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리라이팅 클래식 15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1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를 실천하는 고미숙이 '동의보감'을 종횡무진 안내한 책이다. 어렵지 않게 서술하면서도 꼼꼼하고 재미있다. 인도 고대의학이나 고대 그리스철학 등 저자가 읽은 동서양의 다른 서적에서도 인용한 내용을 자유자재로 배치해 삶의 비전과 통찰을 제시한 하나의 이야기로 읽어도 좋다. 현재 우리의 기계화된 삶과 자본의 논리와 남성중심의 시선에 갇힌 울체된 삶에 어떤 지향을 제시하는 대목들도 많다. 에콜로지(인간과 자연의 공생), 즉 몸과 우주의 사계가 은유만으로 해석되어선 안 된다는 점이 기본이다. 몸이 자연이고, 소우주다. 오장육부에 대한 장에서는 특히 구체적으로 우리 몸속의 사계를 설명한다. 오행의 원리로 설명할 때는 나의 본질을 구현해 주고 나를 제어하는 힘이 '상극의 힘'이라고 새삼 힘준다. 간혹 얼른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읽고 넘어가는 정도도 무방하지 싶다. 동의보감은 잘 알려진 것 같지만 제대로 알려지지 못하고 오해되는 부분도 많다. 고미숙의 책으로 동의보감의 위대함과 깊이를 어느 정도 느낄 수 있고 무엇보다 내 몸과 마음의 주도권을 가지는 일이 양생에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었다. 

 

 

저자는 동의보감의 경이로움을 독창적 분류법에 우선 둔다. 허준은 5편 106문의 목차로 동의보감을 구성하는데 5편은 내경, 외형, 잡병, 탕액, 침구편의 순이다.  동의보감이 놀라운 텍스트라는 저자의 다른 논거는 특유의 글쓰기 방식을 채택한 점이다. 민담, 낭송은 물론 만능 엔터테이터의 역할을 하는 의사의 치료담(처방) 그리고 재미있는 서사를 통해 시대적 상황을 드러내고 일상의 희로애락을 담아냈다는 점이다. 1,2장을 할애해 예시를 들며 그 놀라움을 보여준다.

 

 

정, 기, 신으로 이루어진 우리의 '몸은 습관의 거처'다. '이 몸들이 모여 격전하는 곳이 공동체'다. 생명활동이란 몸의 안과 밖이

마주치는 지점에서 이루어진다. 타자와의 관계맺기에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타자에는 우리가 밤에 꾸는 꿈과 똥오줌 같은 배설물도 포함된다. 즉 소통이 관건이다.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고 했던가. 꽃은 병이다. 열꽃이다. 살아있다는 증거이자 살아가라는 지엄한 명령이다. 병은 태어남과 동시에 몸과 공존하는 것이라 병과 몸의 핵심은 '관계와 배치'의 기술에 있다. 즉 내가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주도권을 갖는다는 건, 다시 그 이전의 병적 상태로 돌아가지 않을 수 있는 힘을 갖는다는 뜻이다. 병과 통증이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삶의 비전이 되어야, 번뇌가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는 에너지로 재생될 수 있다는 말이다. 내 몸, 우주(몸=소우주), 삶의 새로운 질서!

 

 

인간은 우주적 질료들의 결합이다. '정精은 생명의 기초를 이루는 물질적 토대, 기氣는 이 질료를 움직이는 에너지, 신神은 정기의 흐름에 벡터를 부여하는 컨트롤러, 고도의 정신활동이자 변화를 주관하는 무형의 작용'이다. '먼지가 되어 날아가야지 바람이 되어 당신 곁으로'라는 노랫말은 은유가 아닌 거다. 그러고 보면 김광석은 노랫말에 죽음을 암시한 게 적지 않은 것 같다. 먼지가 되어 날아가겠다고 했으니. 우리는 그 옛날 저 세상으로 간 사람들의 질료(먼지)로 이루어진, 즉 나는 '나'가 아니라는 진리를 잊고 산다. 내 안에 너 있다! 이 또한 그러고 보면 진리다. 내가 기억하고 있던 그 옛날의 '나'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언제나 나는 지금의 나다. 수많은 너가 결합된 유기체다.

 

 

우리가 계절을 타는 이유를 비롯해 존재론적인 의문과 존재에 대한 위대한 긍정에 이르기까지 저자는 은유로 말하지 않는다. 다방면의 참고인용문과 동의보감에서 얻은 근거를 들어 자신의 해석으로 쉽고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몸, 병, 우주는 은유로 해석될 대상이 아니라 우리 삶을 총괄해 움직이는 신성하고 전체적인 지도다. 인도 고대의학은 질병의 원인을 지혜의 결핍으로 보았고 고대 그리스 철학의 양생법은 자기배려, 자기수련, 자기치유로 보았다. 자기배려는 객관화 능력이다. 이 기술이 미흡할 때 칠정의 화기에 휘둘린다. 망상은 시공이 따로 노는 것을 말하는데, 겨울에 봄을 기다리고 여름에 가을을 기다리는 것도 망상이라 할 수 있다. 하룻밤에도 수없이 집을 짓고 허물지만 눈을 떴을 때 그것이 현실에서 접점을 찾지 못하면 무효다. "지금, 여기"를 누릴 수 있는 능력, 그것이 양생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장기들과 맺는 관계를 설명하는 대목도 재미있다. 대단한 망상의 집을 짓는 때는 바로 사랑에 빠졌을 때가 아닐까. 흔히 열병이라 하는데 저자는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한의학적으로 보면 사랑을 할 땐 평온해야 한다. 첫사랑을 열병이라 하고, 제비들의 사랑이 불꽃같다고 하는 건 쉬이

피었다 지기 때문이다. 평온이란 이런 허열에 휘둘리지 않는 '사랑의 환희'를 의미한다. 그게 어떻게 하는 거냐고?

발바닥으로 사랑을 하면 된다. 발바닥에 다름아닌 신장의 경맥이 흐르기 때문이다. (중략)

어디 연애만 그렇겠는가? 삶의 모든 이치가 그렇다. 발바닥이 있는 곳이 곧 내 삶의 현장이다. 

복습 삼아  시 한편을 소개해 본다. 늘 음미하고 다니면 양생과 에로스,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 p260

 

 

그러면서 저자가 소개한 시는 박노해의 시 '발바닥 사랑'이다. 박노해 시를 이렇게 음미할 수도 있구나.

아래의 시 말고도 박노해의 시 한 편이 더(건너뛴 삶) 소개 되어 있다.

 

 

사람은 자신의 발이 그리로 가면/ 머리도 가슴도 함께 따라가지 않을 수 없으니//

발바닥이 가는 대로 생각하게 되고/ 발바닥이 이어주는 대로 만나게 되고/ 그 인연에 따라 삶 또한 달라지리니//

현장에 딛고 선 나의 발바닥/ 대지와 입맞춤하는 나의 발바닥

내 두 발에 찍힌 사랑의 입맞춤/ 그 영혼이 바로 나이니//

그리하여 우리 최후의 날/ 하늘은 단 한 가지만을 요구하리니/ 어디 너의 발바닥 사랑을 좀 보자꾸나

 

(박노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느린걸음)

 

                                                                                  - '발바닥 사랑' 중에서 일부, p261

 

 

 

읽기 전 내가 목차에서 우선 눈이 갔던 장은 제8장이었다. '여성의 몸, 여성의 지혜'에서는 완경(이 책에선 폐경이라고 함) 이후의 여성 삶과 지혜를 짚는다. 완경은 축복이고 축복이전에 자연이다. 여름이 가을로 바뀌는 우주의 금화교역金火交易이다. 이 책에서 늘 강조되지만 태과는 불급만 못하다. 흔히 젊음(여름)이 짧다고 한탄할 일이 아니다. 한창 뜨거울 때 입추(양력 8월7일 경)가 시작되고 태양은 자리를 이동한다. 비로소 열기가 식으며 열매가 익기 시작한다. 완경기를 소위 여성구실을 못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건 남성의 시선에 갇힌 태도이고 성적 구애의 대상으로서만 여성성이 인증된다고 생각하는 오류다. 여성이 남성의 시선이 아닌 스스로의 힘으로 생의 주기를 넘어가는 것이 더 근본적이며 여성성의 해방이란 그런 욕망의 배치로부터 탈주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완경기 이후 여성성은 아주 다른 방식으로 훨씬 더 깊고 넓게 고양된다. 생리가 멈추면 지혜가 쌓이고 이 지혜로 공동체를 이끌어 가는 것, "여성의 지혜가 공동체 전체의 행복과 안녕으로 확장될 때, 그때 비로소 여성성은 대지의 모성으로 발현되는 것이 아닐까(p382)." 8장에서 저자는 여성의 몸과 사랑, 결혼, 출산, 양육, 가족, 나아가 자아구원으로서의 배움과 '몸에 대한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한 전투의 일환'으로서의 글쓰기를 권유한다. 전투의 제일보는 배움의 자세라고 다시 한번 강조. 모르는 게 약이다,는 방관이거나 무책임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는 것이 힘이다. 알면 두려움이 없어진다.  

 

 

에필로그에서 편작 삼형제 이야기를 한다. 병이 되기 이전에 미병 단계에서 치료한 큰형, 작은 병일 때 치료한 둘째, 그리고 큰병을 치료한 편작. 병의 스케일에 따라 명망도 높아진 편작이지만 집안에선 그를 제일 하수로 취급했다. 병이 되기 전 병을 다스리는 호모 큐라스가 되라는 조언은 소중하다. 큐라스는 케어의 라틴어. 케어의 달인? 즉 치유, 돌봄 나아가 수련의 의미가 더 적절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감정의 연원을 관찰하는 게 필요하다. "칠정의 원천과 경로에 스스스로 개입해 그 출구를 찾아 흐르게 하라"는 처방이다.  달리 '공감의 기술'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통하지 않고 막히고 흐르지 못하면 병이 되는 법. 병을 만든 것도, 아는 것도, 치유하는 것도 자신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자.

 

 

저자가 호모 큐라스 즉 '자기수련'의 방책으로 권하는 글쓰기의 태도도 유의미하다. 서두에서 동의보감의 특유의 글쓰기를 치켜세운 것도 저자가 글쓰기의 지평을 넓히는 데에 얼마나 열심인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내 언어의 한계가 곧 내 삶의 크기이자 운명의 지도라고 말하는 저자는 자신의 몸과 삶을 언어로 조직할 수 있으려면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다고 한다. 집중력이 곧 정기신의 확보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독서의 밀도부터 높여야한다고 하니 공부(배움)와 수련은 끝이 없는 즐거운 길이다. 동일한 시공간에서 규칙적으로 글을 쓰며 자신만의 수련법을 터득한 작가들이 생각난다. 저자는 걷기든, 낭송이든 뭘 택하든 이 과정에 반드시 '앎의 의지와 욕망이 함께 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것이 없으면 어떤 실천이나 수행도 매너리즘에 빠지고 만다니. "글쓰기가 가장 좋은 수련법이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p434)."

 

 

책이 나의 필요에 따라 인연으로 오는 게 새삼 신기하다. 몸에서 필요한 게 입에 당기듯 책도 그런 것 같다. 작년 10월에 초판된 이 책을 좀 더 일찍 읽었더라면 좋았겠지만 지금도 늦지 않고 충분히 적절했다. 읽는 것만으로도 몸의 독소가 어느 정도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단단하고 새콤한 홍시 한 알 아작아작 씹어먹은 기분이다. 모든 것은 흘러가게 마련. 붙잡아두면 고여서 썩는 법. 객관적으로 그렇지 않음에도 상처를 호소하고 소외감을 느끼는 현대인들의 인정욕망, 관계욕망에서 놓여나 삶과 실천의 문제만 남았다. 끄달리지 않고 지혜롭게 우리의 멋진 계절을 사는 것은 은혜이자 권리, 의무이기도 하다. 상처와 힐링이 흔한 키워드가 된 요즘 '성숙'에 대한 이런 조언은 명약이다. 아픈만큼 성숙해지고, 뭐 이런 노랫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실제로 10대가 느끼는 사춘기적 정서나 50대가 느끼는 결핍감 사이엔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다. 철들지 않는 중년들.

성숙이란 어떤 사건들을 더 큰 좌표 속에서 볼 수 있는 힘이다. 사회적으로, 전 지구적으로, 생명의 역사라는 우주적

차원으로 인과의 그물망을 넓게 칠 수 있는 힘이 곧 성숙이다. 인과의 좌표가 달라지면 사건도 달라진다.

그러면 다른 사건들과 타자들을 맞이하기 위하여 과거의 상흔들을 기꺼이 떠나보낼 수 있다. (중략)

"의식이 몸을 지배한다."     - p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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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연금, 보험, 저축을 능가하는 노후대비'책'
    from 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2012-11-01 18:15 
    '두통에는 진통제', '우울증엔 항우울제', '불면증엔 수면제'라는 것이 공식처럼 각인되고 있다. 그러나 시댁과 갈등을 겪는 전업주부의 두통과 학습우울증에 걸린 청소년의 두통이 과연 같은 질병일까. 또 시댁과 갈등을 겪는 주부에게 어깨 결림, 두통, 불면증, 소화불량, 생리통이 동시에 나타났다면, 이는 각각 정형외과, 신경과, 정신과, 내과, 산부인과에서 따로 해결해야 할 병일까. ─강용혁, 『닥터K의 마음문제 상담소』, 12쪽 예전에 손발이 너무..
 
 
소나무집 2012-10-09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관심 있게 보았어요. 이 분은 어려운 주제도 쉽고 흥미롭게 써내는 재주가 있어요.^^

프레이야 2012-10-11 10:01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고미숙님의 다른 책들 더 읽어보려구요^^

댈러웨이 2012-10-10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제가 묵히고 있는 영역이 있는데요. 한국/중국 고전요. 고전이라고 하는 게 맞나??? 한시 이런 쪽인데 잘 모르겠어서 설명을 못하겠네요. 리뷰하신 걸 보니까 이 책 재미 있겠어요. 게다가 어렵지도 않다고 하시니까 읽으려면 활자 따라가면서 읽을 수도 있겠다 라고 리뷰 처음 읽으면서 생각했는데 뒤로 갈수록... 정리는 고사하고 읽는 것도 못할 것 같아요. ㅎㅎ

사랑이 열병이면 사랑이 아니라고요? 평온? 그럼, 딱 지금의 제 상태인데. ( ") 완경/폐경, 완경이라는 단어는 처음 들어보는데 정말 좋은 단어에요. 어감때문이라도 폐경은 그야말로 여성성의 부정 그 자체였는데, 완경이란 단어는 완전히 다른 신세계를 열어주는군요.

리뷰가 정말 좋아서 제대로 댓글을 달고 싶었는데 제 주 특기인 엄한 말로 도배만... 나잇나잇, 프레이야님!

프레이야 2012-10-11 10:06   좋아요 0 | URL
완경! 좋은 말이지요. 언어가 그래서 중요한가 봐요. 의미가 달라지니까요.^^
몸과 마음은 하나. 평온이면 더없이 좋은 상태이니 유지 잘 하시길^^
댈러웨이님, 다른 말보다 그저 부비부비:) 히히~~

댈러웨이 2012-10-11 15:14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저 지금 '부비부비' 무슨 뜻인지 몰라서 사전 열어서 찾아봤어요. 저도 부비부비~ ㅋㅋㅋ

프레이야 2012-10-12 13:47   좋아요 0 | URL
부비부비,가 사전에 나오던가요? ㅎㅎ
저도 그래서 찾아보니 '부빗부빗'으로 나오긴 하네요 ^^

페크pek0501 2012-10-10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미숙 님의 책은 두 권 읽었어요. 공부의 달인~과 호모에로스 등.
제가 구입한 건 아니고 선물로 받아 읽었지요. 일간지에 연재되는 글도 읽어서
저자를 좀 알지요.
독서로 공부하라, 는 것과 사랑하면 오히려 마음이 편한해진다 라는 내용은 제가 읽은 것과 겹치네요.
"성숙이란 어떤 사건들을 더 큰 좌표 속에서 볼 수 있는 힘이다" -이것 기억해 두고 싶네요.
한순간에 마음이 좁아지는 걸 경험해요. 시간이 지나고 나면 별 일 아닌 것을요.
님의 꼼꼼한 리뷰에 반하며 간다는...ㅋㅋ

프레이야 2012-10-11 10:08   좋아요 0 | URL
이분의 강연을 가까이서 들을 기회가 있으면 가서 듣고 싶어져요.
좋은 기운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물씬^^
더 큰 좌표 속에서 볼 수 있는 힘, 성숙이란 말의 개념정의로 마음에 쏙 드는 말이에요^^
페크님, 조용히 불교방송 틀어놓고 가을하늘 한 번 보고 앉았어요. 좋은하루!!

풀꽃선생 2012-10-10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갑습니다~
저도 이 책 사두고 '나의 운명사용설명서' 읽었는데 얼른 읽고 싶어요.
많이 배우고 갑니다..

프레이야 2012-10-11 10:10   좋아요 0 | URL
풀꽃선생님, 저도 그 책 오늘 주문하려구요^^
고미숙님의 저서 주제의 골저는 같긴 한데 그래도 읽어볼 가치가 있을 것 같아요.
탱스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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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 그중 최고의 계절 시월이면 사뭇 하늘을 한 번 더 쳐다보게 된다.

가을엔 바다 물빛까지도 하늘을 닮아 무량하고 선량하게 느껴진다. 열두 달 중 석달이나(!) 남은 시월이면

한 해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초조함 혹은 설렘과 함께 지나온 아홉 달을 돌아보게도 된다.

내 삶의 전체를 두고도 나는 지금 시월의 어느 멋진 날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돌아보면 애틋하지 않은 게 어디 있겠냐마는 잘 살았거나 기대에 못 미쳤거나, 내가 가진 모든 것에 감사하고

내게 손 내민 모든 인연에 축복을 바란다. 멀가까이서 늘 나의 안녕을 묻고 염려하고 힘내라고

물심양면 건네주는 정성의 인연과 내 칠정의 격랑에도 흔들림 없이 그자리 그곁에서 말없는 위로와 힘이 되어준

이들의 진심으로 나는 또 돌고돌아 눈물나게 벅차오르는 계절을 누리고 있다.

이 노랫말처럼, 더는 소원 없어. 바램은 죄가 될 테니까.

말이 되어 피어나지 못한 이야기들은 또다른 계절에 이름 모를 꽃이 되어 피어나겠지.

 

10년 째 내 발이 되어준 자동차도 한 군데 두 군데 아픈 데가 나온다.

화기로 날강날강해진 내 심장처럼 고치고 다듬고 돌보아야 할 시기다.

발전기가 다 돼 충전이 안 된다니 새 것으로 교체작업을 맡기고 이 페이퍼를 쓰고 있다.(오늘이 마감일^^)

자동차 서비스센터 휴게실 창 밖으로 살랑 부는 가을바람이 거리의 은행나무 잎들을 시나브로 흔들고 있다.

조만간 그들 또한 내 마음처럼 눈부시게 노랑노랑해질 걸 시월의 바람은 모르지 않는다. 

 

나는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여지껏 살고 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농촌이나 어촌의 풍경은 내게 생활이 아니라 관념이나 감상의 대상으로 삶과는 좀 떨어진 환상의 영역이다.

무작정 동경하지는 않지만 한번쯤 내게 새로운 삶이 허락된다면 바닷가 한적한 마을이나 섬생활을 꿈꿔 보기도 한다.

앞으로의 삶을 알 수는 없지만 도시에 빚지고 살아온 삶, 도시라는 공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삶을 살면서

도시를 제대로 알고 사랑한 적은 있는지 자문해 본다. 내가 살고 있는 이 도시만 해도 구석구석 알고 사랑하는 일에

무감하고 게으르니. 내 마음 속 가장 멀고도 가까운 도시의 '거리'와 삶과 이미지들을 그려보며 이런 에세이들에 눈길 간다.

좋은 사진이 함께 수록되어 있는 에세이들이라 더욱 끌린다.

 

눈에 확 띄는 책!  소로우의 사상을 총정리할 수 있다는 <월든, 시민의 불복종, 원칙 없는 삶>도 어떻게 보면

도시의 삶을 역으로 이해할 수 있는 훌륭한 책이 되겠다.

 

 

 

 

1. 플라스틱 라이프 / 김석원 / 이덴슬리벨

 

                                      

기묘한 도시, 그 속에서 잠들지 못하는 사람들……
경계와 고독의 공간에서 당신을 읽어내는 사진에세이집
도시 생활이 삭막한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이곳에서는 수백만의 사람들이 서로 부대끼며 혼잡한 와중에 출퇴근을 반복하고 하루를 마감한다. 그 반복이 바로 일상이다. 그래서일까? 시간이 지날수록 인간의 정신은 황폐해지고 도시의 구조는 거대해진다. 인간관계 역시 복잡하다보니 사람들은 서로를 믿지 못한 채 속마음을 숨기며 적당한 심리적 거리를 유지한다.
『플라스틱 라이프』는 이처럼 도시에 사는, 도시를 사랑하지만 때로는 벗어나고 싶어 하는, 도시가 키운 사람들, 그리고 도시라는 공간 자체의 이야기를 담았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도시에 대한 재인식이 필요했고, 이를 시각화할 국내외 주목할 만한 사진작가 14명의 사진을 선별해 실었다. 사진예술학과 교수인 저자 김석원의 주도로 이루어진 이 프로젝트는 도시화를 통해 우리가 잃어버린 것과 얻은 것을 한번쯤 점검하게 해주면서,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 거는 희망과 애정의 끈을 놓지 않는다. 인문학적인 정서가 깊게 밴 에세이와 함께 ‘현재’를 꾸밈없이 담은 이 사진에세이집은 개인이라는 나무와 더불어 도시라는 숲 전체를 조망하게 해줄 것이다. (알라딘 책 소개)

 

 

 

 

2. 도시의 사생활 / 김지수 / 팜파스

 

 

“도시는 나를 낳고, 나는 자라서 도시가 되었다.”
콘크리트 숲의 우아한 유목민, 「보그」 베테랑 에디터 ‘김지수 식’ 도시 힐링
“도시는 나를 낳고, 나는 자라서 도시가 되었다. 생각해보면 도시가 내게 등을 돌렸던 게 아니라 내가 두려워 도시의 몸을 밀어냈던 시간이 더 많았다. 도시는 나를 지배하려고 한 적도 없었다.” 저자 김지수는 책머리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누구보다 도시로부터 많은 상처를 받았다고 자부하는 저자는 도시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상처의 찬란한 꽃밭, 수퍼 에고(ego), 21세기에 가장 고독한 생명체……. 밤이면 화려한 네온을 입고 뽐내다가도 새벽이면 부끄럽게 토사물을 부려놓는 도시, 성형외과로 몸을 재조립하고 정신과로 기억을 성형하는 도시, 명품으로 자아를 포장하고 다이어트로 자존을 소비하는 도시, 분노 때문에 살이 다 떨려도 두 손 꼭 부여잡고 아부의 미소를 지어내는 도시, 하지만 그 철부지 같은 도시가 바로 자신이었음도 함께 털어놓는다. 『도시의 사생활』은 도시로부터 호되게 상처받았던, 그래서 도시에게 지지 않으려고 죽자고 덤볐던 한 사람이 바라본 ‘도시의 오늘’, ‘도시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초상’을 담은 것이다.  (출판사 책 소개 중)

 

 

 

 

3. 저 불빛들을 기억해 / 나희덕 / 하늘바람별

 

 

 

13년 만에 엮은 나희덕 시인의 새 산문집. 시인의 문학적 고백과 신념,
부단한 자기 관조, 모든 존재에 대한 서정적 포옹이 살아 있는 35편의 글과 사진

점은 가장 간결한 존재의 형태로서 그 자체가 하나의 작은 세계이다. 점은 다른 점과 만나 선이 되려고 한다. 점이 점에게로 움직여 간 궤적이 곧 선이다. 면은 선과 선이 어떤 각도와 방향에서 만나느냐에 따라 그 안정감과 저항력이 달라진다.
이 산문집을 점, 선, 면으로 구성한 것도 나와 타인, 그리고 세상 사이의 축도를 보여 주기 위해서이다. ‘점’이 한 개체의 내밀한 모습을 나타낸다면, 점과 점이 만나는 ‘선’은 개체와 또 다른 개체의 만남을 의미한다. 또한 다양한 선들이 만들어 낸 ‘면’은 사회 또는 공동체를 뜻한다. 물론 한 편의 글을 그 어느 하나에 귀속시키기란 쉽지 않다. 어느새 점은 선이 되어 있고, 선은 면이 되어 있고, 면은 하나의 점처럼 보이기도 한다. 삶이란 그렇게 점과 선과 면이 역동적으로 만나는 과정일 것이다.(서문에서) - 출판사 책 소개 중


 

 

 

4. 월든, 시민의 불복종, 원칙 없는 삶 /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 문주

 

 

 「시민의 불복종」은 멕시코 전쟁과 노예제도에 반대해 인두세 납부를 거부한 소로우가 옥고를 치룬 후 써내려간 짧은 ‘감옥기’이자 인간이 자유로운 주체로 존재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정부에 대한 자유로운 개인, 시민의 저항이라는 관점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글이다.
국내에서 최초로 번역, 출간된 「원칙 없는 삶」은 소로우의 연설문으로 진리, 자유, 정의, 정치 등의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놀라운 것은 이 짧은 글 속에서 후대에나 다루어진 다양한 사고와 성찰, 메타포들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 변방의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으리만치 조용한 삶을 살았던 소로우가 불멸의 이름을 얻게 된 이유를 수긍하게 만드는 글이기도 하다.
소로우의 삶과 사상의 정수를 모아놓은 이 책 속의 소로우는 각박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귀중한 성찰의 시간을 제공하는 스승이다. 동시에 정부에 저항하기 위해 수감된 자신을, 원하지 않는데도 구해준 지인들의 친절에 투덜거리고, 몇 년이 지난 후에도 잃어버린 동물들을 찾기 위해 이름과 버릇을 지나는 길손들에게 되뇌는 정말 소박한 우리의 이웃이기도 하다.

(출판사 책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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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 2012-10-06 1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목신간 체크하러 들어왔다가 마음이 짠해져서 나갑니다.
프레이야님의 마음이 그대로 담겨 있는 것같네요.
가을은 풍요로우면서도 숙연해지는 계절이 아닌가 합니다.
나를 되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어요.
'더는 소원 없어, 바램은 죄가 될 테니까'

프레이야 2012-10-06 21:47   좋아요 0 | URL
그래서 가을을 우주의 대혁명이 일어나는 계절로 보나봐요. 더 바랄 것 없이 좋은계절 누리시기 바랍니다. 고마워요, 라일락님^^

BRINY 2012-10-06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 페이퍼 제목이 멋집니다.

프레이야 2012-10-06 21:38   좋아요 0 | URL
표절?! 크아ᆢ좀 그랬나요ㅋ
요즘 라디오에서 자주 들리는 노래라ᆢ
시월이면 꼭이요. 임태경 부부 듀엣으로 부른 것도 좋은데 그냥 김동규의 저음이 가을과 더 잘 어울리는 듯해요.

transient-guest 2012-10-07 0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옆집의 잔디가 항상 더 푸르러 보인다고 한잖아요. 도시에서 살면서 섬이나 시골생활 꿈꾸는 건 프레이야님만은 아니겠죠. 사실 저도 매일 좀 벌고 모으고, 나이 더 들면 좀더 한적한 곳에 집짓고 책보며 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한참 그런 생각 많이 하던 작년에는 농비어천가를 보면서 달래기도 하고, 교과서 삼기도 했었어요ㅎ.

왠지 가을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페이퍼에요. 여기도 엊그제부터 기온이 뚝 떨어진것이 정말 가을이 왔구나 싶더라구요. 책을 많이 읽게해주는 계절...ㅎ

프레이야 2012-10-07 11:02   좋아요 0 | URL
함께사는 사람과 같은 꿈을 갖고 계시네요. 전 딱히 그렇다기보다 동경의 대상이기만 한 게, 휴양이 아니라 생활이 되면 하루하루 그렇게 살 수 있을지 싶어서지요. 지금 여기, 가 최고라 생각합니다^^ 그곳도 기온이 뚝 떨어졌군요. 영혼도 추위를 타는 계절이라 책읽기 좋은 계절이라고 권하나 봐요^^

책읽는나무 2012-10-07 0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석 잘 보내셨나요?^^
님의 글들은 항상 대도시가 아닌 자연과 함께 하고 있는 듯하시온데..
더이상의 바람은 죄가 될 수 있사와요.ㅎ

오늘아침도 보아하니 낮엔 구름과 함께 하늘은 높겠사옵니다.
높고 깊음을 바라보는 시간들도 님껜 자연 그이상이 아니겠어요.
잘 읽고 갑니다.멋진 책들이로군요.^^

프레이야 2012-10-07 11:10   좋아요 0 | URL
네, 추석은 잘보냈고 가을 하늘도 만끽하고 있어요.님도 이쁜 둥이들이랑 잘 보내셨지요?^^ 더 바랄 것 없이 멋진 날들입니다요ㅎㅎ
저는 딱히 도시를 떠나 살고싶다는 생각을 해보지않았는데 그러면서도 도시를 좀 더 알고 사랑하지 않았던거 같아요. 자연은 어디에도 그냥 그자체로 있지요. ^^

다크아이즈 2012-10-07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아야님 자동차 바꾸시진 않아도 되지요?
울 아자씨도 십 년 넘은 자동차 모는데 제가 보긴 멀쩡한데 자꾸 우엣돈 들어간다며
은근 새 찰로 바꿔달라고 시위하네요. 못 견디고 굴복할 것 같은데 왠지 아깝다는 생각이...

책 소개 고맙습니다. 나희덕 산문집 제목은 시적인데, 출판사 책 소개가 어째ㅠ...

프레이야 2012-10-08 20:44   좋아요 0 | URL
울 아자씨ㅋㅋㅋ 팜므느와르님 이 말 때문에 완전 더 친근하게 느껴져요^^
네, 내 차는 전혀 바꾸지 않아도 되구요. 그저 소모품이니 수명 다 해 교체해 줬어요.
제가 관리를 잘 못하긴 해도 주행거리도 얼마 되지 않구요.
느와르님 아자씨는 새 차가 사고 싶어 그러시는 게 아닌가 싶다능 ㅋㅋㅋ

나희덕 시인의 시가 좋으니 산문집도 무조건 믿음이 가는걸요^^ 기대 밖일 수도 있겠구요.
멋진 사진도 곁들여 좋아보였어요.^^

블루데이지 2012-10-08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동차 서비스센터 휴게실 창 밖으로 살랑 부는 가을바람이 거리의 은행나무 잎들을 시나브로 흔들고 있다.
조만간 그들 또한 내 마음처럼 눈부시게 노랑노랑해질 걸 시월의 바람은 모르지 않는다. >
는 프레이야님 말씀이 일요일 낮 아이들과 산책하며 걷는 숲길에서 자꾸 맴돌았어요!
가을 내내 잊혀지지 않을것같아요! 시월의 가을숲을 닮으셨을것같은 프레이야님의 그말씀이요~~

프레이야 2012-10-08 20:01   좋아요 0 | URL
세 아이들과 숲길 산책! 느긋하고 참 여유롭게 느껴져요, 데이지님.
요샌 무시로 아이들 어릴 적 함께한 시간들이 생각나곤 해요.
오늘은 큰아이 5살 적에 사준 푸우 인형을 목욕시켰어요. (세탁기로 돌린거지만^^)
그때 작은아이 만삭 때였는데 집에서 절 기다리고 있을 아이 생각에 정기검진 하고 나온 병원앞
인형샵에서 첫눈에 반해 산 거에요. 그걸 다 큰 아이가 여태도 좋아한답니다.ㅎㅎ
고마워요, 늘!!

순오기 2012-10-08 0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밤에 듣는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 참 좋으네요.^^
어제 무등산 갔다가 잔치국수에 막걸리 한 잔 하고 돌아와 곯아떨어졌다 일어났어요.ㅋㅋ
이번주는 금욜까지 교육청 연수에 오전 시간을 몽땅 바쳐야 하는 한주일이네요.ㅠ
추천하신 책, 특히 나희덕 산문집 보고 싶네요.

프레이야 2012-10-08 20:03   좋아요 0 | URL
오기언니, 잔치국수에 막걸리 크아~~ ㅎㅎㅎ
이번주도 연수로 바쁘시군요. 늘 건강 챙기시기 바랍니다.
시인들의 산문집이 자주 보이네요.^^

맥거핀 2012-10-08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헨디 데이비드 소로는 여러 다른 분들이 언급하시는 것은 많이 보았는데, 한번도 책을 읽어본 적이 없군요. 소개해주신 내용만으로도 충분히 읽어볼 책이 아닌가 싶습니다. 책 소개부분 보다도 글머리가 더 인상적인 글이네요. 요새 가을이 점점 짧아지고 있는 것 같아요. 소중한 가을을 만끽하시길 바랍니다.^^

프레이야 2012-10-08 20:09   좋아요 0 | URL
게으르게도 책소개는 발췌한 걸로 대신했습니다.^^
소로우의 책은 저도 담아뒀습니다.
점점 봄 가을이 짧아진다고들 하니 더 소중한 것 같아요.
맥거핀님에게도 지금이 최고의 계절이 되길 바랍니다.

드림모노로그 2012-10-08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래 정말 좋네요 ^^ 제 몸도 조금씩 고장이 나는 기분이예요 ㅋㅋ
아침에 보니 눈에 다래끼가 나서 퉁퉁 부었더라구요 ㅎㅎㅎ
연식이 오래되다보니 자동차처럼 몸에서도 신호가 오는 듯 합니다 ㅋㅋ
시월의 어느 멋진 날... 제 인생이 늘 멋진 날이 되어주길 바라게 해주네요 *^^*
프레이야님도 멋진 가을 날 되세요 ~
저 불빛들을 기억해 ~ 너무 이쁜 책 같아요~ 담아갑니다 ^^ㅎㅎ

프레이야 2012-10-08 20:14   좋아요 0 | URL
다래끼요? 약은 드셨는지요? 눈이 불편할 텐데요.
저는 11살에 크게 나서 애꾸눈 선장처럼 한 쪽 눈에 안대를 하고 다녔던 기억이 있어요.
사진도 있는데 그게 어디 갔는지.. 우리 몸은 고장 나는 게 정상인 거라고들 하더라구요.ㅎㅎ
알고 고치고 회복하여 내가 주관할 수 있으면 되는 거지 싶어요.
일년 내내 드림모노로그님 말씀대로 정말 늘 멋진 날이 되길 바랍니다~~~
뭐.. 사실 좀 덜 멋져도 그것으로도 충분하구요^^

2012-10-08 16: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0-08 20: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댈러웨이 2012-10-08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곡을 틀어놓고 눈을 감았어요. 가사는 하나도 안들리는데 곡조에 상념을 실어 흘러가다 보니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라는 한 구절에 이르렀네요. 어떻게 지내세요, 프레이야님? 늘 변함없이 그 자리에서 흔들리지 않고 빛을 내시는 분.

소로우의 <월든>에서 좋아하는 문구 하나가 있어요. 문어는 구어와 같지 않아서 성숙과 경험의 언어다. 문어 속에는 별이 찬란하게 빛나고 능력있는 사람은 그 별을 읽을 수 있다 라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프레이야님께 특별히 선물요. 안녕요.

프레이야 2012-10-08 21:50   좋아요 0 | URL
앗, 댈러웨이님 페이퍼 읽다가 잠시 다른 일 하느라 돌아왔는데 댓글이^^
내가 먼저 하려고 했는데 :)
꾹꾹 담아 읽고 인사하려구요^^

문어는 구어보다 성숙하고 경험이 우러난 언어라는 뜻이네요^^ 숙성 시켜서 내보낸 언어라서
혹은 그런 언어가 되어야 한다는 뜻도.^^
문어라 해서 난 또 바다의 그?? ㅋㅋ 농담이에요. 히히~~

"문어는 구어와 같지 않아서 성숙과 경험의 언어다. 문어 속에는 별이 찬란하게 빛나고 능력있는 사람은 그 별을 읽을 수 있다" 이 문장, 간직할게요. 고마워요*^^* 좋아라~

blanca 2012-10-09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노래 너무 좋아해요. 아, 벌써 시월이에요. 또 경계를 넘어가야 하는 좀 싱숭생숭한 날들. '눈부시게 노랑노랑'이 구절이 프레이야님의 시어 같아요.

프레이야 2012-10-11 10:11   좋아요 0 | URL
시월은 충분히 싱숭생숭해도 좋을 날들 같아요, 블랑카님^^
오늘도 멋진 하루 보내세요^^

다락방 2012-10-09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관심 신간 페이퍼를 이렇게 멋지게 써도 되는겁니까, 프레이야님!! ㅎㅎ

프레이야 2012-10-11 10:11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우힛~ 좋은하루 보내세요^^
 

 

 

 

 

 

 

 

좀 늦은 감이 있지만 요즘 맛나게 야곰야곰 먹고 있는 문정희 시집.

언어의 창조, 시의 창조, 세상의 창조. 파괴도 서슴치 않아.

잉태와 생산의 관능, 그 이름 다산의 처녀.

 

 

다산의 처녀 / 문정희 / 2010 민음사

 

 

 

 

 

 

이번 추석연휴가 다가오기 며칠 전부터 유난히 깨송편이 먹고 싶었다.

엄마에게 만들어달라고 부탁하려다 힘드실까봐 그만 뒀는데, 추석 날 저녁에 가보니 깨송편이 식탁에 있는 거다.

며느리랑 어린 조카 둘이랑 만들었단다. 오래오래 전, 엄마가 익반죽을 하고 꿀이 지르르 흐르게 깨속을 만들어주면

내가 90% 빚었던 그 깨송편을. 모양도 가지가지 크기도 가지가지, 좀 우스웠지만 얼른 한입 넣었다.

그런데 맛이 그게 아닌 거다. 달지도 않고 입에 착 붙지도 않고 윤기도 없고. 그래도 아무 말 않고 있으니 엄마가 먼저

송편이 옛날 맛이 안 나서 속상하다는 거다. 수입깨라 그렇단다. 그렇기도 하겠다 싶었다. 예전에 모두 국산참깨라서

맛이 확실히 달랐다고. 실망한 얼굴로 맛 없어 하던 내가 마음에 걸렸던지 엄마는 그 다음날 내게 불쑥 전화를 하셨다.

송편 먹다가 맛이 없어 화나서 전화한다시며.ㅎㅎㅎ 

그래도 싸주신 깨송편 맛나게 먹었다. 속을 좀 많이 넣은 건 맛있더구만.^^

 

그날 옛날 사진첩이 거실에 나와 있었다. 뒤적여 보니 젊은 아빠 엄마가 들어있고 지금보다 풋풋하니 순수하고 참한

모습의 여동생, 지금보다 사프해 보이는 훈훈한 남동생, 그리고 지금보다 더 뽀얗고 반짝반짝한 내가 들어 있는 거다.

"나는 안 늙을 줄 알았다."

엄마의 말씀이셨다. 미모가 출중했던 젊은 날의 엄마사진을 보면 정말이지 세월이 잔인하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의 오십 초반 시절의 사진이 보였다. 아빠가 하시는 일을 늘 함께하며 바깥 출입을 잘 못하며 사셨던 엄마가

오십쯤 되니 바깥 활동도 하시고 원래 강한 지적 욕구도 채우고 어쩌면 그때가 엄마의 봄날이었을지도 모른다.

그해 여름 나는 아파트로 두번째 이사를 하였고 엄마는 대학 평생교육원에서 서예와 수묵화를 공부하셨다.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내 이사를 도울 생각에 긴 언덕길을 급히 내려오다 삐끗하여 발목뼈가 6조각이 나는 사고를 당했다. 골다공증이 있어 약간의 충격에도 뼈가 바스라진 거다. 정형외과에서 대수술을 하고 그해 무더위를 힘들게 보내셨다.

 

그러고보니 엄마의 무더위는 생에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한, 세 번이다.

내가 고3일 때 폐결핵 진단을 받고도 휴학하지 않으려고 주사를 손수 놓아주시겠다고 매일같이 몇 달 동안

긴 언덕길을 오르내리셨는데 그해 여름의 무더위로 엄마는 더위 타는 체질이 되었다.

그리곤 다리를 다친 오십 세 여름을 지나, 5년 전 여름 직장암 수술을 하고 퉁퉁 부은 얼굴로 못 알아들을 헛소리를 하시던

회복실의 엄마.  수술 후 깨면 몸이 부서지는 듯한 고통이 공격하는 걸 나도 알기에 어쩔 수 없이 참담했던 심정.

 

오십에 다친 그 발목은 아직도 붓기가 남아있고 무리하면 욱신거린다며 발목을 들어 보이신다.

그곳의 피부색은 늘 푸르죽죽하다. 시무룩히 일별했지만 마음이 아프다.

엄마보다 한 살 아래 시어머니도 얼마전부터 무릎관절이 좋지 않아 병원 다니며 깁스를 하고 계시더라.

수술밖에 답이 없다고. 나는 투덜거렸었는데 영 늙으신 어른들 뵈니 내 미래를 보는 것 같아 울컥하니 무거웠다.

두루 건강하시면 좋겠다.

 

올해 고희를 맞으신 어느 선생님 일을 하루 종일 도와 드리고 녹초가 되어 오면서,

오십 세, 꿈도 자존심도 충천했던 엄마의 그 시절을 돌려드리고 싶다는 되지도 않을 생각이 든다.

하기야 오십 세는 여자에게만 있겠나. 나는 아직 오십은 멀었(다고 할 수 있을까?)지만.^^

그저 항상 '지금'이 황금시절인 거지. 고죠~ ㅋㅋ

 

 

 

 

 

오십 세

 

 

 

/ 문 정 희

 

 

 

나이 오십은 콩떡이다

말랑하고 구수하고 정겹지만

누구도 선뜻 손을 내밀지 않는

화려한 뷔페상 위의 콩떡이다

오늘 아침 눈을 떠 보니 글쎄 내가 콩떡이 되어 있다

하지만 내 죄는 아니다

나는 가만히 있었는데 시간은 안 가고 나이만 왔다

앙큼한 도둑에게 큰 것 하날 잃은 것 같다

하여간 텅 빈 이 평야에

이제 무슨 씨를 뿌릴 것인가

진종일 돌아다녀도 개들조차 슬슬 피해 가는

이것은 나이가 아니라 초가을이다

잘하면 곁에는 부모도 있고 자식도 있어

가장 완벽한 나이라고 어떤 이는 말하지만

꽃병에는 가쁜 숨을 할딱이며

반쯤 상처 입은 꽃 몇 송이 꽂혀 있다

두려울 건 없지만 쓸쓸한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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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2-10-04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깨송편을 드셨군요~ 정말 예전처럼 우리 땅에서 키운 것을 먹어야 하는데 안타깝죠.ㅜ
문정희 산문집만 읽고 아직 다산의 처녀랑 최근시집은 안 샀는데...
'콩떡이 되어 있었다'는 시인은 여전히 스카프로 멋을 내는 멋쟁이였어요.^^

프레이야 2012-10-05 08:50   좋아요 0 | URL
네, 언니^^ 신기하게도 먹고 싶었던 걸 해두셨더라구요^^
예전 맛은 덜 났지만 그래도 맛났어요.
문정희 시인은 예순 중반도 넘었지만 참 젊고 멋쟁이 같아요. 시도 참 좋구요.
언니는 만나봤으니 더 좋으셨겠어요. ^^

blanca 2012-10-05 1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깨 송편 완전 좋아해요. 안 그래도 어제 아이 친구 할머니분이 송편 주셔서 놀이터에서 먹었어요^^;; 아아, 프레이야님 어머니에게 이런 사연들이 있었군요. 늙어가고 병들고 죽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송편 주신 할머니랑 잠시 했었는데 마음이 참 스산해지더라고요. 점점 약해지시는 부모님, 나이들어가는 나. 위에 문정희님의 시 너무 좋아요.^^

프레이야 2012-10-05 16:44   좋아요 0 | URL
놀이터에서 만나게되는 할머니는 얘기 나누면 참 좋아들하시죠. 아이 어릴적 저도 놀이터친구 있었어요ㅎㅎ 할머니친구요. 추석엔 역시 송편을 먹어야 제맛이에요! 블랑카님도 깨송편 좋아하신다니 더더 친해지고 싶다능ㅎㅎ 문정희 시인은 참 뜨거운 것 같아요. 저 시말고도 마음에 콕 박히는 게 많더라구요^^

자목련 2012-10-05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렸을 때는 밤 송편이 제일 좋았어요. 요즘은 콩이 맛나더라구요. 저도 조만간 깨 송편을 좋아하겠죠?
엄마랑 지난 시간을 이야기할 수 있다니, 정말 정말 부러워요.

프레이야 2012-10-05 16:48   좋아요 0 | URL
혹시 자목련님 엄마는ᆢ?? ㅠ
어머니 말고 엄마요.
밤송편도 먹고싶어져요. 천고마비ㅎㅎ
전 콩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콩을 좋아해야 할까봐요. 건강을 위해^^

마녀고양이 2012-10-05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여자는 항상 '지금'이 황금 시대예요, 언니... ^^
우린 항상 한 미모에, 멋진 여자들이잖아요..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아우, 하늘이요, 아주 높아요, 파아랗고 높아요.
가을이예요, 가을! 아하하, 자전거를 파주까지 타고온 이후 엉덩이 욱신거려 죽겠어요.

프레이야 2012-10-06 14:22   좋아요 0 | URL
한 미모 ㅋ 저렇게나 많은 'ㅎㅎ'은 뭐야요? 진한 긍정? 응응?? ㅎㅎ
요즘 자전거 타기 딱 좋은 계절이죠. 파주까지요? 몇시간 걸려요?
나도 더 타고 싶어도 엉덩이 아파서 오래 못 타는데요.ㅎㅎ
의사가 운동을 권하던데 안 그래도 자전거 좀 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생각만하다 관두는 나는 ㅠㅠ 아니고 진짜 불끈!!

2012-10-05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이 시 너무 재밌잖아요~ㅋ

오십, 자존심도 꿈도 충천했던 엄마. 그러고 보니, 저희 엄마도...
결핵주사 이야기, 프레이야님 어머니가 위대하시다는 생각 절로 들었어요.

프레이야 2012-10-06 14:07   좋아요 0 | URL
섬님, 문정희 시인의 시, 이것 말고도 재밌는 거 많아요. ㅎㅎ
또 소개할게요. 이젠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 아는,, 뭐 그런 게 있나봐요, 엄마랑은.

스파피필름 2012-10-05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깨송편 이야기는 포근하고, 엄마 이야기는 쪼금 가슴이 아프고, 시는 참 좋네요.
그럼요.. 지금이 황금시절인거죠. ^^

프레이야 2012-10-06 14:10   좋아요 0 | URL
스파피필름님도 황금시절 누리세요^^
오늘낮엔 좀 덥다 싶으네요. 차에 수명 다한 부품 교체하며 서비스센터에서 인사 드려요^^
낡고 익숙해진 것들과의 결별! 필요한 것 같아요. 하물며 차도 그러게요.

드림모노로그 2012-10-05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가만히 있었는데 시간은 안 가고 나이만 왔다

앙큼한 도둑에게 큰 것 하날 잃은 것 같다


요즘 너무 바쁘기도 하고요. 문득 이 시를 읽는 순간 울컥해지는 건 왠지 모르겠어요 ㅋㅋㅋ
시간 날때 여유있게 들려서 서재 구경 하고 가겠습니다 ~
서재가 무척 알찬 느낌이 들어요 ^^ 무척 배우고 싶은 부분이기도 합니다 ^^;;;
ㅋㅋㅋ

프레이야 2012-10-06 14:13   좋아요 0 | URL
울컥!까지 하시다니 많이 공감되셨나 봐요. ㅎㅎ
드림모노로그님 서재가 더욱 알차던 걸요:)
주옥같은 리뷰와 도서들 저도 차근차근 읽어볼게요.
'잃어버린 시간들' 리뷰는 특히 제게 너무 좋았습니다.
 
[도시락의 시간]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도시락의 시간 - 도시락으로 만나는 가슴 따뜻한 인생 이야기
아베 나오미.아베 사토루 지음, 이은정 옮김 / 인디고(글담) / 2012년 7월
평점 :
절판


 

 

이렇게나 예쁘고 맛깔난 책이라니! 이런 책은 포토리뷰로 해야하는데, 아쉽다. 여기 나온 39가지 평범한 사람들의 도시락을 사진 없이 보여주려니 표현의 한계에 부딪힐 것 같다. 그냥 도시락 먹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이런 책은 단숨에 보는 것보다 한 꼭지씩 야곰야곰 맛보는 게 좋다. 39명 더하기 아베 부부와 어린 딸의 '사람사는 이야기'는 담담하면서도 빛나는 생의 지혜가 엿보인다. 게다가 사진과 편집이 좋아 전체적으로 산뜻한 책이다.

 

부제 '도시락으로 만나는 가슴 따뜻한 인생 이야기'는 이 책을 간단하고 정확히 말해준다. 아베 부부가 인터뷰하고 사진 찍은 39명의 인생을 도시락과 함께 엿듣는 재미가 도시락 먹는 것만큼이나 흐뭇하다. 이 책의 미덕은 사진에 있다. 인물사진과 도시락 사진이 주로 차지하고 풍경사진도 있다. 이 책은 도시락이 주인이 아니라 도시락을 싸고 먹는 사람이 주인이다. 요리연구가의 도시락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도시락이니 비슷비슷 고만고만하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제각각의 이야기와 더불어 정성어린 일상의 손길이 엿보여 하나밖에 없는 귀한 도시락이 된다.  

 

어느 날 도시락 사진을 찍겠다고 마음 먹은 아베 사토루, 그가 찍은 인물사진은 정직하다. 정면을 향하고 반듯하게 선 인물의 무심한 표정과 배경에서 엿보이는 직업, 인물의 몸 전체에서 느껴지는 살아있는 기운은 도시락을 먹는 옆모습을 찍은 사진과 조금 다른 느낌을 준다. 전자가 사회적인 자세라면 후자는 좀더 개인적이고 사적이다. 그 중 첫번째 사진, 주먹밥을 한입 가득 미어터지게 베어무는 남자의 사진은 애잔하기까지 하다. 도시락을 먹으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웃음 짓는 얼굴에는 녹록하지만은 않은 생을 살며 둥글려진 생활의 기술이 엿보인다.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에서 박찬일은 랍스터를 휘지 않게 잘 삶기 위해 가슴에서 배로 찔러 넣는 부젓가락 이야기를 하며 "당신 접시에 오른 랍스터가 반듯한 것은 결코 그 녀석의 본성이 아니다."라고 호쾌하게 정곡을 찔렀다. 아베 부부는 도시락 사진에다 그 사람이 지나왔고 현재 살아가는 시간을 간결하게 담아낸다. 굳이 도시락이 아니어도 평범한 이들의 이야기를 취재할 수 있겠지만 도시락을 매개로 벽을 넘어가기 수월했을 듯. '도시락의 시간'은 '도시락에 담긴 시간' 혹은 '도시락이 먹은 시간', 더 평이하게는 '도시락과 함께한 시간'이 되겠다.

 

이 책이 더 흥미로운 건 39가지 특이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덕분이다. 직업이 특이하다는 건 내 소견일 테다. 세상에 존재하는 직업의 수는 엄청나다고 들었지만 내가 처음 들어본 직업도 많았다. 대충 열거하자면 집유원, 해녀, 산사음악연주자, 증류소직원, 말 체중 측정 담당자, 수타면 장인, 모래찜질온천 직원, 관광마차 마부, 원숭이 재주꾼, 아이누 예술인, 사찰승려, 북 연주자, 가야부키(일본 전통 초가집) 장인, 옛날이야기꾼, 스키 투어 가이드 등등.  각자의 직업과 관련한 구체적인 이야기가 재미있다. 그냥 할머니, 고등학생, 유치원생도 있다.

 

생활과 가족을 말하며 그들 직업에 서린 애환을 즐거움으로 승화해 들려주는 이야기가 진솔하고 밝다. 도시락에 담긴 애정과 배려, 감사의 마음이 느껴지는 대목들에서는 어김없이 훈훈한 마음에 젖게 된다. 첫 새벽에 출근하는 남편은 "아무리 부부라도 서로 힘들게 해서는 안 되는" 거라며 손수 자신이 먹을 주먹밥을 싸고, 또 첫 새벽에 출근하는 역무원 아내를 위해 어떤 남편은 손수 아내가 먹을 도시락을 싼다. 아이들 도시락을 손수 싸주는 아버지, 하트를 보면 행복 모양이 떴다고 좋아하는 유치원생 아이에게 하트모양 계란말이를 꼭 싸주는 일하는 젊은 엄마, 먹은 상태를 보려고 도시락을 씻지 말고 가져오라는 아내, "내 나이 때는 뭐든 조금만 있으며 되거든"이라고 말하며 멀리 있는 딸이 보내주는 고기로 도시락을 싸는 놀빛 할머니, 세상에서 하나뿐인 '스카보로 페어 베이컨'을 손수 만드는 철도 운전사 등등...

 

문어잡이 항아리를 연구 중인 디자인학과 교수는 손수 자신의 도시락을 준비한다. 고양이가 남긴 참치로 김밥을 싸오고, 고양이가 남긴 게 없는 날은 학교식당에서 200엔 하는 매실 미역 우동을 먹는 그의 이야기는 신기하다. 문어잡이 항아리가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문어잡이 항아리는 구멍이 뚫려 있어서 문어가 도망치려고 맘만 먹으면 언제든지 도망칠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잡히면 문어의 책임이 된다는 점이 무척 공정하게 느껴지죠. 문어도 적당한 곳에 몸을 숨기고 싶은 게 아닐까 싶어요.

작년에 그렇게 바라던 금과 은으로 된 문어잡이 항아리를 만들었습니다.

높이가 2미터 정도 되고 무게가 약 360킬로그램이나 나가는 거대한 항아리였죠. 만들고 나서 안에 들어가 봤는데,

문어의 기분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더라고요. 나오기가 싫었거든요. 다시 태어난 기분이 들었습니다.

금 항아리 안쪽에는 옻칠을 해놔서 바닷속에서 보면 마치 블랙홀처럼 보일 거에요.

은 항아리 안쪽은 형광도료를 발랐기 때문에 번쩍거리고요. 제 숙제는 이것을 어떻게 바다로 옮길 것인가랍니다

      - p45

 

 

"도시락은 두 사람이 먹는 것"이란 말이 좋다. 혼자 먹지만 싸준 사람과 함께 먹는 것이니.

"사람에게서 삶의 활력소와 건강을 얻었다"고 믿고 말하는 증류소 직원의 말도,

"오늘도 좋은 스님이 아니었다. 하지만 내일도 스님으로 있자."라고 말하는 사찰승려도 참 좋다.

육덕진 체구의 이 사찰승려는 초등학교 때 사용하던 알루미늄 도시락을 지금도 쓰는데 4학년 때 어머니가 한천을 만들 때도

그 도시락을 써서 바닥에 칼자국이 나 있다. 그런데 일본의 사찰승려는 결혼을 하나 보다. 지금은 아내가 이 도시락에

밥을 싸준다니. 반찬도 절반 나눈 삶은 달걀 한 개와 생선구이가 보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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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는재로 2012-09-25 1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시락은 두사람이 먹는것 진짜 좋은 글귀네요 싸준사람과 먹는 사람 두사람의 정이 통한다는 뜻이 겟죠

프레이야 2012-09-26 18:49   좋아요 0 | URL
고등학생 때 엄마가 싸주신 도시락 두 개가 생각납니다.
한 개는 1교시 전에 이미 먹고 없었어요. 모양새는 투박해도 정성이 담긴 도시락이라야 진짜겠지요.

책읽는나무 2012-09-25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낼모레 또 도시락을 싸야하는데 말이죠~
귀.찮.다.라는 생각이 먼저였는데,이젠 그러지 말아야겠단 생각이 문득 드네요.^^
포토리뷰 다시 한 번 올려주세요.ㅋ

프레이야 2012-09-26 18:50   좋아요 0 | URL
내일 도시락 예쁘고 맛나게 싸시겠네요.^^
갑자기 다른 사람이 싸준 도시락이 먹고 싶어진다능ᆢ 포토리뷰는 아무래도 패스에요.ㅎㅎ

블루데이지 2012-09-26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책을 읽고는 평범한것들에 이렇게 맘이 짠하게 묵직하게 울려도 되나 싶을정도로 저도 이책 너무 좋았어요!
이 책을 읽은사람으로서 프레이야님의 리뷰를 읽으니 복습되고, 읽을때의 감동도 다시 살아나서 너무 좋아요!
프레이야님께서 느끼신걸 저도 느꼈다는게 너무 기분좋으네요!
프레이야님을 지극히 애정합니다...

프레이야 2012-09-26 16:42   좋아요 0 | URL
우리 같이 느꼈군요.^^ 고마워요, 블루데이지님 :)
지극히 평범하고 소소한 것들이 결코 작은 게 아니란 것.
그런 것들이 쌓이고 모이고 이어져서 의미가 되는 것 같아요.

자목련 2012-09-26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시락'말로 함축한 삶을 만나셨군요. 엄마가 싸주셨던 설탕을 살짝 뿌려서 라면 봉지에 담았던 누룽지가 생각나요.
39가지의 직업과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정말 정겹고 따뜻할 것 같아요.
음식에 대한 책들이 많이 쏟아져서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이 책은 색다른 맛을 안겨줄 것 같아요.
프레이야님 글 덕분이겠지요?

프레이야 2012-09-26 16:44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자목련님. 인터뷰이들의 얘기가 장황하지 않게 나오는데
'도시락' 안에 많은 게 함축되어 있어요. 행간에 엿보이는 어떤 것들이요.^^
설탕 뿌린 누룽지는 먹어봤지만 그걸 라면봉지에 담아서 주셨군요, 엄마가요. ㅎㅎ
한 맛 더 났겠다 싶어요.
이 책은 정말 책 자체가 예뻐요.

페크pek0501 2012-09-27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시락은 싸준 사람과 둘이 먹는 거군요. 멋진 표현이에요.^^

프레이야 님은 신간평가단으로 다양한 책을 읽을 수 있겠네요. 저는 책은 탐나지만 이렇게
부지런히 리뷰 쓸 자신이 없어서 엄두를 못 내요. 더군다나 이렇게 성실하게 쓴 긴 리뷰는...

저, 추석 쇠러 2박3일로 대구에 간답니다. 추석 연휴, 잘 보내세요.

2012-09-27 1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2-09-27 20:47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종파에 따라 다르군요.
페크 님의 생각처럼 오히려 믿음이 갈 거 같은걸요, 저도. ^^
대구면 이곳에서 그리 멀지않은 도시에요.
추석 맛난 거 많이 드시고 몸도 마음도 편안할 수 있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일은 적당히 분배해 하시구요ㅎㅎ 리뷰는 저도 맨날 하루 늦거나 마지막날ᆢ
벼락치기 공부하던 버릇이 아직ㅎㅎ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 - 박찬일 셰프 음식 에세이
박찬일 지음 / 푸른숲 / 2012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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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이 남다른 저자들이 많은데 박찬일도 이력이 남다르다. 기자 출신답게 군더더기 없이 치고 나가는 문장이 힘있고 맛깔져 읽는 재미가 있다. 인간관계도 전방위 같은데 김중혁 등 문학계 사람들은 물론 기자 시절 이탈리아 영화에 매료되어 이탈리아로 음식 유학을 갔을 정도이니 셰프들과의 관계도 그렇고, 달걀을 몸서리치게 좋아하고 술 잘 마시고 새로운 음식 먹는 것도 좋아하고 두루 호쾌한 사람 같다. 특히 음식을 만드는 사람은 미각만이 아니라 상당히 예민한 감각을 본능적으로 지니고 있어야 될 것 같은데 저자가 그런 느낌을 준다. 섣부른 판단일 수도 있지만 에세이는 어떤 식으로든 글쓴이가 보여서 읽는 이와 쓴 이의 거리가 상대적으로 가까운 글쓰기 방식이라 좋다.

 

'맛'에 대한 이야기다. '인생 앞에 놓인 수많은 맛의 강물을 건너는 당신에게'라는 헌사로 서문을 시작한다. 음식의 맛에 대한 이야기이고 추억의 맛에 대한 이야기다. 글쓴이의 맛의 추억이 읽는 이에게도 위로의 맛이 될 수 있다니, 맛난 책이다. 단순히 남의 이야기를 읽는 것에서 그친다면 부족하겠다. 언급된 어떤 재료든 맛나게 조리할 수 있는 '비법'이라든지 쉽고도 자신있게 해볼 수 있는 자신만의 조리법도 제공하고 있다. 유머와 농담을 섞어가며 엽기적인 먹을거리 후일담을 늘어놓고 잠시 사색에 빠지고 철학하다가고 아무렇지 않은 척한다. 참새머리 오도독 씹기나 죽어도 다리에 남아있는 신경의 꿈틀거림으로 생존을 항변하는 블랙유머의 주인공 산낙지 아니 죽은 낙지의 추억 같은 것.

 

저자에 의하면 음식의 맛이란 지구시계의 1년을 기준으로 12월 31일 오후 다섯 시의 존재, 그 인간시계의 오후 다섯 시에 나타났다. 오후 다섯 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 해거름을 준비하는 시간이잖은가. 음식의 맛을 위해 공을 들이는 일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란 얘기인데 나로서는 쓸쓸하고도 충만하게 지는 해를 가슴으로 맞을 준비를 하는 시간과 그 이전 시간의 추억을 곱씹는 재미도 더했다. 돌이켜보면, 음식을 만드는 일도 먹는 일도 그렇게 거룩했다.

 

세 개의 장으로 나뉜다. 1부는 우리 땅에서 몸에 지문처럼 새겨진 맛의 추억, 2부는 외국 땅의 낯선 맛의 추억, 3부는 문학작품 속에 등장하는 음식과 맛의 추억이다.

 

1부에서는 21가지 우리 음식이 불러오는 추억을 이야기한다. 어린 시절 수박 화채 속에 둥둥 떠 있던 송곳으로 깬 날카로운 예각의 얼음맛, 스러져간 가부장의 권위가 서글픈 닭백숙의 기억, 각자의 입안에서 이질적인 맛의 창조를 찾아내는 아름다운 공간 배열의 남도 한상 차림, 어머니가 쌓은 찬합의 높이로 추억하는 운동회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전은 지구전(持久戰)이다,에서는 전을 대표 슬로 쿠킹으로 부르며 명절이면 소쿠리 가득 하루 종일 전을 부쳐야하는 여자들의 힘든 노동을 알아주는 대목이 나온다. 명절이면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픈데 그걸 알아주는 남자가 여기 있다.

 

경북 내륙지방의 배추전에 대한 추억이다.

 

전은 기름막이 있는 듯 없는 듯 바른 팬에서 천천히 요리해야 하는 음식이다. 손님이 아무리 난리를 쳐도, 후딱 만들어서는 안 되는 음식이다. 그래서 전은 지구전이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워 학대하면서 만드는 음식이다. 그걸 아는 집을 여간해서는 찾기 어렵다. 역시 늙으신 어머니를 다시 졸라야 하나.   - p83

 

 

2부에서는 15가지 외국음식의 추억을 불러온다. 나는 이 장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치즈, 랍스터, 소 내장 요리, 라멘, 바칼라, 딤섬, 이슬람의 할랄푸드 등 다른 문화를 맛과 함께 받아들이는 이야기가 흥미롭고 유익하다. 이탈리아적인 서사로 기억한다는 '대부'에 매료되어 시칠리아 섬으로 간 저자가 카놀리와 토마토소스를 첫 순서로 말하는 건 당연한 일.

 

시칠리아 유학 당시 스승, 주세페가 전하는 초콜릿 소스 토끼요리는 특별하다. 공정무역으로 들여온 카카오 초콜릿으로 '가장 순수하고 가장 품질 좋은' 초콜릿을 만든 그의 초콜릿 소스에는 마성이 깃들어 있다고 느낀다니. 주세페는 말한다.

"대지의 기운, 흙냄새, 먼지바람, 새벽이슬 같은 게 카카오의 본래의 맛과 냄새야. 잘 맡아봐. 아프리카의 카카오는 무언가 건조하고 대륙적이고, 아메리카의 카카오는 습하고 진하며 나무냄새가 많이 나. 둘 다 태양을 닮은 맛이라는 건 공통점이지." (p194) 

 

저자가 마음에 새긴 주세페의 말은 삶을 살만 한 것으로 만든다.

 

"초콜릿소스의 토끼 고기 같은 건 이제 먹지 않을 줄 알았어. 이탈리아에 맥도널드가 들어오고 나서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지. 그렇지만 나는 아직도 그걸 만들고,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알아? 낙관하는 거야.

희망이 없으면 삶이 무슨 소용이지? "   - p195

 

 

이슬람의 할랄(허용,이란 뜻) 푸드에 대한 구절은 새삼 놀라운 각성이다.

 

 

할랄 푸드와 수식(手食)은 강제된 것은 아니지만,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 교차점을 맞붙이고 있는 것 같다. 오직 오른손을 써서, 살과 소스를, 할랄의 고기를 꾹꾹 뭉쳐 먹는 온전한 手食은 지상에서 가장 경건한 식사법이다. 신이 주신 모든 먹을거리는 손을 통해 그 존재의 각성을 불러온다. 따뜻한 음식을 체온으로 집을 때 그것은 비로소 내 몸이 될 것이란 확신을 얻곤 한다. (중략)

"손 있는 자, 그대 손으로 음식을 집으라. 신이 거기 있으리라."   - p229

 

 

 

3부에서는 황새치가 나오는 <노인과 바다> 등 9편의 작품을 통해, 한때 이러저러한 소재로 소설쓰기에 도전해봤던 고백도 있고 문학에 대한 그의 끊이지 않는 애정을 엿볼 수 있다. 문학작품 속에서 음식과 관련한 이야기를 끌어온다. 백영옥의 '스타일'을 들어 쓴 '고기 권하는 사회'에서도 아버지가 생각났지만, 박완서 '그 남자네 집'에서 저자가 길어올린 민어의 추억이 맛나다. 여기서 '포만감'에 덜커덕 걸려든 것이다. 저자는 우리가 먹는 행위를 통해 얻는 만족감은 혀에서 두루 느껴지는 화학적 반응에만 기대는 게 아니란 걸 집어낸다. 포식가들의 손을 들어주는 그는 진정한 미식가이지 않은가. 미식가들이야 여러가지 음식을 소량 맛보며 맛에 대한 평론까지 해야할지 모르지만 대개의 우리는 음식이 내 손을 거쳐 식도를 타고 내려가 위장을 부풀려주는 그 포만감에 흡족해 한다. 재료는 두툼해야 하고 양도 적어서는 안 된다. 혀의 오르가슴을 더해주면 금상첨화지만 절정의 감각은 일순간의 것, 그 순간이 지나면 체감되고 망각된다. 그에 비해 포만감은 상대적으로 좀더 오래간다.

 

민어는 식도를 자극하는 통쾌한 맛이 있었다. 두껍게 썰어 질감을 살린 횟점이 식도를 넘어가며 위에 포만의 자극을

시작한 셈이었다. 미각이란 때론 화학적 반응을 넘어 물리적 현상으로도 읽을 수 있는 것일까.   - p272

 

 

내 아버지는 고기대왕이다. 생선보다 육류의 살점을 즐기는 당신은 여든이 넘은 생, 평생 몸을 키우고 만들고 그 몸으로 일하고 늙어가는 생명의 재료로 고기를 드셨다. 우리 삼남매는 당신 몸의 등골을 빼먹고 자랐다. 아버지가 먹은 소를 일렬로 세운다면 그 길이가 얼마일지 가늠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런 얘길 하며 웃곤 하시는데 지금은 드시는 양 자체가 줄었다. 어린 시절 기억에도 고기가 오르지 않은 밥상은 한번도 없었다. 채식을 하면 소화가 안 되니 상추 같은 채소가 곁들여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생마늘이나 생양파가 채소를 대신한다. 고기는 무한정 소화가 되니 특이체질도 그런 체질이 없다. 그래도 혈압도 정상이고 성인병이라곤 없다. 아버지는 고기를 얇고 잘게 썰면 싫어하신다. 두툼한 고기살의 붉은 기운이 가시기 전에 지글지글 매 끼니 드시니 주방엔 늘 기름기가 배어있었다. 식탁도 바닥도 주방 벽지도 누렇고 찐득거려 육식을 좋아하지 않는 어머니는 힘드실 수밖에. 그래도 밑반찬 요것조것 해야하는 상차림보다 수월하다고 하신다.

 

낚시에 걸린 민어를 바라보며 저자는 요리와 생명과 먹는 일의 숙명적 관계를 이렇게 쓴다.

 

 

고기가 사후 경직이 일어나듯 생선도 그렇다. 붉거나 푸르거나 선명한 색채의 몸통 빛이 서서히 사라지고, 산소 부족으로 청색증이 돌듯이 사악하고 창백한 푸른 기운이 돌기 시작한다. 그것은 그로테스크하기까지 하다. 생명이 사라지는 과정이다. 요리는 생명을 위해 복무하지만, 그 재료는 아이러니하게도 생명에서 얻는다. 육식하는 사람의 태생적인 딜레마랄까. 번민은 그렇게 시작될 것이다.  - p268

 

 

음식의 맛, 추억의 맛은 오후 다섯 시의 맛이란 말에 끄덕거려진다. 추억의 절반은 맛이라고 하니, 나머지 절반은 무얼까.

먹어서 '내가 된' 저자처럼 해거름에 서서 맛을 추억하는 아버지와 나, 그리고 멀가까운 인연들을 생각한다.

 

 

 

 

 

 

 

ps)  좋은 책에 오자가 둘 있어 아쉽다.

       p194 /아프리카 사람들은 뱀을 숭상한다. 대지를 배고 훑고 다니면서 어머니 대지와 동거한다. (배고 --> 배로)

       p263 /소설 속의 새댁은 아마도 작가의 어릴 적 분신은 혐오의 기분까지 한껏 내비치고 있었다. (분신은 --> 분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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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2-09-25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식의 맛은 추엇의 맛이기도 하다는 말에 전적으로 공감이되는 글입니다. 이번 명절이 지나고 프랑스로 유학을 가는 녀석에게 사람의 마음을 치유할 수 있고, 풍요롭게 할 수 있는 파티쉐가 되어서 오라고 하면서 선물한 책입니다.

프레이야 2012-09-26 16:49   좋아요 0 | URL
추억을 불러주는 음식, 누구에게나 있겠지요.
맛깔나게 쓰느냐의 문제는 다른 문제겠지만요.
이 책은 벗에게 좋은 선물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LAYLA 2012-09-26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를 보고 어찌 책을 사지 않을 수 있겠어요...바로 사러 갑니다 ㅎㅎㅎ

프레이야 2012-09-27 07:43   좋아요 0 | URL
홍홍! 사셨어요?ㅎㅎ
맛나게 읽으실 거에요. ^^

페크pek0501 2012-09-27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세이는 어떤 식으로든 글쓴이가 보여서 읽는 이와 쓴 이의 거리가 상대적으로 가까운 글쓰기 방식이라 좋다."
저는 글에서 저를 숨기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 배워야겠군요. 잊고 있었어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알아? 낙관하는 거야. "
이것도 배워 갑니다.^^

프레이야 님, 저도 오후 다섯 시부터 어두워지기 직전까지의 시간을 좋아한답니다.
요즘 이 시간에 산책을 하면 죽이죠. ㅋㅋ

프레이야 2012-09-27 20:47   좋아요 0 | URL
낙관이 때론 위험하단 생각을 하먼서도 그럼에도 그게 최선의 태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귀착해요. 페크 님도 해 넘어가는 그 시간을 좋아하시는군요. 와락 반가워라. 님이랑 저는 기가 비슷한 거 같다능ᆢ 호호~~~ 개와 늑대의 시간이기도 한 그 시간, 공원산책 하며 저도 호흡 좀 가다듬어야겠어요. 산책! 이 말 참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