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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절반은 맛이다 - 박찬일 셰프 음식 에세이
박찬일 지음 / 푸른숲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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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이 남다른 저자들이 많은데 박찬일도 이력이 남다르다. 기자 출신답게 군더더기 없이 치고 나가는 문장이 힘있고 맛깔져 읽는 재미가 있다. 인간관계도 전방위 같은데 김중혁 등 문학계 사람들은 물론 기자 시절 이탈리아 영화에 매료되어 이탈리아로 음식 유학을 갔을 정도이니 셰프들과의 관계도 그렇고, 달걀을 몸서리치게 좋아하고 술 잘 마시고 새로운 음식 먹는 것도 좋아하고 두루 호쾌한 사람 같다. 특히 음식을 만드는 사람은 미각만이 아니라 상당히 예민한 감각을 본능적으로 지니고 있어야 될 것 같은데 저자가 그런 느낌을 준다. 섣부른 판단일 수도 있지만 에세이는 어떤 식으로든 글쓴이가 보여서 읽는 이와 쓴 이의 거리가 상대적으로 가까운 글쓰기 방식이라 좋다.

 

'맛'에 대한 이야기다. '인생 앞에 놓인 수많은 맛의 강물을 건너는 당신에게'라는 헌사로 서문을 시작한다. 음식의 맛에 대한 이야기이고 추억의 맛에 대한 이야기다. 글쓴이의 맛의 추억이 읽는 이에게도 위로의 맛이 될 수 있다니, 맛난 책이다. 단순히 남의 이야기를 읽는 것에서 그친다면 부족하겠다. 언급된 어떤 재료든 맛나게 조리할 수 있는 '비법'이라든지 쉽고도 자신있게 해볼 수 있는 자신만의 조리법도 제공하고 있다. 유머와 농담을 섞어가며 엽기적인 먹을거리 후일담을 늘어놓고 잠시 사색에 빠지고 철학하다가고 아무렇지 않은 척한다. 참새머리 오도독 씹기나 죽어도 다리에 남아있는 신경의 꿈틀거림으로 생존을 항변하는 블랙유머의 주인공 산낙지 아니 죽은 낙지의 추억 같은 것.

 

저자에 의하면 음식의 맛이란 지구시계의 1년을 기준으로 12월 31일 오후 다섯 시의 존재, 그 인간시계의 오후 다섯 시에 나타났다. 오후 다섯 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 해거름을 준비하는 시간이잖은가. 음식의 맛을 위해 공을 들이는 일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란 얘기인데 나로서는 쓸쓸하고도 충만하게 지는 해를 가슴으로 맞을 준비를 하는 시간과 그 이전 시간의 추억을 곱씹는 재미도 더했다. 돌이켜보면, 음식을 만드는 일도 먹는 일도 그렇게 거룩했다.

 

세 개의 장으로 나뉜다. 1부는 우리 땅에서 몸에 지문처럼 새겨진 맛의 추억, 2부는 외국 땅의 낯선 맛의 추억, 3부는 문학작품 속에 등장하는 음식과 맛의 추억이다.

 

1부에서는 21가지 우리 음식이 불러오는 추억을 이야기한다. 어린 시절 수박 화채 속에 둥둥 떠 있던 송곳으로 깬 날카로운 예각의 얼음맛, 스러져간 가부장의 권위가 서글픈 닭백숙의 기억, 각자의 입안에서 이질적인 맛의 창조를 찾아내는 아름다운 공간 배열의 남도 한상 차림, 어머니가 쌓은 찬합의 높이로 추억하는 운동회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전은 지구전(持久戰)이다,에서는 전을 대표 슬로 쿠킹으로 부르며 명절이면 소쿠리 가득 하루 종일 전을 부쳐야하는 여자들의 힘든 노동을 알아주는 대목이 나온다. 명절이면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픈데 그걸 알아주는 남자가 여기 있다.

 

경북 내륙지방의 배추전에 대한 추억이다.

 

전은 기름막이 있는 듯 없는 듯 바른 팬에서 천천히 요리해야 하는 음식이다. 손님이 아무리 난리를 쳐도, 후딱 만들어서는 안 되는 음식이다. 그래서 전은 지구전이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워 학대하면서 만드는 음식이다. 그걸 아는 집을 여간해서는 찾기 어렵다. 역시 늙으신 어머니를 다시 졸라야 하나.   - p83

 

 

2부에서는 15가지 외국음식의 추억을 불러온다. 나는 이 장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치즈, 랍스터, 소 내장 요리, 라멘, 바칼라, 딤섬, 이슬람의 할랄푸드 등 다른 문화를 맛과 함께 받아들이는 이야기가 흥미롭고 유익하다. 이탈리아적인 서사로 기억한다는 '대부'에 매료되어 시칠리아 섬으로 간 저자가 카놀리와 토마토소스를 첫 순서로 말하는 건 당연한 일.

 

시칠리아 유학 당시 스승, 주세페가 전하는 초콜릿 소스 토끼요리는 특별하다. 공정무역으로 들여온 카카오 초콜릿으로 '가장 순수하고 가장 품질 좋은' 초콜릿을 만든 그의 초콜릿 소스에는 마성이 깃들어 있다고 느낀다니. 주세페는 말한다.

"대지의 기운, 흙냄새, 먼지바람, 새벽이슬 같은 게 카카오의 본래의 맛과 냄새야. 잘 맡아봐. 아프리카의 카카오는 무언가 건조하고 대륙적이고, 아메리카의 카카오는 습하고 진하며 나무냄새가 많이 나. 둘 다 태양을 닮은 맛이라는 건 공통점이지." (p194) 

 

저자가 마음에 새긴 주세페의 말은 삶을 살만 한 것으로 만든다.

 

"초콜릿소스의 토끼 고기 같은 건 이제 먹지 않을 줄 알았어. 이탈리아에 맥도널드가 들어오고 나서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지. 그렇지만 나는 아직도 그걸 만들고,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알아? 낙관하는 거야.

희망이 없으면 삶이 무슨 소용이지? "   - p195

 

 

이슬람의 할랄(허용,이란 뜻) 푸드에 대한 구절은 새삼 놀라운 각성이다.

 

 

할랄 푸드와 수식(手食)은 강제된 것은 아니지만,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 교차점을 맞붙이고 있는 것 같다. 오직 오른손을 써서, 살과 소스를, 할랄의 고기를 꾹꾹 뭉쳐 먹는 온전한 手食은 지상에서 가장 경건한 식사법이다. 신이 주신 모든 먹을거리는 손을 통해 그 존재의 각성을 불러온다. 따뜻한 음식을 체온으로 집을 때 그것은 비로소 내 몸이 될 것이란 확신을 얻곤 한다. (중략)

"손 있는 자, 그대 손으로 음식을 집으라. 신이 거기 있으리라."   - p229

 

 

 

3부에서는 황새치가 나오는 <노인과 바다> 등 9편의 작품을 통해, 한때 이러저러한 소재로 소설쓰기에 도전해봤던 고백도 있고 문학에 대한 그의 끊이지 않는 애정을 엿볼 수 있다. 문학작품 속에서 음식과 관련한 이야기를 끌어온다. 백영옥의 '스타일'을 들어 쓴 '고기 권하는 사회'에서도 아버지가 생각났지만, 박완서 '그 남자네 집'에서 저자가 길어올린 민어의 추억이 맛나다. 여기서 '포만감'에 덜커덕 걸려든 것이다. 저자는 우리가 먹는 행위를 통해 얻는 만족감은 혀에서 두루 느껴지는 화학적 반응에만 기대는 게 아니란 걸 집어낸다. 포식가들의 손을 들어주는 그는 진정한 미식가이지 않은가. 미식가들이야 여러가지 음식을 소량 맛보며 맛에 대한 평론까지 해야할지 모르지만 대개의 우리는 음식이 내 손을 거쳐 식도를 타고 내려가 위장을 부풀려주는 그 포만감에 흡족해 한다. 재료는 두툼해야 하고 양도 적어서는 안 된다. 혀의 오르가슴을 더해주면 금상첨화지만 절정의 감각은 일순간의 것, 그 순간이 지나면 체감되고 망각된다. 그에 비해 포만감은 상대적으로 좀더 오래간다.

 

민어는 식도를 자극하는 통쾌한 맛이 있었다. 두껍게 썰어 질감을 살린 횟점이 식도를 넘어가며 위에 포만의 자극을

시작한 셈이었다. 미각이란 때론 화학적 반응을 넘어 물리적 현상으로도 읽을 수 있는 것일까.   - p272

 

 

내 아버지는 고기대왕이다. 생선보다 육류의 살점을 즐기는 당신은 여든이 넘은 생, 평생 몸을 키우고 만들고 그 몸으로 일하고 늙어가는 생명의 재료로 고기를 드셨다. 우리 삼남매는 당신 몸의 등골을 빼먹고 자랐다. 아버지가 먹은 소를 일렬로 세운다면 그 길이가 얼마일지 가늠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런 얘길 하며 웃곤 하시는데 지금은 드시는 양 자체가 줄었다. 어린 시절 기억에도 고기가 오르지 않은 밥상은 한번도 없었다. 채식을 하면 소화가 안 되니 상추 같은 채소가 곁들여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생마늘이나 생양파가 채소를 대신한다. 고기는 무한정 소화가 되니 특이체질도 그런 체질이 없다. 그래도 혈압도 정상이고 성인병이라곤 없다. 아버지는 고기를 얇고 잘게 썰면 싫어하신다. 두툼한 고기살의 붉은 기운이 가시기 전에 지글지글 매 끼니 드시니 주방엔 늘 기름기가 배어있었다. 식탁도 바닥도 주방 벽지도 누렇고 찐득거려 육식을 좋아하지 않는 어머니는 힘드실 수밖에. 그래도 밑반찬 요것조것 해야하는 상차림보다 수월하다고 하신다.

 

낚시에 걸린 민어를 바라보며 저자는 요리와 생명과 먹는 일의 숙명적 관계를 이렇게 쓴다.

 

 

고기가 사후 경직이 일어나듯 생선도 그렇다. 붉거나 푸르거나 선명한 색채의 몸통 빛이 서서히 사라지고, 산소 부족으로 청색증이 돌듯이 사악하고 창백한 푸른 기운이 돌기 시작한다. 그것은 그로테스크하기까지 하다. 생명이 사라지는 과정이다. 요리는 생명을 위해 복무하지만, 그 재료는 아이러니하게도 생명에서 얻는다. 육식하는 사람의 태생적인 딜레마랄까. 번민은 그렇게 시작될 것이다.  - p268

 

 

음식의 맛, 추억의 맛은 오후 다섯 시의 맛이란 말에 끄덕거려진다. 추억의 절반은 맛이라고 하니, 나머지 절반은 무얼까.

먹어서 '내가 된' 저자처럼 해거름에 서서 맛을 추억하는 아버지와 나, 그리고 멀가까운 인연들을 생각한다.

 

 

 

 

 

 

 

ps)  좋은 책에 오자가 둘 있어 아쉽다.

       p194 /아프리카 사람들은 뱀을 숭상한다. 대지를 배고 훑고 다니면서 어머니 대지와 동거한다. (배고 --> 배로)

       p263 /소설 속의 새댁은 아마도 작가의 어릴 적 분신은 혐오의 기분까지 한껏 내비치고 있었다. (분신은 --> 분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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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2-09-25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식의 맛은 추엇의 맛이기도 하다는 말에 전적으로 공감이되는 글입니다. 이번 명절이 지나고 프랑스로 유학을 가는 녀석에게 사람의 마음을 치유할 수 있고, 풍요롭게 할 수 있는 파티쉐가 되어서 오라고 하면서 선물한 책입니다.

프레이야 2012-09-26 16:49   좋아요 0 | URL
추억을 불러주는 음식, 누구에게나 있겠지요.
맛깔나게 쓰느냐의 문제는 다른 문제겠지만요.
이 책은 벗에게 좋은 선물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LAYLA 2012-09-26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를 보고 어찌 책을 사지 않을 수 있겠어요...바로 사러 갑니다 ㅎㅎㅎ

프레이야 2012-09-27 07:43   좋아요 0 | URL
홍홍! 사셨어요?ㅎㅎ
맛나게 읽으실 거에요. ^^

페크pek0501 2012-09-27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세이는 어떤 식으로든 글쓴이가 보여서 읽는 이와 쓴 이의 거리가 상대적으로 가까운 글쓰기 방식이라 좋다."
저는 글에서 저를 숨기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 배워야겠군요. 잊고 있었어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알아? 낙관하는 거야. "
이것도 배워 갑니다.^^

프레이야 님, 저도 오후 다섯 시부터 어두워지기 직전까지의 시간을 좋아한답니다.
요즘 이 시간에 산책을 하면 죽이죠. ㅋㅋ

프레이야 2012-09-27 20:47   좋아요 0 | URL
낙관이 때론 위험하단 생각을 하먼서도 그럼에도 그게 최선의 태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귀착해요. 페크 님도 해 넘어가는 그 시간을 좋아하시는군요. 와락 반가워라. 님이랑 저는 기가 비슷한 거 같다능ᆢ 호호~~~ 개와 늑대의 시간이기도 한 그 시간, 공원산책 하며 저도 호흡 좀 가다듬어야겠어요. 산책! 이 말 참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