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늦은 감이 있지만 요즘 맛나게 야곰야곰 먹고 있는 문정희 시집.

언어의 창조, 시의 창조, 세상의 창조. 파괴도 서슴치 않아.

잉태와 생산의 관능, 그 이름 다산의 처녀.

 

 

다산의 처녀 / 문정희 / 2010 민음사

 

 

 

 

 

 

이번 추석연휴가 다가오기 며칠 전부터 유난히 깨송편이 먹고 싶었다.

엄마에게 만들어달라고 부탁하려다 힘드실까봐 그만 뒀는데, 추석 날 저녁에 가보니 깨송편이 식탁에 있는 거다.

며느리랑 어린 조카 둘이랑 만들었단다. 오래오래 전, 엄마가 익반죽을 하고 꿀이 지르르 흐르게 깨속을 만들어주면

내가 90% 빚었던 그 깨송편을. 모양도 가지가지 크기도 가지가지, 좀 우스웠지만 얼른 한입 넣었다.

그런데 맛이 그게 아닌 거다. 달지도 않고 입에 착 붙지도 않고 윤기도 없고. 그래도 아무 말 않고 있으니 엄마가 먼저

송편이 옛날 맛이 안 나서 속상하다는 거다. 수입깨라 그렇단다. 그렇기도 하겠다 싶었다. 예전에 모두 국산참깨라서

맛이 확실히 달랐다고. 실망한 얼굴로 맛 없어 하던 내가 마음에 걸렸던지 엄마는 그 다음날 내게 불쑥 전화를 하셨다.

송편 먹다가 맛이 없어 화나서 전화한다시며.ㅎㅎㅎ 

그래도 싸주신 깨송편 맛나게 먹었다. 속을 좀 많이 넣은 건 맛있더구만.^^

 

그날 옛날 사진첩이 거실에 나와 있었다. 뒤적여 보니 젊은 아빠 엄마가 들어있고 지금보다 풋풋하니 순수하고 참한

모습의 여동생, 지금보다 사프해 보이는 훈훈한 남동생, 그리고 지금보다 더 뽀얗고 반짝반짝한 내가 들어 있는 거다.

"나는 안 늙을 줄 알았다."

엄마의 말씀이셨다. 미모가 출중했던 젊은 날의 엄마사진을 보면 정말이지 세월이 잔인하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의 오십 초반 시절의 사진이 보였다. 아빠가 하시는 일을 늘 함께하며 바깥 출입을 잘 못하며 사셨던 엄마가

오십쯤 되니 바깥 활동도 하시고 원래 강한 지적 욕구도 채우고 어쩌면 그때가 엄마의 봄날이었을지도 모른다.

그해 여름 나는 아파트로 두번째 이사를 하였고 엄마는 대학 평생교육원에서 서예와 수묵화를 공부하셨다.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내 이사를 도울 생각에 긴 언덕길을 급히 내려오다 삐끗하여 발목뼈가 6조각이 나는 사고를 당했다. 골다공증이 있어 약간의 충격에도 뼈가 바스라진 거다. 정형외과에서 대수술을 하고 그해 무더위를 힘들게 보내셨다.

 

그러고보니 엄마의 무더위는 생에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한, 세 번이다.

내가 고3일 때 폐결핵 진단을 받고도 휴학하지 않으려고 주사를 손수 놓아주시겠다고 매일같이 몇 달 동안

긴 언덕길을 오르내리셨는데 그해 여름의 무더위로 엄마는 더위 타는 체질이 되었다.

그리곤 다리를 다친 오십 세 여름을 지나, 5년 전 여름 직장암 수술을 하고 퉁퉁 부은 얼굴로 못 알아들을 헛소리를 하시던

회복실의 엄마.  수술 후 깨면 몸이 부서지는 듯한 고통이 공격하는 걸 나도 알기에 어쩔 수 없이 참담했던 심정.

 

오십에 다친 그 발목은 아직도 붓기가 남아있고 무리하면 욱신거린다며 발목을 들어 보이신다.

그곳의 피부색은 늘 푸르죽죽하다. 시무룩히 일별했지만 마음이 아프다.

엄마보다 한 살 아래 시어머니도 얼마전부터 무릎관절이 좋지 않아 병원 다니며 깁스를 하고 계시더라.

수술밖에 답이 없다고. 나는 투덜거렸었는데 영 늙으신 어른들 뵈니 내 미래를 보는 것 같아 울컥하니 무거웠다.

두루 건강하시면 좋겠다.

 

올해 고희를 맞으신 어느 선생님 일을 하루 종일 도와 드리고 녹초가 되어 오면서,

오십 세, 꿈도 자존심도 충천했던 엄마의 그 시절을 돌려드리고 싶다는 되지도 않을 생각이 든다.

하기야 오십 세는 여자에게만 있겠나. 나는 아직 오십은 멀었(다고 할 수 있을까?)지만.^^

그저 항상 '지금'이 황금시절인 거지. 고죠~ ㅋㅋ

 

 

 

 

 

오십 세

 

 

 

/ 문 정 희

 

 

 

나이 오십은 콩떡이다

말랑하고 구수하고 정겹지만

누구도 선뜻 손을 내밀지 않는

화려한 뷔페상 위의 콩떡이다

오늘 아침 눈을 떠 보니 글쎄 내가 콩떡이 되어 있다

하지만 내 죄는 아니다

나는 가만히 있었는데 시간은 안 가고 나이만 왔다

앙큼한 도둑에게 큰 것 하날 잃은 것 같다

하여간 텅 빈 이 평야에

이제 무슨 씨를 뿌릴 것인가

진종일 돌아다녀도 개들조차 슬슬 피해 가는

이것은 나이가 아니라 초가을이다

잘하면 곁에는 부모도 있고 자식도 있어

가장 완벽한 나이라고 어떤 이는 말하지만

꽃병에는 가쁜 숨을 할딱이며

반쯤 상처 입은 꽃 몇 송이 꽂혀 있다

두려울 건 없지만 쓸쓸한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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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2-10-04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깨송편을 드셨군요~ 정말 예전처럼 우리 땅에서 키운 것을 먹어야 하는데 안타깝죠.ㅜ
문정희 산문집만 읽고 아직 다산의 처녀랑 최근시집은 안 샀는데...
'콩떡이 되어 있었다'는 시인은 여전히 스카프로 멋을 내는 멋쟁이였어요.^^

프레이야 2012-10-05 08:50   좋아요 0 | URL
네, 언니^^ 신기하게도 먹고 싶었던 걸 해두셨더라구요^^
예전 맛은 덜 났지만 그래도 맛났어요.
문정희 시인은 예순 중반도 넘었지만 참 젊고 멋쟁이 같아요. 시도 참 좋구요.
언니는 만나봤으니 더 좋으셨겠어요. ^^

blanca 2012-10-05 1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깨 송편 완전 좋아해요. 안 그래도 어제 아이 친구 할머니분이 송편 주셔서 놀이터에서 먹었어요^^;; 아아, 프레이야님 어머니에게 이런 사연들이 있었군요. 늙어가고 병들고 죽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송편 주신 할머니랑 잠시 했었는데 마음이 참 스산해지더라고요. 점점 약해지시는 부모님, 나이들어가는 나. 위에 문정희님의 시 너무 좋아요.^^

프레이야 2012-10-05 16:44   좋아요 0 | URL
놀이터에서 만나게되는 할머니는 얘기 나누면 참 좋아들하시죠. 아이 어릴적 저도 놀이터친구 있었어요ㅎㅎ 할머니친구요. 추석엔 역시 송편을 먹어야 제맛이에요! 블랑카님도 깨송편 좋아하신다니 더더 친해지고 싶다능ㅎㅎ 문정희 시인은 참 뜨거운 것 같아요. 저 시말고도 마음에 콕 박히는 게 많더라구요^^

자목련 2012-10-05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렸을 때는 밤 송편이 제일 좋았어요. 요즘은 콩이 맛나더라구요. 저도 조만간 깨 송편을 좋아하겠죠?
엄마랑 지난 시간을 이야기할 수 있다니, 정말 정말 부러워요.

프레이야 2012-10-05 16:48   좋아요 0 | URL
혹시 자목련님 엄마는ᆢ?? ㅠ
어머니 말고 엄마요.
밤송편도 먹고싶어져요. 천고마비ㅎㅎ
전 콩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콩을 좋아해야 할까봐요. 건강을 위해^^

마녀고양이 2012-10-05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여자는 항상 '지금'이 황금 시대예요, 언니... ^^
우린 항상 한 미모에, 멋진 여자들이잖아요..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아우, 하늘이요, 아주 높아요, 파아랗고 높아요.
가을이예요, 가을! 아하하, 자전거를 파주까지 타고온 이후 엉덩이 욱신거려 죽겠어요.

프레이야 2012-10-06 14:22   좋아요 0 | URL
한 미모 ㅋ 저렇게나 많은 'ㅎㅎ'은 뭐야요? 진한 긍정? 응응?? ㅎㅎ
요즘 자전거 타기 딱 좋은 계절이죠. 파주까지요? 몇시간 걸려요?
나도 더 타고 싶어도 엉덩이 아파서 오래 못 타는데요.ㅎㅎ
의사가 운동을 권하던데 안 그래도 자전거 좀 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생각만하다 관두는 나는 ㅠㅠ 아니고 진짜 불끈!!

2012-10-05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이 시 너무 재밌잖아요~ㅋ

오십, 자존심도 꿈도 충천했던 엄마. 그러고 보니, 저희 엄마도...
결핵주사 이야기, 프레이야님 어머니가 위대하시다는 생각 절로 들었어요.

프레이야 2012-10-06 14:07   좋아요 0 | URL
섬님, 문정희 시인의 시, 이것 말고도 재밌는 거 많아요. ㅎㅎ
또 소개할게요. 이젠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 아는,, 뭐 그런 게 있나봐요, 엄마랑은.

스파피필름 2012-10-05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깨송편 이야기는 포근하고, 엄마 이야기는 쪼금 가슴이 아프고, 시는 참 좋네요.
그럼요.. 지금이 황금시절인거죠. ^^

프레이야 2012-10-06 14:10   좋아요 0 | URL
스파피필름님도 황금시절 누리세요^^
오늘낮엔 좀 덥다 싶으네요. 차에 수명 다한 부품 교체하며 서비스센터에서 인사 드려요^^
낡고 익숙해진 것들과의 결별! 필요한 것 같아요. 하물며 차도 그러게요.

드림모노로그 2012-10-05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가만히 있었는데 시간은 안 가고 나이만 왔다

앙큼한 도둑에게 큰 것 하날 잃은 것 같다


요즘 너무 바쁘기도 하고요. 문득 이 시를 읽는 순간 울컥해지는 건 왠지 모르겠어요 ㅋㅋㅋ
시간 날때 여유있게 들려서 서재 구경 하고 가겠습니다 ~
서재가 무척 알찬 느낌이 들어요 ^^ 무척 배우고 싶은 부분이기도 합니다 ^^;;;
ㅋㅋㅋ

프레이야 2012-10-06 14:13   좋아요 0 | URL
울컥!까지 하시다니 많이 공감되셨나 봐요. ㅎㅎ
드림모노로그님 서재가 더욱 알차던 걸요:)
주옥같은 리뷰와 도서들 저도 차근차근 읽어볼게요.
'잃어버린 시간들' 리뷰는 특히 제게 너무 좋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