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리라이팅 클래식 15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1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를 실천하는 고미숙이 '동의보감'을 종횡무진 안내한 책이다. 어렵지 않게 서술하면서도 꼼꼼하고 재미있다. 인도 고대의학이나 고대 그리스철학 등 저자가 읽은 동서양의 다른 서적에서도 인용한 내용을 자유자재로 배치해 삶의 비전과 통찰을 제시한 하나의 이야기로 읽어도 좋다. 현재 우리의 기계화된 삶과 자본의 논리와 남성중심의 시선에 갇힌 울체된 삶에 어떤 지향을 제시하는 대목들도 많다. 에콜로지(인간과 자연의 공생), 즉 몸과 우주의 사계가 은유만으로 해석되어선 안 된다는 점이 기본이다. 몸이 자연이고, 소우주다. 오장육부에 대한 장에서는 특히 구체적으로 우리 몸속의 사계를 설명한다. 오행의 원리로 설명할 때는 나의 본질을 구현해 주고 나를 제어하는 힘이 '상극의 힘'이라고 새삼 힘준다. 간혹 얼른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읽고 넘어가는 정도도 무방하지 싶다. 동의보감은 잘 알려진 것 같지만 제대로 알려지지 못하고 오해되는 부분도 많다. 고미숙의 책으로 동의보감의 위대함과 깊이를 어느 정도 느낄 수 있고 무엇보다 내 몸과 마음의 주도권을 가지는 일이 양생에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었다. 

 

 

저자는 동의보감의 경이로움을 독창적 분류법에 우선 둔다. 허준은 5편 106문의 목차로 동의보감을 구성하는데 5편은 내경, 외형, 잡병, 탕액, 침구편의 순이다.  동의보감이 놀라운 텍스트라는 저자의 다른 논거는 특유의 글쓰기 방식을 채택한 점이다. 민담, 낭송은 물론 만능 엔터테이터의 역할을 하는 의사의 치료담(처방) 그리고 재미있는 서사를 통해 시대적 상황을 드러내고 일상의 희로애락을 담아냈다는 점이다. 1,2장을 할애해 예시를 들며 그 놀라움을 보여준다.

 

 

정, 기, 신으로 이루어진 우리의 '몸은 습관의 거처'다. '이 몸들이 모여 격전하는 곳이 공동체'다. 생명활동이란 몸의 안과 밖이

마주치는 지점에서 이루어진다. 타자와의 관계맺기에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타자에는 우리가 밤에 꾸는 꿈과 똥오줌 같은 배설물도 포함된다. 즉 소통이 관건이다.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고 했던가. 꽃은 병이다. 열꽃이다. 살아있다는 증거이자 살아가라는 지엄한 명령이다. 병은 태어남과 동시에 몸과 공존하는 것이라 병과 몸의 핵심은 '관계와 배치'의 기술에 있다. 즉 내가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주도권을 갖는다는 건, 다시 그 이전의 병적 상태로 돌아가지 않을 수 있는 힘을 갖는다는 뜻이다. 병과 통증이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삶의 비전이 되어야, 번뇌가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는 에너지로 재생될 수 있다는 말이다. 내 몸, 우주(몸=소우주), 삶의 새로운 질서!

 

 

인간은 우주적 질료들의 결합이다. '정精은 생명의 기초를 이루는 물질적 토대, 기氣는 이 질료를 움직이는 에너지, 신神은 정기의 흐름에 벡터를 부여하는 컨트롤러, 고도의 정신활동이자 변화를 주관하는 무형의 작용'이다. '먼지가 되어 날아가야지 바람이 되어 당신 곁으로'라는 노랫말은 은유가 아닌 거다. 그러고 보면 김광석은 노랫말에 죽음을 암시한 게 적지 않은 것 같다. 먼지가 되어 날아가겠다고 했으니. 우리는 그 옛날 저 세상으로 간 사람들의 질료(먼지)로 이루어진, 즉 나는 '나'가 아니라는 진리를 잊고 산다. 내 안에 너 있다! 이 또한 그러고 보면 진리다. 내가 기억하고 있던 그 옛날의 '나'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언제나 나는 지금의 나다. 수많은 너가 결합된 유기체다.

 

 

우리가 계절을 타는 이유를 비롯해 존재론적인 의문과 존재에 대한 위대한 긍정에 이르기까지 저자는 은유로 말하지 않는다. 다방면의 참고인용문과 동의보감에서 얻은 근거를 들어 자신의 해석으로 쉽고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몸, 병, 우주는 은유로 해석될 대상이 아니라 우리 삶을 총괄해 움직이는 신성하고 전체적인 지도다. 인도 고대의학은 질병의 원인을 지혜의 결핍으로 보았고 고대 그리스 철학의 양생법은 자기배려, 자기수련, 자기치유로 보았다. 자기배려는 객관화 능력이다. 이 기술이 미흡할 때 칠정의 화기에 휘둘린다. 망상은 시공이 따로 노는 것을 말하는데, 겨울에 봄을 기다리고 여름에 가을을 기다리는 것도 망상이라 할 수 있다. 하룻밤에도 수없이 집을 짓고 허물지만 눈을 떴을 때 그것이 현실에서 접점을 찾지 못하면 무효다. "지금, 여기"를 누릴 수 있는 능력, 그것이 양생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장기들과 맺는 관계를 설명하는 대목도 재미있다. 대단한 망상의 집을 짓는 때는 바로 사랑에 빠졌을 때가 아닐까. 흔히 열병이라 하는데 저자는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한의학적으로 보면 사랑을 할 땐 평온해야 한다. 첫사랑을 열병이라 하고, 제비들의 사랑이 불꽃같다고 하는 건 쉬이

피었다 지기 때문이다. 평온이란 이런 허열에 휘둘리지 않는 '사랑의 환희'를 의미한다. 그게 어떻게 하는 거냐고?

발바닥으로 사랑을 하면 된다. 발바닥에 다름아닌 신장의 경맥이 흐르기 때문이다. (중략)

어디 연애만 그렇겠는가? 삶의 모든 이치가 그렇다. 발바닥이 있는 곳이 곧 내 삶의 현장이다. 

복습 삼아  시 한편을 소개해 본다. 늘 음미하고 다니면 양생과 에로스,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 p260

 

 

그러면서 저자가 소개한 시는 박노해의 시 '발바닥 사랑'이다. 박노해 시를 이렇게 음미할 수도 있구나.

아래의 시 말고도 박노해의 시 한 편이 더(건너뛴 삶) 소개 되어 있다.

 

 

사람은 자신의 발이 그리로 가면/ 머리도 가슴도 함께 따라가지 않을 수 없으니//

발바닥이 가는 대로 생각하게 되고/ 발바닥이 이어주는 대로 만나게 되고/ 그 인연에 따라 삶 또한 달라지리니//

현장에 딛고 선 나의 발바닥/ 대지와 입맞춤하는 나의 발바닥

내 두 발에 찍힌 사랑의 입맞춤/ 그 영혼이 바로 나이니//

그리하여 우리 최후의 날/ 하늘은 단 한 가지만을 요구하리니/ 어디 너의 발바닥 사랑을 좀 보자꾸나

 

(박노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느린걸음)

 

                                                                                  - '발바닥 사랑' 중에서 일부, p261

 

 

 

읽기 전 내가 목차에서 우선 눈이 갔던 장은 제8장이었다. '여성의 몸, 여성의 지혜'에서는 완경(이 책에선 폐경이라고 함) 이후의 여성 삶과 지혜를 짚는다. 완경은 축복이고 축복이전에 자연이다. 여름이 가을로 바뀌는 우주의 금화교역金火交易이다. 이 책에서 늘 강조되지만 태과는 불급만 못하다. 흔히 젊음(여름)이 짧다고 한탄할 일이 아니다. 한창 뜨거울 때 입추(양력 8월7일 경)가 시작되고 태양은 자리를 이동한다. 비로소 열기가 식으며 열매가 익기 시작한다. 완경기를 소위 여성구실을 못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건 남성의 시선에 갇힌 태도이고 성적 구애의 대상으로서만 여성성이 인증된다고 생각하는 오류다. 여성이 남성의 시선이 아닌 스스로의 힘으로 생의 주기를 넘어가는 것이 더 근본적이며 여성성의 해방이란 그런 욕망의 배치로부터 탈주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완경기 이후 여성성은 아주 다른 방식으로 훨씬 더 깊고 넓게 고양된다. 생리가 멈추면 지혜가 쌓이고 이 지혜로 공동체를 이끌어 가는 것, "여성의 지혜가 공동체 전체의 행복과 안녕으로 확장될 때, 그때 비로소 여성성은 대지의 모성으로 발현되는 것이 아닐까(p382)." 8장에서 저자는 여성의 몸과 사랑, 결혼, 출산, 양육, 가족, 나아가 자아구원으로서의 배움과 '몸에 대한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한 전투의 일환'으로서의 글쓰기를 권유한다. 전투의 제일보는 배움의 자세라고 다시 한번 강조. 모르는 게 약이다,는 방관이거나 무책임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는 것이 힘이다. 알면 두려움이 없어진다.  

 

 

에필로그에서 편작 삼형제 이야기를 한다. 병이 되기 이전에 미병 단계에서 치료한 큰형, 작은 병일 때 치료한 둘째, 그리고 큰병을 치료한 편작. 병의 스케일에 따라 명망도 높아진 편작이지만 집안에선 그를 제일 하수로 취급했다. 병이 되기 전 병을 다스리는 호모 큐라스가 되라는 조언은 소중하다. 큐라스는 케어의 라틴어. 케어의 달인? 즉 치유, 돌봄 나아가 수련의 의미가 더 적절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감정의 연원을 관찰하는 게 필요하다. "칠정의 원천과 경로에 스스스로 개입해 그 출구를 찾아 흐르게 하라"는 처방이다.  달리 '공감의 기술'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통하지 않고 막히고 흐르지 못하면 병이 되는 법. 병을 만든 것도, 아는 것도, 치유하는 것도 자신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자.

 

 

저자가 호모 큐라스 즉 '자기수련'의 방책으로 권하는 글쓰기의 태도도 유의미하다. 서두에서 동의보감의 특유의 글쓰기를 치켜세운 것도 저자가 글쓰기의 지평을 넓히는 데에 얼마나 열심인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내 언어의 한계가 곧 내 삶의 크기이자 운명의 지도라고 말하는 저자는 자신의 몸과 삶을 언어로 조직할 수 있으려면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다고 한다. 집중력이 곧 정기신의 확보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독서의 밀도부터 높여야한다고 하니 공부(배움)와 수련은 끝이 없는 즐거운 길이다. 동일한 시공간에서 규칙적으로 글을 쓰며 자신만의 수련법을 터득한 작가들이 생각난다. 저자는 걷기든, 낭송이든 뭘 택하든 이 과정에 반드시 '앎의 의지와 욕망이 함께 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것이 없으면 어떤 실천이나 수행도 매너리즘에 빠지고 만다니. "글쓰기가 가장 좋은 수련법이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p434)."

 

 

책이 나의 필요에 따라 인연으로 오는 게 새삼 신기하다. 몸에서 필요한 게 입에 당기듯 책도 그런 것 같다. 작년 10월에 초판된 이 책을 좀 더 일찍 읽었더라면 좋았겠지만 지금도 늦지 않고 충분히 적절했다. 읽는 것만으로도 몸의 독소가 어느 정도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단단하고 새콤한 홍시 한 알 아작아작 씹어먹은 기분이다. 모든 것은 흘러가게 마련. 붙잡아두면 고여서 썩는 법. 객관적으로 그렇지 않음에도 상처를 호소하고 소외감을 느끼는 현대인들의 인정욕망, 관계욕망에서 놓여나 삶과 실천의 문제만 남았다. 끄달리지 않고 지혜롭게 우리의 멋진 계절을 사는 것은 은혜이자 권리, 의무이기도 하다. 상처와 힐링이 흔한 키워드가 된 요즘 '성숙'에 대한 이런 조언은 명약이다. 아픈만큼 성숙해지고, 뭐 이런 노랫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실제로 10대가 느끼는 사춘기적 정서나 50대가 느끼는 결핍감 사이엔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다. 철들지 않는 중년들.

성숙이란 어떤 사건들을 더 큰 좌표 속에서 볼 수 있는 힘이다. 사회적으로, 전 지구적으로, 생명의 역사라는 우주적

차원으로 인과의 그물망을 넓게 칠 수 있는 힘이 곧 성숙이다. 인과의 좌표가 달라지면 사건도 달라진다.

그러면 다른 사건들과 타자들을 맞이하기 위하여 과거의 상흔들을 기꺼이 떠나보낼 수 있다. (중략)

"의식이 몸을 지배한다."     - p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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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연금, 보험, 저축을 능가하는 노후대비'책'
    from 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2012-11-01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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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집 2012-10-09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관심 있게 보았어요. 이 분은 어려운 주제도 쉽고 흥미롭게 써내는 재주가 있어요.^^

프레이야 2012-10-11 10:01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고미숙님의 다른 책들 더 읽어보려구요^^

댈러웨이 2012-10-10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제가 묵히고 있는 영역이 있는데요. 한국/중국 고전요. 고전이라고 하는 게 맞나??? 한시 이런 쪽인데 잘 모르겠어서 설명을 못하겠네요. 리뷰하신 걸 보니까 이 책 재미 있겠어요. 게다가 어렵지도 않다고 하시니까 읽으려면 활자 따라가면서 읽을 수도 있겠다 라고 리뷰 처음 읽으면서 생각했는데 뒤로 갈수록... 정리는 고사하고 읽는 것도 못할 것 같아요. ㅎㅎ

사랑이 열병이면 사랑이 아니라고요? 평온? 그럼, 딱 지금의 제 상태인데. ( ") 완경/폐경, 완경이라는 단어는 처음 들어보는데 정말 좋은 단어에요. 어감때문이라도 폐경은 그야말로 여성성의 부정 그 자체였는데, 완경이란 단어는 완전히 다른 신세계를 열어주는군요.

리뷰가 정말 좋아서 제대로 댓글을 달고 싶었는데 제 주 특기인 엄한 말로 도배만... 나잇나잇, 프레이야님!

프레이야 2012-10-11 10:06   좋아요 0 | URL
완경! 좋은 말이지요. 언어가 그래서 중요한가 봐요. 의미가 달라지니까요.^^
몸과 마음은 하나. 평온이면 더없이 좋은 상태이니 유지 잘 하시길^^
댈러웨이님, 다른 말보다 그저 부비부비:) 히히~~

댈러웨이 2012-10-11 15:14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저 지금 '부비부비' 무슨 뜻인지 몰라서 사전 열어서 찾아봤어요. 저도 부비부비~ ㅋㅋㅋ

프레이야 2012-10-12 13:47   좋아요 0 | URL
부비부비,가 사전에 나오던가요? ㅎㅎ
저도 그래서 찾아보니 '부빗부빗'으로 나오긴 하네요 ^^

페크pek0501 2012-10-10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미숙 님의 책은 두 권 읽었어요. 공부의 달인~과 호모에로스 등.
제가 구입한 건 아니고 선물로 받아 읽었지요. 일간지에 연재되는 글도 읽어서
저자를 좀 알지요.
독서로 공부하라, 는 것과 사랑하면 오히려 마음이 편한해진다 라는 내용은 제가 읽은 것과 겹치네요.
"성숙이란 어떤 사건들을 더 큰 좌표 속에서 볼 수 있는 힘이다" -이것 기억해 두고 싶네요.
한순간에 마음이 좁아지는 걸 경험해요. 시간이 지나고 나면 별 일 아닌 것을요.
님의 꼼꼼한 리뷰에 반하며 간다는...ㅋㅋ

프레이야 2012-10-11 10:08   좋아요 0 | URL
이분의 강연을 가까이서 들을 기회가 있으면 가서 듣고 싶어져요.
좋은 기운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물씬^^
더 큰 좌표 속에서 볼 수 있는 힘, 성숙이란 말의 개념정의로 마음에 쏙 드는 말이에요^^
페크님, 조용히 불교방송 틀어놓고 가을하늘 한 번 보고 앉았어요. 좋은하루!!

풀꽃선생 2012-10-10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갑습니다~
저도 이 책 사두고 '나의 운명사용설명서' 읽었는데 얼른 읽고 싶어요.
많이 배우고 갑니다..

프레이야 2012-10-11 10:10   좋아요 0 | URL
풀꽃선생님, 저도 그 책 오늘 주문하려구요^^
고미숙님의 저서 주제의 골저는 같긴 한데 그래도 읽어볼 가치가 있을 것 같아요.
탱스투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