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달엔 무조건 마흔여섯 권을 읽어야 했습니다. 30일 저녁, 마흔 여섯권을 읽었으리라 예상하고 카운팅을 했더니 마흔 세 권. 이럴수가. 여러 책을 번갈아 읽고, 중간에 읽다 만 책들이 있다 보니 예상과 달리 세 권이 모자랐어요.

 

아침 6시까지, 읽고 있던 <캐럴><축복받은 집>을 완독했습니다. 마흔 다섯 권.

이제 한 권만 읽으면...... 일단은 잤어요.

 

자고 일어나, 책 세 권을 가방에 집어넣고 미팅 시간에 맞춰 헐레벌떡 나갔습니다.

그런데, 지인의 전화를 받고 나서야 미팅 날이 내일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이런 젠장. 날짜로 말해주지. 요일로 말해 줘가지고는, 헷갈리게.’

3.31일과 41일을 어느 누가 헷갈려하겠습니까?

 

목요일과 금요일을 헷갈린 자기 잘못인줄 알면서도 엉뚱한 소릴 지껄여가며 집으로 돌아가려다 아무래도 억울했습니다. 교통비가 얼만데요?!

억울해서 서점엘 갔습니다.

 

책들을 둘러보다 굿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그래, 여기서 한 권을 마저 읽자.’

 

교보문고에 새로 설치된 큰 책상 앞에 앉아, 돈 주고 사긴 아까운 책들을 골라 읽었습니다.

몇 권 읽었냐구요. 다섯 권 읽었습니다. 두둥 ^^



<나이 서른에, 3,000권을 읽어봤더니> 같은 책들은 30분이면 읽을 수 있습니다.

, 건질 게 하나도 없는 책도 있다니!’

 

김 모 작가는 3년에 만권 읽었다고 우깁니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는데, ‘머릿속에 아무것도 담을 게 없는이런 책들만 읽었다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만권은 무슨, 2만권도 읽겠어요.

 

이 달에 꼭 마흔여섯 권을 읽어야 할 이유가 있었습니다.

마흔 여섯 권을 읽으면 24개월, 2년 동안 총 700권 독서가 되거든요.

 

‘2699’권이면 너무 억울할 것 같았습니다.

이게 무슨 백화점 세일 가격표가 아니잖아요?

 

미팅 날짜를 오해한 건 신의 계시였을까요?

그래, 옛다, 700?’

 

 

이 달 읽은 50권 중에 사서 읽은 책은 쉼보르스카의 <충분하다>가 유일하네요.

 

책을 사서 읽으란 주장들이 있습니다. 동의합니다. 작가를 위해서도 출판사를 위해서도

사서 읽어야죠. 잡지 <뿌리깊은 나무> 대표 고 한창기 사장님은 생전에 이렇게 말하셨다죠.

 

남자가 뜻을 품었으면 돈을 낙엽처럼 태워라!”

 

, 어찌나 멋있던지. 돈을 낙엽 태우듯 책을 사 읽었습니다. 돈은 낙엽보다 빨리 없어지더군요. 저 역시 계속 사서 읽고 싶습니다. 그런데 제가 저 700권의 책들을 전부 사서 읽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이혼이죠. 가뜩이나 돈도 못 버는데. 우리 사장님, 임금 삼개월 째 체불 중인데 오늘 계좌로 또 3.3프로 뗀 50만원 보내셨네요. 이게 몇 번짼지.

사장님, 새 모이주시나요?? 사장님 나빠요.

(알라딘 중고 서점가서 간서치 이덕무 마냥 맹자 팔아서 쌀 사려고 했어요. 맹자 하나 갖고 어림없겠죠? 공자님도 끼워 팔구, 장자님도 소유욕이 없으시니 덩달아 팔구..... )

 

또 이야기가 곁가지로 샜네요. 돈을 낙엽처럼 태워 책을 사 읽으시되 저처럼 만권이 목표이신 분들은 주변 도서관도 활용해 보시라구요. (도서관 대출 권수 840권이네요. 사서님들, 미안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년동안 목표율 0.7프로 달성했습니다. ^^

 

이달의 책 후보는 김용규의 <데칼로그>, 매튜 퀵의 <러브 메이 페일>, 줌파 라히리의 <축복받은 집>입니다. 객관적으론 줌파 라히리의 <축복받은 집>을 뽑아야겠죠? <저지대>를 읽고 그다지 기대하지 않았는데 이웃님들 칭찬 릴레이가 펼쳐지길래 궁금해서 읽었습니다. ‘경이적인 데뷔작이란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더군요. (줌파 라히리와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위주로 왜 대다수 한국 단편 소설들이 신춘문예용소설인지 비교, 분석하는 글을 쓰고 싶어지네요.)

 

그럼에도 이달의 책으로 매튜 퀵의 <러브 메이 페일>을 뽑고 싶어요.

마지막 장을 덮으며 절로 입 밖으로 이런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매튜 퀵, 이 미친 새끼!”

그 순간 저는 울고 있었죠.


매튜 퀵 소설을 읽을 땐 연신 낄낄대다 마지막장을 덮을 땐 언제나 눈물이 납니다.

다른 분들도 그러신지? 궁금하네요. ^^

 

이달엔 어디 니가 얼마나 읽나 보자할 정도로 도서관에서 끊임없이 책 찾아가라고 연락이 오더군요. 신청도서, 예약도서 읽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다음 달엔 도로 고전에 도전해야겠습니다. ^^

 

4월이네요. 책 읽기엔 잔인한 달이죠.

독서보다는 봄을 즐기시는 게 어떨지요?

행복한 봄날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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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adhi(眞我) 2016-04-01 12: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뜨허 어마어마한 독서량이네요. 저는 오래 살기 싫었는데 죽기 전에 만 권 읽어보게 오래 살자 그랬는데 그것(만 권 읽기)도 쉽지 않을 듯해서 사는 동안 좋은 책만 골라 읽자로 바꿨어요.

시이소오 2016-04-01 12:56   좋아요 1 | URL
만 권읽을 만큼
만수무강하셔야죠 ^^

samadhi(眞我) 2016-04-01 12:57   좋아요 1 | URL
헉 만수무강 =_=

시이소오 2016-04-01 13:01   좋아요 1 | URL
운을 맞추려다 보니, 그럼 백세까지만 백수무강 하소서^^

samadhi(眞我) 2016-04-01 13:04   좋아요 1 | URL
그냥 책 놔두고 갈랍니다 ㅎㅎ

시이소오 2016-04-01 13:06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

[그장소] 2016-04-01 19: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마무지 엄청나게 읽으시네요..^^
열심히 쫓아 오시라고 저는 게으름을 부렸는데...하루 한권 도 요즘은 벅차요..날씨탓을 짓궂게 해봅니다.
저도 교차하면서 읽기 하는데...하루 5권이 한계 ..인것같아요.
읽고 쓰고 읽고 쓰면 ㅡ중간에 김빠져서 쉬엄쉬엄 읽게됩니다.
그래도 그렇게 읽어야 기억이 잘나요..물론 저도 어마무시한 속도로 잊습니다만 ....ㅎㅎㅎ응원 놓고 가요!^^

시이소오 2016-04-01 19:01   좋아요 1 | URL
어마무지 빨리 잊어버려요 ^^; 응원 감사합니다^^
그장소님 경보 잊지마세요. 하루 다섯권은 넘하잖어요 ㅎㅎ
저 다리 찢어집니당 ^^

[그장소] 2016-04-01 19:12   좋아요 1 | URL
허어 ㅡ잘 읽힐때 입니다...지금은 한권도 벅차당께요~!!^^;;
우동한 그릇 ㅡ이것도 한 십분 걸리는데 10분 울먹거린다는게 함정 ㅡ~^^

곰곰생각하는발 2016-04-01 18: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 꽃들에게 희망을 추천합니다... 이거 10분이면 돌파할 수 있습니다..

시이소오 2016-04-01 18:59   좋아요 2 | URL
이런 책 많이 추천해주세요. 저도 3년동안 만권 읽게요 ㅋㅋ^^

곰곰생각하는발 2016-04-01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쪽팔리지만 저도 책 정해 놓고 목표치에 도달하지 않으면 10분이면 돌파할 수있는 책 일부러 읽고 그랬슴돠.. 흑흑흑....

시이소오 2016-04-01 19:16   좋아요 0 | URL
누가 욕하겠어요? `억울하면 당신도 읽으세요` 하면 되죵 ㅋ ^^

고양이라디오 2016-04-02 0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이소오님 부럽습니다^^ 앞으로도 열독하시고 좋은 책 많이 소개해주세요.

그리고 책을 빨리 읽으시나요? 서점에서 5권이라니ㅎㄷㄷ 대충 속독으로 훑어보기도 하시는 건가요?

시이소오 2016-04-02 08:40   좋아요 0 | URL
저 책들 경우 빨리 읽었어요. 속독 못해요. 격려 감사합니다 ^^
 
데칼로그 - 김용규의 십계명 강의
김용규 지음 / 포이에마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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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규는 <백만장자의 질문>이란 책으로 재벌에 부역하고 혹세무민하였으므로 별점을 깍는다. 

 

20대 때 니체를 읽고 나 역시 니체를 따라 안티 크리스트를 선언했다.

그런 내가 십계명에 관한 책을 읽을 줄이야!

 

강석경의 <저 절로 가는 사람>을 읽고선 당장 삭발하고 출가하고 싶었다.

반면 이 책을 읽고선 당장 교회로 달려가 십자가 앞에 무릎 꿇고 기도드리고 싶었다.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었다. 찬송하고 싶었다.

, 주여~ 전능하신 하나님!!’

 

나는 모태신앙이었다. 어릴 때부터 일요일에 교회에 가는 건 평일에 학교 가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었다. 교회가면 좋았다. 먹을 것도 주고, 예쁜 교회 여동생도 있고, 교회 누나도 있고, 계란 먹는 부활절도 좋았고, 크리스마스 때면 부모님 허락 하에 밤을 샐 수 있는 새벽송도 좋았고, 성가대 활동도 좋아했다. (, 가스펠 송을 얼마나 좋아했던가)

 

그럼에도 나는 무신론자가 되고 말았다. 내가 기독교에 의구심을 갖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성경 탓이었다. 머리가 커지면서 도무지 성경을 제정신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신이라는 자가 허구헌날 전쟁 일으켜 사람 죽이기 바쁘다. 잔인하긴 이루 말할 수 없다. 툭하면 시기하고 질투한다. 찬양하라고? 인간도 개나 고양이를 키우며 나를 찬양해! 찬송해!’라고 하지 않는다. 전지전능한 신이라면 피조물의 찬양 따위가 무엇 때문에 필요할까? 오로지 허영심 때문이다. 욥을 보아라. 열심히 믿으면 뭐하나? 신은 사탄의 한 마디에 혹해서 죽어라고 괴롭힌다. 사랑은 개뿔. 살인하고, 잔인하고, 질투하고, 귀가 얇고, 의심하고, 시험하고.

 

이 신과 가장 흡사한 인간 성격 유형을 뭐라 하는가?

팜므파탈이다. 신은 남자인가? 그렇다면 옴므파탈’.

한국말로 하자면 양아치, 조폭, 깡패, 불한당이다.

 

초기 라틴교부 테르툴리아누스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을 수가 없다.

정말 믿고 싶다.......죽도록 믿고 싶은데.....

 

빌려온 책들엔 낙서를 할 수 없어 조그마한 포스트 잇을 붙여놓는다. , 겨우 일계명 읽는데 거의 매 페이지마다 포스트 잇을 붙였다. 포기했다. 매 페이지마다 붙이면 도대체 왜 붙인단 말인가. 필사 포기다. 일주일은 걸릴 것 같다.

 

단 한 번도 십계명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토록 많은 학자들이 십계명을 연구했다니! 김용규는 크쥐스토프 키에슬롭스키의 연작 드라마 <데칼로그>에서 책의 영감을 얻었다. 그는 드라마 <데칼로그>를 매개로 십계명에 대한 존재론적 해석을 시도한다.

그렇다면 십계명을 한 번 불러볼까.

 

1

 

1: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출애굽기 20:3)

2: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출애굽기 20:3 ~6)

 

3: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출애굽기 20: 7)

4: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으니라 (출애굽기 20: 8~11)

 

2

 

5: 네 부모를 공경하라.....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갈리라 (출애굽기 20: 12)

6: 살인하지 말라 (출애굽기 20: 13)

7: 간음하지 말라(출애굽기 20: 14)

8: 도둑질하지 말라 (출애굽기 20: 15)

9: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출애굽기 20:16)

10: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출애굽기 20:17)

 

1판이 신과 인간의 관계라면 2판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다. 이 열 계의 계명이 추후 율법학자들에 의해 613개까지 확대되었다. ‘안식일에 아이를 안아도 되지만 돌을 든 아이를 안으면 안 된다는 둥 십계명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기는커녕 족쇄이자 사슬이었다. 김용규는 크뤼제만의 사회학적 해석을 토대로 존재론적 해석을 시도한다.

 

예흐예 아세르 예흐예신은 자신의 이름을 모세에게 말했다. ‘나는 있다, 나는 존재한다로 해석된다. 저자는 이러한 있음. 존재에 주목한다. 야훼는 그는 있다라는 뜻이다.

존재는 존재자를 존재하게끔 한다. 1계명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의 뜻은 신 안에서만 인간이 자유롭다는 뜻이다.

 

2계의 뜻은 신이 아닌 것을 마치 신처럼섬기지 말라는 뜻이다. , 쾌락, 권력, 이성 등은 우상의 예다. 저자는 종교해악론자들과 종교말살론자들을 비판한다. <만들어진 신>의 리처드 도킨스, <종교의 종말>의 샘 해리스, <주문을 깨다>의 대니얼 데닛, <신은 위대하지 않다>의 크리스토퍼 히친스, <우주에는 신이 없다>의 데이비드 밀스 등등.

 

저자 입장에서 이들은 여전히 이성을 우상처럼 섬기는 자들이다. 저자는 종교에 의한 만행이 사실임을 부인하진 않는다. 그러나, 20세기에 벌어진 제노사이드가 모두 종교 때문은 아니라고 반박한다.

 

다른 이유로 나는 종교말살론에 반대한다. 종교를 없앨 수 있다는 생각은 사유재산 폐지만큼이나 순진한 발상이다.

 

신에게는 이름이 없다. 당연하다. 이름이 있다는 것은 한정된다는 뜻이다. 신은 무한자요. 무규정자다. 이름이 있다면 그는 신이 아니다.

 

3계는 아무런 목적없이 신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합당하게 신의 이름을 사용하라는 뜻이다.

 

4계명 역시 인간에게 자유라기보단 족쇄로 작용했다. 율법학자들은 안식일에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등 온갖 율법을 고안해냈다. 안식이란 무엇인가? ‘무엇 이 아니라 있음에 거주하는 것이다. 아이는 엄마가 무엇 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엄마의 있음에만 관심을 갖는다. 부모 역시 아이가 똑똑해서, 잘 생겨서 사랑하는 게 아니다. 자식의 있음에 감사하고 있음을 사랑할 뿐이다.

 

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라고 말했다. 타인은 우리를 있음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무엇 으로만 바라본다.

 

죄란 무엇인가?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수페르비아. , 인간 스스로를 신처럼 높이려는 마음이 죄다. 그것은 신에게서 돌아서는 것이다. 신에게서 돌아섬은 존재 상실이다. 리쾨르에 의하면 그것은 혼의 상실이다. 그것은 또한 도저히 안식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죽은 혼콘큐피스켄치아곧 한없는 욕망이다.

 

그러므로 안식이란 무엇 을 향한 한없는 욕망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존재 자체를 기뻐하는 것이며, 존재 자체의 자유이며 신을 향해 돌아서는 것이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은 자만을 극복하고 복종하라는 가르침이다. 자만 때문에 타락했으므로 인간에겐 겸손만이 유일한 길이다. 니체는 기독교 정신을 낙타에 비유했다. 그는 기독교를 삶을 부정하는 긍정이라 비판했다. 저자는 복종이 자유인의 미덕이며 복종하는 자의 승리라고 주장한다. 나처럼 불가지론자(현재)의 입장에선 니체의 말이 더 설득력이 있다.

 

크뤼제만에 따르면 살인하지 말라에 쓰인 히브리어 동사 ‘rsh’는 의도되지 않은 살인마저 포함한다. 그러나, 저자는 존재론적인 살인을 하지말라로 해석한다. 존재론적 살인이란 영혼의 살인이다. ’소외당하는 것그것이 바로 죽음이다. 소외를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프롬에 따르면 사랑이다. 따라서 살인하지 말라서로 사랑하라라는 뜻으로 확대된다.

 

저자는 간음하지 말라의 계명을 네 이웃을 사랑하라의 뜻이라 주장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랑을 두 종류로 나눈다. 피조물에 대한 하향적 사랑인 쿠피디타스cupiditas와 신을 향한 상승적 사랑인 카리타스caritas. 쿠피디타스가 무엇-에 대한 사랑이라면 카리타스는 있음에 대한 사랑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수관으로 흘러가는 물을 정원으로 끌어가시오라고 했다는데 과연 그렇게만 하면 쿠피디타스를 카리타스로 바꿀 수가 있을까.

 

8계명 도둑질하지 말라는 인간을 소유 가능한 존재물로 취급하여 무엇-을 이용하려는 탐욕을 버리라는 뜻이다.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제 9계명은 네 이웃의 명예, 권리, 소유, 그리고 행복에 해를 끼치는 말을 하지 말라, 사랑 안에서 서로 도우며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말하라

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말하라의 뜻은 인식의 진리가 아닌 존재의 진리에 어긋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저자는 마지막 10계를 영화 <데칼로그>처럼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네 이웃의 모든 소유를 탐내지 말라‘, 둘로 나눈다. 10계는 한 마디로 자족하라의 가르침이다. ’너는 네게 있는 것에 자족하고, 네게 없는 것을 탐하지 말라는 뜻이다. 인간은 죄를 지을 수 있는 능력은 가졌으나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은 가지지 않았다.

 

키르케고르는 인간의 구원을 실존의 3단계설로 설명하였다. 심미적 단계, 윤리적 단계, 종교적 단계. 종교적 단계의 예가 욥이다. 무한한 자기체념은 신앙 앞에 전제되는 최후의 단계다. 그에 따르면 구원의 문제는 신앙의 문제이지 이성의 문제가 아니다.

 

키르케고르에 따르면 고난이 없는 인간은 종교적 단계에 들어가지 못한다.

 

프로이트와 프롬은 돈을 지옥의 똥으로 보았다. 프롬은 탐욕이 지닌 네크로필리아적 성격에 대해 말한다. 모든 살아 있는 것을 증오하고 죽은 것을 사랑하는 일종의 병적 상태, 그것이 네크로필리아다. 반면에 생명과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정열적 사랑이 바이오필리아다.

 

현대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사회는 신자유주의와 금융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을 부채인간으로 만들었다. 부채가 이익을 창출하는 금융자본주의에선 아무도 빚 없이 살 수 없다. 오늘날의 문학, 철학, 종교는 인간의 탐욕을 정당화하고 미화시킨다.

 

그렇다면 어떻게 탐욕에서 벗어날 것인가. 죄 때문에 탐욕의 노예가 되었기에, 죄 사함만이 탐욕에서 해방되는 길이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합하여새로운 인간이 되는 것. 이른바 레카피툴라티오(총괄적 갱신), 흔히 말하는 거듭남에 의해 탐욕에서 벗어날 수 있다.

프로이트로 말하자면 타나토스와 에로스.

 

기독교 사상에서 구원을 이루는 두 개의 주된 메커니즘이 있다. 칭의와 성화다. 칭의는 죄인을 의인 되게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죄 사함이라고도 부른다. 성화는 악인이 선인이 된다는 뜻이다.

 

세례를 받고도 악한 행동을 계속하는 자는 구원받을 수 있을까. 저자에 따르면 구원 받을 수 없다. 세례가 아니라 성화가 구원의 징표다. 세례만 받아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바울로부터 나왔다. 바울의 간사함 때문에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악의 구덩이 속으로 빠졌던가.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는 결국 성화되어라의 뜻이다. 성화되지 않고서는 구원받을 수 없다.

 

저자는 십계명이 가리키는 것은 결국 너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라는 가르침이라고 말한다. 다른 신이란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낸 각종 우상이다. 십계명를 단 하나의 문장으로 말한다면 너는 너 자신으로 존재하라가 아닐까. 물론 이건 불가지론자의 관점이다.

 

키에슬롭스키는 <데칼로그>를 무엇 때문에 사는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만들었다고 말했다. 탐욕이 인간을 그렇게 만들었다. 신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부채인간이다. 우리는 무엇 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에 처해야 한다. 있음에 처하는 것. 그것이 곧 자유다.

 

십계명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왜 대다수 기독교인들은 사악할까. 신도를 강간하는 목사의 이야기는 이제 더 이상 뉴스거리도 되지 않는다. 왜 여전히 기독교인들은 자유가 아닌 물질에 구속된 삶을 추구할까. 끊임없이 교회는 지어지지만 기독교인들의 탐욕은 누그러들지 않는다. 성화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

 

내가 기독교에 느끼는 감정은 샤를 페기가 칸트의 도덕률에 대해 말한 것과 흡사하다.

그것은 순결한 손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것에는 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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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31 14: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6-03-31 14:31   좋아요 0 | URL
동감입니다. 저는 저말을 `있음`에 처하라로 해석해요. 그러면 견딜만 해져요 ㅋ ^^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 테리 이글턴의 아주 특별한 문학 강의
테리 이글턴 지음, 이미애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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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학적 평론가와 섬세한 평론가가 있다.

현학적 비평이 작품을 난도질한다면 섬세한 비평은 작품을 감싸 안는다.

정성일 평론가를 존경한다. (이제 감독이라 불러야 할까, 혹은 영화인?)

현학적 평론가의 수장은 정성일이다. 고로, 정성일 평론은 읽지 않는다. 정성일은 마치 소개팅을 주선해 놓고 소개해주는 친구의 장점을 말해주기는커녕 자기자랑만 일삼는 주선자와 같다.

 

도대체 문학이나 영화 평론에 라캉이나 들뢰즈가 왜 필요한가? 허세에 가득 차 현학적인 용어를 남발하는 교만과 자만에 빠진 비평은 관객/독자에게 아무런 쓸모가 없다. 히브리스 비평, 수페르비아 비평. 그가 비평하는 영화는 보고 싶은 생각이 눈곱만큼도 들지 않는다.

 

섬세한 평론가의 수장은 단연 신형철이다. 신형철이 비평의 대상으로 삼은 책은 보고 싶다. 보고 싶어 미치겠다. 신형철은 작품 안에 머무르면서 왜 이 작품이 좋은 작품인지 독자에게 조곤조곤 설명해준다. 손수건 같은 비평. 벙어리장갑 같은 비평.

 

정성일은 끊임없이 작품 밖으로 나가 온갖 쓸모없는 잣대를 가져와 들이밀기 바쁘다. 정성일 식 비평은 프로쿠르스테스의 침대다. 들뢰즈, 라깡 및 온갖 철학자의 이론에 들어맞지 않으면 작품은 잘려지고 만다. 잘려진 작품은 이제 온데간데없다. 심지어 살아남은 작품마저 온데간데없긴 마찬가지다. 철학자의 헛소리만 메마른 대지에 남아 유령처럼 맴돌 뿐이다.

(, 주여, 용서하소서, 저들은 지들이 뭐하고 자빠졌는지 모릅니다.~~ )

 

테리 이글턴은 신형철 같은 비평가다. 이 책에선 그 어떤 철학자의 이름도 등장하지 않는다. 단지 소설을 깊이 있게 읽을 뿐이다. 왜 어떤 문장이 좋은지, 왜 어떤 문장이 나쁜지를 문학 안에서 설명해준다.

 

테리 이글턴은 포스터의 <인도로 가는 길> 첫 문장으로 책을 시작한다. 영어 원문이 실려 있어 우리는 소설 첫 문장의 운율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테리 이글턴은 말한다. <요한 복음>의 도입부 문장이 왜 뛰어난지,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첫 문장의 아이러니가 왜 탁월한지, <모비딕> 첫 문장이 왜 유명한지. 모더니스트들과 사실주의자들 사이에 캐릭터, 서사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문학을 감정이입으로 해석하기엔 어떤 오류가 있는지, 등등.

 

이 책의 원제는 ‘how to read literature’. , 문학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한 문학 읽기의 방법을 제시한다. 테리 이글턴은 소설가를 믿지 말고 소설을 믿으라고 충고한다. 심지어 소설은 소설을 쓴 소설가의 사상과 다를 수도 있다.

 

우리는 소설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이글턴은 서사의 흐름에서 뒤로 물러서서 되풀이되는 관념이나 관심사에 주목하라고 말한다. 인물을 고립시켜 보지 말고, 주제와 플롯, 이미지와 상징을 포함하는 패턴의 한 요소로 파악하라고. 도덕적 비젼 역시 중요하다. 신형철 역시 <몰락의 에티카>에서 이렇게 말했다.

 

문학이 윤리와 무관했던 적이 있었던가. 적어도 그것이 진정한 문학이라면.’


혹은 계보를 추적하며 문학을 읽을 수도 있다. 예를 들면, 탐 존스부터 해리 포터까지 고아 문학의 계보를 만들 수도 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문학을 좋은 문학이라고 할 수 있을까? 독창성? 이글턴에 따르면 새롭다고 해서 가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변화는 진전보다는 퇴보를 의미할 가능성이 더 높다. 보편적인 호소력? 그것도 논란의 소지가 있다. 작품이란 무릇 세월이 흐르면서 새로운 의미를 산출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재미? 그것도 아니다. 테리 이글턴은 사적 선호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자면, 나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대부분의 소설이 재미가 없다. 테리 이글턴은 좋은 문학에 대한 공적인 기준, ‘규범적 이론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심오하고 복잡함? 그것도 문학을 가치있게 하는 것은 아니다. 플롯이 조화롭고 통일된 문학? 그것도 아니다. 그에 따르면, 20세기에 가장 위대한 희곡은 <고도를 기다리며>이고 가장 훌륭한 소설은 <율리시스>이며 가장 훌륭한 시는 <황무지>. 이 세 작품 모두 플롯이랄 게 없다. 어휘가 풍부하고 화려한 문학? 그것도 아니다. 조지 오웰의 산문은 풍부하지 않다.

 

테리 이글턴은 문학 작품의 몇 구절의 분석을 통해 좋은 문학의 정의를 내리려 시도한다. 여기서 테리 이글턴은 존 업다이크와 윌리엄 포크너를 물 멕인다. 테리 이글턴에 따르면 업다이크의 문장은 반질반질할 정도로 기교적이고, 포크너의 문장은 그저 망할 일들이 줄줄이 이어지며조야하고 수다스럽다.

 

그에 비해 에벌린 워나 나보코프, 캐럴 실즈의 문장은 뛰어나다. 이글턴에 따르면, 에벌린 워의 문장은 선명하고 불순물이나 군더더기가 없다. 억제하지도 과시하지도 않는다. 기교를 의식하지도 않는다. 나보코프의 <롤리타>의 문장은 젠체하긴 하지만 풍자적이고 유머러스하고 <문학적>이다. 캐럴 실즈의 <사랑 공화국>의 문장은 섬세한 상상력을 보여준다.

 

테리 이글턴은 좋은 문학이 어떤 것인지 딱히 결론 내리지 않았다. 꼼꼼한 읽기를 통해 몇몇 작품 단락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내놓았을 뿐이다. 혹시 테리 이글턴은 좋은 문학이란 독자인 우리가 문학을 좀 더 섬세하게, 깊이 있게 읽을 때, 그때서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 말하고 싶었던 걸까?

 

이상한 말이지만 사람은 책을 읽을 수 없다. 다시 읽을 수 있을 뿐이다. 좋은 독자, 일류 독자, 능동적이고 창의적인 독자는 다시 읽는 독자다.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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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북 2016-03-30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옷~ 저랑 비슷한 시간에 같은 책에 대한 리뷰를 올리셔서 반가워요~ 이런 이유로도 친밀한 느낌이 드네요^^

시이소오 2016-03-30 14:54   좋아요 0 | URL
원더북님, 저도 화들짝 했네요. 반갑습니다^^

프레이야 2016-03-30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읽는 독자가 되어야겠군요. 섬세하게 작품을 품어 안는 비평가가 저는 좋더군요. ^^

시이소오 2016-03-31 00:05   좋아요 0 | URL
그쵸? 저만 그런거 아니죠 ㅋ^^

eL 2016-03-31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첫문단 보고 오? 하면서 클릭해서 끝까지 읽었네요. 두가지 서로 다른 비평에 대한 이야기가 와닿아요. 어떤의미에서는 두 비평의 차이가 대상을 분석하느냐 대상에 다가가느냐의 차이인 것 같은데.. 저도 후자가 좋으네요 ^^

시이소오 2016-03-31 23:34   좋아요 1 | URL
비평은 사랑입니다 ^^

포스트잇 2016-06-07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쿠, 오래전에 이미 이 책을 정리하셨군요. 대단한 책이죠? ㅎㅎ

시이소오 2016-06-07 12:16   좋아요 0 | URL
테리이글턴 책도 이미오래전에 번역되었더라구요

이글턴의 다른 책도 읽어봐야겠어요^^
 
작가의 책 - 작가 55인의 은밀한 독서 편력
패멀라 폴 지음, 정혜윤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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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작가의 책 토머스 하디 줌파 라히리.

 

줌파 라히리의 <저지대>를 읽으면서 우다얀과 수바시가 사랑한 가우리 캐릭터는 어디서 연원한 걸까 궁금했었다. 테리 이글턴의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을 읽다 토머스 하디 <무명의 주드>에 나오는 수 브라이드헤드와 가우리가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수에 대해 비판적인 한 비평가는 이렇게 썼다고 한다.

 

결국 수를 변호해보려고 해도, 그러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말이 많지 않다. 그녀는 첫 애인의 죽음을 재촉한 후 사랑받는 기쁨을 누리려고 주드를 유혹한다. 그러고는 수상쩍은 동기로 기이하게도 무감각하고 무심하게 필롯슨과 결혼하며 그 과정에서 놀랍게도 냉담하게 주드를 대한다. 필롯슨과의 잠자리를 거부한 후 그녀는 그를 버리고 다시 주드에게 돌아감으로써 그 교장의 경력을 일시적으로 파탄 내고 주드와의 잠자리도 거부한다. 그런 다음에 아라벨라에 대한 질투심 때문엥 주드와 결혼하기로 동의하고, 도다시 마음을 바꿔서 결국에는 필롯슨에게 돌아가고 주드가 죽도록 내버려둔다......

 

D. H 로렌스는 수를 신체적 발기불능이라 비난할 정도였다. 테리 이글턴은 얼토당토않은 논평이라고 수를 옹호한다.

 

그녀는 결혼과 성이 여자의 독립성을 뺏는 덫이라고 간주합니다. 그리고 소설은 그녀의 이런 견해를 충분히 지지합니다. “여자들이 비난을 받아야 하는 거요? (주드가 말했다.) 아니면 정상적인 성적 충동이 진전을 바라는 사람을 올가미에 씌우고 억누르는 집안의 지독한 덫이 되어버리는 부자연한 체제가 문제인 거요?”

 

- p140. 테리 이글턴,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저지대>의 가우리는 우다얀이 죽자 올가미에 씌우고 억누르는 집안의 지독한 덫이 되어버리는 부자연한 체제에 갇힌다. 수바시는 가우리에게 청혼을 하고 그녀를 집안에서 빼내 영국으로 데려온다. 수바시가 가우리를 덫에서 구해준 셈이다. 수바시는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한다. 가우리는 냉담하다. 어느날 가우리는 수바시와 딸 벨라를 버리고 도망친다. 자신의 자유를 찾아서.

 

줌파 라히리는 가우리 캐릭터를 토머스 하디의 <무명의 주드>에서 차용해 온 것은 아닐까

<작가의 책> 줌파 라히리 편엔 이런 질문이 나온다.

 

가장 좋아하는 소설가의 이름을 말해야만 한다면 누구를 꼽으시겠습니까?

 

토머스 하디요. 고등학교 시절 그의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부터 그의 작품 속 인물, 장소에 대한 감각, 인간에 대한 인정사정없이 냉혹한 시각에 어떤 동류의식을 느꼈거든요. 그래서 가능한 한 자주 반복해서 읽으려 하고 있지요.


 

.... 두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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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6-03-31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구입하려다가 두꺼워서 포기했어요. 후후~~

시이소오 2016-03-31 14:29   좋아요 0 | URL
여러 작가들이 나와서 지루하지 않답니다 ^^
 
읽다 (2015년판) - 김영하와 함께하는 여섯 날의 문학 탐사 김영하 산문 삼부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사랑과 독서의 공통점이 뭘까요?

 

답은 광고 후에.....아니고요. 잠깐만요. 또 다른 퀴즈가 있습니다. 버지나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그리고 김영하의 <읽다>의 공통점은 뭘까요? 십 초 드리겠습니다. 1.2.3.....10.

 

와우, 역시. 그렇습니다. 강연을 정리한 글인 듯 경어체로 쓰였습니다. 그래서 저 역시 리뷰를 경어체로 쓰겠습니다.

 

, 다시 사랑과 독서의 공통점은 뭘까요?

 

해럴드 블룸은 <교양인의 책 읽기>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독서는 자아를 분열시킨다. 즉 자아의 상당 부분이 독서와 함께 산산이 흩어진다.”

 

사랑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요? 사랑은 자기분열이요, 자아상실입니다. 자아상실은 무슨 뜻인가요? 나와 나 아닌 것들의 경계가 흐려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하면 세상이 아름답게 느껴져요. 아이들의 웃음소리, 길가에 핀 장미 꽃 한 송이도 유난히 사랑스럽습니다. 또한 경계가 없어진다는 말은 한편으론 제정신이 아니란 뜻입니다. 사사키 아타루가 그랬잖아요? 책을 제대로 읽으면 미쳐버린다구요. 김영하는 <돈키호테>를 예로 듭니다.

 

돈키호테에게 현실과 책의 경계는 아예 사라져버립니다. 풍차는 기사가 되고 이발사의 대야는 투구가 되죠. 돈키호테는 온갖 미친 짓에도 불구하고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그에 반해 책 읽고 미친 보바리 부인은 어떻게 되었죠? 자살합니다.

 

쥘 드 고티에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다르게 상상하는 기능보바리즘이라 명명했습니다. 다니엘 페나크에 따르면 보바리즘이란 상상이 극에 달하고 온 신경이 떨려오고 심장이 달아오르며 아들레날린이 마구 분출되는 가운데 주인공의 세계에 완전 동화되어, 어처구니없게도 대뇌마저 일상과 소설의 세계를 혼동하기에 이르는현상입니다.

 

책 속에 길이 있을까요? 김영하는 카프카의 소설 <>을 예로 듭니다. 요제프 K는 사실 성에 있습니다. 그런데도 계속 성을 찾습니다. 길은 계속 등장합니다. 과연 길을 따라 간다고 성을 찾을 수 있을까요? 김영하 역시 오르한 파묵이 말한 감춰진 중심부를 인용합니다. 독자는 감춰진 중심부를 찾아가는 셜록홈즈같은 탐정과도 같습니다. ‘중심부를 찾기 위해서는 주의 깊게 읽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보바리 부인>의 중심부는 무엇일까요? 플로베르는 루이즈 콜레에게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내가 볼 때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것은 내가 실천에 옮겨보고 싶은 바로 무에 관한 한 권의 책, 외부 세계와의 접착점이 없는 한 권의 책이다. 마치 이 지구가 아무것에도 떠받쳐지지 않고도 공중에 떠 있듯이 오직 스타일의 내적인 힘만으로 저 혼자 지탱되는 한 권의 책, 거의 아무런 주제도 없는 아니 적어도 주제가 거의 눈에 뜨이지 않는 한 권의 책 말이다. 가장 아름다운 작품들은 최소한의 소재만으로 된 작품들이다. 표현이 생각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어휘는 더욱 생각에 밀착되어 자취를 감추게 되고 그리하여 더욱 아름다워지는 것이다.

 

(과연 <보바리 부인>엔 아무런 중심부가 없는 걸까요?) 김영하는 소설을 읽는 다는 것이 감춰진 중심부에 도달하기 위한 여정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김영하에 따르면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는 헤매기 위해서입니다. ‘아무 의미도 없는 이상한 세계에서 어슬렁거리기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시간 낭비 아닐까요? 그렇진 않습니다. 김영하에 따르면 독서는 고유한 헤맴이고 유일무이한 감정적 경험이며 교환불가능하기에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현실의 우주가 빛나는 별과 행성, 블랙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크레페케이크를 닮은 우리의 작은 우주는 우리가 읽은 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것들이 조용히 우리 안에서 빛날 때, 우리는 인간을 데이터로 환원하는 세계와 맞설 존엄성과 힘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소설은 꿈이다.

 

<하자르 사전>에 나오는 유수프마수디는 음악가이면서 꿈을 읽는다고 합니다. 또한 그는 꿈을 따라 여행하는 유령을 쫓아다녔다고 하죠.

 

마수디가 알아낸 바에 따르면,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한 꿈을 꾸고 그중 한 사람의 꿈이 다른 한 사람의 현실을 구성하는 경우, 꿈의 작은 일부분이 언제나 남겨진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꿈의 아이들이다. 꿈은 물론 꿈에 나오는 사람의 현실보다 짧다. 하지만 꿈은 언제나 아주 깊기 때문에, 어떤 현실과도 비교할 수 없다. 그래서 언제나 약간의 찌꺼기가 남게 된다.

 

이러한 잉여물질은 꿈에 나오는 사람의 현실 속으로 완전히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제 3의 인물 현실 속으로 흘러들어가 거기에 붙어 있게 뙨다. 결과적으로 제 3의 인물은 엄청난 어려움과 변화를 겪게 된다. 3의 인물은 처음의 두 사람보다 더욱 복잡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 인물의 자유의지는 다른 두 사람에 비해 두 배는 더 무의식의 지배를 받는다.

 

- 밀로라드 파비치, <하자르 사전>

 

재밌는 관점입니다. 꿈에 따라 현실을 만들고 나면 남는 부분이 생깁니다. 잉여 물질이 엉뚱한 사람의 현실 속으로 들어가 이상한 작용을 하게 된다는 거죠. 그래서 제가 간혹 엉뚱한 짓을 하는 걸까요?

 

(유수프마수디가 꿈을 따라 여행하는 유령을 쫓아다녔다고 하는데, 실제로 루시드 드리머들 사이에 유령의 몽타쥬가 돌아다닙니다. 제가 보기엔 매트릭스의 스미스 요원과 닮았습니다. 저 유령 빨리 잡혔으면 좋겠네요. 저 놈 때문에 제 현실이 엉망진창인지도 모르잖아요. 참고로 저는, 루시드 드림, 우리말로는 자각몽이라고 하죠. 6개월 훈련하고 포기했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김영하는 마치 <하자르 사전>에서의 꿈처럼, 소설에서도 현실로 다 치환되지 않는 잉여 물질이 남는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 부분 때문에 우리가 소설을 읽는 지도 모른다구요.

 

왜 소설을 읽느냐?”하는 질문에 김영하는 말합니다.

거기 소설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소설 자체가 목적이란 뜻이겠죠. 소설을 하나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소설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파묵에 따르면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2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블랑쇼처럼 말해볼까요? 소설은 삶이고 소설은 죽음입니다. 소설을, 책을 읽는다는 것은 카프카가 말한 것처럼 얼어붙은 감수성, 우리의 응고된 자아를 해체하고 깨부수는 도끼질입니다. ‘가 죽을 때마다 새로운 가 탄생하는 셈이죠.

 

아우구스티누스를 따라, 사사키 아타루를 따라 반복하시겠습니까?

 

 

 

집어 들고 읽어라, 집어 들고 읽어라, 집어 들고 읽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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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tty99 2016-03-29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시이소오 2016-03-29 13:36   좋아요 1 | URL
저런, 어안이 벙벙한 상태신가요? ㅋ ^^

kitty99 2016-03-29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이소오 타고 하늘까지 슈웅~~~^^

시이소오 2016-03-29 13:40   좋아요 1 | URL
김영하 작가님을 타셔야죠. ^^

kitty99 2016-03-29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늘 위에서 만나고 왔음 ㅋㅋㅋ

시이소오 2016-03-29 13:45   좋아요 2 | URL
김영하 작가님이 뭐라든가요? `이 놈의 인기는 하늘, 땅을 안가리는구나`, 만년필을 꺼내 묻지 않던가요? 이름? ㅋ

꿈꾸는섬 2016-03-29 13: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오랜만에 김영하작가책을 만나볼까하는 생각이 들어요. 요새 애정이 좀 식었었는데 시이소오님 글 읽으니 읽고싶네요.

시이소오 2016-03-29 13:46   좋아요 1 | URL
김영하 작가님, 나이먹고 철들었어요. ^^

꿈꾸는섬 2016-03-29 13:48   좋아요 0 | URL
ㅎㅎㅎ철든 김영하작가님~
왠지 매력적일 것 같다는 생각이ㅎㅎㅎ 기대되게해요. 철들었다는 말이요.

시이소오 2016-03-29 13:50   좋아요 0 | URL
한껏 성숙해진 김영하를 기대하세요^^

kitty99 2016-03-29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뇨 그냥 째려보시던대요 그것도 한 쪽 눈으로 ...

시이소오 2016-03-29 13:49   좋아요 1 | URL
ㅋㅋㅋ 짝눈이라 그렇게 보일수도 있어요. (농담입니다. 독자, 김영하 외모비하, 뭐 이런 기사 나오면 안 됩니다)

kitty99 2016-03-29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

cyrus 2016-03-29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번 들어가면 정말 제대로 헤매는 소설이 있습니다. 카프카의 소설입니다. 특히 <성>은 미완성이라서 탈출구가 없어요.

시이소오 2016-03-29 20:38   좋아요 0 | URL
그래서 카프카 소설들이 재밌는 것 같아요^^

룰루라떼 2016-03-29 2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프카...ㅎ
하자르 사전도 올만에
제목보네요^^
스미스요원 보이믄
제가 잡겠습니다^^
자각몽 잘 꾸거든요~하핫!

시이소오 2016-03-29 21:49   좋아요 0 | URL
오호. 부럽습니다. 잡아주세요. 대머리에요. ㅋㅋ

룰루라떼 2016-03-29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대머리 맞아요?
성질 드러워 보이는?
눈매가 부리부리하고?
지난번에 함 봤는데...ㅎ

시이소오 2016-03-29 2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맞는것 같은데요. 혼자서는 잡기힘드실텐데. 자각몽자들하고 연합하셔야할듯 ^^

룰루라떼 2016-03-29 2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유~연합은 무쓴~ㅎ
피하는게 상책일듯~했어요
그때도
느낌 넘 안좋더라고요
큰소리 쳤는데..죄송합니다^^

룰루라떼 2016-03-29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농담이 아니고,
자각몽이라고
상황을 100% 컨트롤 하는것이
아니라서
위험할때는
장소를 재빨리 바꾸는것이
안전하거든요
그리고 그곳이 현실화 된 세계일지도 모르고요^^

시이소오 2016-03-29 22:18   좋아요 0 | URL
맞아요. 농담이었어요. 그 놈 만나면 도망쳐야죠. ^^
꿈에 갇히면 어떡해요? 룰루라떼도 드셔야하는데 ^^

룰루라떼 2016-03-29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이소오님
대머리 본거 저는 농담
아니었어요
자각몽이 거의 안전하다고
저는 생각하지만
성질 드러워 보이는 존재를
아주 가끔 볼때가 있거든요.
그렇다고 일종의 자기계발?
방편으로 자각몽을 시도하시는 분들께 위험하다고만 말할수도
없구요.분명 현실세계에서
깨어있는, 자각생이 더 중요하지만,
장자의 비유처럼 이 세상이
꿈일지도 모르죠.
꿈이 현실보다 더 생생할때도
많거든요.
말이 길어졌는데,
대머리!!!
진짜인줄 알았는데,
농담이라 하셔서
살짝 기분 나빴어요^^

시이소오 2016-03-29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잡아달라는 말 농담이었다구요. ^^ 대머리 만나신건 믿죠.
저도 한때 자각몽 공부해서 대충은 아는걸요 ^^ 위험하다고 들었거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