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팅 클럽
강영숙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오래전 폴 오스터의 어느 책표지에서 본 이후로 나는 표지나 삽화에 실재하는 수동타자기라면 사족을 못쓴다. 수동타자기의 추억은 그보다 더더 오래전 이십대 초반으로 거슬러 간다. 신입생이 된 나는 영문타자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학교 앞 타자학원에 등록했다. 여름으로 접어들어 한낮의 열기가 제법이었던 어느 날, 작고 낡고 후텁지근한 공간에 앉아 거리로 난 창문을 활짝 열고 차소리를 들어가며 타.닥.타.닥 ...  내 촉수는 온통 타자기 소리로 뻗치고 한두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나 몰랐다. 한달 후 강사에게 물어보니 집으로 가져가서 연습할 수 있게 타자기를 대여해 준다는 것이다. 학원은 한 달이면 충분했고 집에서도 한 달이면 되었다. 한글타자보다 영문타자가 훨씬 쉽다. 받침이 없으니.

 

한글타자기도 그 후 대여해 와 집에서 연습했다. 몸으로 익힌 건 잊어먹지 않는다더니 지금도 영문타자를 더 잘 친다.  이후 개인용 컴이 보급화되고 누구나 부드러운 자판에 미끄러지듯 손가락질을 하지만 나는 그때 그 수동타자기의 촉감과 소리가 참말 좋다. 먹끈를 갈아끼우며 손이 시커멓게 되던 일, 한 행을 치면 왼쪽에 달린 막대를 조작해 덜커덩 행을 내려주고 종이 한 면을 다 치고 나면 레버를 돌려 종이를 빼고 새 종이를 갈아끼우고. 종이가 자주 끼이기도 하고 먹끈이 감기기도 하지만, 한 타 한 타 내려칠 때마다 톡.톡... 활자판이 튀어나가 종이에 찍히는 기막힌 광경을 쳐다보며 글을 쓴다는 건 말할 수 없는 희열이다. 한 자 한 자 내 생각과 마음이 곧바로 교감과 이해를 얻는 듯 눈 앞에서 내 눈을 보고 맞장구 쳐주는 것과 같은 그런 기분이랄까. 지금도 집에 골동품 같은 수동타자기가 있다. 외국 것이라 영문타자기인데 가끔 자판을 몇 개 탁.탁. 쳐본다. 고장나 작동은 안 되고 둔탁한 소리를 내지만 오래 갖고 있고 싶은 물건이다.

 

수동타자기의 낡은 기억을 늘어놓은 까닭이 있다. 강영숙의 소설 <라이팅 클럽>이 끌렸던 건 다분히 저 표지의 수동타자기 때문이다. 그리고 '라이팅'이라는 낱말에도. 예를 들어 '글쓰기 수업'이라고 제목 짓지 않은 건 어떤 효과가 있는 것 같다. 이야기를 다 읽어보면 왜 우리말 제목을 짓지 않았는지 수긍된다. 분명히 내가 이 소설을 읽게 된 건 또 행운이었고 인연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작년이었던가? 어느 모임에서 '내 삶의 키워드'를 발표하는 기회가 있었다. 나는 바로 '글쓰기'를 떠올렸지만 발표는 잘하지 못했던 것 같다. 내 진심이 잘 전해졌는지 모호하다. 말이든 글이든 쉽지 않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런 것이다. 진실과는 다르게 들릴 수도 있고 지나친 자기검증과 겸손의 책무로 덜 전해지기도 하고 잘못하면 과시나 자만으로 들릴 수도 있고, 아무튼 말과 글은 늘 오해의 소지를 그림자처럼 달고 태어난다. 그렇다고 주눅들지 말자. 글쓰기는 삶의 방식이고 양식이며 삶 그 자체라고 <라이팅 클럽>이 자신있게 응원하고 있으니.

 

 

중요한 건 의지가 아니라 테크닉이다. - 9p

 

 

<라이팅 클럽>을 여는 첫 문장이다. 눈치 챌 수 있겠지만 라이팅을 리빙 정도로 대입한다면 삶은 의지만으로 충분한 게 아니라 테크닉이라는 말이 된다. 이 소설은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은 물론 글쓰기를 시작하는 사람, 중도에 딜레마에 빠져있는 사람, 삶이 충분히 풀리지 않는다고 여겨져 의기소침한 사람 모두에게 적절한 보람을 준다. 작가는 글쓰기에도 삶에도 기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적지 않은 세월을 살아왔고 지금도 늘 요령 부득으로 살고 있는 나는 이 말에 공감한다. 소설 속 김 작가와 딸(주인공)은 지지부진한 삶과 글쓰기를 병행하며 결국 삶의 테크닉, (세상과 사람과의)관계의 테크닉, 글쓰는 일의 테크닉을 몸으로 익힌다. 내가 얻은 결론은 누구나 자기 삶의 승리자이고 패배자는 없다는 사실이다. 삶이건 글이건 테크닉이라고 하니 거창한가. 그렇지도 않다, 사실은. 우리가 대체로 알고 있는 구체적 글쓰기의 테크닉도 알고 있어도 잘 작동하지 않는다. 중요한 건 테크닉보다 연습이 아닐까. 시행착오와 전쟁과 아픔과 상처의 나날을 거듭하는 연습. 죽기와 살기를 반복하는 지난한 연습. 글쓰기의 과정만 놓고 봐도, 아무리 허섭스레기 같은 초기의 일기류 글과 구구절절이라 해도 그것을 월반해서는 다음 단계가 오지 않는다. 그런 지리멸렬한 과정을 거쳐, 결국 치를 것은 다 치러야 '그 다음'이란 게 있다. 삶도 그런 것이다.

 

 

비유로, 거짓말로 구질구질한 실존의 고통을 비켜 갔다 - 269p

 

 

한 때 나는 잡문이든 아니든 왜 깊은 밤 잠 안 자고 글을 쓰고 있나, 자문한 적이 있다. 답은 쉽게 나왔다. 고통을 비켜 가기 위해. 배설이라도 나쁘지 않다. 痛하고 慟해야 通하니까. 저 인용 구절의 '비유'는 시로 '거짓말'은 소설로 범위를 좁힐 수 있다. 글쓰기를 통해 구질구질한 실존의 고통을 비켜가고 싶은 무의식의 욕망이 작용한 것이다.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한다. 그걸 나무랄 수 없다. 자신의 것을 다 토해내야 남의 것도 들어온다. 대개 우리는 남의 이야기에는 오래 집중하지 못하는 법이다. 그러나 너머의 너머 세상으로 가기 위해선 타인의 일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단계가 온다.

 

 

자, 이제 우리의 수업 방향을 좀 바꿔야 해요. 특정한 사물이나 현상, 혹은 이미지로부터 얘기를 만들어나가는 훈련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에 왔어요. - 173p

 

 

시간과 공간, 이 두 가지 중 어떤 것이 더 중요할까, 라는 우문에 접한 적이 있다. 공간설정이야 말로 이야기의 상당히 중요한 조건이다. 강영숙 작가는 공간을 관찰하는 정도가 아니라 탐구하라고 한다. 누구나 느끼겠지만 공간이 나를 지배한다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자신을 낯선 공간에 두고 싶은 열망에 여행을 하고 생경한 공간에 자신을 두어 다르게 물들어가는 그 순간의 마음에 집중해보기도 한다. 그 공간은 점멸등처럼 기억의 스위치를 켰다껐다 반복하고 공간마저 잠식하는 시간의 잔인함을 이기는 힘이 된다. 다음 팁은 소설은 물론 다른 장르의 글을 쓰는 사람 모두에게 유효하다.

 

 

나는 그때 뭔가를 자세히 들여다본다는 것,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간을 탐구하는 것이 글을 쓰는 데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라는 걸 감각적으로 알게 되었다. 공간을 제대로 설정하라. 그러면 글은 생각보다 훨씬 더 자연스럽게 써지고 훨씬 더 힘 있게 진행된다!   - 199p

 

 

주인공을 빌어 작가는 글쓰기 모드의 필요조건으로 날씨가 너무 더워선 안 되고 배가 너무 고파도 불러도 안 된다고 썼다. 배가 부르면 문제의식을 상실하고 배가 고프면 꼬르륵거리는 소리 때문에 글 쓰는 데 집중을 못 한다고 우스개처럼 말한다. 이 소설은 가벼워 보이는 화법을 쓰지만 그렇지 않다. 블로그의 시대, 누구나 글을 쓰는 시대에 우리의 욕망이 어디로 어떻게 투사되는지 그리고 그 방향성은 어떠해야할지도 생각해보게 하는 소설이다. 술술 잘 읽히는 멋내지 않은 문장으로 날강날강한 삶의 이면을 측은하게 바라보게 하면서 결국 눈물나게 따뜻하고 힘찬 기운을 주는 강영숙 소설가의 다른 작품을 찾아보게 만드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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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에 언급된 책 15권을 메모해둔다. 언젠가 찾아읽고 싶은 책들.

작가는 '어떤 경우 책은 너무 많은 걸 감춰주는 보호 장치의 역할도 한다'며, 책을 읽는 상대의 첫번째 좋은 이미지 속으로 쏙 들어가 모든 걸 덮어버린 결과는 오해나 착각을 불러왔고 대부분 좋지 않았다고 주인공을 고백한다. 그래도 책읽기는 글쓰기와 도반인 걸. J작가가 주인공 영인에게 준 읽어야할 책 목록을 보물처럼 간직하고 읽고 읽었듯. 읽고 쓰고, 쓰고 읽고, 생각하고 구축하고, 그리고 넘어서기!

 

1. 노동일기/ 시몬느 베이유

2. 형태의 삶/ 앙리 포시용

3.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하인리히 뵐

4. 제8요일/ 마렉 플라스코

5. 닥터지바고/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6. 자기만의 방, 댈러웨이부인/ 버지니아 울프

7. 디 아워스

8. 더 이상 어머니는 없다/ 에이드리언 리치

9. 티보가의 사람들

10. 캬라멜 공장부터/ 사다 이네코

11. 강철군화/ 잭 런던

12. 인간은 모두가 죽는다/ 시몬느 보봐르

13. 돈 키호테/ 세르반테스

14. 파울라/ 이사벨 아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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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2-09-21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탁탁탁...타자기 두드리는 소리를 좋아하셨구나...
저도 그 타자기 소리와 관련된 페이퍼를 언젠가 한번 올려야겠어요.
강영숙 작가 글 좋아요. 이 책 말고 다른 책들도 제가 읽어본 것들은 다 좋았어요.

프레이야 2012-09-22 18:50   좋아요 0 | URL
나인님의 리뷰로 얼핏 이 책을 본 것 같아요.
다른 작품을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페크pek0501 2012-09-21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이 쓴 리뷰를 맛있게 음미하다가 내려오니 벌써 다 읽고 말았다는...ㅋ

14권의 목록은 저도 어디다 적어 놓고 싶군요. 전 이중 세 권만 읽었네요.
잘 읽고 갑니다. 자 알...


프레이야 2012-09-22 18:51   좋아요 0 | URL
그 중 세 권이나요!! 전 한 권 달랑.^^
맛있게 읽어주셔서 고마워요, 페크님.

하늘바람 2012-09-21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재미나게 읽었어요 리뷰를 볼

프레이야 2012-09-22 18:52   좋아요 0 | URL
하늘바람님, 읽으셨군요, 이 소설.
산후조리 잘 하셔야 해요.
마침 계절이 참 좋은 때라 행운이에요. 반디도 엄마도^^

자목련 2012-09-23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영숙의 소설, 좋아요. 특히 이 장편은 정말 재미있게 읽었어요.
단편집 <아령 하는 밤>, <빨강 속의 검정에 대하여>도 좋았어요.
한데 프레이야님의 리뷰는 더 좋아요!!

프레이야 2012-09-23 18:04   좋아요 0 | URL
역시 문학을 사랑하시는 자목련님^^
권해주신 강영숙의 단편집도 담아둡니다.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