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가메시 서사시 범우고전선 10
N.K. 샌다스 지음, 이현주 옮김 / 범우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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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메시는 박정희같은 연쇄 강간범이었다. 우룩의 다섯 번째 왕이었던 길가메시는 군인의 딸이건, 대신의 아내건 가리지 않고빼앗아 겁탈한다. 대한민국 5대, 6대, 7대, 8대, 9대 대통령이었던 박정희 역시 남편이 있건 없건, 나이가 어리건 적건(30대건, 20대건, 확인되지 않은 의혹에 따르면 10대까지), 수 백명의 여성들을 강간했다. ‘대통령이니까 여자 수 백명쯤이야 강간해도 되는 거 아냐, 나랑 내 가족만 안 당하면 되지하고 한국 국민들은 우습게 넘겼지만 우룩의 백성들은 신에게 호소했다.

 

이런 색마 새끼가 왕입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파렴치한 길가메시는 도살자 박정희와 달리 백성들로부터 사랑받는 왕이 되었을까?

 

 

블로그 이웃들에게 클리프턴 패디먼이 선별한 <평생 독서 계획> 수록 작품을 읽고 리뷰를 쓰기로 말씀드렸다. 되도록 페디먼이 정리한 순서대로 리뷰를 올릴 예정이다. 이른바 꼬꼬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고전읽기의 약자입니다.) 꼬꼬고 그 첫 작품은 <길가메시 서사시>. 


<길가메시>는 현존하는 호모 사피엔스 최초의 문학작품이다. 기원전 3000년 경, 지금으로부터 5,000년 전 작품으로 <일리아드>보다 거의 2000년 앞서 쓰여 졌다. <길가메시>에 비하면 <일리아드>는 문학이라기보다는 애들 소꿉장난이다. <일리아드>에서 아킬레우스와 그의 시종인 파트로클로스의 관계는 다분히 <길가메시>적이다. (길가메시와 그의 또 다른 자아인 엔키두를 연상시킨다.) <일리아드>는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의 순간에 별다른 감흥이 없다. 반면 엔키두의 시신 앞에서 칠일 밤낮을 울부짖는 길가메시의 비탄 앞에선 억장이 무너지고 가슴이 찢어진다.

 

왜냐하면 영화에 비유하자면 <일리아드>의 파트로클로스는 거의 단역급인 반면, 엔키두는 길가메시와 함께 투 톱’, 거의 더블 캐스팅이기 때문이다. (죽기 전 까진)

 

문장 또한 비교가 안 된다. <일리아드>누가 누굴 죽이고만 반복하기에 여념이 없다. <길가메시>의 문장을 읽다보면 지금으로부터 5천년 전 작품이라는 게 믿기지가 않는다. 셰익스피어는 분명 <길가메시>를 읽었음에 틀림없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

 

영구 불변하는 것은 없다. 영원히 남아 있을 집을 지을 수 있을까? 약속을 언제까지고 영원히 지킬 수 있을까? 형제들이 유산을 나누어 가진 후 영원히 자기 것에 만족할 수 있겠는가? 강이 홍수를 견뎌낼 수 있겠는가? 껍질을 벗고 눈부신 태양을 볼 수 있는 것은 잠자리의 요정뿐이다. ......잠든 자와 죽은 자, 그것은 얼마나 비슷한가! 그것들은 색칠한 죽음과 같다...”

 

- <길가메시 서사시>, P90

 

이건 셰익스피어가 아닌가!

 

<일리아드>엔 동물, 자연에 빗댄 천편일률적인 비유들만 넘쳐난다. 반면 <길가메시>에는 감탄할만한 문장, 비유들로 넘쳐난다. <일리아드>가 똑같은 패턴으로 참을 수 없이 지루하다면 <길가메시>는 흥미진진하다.

 

엔키두가 죽은 이후의 <길가메시><오딧세이아>를 떠올리게 한다. 다시 말해, <일리아드><오딧세이아><길가메시>가 잉태한 자식들이다. 플로베르의 말처럼 서양 문학이 <일리아드> 아니면 <오딧세이아>’라면 서양 문학의 원류는 <길가메시>.

 

 

도로 줄거리로 돌아오면,.

 

백성들의 호소에 아누신은 아루루신에게 부탁한다. 아루루신은 길가메시와 똑같은 두 번째 자아엔키두를 만든다. 엔키두는 동물들과 함께 자연에서 만족스레 살아간다. 엔키두를 두려워한 사냥꾼은 창녀를 불러와 그를 유혹하게 한다. 여자를 체험한 엔키두는 동물들에게 돌아가지만 동물들은 이제 그를 보고 도망친다. 엔키두는 창녀의 설득에 길가메시가 통치하는 대도시 우룩을 향해 길을 떠난다.

 

길가메시가 결혼식장에서 난봉을 부린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엔키두는 달려가 그와 결투를 벌인다. 길가메시와의 싸움이 끝나자 엔키두에겐 난폭한 성질이 사라진다. 이후로 길가메시와 엔키두는 둘도 없는 친구 사이가 된다.

 

엔키두가 안일함에 젖어있자 길가메시는 생명의 나라로 가기 위해 악을 무찌르자며 훔바바와 대결하기로 작정한다. 집정관이나 주변의 만류에도 결국 길가메시는 샤마시에게 기도를 드리고 엔키두와 함께 훔바바와 대결하기 위해 길을 떠난다.

 

오랜 여행 끝에, 길가메시와 엔키두는 숲의 수호자인 훔바바를 처치한다. 길가메시의 늠름한 풍채에 반한 이시타르 여신이 그에게 구혼한다. 길가메시는 그녀가 사랑한 것들의 비극을 상키시키며 구혼을 거절한다. 모욕감을 느낀 이시타르 여신은 아난 신에게 부탁하여 하늘 황소를 우룩에 보내 젊은이들의 목숨을 빼앗는다. 길가메시와 엔키두는 협력하여 하늘 황소의 목을 댕강, 딴다.

 

신들은 옥신각신 끝에 엔키두의 목숨을 거둬들이기로 결정한다. 엔키두가 병으로 죽자, 길가메시는 엔키두를 그리워하다 비탄에 빠져 울며불며 광야를 헤매고 다닌다. 죽음이 두려워진 길가메시는 머나먼 곳이라 불리는 우투나피시팀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

 

길가메시는 술 만드는 여인 시두리의 도움으로 우투나피시팀의 뱃사공인 우루샤나비를 찾아가 우트나피시팀을 만나게 해줄 것을 요청한다. 우투나피시팀을 만난 길가메시는 그에게 삶과 죽음에 대해, 또한 어떻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찾을 수 있는지 묻는다.

 

우투나피시팀은 신들이 인간에게 삶과 죽음을 주었으나 죽음의 날짜를 밝히지 않았다고 말한다. 길가메시는 다시 한번 어떻게 우투나피시팀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는지를 묻는다.

 

엔릴은 인간들의 반란을 참지 못해 인류를 심판하기로 결정했다. 에아(엔키)는 우투나피시팀에게 커다란 배를 만들어 모든 생명의 종자를 실으라고 말한다. 홍수로 전 인류가 멸망하고 오직 우투나피시팀과 그의 아내만 살아남는다.

 

엔릴은 다른 신들의 원성으로 그와 그의 아내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며 축복한다. 이야기를 들은 길가메시도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여섯 날과 일곱 밤을 잠자리 않고 견디려 한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칠일 동안 잠에 빠진다.

 

할 수없이 길가메시는 우투나피시팀에 의해 쫓겨난 사공 우르샤나비와 함께 우룩으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 우투나피시팀은 선물로 길가메시에게 신들의 비밀을 알려준다. 바다 밑에 장미처럼 가시가 있는 식물이 손을 찌르거든 그 식물을 꺽으라고 충고한다. 우투나피시팀은 그 식물에겐 젊음을 잃은 사람에게 다시 젊음을 회복시켜 주는 마법이 있다고 말한다. 길가메시는 그 식물을 손에 넣고 기뻐한다. 그러나, 그가 목욕하는 사이 뱀이 식물을 가로채 도망친다.

 

여행을 통해 아무것도 얻은 게 없이 길가메시는 우룩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과연 아무것도 얻은 게 없었을까. 삶의 덧없음을 깨달은 길가메시는 백성들에게 관대하고 태양 앞에 떳떳한 왕이 된다. 악을 정복한 그는 결국 운명의 날에 죽음을 맞고, ‘피와 살을 가진모든 백성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한다.


5,000년 전 길가메시는 영원한 생명을 찾아 길을 떠나 맨손으로 돌아왔다. 오늘날 호모사피엔스는 <길가메시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어느 과학자의 주장에 따르면 2050년 경이면 인간이 죽음을 정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죽지 않는 인간이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길가메시>2의 자아혹은 페르소나(엔키두)가 죽고 나서야 진정한 인간으로 거듭난다.

한편, 한국의 도살자는 끝내 인간이 되지 못한 채 연쇄강간범으로 죽고 만다.

 

<길가메시>의 백성들이 길가메시가 행한 선을 후대에까지 칭송한 것과 달리 한국의 피와 살과 생각을 가진’ ‘모든시민들은 도살자가 저지른 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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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강요 2016-03-14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나...
한국의 ‘피와 살’ 은 가졌으나 ‘생각’ 은 가지지 못한 불쌍한 시민들은 도살자의 악행을
잊었나 봅니다ㅠ

2016-03-15 04: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깊이에의강요 2016-03-15 0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이소님 글이 호부호형을 허하시는 바람에...^^;
도살자를 도살자라...^^;

시이소오 2016-03-15 07:50   좋아요 0 | URL
ㅋ 지조가 있으시네요. 깊이에의 강요님 댓글이 아침 댓바람부터 달리다니 오늘 좋은일이 생길듯한 예감. ^^

굿모닝입니다. 꽃 피듯 활기찬 하루 되소서^^

깊이에의강요 2016-03-15 08: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하루 되세요~~^^

2016-11-08 05: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1-08 1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6-29 10: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7-06-30 15:25   좋아요 0 | URL
혹 변희재씬가요? 만일 그렇다면 잠이나 쳐 자시길
 

넷째 밤. 우리에게는 보인다. 중세 해석자 혁명을 넘어

 

p191. 12세기 중세 해석자 혁명에 참가한 법학자, 신학자 들이 이미 자신과 자신의 시대를 근대라 불렀습니다. 나중에 말하겠지만 확실히 그들은 근대적인 법 시스템의 창시자이므로 꼭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르장드르가 만약 지금 뭔가가 끝나려 하고 있다면 그것은 중세다라고, 다소 미소 섞인, 그러나 충분히 신랄한 아이러니를 담아 말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가 아닐까요?

 

p192. 사람이 하는 일은 어디까지나 베케트가 말하는 낡은 나사의 새로운 회전이라는 것이지요. 그것은 뭔가의 계속이고, 뭔가를 계속하는 일입니다. 그걸로 충분하겠지요.

 

p193. 우리가 통상 근대라 부르는 시대의 모든 것, 근대법이나 근대 정치제도뿐만이 아니라 근대국가, 근대 철학 그리고 근대의 대학, 근대과학, 문학을 포함한 학문은 여기에 연원을 갖습니다. 여기에 혁명이 있습니다. 이를 교황 혁명 또는 중세 해석자 혁명이라 부릅니다. 무엇보다 먼저 이는 최초의 근대 법’, 당시의 호칭으로 하면 새로운 법jus novum’을 낳는 운동이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르장드르가 단순한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다고 한 부분과 그 에피소드에 머무르지 않은 혁명의 본질부분을 나눠서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여기서 지금까지 사용해온 두 가지 호칭을 억지로 각각에 할당하겠습니다. 전자를 교황혁명’, 후자를 중세해석자 혁명이라 부르기로 합니다.

 

p195. 보름스협약으로 교황이 성직자를 서임할 권리를 되찾았다는 표면적인 의의밖에 보지 않는다면, 왜 이것이 혁명인지는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사실 일반적인 고등학교 세계사 자료집에도 실려 있는, 힌트가 되는 게 하나 있습니다. 보름스협약을 승인하기 위해 250년이 넘은 세월을 거쳐 공의회가 부활했습니다. 새롭게 소집된 제 1차 라테라노 공의회란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근대 의회의 기원이었습니다.

 

p196. 11세기 말 피사의 도서관 구석에서 한 무더기의 책이 발견됩니다.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입니다. 즉 동로마제국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의 명령에 따라 법학자 트리보니아누스가 편찬한 <로마법>대전 전 50권이 발견된 것입니다. ...6세기부터 11세기 말까지 600년 가까이 완전한 망각에 묻혀 있었습니다. 사라졌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찾아내 들고 읽었습니다. 아주 긴 시간에 걸쳐 믿기 힘든 노력을 아낌없이 투입하였지요.

 

그들은 읽었습니다. 읽어버린 이상 고쳐 읽지 않으면 안 됩니다. 고쳐 읽은 이상 고쳐 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읽은 것은 굽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쓰기 시작해야만 합니다. 반복합니다. 그것이, 그것만이 혁명의 본체입니다.

 

p197. 앞에서 말한대로 여기서 새로운 법이 성립합니다. 그것은 쓰였습니다. 물론 교회법뿐만 아니라 이 혁명에 자극받아 세속법, 예컨대 군주법이나 제국법, 봉건법, 장원법, 도시법, 상법 등도 차례로 고쳐 쓰입니다. 그리고 12세기 중반 교회법학자 그라티아누스의 교회법 모순 조항의 해류집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그라티아누스 교령집>에 그 성과가 집성됩니다. 이리하여 르장드르의 말을 빌리면 혁명은 <그라티아누스 교령집>의 결정적인 승리로 끝났습니다.

 

로마법을 주입받아 고쳐 쓰인 교회법의 텍스트는 절대적으로 자기를 갱신하고, 대사되고, 체계를 이루고, 다른 법의 집성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이를 중세 해석자 혁명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이 혁명의 과실인 새로운 법을 추축으로 한 유럽 전체를 통일하는 그리스도교 공동체’, 교회가 성립합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근대국가의 원형이 되는 겁니다.

 

p202. 피에르 르장드르의 독창적인 사고의 핵심은 여기에 있습니다. 즉 그는 국가의 본질을 폭력이나 경제적 이익으로 줄여버리지 않습니다. 국가의 본질이란 재생산 =번식을 보증하는것이라고 말합니다. 아이를 낳아 기르는 물질적, 제도적, 상징적 준비를 갖추고 대비하는 것이 국가의 역할입니다.

 

일단 그런 말을 듣고 보니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당연하지 않나요. 왜냐하면 아이를 낳아 기르지 않으면 단적으로 말해 절멸할 테니까요 이런 것을 저출산 문제라 부르는 것은 문제를 하찮게 만들어 가장 중요한 문제에서 눈을 돌리게 하는 것입니다.

 

역으로 말하자면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없는 국가의 형식이야 말로 가장 먼저 없어져야 하고, 우리가 오랫동안 말해온 의미에서 문학의 혁명에 의해 전복되어야 할 것입니다.

 

p205. 말하자면 재생산하는 원리, 아이를 낳고 기르는 원리, 계보 원리를 맡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유엔은 계속해서 공중에 붕 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계정부라는 구상은 늘 벽에 부딪치게 됩니다.

 

p207 근대 국가의 원형은 이 중세 해석자 혁명에서 성립한 중세 그리스드교 공동체에 있습니다. 교황이 바로 최초의 주권자입니다.

 

<로마법 대전> 칙법휘찬에 있는 유명한 조문에는 분명히 황제의 권력은 법에서 유래하는 것이고 황제는 법의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고 쓰여 있습니다. 망각되고 있던 이 법전의 조문은 오랫동안 중세의 위대한 법학자나 신학자에게 전통으로 계승되어 교황[게 해당하는 것으로 논의되어왔습니다. 12세기부터 교황이나 왕이라도 권리상 법을 무시할 수 없고, 사실상 무시하기 힘들어진 것도 이 혁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p211. 12세기 혁명으로 가능해진 실증주의의 영향은 역사학에만 그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컨대 이때 다른 분야에서 구별되어 전문적으로 체계화되고 정련되어 강철처럼 강인해진 법학이야말로 유럽의 첫 과학이었습니다. 이는 모든 과학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p212. 중세 해석자 혁명은 혁명의 본체를 드러낸 혁명입니다. 다시 말해 법학자의 텍스트 고쳐 쓰기의 혁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척 담담하고 전혀 극적이지 않습니다. 수많은 신학자, 법학자가 밤낮으로 홀로 책장을 넘기고 사전을 찾고 판례를 조사하여 법문을 고쳐 씁니다. 정말 수수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담담하고 수수한 작업에서 엄청난 변혁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줄기차게 이어지는 작업 자체가 바로 혁명입니다. 이것이 바로 12세기 혁명의 위대함이니까요.

 

p213. 이리하여 근대법, 근대국가, 근대주권, 회사, 신탁, 계약, 조합 등 근대자본제의 원형도 이 혁명이 창출해냈습니다. 근대 의회나 선거를 비롯한 근대 정치제도도 말이지요. 어이가 없을 만큼 단순한 것조차 이 혁명의 발명품입니다.

 

p218. 혁명의 담당자는 법학자로서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을 철저하게 읽습니다. 읽고, 다시 읽고, 고쳐 쓰고, 씁니다. 하지만 그 전에 어학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식자율이 매우 낮은 세계였습니다. 사전도 제대로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라틴어도, 그리스어도 공부해야 합니다. 게다가 상대해야 하는 것은 법문입니다. 앞으로 적용될 법입니다. 한 자 한 구절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이상하게 오역하면 사람이 죽습니다. 르장드르는 이것은 문법학자의 혁명이다라고 말합니다.

 

철저하게, 문법적으로 정확하게 합니다. 절대 오역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이 시점에서 이미 미쳐버릴 것만 같은 일이라는 걸 아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인쇄술 같은 것도 없으니까 사본을 만듭니다. 손으로 베껴씁니다. 거기서 또 틀렸다가는 큰 소동이 벌어지니까 이보다 더 철저한 독서가 있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의미가 잘 통하지 않는 부분, 읽기 어려운 부분에 주석을 붙입니다. 직역하면 다소 의미가 통하지 않는 부분을 의역하거나 하여 수정합니다. 해석을 조금씩 갱신해갑니다. 현행법으로 적용하는 판례가 쌓여갑니다. 법문과 판례를 대조하여 모순이 없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 또한 철저하게, 문법적으로 정확하게 해야 합니다. 점점 두꺼워져 재판 현장에서 도움이 되지 않게 됩니다.

 

그렇다면 발췌하여 요약본을 만들어야 합니다. 법 격언이나 법문, 판례의 발췌 요약본을, 또 이상한 누락이나 날림이 있으면 큰일이니까 다시 자세히 읽으면서 한 번 정리하여 가필하고 편찬하고 제본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련의 페이지 수를 적는 것도 자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손으로 매기지 않으면 안 되고, 또 누락이 있으면 큰일이니까요.

 

이것만으로도 발광할 것 같은 이야기입니다. 읽고 쓰고 번역하여 책을 만든다는 것이 대체 얼마나 무리한 일인가에 대해 말해온 우리가 보면 말이지요.

 

그리고 또 색인을 만들어야 합니다.....그것이 바로 12세기 해석자 혁명의 혁명가들이 최초로 한 일입니다. 데이터베이스로서 법문을 검색할 수 있게 한 것이지요.

 

이 작업은 짧게 잡아도 거의 100년 가까이 이어집니다. 1세기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실증주의의 탄생, 그 이상의 것이 일어났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을 통치하는 도구가 정보뿐이게 된 것입니다.

 

르장드르는 얼핏 아주 기묘한 말을 하는 사람입니다. 텍스트문서라는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라고 말이지요.

 

보통 텍스트라고 하면 쓰인 문서를 말합니다. 문서라는 것은 보통 정보가 쓰여 있습니다. 정보를 입수하기 위한 도구, 정보를 실어 나르는 운반 도구입니다. 하지만 애초에 텍스트란 무엇일까요? 이는 라틴어의 동사 ‘texere’의 수동완료분사 ‘textus’를 어원으로 합니다. 즉 원래 직물 또는 뒤얽힌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고대부터 순서대로 문명, 이야기, 신의 말, 복음서, 본문이라는 의미는 거기에서 나왔습니다.

 

좀 더 확실히 말하자면, 르장드르에게 텍스트라는 것은, 예컨대 흑인의 춤입니다.......그렇다면 이들 액세서리, 각양각색의 복장, 문신, 악기, 음악, 멜로디, 리듬, 가사, 춤의 안무는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그들의 신화를 의미합니다. 그들은 그들의 신화를 좀 더 말하자면 을 춤추고 있는 셈입니다.


모리스 블랑쇼가 독서란 묘석과의 열광적인 춤이다라고 말했는데, 그것을 받아들였을 르장드르는 이렇게 하여 그들은 법과 춤추러 찾아오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독서란 춤이고, 사람은 법과 춤춥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몸에 두르고 있는 모든 것, 호흡법이나 발성법, 옷이나 장식품이나 소리나 리듬이나 노래, 춤의 안무는 그 자체가 법전이고 성전이며 신화이고 시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신체에 법과 신화를 걸친 그들의 행동거지, 힘껏 내밟는 일보는 무엇일까요? 자신의 심신에 새기게 한 규칙, , 문장을 소리 내고, 흔들고, 그리고 거기에 새로운 창의를 덧붙이는 것은 무엇일가요? 액세서리의 디자인을 조금씩 바꾸고, 리듬을 개량하고, 춤의 안무를 바꾸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말로 하면, 바로 읽고, 고쳐 일고, 쓰고, 고쳐 쓰는, ‘문학행위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은 그대로 그들에게 법적, 규범적, 철학적, 문학적인 사고인 것입니다. 그들은 사고하고, 그들은 읽고, 그들은 쓰고 있습니다. - 깊게, 깊게, 춤을 추면서.

 

p223. 또 한 가지. 르장드르가 들고 있는 예입니다. 전전까지 - 유대인 게토에서 이루어졌던 의례가 있었습니다. 즉 아이들을 모아 눈가리개를 하고 토라, 즉 유대교의 율법 문장에 꿀을 발라놓고 핥게 했습니다. 그런 바보 같은, 문서에 꿀을 바르고 핥는다고 문서의 내용을 알 턱이 없잖아, 라고 말하는 사람은 상당히 소견이 좁은 사람이 됩니다.....이게 효과가 없느냐 하면 굉장히 효과가 있습니다. 당연히 효과가 있지요. 효과가 있을 게 뻔합니다. 왜냐하면 먹어버린 것은 되돌릴 수 없으니까요.

 

르장드르에게는 이 모든 것이 텍스트인 것입니다. 시도 노래도 춤도 악기도 리듬도 꿀맛도. 또는 아무렇지 않은 일상의 인사라든가 행동거지라든가 표정이라든가. 이런 것이 모두 을 의미하고, ‘을 읽는 것이며, 고쳐 읽는 것이며, 고쳐 쓰는 것이며, 쓰는 것일 수 있습니다.

 

p224. 자신의 신체라는 종이에 신의 행위를 나타내는 춤으로 써도 됩니다. 자신의 혀라는 종이에 신의 말이 스며든 꿀로 써도 됩니다. 무엇에 무엇을 썼다면 그것은 규칙일까요? 이것은 방대한 비전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을 다시 문학이라 부르는 것은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무엇에 무엇을 써도 그것은 문학인 것입니다.

 

p225. 텍스트는 문서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문학은 종이에 쓴 것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지블릴이 무함마드의 심장을 꺼내 씻어도 그것은 문학입니다. 우리의 텍스트는 넓습니다. 우리의 규칙은 넓습니다. 우리의 우리의 예술은 더욱 넓고 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법은 춤추지 않으면 안 됩니다.

 

p233. 정보로서의 법’, ‘폭력’, ‘주권의 삼위일체를 객관적, 중립적, 보편적인 것으로서 전 세계에 수출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했을까요? 그렇습니다. 그것을 위한 편의야말로 세속화였던 것입니다. 이 삼위일체는 비종교적인 것이고 근대적인 것이고 과학적인 것이고, 따라서 객관적이고 중립적이고 보편적인 것이므로 만인에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말이지요. 이렇게 하여 전 세계에 수출되었습니다. 그것 자체가 식민지화라는 폭력에 의해.

 

르장드르는 세속화를 유럽의 전략 병기’, ‘개종, 정복을 위한 병기라고 말합니다. 신은 죽었다. 우리는 종교에서 이탈했다, 우리 세계는 세속화되어 근본적으로 비종교적이 되었다. - 이런 사고는 타자들의 삶을 짓밟기 위한 무기였던 것입니다.

 

p236. 한 행을 쓸 때 자신은 그것을 정말 믿는 것일까요? 한 행을 지울 때 자신은 그것이 정말로 믿을 수 없는 것일까요? 믿지 않는다면 고쳐 쓸 수 없지만, 고쳐 쓸 수 있다는 것은 믿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신과 불신의 이분법은 다 같이 완전히 사라집니다. 거기에 무한한 회색의 투쟁 공간이 출현합니다.

 

버지니아 울프가 말했습니다. “최후에는 고독한 전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것은 쓰는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혁명의 장소입니다. 혁명의 시간입니다. 이 시공은 끝나지 않습니다. 정의상, 끝날 수 없는 것입니다.

 

p238. , , 연극, 노래, 음악, 회화 등 예술의 놀랄 만한 힘을 억압하기 때문에 그것은 외부에서 회귀하여 우리를 강습합니다. 그 힘은 파시즘 또는 스탈린 주의라는 형태로 놀랄 만큼 무참한 죽음을 강요하게 되었습니다.

 

p241. 이는 푸코가 자기 통치의 문제로 논한 것과 겹칩니다. 시장 안에서 우리는 매일 자신을 훈련하고 있습니다. 생산성을 위해, 효율을 위해, 그것도 하나의 인간을 훈련한다예술 =기예인 것입니다. 푸코는 인간의 제조란 하나의 예술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행동거지, 우리의 언어, 우리의 예의범절,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일종의 훈련의 효과고, 그 잔혹한 훈련의 모든 것은 역시 예술에 속하는 뭔가입니다. 우리는 사회에 의해 안무되고있는 것입니다. .....이는 바로 니체가 <도덕의 계보학>에서 결정적으로 논하고 있는 것입니다.

 

p243. 대체로 예술이란 수태의 예술입니다. ‘잉태된 것concept’을 위한 기예입니다.

p246. 읽어버렸다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된다면,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 줄 알고 있다니요, 알고 있는 게 아닙니다. 사실은 모르고 있으니까 그렇게 살 수 없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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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을 끓이며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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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의 <칼의 노래>는 남성적 묘사의 극치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일까? 나는 김훈의 <화장>을 읽기가 불편했다. 추은주가 오상무에게 쓴 편지부분에서 계속 김훈의 얼굴이 어른거리기 때문이다. 김훈이 화장을 하고 여장을 한 모습이 연상된다.

 

남성적 서사가 주를 이루는 <칼의 노래>같은 소설을 읽을 땐 그의 문체가 장점이 될 수 있지만 <화장>같은 경우엔 오히려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김훈의 소설보단 에세이가 읽기에 마음 편하다. 어떤 이웃분이 김훈의 글은 낭독에 좋다고 말씀하셨는데 동의한다. <라면을 끓이며>도 읽다보면 어느새 읊조리게 된다. 어쩌면 그는 시조의 형식을 차용한 게 아닐까. 아니면 국악의 리듬을 차용한 것일까. 알려진 대로 김훈은 <칼의 노래>를 집필할 때 국악장단을 연상하면서 문장을 썼다고 말했었다.

진양조,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 휘모리.등등.

 

예를 들면 이런 문장을 읽다보면 저절로 소리를 내뱉고 싶어진다.

 

가을은 칼로 치듯이 왔다. 가을이 왔는데, 물가의 메뚜기들은 대가리가 굵어졌고, 굵은 대가리가 여름내 햇볕에 그을려 누렇게 변해 있었다. 메뚜기 대가리에도 가을은 칼로 치듯이 왔다. 그것들도 생로병사가 있어서 이 가을에 땅 위의 모든 메뚜기들은 죽어야 하리. 그 물가에서 온 여름을 혼자서 놀았다. 놀았다기보다는 주저앉아 있었다. 사랑은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의 이름이라고, 그 갯벌은 가르쳐주었다. 내 영세한 사랑에도 풍경이 있다면, 아마도 이 빈곤한 물가의 저녁썰물일 것이다. 사랑은 물가에 주저앉은 속수무책이다.

 

<라면을 끓이며> P224. 3부 몸.

 

원래 좋아하던 문장들을 다시 만나는 것도 반가웠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

 

잘 익은 수박은 터질 듯이 팽팽해서, 식칼을 반쯤만 밀어 넣어도 나머지는 저절로 열린다. 수박은 천지개벽하듯이 갈라진다. 수박이 두 쪽으로 벌어지는 순간, ‘!’ 소리를 지를 여유도 없이 초록은 빨강으로 바뀐다. 한 번의 칼질로 이처럼 선명하게도 세계를 전환시키는 사물은 이 세상에 오직 수박뿐이다. 초록의 껍질 속에서, 새카만 씨앗들이 별처럼 박힌 선홍색의 바다가 펼쳐지고, 이 세상에 처음 퍼져나가는 비린 향기가 마루에 가득 찬다.

 

<라면을 끓이며> P336. 4, .

 

가끔씩 아무 이유 없이 <칼의 노래> 첫 문장을 내뱉곤 한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그리곤 혼자 자지러진다.

아으, 동동다리

 

그의 글에선 여전히 전체성과 개별성이 투쟁을 벌인다.

애초에 필사를 포기한다. 반납 일을 하루 넘겼기에.

사서 필사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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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3-13 0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훈은 낭독하기에 좋은 글이다에 격하게 동의합니다..

시이소오 2016-03-13 07:59   좋아요 0 | URL
그쵸? 누군가 읊어줬으면 좋겠어요^^

mipsan 2016-03-13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의 정석같은 느낌

시이소오 2016-03-13 18:03   좋아요 0 | URL
갈고 닦은듯하죠? ^^

mipsan 2016-03-13 18: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ㅎㅎ

깊이에의강요 2016-03-13 2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듬이 있지요^^

시이소오 2016-03-13 20:38   좋아요 0 | URL
그렇죠? ^^

caesar 2016-03-14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훈은 소설보다 에세이라는 말, 저 역시 매번 해왔던 말이라 동의x3합니다!

시이소오 2016-03-14 00:12   좋아요 1 | URL
역시, 그렇죠? ^*^

징가 2016-03-14 1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필사까지 허걱 거의 만랩이십니다.
김훈 작가의 필력은 살아숨쉬는 생물같다고 생각합니다.

시이소오 2016-03-14 13:05   좋아요 0 | URL
살아 숨쉬는 생물이라는 말을 들으니 뱀장어가 떠오르네요.
왜일런지요. ㅋ ^^

비로그인 2016-03-14 1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롤리팝에서 알파벳으로 바꿨습니다.
시이소님 좋은 하루되세요.

시이소오 2016-03-14 19:51   좋아요 0 | URL
오, 대문화면도 멋지네요. 기억하겠습니다 ^^

김선중 2016-03-20 0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경륜있는 글의 면면입니다

시이소오 2016-03-20 08:36   좋아요 0 | URL
한국의 코멕 메카시라 불러도 전혀 과장이 아닐듯 합니다 ^^

마르케스 찾기 2016-10-02 0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훈님의 자전거 여행을 한 낮의 한 적한 버스 안에서 오디오북으로 들었어요ㅋㅋ
종점에서 종점으로ㅋ 한 낮 버스 안이라 사람도 없고,, 맨 뒷 줄이라 타고 내리는 사람들에 방해도 없이 시원하게,,,
올 여름 저의 휴가였어요ㅋㅋ
낭독하기 좋은 글이다는 말씀에 격하게 저도 동의합니다,,,
작년 휴가땐 KTX타고 서울가서,
대학로 연극을 일주일간 내내 보러 다녔죠.
휴가철엔 산 계곡 바다,, 온 나라가 소음에, 쓰레기에, 가는 곳마다 술판과 고기판과 수박찌꺼기라ㅠ

한 적한 시간을 소소하게 보내기에 좋은 책과 좋았던 시간들이었어요. 오디오북으로 듣기엔 김훈님의 자전거 여행만한 책은 없더라구요.
라면을 끓이며 이 책도 ˝읽고 싶어요˝가 아닌 ˝듣고˝ 싶어지네요ㅋㅋ

시이소오 2016-10-02 01:04   좋아요 0 | URL
오디오북이 있군요. 자전거 여행은 오디오북으로 읽어야겠어요 ^^
 

셋째 밤. 읽어라 어머니인 문맹의 고아여. 무함마드와 하디자의 혁명

 

p121. 그러는 사이에 서른두 살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의 일입니다. 아주 낙담하여 뜰의 무화과나무 그늘에 앉아 신음하듯 읊습니다. “언제까지입니까? 주여, 언제까지입니까? 아무리 지나도 내일인 겁니까? 왜 저의 더러움이 바로 지금 없어지지 않는 것입니까?” 그러자 그곳에 아이들이 흥얼거리는 노랫소리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 소리는 흘러왔습니다.

 

집어 들고 읽어라. 집어 들고 읽어라, 집어 들고 읽어라.” 그 소리에 이끌려, 또 친어머니가 갖고 있던 신앙에 이끌려 그는 성서에 있는, 사도 바울이 로마인에게 보낸 편지인 로마서를 읽기 시작합니다. 그는 집어 들고 읽었습니다. 역시 여기도 읽습니다. 어디까지나, 어디까지나 읽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멸망을 향해 조용히, 그러나 착실히 쇠망의 길을 걷고 있는 제국의 유일한 신앙의 거점이며 서방 교회를 인도하는 빛이며 사도 바울 이래 최대의 신학자가 되리라고는 그 자신도 생각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의 이름은 성 아우구스티누스라고 합니다.

 

p124. 들뢰즈=가타리는 그들의 저작에서 국가장치에 대한 전쟁기계라는 아주 신선한 개념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국가장치는 악이며 전쟁기계는 선이라고까지는 못하겠지만, 전쟁기계야말로 근본적이고 좋은 것이라고 산만하게 이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주 냉철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전쟁기계가 옳은 것이다, 라고 생각하지 말았으면 한다. 왜냐하면 나치라는 것은 분명히 전쟁기계였기 때문이다, 라고 말입니다.

 

물론 전쟁기계라는 개념에 포함되어 있는 투쟁력 없이는 어떤 변혁도 불가능합니다. 그런 것으로 제기된 것이니까요. 그러나 이쪽은 좋고 저쪽은 나빠라는 단순한 사고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그런 유치한 사고에 굴복한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p126. 하지만 그렇게 협애한 라캉상을 라캉 스스로 극복하게 된 계기는 이 에스파냐 신비주의입니다. 아빌라의 성녀 테레지아와 그 오른팔인 십자가의 성 요한을 필두에 두는 운동입니다.

 

20세기 최대의 시인이라고 하면 T.S 엘리엇과 폴 발레리, 라이너 마리아 릴케, 에즈라 파운드와 더불어 역시 파울 첼란이라고 생각합니다. 엘리엇이 그의 대표작 <네 개의 사중주>에서 십자가의 요한을 많이 인용했고, 파운도도 <캔토스>에서 그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폴 발레리도 성 요한의 <영적 찬가>를 완벽한 시의 한 예로 절찬하고 있습니다.

 

P127.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에 대해 배운 적이 한 번이라도 있는 걸까요? 지금 예로 든 것만 해도 이미 라캉도, 푸코도, 20세기의 위대한 시인들도 그()들을 예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들은 아무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항상 그()들은 죽임을 당하는 쪽이었으니까요.

 

P128. 읽고 쓰는 것 때문에 목숨을 걸지 않을 수 있었던 날들 그것은 역사상 실로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아시아에서 다소라도 언론의 자유가 지켜지고 있는 나라는 일본밖에 없습니다.

 

P129. 신비가라는 것은 제일 먼저 그녀에게 읽고 쓴다는 것이 처음부터 광기에 가까운 것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목숨을 택할지, 읽는 것의 광기를 택할지 하는 일이 됩니다. 죽임을 당하거나 아니면 광기를 무릅쓰고 읽거나, 읽는 내가 옳은지, 읽는 나를 압살하려는 세계가 옳은지 어쩐지 앞에서도 이와 같은 이야기를 한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그리고 그녀는 환각을 봅니다. 거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예수는 그녀에게 알립니다.

 

-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너에게 마치 펼쳐진 책처럼 될 것이다.”

 

P132. 자신이 하는 일을 종교라고 생각하는 종교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종교 법인인 것에 안심하고 인가를 받아 세제상의 우대 조치라는 은혜에 만족하며 기뻐하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슬람 이전의 시대를 자힐리야라고 합니다. 무명 시대라고 번역됩니다. 무지의 시대라는 것이지요.

 

P134. 무함마드는 야팀입니다. 고아지요. 아버지 없는 아이입니다. 어머니도 그가 여섯 살 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성전 <코란>은 분노의 책이기도 하기 때문에 고아, 빈민을 학대하는 사회에 대한 격렬한 의분의 말이 나옵니다.

 

P135. 당연히 상인 계층이므로 시리아로의 대상 무역에 종사했다고는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요. <코란>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말 가운데 하나는 나는 시장을 헤매고 다니며 먹고사는 평범한 남자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생각합니다. 말 그대로였겠지요. 그는 기적을 거부합니다.

 

P138. 대천사 지브릴이 출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천사 가브리엘입니다. 하얀 백합꽃을 손에 쥐고 마리아에게 수태고지를 한 그 천사입니다. 무함마드는 그때 그 자리에서 기뻐하거나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미쳐버리지 않았나 생각하며 도망칩니다.

 

P139. 무함마드는 하디자의 격려를 받고 용기를 되찾아 다시 동굴로 갑니다. 그러나 역시 지브릴이 있습니다. 여기서부터가 굉장히 훌륭합니다. 감동적이고 또 희극적인 장면이 시작됩니다. 전거에 따라 다릅니다만, 대체로 세 가지 설이 있습니다. 지브릴이 자루를 갖고 있어 그것을 무함마드의 머리에 씌워 목을 졸랐다는 설. 아무것도 갖지 않고 무함마드에게 덤벼들어 뒤에서 목을 죄어 꼼짝하지 못하게 했다는 설.

 

책 같은 것이 든 자루를 가지고 있어 그것으로 때렸다는 설. 이를 다섯 번 정도 합니다. “내 이야기를 듣겠느냐?” “싫습니다.” 그러면 때리고 세게 조릅니다. 그리고 다시 묻습니다. 거부합니다. 다시 뒤에서 목을 죄어 꼼짝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를 다섯 번 정도 반복합니다.

 

P140. 그러나 무함마드가 왜 이렇게까지 거부했을까요? 그 이유를 생각하면 정말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브릴은 무함마드에게 읽으라고 하니까요. 읽어라, 라고 말이지요. 그러나 무함마드는 무엇을 읽어야 좋을지 모릅니다. 도대체 뭘 읽으라는 겁니까, 하는 말대답까지 했습니다. 그러자 일단 천사가 사라졌다는 전승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계시는 내려집니다. 대천사가 전한 신의 계시, 전 이슬람 세계를 정초하는 최초의 계시는 이렇습니다.

 

읽어라. 창조주이신 주의 이름으로,

아주 작은 응혈에서 사람을 만드셨다.

읽어라. 너의 주는 더없이 고마우신 분이라,

붓을 드는 법을 가르쳐주신다.

사람에게 미지의 것을 가르쳐 주신다.

 

P142. 벨기에의 역사가 앙리 피렌은 무함마드없이는 샤를마뉴도 없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무함마드가 등장하고 이슬람이 지중해 세계를 정복합니다. 그에 대항하고 그에 대해 닫음으로써 비로소 유럽은 고대에서 벗어나 통일체로 조직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디자가 없었다면 무함마드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디자가 없었다면 유럽도 없었습니다. 즉 유럽에 의한 세계의 근대화도 없었습니다. 하디자가 없었다면 세계화도 없었다고 말할 수 있고, 게다가 그 세계화 안에서 다양한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저항하는 유일한 세력도 그녀가 선택한 남편이 창출해낸 이슬람 공동체였으니까요.

 

P143. 너희들의 아내, 누이, 딸들은 신으로부터 위탁받은 자이므로 소홀히 대하지 말라,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슬람이 왜 아직도 여성 차별적인 사회의 존립을 허용하고 있는지 저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P144. 무함마드는 문맹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문맹은 아랍어로 움미ummi’라고 합니다. 사실 이는 아랍어로 어머니인이라는 모성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어느 전승에 따르면, 지브릴은 책을 갖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코란>에는 인간일 읽을 수 없는 신의 말로 쓰인 원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원본을 이슬람에서는 책의 어머니라고 합니다. 따라서 <코란>은 책의 어머니의 사본인 셈입니다.

 

p145. 무함마드는 최후의 예언자입니다. 이제 예언자는 나타나지 않고 계시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책의 어머니는 두 번 다시 되돌릴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구히 사라져 잊히고 맙니다. 무함마드가 읽는 다는 것, 이는 책의 어머니에 대한 접근을 소진시키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읽는다는 것은 읽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책 같은 걸 읽을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책의 소실, 읽는 것의 좌절,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빛나는 책이라 불리는 <코란> (‘읽는다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놀랄만한 역설일까요? 그렇지도 않겠지요. 우리는 처음부터 말했습니다. 책은 읽을 수 없습니다. 읽을 수 있다면 미쳐버립니다. 하지만 그것만이, 그것만이 읽는다는 것입니다.

 

벤슬라마는 이를 정확히 ‘le concept du liver’라 불렀습니다. 영어로 말하면 ‘the concept of the book’입니다. 책의 개념이라고 번역한다고 해도 의미는 알 수 없습니다. 당연히 이는 책을 잉태하는 것이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책의 어머니가 잉태하게 하는, 어머니인 고아의 읽는다는 것’. 그것이 <코란>이고 이슬람 공동체의 근원입니다.

 

p146. 그가 추구하는 궁극의 대상, 그것은 책의 어머니입니다. ‘책의 어머니에 도달하는 것을 추구합니다. ‘책의 어머니는 신이 아닙니다. 그는 신도, 신인 것도 추구하지 않습니다. 책을, 바로 책을 추구합니다. 읽을 수 없는 그가 읽을 수 없는 책을. 어머니인 그가 어머니인 책을.

 

p147. 읽을 수 없는 것이 읽을 수 있는 것으로 전화하고, 읽을 수 있는 것이 갑자기 읽을 수 없는 것으로 흐려지는 이 절대적인 순간. 이 자체가 천사천사적인 것입니다. 읽을 수 없을 터인 것을 읽는 것, ‘읽는다는 기회를 주는 것, 이것이야말로 천사적인 일입니다.

 

p148. 대천사 지브릴은 무함마드의 목구멍을 찢고 심장을 꺼내 씻었습니다. 그것을 무함마드의 신체에 돌려놓았을 때 그의 마음은 신앙과 지혜로 가득 찼습니다. 마음이 정화된 무함마드는 천마를 타고 한달음에 천리를 날아갔습니다. 목구멍을 찢고 심장을 꺼내 씻었다, 그러자 천리를 갔다- 읽는다는 것은 이 정도의 일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반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몇 번이라도.

 

p149. <하디스>라는 무함마드의 언행록이 있습니다. 거기에 그 자신이 말하는 훌륭한 문구가 있습니다. 이르길, 신이 최초로 창조한 것은 무엇인가? 붓입니다. 갈대를 꺽어 만든 붓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쓰는 판 점토판일까요?-을 창조하고, 신은 이렇게 말합니다.

 

써라.”

 

p150. 완벽합니다. 이 문맹인 고아에게 내린 읽어라’, ‘붓을 들어라라는 명령이 그 위대한 이슬람의 서예 문화를 만들어냈습니다.

 

p151. 카바 신전에서 시를 낭송하는 대회가 열렸습니다. 이 대회를 무파카라라고 합니다. 운을 맞춘 시를 읊는 대회로 토너먼트 방식으로 우승자를 가립니다. 무함마드는 웬일인지 이를 자주 보러 간 모양입니다. 래퍼들의 배틀 같은 것입니다. 우승한 시는 무알라카트라고 합니다. 이는 걸어놓은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천에 금빛 글자로 쓰인 그 시를, 우승자를 칭송하기 위해 1년간 카바 신전에 걸어두는 것입니다.

 

무함마드는 시를 무척 좋아하여 <코란>에도 시의 언어는 황금보다 훌륭하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나중에 그는 아이샤라는 아내를 맞이합니다. 아이샤는 그 미모가 칭송받을 정도로 뛰어나고 무엇보다 재원이었습니다. 모든 아랍 시를 암기하고 있어 무함마드가 그것 좀 해주게하면 아름다운 목소리로 술술 읊었고, 자신도 시를 쓰고 연설가지 했던 여성이었습니다.

 

p152. 몇 번이나 반복합니다. 문학이야말로 혁명의 힘이고, 혁명은 문학으로부터만 일어납니다. 읽고 쓰고 노래하는 것. 혁명은 거기에서만 일어납니다.

 

p153. 그래도 거기에는 한순간이라도 빛이 있었고, 가능성이 있었고, 혁명이 있었습니다. 구원받은 목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최초의 말은 역시 읽어라였습니다. “붓을 드는 법을 가르쳐주신다.”그리고 꽃을 피운 것이 확실히 있었습니다. 그것은 거기에 있었습니다. 지금도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슬람의 가르침에서는 세계의 종말이 올 때 확실한 징조가 있다고 합니다. 그게 무엇인지 아시나요? <코란>의 텍스트가 분실되고 그것이 잊히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교도인 처지에 건방진 말이지만 그런 일은 없습니다. 있을 수 없습니다.

 

p158. ‘폭력의 선행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국가나 사회를 정초하기 위해서는 우선 법을 모르는 강대한 힘을 가진 아버지가 필요합니다. 그러한 정초자의 근원적인 폭력이 우선 존재하지 않았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이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에게 다시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비로소 법이, 그리고 법에 의한 평화가 성립합니다. 즉 법의 텍스트가 성립하고, 그에 준거하는 사회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p161. 그러므로 이슬람은 근본적으로 정신분석적, 민족학적 사고의 틀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국가나 공동체나 법의 기원에서 폭력을 찾는 사고와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알다시피 에드워드 사이드는 중동 문화를 미적으로만 뛰어난 것으로 칭송하는 대신 지적으로는 열등한 것으로 차별하는 태도를 오리엔탈리즘이라 부르며 비판했습니다.

 

p162. 폭력이 반드시 선행하고 폭력이야말로 국가나 법의 기원이고 근원이라는 사고는 완전히 시야 협착에 빠져 있습니다. 그 반대입니다.

 

p165. 불교는 광대한 교양을 포함하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원시불전에 의거하는 한 이런 말은 할 수 있습니다. 부처조차 최종적인 해탈, 즉 열반(니르바나)에 달한 것은 죽을 때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에 최종적인 해탈 같은 건 있을 수 없습니다.

 

또 티베트 불교의 게룩파에서 최종 해탈자를 자처하지 마라는 규칙은 4대 계율 중 하나입니다. 즉 죽이지 마라, 도둑질하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에 버금가는 계율인 것이지요.

 

p166. 마르코의 복음서 1332~34절입니다. 예수의 종말의 그날과 그 시간의 도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나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 그때가 언제 올는지 모르니 조심해서 항상 깨어 있어라.

그것은 마치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이 종들에게 자기 권한을 주며 각각 일을 맡기고, 특히 문지기에게는 깨어 있으라고 분부하는 것과 같다.

 

p168. 루터 또는 무함마드에게 읽다라는 것은 무엇을 전제로 한 것이었을까요? 세계와 자신과 책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생생한 이물로서 타자성으로 분리되고 구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을 읽는 자신이 미쳤는가, 아니면 세상이 미쳤는가 하는 물음이 가능해집니다. 이렇게 당연한 일이 원리주의자들에게는 알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런 원리주의적 사고의 함정은 얼마든지 널려 있습니다. 지금도.

 

p172. 죽음에 대한 선동, 죽음의 공포라는 선동을 받고 오히려 죽음으로, 그리고 자신의 죽음과 세계의 멸망이 일치하는 절대적 순간의 향락으로. 이는 사실 나치적인 담론입니다. 소설가 토마스 만은 일찌감치 자료도 다 나오지 않을 때부터 명민하게 지적했습니다. 나치의 본질은 전쟁을 위한 전쟁이고 자신의 죽음과 멸망을 위한 전쟁이라고 말이지요.

 

나치가 목표로 했던 것, 그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했던 것도 사실 잘 모르지 않나요? 그건 자살입니다. 게다가 자신과 셰계를 일격에 동시에 죽이는 것. 종말의 절대적 향락의 순간이 도래하는 것을 불러오는 것이빈다.

 

미셀 푸코도 강의에서 극명하게 지적하고 있고, 피에르 르장드르도 분명히 독일 국가의 절대적 자살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실제로 히틀러는 총통명령 전문 71호에서 이 세상의 다른 모든 민족을 멸망시키라는 명령을 내리는 동시에 독일인의 생존 조건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역시 자신의 죽음의 순간과 모든 타자, 모든 세계의 죽음의 순간과 일치시키는 것을 절대적 향락으로 꿈꾸었던 것입니다.

 

p174. 왜냐하면 현대사상은 그 후 압도적으로 병든 방향으로 향하고 말았으니까요. 누구나 역사의 종말이니 우리는 잠재적으로 아우슈비츠에 있는 것이다느니 인간의 역사는 끝났고 이미 종말이 찾아왔으며 이제 우리는 인간이 아니다느니 하는 쓸데없는 잡담을 늘어놓을 뿐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현실에 대한, ‘현재에 대한 굴종을 선전하며 돌아다니려고 합니다.

 

175. 어떻게든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에 역사의 종말이 오지 않으면 곤란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지요. 조르조 아감벤이나 코제브처럼요. 시시합니다.

 

p176. 아감벤이 어떤 저작에서 굉장히 어리석은 말을 합니다. 일렉산드리아가 어딘가에서 세계의 끝, 종말을 그린 그림이 나옵니다. 즉 천국이 도래한 그림이지요. 거기에는 동물의 얼굴을 한 사람들이 식사를 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아감벤은 흥분하여 역시 세계의 종말, 역사의 종언은 동물의 세계다, 동물화인 것이다, 하며 기고만장한 어조로 주장합니다. 실소를 금할 수 없습니다. 왜일까요?

 

물론 일신교에서 세계의 종말을 천국의 도래기도 합니다. 하지만 천국은 원래 그리스어로 파라데이소스paradeisos’라고 하는데, 더 거슬러 올라가면 고대 페르시아어인 파이리다에자가 어원입니다. 그런데 파이리다에자란 무슨 뜻일까요? 원래 여기에는 천국이라는 의미가 없었습니다. ‘둘러싸다는 의미고, 나아가서는 왕의 즐거움을 위한 광활한 동물원이나 식물원을 의미했습니다.

 

이 말은 헤브라이 문화로 전해져 인간의 종말에 약속되는 구제의 장소인 천국으로 전화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사자와 양이 함께 어울리며 평화롭게 사는 곳이다라고 정의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계의 종말에 오는 천국도 원래는 동물원이라는 의미입니다.

 

p177. 아감벤처럼 남이 하는 대로 덩달아 끝이다, 종말이다, 동물이다, 하고 떠드는 사람은 전 세계에 우글우글합니다. 그러데 조금은 자신이 얼마나 저열하고 무참하며 조악한 사고의 형태에 알랑거리고 있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p179. 제임스 조이스의 <피네간의 경야>, 이 책의 제목은 무슨 뜻일까요? 물론 아일랜드의 속요 <피네간의 경야>에서 온 것입니다. 아일랜드의 신화적 영웅 핀이 돌아온다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우선 피네간의 ‘Wake’, 경야’, ‘깨어남그리고 삶의 영위인 항적을 표현한 것입니다.

 

또한 피네간에 함의되어 있는 ‘Finn-Again’, 다시라는 의미기도 하기 때문에, 또 끝이 왔지만 다시 깨어난다는 것입니다. 또다시 찾아온 종말, 하지만 끝날 것 같아도 끝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p180. 제임스 조이스의 제자인 사무엘 베케트도 <>이라는 소설, 그리고 <승부의 끝>이라는 희곡을 썼습니다. 그러나 <>은 잡지에 게재될 때 계속이라는 제목이었습니다. 역시 끝날 것 같지만 전혀 끝나지 않는, 길게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소설을 썼습니다.

 

괜찮겠지. 이건 말이야, 결코 끝나지 않아. 난 말이야 절대 나가지 않는다.”라고 중얼거리는 클로브가 주인공 함의 얼굴에 손수건을 덮어주는 데서 끝납니다. 함은 죽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베케트 자신이 베를린에서 이 작품을 연출했을 때 분명히 말했습니다. 이 손수건은 죽기 위해서가 아니라 침묵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라고. 그리고 또 손수건은 막을 의미하는가라는 질문에 무뚝뚝하게 그렇고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p181. 20세기 최대 걸작은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우선 저녁이라는 지문이 쓰여 있습니다. ‘저녁이 찾아온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에스트라공이 어쩔 도리가 없다.”고 말합니다. 직접적으로 이는 단지 구두를 벗을 수 없다는 것인데, 사실은 이중 의미로, 이제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 어쩔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제 끝났다, 라고 말이지요. 거기에 어슬렁어슬렁 블라디미르가 등장하고, 에스트라공의 첫 대사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이렇게 말합니다.

 

나도 그렇게 믿을 뻔했어. 하지만 난 오랫동안 그런 생각에 거슬러왔어. 자신에게 이렇게 훈계하면서 블라디미르, 잘 생각해봐. 넌 아직 모든 걸 시도해본 건 아냐, 라고 말이야. 그리고 다시 싸우기 시작했어.

 

p182. 그러자 포조가 돌연 격노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이젠 지긋지긋해, 그만둬. 시간 이야기를 이러쿵저러쿵 얘기 하는 건, 바보 같아! 언제야! 언제야! 어느 날이면 안 되는 거야? 다른 날들과 마찬가지인 어느 날, 놈은 벙어리가 되었어. 어느날 나는 맹인이 되었어. 어느 날 우리는 귀머거리가 될지도 모르지. 어느 날 태어났어. 어느 날 죽겠지. 같은 어느 날, 같은 어느 시간에. 그것으로 충분하잖아. 여자들은 묘석 위에 걸터앉아 출산을 하지. 그 순간 해가 빛나는 거야. 그리고 또 새로운 밤이 찾아오지. 앞으로!

 

p183. 이런 베케트주의자로서의 푸코라는 시점 없이 어떻게 푸코에 대해 논할 수 있는지 저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현대문학은 자신이 살고 있는 동안 뭔가 결정적인 몰락이나 종언이 일어나주지 않으면 곤란하다는 유치한 사고에 대한 투쟁으로 조직되어 왔습니다.

 

이 희곡은 지금도 부조리나 난해라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체 이 희곡은 뭘 의미하고 있는 겁니까? 하는 젊은 배우의 소박한 질문에 베케트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아십니까? 웃으면서 베케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공생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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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6. 그리고 다음 원숭이의 말을 머리에 채워 넣기 위해 서둘러 다른 강의실로 떠난다. 이런 공부의 과정은 삶의 무능력자들만 체계적으로 양산하고 있다. 똑똑하되 멍청하며, 언변은 좋되 무능하다. 시험 문제는 잘 풀되 삶의 문제를 대처하는 능력은 형편없으며, 남을 품평하는 데는 날카로운 날을 세우되 자신을 성찰하는 데는 무디기 짝이 없다.

 

하나를 배워 다른 하나에 적용할 줄 아는 게 아니라 다른 하나가 내가 배운 하나와 다르면 멘붕하고 열폭한다. 그건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배울수록 무능력해지고, 배울수록 화만 내는 처지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P8. 내가 아는 공부는 반대였다. 어떤 지식 권력의 정당성과 주도권을 확인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도전하는 것이 공부였다. 삶은 언제나 지식보다 풍부한 것이고, 언어에 도전하는 것이었다......삶이 공부의 식민지가 아니라 공부가 삶의 도구였다.

 

P9. 공부의 기쁨은 보편성의 발견이다. 내가 처한 현실이나 난처함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 이 시대 대다수의 사람들이 모두 겪는 일이라는 걸 깨달아가는 과정이 공부의 과정이다. 동시대성을 발견하는 것이 공부의 목적이라는 말이다. 시대의 암흑이라는 동시대성을 발견하고 그 문제를 공동의 노력으로 해결해가려고 하는 과정에서 동시대인이 형성된다. 이 동시대인을 형성해가는 것, 그것이 공부가 무능력한 개체들이 아니라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를 형성해가는 과정이며 우리가 공부를 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P19. 미국식 표현으로 잔디깍기 맘이라는 말이 있어요. 부모가 먼저 잔디까기 기계로 풀을 깍아줘서 아이가 갈 길을 먼저 열어준다는 뜻이에요.

 

지금의 486 부모들은 공부를 잘하면 잘살 수 있다는 생각이 자기 몸으로 체득된 세대예요. 그러니까 부모들이 자신이 성공했던 방법을 아이들에게 강요하는 거죠. 그런데 사실 거시적으로 보면 운이 좋은 세대였던 겁니다. 80년대 초반엔 졸업 정원제가 있어서 그전에 비해 어렵지 않게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어요. 그리고 이들이 취업할 무렵인 87,88년도는 우리나라가 한창 경기가 좋을 때라 대기업 취업이 상대적으로 쉬웠습니다. 좋은 일자리 수에 비해 대졸자가 모자랄 정도였죠.

 

주거도 마찬가지입니다.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 신도시가 만들어질 때 손쉽게 집을 살 수 있었어요. 이른바 굉장히 좋은 라인업을 탄 것입니다. ...일종의 프리라이딩, 운이 좋은 세대죠. .....그런데도 본인들이 잘해서 성공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자기가 했던 방식을 그대로 복제해서 자기 아이들도 그러기를 바랍니다.

 

P43. 그런데 요즘 이십대 친구들을 보면 대인관계에서 아주 기본적인 부분들조차 안 돼 있는 친구들을 왕왕 봐요. 머리는 똑똑한데. 그걸 <아프지 않다는 거짓말>이란 책을 쓴 가이 윈치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 관계의 근육이 쇠퇴한 것이라고 비유할 수 있어요.

 

P48. 심리 발달을 어떤 식으로 규정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 중 하나의 틀이 자아 중심성egocentrism’에서 자아의 탈중심성egodecentrism’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얘기해요.

 

p56. 아즈마 히로키라는 일본 문화비평가의 표현 중에 게임화된 현실이라는 말이 있어요. 그 말을 응용하면 모든 일을 정말 게임처럼 생각하면서 내가 시뮬레이션한 대로 통제가 되고 일이 굴러갈 거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시뮬레이션한 데에서 내가 이렇게 열심히 하니 아이템이 주어지듯 뭔가가 주어질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경향을 말합니다.

 

61. 자아 중심성이 굉장히 강하니까 자의식은 무척 높은데, 자기 의견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은 없고, 그러다보니까 한편으로는 굉장히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면서 어떤 결정을 할 때는 남 얘기에 쉽게 넘어가는 거죠. 자기 의견이 없게 돼요.

 

 

p63. 세상에 적응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보는데, 하나는 나를 구겨 넣는 방법, 맞추는 방법이 있고, 또 하나는 환경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바꾸는 방법이에요. 이 두 개를 적절히 조화롭게 사용하면서 우리는 적응을 해나가는 거겠죠. 그런데 일부 친구들의 자아 중심성의 세계에서는 나를 구겨 넣을 생각이 없어요. 그리고 환경을 바꾸고 싶지도 않아요. 환경이 알아서 바뀌어줬으면 좋겠는 거죠.

 

p64. 미디어가 점점 더 대다수의 시민들을 관전평, 품평을 하는 사람들로 만들고 있어요. 댓글을 달고, 시민들을 관전평, 품평을 하는 사람들로 만들고 있어요. 댓글을 달고, ARS를 돌리고, 시청자 게시판에 글을 올리고 하는 등등이 마치 의견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저 품평을 하는 것에 지나지 않거든요. 의견을 말하는 것이 참여자의 입장이라면 품평은 구경꾼의 언어예요.

 

p68. 엄기호. 공부를 하는doing’게 아니라 구경하는 거예요. 교재에 형광펜이 다 칠혀져 있다니, 세상에 그런 공부가 어디 있어요? .....그러니까 계속 구경하는 형태예요, 존 듀이가 말한 대로라면 언더고잉undergoing;’, 즉 겪는 게 있어야 하는데 그게 사라져버리는 거죠. 공부 중독이라고 하는데 중독될 실재는 없어요.

 

p76. 특히 정신과가 각광받으면서 최근 7,8년 동안 똑똑한 친구들이 정신과에 많이 지원했어요. 그런데 이 친구들이 정신과 의사가 어울릴까 하는 의문이 들 때가 있어요. 정말 똑똑하고, 공손하고, 예쁘고, 잘생기고, 영어도 제2외국어도 너무 잘 하고.....그런데 정신과 의사가 가져야 할 파이팅이 없어요. 아울러 자기가 살아온 세계가 너무 좁으니까 연민이나 사람에 대한 이해의 폭도 좁고, 마치 요즘 교사들이 공부 못하는 애들을 이해 못하는 것과 비슷해요. “왜 학교를 안 가니?” 이런 식, “이 정도면 가난한 건가?” 이런 식....머릿속에 상식이 만들어져 있어요.

 

p79. 엄기호. 그들에게는 세상이 안 공정한 거예요. 나는 죽을 둥 살 둥 공부해서 서울대 왔는데, 그리고 또 죽을 둥 살 둥 공부해서 정규직이 됐는데 비정규직으로 온 사람들이 갑자기 데모하면서 정규직화 해 달라 그러면 너는 지금까지 뭘 하고 살아왔는데 그런 요구를 하느냐, 생각하죠. 우리는 차별이 정의롭지 않다고 생각하잖아요. 이들 경험 세계에서는 차별을 정의롭지 않다고 보는 게 공정하지 않은 거예요. 이 이야기는 오찬호 씨가 쓴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에 잘 나와 있죠.

 

p81. 하지현. 바칼로레아와 논술시험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칼로레아는 어떻게 보면 답이 없어요. 구술하는 논리 전개를 보는 거잖아요? 철학적 담론이나 재미있는 주제를 던제주죠. 그런데 우리나라 수리 논술시험은 독특해요. 수학 문제, 통계, 확률 문제가 나오는데, 여기서 최적의 솔루션을 도출하는 방법과 그것이 왜 그런지를 써라. 전 처음에 이게 무슨 논술시험이야’,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논술시험을 볼 때는 철학 문제나 윤리적 딜레마, 이런 문제들이 많았거든요. 그래서 생각을 좀 해보니, 이래야 논란의 여지가 없이 채점이 가능한 거예요.

 

p86. 엄기호. 지금 대학은 논문을 쓰는 교수, 강의를 잘하는 교수, 책을 쓰는 교수, 프로젝트를 잘 하는 교수 등등 더 다양한 형태의 교수가 필요한데, 학교랑 똑같아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역설적으로 논문 기계들만 임용되게 되는 거죠. 결국은 이 공정함이라는 게 어떤 공정함인가, 누구를 위한 공정함인가, 라고 질문 할 수밖에 없어요.

 

p99. 하지현. 우리나라는 2천 년대 초반 이후, 특히 IMF 이후에 성장 곡선이 정점을 찍고 이후에는 아마 멈추지 않았나, 5천 만 인구의 내수 시장을 봤을 때 이미 꽉 차지 않았나 싶어요. 70년대에서 90년대 초까지의 팽창은 이제 불가능하죠. 그런데 박해천의 <아파트 게임>에 나오는 것처럼 486들이 부를 축적한 방식이 대학을 졸업하고 분당이나 일산의 아파트 분양권을 당첨 받아서 그걸 두세 번 갈아타니 어느새 서울이나 소도시에 꽤 괜찮은 아파트를 갖게 되었고, 그걸 통해서 먹고살 길이 생긴 거죠. 이런 라인업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건 사회가 팽창하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이제는 그게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P100. 공부를 통해서 고학력을 얻고 고학력을 통해서 나름의 기본 위치를 갖는 것은 여전히 안전한 길입니다. 하지만 확률로 따지면 성공 확률이 높다기보다 상대적으로 실패 확률이 낮은 방법일 뿐이에요.

 

실제 자료를 봐도 그래요. 사회학자인 신광영 중앙대 교수가 2000년부터 2014년까지의 한국노동패널 자료를 분석해서 중간계급 세대 간 이동 경로를 추적했어요. 놀랍게도 부모와 자녀 세대가 모두 중간 계급을 유지한 확률은 10.5 퍼센트에 불과했어요. 10명에 9명은 지위가 달라진 거예요. 이렇게 애를 써서 자기 중간 계급을 물려주려고 부모 세대는 무진장 애를 쓰지만 10명에 9명은 실패했다는 것. 이건 이 전략이 개인의 능력 문제로 실패한 것이 아니라 전략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증거 아닐까요?

 

P105. 엄기호. 공부라고 했을 때, 경험을 통해서 뭔가를 얻는 건 의미가 없는 것이 되어버렸어요. 그러다 보니 굉장히 위계화되고 학벌화된 시스템의 자격증만이 유의미하게 됐죠. 이반 일리치의 개념을 가져와서 쓰면 한국사회가 스쿨링화된 사회라는 생각이 들어요. 사회 전체가 학교가 되었다는 거죠. .....그런데 한국 사회는 스쿨 자체가 굉장히 위계화된 학벌사회라서, 어디를 나왔는지가 그 사람의 능력과 그 밖의 모든 것을 검증해주고 보여준다고 보는 사회죠. 그래서 좁은 의미의 공부에 대한 집착 같은 게 생겼죠. 그런데 이게 사회적으로 보면 정말 비극이거든요.

 

요즘 강남 대치동의 학부모들이 자식들에게 주는 약 중에 하나가 오력탕이라고 하던데, 총명하게 하고, 뭐 그렇게 하면서 다섯 가지 힘을 준대요. 그런데 그 약의 핵심적인 기능이 잠 안 오게 하는 거래요. 잠자지 말고 공부하라는 거죠.

 

P111. 현재 교육 시스템에서 근대 교육의 기본 정책을 재고해봐야 할 필요가 있어요. 그래서 평균을 중심으로 하는 교육을 일으키고, 그리고 주로 제가 만나는 아이들, 하위 50퍼센트 친구들을 어떻게 도울 것인가, 탈락하는 10퍼센트를 5퍼센트로 줄일 방법은 무엇인가,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에요. 결국 이 친구들도 사회에 나갈 거니까, 사회에서 자기 밥벌이를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술과 능력을 가질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필요하단 말이죠. 그리고 상위 5퍼센트 친구들은 알아서 가는 거지 학교가 힘쓸 일은 아니라는 거예요.

 

어느 순간부터 고등학교 정문 플래카드에 어느 대학 몇 명, 어느 대학 몇 명 합격했다는 게 그 학교의 성적표가 되어버렸는데, 그렇게 되면 안 되는 거거든요. 학교는 학원이 아니거든요. 우수한 몇 명을 위한 학교가 아니라 중간인 아이들을 위한 학교가 되는 게 원래 학교의 취지에 더 맞죠. 그러니 플래카드를 붙인다면 졸업 10년 후 80퍼센트의 졸업생이 독립적으로 잘 살고 있습니다.”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P114. 엄기호. 학부모고 학생들이고 실제로는 최상인데 그것을 마치 중간값이고 평균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어요. 한윤형 씨가 썼던 표현대로 하면 평균압입니다. 평균에 대한 압력이죠. 한국은 적어도 평균이 되어야 한다는 압력이 매우 높은 사회라는 뜻입니다. 평균이 되지 못하면 탈락이고 낙오이며 패배한 인생이라는 말이 돼요. 그런데 한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평균이라는 건 절대 평균이 아니라는 거예요. 너무 높다는 거죠.

 

.....중간쯤 되는 아이들도 소위 10개 대학 있잖아요, ‘서연고서성한중경외시라고 하는, 그 정도까지는 가줘야 평균이라고 생각하죠. 이건 정말 말이 안 되는 거거든요.

 

하지현. 10개 대학 정원을 대략 계산해보면 3만 명 정도 되거든요. 현재 수능 수험생을 65만 명 정도로 보면...대략 4.5퍼센트. 그런데 이걸 평균값으로 생각한다는 거잖아요.

 

P.124. 하지현. 얼마 전에 연애연구소를 운영하는 분과 이야기를 나눠 볼 기회가 있었어요. 기업 교육을 나가서 연애란 어떻헤 하는 것인가를 가르치는 분이에요. 제일 반응이 좋은 직업군이 판검사, 의사라고 하더군요. ‘이럴 땐 이렇게 하고, 저럴 땐 저렇게 해라라고 이야기해주는 것에 열렬한 반응을 보인대요...그런데 재미있는 건, 이 분이 저한테 가장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데가 어딘지 아세요?” 그러더라고요. 어디일 것 같으세요

이마트 직원 분들이래요. 이분들은 늘 사람을 대하고 있으니 도리어 연애 기술이라고 하면서 사람 대하는 기술 같은 것을 가르치는 게 조금 웃기는 거예요.

 

P129. 엄기호. , 여기에서 재미있는 현상이 있어요. 틀 밖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있잖아요. 성공을 하고 나면 그것으로 죽 살아가면 되잖아요? 그것이 다른 사람들한테 훨씬 더 영감을 주거든요. 그런데 꼭 책을 씁니다. 꼭 학원을 해요. 결국 자신의 성공 방식을 매뉴얼화하는 거예요. 본인이 그러고자 하는 욕망이 있고 또 사람들이 그것을 원하죠. 결국 한국에서 블루오션은 공부밖에 없어요. 출판계도 레드오션이잖아요. 그런데 출판학교는 잘되고 있어요. 출판계는 망해가고 있는데 말예요.

 

P132. 엄기호. 공부 중독의 비극적 역설은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삶의 문제를 풀기 위해서 공부를 하는데 공부와 삶을 분리시키고 공부에 올인하다 보니 삶이 더욱더 빈약하고 허약해지고 있다는 것. 그 빈약함과 허약함을 채우기 위해서 가르칠 수 없는 것을 또 가르칠 수 있는 것처럼 만들면서 삶은 공부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있고요.

 

P139. 엄기호. 대기업 생산직 노동자들이 돈을 꽤 많이 벌거든요. 노동 계급의 대표는 아니고 중산층화된 노동 계급이죠. 이 사람들은 이제는 대학 가 봤자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는 걸 알아요.

 

P144. 하지현. 마루야마 겐지 식으로 얘기하면 자식도 엄밀하게 말하면 남이다, 아들러 식으로 말하면, 아무리 자식이라도 자식의 삶에 대해서 왈가왈부하지 마라.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게 참 안되죠. 자식을 자아의 확장이라고 생각하면서 자식이 잘되는 것이 내가 잘되는 것이라고 여기죠.

 

자신의 삶의 성적표가 자신의 성취에 의해 매겨지는 게 아니라 애가 대학갈 때, 취업할 때, 결혼할 때, 이렇게 세 번, 자신의 인생 성적표를 받는다고 생각해요. 자기 인생에서 내가 뭘 얻었고, 내가 뭘 재미있게 생각했고, 내가 그동안 살면서 사회에 어떤 공헌을 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내 자식이 어느 대학에 갔고, 어디에 취직했고, 어떤 직업을 가졌고, 어떤 집안과 결혼해서 어느 동네에 살고 있는가를 가지고 자기 인생의 성적표를 받고 있다는 것은 정말 불행한 일이라는 거죠.

 

P145. 엄기호. 방금 선생님이 말씀하신 그 메시지를 매우 강력하게 던지는 게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학교 안에서도 그렇고, 사회에서도 그렇고 공부 중독이 차별과 혐오를 굉장히 광범위하게 양산해내고 있거든요. 그 핵심에 지나친 과잉 투자와 보잘것없는 아웃풋이 있다 보니까, ‘내가 이 개고생을 해서 어떻게 얻었는데 내가 왜 쟤랑 이걸 나눠야 하지’, ‘왜 내가 쟤랑 동등해져야 하지’, 이런 생각에 용서가 안 되는 거죠. 그리고 이게 안 되면 안 될수록 중산층들은 교육을 더욱 더 특권화하려고 해요.

 

P147. 엄기호. 여전히 의미 있는 것 중의 하나가, 그런 지식인들이 자식에게 내가 소위 공부를 통해서 여기까지 와봤지만 정말 별것 아니더라하고 말하기도 하잖아요. 내가 어느 정도 재산을 물려줄 수 있으니까 그 돈을 발판으로 농부가 돼든 목수가 돼든, 조금 벌고 조금 쓰는 삶을 살아라, 이건 굉장히 훌륭한 선택이라고 생각해요.

 

P149. 부지불식간에 자기 자식을 신빈곤층으로 만든 거예요. 부모님이 아파트 팔아가지고 사교육 시켜줬으니 부자인 줄 알고 살다가, 대학 와서 자기가 신빈곤층이 되었음을 절감할 때, 이것보다 더 비참한 것이 있을까요? .....그런 학생들 말고 완전히 무기력해지는 학생들이 있어요. 가난에 대해서 조금의 면역 체계도 없는 학생들이 완전히 멘붕이 되는 거죠.

 

P151. 엄기호. 의사나 변호사는 이러니저러니 해도 죽을 때까지 갈 수 있는데, 대기업 부장은 다 허깨비예요. 해고되면 끝이잖아요.

 

엄기호. 제가 아는 친구 중에서는 그 돈으로 온 집안 식구가 1년 동안 세계 여행을 한 집이 있어요. 그렇게 하면 많은 사람들이 불안감에 묻죠. “그러고 난 다음에 먹고사는 건 어떻게 할 거냐”, “직업은 어떻게 할 거냐”. 이 불안을 잠재울 수 있는 건 두 가지죠. 하나는 내가 무슨 직업을 구하더라도 어떻게든 살아가기 위해서는 감수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가 필요한 것이고, 또 하나는 제가 사회학자니까, 뭘 하든 굶어죽지 않는 시스템을 사회에서 만들어줘야 하는 거예요. 시민 수당이든 어떤 형태든지 간에요.

 

P153. 하지현. 부모고 아이고 리스트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커요. 그런데 그 두려움을 넘어서야 돼요. “이리로 한번 가봐. 그 대신 6개월은 해봐. 그럼 대충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게 돼. 그런데 그게 길이 아니라는 결론을 얻는다면 그동안 시간 낭비한 게 아니라 최소한 네 인생에서 이 길은 아니라는 것은 알게 되잖아.” 이십대 초반에 얻어야 하는 것은 하고 싶다도 있지만, ‘해보니까 이건 아니다인 것을 찾는 것도 굉장히 중요한 것 같아요.

 

P156. 하지현. 우리나라 사람들의 3퍼센트에서 5퍼센트에 드는 수입일 텐데, 이들이 허덕허덕한다는 것은.....

 

엄기호. 강남 대치동에 사는 제 친구는 그곳을 늪이라고 표현해요. 안 시키려야 안 시킬 수가 없대요.

 

하지현 : 제가 이런 얘기를 강연에서 하면 나오는 특징적인 피드백이 있습니다. “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사회 시스템이 변하지 않는 한 결국 손해를 보게 되는 것은 나 개인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이 말은 맞으면서도 현실에 맞지 않는 허황된 얘기로 들린다라는 것입니다. 사교육 안 시키고 그래서 좋은 대학 못 가고 그래서 취업이 안 되면 사회에서 듣보잡취급 받으면서 살 텐데 어떡하느냐는 거죠. 저는 그래서 더욱 더 이부분에 대한 새로운 공감대와 행동을 해낼 개인이 늘어나야 한다고 보는 거예요.

 

....그래서, 한 명씩 한 명씩이라도 개인의 선택의 변화가 이어지고, 그 수가 어느 순간 무시할 수 없는 수가 된 다음에는 결국 상식의 전환이라는 거대한 위상 전위를 맞이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다행히 분위기는 무르익었다고 봐요. 중산층이 어려워지면서 더 이상 이 게임에 넣을 판돈이 모자란다는 현실과, 인풋 대비 아웃풋이 턱없이 맞지 않을 정도로 인풋 요구량이 현실적으로 감당할 수준을 넘어섰고, 아웃풋마저 매우 미비한 확률 게임이 되어버렸다는 점에서요. 그래서 이 게임 내지는 이 게임을 바라보는 인식 자체가 잘못되었고 여기서 벗어나야 살 수 있겠다는 인식의 대전환이 일어날 그날이 꽤 가까이 다가와 있다고 봅니다.

 

P159. 하지현. 완전히 새로운 영역의 공부가 필요해요.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과가 아니라 뭔가를 알고 싶다라는 욕구로부터 시작하는 새로운 공부. 이 친구들에게 이전까지의 공부는 불쾌한 기억이거든요.

 

P163. 공부라는 것, 알고 싶다는 욕망을 갖는 데에는 동기가 필요하거든요. 동기는 크게 세 가지라고 생각해요. 하나는 절박감이에요. ‘이거 모르면 나 죽어’, ‘어떻게든 알아내야 해이런 것이죠. 두 번째는 경쟁심이에요. ‘쟤보다는 나았으면 좋겠어하는 욕구, 세 번째는 그냥 하고 싶어’, ‘알고 싶어이런 이상적인 목표가 있는 거예요. 저는 이 세 가지가 인간을 움직이는 추동력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문제는 이 세 가지가 전부 다 없는 친구들이 있어요.

 

P166. 하지현. ‘그렇다면 공부를 잘한다는 것은 뭘까에 대해서 생각해봤어요. 첫 번째는 핵심, 맥락을 잘 잡아내는 거죠. 둘째는 짧은 시간에 효율적으로 많은 정보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 셋째가 진짜 공부를 잘 하는 것일 텐데, 이치를 깨닫는 것이죠. 큰 흐름 안에서 이게 뭘 의미하고 있고, 어디에 자리하고 있는가, 나아가서는 나하고 어떤 관계가 있는가까지 생각할 수 있는 것이겠죠.

 

지금 우리 아이들에게 주어지는 공부는 둘째가 90퍼센트예요. 성적이 아주 잘 나오는 아이는 첫째 덕목인 맥락을 잡 잡아내서 요령이 좋죠. 정작 중요한 것은 셋째인데 거기에까지 마음이 미칠 여유가 없어요. 또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게 비극입니다. 저는 순서로 볼 때 셋째를 목표로 하면서 첫째를 중심으로 흐름을 잡고, 그리고 둘째는 필요에 의해서 노력하면 되는 게 아닌가 싶어요.

 

P181. 이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학력간 임금 격차를 획기적으로 줄이는 거예요. 대졸자와 고졸자 간의 임금 격차가 너무 큽니다. 이 경제적 격차가 사회적, 문화적 격차로 이어지는 한 결코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아요.

 

P184. 엄기호. 한국의 가장 큰 문제는 계급이 구조화가 되면서 동시에 경제적 격차도 구조화가 된다는 점이에요. 경제적 격차가 줄어드는 방식으로 또는 경제적 격차를 완충하는 방식, 이를테면 복지 제도잖아요, 그런 방식으로 계급의 구조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요.

 

P193. 공부의 블랙홀에 빠진 부모는 공부에 중독된 아이를 만들고, 그 아이들이 사회에 나온다. 공부 백 퍼센트짜리 순도 높은 존재일 뿐, 사회성, 공감능력, 유연성 같은 요소는 상대적으로 결핍된 상태다. 공부로 승부하는 나이는 20대 중반까지이고 그 후에는 다른 요소들이 더 중요할 수 있는데, 이 요소들이 모자라다고 느끼면 역시 공부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여기며 책과 학원을 찾으니 기가 찰 노릇이다. 이런 악순환에 빠져 있는 것이 지금 우리 사회다. 공부라는 블랙홀이 학교를 넘어서 사회와 인생을 빨아들이고 있다.

 

P194. 더 중요한 것은 공부에 중독된 한국인이 그 독 때문에 내 인생뿐 아니라 자식의 인생도 망가뜨리고, 더 나아가 사회구조까지도 동력을 잃어버리게 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먼저다. 그리고 그 길로 아무리 노력하고, 아무리 성실하게 열심히 한다고 해도 끝에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올 것이라 믿고 싶지만, 이 대담에서 누누이 반복했듯이 그럴 확률은 급격히 작아진 것이 현재 우리 사회다.

 

모두가 미쳤어, ”이건 아니야를 외치면서도 그 트랙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아는 도둑질이 이것뿐이라는 점도 있고, 나만 혼자 빠져나갔다가 혼자서만 불리해질 것이라는 두려움이 강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이슈로 비판을 하면서도 정작 내 아이라는 개인의 문제가 되는 순간 이전의 합리적 상식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고 멈춘 채 하던 대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P195. 이 대담을 시작으로 한 명이라도 더 이 게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생각의 전환과 용기의 불씨를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 공부 중독에서 벗어나 다른 트랙에 선 사람이 늘어날수록 공부라는 블랙홀의 중력장은 힘을 잃을 것이다. 차곡차곡 쌓여서 어느 순간 임계점을 넘어설 정도의 참여자가 모이고 나면, 블랙홀은 그 위력을 잃고 사라져버릴 것이라 기대하고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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