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푸슈킨과 고골의 나라

 

나보코프와 예술이라는 피난처, 롤리타, 나보코프

 

푸슈킨과 레르몬토프를 제쳐놓고 나보코프가 뽑은 가장 위대한 작가는 1위 톨스토이, 2위 고골, 3위 체홉, 4위 투르게네프. 그가 보기에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류작가라고. 예전엔 인정할 수 없었을텐데, 지금으로선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싶다. 2007년 영어권의 대표적 현역 작가들이 뽑은 최고의 문학 작품으로 1위엔 역시 <안나 카레니나>, 2위는 플로베르의 <마담 보봐리>, 3위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4위는 나보코프의 <롤리타>였다고.

 

대부분 평론가들과 마찬가지로 나보코프 역시 레빈-키티 커플의 사랑과 대조적으로 안나 브론스키 커플은 육체적 사랑에만 기초해 있다고 평가한다. 실망이다. 이런 답안은 초등학교 교실에서도 나올 수 있는 분석 아닌가.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이 단지 육체적 사랑에 기초한다는 평엔 동의할 수 없다. 그들도 레빈, 키티 커플 마냥 진정한 사랑을 했다. 아니, 했다고 생각했다. 안나, 브론스키 커플의 비극은 상대방 보다는 자기 자신을 더 사랑했다는 데 있다. 사실 그들의 사랑은 육체적 쾌락보다는 오히려 허영에 기초한 것이었다.

 

나비의 변태를 거친 기억의 아상블라주, <말하라, 기억이여> 나보코프,

 

나보코프는 기억력이 형편없어 메모리스트가 되었다고. 그래서 그에게 있어 상상력은 기억력의 한 형식이다.

 

그의 지론에 따르면, 모든 사건의 객관적 존재 자체가 하나의 불순한 상상의 형식이며 창조적 상상력의 도움이 없다면 우리의 정신은 아무것도 파악할 수 없다. 그러니 순수한 객관적 현실이나 순수한 기억이라는 개념이야말로 오히려 픽션일 따름이다. 따라서 진실은 언제나 기억과 상상의 창조적인 합성물이다.

 

(<말하라, 기억이여> 아직 절판 상태네요 ^^;;) 


예브게니 오네긴과 차이코프스키, 예브게니 오네긴

 

예전에 <예브게니 오네긴> 광팬 때문에 호기심에 이 책을 읽었다. 나로선 뭐가 좋다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티치아나나 오네긴과 같은 경험을 했다면 공감할 수 있었을까? 상대방이 나를 사랑할 때 나는 시큰둥하다가, 상대방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자 이번엔 자신이 열정적인 사랑에 빠지는 경험? 아무튼 차이코프스키는 작품을 구상할 때 제자인 안토니나 밀류코바로부터 구애 편지를 받았다. 그는 제자의 구애를 받아들여 결혼을 했다.

 

우리는 모두 고골의 <외투>에서 나왔다외투, 고골.

 

역시 읽었으나 감흥이 없었던 작품이지만 로쟈는 매년 다시 읽으면서 경탄하는 작품이라니 나 역시 다시 읽어봐야 겠다. 주인공 아카키의 외투에 대한 욕망은 여전히 현대적으로 보인다. 라캉의 이론에 어울릴 듯.

 

도스토예프스키와 돈.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맞는 말이다. 돈을 빼놓고 도스토예프스키를 논할 순 없다

<톨스토이, 도덕에 미치다>만큼 재밌을 듯.

 

사냥개 같은 시대의 증언 <회상> 나데쥬다 야코블레브나 만델슈탐

 

20세기 러시아 시의 거장 오십 만델슈탐의 부인 나데쥬다 만텔슈탐의 회고록이라고. 시인 만델슈탐은 두 번째 체포 때, 시베리아 강제수용소 이송 중 사망했다. “무슨 이유로 그를 잡아갔지?”라는 질문은 금기시되었지만, 누군가 그런 질문을 던지면 아흐마토바는 격분하여 소리쳤다고 한다. “무슨 이유가 있겠어? 아무 이유 없이 사람들을 잡아들인다는 걸 아직도 모르겠어?” 바로 그 시대의 목격담이자 증언이라고.















 

12. 한국 문학에 대한 믿음과 불신 사이

 

핏빛 어두운 조수가 퍼져, 도처에

순결한 의식이 침몰하고

최선의 무리는 확신이 없고

최악의 무리만이 열광적으로 날뛰고 있네

 

- W.B 예이츠, <2의 강림>

 

오늘날 한국 문학은 죽었다?’ 로쟈는 문학에 대해 가장된 순진한 믿음’, 즉 문학을 좀

더 진지하게 믿는 척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한국 문단 문학의 종언, 한국 문학과 그 적들, 조영일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 문학의 종언>을 번역한 평론가 조영일의 두 번째 평론집이다.

그는 한국문학이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끝났다고 보는 것은 한국의 문단문학이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는 문학편집과 문학비평이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백전 백패의 운명을 찬양함, 자전거 여행, 김훈

 

살아서 아름다운 것들은 나의 기갈에 물 한 모금 주지 않았다. 그것들은 세계의 불가해한 운명처럼 나를 배반했다. 그러므로 나는 가장 빈곤한 한줌의 언어로 그 운명에 맞선다. 나는 백전백패할 것이다.

 

말해 무엇하랴, 김훈의 에세이는 무조건 읽어야 한다.

 

기형도의 보편 문법. <기형도 전집> 기형도

 

인간에게도 누구나 잎이 주렁주렁 달린 가지가 서너 개 이상 있다. 그 개별적 가지들은 시간의 묶음이며 그 시차인 공간인 가지 안에는 썩은 잎부터 부활해가는 잎, 돋는 잎 등이 달려있다. 그 잎들은 나무의 물관, 체관의 관다발로부터 양분 및 수분을 공급받으며 또 외적인 요소, 즉 햇빛을 이용하여 녹색 동화작용을 일으켜 내적 에너지를 확충한다. 고로 잎은 나무와 햇빛의 유기적 매체이다. 개별 인간과 보편 세계의 이질성을 이어주는 것은 동일인으로서의 인칭이다. 우리는 그러한 인칭을 2인칭화(사랑, 친구, 가족)한다. 그러나 과수뿐 아니라 인간의 사육 기간 중에서 우리의 관계들 속에는 엄연히 칼날 같은 전정이 가해진다. 그것은 소극적으로 타의에 의한 단절의 전정과 적극적 전정으로 구분한다.

 

식물적 상상력,모종전정의 시인(기형도의 전정에 최초로 주목한 비평과는 정과리라고. 정과리의 <무덤 속의 마젤란>은 기형도에 관한 필수적인 참고 문헌이라고 한다.)

 

둑방에는 패랭이 꽃이 무수히 피어 있었다. 모두 다 꽃씨들을 갖고 있다니

작은 씨앗들이 어떻게 큰 꽃이 될까. 나는 풀밭에 꽂혀서 잠을 잤다.”

 

부끄럽게도 나는 아직 기형도의 시를 안 읽었다. 죽기 전엔 읽어야.

 













13. “너 책이야? 나 장정일이야!”

 

장정일의 공부,

장정일의 독서일기 7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

보트하우스

내게 거짓말을 해봐.

 

2004년 독서일기 10년째인 6권의 서문은 이렇다.

 

보혁갈등이 첨예하게 부딪치는 지난 몇 년간을 보내면서, 나의 독서관은 개인적으로 내밀한 쾌락을 좇아가는 독서에서 약간 다른 것으로 진화했다. <....> 시민이 책을 읽지 않으면 우중이 된다. 책과 멀리하면 할수록 그 사람은 사회 관습의 맹목적인 신봉자가 되기 십상이고 수구적 이념의 하수인이 되기 일쑤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내밀한 정신의 쾌락을 놓치는 사람일뿐 아니라, 나쁜 시민이다. <.....> 독서는 민주사회를 억견과 독선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시민들이 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의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강유원은 장정일의 독서 일기 2권에 대한 독후감을 이렇게 적었다.

 

장정일은 많은 분량의 책을 읽지만 그것을 꿰어서 이론적 줄거리를 만들어내지는 못하는 듯하다.

 

, 로쟈의 말대로 강유원의 장정일 비판은 공감하기 힘들다. 누가 그랬더라. 언젠가 자신의 무지를 깨닫는 날이 기필코 올 것이라고. 장정일 역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자신의 무지를 밝히기 위해 공부한다고 말했다. 덧붙이자면, 또 다시 한나 아렌트를 빌어 말하자면 나는 내 무지가 이제 악이 될 수 있음을 알기에 공부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너희가 독서를 아느냐 <장정일의 독서일기5>

 

역시 장정일, 가차 없다. (그 이후 쓰인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에도 그의 돌직구는 여전히 곧다.) 지식인들 모두가 장정일처럼 말하길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도 안 될 것이다. 단지 검은 것을 검은 것이라고 말해주었으면.

 

장정일 문학의 변죽, <정열의 수난 장정일 문학의 변주>, 문광훈

 

장정일에 대해 말한다면서 저자 얘기만 하는 책이라니, 추천이라기 보단 비추의 리뷰다.

 

로쟈의 페이퍼 03

 

가라타니 고진, <정치를 말하다>, <탐구>, <탐구2>

 

로쟈의 리스트 8. 에리히 프롬 읽기

 

<소유냐 존재냐>, <에리히 프롬의 현대성>,

백민정, <맹자 :유학을 위한 철학적 변론>

박홍규, <우리는 사랑하는가 :에리히 프롬의 생애와 사상>



 













14. 기적에 이르는 침묵

 

기적에 이르는 침묵, <봉인된 시간> 타르코프스키

 

타르코프스키에게 있어서 영화란 시간을 빚어내는 것이다. 로쟈는 타르코프스키 영화가 대단히 격렬하다고 말한다. 그는 <노스탤지어>의 분신 장면과 <희생>의 방화 장면을 예로 든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가 격렬하다는 의견에 적극 동감한다.(동지를 만났다) 그의 영화를 볼 때 나로선 몽타쥬보다는 시점의 파괴 때문에 깜짝 깜짝 놀라곤 했다.

 

타르코프스키의 순교일기에 대하여, 타르코프스키의 순교일기

 

타키역시 도키 빠였다.

 

이제 나는 우선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이 쓴 글을 모조리 읽어야만 하겠다. 그리고 그에 관해 쓴 모든 글들 그리고 러시아 종교철학자들이 솔로비요프, 베르쟈에프, 레온체프의 글들도 모두 읽어야 겠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내가 영화 속에서 실현시키고자 하는 이 모든 것들의 총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존재론적 살인과 정치적 살인. <데칼로그 십게, 키에슬로프스키, 그리고 자유에 관한 성찰>

 

로쟈는 살인하지 말지니라만을 읽고 쓴다. 저자는 야첵의 살인을 해명하기 전에 주인공 뫼르소를 분석하지만 로쟈는 곧바로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를 떠올린다. 그러나 그의 살인은 야첵이나 뫼르소와는 달리 합리적이고 계획적인 살인이었다.














 

15. 이미지가 들려주는 것

 

러시아에도 미술이 있어?” <러시아미술사> 이진숙

 

러시아 미술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이콘화와 19세기 이동파, 그리고 20세기 초반의 아방가르드 등이라는데, 로쟈는 특히나 19세기 미술에 관심이 있다고. 이동파의 가장 대표적인 화가는 일리야 레핀이다. 그의 <볼가 강의 배를 끄는 인부들>은 러시아 미술사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라고. 바실리 페로프<트로이카>, <도스토예프스키의 초상>, 니콜라이 야로센코<삶은 어디에나>의 작품 등을 통해 러시아 미술의 메시지를 느낄 수 있다고. 그것은 삶의 고통과 분노, 비애와 절망에 대한 연민이면서 그럼에도 끝까지 버릴 수 없는 희망에 대한 송가다.

 


참고서적

조토프 <러시아 미술사>

캐밀러 그레 <위대한 실험>

이주헌, <눈과 피의 나라 러시아미술>

 

추의 이미지는 미의 이미지보다 다채롭다.

 

추의 역사, 에코

미의 역사, 에코

 

에코는 <미의 역사>의 자료를 1960년 대 초반부터 모았다고. 미에 대한 개념이 시대에 따라 달라지긴 했지만 대체적으로 비례와 균형과도 같은 기준이 있다면 추의 이미지는 훨씬 다채롭고 풍부하다. 형식의 결여, 불균형, 부조화, 외관 손상, 변형, 불쾌함의 다양한 형상들이 너무 방대해서 단순히 추를 미의 반대라고만 말할 수는 없다는 게 에코의 주장이다. 즉 모든 아름다움은 서로 엇비슷하지만, 추함은 저마다 제각각이다.

 

미술의 고고학,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박이소.

 

원제는 <믿는 것이 보는 것이다>. 저자 스타니스제프스키는 우리가 보기 전에 이미 작용하고 있는 믿음들에 대해 폭로한다. 미술가가 미술작품을 창조한다 하더라도 그 자체로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오로지 미술의 제도 내로 순환해야만 깊은 의미와 중요성을 획득한다. 뒤샹의 변기를 전시회 좌대에 올려놓고 <>이라 명명함은 고대 인물상을 박물관에 전시하여 <비너스>와 명명한 것과 마찬가지다.

 

참고문헌

존 버거, <이미지>

 

곰브리치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 이미지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

 

곰브리치는 예술은 어떤 시대정신으로 환원하려는 시도에 반대한다. 그가 보기에 예술은 창조적 개인의 소산이다. 그가 미술사가로서 수호하려는 가치가 단지 서유럽의 전통문명이라니, 지나친 유럽중심주의적인 발상 아닌가.

 

철학자 마그리트, 르네 마그리트 수지 개볼릭.

 

로쟈의 말대로 마그리트 그림은 감동을 주진 않는다. 그러나 분명 지성을 자극한다. 저자는 그 유명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의 그림을 분석한다. 이 그림은 더 이상 재현적 회화의 불가능성을 선포한다. 이제 회화는 무한한 가능성과 함께 회화적 불가능성에 직면한다. 이러한 모순으로부터 현대 회화의 가능성과 과제가 동시에 산출된다.

 

베이컨이란 무엇인가, 베이컨 회화의 괴물, 크리스토프 도미노

 

들뢰즈에 따르면 베이컨은 형상적인 것에서 형상을 빼내고자 한다. 그는 외치는 사람들이 아니라 외침 그 자체를 그리고자 한다.

 

기술합성 시대의 예술 작품, 미디어 아트, 진중권

 

미디어아티스트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관심은 예술과 기술의 공조이고, 공진화다. 예술가들은 새로운 첨단 기술을 통해 표현의 가능성을 확장시켜나가고, 기술자들은 그러한 예술에서 더 나은 기술을 위한 영감을 얻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근대 미학을 관장해온 칸트적 미학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듯하다. ‘미적 자율성이나 무목적의 목적성같은 개념이 예술과 기술의 극단적인 결합 형태인 미디어아트에는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예술기술을 모두 뜻하던 아트라는 말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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