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지식 - 책의 바다를 항해하는 187편의 지식 오디세이
고명섭 지음 / 사계절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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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책장에는 힐링 코너가 따로 있다. 다시 읽을 필요는 없지만 가끔 뒤적이는 보물들.

 

어린 시절 나에게는 다락방에 올라가 읽곤 하던 힐링 책이 있었다. 제목도 기억나지 않지만 엄청나게 두꺼운 과학만화였다. 우울감과 공황에 시달렸던 열 살 무렵의 나는 정체를 알지 못하게 공허감이 밀려올 때면 다락방에 가서 그 과학만화를 읽었다. 태풍을 귀엽게 의인화하고 천체의 질서에 대해 알려주던 그 만화는 이 넓은 세상, 지구, 우주를 작고 귀엽고 다정하게 만들어 품게 해주었다. 삶의 끝에 죽음이 있다면 도대체 왜 태어나고 살아가야 하는 걸까, 허무한 질문이 내 안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던 열 몇 살 즈음의 나를 치유해 준 것은 책들이었다.

 

<즐거운 지식>은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라 소장용힐링책이 되진 못했지만 다른 책을 읽다가 틈틈이 읽으면서 기운을 얻곤 했다. 딱딱한 인문사회과학 서평집이 무슨 위로가 되냐고? 머리 아프지 않냐고? 일단 고명섭은 아무리 어려운 철학도 어렵지 않게 쓰는 재주가 있는 필자이다. 그리고 나는 이 두꺼운 책을 순서대로 공부하듯 읽지 않고 내가 아는 철학자, 내가 읽은 책, 관심 있는 영역을 그때그때 땡기는 대로골라 읽었다.

 

이 책은 오디세우스를 바로 그런 앎에 대한 모든 것, 열망과 용기를 지닌 사람으로 본다,

세이렌 이야기는 목숨을 걷어갈 만큼 강렬한 유혹, '앎의 유혹'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나는 이것을 저자인 고명섭의 자기고백이라고 보았다. 같은 인생을 사는데 그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책을 읽고, 그것을 바탕으로 또 얼마나 많은 책을 쓰고 있는가. 어쩌면 저자는 빨려드는 독서에 공포를 느끼면서, 거기에 난파하지 않으려 책을 쓰는 일로 몸부림을 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계몽의 변증법> 저자들은 앎과 삶 사이에서 난파당할 위험을 뚫고 '자아'가 등장한다고 말한다. 오디세우스는 그렇게 주체로서 자신을 일으켜 세운 사람(이 유혹을 겪은 주인공은 고통을 통해 성숙한다. 그가 견뎌내야 했던 다양한 죽음의 위기를 통해 자신의 '삶의 통일성', '인격의 동일성'이 확고해진다-계몽의 변증법 중에서)이라고 해석했단다. 오디세우스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삶이 풍요로워지지 않는다면 앎의 욕구는 자기 자신의 존재를 갉아먹는 탐욕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란다. 어린 시절 읽고 지나친 오디세우스 이야기를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니. 스스로 지적 바다에서 호흡곤란을 느낀 사람들의 시선이리라.

 

지젝을 다룬 부분은 흥미로웠다. 붙어 있는 제목이 지젝 - 혁명을 연기하는 배우. 한겨레에 가끔 기고되는 그의 글을 읽을 때마다 내가 느꼈던 바로 그것을 정확히 지적한 느낌이다. 이 사람은 어째서 이렇게 유명한 거지? 그런데 아무리 읽고 이해하려 애써도 뭔가 알맹이를 못 느끼겠는 이 느낌은 뭐지, 싶은...

지젝에 대한 책 <지젝>을 쓴 저자(영국 정신분석학자 이안 파커)가 보기엔 지젝은 세계를 해석하기만 할 뿐 세계를 바꾼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는, 실천적 무기력 증상을 내장한 자의 자기방어일 뿐이라는데 그 해석을 보니 그동안 내가 왜 그런 느낌을 받았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그 외에도 나에게 매우 특별했던 가라타니 고진, 랑시에르의 책들, 이름은 들어보았으나 원작을 읽지 못했던 알튀세르나 칸트에 대한 엿봄, 하도 많이 언급되어 읽은 적 없음에도 다 알고 있는 듯한 플라톤, 그 대신 열심히 탐구했던 아리스토텔레스, 말 그대로 문제적 인간들, 특히 철학자들, 철학적 인간들이 책으로 대거 등장한다. 한 편의 글들이 엄청 길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겉핥기라는 느낌이 들지도 않는다. 이 책을 읽고 나서 <계몽의 변증법>을 다음 독서 목표로 삼은 것은 또 하나의 성과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는 앞으로도 계속 고명섭의 책을 읽을 것이다. 이렇게 과제를 던져주는 책은 참으로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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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죽이지 말라고 말해줘! - 스페인·라틴아메리카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후안 룰포 외 지음, 김현균 엮고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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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어 공부를 하고 있다. 그저 재미로. 아니, 힐링용으로.

목표가 없는 공부는 느리다. 그래서 좋다. 잘하려 애쓰지 않아도 되니까. 재미있기만 하면 되니까. 물론 단점도 있다. 속도가 안 난다. 2년 가까이 되지만 별로 실력이 좋아지지 않았다.

목표가 없었지만 굳이 왜 공부를 하는가 자문하며, 언젠가 스페인어로 된 동화책 정도를 읽을 수 있게 된다면 그것도 좋겠다 싶어졌다. 첫 페이지를 읽다 말곤 했지만 스페인어 <모모>, <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준 고양이> 그리고 네루다의 시집도 사 놓았다.

 

최근에 꿈과 계엄에 대한 소설을 한 편 썼다. 처음부터 계엄 이야기를 쓸 생각은 없었다. 꿈이 잦은 내가, 꿈의 미스테리를 풀고 싶어 온갖 심리학, 뇌과학 책을 섭렵하던 내가 소설 속에 내 꿈들을 담으려다 문득 라틴 문학의 마술적 사실주의가 떠올랐다. 꿈은 비현실적이지만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니 그야말로 마술적 사실주의적 글쓰기 기법에 딱 적합한 소재 아닌가. 물론 21세기 대한민국 문학계에서 라틴식 마술적 사실주의는 너무나 걸맞지 않은 사조이다. 다만 판타지 문학이 판을 치는, 특히 청소년 소설계에서라면 마술적 사실주의에서 배울 점이 있지 않을까, 생각이 미친다.

 

그렇게 집어 든 라틴문학 단편집이 바로 이 <날 죽이지 말라고 말해줘> 이다. 어쩌다 보니 청소년 소설 외에는 한국 소설을 읽지 않은 세월이 길어진 내가 시대와 공간이 먼 라틴 문학을 읽는다는 괴리감이 있다. 유명 작품 위주로 읽다 보니 아주 가까운 현대 스페인어권 문학은 어떨까 궁금하긴 하다. 그래도 아주 좋은 충격이었다. 전혀 다른 구조와 발상의 향연이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전에 읽었던 보르헤스를 다시 집어든다. 이익과 목표와는 무관한 이런 독서, 진공 상태의 독서의 세계로 나는 서서히 접어들고 있다. 이러면서 늙어가겠지. 아직은 쓸모가 있는 회화, 쓸모가 있는 독서, 생산적인 글쓰기에 대한 욕구가 아주 다 사라진 건 아니지만 또 한 편 이렇게 서서히 가라앉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니, 아닌가? 한 열네 살부터 그런 알 수 없는 시공간/혹은 상태를 꿈꾸었던 것도 같은데?

 

사회적 사실주의 문학을 구현했다고 하는 이그나시오 알데꼬아 <영 산체스> 에서는 교과서에서 배운 1920년대 리얼리즘 문학이 떠오른다. 냄새로 그 현장을 느끼게 하는 솜씨를 보라.

 

오후에는 후텁지근하고 궂은 날씨였다. 들판에서 곡식 향기가 풍겨왔다. 하수도 냄새가 났다. 기관차의 증기 냄새가 났다. 길을 어슬렁거리는 사람들은 약간의 땀 냄새를 풍겼다. 또 식료품 창고처럼 어두침침하고 희게 색칠된 옷장 어딘가에서 무미건조한 석회 냄새를 먹은 옷 냄새가 났다. 나들이옷 차림으로 도시에 올라온 농사꾼 냄새가 났다. ...

 

알레호 까르뻰띠에르의 <씨앗으로 돌아가는 여행>은 한 남자의 죽음을 역순으로 거스르는 기법이 돋보인다. 이 책 속 작품의 공통점은 독특한 기법만이 아니라 섬세한 묘사와 시적인 표현이 감성을 사로잡는다는 것.

 

새들은 깃털의 회오리바람을 일으키고 알로 돌아갔다. 물고기들은 연못 바닥에 비늘의 강설을 남기로 알로 응결되었다. 야자나무는 부채를 접듯 갈라진 잎을 접고 땅속으로 사라졌다. 줄기들은 잎사귀들을 다시 빨아들였고, 대지는 자신에게 속한 모든 것을 회수했다.

 

훌리오 꼬르따사르 <드러누운 밤>은 오토바이 사고로 병원에 누운 주인공이 꿈속에서 스페인 정복 이전 시대의 원주민이 되어 정글에서 도망가는 자신과 뒤섞이는,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결국 병상과 아스테카 제단에서 이중으로 주인공이 죽게 되는 이야기인데 이 역시 문장이 예술이다, 자연스럽게 두 세계가 섞이는데 여기가 어디라, 설명이 없이 자연스럽게 공간이 바뀐다.

 

(병실에서) 손은 물병에 닿지 않았고 그의 손가락들은 다시 캄캄해진 텅 빈 공간을 움켜쥐었다. 통로는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바위가 한없이 계속되는 가운데 돌연 붉은 섬광이 번쩍이곤 했다.... 그는 하늘을 향해 누워서 힘없이 신음소리를 냈다. 천장이 끝나가고 있었고, 어둠의 문처럼 천장이 열리며 놓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종들은 몸을 똑바로 세웠고, 높이 떠 있는 하현달이 그의 얼굴에 떨어졌다. 그는 달을 보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눈을 감았고, 다른 쪽으로 옮겨가 다시 병실을 지키는 탁 트인 하늘을 보고자 눈을 떴다. 눈을 뜰 때마다 달이 뜬 밤이었다. 적들이 돌계단을 통해 그를 올리고 있었는데, 이제 그의 머리는 아래쪽으로 늘어뜨려져 있었다.

 

라틴 아메리카의 정치적 현실을 담는 이야기도 제법 있다. 루이사 발렌수엘라 <검열관>20세기 남미의 흔하디 흔한 독재정권하에 망가지는 나약한 인간성을 담는다. 해설에서는 자신의 피조물에 의해 삼켜진 작가의 개념은 현저히 보르헤스적이다.’라고 표현했다. 보르헤스는 그들 중 거두이기는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들 중 하나이다. 모든 작가들을 그 대표에 아랫단에 놓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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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가?
지젤 사피로 지음, 원은영 옮김 / 이음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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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중반, 국문학과에 입학하고 나서야 신입생인 나는 서정주가 친일을 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뿐만 아니라 당시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을 찬양했다는 사실에 더욱 경악했다. 고등학교 시절 열심히 외우고 다녔던 천재 시인에게 그런 피 묻은 얼굴이 있다는 사실을 놓고 대학 1,2학년 생들은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시는 시대로 인정해야 한다, <화사><자화상> 같은 시들을 어떻게 버리냐는 주장과 위선자가 재주를 가졌다고 해서 그걸 예술로 인정할 수 없다는 주장이 팽배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서정주를 엄청 찬양하는 문학소녀는 아니었기에 개인적인 박탈감은 없었지만 다른 내가 좋아하는 시인들에게도 그런 이면의 역사가 있으면 어쩌나 두려워졌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그런 충격과 배신감은 살면서 꽤 여러 번 느낀다. 많은 작가와 예술가, 영화감독들에게서. 고은이 그랬고 조재현이 그랬다. 우디 앨런은 그냥 좀 웃겼지만 폴란스키는 꽤 허탈했던 것 같다. 사랑하는 예술가의 흑역사를 알게 되는 일은 사랑했던 사람을 지우는 일과 다르지 않다. 이 책은 그런 이야기를 특히 문학과 영화의 영역에서, 서구사회에서 유명한 작품을 중심으로 다룬다.

 

그런 접근은 좋았다. 필요했고. 정치적 입장보다는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주로 서양의 문학과 영화의 사회성/작가주의/참여문학적 영향력을 다룬다고 이 책을 요약해 본다. 하지만 이 책은 일반인이 교양서로 읽을 책은 아닌 듯 싶다. 중간엔 좀 생뚱맞게 어조가 달라지면서 논문처럼 읽히는 글이 실리기도 한다. 우리가 읽기엔 흔히 접해지지 않는 작품도 많이 인용되고 당연히 알 것처럼 쓰인 (너무나 자세한) 사건들이 우리와는 매우 동떨어져 있기도 하고, 그렇다.

그리고 명백히 밝혔지만 저자의 입장은 사회성을 반영해야 하나 작품이나 작가의 상황에 따라 평가를 달리한다, 는 절충적인 입장이다. 작가의 도덕성과 작품의 도덕성이 가진 관계를 부정하지 않고, 작품이 어떤 사람들이나 집단의 출신, 성별, 또는 성적 기호를 이유로 하는 혐오 선동과 물리적 또는 상징 폭력 선동을 포함하지 않는 한, 문화 생산 장의 고유한 기준에 따라 상대적이고 자율적인 방식으로 작품을 판단할 것을 요구할 것, 이라며.

범죄에 가까운 성차별적인 행태에 대해서는 좀 단호하지만 정치적 행동에 대해서는 다양한 입장을 수용한다고 할까. 세상 모든 일에는 이해와 오해의 영역이 불분명한 부분이 있으니 모든 사건은 세밀하게 들여다보지 않으면 억울할 사람들이 있을 수밖에 없다. 나라나 민족 간의 갈등도 명명백백하게 잘잘못을 나누어 살필 수 없는 어떤 경계도 있는 것이고.

 

그 유명한 바그너와 하이데거처럼 나치에 부역했다고는 하나 업적이 어마어마하다는 천재들에 대해 어떻게 접근해야 할 것인가 개인적으로 고민이 된 적이 있었다. 용납이나 수용까지는 아니어도 세간의 평에 의존하지 말고 읽어는 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과 아니, 세상에 얼마나 좋은 작가와 글과 예술 작품이 많은데 그런 자들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어?’, 사이에서 고민하던 바로 그 작가들.

이 책에도 마침 그들에 대한 언급도 있다. 바그너의 음악은 그의 열렬할 반유대주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바그너의 행적을 알고도 <니벨룽의 반지>를 듣는다. 하이데거가 그랬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알라딘 장바구니에 고명섭이 쓴 <하이데거 극장>은 넣어둔다. 그래, 예술가를 좋아하는 것과 그 작품을 감상하는 일은 다른 거니까. 비판도 읽어보고 들어보고 해야 하는 거니까. 어떤 이는 그런 자들의 작품을 보아주는 일조차 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경하게 주장할 테지만 나는, 세상사는 좀 더 복잡하고 섬세하게 들여다 봐야 한다는 입장이니까. 저자인 지젤 사피로도 삭제보다는 비판을 하자고 한다.

물론, 범죄는 아무리 뛰어난 예술로도 덮어지지 않는다는 건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말이다. 그리고 또 물론, 나는 언행 일치, 사상과 행동과 작품이 일치하는 예술가들을 몹시도 사랑한다는 것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바이다.

 

책 속에서 언급된 저작과 현실 참여 사이의 일관성을 주장한 이들은 다음과 같다. 빅토르 위고, 조르주 상드, 에밀 졸라, 앙드레 말로, 장 폴 사르트르, 시몬 드 보부아르, 베르톨트 브레히트, 엔체스베르거, 에메 세제르, 상고르, 모리슨, 옐리네크, 뒤르켐, 시몬 베유, 로이, 존 듀이, 푸코, 부르디외, 하버마스, 촘스키, 주디스 버틀러 등. 그리고 얼마 전에 읽고 참 좋았던 아니 에르노도.

아니 에르노는 <르 몽드>에 실린 논설에서 이민과 다문화를 비난하면서 프랑스 문학의 순수성을 잃었다고 주장하는 어떤 에세이를 비난하며 나는 작가로서의 내 작업을 타자와 나를 대비함으로써 정의한 인종, 민족 정체성과 연결 시키는 일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 것이며 인류의 분열을 강요하려 드는 이들과 맞서 싸울 것이다.”라고 말했단다. 그의 <세월>을 읽고 문학적으로 참 좋다고 생각했지만 그이에게는 이런 단단함이 있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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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벳의 발명 - 문자의 기원을 향한 탐구의 역사 Philos 시리즈 29
조해나 드러커 지음, 최성민 외 옮김 / arte(아르테)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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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도서관에 이 책을 신청한 나 자신을 반성하는 바이다. 알파벳 즉 모든 문자들의 기원을 사회과학적으로, 문화인류학적으로 풀어쓴 책일 줄 알았다. 유발 하라리 풍의 책을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거기 담긴 오래된 알파벳들을 그려보고싶었다. 하지만 이 책은 일단 너무 두껍고 지나치게 학술적이다. 논문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당연한 걸 테지만 우리의 알파벳 한글은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역자 주로 잠시 언급될 뿐). 내가 개인적으로 이 책을 샀어도 조금 실망했겠지만 이걸 학교 도서관에 신청하다니!

 

물론 학교 도서관에는 꼭 학생들이 읽을 수 있는 책만 들어오진 않는다. 교사 등 어른들도 학교 구성원이기 때문에 책을 신청할 권리가 있다. 그럼에도 늘, 중학생인 우리 아이들도 한 번쯤 들춰볼 수 있고,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그 표지를 봐두었다가라도, 나중에라도 읽어보고 싶어질 책들로 신청하려 애써 왔건만... 이 책은 책깨나 읽는다는 어른들도 끝까지 읽기에 너무 버겁다....

솔직히 말하면 맨 앞과 맨 뒤를 중점적으로 읽었다. 그리고 중간중간에 나오는 다양한 글자들은 베껴 그렸다’. 한글워드프로세서에서 콘트롤 + F10을 누르면 나오는 많은 문자표를 보면서 언젠가 저것들을 한 번 베껴 그려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너무나 많고 너무나 다양하고 너무나 아름다운 그 문자와 기호들! 이 책을 보고 만년필로 하나하나 그려본 알파벳들은 그때의 다짐을 되새기듯 신비했다. 의미와 소리를 알 수 없는 그 수많은 알파벳들을 그리면서, 판타지 소설 작가라면, 외계인이 등장하는 영화를 구상하는 감독이 되어 신비로운 글자를 만들어보는 상상을 한다. 잠들기 전 온갖 색이 든 대여섯 자루의 만년필을 번갈아 써가며 스케치북에 써본 이국의, 고대의 알파벳들이 준 기쁨으로 이 책의 내용을 다 못 읽은 아쉬움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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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율표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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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원소인 탄소 예찬을 처음 읽은 것은 아마도 김상욱의 글에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유시민의 <문과남자>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읽었다. 죽음은 원자로 돌아가는 길이며 심상한 일이라는 결론이 좋았던 기억이 있다. 유물론자들의 과학 예찬은 이렇게도 마음을 편하게 한다.

그 유명한 프리모 레비의 글을 60년 생애 처음으로 읽었다. 시사인에 연재한 김명희 씨의 명문에 감탄하다가, 그의 마지막 글에서 헌사를 읽었다. 사실은 프리모 레비의 <주기율표>에 기대어 자신도 원소들 이야기로 세상 이야기를 풀어보고 싶었다고. 과학과 사회학이 만나는 글을 읽으며, 인문학적 통찰이 과학에 뿌리를 두면 이렇게 멋질 수 있다를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이 덕분에 처음으로 프리모 레비를 읽는다.

 

이 책의 맨 마지막 탄소편은 통째로 글을 옮겨 적어보고 싶을 만큼 아름답다. 그러고 보니 김상욱과 유시민은 이 책을 읽었던 게 아닐까? 다시 한번 나는, 모든 생은 무의미하지 않으며, 죽음조차 끝이 아님을 탄소론에서 읽는다.

사실 모든 이는 늘 죽음을 생각하며 산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최근에 드라마 <천국보다 아름다운>을 보면서 남편과 유물론자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세계관이다라면서도 재미있게 본 모순된 행동을 했다. 이런저런 책들을 읽고 각종 종교들에 접근해 보아도 결론은 같다. 죽음은 끝이며 영적인 다른 세계는 없(을 것이). 다만, 원자로 돌아간 내 몸은 지구의 다른 존재를 위해 이로울 것이니 내 죽음은 여기서 끝인 게 아니라는, 아주 고대 그리스적이고 원초적이고 단순한, 데모크리토스스러운 유물론이 도달한다. 참으로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어쩌면 그래서, 그 모진 세월에도 잘 버텼던 프리모 레비가 명성도 얻고 평온도 얻은 이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지도 모른다. 내 삶과 죽음의 무게는, 살아있을 때 최선을 다하되, 결코 죽음이 두려울 것도 대단할 것도 없는 것. 나는 그들 중 하나(one of them)일 뿐이고 죽으나 소멸하지 않고 이 세상/이 우주 어딘가에 남는다는 것. 몸을 바꿔 달리 태어난다는 것(프리모 레비에 의하면 변화는 생명의 속성, 그러므로 죽은 후에도 나는 또다른 생명인 것이다)에 도달하여 조금은 가벼워지기를 바란다.

 

유태인 학살, 세월호, 4.3, 광주...

모든 비극은 마주 대하기 끔찍하면서도 곱씹어야 할 이유가 있다. 돌아서 달콤하고 평안한 이야기만 즐기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이유가 어쩌면 인류의 원죄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렇게 프리모 레비를 거듭 말했나 보다. 그리고 철학책을 열심히 읽고 있는 중3 제자에게 이 책을 권해 보았다. 네가 원하는 문학과 과학, 철학이 만나는 접점을 이 책에서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유를 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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