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 중독 - 공부만이 답이라고 믿는 이들에게
엄기호.하지현 지음 / 위고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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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아은의 <잠실동 사람들>을 읽기 전까진 중산층 교육열이 그 정도일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초등학교 2학년이 새벽 3시까지 공부를 하다니! 잠실이 이정도면 대치동은 어느 정도란 말인가.

 

우리 세대야 베이비 붐 세대여서 초등학교 때도 한 반 70명에 오전, 오후반이 있던 시절이었다. 당연히 대학가기도 그만큼 어려웠을 것이라 막연히 생각했는데 소설을 보니 그때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은 듯 했다.

 

한국의 사려 깊은 사회학자 엄기호와 신뢰할만한 정신과 전문의 하지현이 대한민국 공부 중독현상에 대해 논한다.

 

엄기호는 학생들이 아프다고 말한다. 학생들은 공부 중이다. 학생들은 공부 중이면 모든 것이 용서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준비가 덜 되었다는 이유로 절대로 타석에 직접 서려 하지 않는다. 타석에 서지 않아야,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만능감을 해치지 않을 수 있다.

 

20대 아이들은 기본적인 대인관계에서도 서툴고 오로지 자기만을 생각할 줄 밖에 모른다. 그들은 현실을 게임처럼 받아들인다. 자신이 열심히 했다면 아이템이 주어지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현실이 그렇지 않을 경우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고 폭력적이 되기까지 한다. 데이트 폭력이 그러한 예이다.

 

이들은 자기중심성은 강하지만 자기 의견이 없으므로 어떤 결정을 할 때에는 다른 사람 얘기에 쉽게 넘어가기도 한다. “정답이 뭐냐?”라는 질문만 받아온 아이들은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경향을 보인다. 공부를 하는 게 아니라 구경한다. 교재마저 형광펜이 칠해져 나오는 형국이다.

 

누가 아이들을 공부로 모는가? 물론 부모다. 특히나 486세대들. 이들은 실제로 공부를 통해 성공한 세대기도 하다. 하지현은 486세대가 굉장히 운이 좋은 프리 라이딩시대였다고 지적한다. 이들은 공부를 통한 계급 상승이 가능하던 세대였다. 그러나, 그런 모델은 이제 끝났다. 신광영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오늘날 열에 아홉은 계급 유지에 실패했다.

 

특히나 하지현은 학부모와 학생들이 평균을 너무 높게 잡는다고 지적한다. 흔히 말하는 서연고서성한중경외시의 대학 정원은 3만 명, 수험생들은 65만 명이다. 4.5퍼센트다.

 

가장 교육에 목을 메고 있는 계층은 중산층이다. 그렇지만 판돈은 점점 더 커지고 아웃풋의 효과는 미비해지고 있다. 더 나아가 중산층 아이들이 대학에 가면서 신 빈곤층으로 추락하는 경우도 있다.

 

엄기호, 하지현은 과도한 사교육이 이제 투자가 아니라 투기라고 말한다. 하루빨리 이 미친 짓을 그만두어야 한다. 부모들은 사회구조가 바뀌지 않는 이상 어쩔 수 없다고 반박한다. 하지현은 생각의 전환과 용기를 가지고 한 사람이라도 먼저 이 트랙을 빠져 나와야 한다고 말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임계점을 넘으면 보다 건강한 교육 시스템이 작동할 수 있을 것이라고.

 

얼마 전, 아이들 놀이 책을 써서 제법 유명해진 친구와 카톡을 했다. 그 당시 친구는 아이들 교육 때문에 외국에 있었다. “놀이 책 썼으면서 아이들 유학 보내는 거 좀 그렇지 않냐?”고 물었다. 친구는 톡했다.

 

그건 노는 거고 이건 공부지.”

 

, 그렇구나.’ 작금의 교육 문제. 트랙에서 벗어나는 게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돌이켜보면 나 역시 타석에 들어서지 않기 위해공부한다고 핑계를 대곤했었다. ‘내공을 쌓는다라는 표현대신 헨리 밀러의 말을 빌려 렌즈를 닦는다라고 말했다. 지금은 충분하지 않다고. 만일 렌즈가 완벽해지는 날이 온다면 그때엔 모두가 어리둥절할 정도로 놀라운 이 세계의 아름다움을 선명하게 보여주겠다고.

 

실제로 부족하다 느껴서 였겠지만 한편으론 만능감을 유지하고 싶어서였다.

 

지금은 하지 않아. 하지만 내가 준비가 되면 나는 최고로 잘 할 수 있어.’

 

렌즈처럼 완전해지는 순간이란 없다. 저질러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읽으면서 꽤나 뜨끔 거렸다. 혹시 나도 공부중독이 아닐까.

나 역시 여전히 삶을 회피하고 식민화하는 공부를 하는 중일까.

삶의 무게를 지고 싶지 않아서 책 속으로 도망치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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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12 08: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6-03-12 08:23   좋아요 0 | URL
그런가요? 절학무우,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풍림화산님도 불바람(?)같은 주말 시작하세요^^

아타락시아 2016-03-12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지식을 탐구하고자 하는 열정에서 오는 공부 중독이 아니죠.

시이소오 2016-03-12 15:15   좋아요 0 | URL
진정한 공부가 필요한 거겠죠?^^

cyrus 2016-03-12 17: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지현 씨가 문제점은 잘 지적했는데, 해결방안이 아쉬웠어요.

시이소오 2016-03-12 21:59   좋아요 0 | URL
해결방안이 참 애매모호 하죠 ^^

기억의행성 2017-09-29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준비를 회피의 다른 말로 쓰는 저의 모습이 생각나 뜨끔하네요

시이소오 2017-09-29 22:18   좋아요 0 | URL
기억의 행성님도 일단 저지르세요^^
 

둘째 밤. 루터, 문학자이기에 혁명가

 

저번에는 비평가와 전문가라는 두 가지 지의 나쁜 형상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프리드리히 니체의 도움을 받아 그가 말한 변질하여 가치판단의 힘을 잃어버린 철학자칼리오스트로 같은 철학자라는, 역시 긍정하지 않을 수 없는 두 가지 형상과 반향하면서 말이지요.

 

p67. 사람들은 거기서 적어도 여섯 혁명을 경험했습니다. 호칭이야 논자마다 다르지만 일단 열거하기로 합시다. 중세 해석자 혁명, 대혁명, 영국혁명, 프랑스혁명, 미국혁명, 러시아혁명,

 

p68. 혁명은 보통 영어로 ‘revolution’이라고 합니다. 이 말이 일반적인 된 것은 프랑스 혁명의 어느 유명한 에피소드에서 입니다. 1789년 바스티유 감옥이 습격을 받았을 때 당시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가 반란이다라고 말하자 측근인 라 로슈포코 리앙쿠르 공작이 아닙니다, 폐하. 이건 반란이 아니라 혁명이옵니다.”라고 했다는 극적인 장면입니다.

 

p69. 12세기 중세 해석자 혁명, 별칭으로 교황 혁명은 유럽에서 최초의 혁명 이념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것은 혁명의 슬로건”, “상징적인 기도 문구이고 은유”(르장드르)였습니다. 그 슬로건, 기도, 은유란 어떤 것이었을까요? ‘Reformatio totius orbis’라고 합니다. 번역하면 세계 전체에 형태를 다시 주는 것이 됩니다. 요컨대 세계혁명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Reformatio’를 혁명이라고 번역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버먼이 이를 독일혁명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앞에서 말했습니다만, 역시 원어를 보면 독일이라는 말은 한마디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를 대혁명이라고 번역하지 못할 이유도 없습니다.

 

p73. 우리가 혁명이라는 말을 듣고 떠올리는 것은 무엇일가요? 폭력이고 유혈이며 참극입니다. 영국혁명의 일부를 이루는 명예혁명은 영어로 ‘Glorious Revolution’이라고 합니다. ...‘빛나는 혁명’, ‘영광스러운 혁명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왜 그렇게 불리는 걸까요? 무혈혁명이었기 때문입니다.

 

p75. 마르틴 루터가 일으킨 대혁명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하지요. 대혁명이란 성서를 읽는 운동입니다. 루터는 무엇을 했을까요? 성서를 읽었습니다. 그는 성서를 읽고, 성서를 번역하고, 그리고 수없이 많은 책을 썼습니다. 이렇게 하여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책을 읽는 것, 그것이 혁명이었던 것입니다.

 

p79. 수도원은 원래 학문과 노동과 금욕과 명상의 장소입니다. 그러나 부패한 수도원은 이제 귀족들이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는 소굴, 패셔너블한 사교장으로 전락해갔던 것입니다.

 

p81.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죄인을 벌하는 정의의 신을 사랑하지 않았다. 아니, 증오했다. 그리고 모독이라고는 말하지 않아도 신에 대해 분노를 안고 있었다. 가련한, 영원히 상실된 죄인을, 죄 때문에, 십계명에 의해 온갖 종류의 재앙으로 우리를 압박하는 것만으로 신은 만족하시지 않는 걸까 ?

 

p83. 그는 알았던 것입니다. 이 세계에는, 이 세계의 질서에는 아무런 근거도 없다는 것을. 성서에는 교황이 높은 사람이라는 따위의 이야기는 쓰여 있지 않습니다. 추기경을, 대주교 자리를, 주교 자리를 마련하라고도 쓰여 있지 않습니다. 황제가 높은 사람이라고도 쓰여 있지 않습니다. 교회법을 지키라고도 쓰여 있지 않습니다. “십계명을 지켜라라고 쓰여 있을 뿐입니다. 수도원을 지으라고도 쓰여 있지 않습니다. 공의회를 열라고도, 그 결정에 따르라고도 쓰여 있지 않습니다. 성직자는 결혼해서는 안 된다고 쓰여 있지 않습니다. 면죄부는 논할 계제도 못 됩니다.

 

p84. 이 세계의 질서에는 아무런 근거도 없습니다. 게다가 그 질서는 완전히 썩어빠졌습니다. 다른 사람은 모두 이 질서를 따르고 있습니다. 이 세계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고, 따라서 이 세계의 질서는 옳고 거기에는 근거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루터를 제외하고, 교황이 있고 추기경이 있고 대주교가 있고 주교가 있고 수도원이 있고, 모두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지만 아무리 읽어도 성서에는 그런 것이 쓰여 있지 않습니다. 책을 읽고 있는 내가 미친 것일까, 아니면 이 세계가 미친 것일까?

 

p85. 반복합니다. 책은 읽을 수 없습니다. 읽을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으로 만들자마자 몇 번 읽어도 알 수 없게 됩니다. 그런 책만이 책입니다.

 

p86.루터가 말했습니다.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기도이고 명상이고 시련이다.”

 

루터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되풀이해서 읽으라고 충고하고 나서 그는 이렇게 말을 잇습니다.

 

그러나 이에 질려 한 번도, 두 번도 이미 충분히 읽었고 들었고 말했다. 뭐든지 근저에서부터 알고 있다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런 생각을 갖는 자는, 때 아닌 때에 열매를 맺는 과일 같은 것으로, 절반도 익지 않은 채 떨어져버릴 것이다.

 

자신이 틀렸을지도 모릅니다. 주위 사람들은 다들 이 세계에는 준거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신만 미쳤는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륀베델처럼요. 저는 이를 준거의 공포라고 부른 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읽어도 정말 그런 것이 그 책에 쓰여 있었는지 완전한 확신을 가질 수 없습니다.

 

책이란 그런 것입니다. 책에 그렇게 쓰여 있었다, 그렇게 생각한다, 정확한 근거를 보여준다,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그저 자신의 망상일지도 모릅니다. 책이라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무의식이 만들어낸 망상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준거의 공포에 사로잡히면서, 그래도 자신이 틀렸다고 생각되지 않는다면 추궁해야 합니다. - 반복하겠습니까? 책을 읽고 있는 내가 미친 것인가, 아니면 이 세계가 미친 것인가, 하고 말입니다.

 

반복합니다. 책을 일고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그런 정도의 일입니다. 자신의 무의식을 쥐어뜯는 일입니다. 자신의 꿈도 마음도 신체도,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 일체를, 지금 여기에 있는 하얗게 빛나는 종이에 비치는 글자의 검은 줄에 내던지는 일입니다.

 

더군다나 이것은 성전입니다. 성전을 바꿔 읽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바꿔 쓰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버지니아 울프가 말한 고독한 싸움밖에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역시 루터는 아무래도 자신이 미쳤다고는 믿을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눈을 비벼도 거기에는 그렇게 쓰여 있고, 또는 그렇게 쓰여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있지 않으므로 몇 번이고 말합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정면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쓰여 있다고밖에 믿을 수 없다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p91. 루터는 설사 보름스 시내 지붕의 기와가 모두 적이 되어 습격해온다고 해도 나는 간다.”라고 말하며 합스부르크 제국의 전성기를 창출한 황제 카를 5세가 기다리는 보름스 국회의 소환에 응합니다. 거기서 주장을 철회하라는 요구를 거절하고 이렇게 말합니다.

 

성서의 증언이나 명백한 이유를 가지고 따르게 하지 못한다면, 나는 계속 내가 든 성구를 따르겠다. 나의 양심은 신의 말에 사로잡혀 있다. 왜냐하면 나는 교황도 공의회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교황이나 공의회는 자주 잘못을 저질렀고, 서로 모순된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나는 내 주장을 철회할 수 없고 그럴 생각도 없다. 양심에 반하는 일을 하는 것은, 확실하기는 해도 득책은 아니기 때문이다.

 

신이시여, 저를 도와주소서. 아멘.

, 여기에 선다. 나에게는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p93. 사실 1519년 루터 책의 출판 부수는 독일 전체 출판물의 3분의 1, 1523년에는 5분의 2에 달했습니다. 좀 더 넓게 잡아도 1500년부터 1540년까지 독일의 전체 서적의 3분의 1을 차지합니다. 참고로 말하자면 <9월성서>1534년까지 85쇄를 찍어 냈고 10만 부가 팔렸습니다.

 

p97. 루터는 1520년 비텐베르크 빈민 구제법이라는 법률을 공포하고 이렇게 선언합니다. “지금부터 이 도시에 가난한 자는 한 사람도 없다. 구걸을 하는 자는 한 사람도 없다.” 실제로 이 법률은 효력을 발휘합니다.

 

p102. 어쨌든 법을 어떻게 적용할지, 그때의 기준이 되는 것은 무엇인지 하는 물음에 루터파 법학은 양심이라고 대답한 겁니다. 재판관의 양심적인 판단이지요. 서구의 현행법이 루터파에 가장 많이 빚지고 있는 것이 이 부분입니다. 법을 구체적인 사례에 공정하게적용한다는 것은 양심에 따라판단한다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p104. 멜라 출신 농민의 아들이 책을 읽습니다. 성서 박사가 됩니다. 그리고 책을 씁니다. 그래서 교황의 방해자가 되고 그리하여 예술, 문학, 정치, , 신앙, 종교, 그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대혁명은 성취되었습니다.

 

반복합니다. 그는 무엇을 했을까요? 책을 읽었습니다. 성서에 그렇게 쓰여 있었으니까, 그것을 부정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해도 그런 건 알 바 아니었던 것이지요. 책을, 텍스트를 읽는 것은 광기의 도박을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읽어버린 이상 그것에 목숨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되고, 따르지 않으면 안됩니다. , 여기에 선다. 나에게는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작가 고토 메이세이가 왜 소설을 쓰는가?”라고 자문하고는 소설을 읽어버렸으니까라고, 사람을 무시하는 듯한 그 사람 특유의 넉살 좋고 이상한 느낌으로 답했습니다. 이는 사실 똑같은 일입니다. 읽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쓰는 것입니다.

 

아무리 읽어도 그렇게 쓰여 있습니다. 그리고 달리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쓸 수밖에 없습니다. 고독한 싸움일지라도, 그륀베델 같은 광기의 위험이 있더라도, 책을 읽는다는 것을 그 정도까지 예민하게 생각하면, 책을 읽고 다시 읽는 것만으로 혁명은 가능하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p106. 연설은 이렇습니다.

 

남자들은 술과 여자로 몸을 망칠 염려가 있다.

그렇다면 술을 금지하고 여자를 죽이라고 할 것인가?

태양과 별이 우리를 속인다고 한다면,

그것을 하늘에서 떼어내야 하는가?

그런 성급함이나 폭력은 신에 대한 신뢰의 결여를 드러내는 것이다.

나는 기도하고 설교하는 것밖에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신이 나를 통해 얼마나 많은 것을 성취하셨는지를 생각해보라.

말이 그 모든 것을 이루었던 것이다.

 

여기서 루터가 읽은 것기도이고 명상이며 시련이다라고 말했다는 것을 떠올립시다. 의미는 분명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는 성급함이나 폭력을 부정하고 말의 힘을 믿고 있습니다.

 

p109. 당연하고 정당한 요구들뿐입니다. 부당하게도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므로 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명문화된 텍스트가 선행합니다. 95개조의 의견서가 있었던 것처럼 12개조의 요구가 있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정당하고, 전적으로 루터적인 방식으로 성서에서 합법적인 근거를 찾으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전쟁에서 흘린 피는 무익했을까요?

 

아닙니다. 전쟁이 종결된 이듬해인 1526년 슈바이엘에서 제국의회가 개최됩니다. 거기에서 농민의 요구에 대한 대위원회가 설립되었고, 논의 끝에 황제에게 보고서가 제출되었습니다. 이 보고서가 12개조의 요구를 원안으로 삼은 것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수많은 부당한 징세가 폐지되었고, 농노제도 폐지되었으며, 이동의 자유나 토지의 반환이 제기되었습니다.

 

p111.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는 사상의 힘을 모욕하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대학교수의 조용한 서재 안에서 나온 철학적 개념이 한 문명을 파괴해버리는 일도 있다고 말이지요. 하이네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은 유럽의 이신론의 목을 잘라버렸고, 루소의 책은 로베스피에르를 매개로 앙시앵레짐을 파멸시킨 피투성이의 무기라고 했습니다.

 

p112. 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이 대혁명에서 집중해야 하는 것은 혁명의 과정에서 폭력에 의해 권력을 탈취하는 것이 선행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텍스트를 읽고, 다시 읽고, 쓰고 ,다시 쓰고, 번역하고, 천명하는 것. 그 과정에서 폭력적인 것이 나타나는 일은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혁명에서는 텍스트가 선행합니다.

 

p113. 됐나요? 텍스트를, 책을, 읽고, 다시 읽고, 쓰고, 다시 쓰고, 그리고 어쩌면 말하고, 노래하고, 춤추는 것. 이것이 혁명의 근원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무래도 이렇게 됩니다. 문학이야말로 혁명의 근원이다, 라고. 루터는 문학자였습니다. 말의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상 최대의 혁명가였습니다.

 

p114. 혁명이 문학적 몽상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은 절대 없습니다. 혁명은 문학적인 것이 아닙니다. 다릅니다. 결코 다릅니다. 문학이야말로 혁명의 본질입니다. 혁명은 문학으로부터만 일어나고, 문학을 잃어버린 순간 혁명은 죽습니다. 왜 우리는 이렇게 문학을 폄하하고 문학부를 대학에서 추방하려고 할까요? 왜 문학자 스스로가 문학을 이렇게 업신여길까요?

 

그것은 바로 문학이 혁명의 잠재력을 아직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그들은 그것에 겁을 먹고 있는 겁니다. 왜 우리가 이토록 정보의 틈새에서 괴로워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자신을 통치하는 텍스트라는 것이 무미건조한 정보이자 서류인 어느 시공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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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6-03-11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사키의 주장에 따르면 `책을 불태운 사람들`은 `책의 놀라운 힘`을 제대로 직시했던 게 틀림없었던 듯합니다. 정성들여 옮겨주신 덕분에 `책 속에 담긴 저자의 생생한 목소리`를 일부나마 엿들을 수 있어서 참 좋네요. 혁명가 루터에 대한 이야기는 `독서의 역사`를 쓴 알베르토 망겔도 여러 곳에서 `그의 영향력`을 거듭 강조하더군요. 다른 한편으로, 니체는 `르네상스 혁명`으로 거의 다 죽어가던 `기독교`를 `루터`가 기어이 다시 살려냈다면서 ˝르네상스가 ㅡ 의미없는 사건으로, 엄청난 헛수고가 되어버리고 말았다니!`라고 탄식하면서, `우리가 그리스도교를 끝장내버리지 못한다면, 독일인들이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까지 말할 정도로 그를 몰아세웠더군요.

* * *

책을 불태우는 사람들

책을 불태우는 사람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역사를 지우고 과거를 파기할 수 있다는 환상을 품는다. 1933년 5월 10일 베를린, 카메라가 돌아가는 가운데 서적 2만여 권이 불태워지는 동안 선전 부장이던 파울 요셉 괴벨스가 환성을 지르는 10만여 명의 군중 앞에서 일장 연설을 하고 있었다. ˝오늘 밤 여러분들이 과거로부터 내려온 이 왜설스런 것들을 불길로 집어던지는 건 너무도 당연합니다. 이거야말로 전세계를 향해 낡은 정신은 죽었다고 선포하는 막강하고 상징적인 행위가 될 것입니다. 이 잿더미 속에서 새로운 정신의 불사조가 일어날 것입니다.˝

당시 열두 살 소년으로 훗날 런던의 유대학을 위한 레오 백 연구소 소장이 된 한스 파우커도 그 현장을 지켜보았으며 화염 속으로 책을 집어던질 때는 엄숙함을 더하기 위해 이런저런 연설이 이어졌다고 그때를 회고하고 있다. 프로이트의 책들을 던지기 전에는 검열관 중 한 사람이 이렇게 비난을 퍼부었다. ˝정신의 파괴적 분석에 기초를 둔 무의식적 충동이라는 허풍에 맞서서, 나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저작들을 기꺼이 불길에 맡기겠노라.˝ 스타인벡, 마르크스, 졸라, 헤밍웨이, 아인슈타인, 프루스트, H.G. 웰스, 하인리히 만과 토마스 만, 잭 런던, 베르톨트 브레히트를 포함한 수백 명의 저자들이 이와 비슷한 묘비명으로 경의를 받았다.

* * *

피노체트의 판단

예를 들면 1981년에 피노체트 장군이 이끄는 군사 정권은 칠레에서 『돈키호테』를 금지시켰는데, 그 이유는 이 작품에 개인의 자유에 대한 호소와 전통적인 권위에 대한 공격이 담겨 있다는 판단에서였다(피노체트의 판단은 꽤 정확했다).

- 알베르토 망겔, 『독서의 역사』

시이소오 2016-03-11 23:33   좋아요 1 | URL
이토록 장문의 댓글을. ㅋ 감사합니다. 책을 제대로 읽으면 미쳐버리니까요. 지배자들 입장에선 다루기가 어려워지겠죠. ^^
 

첫째 밤. 문학의 승리

 

p15. 프란츠 카프카는 초조해하는 것은 죄다라고 말했습니다.

 

p17. 이제 막 시단에 새로이 등장한 폴 발레리가 스승을 우러러보던 스테판 말라르메에게 시작의 충고를 구하는 편지를 쓴 적이 있습니다. 말라르메는 어떻게 답장을 썼을까요? “유일한 참된 충고자, 고독이 하는 말을 듣도록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름다운 일화입니다. 자신이 하는 말도 듣지 말라는 얘깁니다. 누구의 부하도 되어서는 안 되고, 누구의 명령도 들어서는 안 됩니다.

 

p23. 질 들뢰즈의 강력한 말이 있습니다. “타락한 정보가 있는 게 아니라 정보 자체가 타락한 것이다라는.

 

p24. 현재 대부분의 사회과학이나 심리학적인 지식을, 그것도 위에서 강림한 것 같은 그런 지식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비평가들은 모든 것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또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언제 무엇에 대해서도 재치 있는 코멘트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초조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리고 전문가들은 한 가지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환상에 매달립니다. 결국은 둘 다 환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 환상에 대한 신앙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벗어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p25. 라캉은 모든 것에 대해 모든 것을’, 그리고 하나에 대해 모든 것을이라는 욕망은 결국 팔루스적 향락으로 귀착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했습니다.

 

p31. 재현과 미. 그대는 아름다운 교양을 가진 인간을 찾는가. 그렇다면 그대는 마치 아름다운 지방을 찾을 때처럼 역시 제한된 전망과 광경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분명히 전경적 인간들도 있다. 확실히 그들은 전경적인 지방처럼 교훈적이고 훌륭하다. 그러나 아름답지 않다.

 

비트겐슈타인은 현재를 좇는 자는 언젠가 현재에 따라잡힌다라고 말했습니다만, 바로 현재를 좇으려고 하는 이런 초조함에서 절대적으로 잃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자기 아래로 조망하려고 하면 반드시 손끝에서 달아나는 것이 있습니다.

 

p32. 니체는 온갖 책에서 회임, ’임신이라는 은유를 사용합니다. 실제로 확인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거의 모든 책에 나오는 것 같습니다. 예컨대 임신 상태보다 장중한 상태가 있을 수 있을까?”, “이 장중함 안에서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기대되는 것이 사상이든 행위든 우리는 모든 본질적인 완성에 대해 임신이라는 관계 이외의 관계를 갖지 않는다라고.

 

임신, 회태, 수태. 이런 은유를 그는 반드시 침묵’, ‘과묵과 연결시켜 말합니다. 또는 휴식이 양생이라든가, 어쨌든 소요는 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과 함께.

 

들뢰즈는 철학이란 개념concept의 창조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개념이란 무엇일가요? 그것은 애초에 잉태된 것conceptus’이라는 뜻입니다. ‘개념으로 한다, 개념화한다.conception’라는 말도 임신conceptio’이라는 말에서 유래합니다. ‘마리아의 수태‘conceptio Mariae’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마리아의 개념화conceptio에 의해 산출된 개념인 것입니다.

 

p33. 질 들뢰즈가 쓰는 것여성이 되는 것의 연결을 강조하며 쓰는 이유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남자라는 것의 부끄러움이 아닐까라고 묻는 건 이치에 맞는 것입니다.

 

p34. 그렇습니다. 철학이란, 그리고 쓰는 것이란 여성이 되는 것입니다.

 

p35. 그의 책을 읽었다기 보다 읽고 말았습니다. 읽고 만 이상, 거기에 그렇게 쓰여 있는 이상, 그 한 행이 아무래도 옳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은 이상, 그 문구가 하얀 표면에 반짝반짝 검게 빛나 보이고 만 이상, 그 말에 이끌려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 한 행의 검은 글자, 그 빛에. 그러므로 저는 정보를 차단했습니다. 무지를 택하고, 어리석음을 택하고, 양자택일의 거부를 택하고, 안테나를 부러뜨리는 것을 택하고, 제한을 택했습니다.

 

p39. 그러나 그 벌것벗은 형태의 읽기라는 게 대체 무엇이었을까요? 그렇습니다. 그륀베델 자신의 무의식을, 그 욕망을 텍스트에 직접 접속하는 것이었습니다. 찌르듯이. 어쩌면 찔리는 듯이. 그는 아마 그 텍스트를, 어렸을 때부터 품어온 동경과 사랑을 모조리 털어놓는 거울처럼 보고 말았을 겁니다. 거기에 비친 자신의 무의식을 그대로 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미쳐버리고 말았겠지요. 아마도.

 

그러므로 이런 것입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자칫하면 정신이 이상해질 정도의 일입니다.

왜 사람은 책을 성실하게 받아들이지 않을까요? 왜 책에 쓰여 있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걸까요? 왜 읽고서 옳다고 생각했는데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은 채 정보라는 필터를 꽂아 무해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일까요? 아시겠지요. 미쳐버리기 때문입니다.

 

p40. 카프카나 횔덜린이나 아르토의 책을 읽고 그들이 생각하는 것을 완전히 알아버렸다면, 우리는 아마 제 정신으로는 있을 수 없을 겁니다. 서점이나 도서관이라는 얼핏 평온해 보이는 곳이 바로 어설프게 읽으면 발광해버리는 사람들이 빽빽 들어찬, 거의 화약고나 탄약고 같은 끔찍한 장소라고 느낄 수 있는 감성을 단련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니체의 나는 일개 다이너마트다라는 대사를, 뭔가 과장되고 멋이나 부린 농담이나 그 비슷한 것쯤으로 흘려듣는 만만한 태도에 우리는 아무래도 너무 익숙해져버린 것 같습니다.

 

p42. 읽을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쓴 것은 읽을 수가 없는 겁니다.

읽어버리면 미쳐버리고 맙니다.

 

p42. 읽는다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접속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카프카의 소설을 읽는 다는 것은 거지반 카프카의 꿈을 자신의 꿈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기에서 자연스러운 자기 방어가 작동하는 것도 당연하겠지요. 그것은 본질적인 난해함이나 무료함이지, 결코 난해한 체하는 것도 아니고 번역이 나쁜 것도 아니며 재미있게 읽을 수 없는 자신이 열등한 것도 아닙니다. 알아버리면 미쳐버립니다.

 

p43. 니체 왈, “자신이나 자신의 작품을 지루하다고 느끼게 할 용기를 가지지 못한 사람은 예술가든 학자든 하여튼 일류는 아니다.” , 우리는 이미 여기까지 왔으므로 이 한마디는 이해할 수 있겠지요. 알아버리면 미쳐버릴지도 모르는 정도의 것이 아니면 일류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방어기제를 가동시키고, 따라서 기묘한 무료함이나 난해함을, ‘기분 나쁜 느낌을 느끼게 하지 못하는 것은 책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그런데 거기까지 사람을 몰아넣지 않고 안이하게 진행된 책이 과연 읽을 가치가 있는 것인지 어떤지. 그런 책을 읽는 것보다는 카프카의 무의식에 자신의 무의식을 비춰보고 자신의 무의식과 함께 변혁시키는 위험한 모험을 시작하는 것이 훨씬 더 즐겁지 않을까요.

 

p44. 바로 앞에서 후루이 요시키치도 말했습니다만 니체도, 쇼펜하우어도, 나쓰메 소세키도, 스탕달도, 롤랑 바르트도, 헨리 밀러도, 그리고 마르틴 루터도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책은 적게 읽어라. 많이 읽을 게 아니다.”라고요.

 

다시 말해 책이란 되풀이해서 읽는 것이라는 겁니다. 싫은 느낌이 들어서, 방어 반응이 있어서, 잊어버리니까, 자신의 무의식에 문득 닿는 그 청명한 징조만을 인연으로 삼아 선택한 책을 반복해서 읽을 수밖에 없습니다. 왕왕 대량으로 책을 읽고 그 독서량을 자랑하는 사람은, 똑같은 것이 쓰여 있는 책을 많이 읽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즉 자신은 지를 착취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착취당하는 측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읽은 책의 수를 헤아리는 시점에서 이미 끝입니다.

 

p47. 프로이트가 10대 때부터 애독했던 작가에 루트비히 뵈르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수필에 <사흘 만에 독창적인 작가가 되는 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요컨대 사흘간 방에 틀어박혀 생각한 것을 뭐든지 종이에 적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얼핏 보는 것보다 꽤 어려운 일입니다. 뭐든지, 라는 것은 아무리 부끄럽고 보기 흉한 일이라도, 불쾌한 일이라도, 무의하게 느껴지는 일이라도, 쓰기에 괴로운 일이라도 써야 하는 일이니까요. 무의식의 검열과 억압을 떨쳐내어 쓰고, 또 쓰고 마구 써대고 있으면 뭔가가 보이게 됩니다. 마치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 같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반대입니다. 자동기술이 정신분석의 영향 하에 있고 그 정신분석이 뵈르네의 방법에 기반하고 있으니까요.

 

p48. 리처드 엘먼의 방대한 전기에 확실히 쓰여 있는데, 제임스 조이스는 자신이 프로이트와 이름이 같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환희또는 향락이라는 같은 이름을 가진 두 남자가, 과장해서 말하자면 세계를 바꾼 것입니다. 아니, 과장이 아닙니다.

 

p50. 그런데 모더니즘 작가들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사람은 버지니아 울프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프로이트의 영어 표준판을 낸 제임스 스트레이치는 버지니아 울프에게 구혼한 적이 있는 작가이자 비평가인 리튼 스트레이치의 동생입니다. 또 표준판을 출판한 호가스 출판사는 울프 부부가 세운 출판사입니다.

 

p52. 최후에는 고독한 싸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이 정도의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 수필의 제목이 뭐일 것 같습니까? ‘그 책이란 무슨 책이라고 생각합니까? <로빈슨 크루소>입니다. ‘로빈슨 크루소라는 제목의 책에 대해 쓴 수필입니다. 여기서 그런 소년소녀용의 낡아빠진 책에 대해 뭘 그렇게 정색을 하느냐고 버지니아 울프에게 반문하는 사람이 있다면 반성해야 합니다.

 

p53. 로빈슨은 해변에서 발자국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놀랍니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있는 건가? 아니, 내 발자국인지도 모른다. 나는 우스꽝스럽게 자신의 발자국에 겁먹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음 날 또 그 장소에 가봤더니 발자국은 말끔히 지워져 있습니다. 무슨 일일까요?

이것은 혼자 본 것은 사실 본 것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p55. 다시 한 번 버지니아 울프의 말을 인용해보겠습니다. 그녀는 무서운 사람입니다. 시원시원하게 이런 말을 써버리니까요.

 

하지만 아무리 바람직하다 하더라도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독서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것(독서) 자체가 즐거워서 그것(독서)을 하는 즐거움은 세상에 없는 걸까요? 목적 자체인 즐거움이라는 건 없는 걸까요? 독서는 그런 것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요?

 

적어도 나는 때로 다음과 같은 꿈을 꿉니다. 최후 심판의 날 아침, 위대한 정복자, 법률가, 정치가 들이 그들의 보답 보석으로 꾸민 관, 월계관, 불멸의 대리석에 영원히 새겨진 이름 등-을 받으러 왔을 때 신은 우리가 옆구리에 책을 끼고 오는 것을 보시고 사도 베드로에게 얼굴을 돌리고 선망의 마음을 담아 이렇게 말하시겠지요. “, 이 사람들은 보답이 필요 없어. 그들에게 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사람들은 책 읽는 걸 좋아하니까.”

 

p57. 애초에 문학이란 무엇인가. ......프랑스어로 되었던, 당초에 이것은 먼저 쓰는 것, 쓰는 방법 그리고 읽고 쓰는 데 필요한 문학적 학식 일반을 의미했습니다. 다음으로 어떤 문제에 대해 공간된 저작의 총체를 의미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문헌이나 서지에 가깝겠지요.

 

예컨대 페스트에 대해서는 방대한 문학이 있다라는 용례가 보입니다. 현재 통용되고 있는 의미에서의 문학’, 즉 아름답다거나 오락을 위한 언어예술 작품으로서의 문학이라는 의미는 18세기가 되어야 나타납니다. 17세기에 출현한 미적인 문학이라는 의미를 갖는 벨 레트르라는 어휘도 있습니다.

 

p57. 좀 더 분명하게 말하지요. ‘문학이란 읽고 쓰는 기법 일반을 말했습니다.

 

p59. 라틴어의 용례를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다음과 같은 것이 밝혀집니다. 즉 문학이란 성전을 읽고, 성전을 편찬하고, 또 그것에 대한 주석을, 신학서를 쓰는 기법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아주 초기의 그리스도교에서 라틴어의 문학이라는 어휘가 사용되었던 것은 아니지만, 원칙적으로 성전을 읽고 쓰고 번역하고 편찬하는 기법을 문학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법이나 규범, 제도와 관련된 텍스트를 둘러싼 기예도 문학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문학이라 부르는 것이 현실에서 얼마나 협애한 것인지,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문학이라 부르는 것이 실제로는 얼마나 광대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지 아시겠지요.

 

p61. 그러나 역시 글을 쓴다는 것은 일종의 광기를 내포하고 있고, 따라서 기묘한 방황과 열광과 열락을 내포하며, 그리고 신도 선망하게 하는 것이었을 겁니다. 그녀가 말하는 대로 말이지요. 그리고 그것은 아직도 문학이라 불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더 넓은 의미에서. = 정보로서의 문학, 회태로서의 문학, 그리고 세계를 변혁하는 것으로서의 문학. 따라서 끝을 모르는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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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6-03-11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들 ㅡ잘 읽고 갑니다.^^

시이소오 2016-03-11 10:34   좋아요 1 | URL
방문해주셔 감사합니다^^

[그장소] 2016-03-11 10:36   좋아요 0 | URL
흐흣~^^
별 말씀을 요!^^
저만 썰렁하게 느끼는 중일까요? 안보이는 분들 많은것 같은건 ㅡ (있는 분들도 못챙기면서 !^^;)


시이소오 2016-03-11 10:38   좋아요 1 | URL
그런가요? 아직 저는 북플 새내기라 잘 모르겠어요 ㅋ^^;

[그장소] 2016-03-11 10:39   좋아요 0 | URL
아..핡 ㅡ저...저도..새내기입니다~일년 버틴!새내기!^^

시이소오 2016-03-11 10:41   좋아요 1 | URL
저는 이제 2개월 정도요^*;

[그장소] 2016-03-11 10:50   좋아요 0 | URL
일년 ㅡ금방 갑니다~!뭐했나 ㅡ싶으면 지나간 시간이네요...!2개월 ..시작이 반 ㅡㅎㅎㅎ
응원 놓고 갑니다!^^

시이소오 2016-03-11 11:10   좋아요 1 | URL
아, 그런가요?
1년 후에 `그장소`님 얼마나 따라잡을지 궁금하네요. ㅋ^^

[그장소] 2016-03-11 11:12   좋아요 0 | URL
음 ㅡ얼마든지 ㅡ내공이 있으실테니..원체 많이 읽으시기도 하잖아요!^^

시이소오 2016-03-11 11:15   좋아요 1 | URL
이거 왠지 제논의 역설과 비슷해지는건 아닐지 ㅋ
죽어도 못 따라잡는 ^^;

[그장소] 2016-03-11 11:31   좋아요 0 | URL
아ㅡ별 ...별 ㅡ말씀을 ..
제가 미칠듯한 연애에 빠져 책을 놓지 않는한 ㅡ아니면 영혼의 책이다 싶은 단 한권을 찾았어ㅡ하는 경우가 아니면..놓을일은 없겠지만 ㅡ그래도 갈지자 다이아모드 스텝이라 ㅡ잘 꼬이고 넘어져서 ..충분히 따라오실걸로..!!!

시이소오 2016-03-11 11:41   좋아요 1 | URL
10년 후를 내다보고 갑니다^^

[그장소] 2016-03-11 12:31   좋아요 0 | URL
음 ㅡ지금도 그때도 ㅡ저는 살아있다면! (응?~사람일은 모르는 것이므로)
엉뚱한 놀이에 빠져 있길 ㅡ바라는 중입니다.
책에서 빠져 나가야 ..사람노릇을 할테니..저의 경우 !^^;
응원은 공짜니..많이 놓고 갑니다.^^

시이소오 2016-03-11 12:38   좋아요 1 | URL
저도 책에서 빠져나가야 사람노릇을 할텐데... 응원 감사합니다^^

[그장소] 2016-03-11 12:45   좋아요 1 | URL
좀전에 읽은 토픽 ㅡ글
짧은 한줄로 심금울리기 ㅡ에...
사람들이 넘 감동하길래 뭔가 하고 봤더니..경기대 헤밍웨이 ㅡ라는 ...
그 문제의 한 줄은..

크리스마스에 (경기대 도서관)열람실여나요?
.
.
.
왕~왕~왕~~~( BGM은 자동)~
ㅋㅋㅋ
우리 크리스마쓰에도 책읽어요..쭉~~~~!!^^

시이소오 2016-03-11 13:28   좋아요 1 | URL
크리스마스는 가족과 함께 놀아야죠 ㅋ^^

[그장소] 2016-03-11 13:54   좋아요 1 | URL
그러니 ㅡ오죽하면 ㅡ이래저래 눈물 빼는 글로 등극을 했겠어요...저는 혼자도 별 개의치 않는 주의 입니다만~^^

oren 2016-03-11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까, 몇십 분 전에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다뉴브강의 잔물결》을 들으면서, 문득 작년 봄에 가봤던 프라하와 블타바 강과 프라하 성과, 그리고 (그의 흔적조차 전혀 발견하지 못했던) 카프카를 잠시 떠올렸었답니다. 그토록 아름다운 도시에 살았으면서도 왜 카프카는 <성>이나 <소송> 혹은 <굴>과 같은 어둡고도 답답한 소설들만 썼을까 싶은 의문도 다시금 떠올려보면서 말이지요. 그런데 카프카가 ˝초조해 하는 것은 죄다˝라는 말을 했다니 그 말의 진의가 도대체 무엇이었는지도 궁금합니다. 그가 자신의 소설 속에서 보여줬던 온갖 `아득한 미해결 상태`와 `압박`과 `불안`과 `초조` 조차도 결국 모두 다 `탈출`에 실패했기 때문에 결국 (저 말에 따르면) `유죄`로 귀결되고 마는가 싶은, 어설픈 비약까지도 해보게 되구요.

그리고, 전혀 뜻밖에도, `버지니아 울프가 학교에서 낭독했던 과제물 이야기`를 여기서 다시 마주친 것도 반갑습니다. 비록 그녀가 쓴 소설은 단 한 권도 읽어보지 못했지만 말이지요.^^

* * *

드 베리는 아주 열정적으로 책을 수집했다. 그가 소장한 책은 영국의 다른 주교들의 책을 다 합한 것보다 더 많았다. 그 책들을 침대 주변에 쌓아 두었기 때문에 책을 밟지 않고 그의 방으로 들어가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그런 행운을 감사하게 여겼던 드 베리는 학자는 아니었다. 그저 자기가 좋아하는 책을 읽기만 했을 뿐이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이 아닌 것을 그의 것이라 이야기했고 형편없는 시구를 인용하면서도 마치 오비디우스의 시구인 양 생각했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책에서는 죽은 사람들이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책에서 나는 앞으로 다가올 일들을 예견한다. 책에는 전쟁을 암시하는 전조들이 설명되며 평화의 법도 나온다. 모든 존재들은 결국에는 부패하고 썩게 마련이다. 농경의 신 사투르누스는 자신이 낳은 아이들을 삼키는 일을 그만두지 않으며, 신이 인간에게 책이라는 치유법을 내리지 않았다면 이 세상의 모든 영광은 망각 속으로 파묻혀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버지니아 울프도 학교에서 낭독한 한 과제물에서 드 베리의 주장을 그대로 되풀이했다. 버지니아 울프는 이런 글을 남겼다. ˝나는 간혹 이런 꿈을 꿀 때가 있다. 최후의 심판일이 동터 오고 위대한 정복자들과 변호사들과 정치인들이 각자의 대가-불멸의 대리석에 지워지지 않게 새겨진 그들의 왕관과 월계수와 이름-를 받게 된다면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은 베드로 쪽으로 몸을 돌리고는, 우리가 겨드랑이에 책을 끼고 오는 모습을 지켜볼 때의 그런 질투심으로 `이봐, 이들에게는 포상이 필요없어. 그들에겐 줄 것이 없어. 그들은 책 읽기를 사랑하잖아` 라고 말할 것이다.˝)

- 알베르토 망겔, 『독서의 역사』

시이소오 2016-03-11 11:58   좋아요 2 | URL
책 읽기를 사랑하시는 오렌님껜 아무것도 드릴께없네요^^

니페딘1T 2018-04-04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헐.. 이미 리뷰가 다 되어 있었네요!!! 역시!!!

이 책 너무 잼나지 않나요? ㅎㅎㅎ

이 책보고 똑같이 따라하면.... 출판사는 다 문 닫겠죠? ㅋㅋ

시이소오 2018-04-04 09:56   좋아요 0 | URL
말씀대로 넘 재밌게 읽었어요. 이건 리뷰라기보단 필사?? ㅎㅎ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왜 책을 읽어야 하는지 묻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 책을 사료처럼 던져주자.

 

책을 필사하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문장들을 잊어버리고 싶지 않아서.

둘째, 빌려온 책이기 때문에. (내 책상 위에는 항상 리뷰 대기 중인 소유한 책만 한 백 여권 정도 있다. 빌려온 책들 때문에 계속 밀린다.)

셋째, 결정적으로 리뷰가 써지지 않아서다. (필사를 하다보면 어떻게든 쓰게 된다.)

 

참 좋은데 뭐라고 표현할 방법이막막한 책들이 있다. 게다가 이 책의 경우엔 말미에 이현우의 추천 글이 실려 있다. 깔끔하다. 이 책이 어떤 책인지 알고 싶은 독자들은 추천의 글만 읽어도 감을 잡을 수 있다. 원래 계획대로 쓰자니 추천의 글과 똑같은 글이 나올 것만 같았다. 이런 상황이니 더더욱 리뷰쓰기가 힘들었다.

 

할 수 없이 필사를 했다. 그다지 두툼한 책도 아니고, 선별한 문장들만 필사를 했건만 하루 종일 걸렸다. 필사를 끝내고 나서는 기절했다. 다음 날은 저녁 약속도 펑크 내고는 하루 종일 잤다.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다.

 

책 한 권을 재독하고 필사하는데 에너지를 전부 다 소진시킨 느낌이었다.

이 책은 그런 책이다. 저자의 열광적인 문체와 주장에 호응하다보면

자신의 에너지가 바닥을 칠 정도의 책.

 

크게 보자면 책을 읽는 방법엔 다독의 길과 정독의 길이 있다.

사사키 아타루는 후자를 강조한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아이는 성경을 읽었다. 읽고, 읽고 또 읽었다.

나중에는 성경 박사가 된 루터는 물었다.

 

책을 읽고 있는 내가 미친 것일까, 아니면 이 세계가 미친 것일까.

 

그 당시엔 누구나 교황을 따르고 추기경을 따르고 대주교가 있고 주교가 있고 수도원이 있었다. 심지어 천국행 티켓을 돈을 받고 팔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읽어도 성경에 그런 건 쓰여 있지 않았다. 루터는 결국 대 이단으로 선고 받아 보름스 국회에 소환되어 주장을 철회하라는 요구를 받는다.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가 든 성구를 계속 따르겠다.” “따라서 나에게는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이 루터로부터 이른바 16세기의 종교개혁’, 혹은 독일혁명’, ‘대혁명이 시작되었다.

대혁명이란 무엇인가? 성서를 읽는 것이다.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루터에 따르면 기도이고 명상이고 시련이다.”

 

다신교를 믿던 초로의 남자가 있었다. 어느 날 목소리를 듣는다.

 

집어 들고 읽어라. 집어 들고 읽어라. 집어 들고 읽어라.”

 

그래서 그는 로마서를 읽었다. 성경을 읽은 그는 쇠망해가던 교회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

그의 이름은 사도 바울 이래 최대의 신학자가 된 성 아우구스티누스다.

 

역시나 성경을 읽던 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 앞에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난다.

예수가 그녀에게 말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너에게 마치 펼쳐진 책처럼 될 것이다.”

 

그녀가 십자가의 성 요한과 함께 개혁 운동에 나선 아빌라의 성 테레지아다.

 

문맹인 상인 앞에 대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난다. 상인은 도망친다. 그러나, 아내 하디자의 설득에 다시 가브리엘을 찾아간다. 천사가 내 이야기를 듣겠느냐?” 물어도 상인은 싫습니다.”하고 거부한다. 몇 번의 실랑이 끝에 상인이 듣겠다고 하자 천사가 말한다.

 

읽어라. 창조주이신 주의 이름으로,

아주 작은 응혈에서 사람을 만드셨다.

읽어라. 너의 주는 더없이 고마우신 분이라,

붓을 드는 법을 가르쳐주신다.

사람에게 미지의 것을 가르쳐주신다.

 

천사는 상인의 목구멍을 찢고 심장을 꺼내 씻었다. 그것을 상인의 신체에 돌려주었을 때 그의 마음은 신앙과 지혜로 가득 찼다고 한다. 그의 이름은 무함마드였다.

 

신은 무함마드에게 붓을 주고 말한다.

 

써라.”

 

그렇게 해서 쓰인 책이 책의 어머니’ <코란>이다.

무함마드와 그가 받아 적은 책 <코란>에 의해 현대 이슬람 문명이 태동했다.

 

11세기 말 피사 도서관에서 유시티니아누스 법전이 발견되었다. 무려 600년간 망각에 묻혔던 책이었다. 이후 이 책이 근대 모든 법의 원천이 된다. 중세해석자 혁명은 무엇인가? 이 책을 옮김으로써 시작되었다.

 

유스니티아누스 법전을 옮기던 당대의 법학자를 상상해보자. 이건 법전이다. 이상하게 오역하면 죽는다.

(현대 번역가들 책상 앞에 붙여 놓자) 손으로 베껴 써야 하는데 한 글자라도 틀리면 큰 소동이 벌어진다. 번역을 하고 제본, 주석, 수정, 색인을 하는데 100년이 걸린다.

 

텍스트란 곧 법이다. 그러나 텍스트는 꼭 문자를 필요치 않는다.

신체에 법과 신화를 새기면 그것 역시도 텍스트, 곧 문학이다.

르장드르, 사사키 아타루의 관점에서 춤, 음악, 연극, 노래, 회화 이 모든 것이 다 문학이다.

 

사사키 아타루는 문학의 종언, 예술의 종언, 역사의 종언, 인류의 멸망을 말한 이들을 경멸한다. 옴 진리교같은 사이비 종교. 헤겔, 코제브, 하이데거, 아감벤 같은 철학자 등등.

 

20만년 중 5천년이니 80세 수명의 인간으로 비유한다면 현 인류는 겨우 두 살에 불과하다.

문학이 끝났다고?

 

니체는 자비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40부를 찍었고 7부만 지인에게 보냈다.

세계에서 단 7.

 

19세기 문맹률은 어땠을까? 여기서 문맹률의 판단 기준은 사인을 할 수 있는가였다. 잉글랜드는 30퍼센트. 프랑스는 40~45퍼센트, 이탈리아는 70~75퍼센트, 러시아는 90~95퍼센트였다.

 

이때 러시아 작가엔 누가 있었나? 푸시킨, 고골,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투르게네프 등등. 당시 러시아 인구는 4000만 명이었다. 사인을 할 수 있는 사람이 400만 명. 즉 당시의 러시아 작가들은 0.1%에 승부를 걸었던 셈이다.

 

읽는다는 것은 혁명이다. 루소가 그랬고, 무함마드가 그랬고, 전태일이 그랬다. 전태일은 무엇을 읽었나? 근로기준법을 읽어 버리고말았다. ‘목구멍을 찢고 심장을 꺼내 씻을 정도로읽고 읽고 또 읽었다. 아무리 읽어도 하루에 15시간 일하라는 말은 어디에도 쓰여 있지 않았다. 그는 물었으리라.

 

책을 읽고 있는 내가 미친 것일까, 아니면 이 세계가 미친 것일까.

 

만일 세계가 맞다면, 법이 맞다면 책이 틀린거겠지.

결국 그는 자신이 읽은 책을 들고 자신의 몸을 성화처럼 태웠다.

그가 남긴 불씨는 이후 한국 현대사 혁명의 순간마다 불꽃처럼 타올랐다.

 

벤야민은 말했다. “밤중에 계속 걸을 때 도움이 되는 것은 다리도 날개도 아닌 친구의 발소리다.”라고.

 

발소리가 들려온다. 들리고야 말았다.

아무것도 끝나지 않는다. 아무것도 당연하지 않다. 이제 시작이다.

읽어라. 써라, 고쳐 읽어라. 고쳐 써라. 발표하라.

 

집어 들고 읽어라. 집어 들고 읽어라. 집어 들고 읽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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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잇 2016-03-11 08: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책을 씹어드시는군요.넉다운될 정도로 힘을 다하여 필사까지 하시며 책을 읽고, 리뷰를 쓰시다니.. 부끄럽네요.
쓰신 글 마지막은 주문같네요. 집어들고, 읽어야죠. 배우고 갑니다.

시이소오 2016-03-11 08:56   좋아요 2 | URL
ㅋㅋ 빌린 책이라서요. 맞습니다. 마지막은 주문입니다. 친구에게, 저에게 건네는 ^^

뽈쥐의 독서일기 2016-03-11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대체 이 책은 무엇인데 이토록 뜨거운 리뷰를 양산하는지... 아무리 얇아도 필사가 진짜 쉽지 않은데 대단하십니다. 올해가 가기 전에 이 책은 꼭 읽어봐야겠어요! 글 잘 읽었습니다.

시이소오 2016-03-11 20:55   좋아요 0 | URL
책이 뜨거우니까 리뷰들도 뜨겁나 봐요^^

깊이에의강요 2016-03-11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이소오님 리뷰를 읽으면
책이 막~~ 읽고 싶어져요^^

시이소오 2016-03-11 23:28   좋아요 0 | URL
저는 깊이에의 강요님의 댓글을 읽으면 리뷰를 더 잘 쓰고 싶어져요^^

깊이에의강요 2016-03-11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시이소오 2016-03-11 23:56   좋아요 0 | URL
^^

oren 2016-03-12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사키의 책 속 내용들을 쭈욱 읽어보니 <독서의 역사>를 쓴 알베르토 망겔의 주장과 겹치는 부분이 너무나 많아 좀 놀랍습니다. 물론 사사키의 책은 `책과 혁명`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내용뿐만 아니라 문체조차 좀 격렬한 데가 있다면, 망겔의 고찰은 훨씬 더 차분하게,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중심으로, 좀 더 일반적이면서도 드넓은 지평 위에 `독서의 역사`에 대한 폭넓은 탐색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서로는 꽤나 다르게 접근하는 책으로 볼 수도 있지 싶습니다만... 굳이 예를 들자면, 망겔의 책에선 `필사`에 대해서조차도 무려 몇십 쪽을 할애할 정도니까요... 기왕지사 말이 나왔으니 제가 베껴둔 `몇 대목`만이라도 여기에 좀 옮겨볼까 합니다.. (옮겨 붙이는 일은 참 쉬운데, 협소한 공간에 너무 길게 붙여넣는 꼴이 너무 꼴같잖아서 좀 민망하긴 합니다...)

* * *

우아한 손재능에 대한 동경

이제야 필사 시대는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는 예측에도 불구하고 인쇄술이 필사 텍스트에 대한 취향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다는 사실은 마음 속 깊이 새겨 볼 만하다.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구텐베르크와 그의 추종자들은 필사자들의 손재간을 흉내내려고 노력했다. 지금까지 전해오는 인큐내뷸러는 외관이 필사본을 쏙 빼닮았다. 15세기 말경에는, 비록 인쇄술이 확립된 터였지만 우아한 손재능에 대한 동경이 사그러들지 않았고, 서구 역사상 가장 기억할 만한 달필의 일부는 아직 미래의 일로 남아 있었다. 책을 대하기가 더 쉬워졌고, 따라서 더 많은 사람들이 읽기를 배우는 한편으로 글자를 보다 우아하고 두드러지게 쓰려고 애쓰게 되었다. 그래서 16세기는 인쇄의 시대일 뿐만 아니라 훌륭한 육필 입문서의 시대이기도 했다. 기술상의 발전이-구텐베르크의 경우처럼-그 기술로 인해 뿌리째 뽑혀 버리리라고 예상되던 것들을 제거하기보다는 오히려 발전시키는 예가 얼마나 많은지 주목하는 일은 매우 흥미롭다. 자칫 간과하거나 무시해도 좋다는 식으로 지나쳐 버릴 수 있는 전통적인 미덕에도 참다운 가치가 담겨 있음을 깨닫게 하는 대목이다.

* * *

얼마나 피나는 노력이 있어야 하는지

어느 이름 모를 필사자는 8세기 어느 때인가 필사를 끝내면서 ˝얼마나 피나는 노력이 있어야 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손가락 3개는 열심히 옮겨 적고, 두 눈은 끊임없이 보고, 혓바닥은 말을 하고, 온몸은 산고(産苦)를 치른다˝고 적고 있다. 필사자들은 일을 할 때 자신이 옮겨 적는 단어를 하나하나 발음함으로써 혓바닥으로 말을 했던 것이다.

* * *

˝책을 잡고 글을 읽으세˝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은 『고백록』의 어느 중요한 단락에서 두 가지 방식의 독서법-소리를 내는 방법과 소리를 내지 않는 방법-이 거의 동시에 이뤄지는 순간을 묘사하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우유부단함에 화가 난 나머지, 또 자신의 과거 죄에 분노를 느끼면서, 그리고 마침내 자신이 결단을 내려야 할 시간이 왔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며 그때까지 자신의 여름 정원에서 (큰 소리로) 함께 책을 읽고 있던 친구 알리피우스 곁을 빠져 나와 무화과 나무 밑으로 몸을 던져 흐느껴 울었다. 바로 그때 근처의 어느 집에서 어린이(소년인지 소녀인지, 그는 밝히지 않았다)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는데, 그 노래의 후렴이 ˝책을 잡고 글을 읽으세˝였다. 그 노랫소리가 자신을 향한 것이라 믿었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알리피우스가 아직도 꼼짝 않고 앉아 있는 곳으로 다시 달려가 미처 다 읽지 못했던 바울의 『사도행전』한 권을 집어들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나는 그 책을 집어 펼친 뒤 시선이 가장 먼저 닿은 첫 부분을 소리내지 않고 읽었다˝고 말한다. 그가 소리내지 않고 읽은 단락은 로마서 13장으로, ˝육신을 위해 양식을 준비하지 말고 그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갑옷처럼` 걸쳐라˝라는 훈계였다. 혼비백산한 그는 문장의 끝에 이른다. `믿음의 빛`이 그의 가슴에 충만하고 `회의의 어둠`은 말끔히 걷힌다.

* * *

3번이나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나는 학창 시절에 읽었던 『고백록』을, 나의 라틴어 선생이 다른 어떤 시리즈보다 좋아했던, 오렌지색 표지에 두께가 얄팍했던 로마 고전판을 지금도 가지고 왔다. 그 책을 손에 쥔 채 여기 이렇게 서 있노라니 언제나 주머니 크기만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책을 품고 다녔던 저 위대한 르네상스 시인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와 어떤 동료 의식까지 느끼게 된다. 『고백록』을 읽을 때면 아우구스티누스가 다정스레 속삭이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다던 그는 인생 말년에 가까워서는 그 성인과 상상 속에서 3번이나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그의 사후에 출간된 『나의 비밀』이 그것이다.

* * *

페트라르카

아우구스티누스와 마찬가지로 페트라르카도 젊은 시절에 꽤 혼란스런 삶을 살았다. 단테의 친구였던 그의 아버지는 단테처럼 자신의 고향 피렌체에서 추방당해 페트라르카가 태어나자마자 가족들을 아비뇽에 있던 클레멘스 5세 교황의 궁정으로 옮겨야 했다. 페트라르카는 몽펠리에와 볼로냐의 대학들을 다녔으며 아버지가 죽고 스물두 살이 되었을 때는 다시 아비뇽에 정착했다. 이때 그는 이미 돈 많은 젊은이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부(富)도 젊음도 그렇게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방탕한 생활 몇 년 만에 그는 아버지가 물려준 유산 대부분을 탕진하고 어느 수도원으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곳에서 발견한 키케로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책들은 새로 서품을 받은 성직자의 말에 잠재해 있던 문학 취미를 일깨워 주었고, 그는 여생을 걸신들린 듯이 책을 읽어댔다.

그는 30대 중반에 두 개의 작품 『저명한 남자에 대하여』와 시 『아프리카』를 창작하면서 신중하게 글쓰기를 시작했다. 이들 작품에서 그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작가들에게 많은 신세를 지고 있다고 실토했으며, 이 작품으로 그는 로마의 국민과 상원으로부터 월계관을 얻는 영광을 누렸다.

* * *

책이 손을 떠나자마자 그 책에 대해 느꼈던 모든 감정도 눈 녹듯 사리지고 마는걸요

『나의 비밀』에서 페트라르카(그의 기독교 이름인 프란체스코로)와 아우쿠스티누스는 `진리 부인`이 뚫어져라 지켜보는 가운데 어느 정원에 앉아 대화를 나눈다. 프란테스코가 자신은 도시의 공허한 번잡스러움에 지쳐 있다고 고백한다. 그러자 아우구스티누스는 프란체스코의 삶에 대해, 시인인 프란체스코의 서재에 꽂혀 있는 책 가운데 한 권이긴 하지만 아직 프란체스코가 어떤 식으로 읽어야 할지 방법을 모르고 있는 책과 같다고 대답하면서 그에게 미쳐 버릴 만큼 성가시게 구는 군중을 주제로 한 텍스트를 몇 권 상기시킨다. 그 중에는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의 것도 들어 있다. ˝이런 책들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라고 아우구스티누스가 묻는다. 그 질문에 프란체스코는 책을 읽을 때는 매우 유익하지만 ˝책이 손을 떠나자마자 그 책에 대해 느꼈던 모든 감정도 눈 녹듯 사리지고 마는걸요˝ 라고 대답한다.

아우구스티누스 : 그런 식의 독서는 지금 매우 보편적이라네. 학식 있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으니까. ······ 하지만 자네가 적절한 여백에 약간의 메모를 간결하게 적어 놓으면 아마 독서의 열매를 쉽게 즐길 수 있을 걸세.

프란체스코 : 어떤 종류의 메모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우구스티누스 : 책을 읽다가 자네의 영혼을 뒤흔들거나 유쾌하게 만드는 경이로운 문장을 마주칠 때마다 자네의 지적 능력만을 믿지 말고 억지로라도 그것을 외우도록 노력해 보게나. 그리고 그것에 대해 깊이 명상하여 친숙한 것으로 만들어 보라구. 그러면 어쩌다 고통스런 일이 닥치더라도 자네는 고통을 치유할 문장이 마음 속에 새겨진 것처럼 언제든지 준비되어 있음을 깨닫게 될 걸세. 자네에게 유익할 것 같은 어떤 문장이든 접하게 되면 분명히 표시해 두게. 그렇게 하면 그 표시는 자네의 기억력에서 석회의 역할을 맡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멀리 달아나고 말 걸세.

(페트라르카의 상상력으로 보면) 아우구스티누스가 암시하는 독서법은 분명히 새로운 것이었다. 사고를 위한 버팀목으로 책을 이용하지도 않고, 또 사람들이 현인의 권위를 믿는 것처럼 책을 믿지도 않으면서, 책에서 사고와 문장과 이미지를 취한 뒤에 그것을, 오래 전부터 머리 속에 담고 있던 다른 텍스트로부터 정제해 낸 또 다른 사고나 이미지와 연결시키고, 거기다가 독서가 자신의 독특한 사상을 곁들여서 사실상 전혀 새로운 텍스트를 창조해 내는 독서 방법이었다.

* * *

다른 독서 경험을 기억해 냄으로써만

페트라르카의 말을 빌리면 이런 독서법도 그 자신이 `신성한 진실`이라 부르는 그 어떤 것을 고려하다 우연히 터득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그가 말하는 `신성한 진실`이란 책장의 유혹에도 전혀 흔들임 없이 자신의 길을 선택하고 해석해 내기 위해 독서가들이 꼭 갖춰야 하는 감각이었다. 어떤 텍스트를 평가하는 데는 심지어 작가의 의도마저도 특별한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이런 작업은 독서가 자신이 다른 독서 경험을 기억해 냄으로써만 가능하며, 그런 기억을 통해 작가가 책장에 담은 기억이 자연스레 흘러 나온다고 페트라르카는 암시한다.

* * *

마치 호수의 물 위에 쓰여진 것처럼

읽혀지고 기억되는 하나의 텍스트는, 구원이라 이름할 수 있는 그런 반복 독서에서는 마치 내가 오래 전에 기억했던 그 시에 등장하는 얼어붙은 호수-대지만큼이나 단단해서 독서가의 횡단을 받쳐 줄 수 있다-같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 텍스트의 유일한 존재의 터가 마음 속이기 때문에 글자들은 마치 호수의 물 위에 쓰여진 것처럼 늘 불안정하고 유동적이다.

시이소오 2016-03-12 00:08   좋아요 2 | URL
북풀로 읽다가 아무래도 컴으로 다시 읽어야겠어요. 오렌님 사이트가서 복습도 하고 망엘 혹은 망구엘 책도 읽어봐야겠네요
밤의 도서관은 읽는 중이에요^^

머털이 2016-03-12 0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훅! 하고 강하게!! 궁금하네요...👍👍

시이소오 2016-03-12 01:54   좋아요 0 | URL
목적 달성이네요 ^^

니페딘1T 2017-10-02 0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좋을 글에 전율이 입니다. 감사합니다.

시이소오 2017-10-02 09:21   좋아요 0 | URL
이 책 자체가 전율입니다. 니페딘님 제가 고맙습니다^^
 

P162. 미국 독립선언문은 이렇게 단언한다.

 

우리는 다음의 진리가 자명하다고 믿는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으며, 이들은 창조주에게 생명, 자유, 행복의 추구를 포함하는 양도 불가능한 권리를 부여받았다.”

 

P166. 볼테르는 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 하인에게 그 이야기를 하지는 마라. 그가 밤에 날 죽일지 모르니까.”

 

P170. 인문학과 사회과학은 상상의 질서가 정확히 어떻게 삶이라는 직물 속에 짜 넣어졌는지를 설명하는 데 많은 에너지를 쏟는다.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조직화하는 질서가 자신들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만드는 주요 요인은 세 가지이다.

1. 상상의 질서는 물질세계에 단단히 뿌리 내리고 있다.

2. 상상의 질서는 우리 욕망의 형태를 결정한다.

3. 상상의 질서는 상호 주관적이다.

 

P173. 낭만주의는 우리에게 인간으로서 잠재력을 최대한 활용하려면 최대한 다양한 경험을 해야 한다고 속삭인다..... 이 모두를 실행하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반복되는 일상과 친숙한 환경에서 벗어나 먼 지방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다양성을 권하는 낭만주의는 소비지상주의와 꼭 들어맞는다.

 

P211. 부당한 차별은 시간이 흐르면서 개선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심해질 수 있다. 돈은 돈 있는 자에게 들어오고, 가난은 가난뱅이를 방문하는 법이다. 교육은 교육받은 자에게, 무지는 무지한 자에게 돌아가게 마련이다. 역사에 한번 희생자가 된 이들은 또다시 희생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대부분의 사회정치적 차별에는 논리적, 생물학적 근거가 없으며, 우연한 사건이 신화의 뒷받침을 받아 영속화한 것에 불과하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훌륭한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이다.

 

P246. 기원전 첫 밀레니엄 동안, 보편적 질서가 될 잠재력이 있는 후보 세 가지가 출현했다.


1. 경제적인 것, 화폐 질서

2. 정치적인 것, 제국의 질서

3. 종교적인 것,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

 

P308. 우리에게 알려진 최초의 일신교는 기원전 1350년 경 이집트에서 나타났다. 파라오 아케나텐은 이전까지 이집트 만신전에서 그저 그런 위치를 차지하던 아텐신이 사실은 우주를 지배하는 최고 권력이라고 선언했다.

 

P313. 이신교는 이른바 악의 문제에 간명한 해답을 주기 때문에 매우 매력적인 세계관이다. 이 유명한 문제는 인간의 사상에서 가장 근본적 관심사 중 하나다. “세상에는 왜 악이 존재할까? 왜 고통이 존재할까? 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까?” 일신론자들은 이런 물음에 대답하려면 지적인 곡예를 부려야만 했다.

 

널리 알려진 하나의 설명에 따르면, 이것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하는 신의 방식이라고 했다. 악이 없다면 인간은 신과 악 사이에서 선택할 필요가 없으므로 자유의지도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직관에 반하는 답으로서, 즉각 수많은 새로운 의문을 낳는다. 자유의지는 인간에게 악을 선택하도록 허락한다. 많은 사람이 실제로 악을 택하며, 일신교의 정통적 설명에 따르면 이런 선택은 반드시 신의 벌을 부른다. 그러나 만일 그 인물이 자유의지로써 악을 선택하고, 그 결과로 지옥에서 영원한 고통을 받게 된다는 것을 신이 미리 알았다면, 신은 왜 그를 창조했을까? .....아무튼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일신론자들이 악의 문제에 쩔쩔매고 있다는 것이다.

 

P314. 요약하면, 일신론은 질서를 설명하지만 악 앞에서 쩔쩔맨다. 이신론은 악을 설명하지만 질서 앞에서 당황한다. 이 수수께끼를 해결하는 논리적 방법이 하나 있다. 온 우주를 창조한 전능한 유일신이 있는데 그 신이 악한 신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신앙을 가질 배짱이 있는 사람은 역사상 아무도 없었다.

 

P321. 고타마는 집착 없이 실체를 있는 그대로 느끼게끔 훈련하는 일련의 명상기법을 개발했다. 이 방법은 우리 마음이 지금과 다른 어떤 경험을 하고 싶은가?”보다 지금 나는 무엇을 경험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온 관심을 쏟도록 훈련시킨다.

 

P327. 인본주의


1. 자유주의적 인본주의

2. 사회주의적 인본주의

3. 진화론적 인본주의


오늘날 가장 중요한 인본주의 분파는 자유주의적 인본주의다.. 자유주의적 인본주의의 주된 계명들은 이런 내면의 목소리가 지닌 자유를 침입이나 손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계명들을 통칭하여 인권이라고 부른다.

 

P328. 그런데 영원한 영혼과 창조주 하나님에 의지하지 않을 경우, 자유주의자로서 사피엔스 개개인이 뭐 그리 특별한지를 설명하기가 당황스러울 정도로 어려워진다.

 

또 다른 중요한 분파는 사회주의적 인본주의다. 사회주의자들은 인간성이 개인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집단적인 것이라고 믿는다....자유주의적 인본주의가 개개인의 최대한의 자유를 추구하는 데 반해, 사회주의적 인본주의는 모든 인간의 평등을 추구한다. 사회주의자에 따르면 불평등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최악의 모독이다.

 

P329. 전통적 일신론의 속박에서 벗어난 유일한 인본주의는 진화론적 인본주의로, 가장 유명한 예는 국가사회주의, 즉 나치다. ...인류를 보편적이고 영원한 무엇이 아니라 진화하거나 퇴화할 수 있는, 변하기 쉬운 종으로 보았다. 인간은 초인으로 진화할 수도, 인간 이하로 퇴화할 수도 있었다.

 

P332. 나치는 인간을 혐오하지 않았다. 나치가 자유주의적 인본주의, 인권, 공산주의와 싸운 것은 그들이 오히려 인간을 찬양하며 인류의 위대한 잠재력을 믿었기 때문이다.

 

(사사키 아타루의 책에 따르면 유발 하라리의 관점은 반 쯤 진실이다. 인류의 위대한 잠재력을 믿었다기보다는 오로지 히틀러 자신만을 위버멘쉬로 믿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이는 예컨대 미셀 푸코도 강의에서 극명하게 지적하고 있고, 피에르 르장드르도 분명히 독일 국가의 절대적 자살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실제로 히틀러는 총통명령 전문 71호에서 이 세상의 다른 모든 민족을 멸망시키라는 명령을 내리는 동시에 독일인의 생존 조건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역시 자신의 죽음의 순간과 모든 타자, 모든 세계의 죽음의 순간과 일치시키는 것을 절대적 향락으로 꿈꾸었던 것입니다.

 

- 사사키 아타루,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P173.

 

P340. 역사는 결정론으로 설명될 수도 예측될 수도 없다. 역사는 카오스적이기 때문이다. 너무나 많은 힘이 작용하고 있으며, 이들 간의 상호작용은 너무 복잡하므로, 힘의 크기나 상호작용 방식이 극히 조금만 달라져도 결과에는 막대한 차이가 생긴다.

 

역사는 이른바 2단계 카오스계다. 카오스계에는 두 종류가 있다. 1단계 카오스는 자신에 대한 예언에 반응을 하지 않는 카오스다. 가령 날씨는 1단계 카오스계다. 날씨는 무수히 많은 요인의 영향을 받지만, 우리는 점점 더 많은 요인을 고려하는 컴퓨터 모델을 만들어 점점 더 정확하게 예보할 수 있다.

 

2단계 카오스는 스스로에 대한 예측에 반응하는 카오스다. 그러므로 정확한 예측이 불가능하다. 시장이 그런 예다. .....정치도 2단계 카오스계다.

 

P342. 그러면 왜 역사를 연구하는가? 물리학이나 경제학과 달리, 역사는 정확한 예측을 하는 수단이 아니다. 역사를 연구하는 것은 미래를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서다. 우리의 현재 상황이 자연스러운 것도 필연적인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그 결과 우리 앞에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P344. 문화는 다른 사람을 이용하기 위해 일부 사람들이 꾸며낸 음모가 아니다. 그렇다기보다는 우연히 출현해서 자신이 감염시킨 모든 사람을 이용하는 정신의 기생충에 더 가깝다. 이런 접근법은 때로 문화 구성요소학, 혹은 밈 연구라고 불린다.

 

유기체의 진화가 유전자라 불리는 유기체 정보 단위의 복제에 기반을 둔 것과 마찬가지로, 문화적 진화는 이라 불리는 문화적 정보 단위의 복제에 기반을 두고 있다.


P356. 하지만 현대과학은 과거의 모든 전통 지식과 다음 세 가지 점에서 결정적으로 다르다.

 

1. 무지를 기꺼이 인정하기.

현대 과학은 라틴어로 표현하면 이그노라무스Ignoramus 우리는 모른다에 기반을 두고 있다.

2. 관찰과 수학이 중심적 위치 차지

3. 새 힘의 획득 .

 

p383. 최근 유전공학자들은 예쁜꼬마선충의 평균 수명을 두 배로 늘리는 데 성공했다. 나노공학자들은 수백만 개의 나노 로봇으로 구성된 생체공학적 면역계를 개발 중이다. 그 로봇들은 우리 몸속에 살면서 막힌 혈관을 뚫고, 바이러스와 세균과 싸우고, 암세포를 제거하며, 심지어 노화과정을 되돌릴 것이다. 몇몇 진지한 학자들은 2050년이 되면 일부 인류는 죽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p441. 스미스는 경제를 -윈 상황으로 생각하라고 사람들에게 가르쳤다. .....스미스의 이론에서, 사람들은 잉이웃의 것을 빼앗아서 부자가 되는 게 아니라 전체 파이의 크기를 늘림으로써 부자가 된다. 파이가 커지면 모두에게 이익이다....하지만 이 모든 것에는 전제가 있다. 부자가 자신의 수익을 비생산적인 활동에 낭비하지 않고 공장을 새로 세우고 사람들을 새로 고용하는 데 쓴다는 전제다. 그래서 스미스는 수익이 늘면 지주나 직공은 더 많은 조수를 고용할 것이다.”라는 말을 주문처럼 되풀이할 뿐.....

 

(알려져 있다시피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들은 좀 더 값싼 노동력을 찾아 국경을 넘는다. 현 시점에 가장 저렴한 노동력을 제공하는 곳은 말리다.)


p457. 1717년 미시시피 하류의 연안 지대는 늪지와 악어를 제외하면 그다지 매력이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미시시피 사는 여기에 엄청난 부와 무한한 기회가 있다고 떠벌렸다. ....애초에 한 주에 50리브르에 발행되었다. 122일이 되자 주식은 한 주당 1만 리브르를 돌파했다.....며칠 지나지 않아 공황이 시작되었다. 매도 물량이 늘어나자 가격이 내려가기 시작했다. .....

 

프랑스 중앙은행은 가격을 안정시키키 위해 총재인 존 로의 지시에 따라 미시시피 주식을 구매 했지만, 영원히 매수를 계속할 수는 없었다......존 로는 돈을 더 찍어내도록 인가했다. 중앙은행이 주식을 더 살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큰손 투기꾼들은 제때 주식을 판 덕분에 대체로 큰 손실 없이 벗어났지만, 개미들은 모든 것을 잃었다. 자살하는 사람이 속출했다.

 

p464. 이런 견해에 따르면, 가장 현명한 경제정책은 정치를 경제로부터 분리하고, 과세를 줄이고, 정부 규제를 최소화하며, 시장의 힘이 자유롭게 제 갈 길을 가도록 하는 것이다.

(한국 현 정부와 어용 경제학자들의 논리)

 

시장은 그 자체만으로는 사기, 도둑질, 폭력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다. 속임수를 제재하는 법을 만들고, 그 법을 집행할, 경찰, 법원, 교도소를 설립하고 지원함으로써 신뢰를 보장하는 것은 정치체제가 할 일이다. 왕이 시장을 적절히 규율하는 업무에 실패하면 신뢰의 상실, 신용의 축소, 경기침체로 이어진다. 우리가 1719년 미시시피 버블에서 배운 교훈이 이것이었다. 혹시 잊은 사람이 있었다면 2007년 미국의 주택시장 버블과 그 결과로 일어난 신용 붕괴와 불황이 상기시켜주었을 것이다.

 

p569. 최근 러시아, 일본, 한국 과학자로 구성된 연구진은 시베리아의 얼음 속에서 발견된 매머드의 유전자 지도를 작성하는 작업을 완료했다. 이제 이들은 현생 코끼리의 수정란에서 코끼리 DNA를 제거하고 매머드에서 복원한 DNA를 삽입한 뒤 그 수정란을 암코끼리의 자궁에 다시 집어넣는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앞으로 22개월 후에는 지난 5천 년 사이에 처음으로 매머드가 태어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으로 이들은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매머드만으로 끝낼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최근 하버드 대학교의 조지 처치 교수는 이제 네안데르탈인 유전체 프로젝트가 완성되었으니 복원한 DNA를 사피엔스의 난자에 이식할 수 있고, 그러면 지난 3만 년 이래 처음으로 네안데르탈인 아기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P572. 미국의 군사 연구기관인 국방고등연구기획청DARPA은 곤충 사이보그를 개발 중이다.

 

2006년 미 해군잠수전센터는 사이보그 상어를 개발하겠다는 의도를 발표했다.

 

P573. 최첨단 보청기는 바이오닉 귀라고도 불린다. 귀에 이식된 이 장치는 귀의 바깥에 장치된 마이크로폰을 통해 소리를 흡수한다. 장치는 소리를 걸러서 인간의 목소리를 식별하고, 이를 전기신호로 번역한다. 신호는 중추 청각신경으로, 다시 뇌로 전달된다.

 

미 정부가 후원하는 독일 회사인 망막 임플란트는 시각장애인이 부분적으로라도 볼 수 있도록 망막에 삽입하는 장치를 개발 중이다.

 

미국의 전기 기술자인 제시 설리반은 2001년 사고를 당해 두 팔을 완전히 잃었다. 오늘날 그는 시카고 재활연구소의 도움 덕분에 두 개의 생체공학 팔을 사용한다.

 

P575. 또 다른 붉은털 원숭이 아이도야는 2008년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노스캐롤라이나의 의자에 앉아서 일본 쿄토에 있는 생체공학 다리 한 쌍을 생각으로 제어했던 것이다. 두 다리는 아이도야보다 스무 배 무거웠다.

 

P576. 생명의 법칙을 바꾸는 제 3의 방법은 완전히 무생물적 존재를 제작하는 것이다.

 

P576.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완전히 새로운 디지털 마음을 창조한다면 어떨까? 컴퓨터 코드로만 구성된 그 마음이 자아의식, 의식, 기억을 다 갖추고 있다면? 이 프로그램을 컴퓨터에서 실행하면 그것은 인격체일까? 그것을 지우면 살인죄로 기소될까?

 

2005년 시작된 블루브레인 프로젝트는 인간의 뇌 전부를 컴퓨터 안에서 재창조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만일 성공한다면, 이것은 생명이 비유기물의 영역으로 뛰어 들어온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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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가 2016-03-10 08: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님 정리는 핵심을 잘 집어주셔서 책 안사도 님 정리보면 다될듯 얄밉다 님 능력

시이소오 2016-03-10 08:47   좋아요 1 | URL
ㅋㅋ 안그래요. 정리 개념으로 적기보단 인상적인 문구만 적어 놓았습니다. 아마도 민정식님이 책을 읽으셔서 그렇게 느끼실지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