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을 끓이며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김훈의 <칼의 노래>는 남성적 묘사의 극치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일까? 나는 김훈의 <화장>을 읽기가 불편했다. 추은주가 오상무에게 쓴 편지부분에서 계속 김훈의 얼굴이 어른거리기 때문이다. 김훈이 화장을 하고 여장을 한 모습이 연상된다.

 

남성적 서사가 주를 이루는 <칼의 노래>같은 소설을 읽을 땐 그의 문체가 장점이 될 수 있지만 <화장>같은 경우엔 오히려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김훈의 소설보단 에세이가 읽기에 마음 편하다. 어떤 이웃분이 김훈의 글은 낭독에 좋다고 말씀하셨는데 동의한다. <라면을 끓이며>도 읽다보면 어느새 읊조리게 된다. 어쩌면 그는 시조의 형식을 차용한 게 아닐까. 아니면 국악의 리듬을 차용한 것일까. 알려진 대로 김훈은 <칼의 노래>를 집필할 때 국악장단을 연상하면서 문장을 썼다고 말했었다.

진양조,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 휘모리.등등.

 

예를 들면 이런 문장을 읽다보면 저절로 소리를 내뱉고 싶어진다.

 

가을은 칼로 치듯이 왔다. 가을이 왔는데, 물가의 메뚜기들은 대가리가 굵어졌고, 굵은 대가리가 여름내 햇볕에 그을려 누렇게 변해 있었다. 메뚜기 대가리에도 가을은 칼로 치듯이 왔다. 그것들도 생로병사가 있어서 이 가을에 땅 위의 모든 메뚜기들은 죽어야 하리. 그 물가에서 온 여름을 혼자서 놀았다. 놀았다기보다는 주저앉아 있었다. 사랑은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의 이름이라고, 그 갯벌은 가르쳐주었다. 내 영세한 사랑에도 풍경이 있다면, 아마도 이 빈곤한 물가의 저녁썰물일 것이다. 사랑은 물가에 주저앉은 속수무책이다.

 

<라면을 끓이며> P224. 3부 몸.

 

원래 좋아하던 문장들을 다시 만나는 것도 반가웠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

 

잘 익은 수박은 터질 듯이 팽팽해서, 식칼을 반쯤만 밀어 넣어도 나머지는 저절로 열린다. 수박은 천지개벽하듯이 갈라진다. 수박이 두 쪽으로 벌어지는 순간, ‘!’ 소리를 지를 여유도 없이 초록은 빨강으로 바뀐다. 한 번의 칼질로 이처럼 선명하게도 세계를 전환시키는 사물은 이 세상에 오직 수박뿐이다. 초록의 껍질 속에서, 새카만 씨앗들이 별처럼 박힌 선홍색의 바다가 펼쳐지고, 이 세상에 처음 퍼져나가는 비린 향기가 마루에 가득 찬다.

 

<라면을 끓이며> P336. 4, .

 

가끔씩 아무 이유 없이 <칼의 노래> 첫 문장을 내뱉곤 한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그리곤 혼자 자지러진다.

아으, 동동다리

 

그의 글에선 여전히 전체성과 개별성이 투쟁을 벌인다.

애초에 필사를 포기한다. 반납 일을 하루 넘겼기에.

사서 필사하리라.

 

 

 


댓글(17) 먼댓글(0) 좋아요(6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곰곰생각하는발 2016-03-13 0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훈은 낭독하기에 좋은 글이다에 격하게 동의합니다..

시이소오 2016-03-13 07:59   좋아요 0 | URL
그쵸? 누군가 읊어줬으면 좋겠어요^^

mipsan 2016-03-13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의 정석같은 느낌

시이소오 2016-03-13 18:03   좋아요 0 | URL
갈고 닦은듯하죠? ^^

mipsan 2016-03-13 18: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ㅎㅎ

깊이에의강요 2016-03-13 2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듬이 있지요^^

시이소오 2016-03-13 20:38   좋아요 0 | URL
그렇죠? ^^

caesar 2016-03-14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훈은 소설보다 에세이라는 말, 저 역시 매번 해왔던 말이라 동의x3합니다!

시이소오 2016-03-14 00:12   좋아요 1 | URL
역시, 그렇죠? ^*^

징가 2016-03-14 1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필사까지 허걱 거의 만랩이십니다.
김훈 작가의 필력은 살아숨쉬는 생물같다고 생각합니다.

시이소오 2016-03-14 13:05   좋아요 0 | URL
살아 숨쉬는 생물이라는 말을 들으니 뱀장어가 떠오르네요.
왜일런지요. ㅋ ^^

비로그인 2016-03-14 1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롤리팝에서 알파벳으로 바꿨습니다.
시이소님 좋은 하루되세요.

시이소오 2016-03-14 19:51   좋아요 0 | URL
오, 대문화면도 멋지네요. 기억하겠습니다 ^^

김선중 2016-03-20 0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경륜있는 글의 면면입니다

시이소오 2016-03-20 08:36   좋아요 0 | URL
한국의 코멕 메카시라 불러도 전혀 과장이 아닐듯 합니다 ^^

마르케스 찾기 2016-10-02 0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훈님의 자전거 여행을 한 낮의 한 적한 버스 안에서 오디오북으로 들었어요ㅋㅋ
종점에서 종점으로ㅋ 한 낮 버스 안이라 사람도 없고,, 맨 뒷 줄이라 타고 내리는 사람들에 방해도 없이 시원하게,,,
올 여름 저의 휴가였어요ㅋㅋ
낭독하기 좋은 글이다는 말씀에 격하게 저도 동의합니다,,,
작년 휴가땐 KTX타고 서울가서,
대학로 연극을 일주일간 내내 보러 다녔죠.
휴가철엔 산 계곡 바다,, 온 나라가 소음에, 쓰레기에, 가는 곳마다 술판과 고기판과 수박찌꺼기라ㅠ

한 적한 시간을 소소하게 보내기에 좋은 책과 좋았던 시간들이었어요. 오디오북으로 듣기엔 김훈님의 자전거 여행만한 책은 없더라구요.
라면을 끓이며 이 책도 ˝읽고 싶어요˝가 아닌 ˝듣고˝ 싶어지네요ㅋㅋ

시이소오 2016-10-02 01:04   좋아요 0 | URL
오디오북이 있군요. 자전거 여행은 오디오북으로 읽어야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