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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락의 시간 - 도시락으로 만나는 가슴 따뜻한 인생 이야기
아베 나오미.아베 사토루 지음, 이은정 옮김 / 인디고(글담) / 2012년 7월
평점 :
절판
이렇게나 예쁘고 맛깔난 책이라니! 이런 책은 포토리뷰로 해야하는데, 아쉽다. 여기 나온 39가지 평범한 사람들의 도시락을 사진 없이 보여주려니 표현의 한계에 부딪힐 것 같다. 그냥 도시락 먹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이런 책은 단숨에 보는 것보다 한 꼭지씩 야곰야곰 맛보는 게 좋다. 39명 더하기 아베 부부와 어린 딸의 '사람사는 이야기'는 담담하면서도 빛나는 생의 지혜가 엿보인다. 게다가 사진과 편집이 좋아 전체적으로 산뜻한 책이다.
부제 '도시락으로 만나는 가슴 따뜻한 인생 이야기'는 이 책을 간단하고 정확히 말해준다. 아베 부부가 인터뷰하고 사진 찍은 39명의 인생을 도시락과 함께 엿듣는 재미가 도시락 먹는 것만큼이나 흐뭇하다. 이 책의 미덕은 사진에 있다. 인물사진과 도시락 사진이 주로 차지하고 풍경사진도 있다. 이 책은 도시락이 주인이 아니라 도시락을 싸고 먹는 사람이 주인이다. 요리연구가의 도시락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도시락이니 비슷비슷 고만고만하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제각각의 이야기와 더불어 정성어린 일상의 손길이 엿보여 하나밖에 없는 귀한 도시락이 된다.
어느 날 도시락 사진을 찍겠다고 마음 먹은 아베 사토루, 그가 찍은 인물사진은 정직하다. 정면을 향하고 반듯하게 선 인물의 무심한 표정과 배경에서 엿보이는 직업, 인물의 몸 전체에서 느껴지는 살아있는 기운은 도시락을 먹는 옆모습을 찍은 사진과 조금 다른 느낌을 준다. 전자가 사회적인 자세라면 후자는 좀더 개인적이고 사적이다. 그 중 첫번째 사진, 주먹밥을 한입 가득 미어터지게 베어무는 남자의 사진은 애잔하기까지 하다. 도시락을 먹으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웃음 짓는 얼굴에는 녹록하지만은 않은 생을 살며 둥글려진 생활의 기술이 엿보인다.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에서 박찬일은 랍스터를 휘지 않게 잘 삶기 위해 가슴에서 배로 찔러 넣는 부젓가락 이야기를 하며 "당신 접시에 오른 랍스터가 반듯한 것은 결코 그 녀석의 본성이 아니다."라고 호쾌하게 정곡을 찔렀다. 아베 부부는 도시락 사진에다 그 사람이 지나왔고 현재 살아가는 시간을 간결하게 담아낸다. 굳이 도시락이 아니어도 평범한 이들의 이야기를 취재할 수 있겠지만 도시락을 매개로 벽을 넘어가기 수월했을 듯. '도시락의 시간'은 '도시락에 담긴 시간' 혹은 '도시락이 먹은 시간', 더 평이하게는 '도시락과 함께한 시간'이 되겠다.
이 책이 더 흥미로운 건 39가지 특이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덕분이다. 직업이 특이하다는 건 내 소견일 테다. 세상에 존재하는 직업의 수는 엄청나다고 들었지만 내가 처음 들어본 직업도 많았다. 대충 열거하자면 집유원, 해녀, 산사음악연주자, 증류소직원, 말 체중 측정 담당자, 수타면 장인, 모래찜질온천 직원, 관광마차 마부, 원숭이 재주꾼, 아이누 예술인, 사찰승려, 북 연주자, 가야부키(일본 전통 초가집) 장인, 옛날이야기꾼, 스키 투어 가이드 등등. 각자의 직업과 관련한 구체적인 이야기가 재미있다. 그냥 할머니, 고등학생, 유치원생도 있다.
생활과 가족을 말하며 그들 직업에 서린 애환을 즐거움으로 승화해 들려주는 이야기가 진솔하고 밝다. 도시락에 담긴 애정과 배려, 감사의 마음이 느껴지는 대목들에서는 어김없이 훈훈한 마음에 젖게 된다. 첫 새벽에 출근하는 남편은 "아무리 부부라도 서로 힘들게 해서는 안 되는" 거라며 손수 자신이 먹을 주먹밥을 싸고, 또 첫 새벽에 출근하는 역무원 아내를 위해 어떤 남편은 손수 아내가 먹을 도시락을 싼다. 아이들 도시락을 손수 싸주는 아버지, 하트를 보면 행복 모양이 떴다고 좋아하는 유치원생 아이에게 하트모양 계란말이를 꼭 싸주는 일하는 젊은 엄마, 먹은 상태를 보려고 도시락을 씻지 말고 가져오라는 아내, "내 나이 때는 뭐든 조금만 있으며 되거든"이라고 말하며 멀리 있는 딸이 보내주는 고기로 도시락을 싸는 놀빛 할머니, 세상에서 하나뿐인 '스카보로 페어 베이컨'을 손수 만드는 철도 운전사 등등...
문어잡이 항아리를 연구 중인 디자인학과 교수는 손수 자신의 도시락을 준비한다. 고양이가 남긴 참치로 김밥을 싸오고, 고양이가 남긴 게 없는 날은 학교식당에서 200엔 하는 매실 미역 우동을 먹는 그의 이야기는 신기하다. 문어잡이 항아리가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문어잡이 항아리는 구멍이 뚫려 있어서 문어가 도망치려고 맘만 먹으면 언제든지 도망칠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잡히면 문어의 책임이 된다는 점이 무척 공정하게 느껴지죠. 문어도 적당한 곳에 몸을 숨기고 싶은 게 아닐까 싶어요.
작년에 그렇게 바라던 금과 은으로 된 문어잡이 항아리를 만들었습니다.
높이가 2미터 정도 되고 무게가 약 360킬로그램이나 나가는 거대한 항아리였죠. 만들고 나서 안에 들어가 봤는데,
문어의 기분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더라고요. 나오기가 싫었거든요. 다시 태어난 기분이 들었습니다.
금 항아리 안쪽에는 옻칠을 해놔서 바닷속에서 보면 마치 블랙홀처럼 보일 거에요.
은 항아리 안쪽은 형광도료를 발랐기 때문에 번쩍거리고요. 제 숙제는 이것을 어떻게 바다로 옮길 것인가랍니다
- p45
"도시락은 두 사람이 먹는 것"이란 말이 좋다. 혼자 먹지만 싸준 사람과 함께 먹는 것이니.
"사람에게서 삶의 활력소와 건강을 얻었다"고 믿고 말하는 증류소 직원의 말도,
"오늘도 좋은 스님이 아니었다. 하지만 내일도 스님으로 있자."라고 말하는 사찰승려도 참 좋다.
육덕진 체구의 이 사찰승려는 초등학교 때 사용하던 알루미늄 도시락을 지금도 쓰는데 4학년 때 어머니가 한천을 만들 때도
그 도시락을 써서 바닥에 칼자국이 나 있다. 그런데 일본의 사찰승려는 결혼을 하나 보다. 지금은 아내가 이 도시락에
밥을 싸준다니. 반찬도 절반 나눈 삶은 달걀 한 개와 생선구이가 보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