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생이 온다 - 간단함, 병맛, 솔직함으로 기업의 흥망성쇠를 좌우하는
임홍택 지음 / 웨일북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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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셀러들에는 양면성이 있다. 그것을 대하는 사람들의 감정도 양가적이다. ‘뭔가 뛰어난 점이 있으니 베스트셀러가 되었겠지’, 하는, ‘너 인정의 평가가 하나. 또 하나는 돈으로 마케팅하고 광고했나? 품질에 못 미치는 허명 덩어리’, 하는 흥칫뿡의 마음. 후자에 해당하는 책을 워낙 많이 봐온 게 사실이다. 그래도 나는 베스트셀러를 쓱 훑어보는 편이다. 역차별 받는 보석을 놓칠까봐서.

이 책도 대통령의 언급 덕인지 무척이나 많이 팔렸나 보다. 읽기 전에는 도대체 어떻게 한 세대를 함부로 분석한다는 것인가(소위 386세대로서, 세대론, 비판론에 상처를 많이 받아봤다),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읽어는 보고 싶었다. 일단 내 아들과 딸이 92년생, 97년생이다. 저자가 제대로 보긴 했는지 확인해 보고 싶기도 했다(물론 가까이서 본 자녀의 모습과 사회생활인으로서의 모습은 다를 것이며 특히 군집으로,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서의 그들 모습은 또 다를 것이지만 말이다).

일단, 저자가 굉장히 많은 자료를 모으고 정리한 공이 돋보인다. 책을 읽다가 다시 날개로 돌아가 저자 소개 글을 보았을 정도다. 이 사람 연구자인가? 하고 말이다. 의외로 학자도 아니고 이 분야 전문가도 아니었다. 게다가 비교적 객관적이면서도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라보고 있는 그 시선도 나쁘지 않다. 이 세대 때문에 세상이 끝장날 것처럼(오히려 본인들은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 세대라고 자조하는 데 비해) 한심한 눈길로 보거나 미래세대라고 무작정 찬양한다거나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90년대 생들의 특성을 언급하는데, 특히 눈에 띄는 것이 정직성이다.

솔직히 조금 놀라웠다. 교단에서 90년대 생 남자아이들을 가르쳤고 아들딸을 키웠지만 이들이 이전 세대나 이후 세대보다 더 정직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나의 동의를 구하고자 한다면 나는, 요즘 젊은이들은 대체로 개인의 이익과 자본주의적 잣대에서 부정직하고 불공평한 것을 못 참는 것 같다, 고 인정은 하겠다. 그런 측면에서 이들 중 꽤 많은 젊은이들이 소위 조국 사태에 대해 분노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왜 거악은 그냥 두면서 그보다 작은 일에만 분노하느냐고 묻는다면, 이 책에서 예로 제시한 부도덕한 기업이나 상품에 대한 조용한 그들의 거부와 연관 지어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 이것은 나쁜 현상인가?

거시적 담론에 약한 90년생들은 80년대에 민주화의 물결과 함께 청춘을 보내온 5,60대들이 볼 때 이해가 안 될 수 있다. 김수영의 시를 조금 비틀어 늬들은 왜 작은 일에만 분노하는가’, 라고 묻고 싶어질 수 있다. 그렇다면 거꾸로 기성세대들이여, 그대들은 세상을 바꾼 역사의식을 지닌 것처럼 잘난 척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의 안위, 자식의 행복을 위해 입으로는 민주화를 외치면서 사교육시장을 키우고 부동산과 주식 투자에 혈안이 되어 지내느라 대한민국의 교육의 공정성을 내팽개치고 경제적 격차를 키우지는 않았는지 돌아보라, 우리는 거대한 역사의식은 없지만 생활 속의 부당함을 하나, 하나, 작은 목소리라도 내어 고쳐나가고 싶다, 적어도 불공정, 부정의에 대해 거부라고 하련다, 라고 그들이 말하면 우리는 무어라 답할 것인가?

 

나는 침대 머리맡에 7~8종의 책을 쌓아놓고 읽는다. 이 책처럼 지하철을 타면서 빨리 보는 책이 절반, 몇 달을 묵히면서 천천히 공부하듯 읽는 책이 절반이다. 빨리 읽을 수 있다고 책의 무게가 가벼운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좋은 책은 논쟁거리를 많이 던져주는 책, 생각할 것이 많은 책, 특히 어쨌거나 나를 돌아보게 하는 책이다. 그렇다면 이 책도 그 반열에 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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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엔스 -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인간 역사의 대담하고 위대한 질문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조현욱 옮김, 이태수 감수 / 김영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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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사피엔스를 먼저 읽었는데 아무리 번역이라고 해도 원문장이 재미있지 않다면 이토록 재미있을 리 없다는 생각에 <사피엔스>를 집어들게 되었다. 역시 재미있다! 잠자리에 누워서 한 손으로 책을 움켜쥐고 읽는 책은 부담스럽지만 재미있어서 자세를 고쳐가며 읽다 보면 꼭 잠들기 전에는 그런 자세로 읽을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그렇듯 이 책을 어떻게 수업에 활용할까, 아이들에게 읽힐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한다. 중학생들이 읽기야 어렵지만 언젠가 읽어보라고 권할 것이다.

 

유발 하라리는 자신의 책에서 제러드 다이아몬드의 <, , >를 더러 인용한다. 어쩌다 보니 두 책을 번갈아 읽고 있던 내게는 재미난 경험이다. 그리고 이 두 책은 또한 사회과학과 역사서적 들 가운데에서 권위적 위치에 놓여 또 다른 책들에 자주 인용되고 있다는 것도 발견하였다.

 

입장이 없는 역사 기록이라는 게 가능할까? 역사 공부를 할 때마다 생각하는 명제다. 유발 하라리가 자유주의적 인본주의라고 불렀던 서구 자본주의를 세상의 주류 사고방식 혹은 시스템으로 보는 것에 대해(그는 그게 옳다고 말하지 않고 대세인 것처럼 언급하고 있다) 고개가 갸웃거려지긴 한다. 대안적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는 것에도 어째서 그런 건지 궁금해지기도 하고 말이다. <사피엔스>가 그런 논란에서 빗겨있는 이유는 이것이 그의 입장이라서라기보다 많은 자료들을 바탕으로 썼기 때문일 것이다.

 

제러드 다이아몬드가 이미 언급했고 유발 하라리가 강조하는 내용 중에 인류가 수렵채취를 버리고 농경사회로 접어든 것이 가장 큰 패착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기도 하다. 근질거리는 노마드의 유전자를 저 깊은 곳에서 느끼는 많은 사람들은 이 책들을 읽으며 왜 내가 이토록 지금 여기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지 궁금증을 해소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안정적 삶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사람이라면 인류가 농경문화에 갖게 된 것에 더 크게 감사할지도 모른다. 물론 이미 누천 년 고착화되어 버린 농경, 정착의 문화(대부분의 역사학자, 인류학자가 그것을 문명의 발전으로 해석해 왔던)에 대해 의문을 품어보았던 두 역사학자의 드넓은 상상력과 통찰력에는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인간에게 교육이 중요한 이유

유발 하라리는 다른 포유류에 비해 인간의 아기는 무력하여 여러 해 동안 어른들이 부양하고 지키고 가르쳐주어야 한다.’ 면서 인간을 용광로에서 막 꺼낸 유리 덩어리에 비유했다. 교육의 힘이 중요한 이유이고 인류가 다른 동물과 다른 발전을 이뤄낼 수 있었던 까닭이기도 할 것이다. 특히 저자는 사피엔스가 가진 뒷담화의 능력에 주목한다. 인류 발전의 가장 큰 원동력으로 협동하여 협의하는 능력, 신뢰를 바탕으로 사회를 구축하는 능력을 꼽은 것이다.

 

뒷담화는 악의적인 능력이지만, 많은 숫자가 모여 협동을 하려면 사실상 반드시 필요하다. 현대 사피엔스가 약 7만 년 전 획득한 능력은 이들로 하여금 몇 시간이고 계속해서 수다를 떨 수 있게 해주었다. 누가 신뢰할 만한 사람인지에 대한 믿을 만한 정보가 있으면 작은 무리는 더 큰 무리로 확대될 수 있다. 이는 사피엔스가 더욱 긴밀하고 복잡한 협력 관계를 발달시킬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허구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사피엔스가 사용하는 언어의 가장 독특한 측면이다.

성경의 창세기, 호주 원주민의 드림 타임(시공간을 초월해 과거, 현재. 미래가 하나로 존재하는 장소) 신화, 현대 국가의 민족주의 신화와 같은 공통의 신화들을 짜낼 수 있다. 그런 신화들 덕분에 사피엔스는 많은 숫자가 모여 유연하게 협력하는 유례없는 능력을 가질 수 있었다.

 

개미나 벌도 많은 숫자가 모여 함께 일하는 능력이 있지만, 이들의 일하는 방식은 경직되어 있으며 그것도 가까운 친척들하고만 함께한다. 늑대와 침팬지의 협력은 개미보다는 훨씬 더 유연하지만, 협동 상대는 친밀하게 지내는 소수의 개체들뿐이다. 사피엔스는 수없이 많은 이방인들과 매우 유연하게 협력할 수 있다. ...... 사피엔스가 세상을 지배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이 책은 읽다가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게 하는 힘이 있다. 저자는 진지한데 발상이 유쾌하다고 해야 할까. 위대한 인류 역사가 사실은 잔인한 멸종의 역사였을지 모른다는 시선, 농경? 그거 사실은 우리가 불행해진 근원일지도 모른다는 발상, 도덕적으로 부정해야 할 음모와 뒷담화의 능력이 사실은 소통의 근원일 수 있다는 것, 우리가 믿는 모든 것(신용카드를 포함해서)은 일종의 신화(허상)인데 그 허상이 우리 인류를 발전시켰을 거라는 것, 이 모두 참 그럴듯하면서도 참신한 안목 아닌가. 그중 재미있었던 것은 여성주의에 대한 부분이다. 유발 하라리는 모든 당연시되는 것에 대한 아닐 수도 있을 걸?’ 하고 말을 건다. 가령 이런 것. 생물학적으로 여자는 약하기 때문에 남성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여성이 억압받는 이유

근력을 강조하는 문제 남자가 여자보다 강하다는 진술은 평균적으로만, 특정한 종류의 힘에 대해서만 옳다. 일반적으로 여자는 굶주림, 질병 피로에 대한 저항력이 남자보다 크다.

인간의 경우 육체적 힘과 사회적 권력 사이에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20대 청년들은 가장 힘이 세지만 권력을 행사하는 것은 60대의 리더들이다. 목화농장의 흑인 노예들은 농장주보다 힘이 셌고 병사들은 힘으로 장교를 제압할 수 있지만 근육 조직이 아니라 사회성 뛰어난 사람이 정치적 지배력을 지녔다.

 

그러니까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은 이런 것이다.

 

우리가 최상위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정신적, 사회적 기량 덕분이다. 우리 내 권력 사다리도 폭력이 아니라 정신적 사회적 능력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흔한 고정관념에 따르면 여자는 남자보다 남을 조종하고 유화책을 쓰는 능력이 우월하다고 한다. 다른 사람의 시각에서 사물을 보는 능력도 뛰어나다고 한다. 이게 진실이라면 여자들은 뛰어난 정치가나 제국 건설자가 되었어야 한다. 현실은 그렇지 않지만.

 

여자들은 아기를 품고 출산 후(몸도 회복해야 하고 오랫동안 양육해야 한다. 이 기간 동안 식량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남자의 도움이 필요하다. 자신과 자녀의 생존을 보장하려면 남자가 내세운 조건은 뭐든 받아들일 수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순종적이고 집안을 잘 돌보는 여자의 여성적 유전자가 후대에 전해지게 되었다.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싸우는 데 시간을 너무 들인 여자는 자신의 강력한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남기지 못했다.

 

전쟁이 줄어든 이유

유발 하라리의 글이 좋은 이유가 무얼까 생각해 보았다. 유쾌한 문체, 잘 읽히는 문장, 참신한 발상, 쉽지만 지적 만족도가 높은 내용 등등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전망이 있다. 특히, 우리는 아직도 살벌한 세상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상대적으로 20세기 이후는 전쟁의 위험이 덜해진 시대라고 그는 말한다. 물론 이유는 좀 우습다. 자본주의 정신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그는 자본주의자(혹은 호모사피엔스에서 쓴 자유주의’)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걱정하는 대로 문제투성이 현대 자본주의, 암울한 미래 전망보다는 그래도 전보다 살기 좋아진 거다? 전쟁도 줄어든 거라고!’ 이런 발언은 그나마 사람을 안도하게 만든다.

 

진정한 평화는 단지 전쟁이 없는 것만이 아니다. 진정한 평화는 전쟁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말한다. 왜 현대에는 전쟁이 줄었을까? 1. 전쟁의 대가가 극적으로 커졌다. 2. 비용이 커진 반면 이익은 작아졌다. 오히려 평화가 수익성이 좋아졌다. 현대자본주의에서 대외 교역과 투자는 매우 중요해졌다. 그런 상황에서 평화는 훌륭한 배당이익을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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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원 (반양장) - 2020년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96
백온유 지음 / 창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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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유원 백온유 지음

 

 

이 소설의 주인공인 유원이라는 소녀는 어린 날 엄청난 아픔을 겪었다. 집에 불이 나서 자신을 구하려고 언니가 담요에 싸인 어린 유원을 아파트 창밖으로 던진 것이다. 아래서 아이를 받아준 아저씨 덕에 유원은 살아났지만 언니는 끝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런 고통을 겪었다는 데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그 사건 이후의 이야기, 살아남은 자의 부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우리는 가끔 뉴스에서 끔찍한 사건 사고를 접할 때마다 그 주변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 상상한다. 당사자들이나 주변 사람들의 미래에 대해서도 상상해 본다. 아마 작가도 그런 생각을 해봤던 게 아닐까 싶다. 그렇게 해서 살아남은 아이는 자신을 살리고 죽어간 언니와 자신을 살려낸 아저씨와 두 아이의 고통을 지켜보며 살아온 자신의 부모에 대해 어떤 감정을 품고 살아야 할까,를 말이다.

사고는 말 그대로 사고이기에 누구의 책임이 아니지만 짐은 그걸 겪은 이들 모두가 짊어져야 한다. 어찌 보면 그 사고에서 그나마 가장 혜택을 받았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는 이가 이제 막 열일곱, 자기를 살리고 죽었을 때의 언니 나이가 된 소녀 유원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원은 행복하고 감사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언니의 목숨값과 그림자에 짓눌리고, 슬픔을 감추려 애쓰는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며 살아야 했다. 그뿐인가, 자신을 살려준 아저씨에 대한 보은의 무게는 자칫 평생 갈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나 역시 소소한 인연의 끈이 나비의 폭풍처럼 인생에서 길게 닿아 있는 것들을 발견하고 소스라칠 때가 있는데 그 어린 소녀는 어마어마한 무게를 어떻게 이겨내고 살아왔을까 싶다. 그리고 문제는 앞으로도 계속, 죽을 때까지 계속 그리 살아야 할지 모른다는 것.

인생은 스스로 개척하는 거라는 말이 어렸을 때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당연한 말을 하는 것도 같고 그걸 어떻게 하라는 건가 싶기도 했고. 살아보니 스스로 인생을 개척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게 되었다. 누구도 완전히, 그리고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살 수 없다는 것, 벗어나야 할 것이 가족이든 생활이든 습관이든 자기 자신이든 나쁜 기억이든 그것을 대신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고, 그래서 혼자 그걸 해내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것, 다만 좋은 조력자를 만날 수도 있고 누군가의 조력자가 되어줄 수는 있으니 그런 역할이라도 하려 애써야 이 세상에 기여하는 자가 된다는 것.. 뭐 이런 것들을 깨닫게 된다. 그런데 유원은 그런 조력자를 만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최선의 노력으로 그 삶의 무게를 덜어보려 애쓴다.

아주 어렸을 때, 사촌형제들과 이불놀이를 하면서 짓궂은 오빠들이 겹겹이 덮어버린 이불 속에서 버둥거려본 기억이 있다. 무겁고 숨 막히고 절대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은 이불 지옥을 누군가 나타나 치워주기도 하지만 분노든 절박함이든 스스로 힘을 응축해 들고 일어나 치워 버리지 않으면 똑같은 일을 또 당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스스로 무게를 들춰본 경험을 하면 그 다음에 또 다른 시련이 닥쳐도 어떻게든 해보려는 마음이 든다. 그걸 해내는 이야기다, <유원>이라는 소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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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하면 괜찮은 남자는 없다 - 왜 평범해 보이는 남성도 여성 혐오에 빠지는가
박정훈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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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의 <말이 칼이 될 때>를 읽고 여러 선생님과 독서토론을 할 때였다. 정치적 올바름을 지향하고 늘 역사를 공부하며 학생들에게 항상 바른 인성교육을 하는 선생님이 함께 하고 있었는데 그가 대구에서 코로나가 창궐할 때 많은 사람들이 온라인에서 대구혐오발언을 하는 것에 대해 당해도 싸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대구에서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한 폄하가 많이 일어났기 때문에 인과응보라는 것이다. 나는 그 말에 약간 놀랐다. 감정적으로는 그럴 수 있지만 그게 올바른 태도는 아니기 때문이다. 대구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친일파이고 일베일 수 없다. 또한 그 집단이 모두 잘못을 했다 하더라도 너희가 혐오를 했으니 똑같이 혐오를 당해도 된다.’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비슷한 모순은 다른 이야기에서도 나왔다. 늘 학생들을 공평하게 따뜻하게 대하는 좋은 교사인 어떤 선생님이, 자신은 교회에 다니는데 동성애는 정말 나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다른 모든 차별과 혐오에 반대하지만 동성애에 대해서는 그것은 차별이니 반대합니다.’라고 말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런 스스로의 모순이 괴롭다고도 했다.

사람의 행동이 일관되려면 어떤 사고방식이 철학으로 구축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까지 많은 공부가 필요하고 스스로의 행동을 돌아볼 성찰이 필요하다. 물론 아무리 노력해도 인간의 행동은 모순된 점이 있을 수밖에 없지만 말이다.

 

남자 페미니스트의 글을 읽는 마음은 착잡했다. 남자중학생을 가르치는 여교사인 나는 10대 남학생들의 반페미니즘, 아니, 여성혐오의 강도가 어느 정도인지를 피부 깊숙이 매일매일 경험하며 산다. 진심으로 깊이 걱정스럽다. 그 날선 반응은 그냥 다수를 점하는 의견이 아니라 반공, 반독재, 반일 투쟁 뭐 이런 것처럼 거의 신념화 단계에 접어든 것처럼 보인다. 주변에서도 페미니즘 논쟁은 수다가 토론으로, 논쟁으로 싸움으로 번지는 일이 흔하다. 지하철이나 내 자녀들 주변에서 젊은 남녀 연인들이 이 주제로 다투는 걸 자주 보았고 학교에서는 자기들끼리 페미니즘 어쩌구, 궁금증에서 출발한 이야기가 욕설로 끝나는 걸 자주 본다. 남중생 중 페미니즘의 제대로 된 개념과 역사를 아는 아이들은 거의 없다. 그나마 똘똘한 아이들이 페미니즘은 원래 나쁜 뜻이 아니었지만 한국의 페미니즘은 변질됐다.’ 이렇게 말하고 대부분의 아이들은 ? 페미니즘이 여성우월주의아닌가요?“ ” 이렇게 반문하는 게 현실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리뷰를 살펴보았다. 책이나 영화 등이 흥미진진할수록 다른 사람의 의견이 궁금해지는 법이니까. 그리고 요즘 남혐여혐, 페미니즘을 다루는 글들은 영락없이 논쟁적인 댓글들이 달리니까. 심지어 다른 분야에서는 진보적일지라도 페미니즘 이슈에는 기치를 높이들고 싸우려 드는 사람들이 많다. 그게 치가 떨리게 싫다기보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주로) 여성들이 페미니즘을 말할 때, 여성인 우리에게는 이게 목숨을 건 이야기들이었다. 그래서 치열할 수밖에 없었고, 논쟁이 벌어지면 눈물이 나고 목소리가 높아지는, 감정적 고양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억울하고 속상하고 미치겠고 두렵고... 그런데 요즘은 남성들의 반페미니즘 운동이 그렇다. 그들은 목소리를 높이고 화를 내고 욕을 한다. ? 그렇게까지 페미니즘이 그들의 삶을 위협했나? 두렵고 억울하고 무서운가? 의아하다. 어이가 없다. , 물론 다른 건 있다. 그들은 감정적으로 고양되지만 억울해서 울컥하지는 않는다. (군대 얘긴 빼고)

 

나는 남자들이나 반페미니즘 운동이 한심하다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되었는지가 궁금하다는 거다. 누가 더 억울한지 경쟁이라도 하는 것 같은 이런 논쟁 다음 단계에 뭐가 와야 하는지를 생각해야 할 때인 것 같은데 그게 안 보여서 답답한 것이다. 이제는 그런 이야기를 할 때다.

 

이 책은 좋은 책이다. 좋은 책은, 문제제기를 하는 책이고 논쟁을 부르는 책이고 반발하게 하는 책이고 카프카가 말한 대로 도끼로 얼음을 내리치는 것 같은그런 책이다. 알라딘에서 별점테러를 하면서 저주의 리뷰를 퍼붓고 싶을 만큼 강렬한 책이다. 심지어 저자는 아마도 댓글이나 리뷰 테러를 받으리라는 것을 충분히 염두에 두고 이 글을 썼을 것이다. 여자들이 읽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보다 많은 남자들이 이 책을 읽고 화를 냈으면 좋겠다. 그리고 조목조목 반박했으면 좋겠다. “재수없는 페미, 꺼져!”라고 말하지 말고 이러저러 해서 당신 논리는 틀렸다, 라고 반박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페미니스트들로 하여금 생각하게 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리하여 그렇다면 어땋게 할까? 앞으로 우린 어떻게 해야 할까? 라는 질문이 이쪽에서도 저쪽에서도 나와 그 답을 생각해내려고 곰곰해질 수 있으면 좋겠다. 제발, 화는 내도 좋지만 욕은 하지 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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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사람
홍은전 지음 / 봄날의책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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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은전의 글힘은 겪음에서 나온다. ‘경험이 아니라 겪음’. 누구보다도 가까이 장애인들, 약자들과 함께 지내왔으면서도 온전히 그들과 함께 하고 있는 건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묻는 사람. 나 같은 사람은 꿈도 못 꿀 치열한 삶을 살고, 만난 이들의 말과 삶을 글로 옮기고 있으면서도 늘 반성만 하는 사람.

 

글 속의 나는 현실의 나보다 더 섬세하고 더 진지하고 더 치열하다. 처음엔 그것이 가식적으로 느껴져 괴롭고 부끄러웠지만 이제는 그것이 이 힘든 글쓰기를 계속해야 하는 이유임을 알게 되었다.

 

그는 약자들과 나눈 말들을 고통과 희열, 자긍심이 알알이 박힌 따뜻하고 보드랍고 축축한 말들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니까 그가 소위 약자들을 만날 때 연민의 힘으로 다가가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그들의 존엄을 진정으로 존엄하게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그런 존중의 마음에서 출발했으므로 그는 늘 겸손하다. 그러면서 싸움을 멈추지 않는다. 이기적으로 살기에도 바쁜 세상인데 그는 왜 늘 약자들, 상처받은 이들과 함께 하는 걸까.

 

싸우는 사람이 사라졌다는 건 세상의 차별과 고통이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라 세상이 곧 망할 거라는 징조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는 맞서 싸우는 일에서 세상의 희망을 보는 것이다. 하지만 솔직히 이 책을 읽는 일이 내게는 너무 힘겨웠다. 그의 글 때문에 책에 언급되는 박경준, 세월호 유가족, 송국현, 최옥란이 곁에 있는 사람들처럼 생생하게 느껴진다. 이 사람의 삶 앞에서 내 삶은 너무 안이하게 느껴지고 이 사람의 글 앞에서 내 글은 너무 얄팍해 보인다. 책을 절반쯤 읽었을 때 그만 읽어야지, 그만 읽어야지 중얼거리는 나를 발견한다. 그러면서 끝내 읽는 것은 이렇게 함께 읽는 것도 함께 싸우는 일 중 하나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좀 뜬금없지만 내가 테이프를 붙였던 책 속 글귀에는 이런 것도 있다.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며 살고 싶다.

 

작가처럼 아픈 죽음을 많이 바라봐야 했던 사람에게 저 화두는 피맺힌 이야기일 것이다. 내가 저 글귀를 접하는 마음의 치열함은 그에 못 미치더라도, 그래도 나 역시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며내 자리에서 만나는 학생들에게 최선을 다하고 내 미약한 글로나마 세상과 손잡고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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