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버 - 제15회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113
나혜림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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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버 나혜림

 

악마가 유혹하기 딱 좋은 지독한 가난, 거기 놓인 한 중학생이 주인공이다. <파우스트>를 읽을 때도 그런 생각을 한 적 있다. 악마가 자기 신분을 밝히고 거래를 하자고 덤비는데 미끼를 문다? 바보 아닌가? 나라면... 이러면서 그깟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의연함이 내게 있는 듯 으스댔다. 하긴, <파우스트>를 처음 읽을 때가 고 2땐가 그랬으니 세상을 온통 관념으로 받아들였는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지성과 육신이 불일치하는 노인이라면 그런 악마의 유혹에 쉽게 넘어갈 것 같다. 늙어가기 시작하니 조금은 알겠다. 나도 할 수 있는 일은 아직 많은데 몸이 늙어가니 어쩌누, 싶은데 파우스트처럼 영민하고 박학다식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지성이 몹시도 아까워 악마와 거래라도 하고 싶었을 것이다.

 

나혜림의 <클로버>에도 자칭 자신이 파우스트와 거래했다고 하는 악마가 등장하는데, 이번에 거래 대상은 찢어지게 가난한 중학생 소년이다. ‘만약에라는 말 한마디만 하면 악마와의 거래가 성사되는, 갖고 싶을 것이 너무나 많은 소년 정인. 할머니와 폐지를 줍고 악덕 사장이 운영하는 햄버거 가게에서 알바를 해야 겨우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복지관에서 주는 햇반과 라면으로 끼니를 이어야 하는, 절대적 가난에 놓인 소년이다.

 

악마는 고양이의 모습으로 다가와 정인에게 영혼을 팔라고 유혹한다. 하지만 대상을 잘못 잡았다. 악마의 거래에 쉽게 넘어가는 사람은 가난한 자들이 아니다. 정신이 핍약한 사람이 유혹에 넘어가는 것이다. 정인은 건강한 아이다.

 

 

청소년 소설을 읽으며 이토록 많은 플래그를 붙인 적은 없었다. 명문과 박학다식, 현란한 말솜씨에 드라마로 만들면 좋을 것 같은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이런 글을 보면 역시 소설은 아무나 쓰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나에 한 번 들어가 보고 싶었던 1인으로서). 청소년 소설들 품질이 엄청 높아지긴 했지만 아무래도 재미와 줄거리가 중심에 놓여 문체라든가 철학적 성찰이라든가 주제의식 면에서 심오한 것들은 많지 않다. 그런데 오랜만에 재미도 있으면서 뭔가 성숙한 느낌을 주는 청소년 소설을 만난 기분이다. 심지어 나는 기억에 남는 문구를 입력해 놓기까지 했다. 그에 대한 나의 느낌 주석도 붙여 본다.

 

악마는 부잣집에도 찾아가지만 가난한 집에는 두 번 찾아간다 순정한 영혼으로 태어났으나 가는 혹은 부족한 부모 탓에 불행해진 청소년들을 생각하며 가슴 아팠다.

 

인류 역사 3400년간 전쟁이 없었던 날은 268, 고작 97820일뿐이었어. - 전쟁의 위험을 걱정하는 이시대를 살며, 내가 살아온 지난 수십 년의 세월이 악마가 휴가갔던 귀하디 귀한 시간이었다는 생각을 하니 감사하면서도 모골이 송연하다. 다시 전쟁의 시대를 물려줄 것인가? 내가 사는 이땅에서가 아니라 해서 다른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끔찍한 전쟁은 어찌할 것인가?

 

한 잔은 너무 많고 천 잔은 너무 적다. - , 이 반어법이라니. 이 상대성이라니!

 

악마에게 식욕은 없다. 식탐만 있을 뿐. - 잘먹고 잘 사는 이 시대에 갈수록 사람들이 더욱 맛있는 것을 갈구하는 모순.

탐욕은 모든 등식을 부등식으로 만들거든. - !

 

정인은 재아의 손바닥 앞에 제 손을 펼쳤다. 패티를 데우다 생긴 화상, 폐지를 줍다가 노끈에 쓸린 자국이 있는 손,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손과 돈을 버는 손은 묘하게도 닮았다. - 처지가 현격히 다른 두 아이가 우정의 교감을 나누는 장면을 이렇게 표현하다니!

 

소돔에서 나는 사과는 겉보기에는 아름다우나 재의 맛만 난다고 함. - 지옥의 유황냄새나는 꽃밭처럼, <기억전달자> 속 무채색의 디스토피아처럼, 맛과 향을 지닌 이 소소한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를 새삼 느끼게 하는 장면.

 

몸은 급하게 크는데 안쪽은 옹골차게 차오르질 못하고 비었는지, 정인은 눈동자가 깊고 말이 없는 아이로 자랐다. 하지만 그 휑한 안쪽에선 분명 고소하고 달콤한 냄새가 났다. 급하게 철들며 포기해야 했을 욕심들이 소년 안에서 뭉근하게 숙성되었기에. 너무 일찍 밥값의 무게를 알아버린 어린 눈에 비친 세상은 소년의 영혼에 풍미를 더해 주었고, 소년이 곱씹어 삼킨 외로움은 근사한 고명이 되었다. - 정인을 악마의 먹이로 표현하는 대목. 배고픔이 아이를 정신적으로 성숙하게 만드는 시대는 지나지 않았을까 싶어 읽으며 마음이 아팠던 장면이기도 하다.

 

복지관에서는 오래된 박스 냄새가 난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복지관 건물이 골판지로 지어진 것도 아닌데. - 세상이 함께 힘을 합쳐 가난한 아이를 도와도 어딘가 종이밥을 먹는 것처럼 허전하고 허청하다. 그 느낌을 이렇게 표현하다니!

 

왜 인간은 불운에게만 묻는가? 행운에겐 왜 나인가? 묻지 않으면서 생각해 보니 정말 그러네. 행운이 왔을 때 감사할 줄 알아야겠다. 만약 그 모두가 신의 가호도 악마의 장난도 아닌 그저 우연이라면, 모든 우연에 대해 인간은 겸허해야 한다.

 

지옥은 죄 지은 사람들이 가는 곳 아니에요?”

그럼 지상은? 여기서 고통 받는 사람들은 무슨 죄를 지었는데?” - 악마는 이렇게, 얄밉지만 옳은 말을 한다.

 

돈 낭비하는 방법도 진짜 다양하고 창의적이네요.”(호텔에서 악마와)

산통 깨는 방법이 다양하고 창의적인 것처럼” - 정인과 악마의 티키타카

 

햇빛은 작열하며 그 아래에 있는 것들을 노동하게 하지만 달빛은 뭉근하게 뜸을 들이며 상념이라는 김을 뿜어낸다. - 우와, 이거 시() 아닌가?

 

집안 곳곳에 누군가 빨간색 색연필로 오답표시를 해놓은 것 같았다(호텔에서 돌아온 뒤 곰팡이, 뒤틀린 문, 깨진 타일을 가진 집을 보고 느낀 정인의 감정) - 인생이 망가진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이토록 직관적으로 표현한 작가에게 경의를.

 

인생도 마찬가지고. 마냥 어두운 것 같아도, 그 밤이 지나고 햇빛이 비출 때 어떤 모습이리지는 너희가 결정하는 거다 ; 정인의 국어 선생님의 말(소설 속에서 멋진 말들은 주로 국어샘들이 한다. 나도 국어 선생인데, 우리 아이들에게 저런 통찰력 있는 이미지로 보이긴 하려나?)

 

돌아서는데 찍 하고 뭔가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간신히 붙어 있던 운동화 갑피가 밑창에서 떨어진 거였다. 정인의 자존심도 기어코 찢어지는 것 같았다. 괜찮다, 괜찮다, 나는 괜찮다... - 심리학에서 신체화라는 표현을 쓴다. 마음의 아픔이 몸의 아픔으로 나타나는 것. 정인은 삶이 무너지는 장면을 아슬아슬했던 운동화가 찢어지는 것으로 느낀다. 그럼에도 괜찮다, 괜찮다...’ 읊조릴 수 있는 성숙한 아이다.

 

악마(간디를 인용하며); 말을 믿지 마, 차라리 빵을 믿어 세상에는 너무 배가 고파서 신이 빵의 모습으로만 나타날 수 있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잖아

 

폭력은 비디오 게임, 전쟁은 뉴스 속보, 착취는 초콜릿, 생명 경시는 모피 코트, 환경 오염은 아보카도와 스포츠 카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 그렇게 악마와 손을 잡고 우리는 자본주의를 누리며 잘 살고 있다.

 

한 칸짜리 집에는 갈등을 넣어 둘 수납 공간이 없다. 이런 격언이 있다니!!

 

공기 중에 만약에가 가득 차 있었다. 축축하고 어두운 정인의 머릿속에서 만약에는 풍성하게 포자를 터뜨렸다. -상념에 가득찰 때 내 머릿속은.. 그랬구나, 곰팡이 포자가 퍼지듯, 그래서 잠도 못들고 마음이 아팠던 거구나..

 

보호자 대기실 문을 나서려던 정인은 제가 걷어찬 슬리퍼를 보고 머뭇거리다가...... 결국 슬리퍼를 아줌마 쪽으로 다시 밀어주고는 나갔다. -그래, 정인이는 착한 아이라니까?

 

만약에를 백 번 해도 네가 있어야지.”

할머니의 목소리가 정인의 등을 감쌌다. - 이런 말들을 아이들에게 자꾸 들려줘야 한다.

 

저 미성년자예요. 면허 없어요.”

그놈의 미성년자, 미성년자! 너 말하는 것만 보면 나이를 선결제로 한 삼십 년 당겨 쓴 사람 같은데.”

철이 당겨서 들긴 했어요. 왜 식물에 햇빛이 부족하면 위로만 가늘게 웃자란다면서요. 제가 좀 웃자랄 환경이었거든요.”

그러자 악마가 웃자란 식물에게는 늦거름을 줘야지.”라고 말한다. - , 이 대목을 읽으면서 내 머릿속으로는 드라마 캐스팅을 하였으며 두 배우(악마역/정인이 역)가 틱틱거리는 장면을 상상했다. ! 오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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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는가 소크라테스 예수 붓다 - 그들은 어떻게 살아왔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프레데릭 르누아르 지음, 이푸로라 옮김 / 마인드큐브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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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의미가 궁금해질 때마다 사춘기 때 그랬듯이 예수를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예수를 사랑한다(다만, 그가 신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아 신앙을 갖진 못한다). 내 삶이 늘어진다거나 슬프다고 생각될 때마다 그이를 떠올리면 조금은 나은 사람으로 살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래서 얼마 전에 그런 책들을 찾다가 이 책을 발견했다.

 

권력도 돈도 갖지 못했던 이들, 살아생전 고난과 핍박과 고통스러운 죽음을 면치 못했던 세 사람. 인간은 운명 앞에 나약하고, 아무리 좋은 운명을 지녔어도 피할 수 없는 생명의 고통을 품고 살아야 하는 존재이지만 그래도 정신의 고결함을 유지하는 자율성을 지니기에 무의미하지 않을 수 있는 존재이다. 예수와 붓다와 소크라테스는 그런 삶의 태도를 보여주는 정점에 있는 이들이다.

 

붓다라 불린 사람은 2500년 전 북부 인도에 살았다고 한다. 그리스인 소크라테스는 약 2300년 전 아테네에 살았으며 예수는 2000여 년 전 팔레스타인에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무덤이나 유골은 남아 있지 않다. 그들의 존재를 입증하는 화폐나 고고학적 흔적도 없다.... 그런 흔적이 없는 이유는 이들이 한 번도 권력을 손에 쥐지 않았기 때문이다.

 

권력을 잡지 않았으나 사람들 마음속에 영원히 산다.... 역설이다. 이런 역설은 역사에 부지기수다. 애초에 그들 삶의 목적이 무언가를 남기는 것도, 유명해지는 것도 존경받는 것도 아니었기에 그렇다,

 

소크라테스의 친구가 델포이 신전에 신탁을 받으러 갔다가 '모든 사람 가운데 소크라테스가 가장 지혜롭다'는 신탁을 들었다 한다. 소크라테스는 지혜롭다는 사람들이 자신이 모르는 것도 안다고 주장하는 것을 보고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 세상에 현명한 사람은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델포이 신전에 쓰인 '너 자신을 알라'라는 문구는 소크라테스로 하여금 사람들에게 무지를 일깨워주는 사명을 좌우명으로 갖게 했다.

평범한 사람들도 나이가 들면서 자기가 치열하게 살았던 것, 알아 왔던 것, 쌓아왔던 기능과 지식들이 참으로 별 볼 일 없는 것이라는 자각을 하는 경우가 많다. 현명한 늙은이는 늙을수록 자기가 아는 것이 별로 없음을 깨닫게 된다. 진정으로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이야말로 모르는 게 너무 많고 공부할 게 너무 많음을 깨닫게 된다. 간장 종지만 한 세상에 살고 있는 이는 오만을 못 벗다가 자기가 세상 최고인 줄 알고 살게 된다.

소크라테스의 경지에 도달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평범하지만 지혜로운, 그리고 겸손한 노인이 되고 싶다.

부처의 이미지는 말 그대로 엄근진(엄숙근엄진지)이지만 예수와 소크라테스에게는 유머 감각을 본다. 부처도 농담을 하는 이는 아니었더라도 자애롭고 따뜻한 이였나 보다. 유머 감각은 여유에서 나온다고 했다. 너그러움은 세상과 우주를 넓게 이해하는 이에게나 가능한 덕목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한량없이 푸근하기만 한 존재들은 아니었다. 때로는 단호하고 엄격했으며 특히나 그 엄격함의 잣대는 제일 먼저 자기 자신에게 들이대던 이들이다. 1. 자신에게 엄격하고 2. 기득권 세력에게 냉철하며 3. 약자에게 너그러운 지도자. 지도자가 되어야 할 사람 모두에게 필요한 덕목이기도 하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평생을 살며 자신을 벼리는 기준으로 삼아아 할 덕목이기도 하다.

 

그래, 그래서 나는 내가 한없이 슬프고 우울할 때마다, 내가 못나고 초라하게 느껴질 때마다 그토록 예수의 삶을 되짚어 보려 했나 보다. 그러고 보니 우연히 발견한 책이지만 이 책처럼 치우침 없이 세 존재의 삶과 행적을 어렵지 않게 들려준 책이 있었나 싶다. 나이가 들면서 삶과 죽음에 대해 돌아봐야겠고 철학과 종교에 대해 알아나가고 싶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 이, 특히 지성으로 접근하기를 원하는 이들이라면 이 책으로 첫 발걸음을 떼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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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비포 유
조조 모예스 지음, 김선형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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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원서는 읽는 데 오래 걸리는 게 당연하긴 하다. 재미있어서 영어 공부하기 딱 좋다는 말에 속아서(?) 책을 사들었지만, 그리고 로알드 달의 <마틸다>를 읽던 방식으로, 단어 찾지 말고 이해가 되거나 말거나 쭉쭉 읽어나가리라 결심했지만, 이 책에 사용된 단어들은 결코 쉬운 단어들이 아니었다(물론 어린이 책인 마틸다도 결코 쉽지 않았다). 러브스토리라 다음이 궁금해서 책을 손에서 놓기 어려웠다고? 그런 말 하는 이들은 영어 쫌 하는 사람들인 거다.

 

온갖 번역기를 다 써도 갈증은 해소되지 않고, 진도는 나가지 않은 지 1년도 넘은 것 같다. 결국 나는 도서관에서 한국어판 <미 비포 유>를 빌리고 말았다. 그렇게 어찌저찌하다 보니 책을 두 권 읽은 셈이 되었다.

 

중간을 넘어가면서, 그러니까 윌과 루가 교감을 하면서 소설이 재미있어졌다. 루의 어떤 면이 윌이 보기에 똑똑해보였는지는 모르겠다. 루는 착하고 따뜻한 사람이지만(본인도 그렇게 알고 있었을 터) 윌은 그 너머를 본다. 인생은 그런 사람을 만나야 행복해지고 성공하는 법이다. 나도 못 본 나의 잠재력과 장점을 보아주는 사람 말이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이 서로에게 그런 존재라면, 특히 부모가 자식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준다면 좋은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주인공인 루가 그런 귀인 을 만나 인생 역전하는 이야기이다. 구조적으로 신데렐라 이야기일 수도 있다. 잘생긴 부자 남자를 만나 사랑하게 되었고 그의 도움을 받는다는 면에서. 그런 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서로에게 얽매이지 않는 다른 차원의 사랑을 보여준다는 면이 이 소설 플롯의 특성이겠다. 그 사랑은 일방적이지 않다. 윌도 루에게 가장 따뜻한 사랑을 받아보았으니. 아마도 건강한 몸으로 살았다면 결코 맛볼 수 없는 순수한 사랑을 알게 되었다는 면에서 둘의 관계는 일방적이지도 않고 시혜적이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보고 싶었지만 온전히 영화로 감상할 기회는 없었다. 부분적으로 찾아본 영상 속 두 주인공은 소설 속 인물들과 너무나 닮았다. 그러나 영화를 본 분이라도 소설을 꼭 읽어 보라 권하고 싶다. 간절하고 절실한 마음이 잘 묘사된 좋은 문장들이 가득하다. 그리고, 비록 원서를 읽는 사람을 괴롭힐지언정 우리가 아는 흔한 표현이 아닌 풍부한 표현들로 인물의 감정을 잘 전달한다(한국어판 번역도 훌륭하다). 그리고 그들의 캐릭터도.

 

슬펐고, 너무 오래 읽어서 이제 안녕을 하고 싶기도 한 그런 책이다. 인생도 그렇지 않을까. 헤어질 때 아쉽겠지. 그러나 때가 되면 이제 그만, 해야 할 때가 오는 법. 책 한 권은 인생 한 권 같다. 뒤에 보니 저자는 이 이야기의 다음 편, 또 다음 편을 썼던 모양인데, 윌이 없는 루만의 이야기는 (보나마나 재미있겠으나) 보고 싶지 않다. 그러고 보면 나도 윌 트레이너를 사랑했던 건 아닌가, 잠시 생각해 본다.

 

, 걱정마시게. 루는 잘 지낼 거야(잘 지낸대). 나는 왜, 너를 간절히 사랑해서 아팠던 루의 고통보다, 네가 루를 만나 사랑하면서 느꼈을 갈등과 너무나 길었을 상념의 시간들에 더 공감하는 걸까. 아무리 고통스러웠던 기억일지라도 그 다음에 남은 시간이 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좋은 일인 거라서 그랬을까. 그러니까 루는 걱정하지 말라고. 그래 넌 애틋했으나 걱정하지 않았을 거야. 너는 그녀가 어떤 사람이며 어떻게 살아갈 사람인지 잘 알았으니까. 그럼 나도 이제 너랑 안녕할게. , (이래서 책을 너무 오래 읽으면 안 돼...) 아냐, , 괜찮아, , 난 중학교 때 돈키호테를 읽고 나서도 울었던 사람이라(그때도 두꺼운 세 권의 책을 오래오래 읽어서 그랬겠지만). 평안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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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 경이로운 세계 속으로 숨어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
패트릭 브링리 지음, 김희정.조현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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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읽으면서 내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을 부러워했다. 우리에게 이런 거대한 미술관이 있나, 더듬어보면서. 작고 사랑스러운 미술관들이야 많지만 보물을 무궁무진 품은 것 같은, 언제라도 달려가 못 본 구석구석을 다시 보고 싶은 그런 미술관, 가령 스페인의 프라도 미술관 같은 곳이 서울에 있던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가 본 적 없지만 만약 내가 뉴욕에 사는 주민이라면 시간이 날 때 종종 가 보고 싶을 것 같다.

 

나에게 그때 국박은 숨통이었다

1994, 오래전이긴 하지만 첫 직장을 접고 서울에 와서 두 번째 직장을 다니고 있었다. 세 살밖에 안 된 아기와 투병 중인 시부모를 모시고 박봉과 야근에 시달리며 직장을 다녔다. 그런 무리수를 둔 이유는 경력 단절의 걱정 때문이었다. 지금이나 그때나, 결혼한 여자들이 다 하는 걱정일 터. 하루에 4, 5시간밖에 못 자던 시절, 숨 막힐 것 같던 그 시절.

그나마 다니던 회사가 마감이 아닐 때는 취재라는 명목으로 대낮에 서울 시내 여기저기를 다닐 수 있었다. 심지어 마감 직후에는 서점이나 박물관에 가는 일이 취재 거리를 찾는 합법적인 행위였다. 그때 한낮에 당시에는 경복궁 옆에 있던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끔 갔다. 사람이 거의 없는 박물관에 남긴 나만의 발자국 소리가 겨우 나를 숨 쉬게 했다. 잠이 모자라 로비에 앉아 깜빡 잠이 들기도 했던가.

 

홀로 작품과 무슨 대화를 나누었을까

거대한 미술관에서 경비를 서는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작품을 바라볼까? 작가가 경비를 서면서 홀로 마주한 작품은 그 긴 시간은 오롯이 작품 감상만의 시간이었겠는가? 온갖 상념, 자신에 대한 성찰, 과거에 대한 슬픔과 미래에 대한 계획들로 가득 찼을 것. 그때 떠오른 생각들은 글이 되었을 터. 나는 그, 홀로 생각에 잠겼을 작가의 시간에 공감한다. 세사로부터 도망치듯 혼자 유물과 작품을 마주하던 나의 고독함과 어딘가 닮은 듯하여.

 

친절하고 인정 많은 어머니와 소박하지만 진정한 예술의 가치를 알았던 아버지 사이에서 자란 저자는 품성이 따뜻한 사람인 듯하다. 미술관에서 만나는 다양한 관람객을 손님으로 대하는 그의 태도도 그러하지만 내가 그를 따뜻한 사람이라 생각하는 이유는 사람에 대해서도 작품에 대해서도 편견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인종과 출신으로 구성된 매트의 경비원 동료들에 대해 그가 어느 나라에서 왔든 어떤 삶의 경험을 지녔든 하나의 사람으로서의 가치를 존중한다. 그림에 대해서도 중국이나 이집트 그리스와 유럽을 망라하고 진정한 아름다움을 찾아 읽는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행복해하는 사람이다. 젊은 나이에 형을 잃었지만, 그 충격으로 소위 잘나가는 직업을 버리고 스스로 박봉의 경비원이 되기를 선택했지만 신을 원망하지 않고 세상을 탓하지 않는다. 자존감을 잃지 않는다. 미술관 앞뜰에 앉아 1달러짜리 핫도그를 먹으면서 이 직업과 삶에 대해 만족해하고 자신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느낀다.

 

외지인 무리 사이에 끼어 앉아 나 혼자 유일하게 이곳에 속한 사람이라는 기분을 즐긴다. 계단에 편히 자리를 잡은 나는 재킷 단추를 열고 클립으로 부착하는 넥타이를 떼고, 공중에서 이런 나를 내려다보면 얼마나 멋진 한 폭의 그림으로 보일까 생각한다. 이 위대한 도시의 심장부에 있는 위대한 미술관의 계단에 작은 경비원 하나가 앉아 있다. 작지만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존재는 아니다. 앉은 자리는 편안하고, 근무복은 몸에 잘 맞는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도 예술이어야

월급은 어떨지 몰라도, 하루 종일 서 있어야 하는 직업이 힘들지는 몰라도 이 미술관 경비들이 부러운 지점이 있다. 직원들의 가족이 미술관 휴무일을 이용할 수 있게 한다든지 그들만의 작품 전시회를 열어준다든지, 그러니까 직원의 복지를 의 개념이 아니라 배려와 예술적 관점으로 베푸는 것. ‘메트는 경비원들이 투고하고 편집한 미술 작품, , 산문 등을 실은 <스와이프>라는 매거진을 발행했단다. 그리고 가끔 일반대중에게는 공개되지 않는 전시회를 열고 직원들이 작품을 출품할 수 있도록 했단다.

예술 작품이 거하는 곳에 예술 쫌 아는 사람들이 근무한다는 것을 회사도 인정하는 것 아닌가. 작가는 나무의 뿌리는 그 나무의 가지만큼 뻗어나간다고들 한다. 그건 미술관도 마찬가지라 말한다. 이 세상은 모두, 특히 겉으로 그럴듯해 보이는 곳일수록 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매트에도 경비원이 600명쯤 된다고 했던가.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일들을 하고 있을 것인가.

 

남은 하나의 소원은 다른 이를 위해

글의 맥락과 상관은 없지만 책 속에서 가슴에 남는 말이 하나 있었다. 소원을 비는 아이에게 한 어머니가 하나는 네 소원을 위해서, 다른 하나는 네 소원만큼 간절한 다른 누군가의 소원을 위해서빌라 했단다. 최근의 나에게도 간절한 소망이 있다. 그 소원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부끄러워지곤 한다. 내 자식 잘 되게 해달라는 기원은 얼마나 말초적이고 어리석은가. 그러나 간절한가. 그래서 자식이 무엇을 얻게 해달라는 말 대신 그들이 최선을 다하게 해주시고 노력에 합당한 결과를 누리게 해달라, 부당하게 삶에서 좌절을 맛보지 않게 도와달라고 기도한다. 내가 정말 좋은 모성애를 지니고 있다면 이 땅의 모든, 열심히 사는 아이들을 위해 기도해야겠지. 그러나 현실의 나는 초라하고 나약한 어미일 뿐이다. 그래서 나의 기도는 부끄럽기도 했다. 기복은 기복이더라도 다른 하나는 간절한 다른 누군가 소원을 위해 기도해야 하리라.

 

예술관, 세계관, 인간관, 가치관, 역사관

저자가 관람객에게 르네상스의 의미를 설명하는 대목이 있다. 누구든 가장 쉽게 설명하는 이가 가장 사랑하는 이이고,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이다. 겉모습은 경비원이되 그 안에 예술을 이해하는 지성과 교감이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예술가들은 오랫동안 그림을 사진처럼 보이도록 만드는 데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어요. ...그들은 보통 천사나 성인 같은 소재를 그렸는데 그것들을 거의 상징적 기호에 가까운 아름다운 디자인으로 잘 묘사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두초의 이 그림은 르네상스 초기에 그린 거예요. 그때는 사람 자체에 대한 관심이 폭발하던 시기였어요.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이룰 수 있는지, 그들의 삶과 꿈은 무엇으로 구성되는지. 그 이전에는 인간이란 지구에서 짧은 생을 보낸 후에 내세로 나아가는 죄 많고 타락한 생명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건 상당히 새로운 견해였어요.

그러다 보니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가들은 새로운 방식을 고안해 내야 했어요. 만물을 보는 방식을 말이죠... 그들이 발견한 만물 간에 균형을 맞추고 우연과 영원을 조화시키는 방법은 오늘날 당신과 내가 세상을 보는 방식에도 작용하고 있고 수많은 후대의 예술가들에게도 영향을 주었죠.

 

그리고 미켈란젤로에게 배우는 오늘

작가는 미켈란젤로는 자신을 예술사 최고의 거장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게 분명하다. 날마다 그날 해야 할 일을 마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데 더없이 전념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면서 시대의 거장이 얼마나 자신에 대한 번뇌하는 사람이었는지 보여준다. 그는 제가 시대를 잘못 타고 난 때문인 듯합니다. 지금은 제가 하는 예술에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은 시대예요.’라며 오늘날 우리가 하이 르네상스, 혹은 전성기 르네상스라 부르는 자신의 시대에 대해 고뇌했단다. 그리고 미켈란젤로는 사소한 실수로 성 베드로 성당의 완공이 늦어지게 된 일로 크게 자책하며 수치심과 슬픔으로 사람이 죽을 수 있다면 나는 이미 죽었을 것이다.” 라고 말했단다. 그 위대한 미켈란젤로도 하물며 그렇게 옹송거리며 살았거늘.... 나같은 평범한 사람의 고뇌와 부끄러움 따위라니.... 묘하게 위로가 되는 대목......

 

예술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야 한다

 

수수께끼 같은 미소를 짓고 있는 모나리자는 세상에 한 점밖에 없을지 모르지만 어디를 가나 바라볼 가치가 있는 얼굴들은 많이 있다.

 

많은 경우 예술은 우리가 세상이 그대로 멈춰 섰으면 하는 순간에서 비롯한다. 너무도 아름답거나, 진실되거나, 장엄하거나, 슬픈 나머지 삶을 계속하면서는 그냥 받아들일 수 없는 그런 순간 말이다. 예술가들은 그 덧없는 순간들을 기록해서 시간이 멈춘 것처럼 보이도록 한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힘들어도 살아가게 하는 힘을 주는 것이 예술, 어떤 이에게는 그 자체가 목적인 예술. 그게 없었다면 단지 이 생명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얼마나 힘겨웠을까 싶다.

이 책의 저자 패트릭 브링리는 알까. 그의 글도 내게 삶에 힘을 준 예술작품 중 하나였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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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발견 - 한국 지식인들의 문제적 담론 읽기
고명섭 지음 / 그린비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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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발견 고명섭

 

작가 고명섭에 대해 경탄의 마음을 표하고 싶다. 학자도 아니면서 방대한 독서와 집핍의 에너지를 보여주는 그, 시간을 내어 연구해 몰두해도 다다르기 쉽지 않은 통찰의 안목을 보여주는 그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게다가 잘 읽히는 문장을 쓸 수 있다는 것은 그가 읽고 쓴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고 설명한다는 것인데... 무엇보다도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사람들의 저작과 사상을 정리해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사람의 삶과의 연관성 속에서 그 업적이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를 통찰한다. 이렇게 깊이와 넓이, 5차원에 가까운 통찰, 그것을 표출하는 에너지와 기법 모두를 갖춘 저자를 정말 오랜만에 본다. 그의 책은 나를 다른 독서로 이끈다. 이렇게 한 권의 책에서 감자 캐듯 새로운 정보를 얻는 책은 보물이다. 나는 이 책을 통해 <계몽의 변증법>으로 나아간다.

 

그러고 보면 이 책은 전반적으로 <계몽의 변증법>이 제기한 문제에 대한 고민으로 보인다. 나는 아직 그 책을 읽지 않았으니(구해놓았다) 저자가 요약해 놓은 부분에 기댈 수밖에 없지만 고명섭은 이 책에 대해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그렇게 자기반성이 결여된 이성을 도구적 이성이라 일컬음. 계몽은 인간을 신화의 세계에서 구출해 냈지만 그 자신이 다시 신화가 됨이라고 요약하였다. 그렇게 신화가 된 계몽을 비판하기 위한 <계몽의 변증법>과 보폭을 맞추면서 고명섭은 <파우스트>, <니체>, 한나 아렌트와 도올을 바라본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이 책은 <계몽의 변증법> 필터링으로 읽는 현대 철학(의 일부)이라 할 수 있다. 니체나 도올은 제대로 읽어본 적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깊은 생각으로 여러 번 읽었던 파우스트에 대한 글, 그리고 내게 다른 시선을 안겨주는 똘레랑스 편이 유용했다.

 

나는 <파우스트>가 오만한 인간주의를 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방대함, 고민의 깊이를 찬탄하면서도 가리키고 있는 방향성은 무엇인 걸까 읽을 때마다 궁금해했다. 그에 대해 작가는 파우스트야말로 계몽주의 시대를 대변하는 작품이었다 말한다. 파우스트의 이성을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스스로를 계몽하지 않는 계몽이라 부르면서 그런 계몽은 필연적으로 전체주의에 이른다.’고 지적했다 한다. 파우스트 작품에 담은 주제 의식은 괴테 개인의 것이라기보다 시대의 것이었나 보다,

내가 파우스트를 읽으면 막연히 느꼈던 불편함을 이렇게 해명해주다니... 이렇게 계몽의 변증법 feat. 파우스트는 오래 묵은 나의 답답함에 대한 설명이 되었다.

 

그리고 한국 진보 진영에게 한때 중립적이고 이상적인 유토피아의 토핑같이 사랑받던 똘레랑스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은 관점을 제시한다. ‘진정한 톨레랑스는 냉정한 계산이나 적절한 선에서의 타협이 아니라 정의와 연대를 강조하는 뜨거운 이성이라면서 미국의 톨러런스는 다양성과 차이를 인정하는 톨레랑스가 아니라 타협을 말한다고. 그래, 미국 사회 특유의 너그러움이 프랑스식 톨레랑스와는 전혀 다르게 느껴졌던 이유를 알겠다. 진정한 톨레랑스는 인간의 완전함에 대한 부정이 전제조건이고 양심의 자유를 옹호하고 극단을 거부하는 태도이며

폭력을 거부하는 이성적인 토론과 설득. 비폭력의 원칙을 지킨다는 것. 하지만 이 관용의 정신도 사실 제국주의와 싸우지 않았고 서구인, 기독교인들끼리만 통하는 원리였다는 점도 지적한다. 톨레랑스가 구현되려면 토론이 중요한데, 이는 교육받은 이들끼리나 가능한 것이라 사회적 약자가 누리기 어려운 것일 수 있다는 것도.

80년대 진보주의 운동에서 많이 나오던 지식인주의의 오류와 맥이 통하는 지적이다. 오류라기보다 한계가 맞는 말이겠지만.

 

그리고 <계몽의 변증법> 뿐 아니라 부르디외 책을 산 것도 이 책을 통해 얻은 성과에 넣는다. 고명섭 기자, 땡큐. 나는 당신의 다음 저작으로 건너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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