 작가님이시죠. 섭가는중이라 급하게 인사드려요. 혜경님 ㅎㅎ. 이가을. 알차게 맞이하시길요 ~^^

프레이야 2012-09-21 09:27   좋아요 0 | URL
춤인생님, 수업 가는 중에.. 너무 오랜만, 반가워요.
가을 누리고 계시죠? 님도 좋아하는 작가군요. 그럴 줄 알았어요.^^

댈러웨이 2012-09-20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아이참 프레이야님은. 무슨 책인지 알아냈어요. 왜 안 알려주시는 거에요? 저야말로 공장식 결혼식 치뤄놓고는 후회했어요. 그냥 양가 가족들만 모아놓고 단란하게 조촐하게 축복 받으면서 해도 됐을 것을 하면서요. 간소화되어져야 할 거창한 '의식'들이 참 많아요. 그나저나, 반납기일 준수 이꼬르 문화시민. =33333

프레이야 2012-09-21 09:29   좋아요 0 | URL
그게그게 책제목은 안 알려주는 거라네요.ㅎㅎ
저 글을 1986인가 썼으니 당시 일본에도 공장식 결혼식이 성행했나봐요.
우리도 대개 그렇지요. 저도 그랬구요. 하나의 '의식'이 필요한 심리,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더라구요.
근데 저는 아무래도 미개시민 ㅋㅋ
오늘은 꼭 반납할 거에요. 부끄러워서 얼굴 안 들고 책만 삐죽 던지듯 내밀고 나와야쥐.

sslmo 2012-09-20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몰라여~--;
전 일본 작가는 멀리하게 되는 경향이 있는지라...ㅋ~.

프레이야 2012-09-21 09:30   좋아요 0 | URL
ㅎㅎㅎ 역시 양철나무꾼님은 몰라~
일본 작가를 멀리하시니..ㅋ

페크pek0501 2012-09-20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것 참 좋은 아이디어의 페이퍼인데요. 재밌어요. ㅋ
그런데 어렵군요. 힌트를 주셔야 되는 것 아닌가요.
나중엔 꼭 답을 알려 주셔야 합니다.
보러 올게요.

프레이야 2012-09-21 09:31   좋아요 0 | URL
페크님, 힌트는 위의 댓글들 ㅎㅎ

2012-09-21 09: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9-21 13: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blanca 2012-09-21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정말요. 저도 지인들의 결혼식에 가도 무언가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이 항상 듭니다! 마지막에 주린 배를 움켜 쥐고 사진까지 꼭 찍고 와야 임무를 완성하는 것 같은 기분도 그렇고요--;;

프레이야 2012-09-22 20:10   좋아요 0 | URL
블랑카님, 정말 공장식 결혼식 재미없지요.
너무 복잡하고 틀에 박힌 절차하며... 좀 다르게 멋지게 해보고 싶어요.^^
이 책 읽으셨어요? 하루키 에세이 '해 뜨는 나라의 공장'인데요, 재미나게 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