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천한 것과 돼먹잖은 놈의 진화 ,

<다윈의 대답1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은 있는가>, 피터 싱어,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다윈주의 좌파의 가능성을 타진한다고.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에서 설명하듯 극단적인 이기주의 전략보다는 협력적 전략이 생존에 더 유리하다.

 

윤리적 노하우와 가상적 인격, <윤리적 노하우> 프란시스코 바렐라.

 

저자가 보기에 윤리는 노핫know what’의 문제가 아니라 노하우know how’의 문제. 즉 이성적 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자발적 대처의 문제라고 한다. 윤리는 규칙보다는 오히려 습관을 따른다고. 바렐라는 특히 맹자의 인간 본성론에 주목한다. 또한 그는 앞 장에서도 언급했듯 우리의 자아가 비어있다고 주장한다. 동양인인 우리로서는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는 관점이다.

 

참고 서적

마투라나, <있음에서 함으로>

데닛, <자유는 진화한다>

지젝, <시차적 관점>


 














호모 무지쿠스가 부르는 여섯 가지 노래

 

호모 무지쿠스, 대니얼, J 레비틴

뇌의 왈츠, 대니얼 J 레비틴

 

레비틴은 인류학자, 고고학자, 생물학자, 심리학자 모두 인간의 기원을 연구하지만, 음악의 기원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적다고 말했지만, 예외적인 인물이 스티븐 핑커다. 그는 음악을 귀로 듣는 치즈케이크라고 말했다. 비유는 말랑말랑하지만 의미는 가혹하다. 핑커가 보기에 음악은 치즈 케이크만큼이나 생존이나 번식에 도움이 되지 않기에, 딱히 연구할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레비틴은 <뇌의 왈츠>를 통해 핑커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음악도 진화의 산물임을 주장한다. <호모 무지쿠스>는 이러한 주장의 확장판이라고.

 

즐거운 노래를 들으면 세로토닌의 수치가 증가하여 기분을 좋게 하고 활기를 불어넣으며 스트레스를 줄이고 면역계를 튼튼하게 한다. 슬픈 노래는 프롤락틴을 배출시켜 기분을 전환해 준다. 저자는 이 책의 마지막에 <역사상 가장 완벽한 사랑 노래>마이크 스코트의 <모두 가져와>를 꼽았다고.















 

아버지의 역사, 아버지들에 대한 찬사

<아버지들에 대한 찬사>, 시몬느 코르프 소스

<노아의 외투> 필리프 쥘리앵

 

<아버지들에 대한 찬사>아버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에 동조하지 않는다고. 그렇지만 부성의 과거 모델이 작동하지 않기에 새로운 모델을 찾아야 하는 게 오늘날 아버지들이 직면한 현실이다. ‘부성의 과거 모델은 필리프 쥘리앵의 <노아의 외투>가 요긴하단다. 원래 아버지의 일차적 의미는 정치적, 종교적 아버지였다. 이런 의미에서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아버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이기 때문에 아들을 낳는다.

 

이러한 아버지18세기 루이 16세의 처형으로 커다란 전환을 맞는다. ‘부친 살해에 의해 정치적, 종교적 아버지에서 오로지 가정으로 아버지의 역할이 축소된다. 또한 아버지의 권리를 말하던 시기는 지나가고 아이의 권리라는 새로운 관심사가 등장한다. ‘아이의 권리가 중시되고 어머니의 권리가 강화되면서 아버지의 권리는 더더욱 축소된다.

 

프랑스의 아버지는 다른 나라보다 더 독특한 입장에 놓이게 된다. 임신을 장려하기 위한 정부 정책의 일환으로 아버지가 아이를 양육한다기보다는 오히려 국가가 아이들을 양육하기 때문이다. 즉 프랑스 아버지는 더더욱 아버지의 권한이 축소될 수밖에 없다아버지로서 좋은 시절은 다 끝났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아버지의 권위가 무너지면 무너질수록 사회는 더 좋아질 것을 믿는다.

 

남성과 여성 그리고 소통

<남자를 토라지게 하는 말, 여자를 화나게 하는 말>, 데보라 테넌

<남자다움에 관하여>, 하비 맨스필드

 

저자인 데보라 터넌은 남성과 여성의 언어에도 성차가 있다고 주장한다. 남성의 대화 목적이 독립이라면 여성의 대화 목적은 친교. 이런 차이로부터 소통은 가능할까? 저자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길 충고한다. 그러나 <남자다움에 관하여>를 쓴 하비 맨스필드는 성별간의 차이를 부인할 수 없다면 언어적 차이 또한 부인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남자는 남자답게, 여자는 여자답게 행동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7. 언어의 종말과 이야기의 향연

 

거꾸로 바벨탑 이야기. <언어의 종말>, 앤드류 달비.

 

저자인 앤드류 달비에 따르면, 오늘날은 언어의 분화 과정이 아니라 언어의 통합이 진행되고 있으며, 이것이 현재 인류가 처한 위험이라고 본다. 그는 21세기엔 25백개의 언어가 사라지고 약 200개의 언어만이 생존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그렇다면 언어가 사라지는 게 왜 문제란 말인가?

 

언어학자로서 저자가 우려하는 것은 세계의 각 언어로 전승되고 보존되어온 지식을 우리가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번역할 때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직접 건너갈 수 없으며 항상 현실 세계를 거쳐서 가야만 한다. 이때 각 언어는 세계를 보고 나누고 구분하는 각기 다른 관점을 갖고 있으며 이에 따라 그것이 그려내는 현실 세계의 지도도 다를 수밖에 없다. 즉 각 언어는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에 대해서 각기 다른 통찰력을 제공해주며 우리에겐 그러한 대안적인 세계관이 필요하다. 한 언어의 소실은 곧 인간 경험을 이해할 수 있는 한 가지 대안의 상실이다. 게다가 보다 중요하게는 다른 언어와의 상호작용만이 우리 각자의 언어를 더욱 유연하고 창조적으로 만들어 준다.


외국어를 배울 때 마다 언어가 하나면 안 되는 거야? 그런 거야?’ 라는 투정을 부리곤 했었는데, 그렇구나. 소통되는 언어가 적어질수록 사유의 폭도 그만큼 얇아지리라.

 

이야기 탐구의 철학적 향연, <서사철학> 김용석

 

로쟈의 철학자 김용석에 대한 상찬이 인상 깊다. ‘유래없는 깊이와 넓이’, ‘거대한 향유 고래가 수면으로 솟아오르는 걸 보는 기분이라니. 부끄럽게도 난 이 책을 통해 김용석이라는 이름을 처음 접했다. 로쟈의 상찬은 계속된다.

 

세상 자체가 이야기의 중층 구조다. <서사철학>은 이러한 이야기들의 세계, 이야기들의 우주에서 무엇을 읽을 수 있고, 무엇을 해석할 수 있는지 시범적으로 보여준다. 한마디로 장관이다.

 

내러티브적 인식과 인문 과학, <내러티브, 인문과학을 만나다>, 도널드 폴킹혼.

 

저자는 인간은 세 가지 존재 영역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한다. 물질 영역과 유기체 영역, 그리고 정신(의미) . 이 중 오로지 의미 영역만이 인간 존재의 고유한 영역이고 내러티브는 의미 영역의 작용 가운데 하나다. 저자는 기존의 의미의 철학으로부터 한 걸음 나아가 의미의 영역이 사물이나 실체가 아니라 활동임을 강조한다. 물질 영역이 자연과학적 방법에 의해 연구되듯 의미영역은 역사학과 문학비평이 참조점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인문과학은 역사학과 문학이론에 더 치중해야 한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소설 이론의 역사> 윌리스 마틴

미케 발.

 













8. “ 너희가 한국어를 믿느냐?”

 

이것이 번역이다.

번역의 탄생, 이희재

<번역은 반역인가> 박상익

 

이희재는 들이밀기와 길들이기의 딜레마에 대해 말한다. 직역과 의역 사이에서의 고민을 드러내는 표현이다. 예전엔 발코니를 툇마루로 치즈를 소젖메주로 번역했다고 한다. 길들이기의 예다. 저자는 길들이기로서의 의역을 더 강조한다. “번역이란 외국어를 옮기는 작업이 아니라, 한국어를 바로 세우는 작업이다라고 말한다. 그가 외국어의 부자연스런 조어를 한국어의 특징을 최대한 살려 쓰자는 주장에 대해선 적극 동감한다. 번역이 저자를 위해서 라기 보단 독자를 위한 것이라는 저자의 주장을 따르자면 과도한 길들이기는 오히려 독자에게 해를 끼치진 않을까. 로쟈는 번역에서도 들이미는일은 이제 그만했으면 싶다고 말한다. 내 바램은 적어도 한국 소설이라면 외국 소설인양 일명 번역체 문장이라는 마스카라로 떡칠하는 추태는 그만 벌였으면 싶다. 한국 문단은 포용심이 넓은 건가? 이런 소설가에게 상 좀 그만 안겨줘라. 정말이지 난생처음으로 책 읽다 토할 뻔했다.

 

너희가 한국어를 믿느냐?” <번역비평> 창간호.

 

정가 2만원인 책 2천부를 초판으로 찍었을 때 역자가 받을 수 있는 최대 수입은 320만원 정도라고. 번역료가 번역의 적이었다. <뉴욕 타임스> 서평란의 경우 30~40면이라니! 허걱.

 

번역가의 겸손 혹은 소명의식, <번역, 권력, 전복> 로만 알바레즈

 

오역을 언급한다. ‘하느님의 양신의 횃불이 되고. lamblamp로 해석했다.

 

니체와 문체의 속도, <번역 이론>, 라이너 슐테 외 엮음.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데 가장 어려운 것은 그 문체의 속도이다













 

니체, <선악의 저편>

 

예를 들자면 니체는 독일어의 경우 빠른 템포presto’를 거의 표현할 수 없다며 유감스러워했다. 한참 웃었다.

 

우리, 적어도 말인은 되지 말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얼굴 찌푸리게 하는 25가지 인간유형> 류짜이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는 ‘Übermensch’‘der letzte Mensch’를 말한다. 영미권에선 ‘superman/overman’으로 번역되고, 우리나라 번역서에선 주로 초인최종 인간으로 번역되곤 한다. ‘초인이란 역어는 대체적으로 합의를 이룬 듯 하나, ‘der letzte Mensch’비천하기 짝이 없는 인간’, ‘말종 인간’, 최후의 인간등등 아직까지 딱히 하나의 공통된 역어가 없는 실정이다. 이에 로쟈는 <얼굴 찌푸르기 하는 25가지 인간유형>을 참조해 말인末人이란 역어를 제안한다. 그에 따르면 말인이란 일반인들보다 하급으로 퇴화하여 위축되고 창조력이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보잘것없는 인간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말인이란 말은 루쉰이 만들어냈다고. 루쉰의 Q‘가 이런 말인이었다. 류짜이푸의 설명에 따르면 소인은 생리적이거나 지적인 면에서 일반 사람과 동일하지만 품격이 떨어지고 인격이 보잘것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말인은 대부분 우매하면서 선량하다.

 

말인은 지혜가 없는 대신 어느 말에나 순종한다. 힘은 없는 대신 상대방의 기분을 잘 맞춘다. 이렇게 되면 사회적으로 대량의 바보 언니가 세세 대대로 뒤를 이을 것이며 미래 사회는 말인이 좌지우지하는 사회가 될 것이다. 이러한 사회의 미래에 멸망의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질 것은 누가 봐도 자명한 일이다. 우리들이 한사코 말인의 대량 출현을 막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로자의 페이퍼 02. 니진스키의 고백, 니진스키 영혼의 절규

 

무용가 니진스키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울었다니, 그 생각만 하면 로쟈도 눈물이 난다고.

이건 뭐 달리 대책이 없다. 읽으면서 같이 우는 수밖에

 














9. “어머니가 나를 사랑한다니까!”

 

수레바퀴 밑에서데미안의 차이.

 

<수레바퀴 밑에서> 헤르만 헤세

<데미안> 헤르만 헤세

 

지금까지 읽은 책 중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책은?”이란 질문에 로쟈는 단연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밑에서>라고 답했다고. 로쟈에겐 이 책의 주인공 한스 기벤라트가 죽었을 때만큼 슬픈 적은 없었다. 한편 <데미안>은 데면데면했다고. 몇 번씩이나 읽다 그만두고 얼마 전에야 완독했다고 한다. 로쟈는 누구나 한번은 미치게 만드는 책의 마력이 여전히 미심쩍다며 <데미안>나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말한다. , 이 얼마나 특별한가. 나는 <데미안>읽고 미쳤었으니 또한 이 얼마나 평범한가.

계란이나 깨버릴까.

 

헤세의 차라투스트라 VS 니체의 차라투스트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리디리히 니체

 

헤세는 열세 살 때 니체를 읽고 그의 추종자가 아니며 니체 철학은 오래가지 못할 거라고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열세 살 때?? 그러나, <데미안>의 싱클레어는 니체 빠였다.

 

카프카 문학의 기원.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 카프카

 

아버지야말로 카프카 문학의 기원이라는 것.

 

어머니가 나를 사랑한다니까!” <최초의 인간>

 

어머니야말로 카뮈 문학의 기원이라는 것.

 

카프카가 아버지에 대한 증오 때문에 펜대를 잡았다면

카뮈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 때문에 펜대를 잡았다.
















 

10.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단 한 번뿐인 삶 VS 영원회귀,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쿤데라가 보기에 영원회귀 사상이 역으로 주장하는 바는, 한 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삶이란 그림자에 불과하며 아무런 무게도 갖지 않는 무의미한 삶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한 번의 실수처럼 정상 참작의 대상이 되며 노스탤지어까지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반대로 인생의 매 순간이 영원히 반복된다면? 우리는 마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처럼 영원성에 못 박힌 형국이 된다. 더불어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는 엄청난 무게의 책임을 짊어지게 될 것이다. 영원회귀의 삶이 너무도 무거운 삶이라면, 단 한 번의 삶은 깃털만큼이나 가벼운 삶이다. 짐이 무거울수록 우리의 삶은 지상에 더 가까워지면서 생생한 현실감을 갖게 될 테지만, 반면에 짐이 전혀 없다면 우리의 존재는 참을 수 없을 만큼 가벼워지면서 자유롭다 못해 무의미해질 것이다. 그리하여 쿤데라는 묻는다. “그렇다면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무거움, 아니면 가벼움?”

 

아인말 이스트 카인말Einmal ist Keinmal’, 한 번 일어난 일은 전혀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쿤데라는 토마스가 바로 이 한 문장에서 태어났다고 말한다. 토머스는 주로 여성들의 차이에 주목한다. 그는 여성들 간의 백만분의 일의 차이에 사로잡힌다. 테레사를 만나면서 토마스는 새로운 독일어 문장으로 대체된다. 에스 무스 자인Es muss sein”, 즉 그래야만 한다. 로쟈는 토머스가 가벼움의 세계에서 무거움과 필연성의 세계로 돌아갔다고 말한다.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에서 진동하는 토마스의 삶은 한 번뿐인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그래야만 한다사이에 걸쳐 있는 삶이기도 하다. 어느 쪽이 옳은가? 오직 단 한 번밖에 살지 못한다면 그러한 가치판단은 우리의 몫이 아니다. 그것이 영원회귀의 사상이 던져주는 메시지다.

 

단 한번 뿐인 삶은 가볍고, 영원회귀하는 삶은 무거운 걸까? <무의미의 축제>에서 쿤데라는 말했다. 삶이 무의미하다고. 그렇지만 우리는 그 삶을 사랑해야 한다. 사랑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서정적 바람둥이와 서사적 바람둥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이 소설엔 두 가지 정본이 있다. 체코어본, 프랑스어본인데 현재는 프랑스어본 번역만이 통용된다. 쿤데라는 자신과 세계와 타인에 대한 인간의 두 가지 태도서정적인 것서사적인 것으로 구분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프랑스인에게는 낯설었다. 그래서 서정적 바람둥이낭만적 한량으로, ‘서사적 바람둥이자유주의적 한량으로 바꾸는 것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고. 이런 이분법은 우리에게도 낯선 것이 되고 말았다기보다는 지금도 낯설다.

 

쿤데라의 안나 카레니나와 비인칭적 열정

 

<안나 카레니나>

<소설의 기술>

<커튼>

 

토마스와 테레사의 강아지 이름이 카레닌이었다니. 쿤데라의 톨스토이에 대한 오마쥬? 쿤데라는 <안나 카레니나>자살의 산문성에 대한 톨스토이의 탐구라고 했다고.

 

로쟈의 리스트 6. 정홍수의 평론집 <소설의 고독>

가라타니 고진, <근대 문학의 종언>

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밀란 쿤데라의 보헤미안적 삶과 성찰, <커튼> 밀란 쿤데라

 

체코 작가로 활동했지만 체코에게 쫓겨나 프랑스에서 프랑스어로 소설을 쓰는 쿤데라는 체코 작가프랑스 작가로 불리기 보단 중부유럽 작가로 불리길 선호하고, 더 나아가 보헤미아인이라 불리길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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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5-12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쿤데라도 그렇고 카프카도 그렇고... 좀 이쪽 사람들이 범세계적 글쓰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카프카적 글쓰기를 소수의 문학이라고 하더군요.

시이소오 2016-05-12 09:28   좋아요 0 | URL
앵글로 색슨적 문학보단 슬라브적 문학에 더 공감이 가네요.
주변인, 망명자, 유배당한 자, 디아스포라, 유목민적 글쓰기라고 할까요.
노마디즘을 주장하는 들뢰즈나 가타리에게도 카프카가 더 와닿을거에요.

읽는 책마다 체스와프 미워시의 <사로잡힌 마음>이 불쑥불쑥 튀어나와서
읽고 싶은데 아직 미번역이네요.

몇몇 작가를 제외하면 동유럽 작가들은 아직 우리에겐 낯선 문학이 아닐런지요?
그야말로 `소수자`문학인 듯.

곰곰생각하는발 2016-05-12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적없음.. 혹은 소속 없음이 카프카와 쿤데라 문학의 정체성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점에서 나보코보도ㅗ 같은 부류... 이들도 늘 모국어보다는 다른 언어를 사요앴으니 말입니다.

시이소오 2016-05-12 09:53   좋아요 0 | URL
일본어로 쓰긴 하지만 한국에도 서경식 선생님이나 강상중과 같은 `디아스포라` 작가들이 있죠.

소수자, 경계인, 혹은 경계 밖으로 쫓겨난 자의 문학은 아무래도 기존의 가치에 의문을 제시하기에
`우리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뜨리는`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동성애자, 여성에 대한 열등감이 있어요.)

`디아스포라 문학`의 계보를 추적해 보고 싶네요 ^______^

alummii 2016-05-12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읽고싶은 책 많네요 추천감솨...

시이소오 2016-05-12 12:56   좋아요 1 | URL
저도 차근차근 읽어봐야 겠어요 ^^

페크(pek0501) 2016-05-13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전에 수레바퀴 아래서와 데미안을 읽었는데
지금 다시 읽어 보면 그때 놓친 부분이 있다는 걸 알게 될 것 같아요.

오늘 날씨가 아주 좋아 걸으면서 기분이 좋았어요. 미세먼지가 없는 날의 행복을 만끽했어요.
내일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좋은 밤 되세요...

시이소오 2016-05-13 09:40   좋아요 0 | URL
헤세, 저도 다시 읽어보고 싶어요. 어제 저도 가까운 근교 산책 다녀왔어요. 오늘은 서서히 날씨가 개일듯 합니다.

화창한 하루 되시길 ^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