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5. 영국 역사가 에릭 홉스봅은 프랑스혁명이 일어난 1789년부터 1914년까지를 ‘장기 19세기’, 1914년부터 소련이 붕괴한 1991년까지를 ‘단기 20세기’라고 명명하였다. 장기 19세기는 계몽의 시대, 진보의 시대를 가리킨다.
나아가 홉스봄은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을 아울러 ‘20세기의 31년 전쟁’이라 파악했다. 31년 전쟁이 벌어진 기간은 유럽과 미국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심각한 위기를 맞이한 시대였다.
p19. 2001년 9월 11일 미국에서 일어난 동시다발테러, 2003년 이라크전쟁을 기점으로 전개된 시리아 내전과 우크라이나 위기, IS의 위협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전쟁과 분쟁을 일으키지 않았던 시기는 한순간도 없었다. 2008년의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유럽 사회도 점차 불안정해지는 추세다. 2014년 5월 22일부터 25일까지 EU 28개국에서 진행된 유럽의회 선거 결과, 프랑스의 국민전선, 영국의 영국독립당, 덴마크의 덴마크 인민당 등 반이민과 반EU를 기치로 내건 극우세력의 의석이 늘었다. 영국에서는 스코틀랜드 독립 문제가 불거졌고, 벨기에에서도 남북 대립이 격렬해지면서 북부인 플랑드르 지방 독립을 꾀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일본 또한 영토 문제를 둘러싸고 주변 국가들과 긴장을 높여가는 중이다. 특히 오키나와 현의 센카쿠 열도를 둘러싼 오해와 도발을 계기로 중국과 일본이 무력 충돌할 위험이 있다.
P19. 핵 이외의 병기를 써서 전쟁을 해도 사망자는 나온다. 우크라이나 분쟁으로 2014년에 약 2,500명이 죽었다. 2008년의 가자 지구 공습에서도 2,000명 정도의 사망자가 나왔다.
P46. 제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레닌의 지도하에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다. 러시아혁명으로 소련식 사회주의체제가 완성되면서 자본주의도 다시금 변모했다. 구체적인 예로 냉전 시대의 자본주의를 들 수 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제국주의로 거듭난 자본주의 국가들은 전쟁이 끝난 후 사회주의혁명을 저지하기위해 복지정책이나 실업대책 등 자본의 순수한 이윤 추구에 제동을 거는 정책을 마지못해 도입하게 되었다. ......이와같이 국가가 자본에 강력히 개입하는 자본주의를 마르크스 경제학에서는 ‘국가독점자본주의’라고 부른다.
실제로 냉전 시기인 1950년대부터 1970년대에 걸쳐 자본주의 진영은 전례없는 경제적 전영을 맞이했다. 홉스봄은 이 시대를 ‘황금 시대’라 부르는데, 황금 시대는 동시에 복지국가의 시대이기도 했다. 국가의 대규모 공공사업과 인심 후한 복지정책을 바탕으로 실업률은 낮아지고 수많은 노동자가 풍족한 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일부 독자들은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개념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결과를 놓고 보자면, 사회주의는 자본주의가 스스로 개혁할 수 있도록 촉진하는 역할 또한 담당했다.
그러나 소련이 붕괴하면서 동서 냉전이 종결된 1991년 이후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이때부터 미국의 패권이 완전히 확립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인력과 자원이 국경을 초월해 자유로이 이동하는 세계화가 점차 속도를 높여갔다. 구체적으로 보면 복지국가 노선이 막다른 길에 다다르자 신자유주의가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신자유주의란, 정부에 의한 사회보장과 재분배는 극도로 배제하고 기업과 개인의 자유경쟁을 추진함으로써 최대한의 성장과 부의 효율적인 분배가 달성된다고 보는 경제학적인 입장을 가리킨다.
개인적으로 2008년 즈음을 경계로 국제정세의 조류가 달라지면서 신제국주의 시대로 돌입했다고 생각한다. 리먼 브라더스 사태가 벌어지기 직전인 2008년 8월에 러시아 –조지아 전쟁이 발발했다.
2008년을 경계로 세계가 신제국주의 시대로 돌입했다는 증거는 얼마든지 꼽을 수 있다. 피너클 제도(센카쿠 열도)와 스프래틀리 제도, 파라셀 제도를 둘러싼 중국의 영유권 주장과 방공식별구역 설정이 구체적인 사례다. 우크라이나 위기, 러시아의 크림 반도 합병도 마찬가지다.
(스프래틀리 제도의 경우, 중국, 타이완, 말레이사아, 배트남, 브루나이 필리핀이, 파라셀 제도의 경우 중국, 타이완, 배트남이 각기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2016년 2월 미국은 중국이 남중국해에 방공식별구역을 설정하지 말 것을 경고한 바 있다.)
오바마 정권도 눈에 보이지 않는 제국주의의 길 위에서 돌진하는 중인데, 그 상징적인 지역이 남수단과 미얀마다. 2011년 석유 자원이 풍부한 남수단을 독립시킨 것은 오바마 정권의 공작이었다. 중국이 남수단의 석유 이권을 무리하게 개발하려 하자 오바마 정권이 남수단에 미국의 괴뢰국가를 세웠던 것이다.
중일전쟁에서 일본은 장제스 정권의 중국과 전쟁을 벌였다.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정부는 일본군에 눌려 내륙인 충칭으로 이동했는데, 당시 원장 루트라 불리는 물자 수송로를 통해 병기, 식량 등이 영국령 인도제국에서 충칭으로 운반되었다. 그 가운데는 미얀마를 거치는 루트도 있었다. 요컨대 오바마 정권은 미얀마를 친미 국가로 삼아 지난날의 원정루트를 틀어막았고, 미국의 양해 없이는 중국이 서쪽에 있는 인도양으로 나갈 수 없도록 했으며, 이란에서 파이프라인을 끌어오는 것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P59.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사회의 본질이 무엇이라고 생각했을까? 노동력의 상품화가 그 답이다. 노동력이 상품이 되려면 ‘이중의 자유’가 있어야 한다. 첫 번째로는 신분 제약이나 토지의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로이 이동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계약을 거부할 자유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두 번째로는 자신의 토지와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아야 한다. 이를 생산수단으로부터의 자유라 부른다. 토지에 얽매여 있지 않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 하지만 토지나 생산수단은 가지고 있지 않다.
P64. 이 흐름에 변화가 생긴 것은 1600년에 동인도회사가 설립되어 인도와 무역을 시작하면서다. 그 후 인도에서 캘리코라 불리는 면직물이 수입되어 17세기 후반부터 영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영국에서도 캘리코에 대항하기 위해 면직물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캘리코와 경쟁해서 이길 수 있으려면 대량으로 생산해 싸게 팔아야만 했다. 이 캘리코라는 수입 제품과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시작된 것이 산업혁명으로, 이후 면직물을 생산하기 위한 방적기와 직기가 잇다랑 발명되었다.
P65 이 1873년에 시작된 대불황은 소규모의 공황을 반복하며 1896년까지 이어졌다.
공황을 설명하는 이론은 과잉생산설이라든가 과소소비설 같은 다양한 설이 존재한다. 더 오래된 설로는 태양흑점설도 있다.....그 가운데 내가 보기에 가장 설득력이 높은 것은 우노 고조가 주장한 자본과잉설이다.
(임금 상승, - 기술 혁신- 호황 – 또 다시 임금 상승 – 공황)
공황은 사회적인 부담을 가중시킨다. 따라서 어떻게 해야 공황을 피할 수 있을 것인지가 근대 자본주의의 과제가 된다. 가장 손쉬운 공황 회피책은 전쟁이다. 제 2차 세계대전 후 미국에서 본격적인 공황이 발생하지 않은 이유는 미국의 공공사업에 전쟁이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은 미국의 공공사업이었고, 그에 협력한 일본 또한 적어도 ‘버블’이 붕괴하기 전까지는 공황에 가까운 불황을 겪지 않았다.
현재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등과 같은 선진 자본주의국가는 겉으로 자유무역체제 옹호를 외치면서도 보호주의로의 전환을 교활하게 도모하고 있다.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는 유라시아공동체 창설을 제창하고 있는데, 이는 이른바 ‘대동아공영권’ 형태의 경제블록이다.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또한 본질은 블록경제다.
P71 <상설세계사>는 ‘영국과 독일의 패권 다툼’을 제1차 세계대전의 커다란 원인으로 지적하고 있다.
러시아의 역사 교과서에서는 전쟁 원인의 대부분이 독일, 오스트리아 블록에 존재한다고 명확히 단정하고 있다.
P 75. 레닌은 세계대전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레닌이 <제국주의론>을 저술하는 데 토대가 되었던 영국의 경제학자 J.A 홉슨의 <제국주의론>에는 일정한 조건에서라면 전쟁을 피할 수 있다고 적혀 있다......그가 제시한 시나리오는 제국주의국가 사이의 세력 균형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앵글로색슨연합, 범게르만연합, 범슬라브연합, 범라틴연합과 같이 광역화된 제국주의 국가연합을 형성해 세계적인 규모에서 세력 균형을 취한다는 발상이다.
P82. 역사에는 독일어로 ‘게쉬히테Geschichte’와 ‘히스토리에Historie’라는 두 가지 개념이 존재한다. 히스토리에는 연대에 따라 사건을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편년체를 가리킨다. 이와 달리 게쉬히테는 역사상의 사건의 연쇄에는 반드시 의미가 있다는 태도에 입각해 기술한다.
제2장 민족문제를 독해하는 비결. 내셔날리즘
p94. 정리하면 영국,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칼 등 서유럽은 비교적 이른 단계에 주권국가로서의 조건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러나 중, 동유럽을 포함한 15세기 말의 신성로마제국(독일)은 서유럽과 달리 혼돈 상태였다. 신성로마제국은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동부, 스위스, 오스트리아, 체코 등 상당히 넓은 지역을 아울렀는데, 그 실태는 ‘이름뿐인 국가’였다. 황제는 있으나 권력이 없었다. 제국 안에 수백이나 되는 영방국가가 분립되어 있는 상태였다.
절대주의 시대가 시작되는 16세기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세계사의 중심을 차지한 시대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원래 스위스 동북부의 약소 귀족으로, 통치하는 영토도 변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1273년, 합스부르크 가문의 계승자인 루돌프 1세가 느닷없이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선제후들이 루돌프 1세를 왕으로 고른 이유는, 무난하면서도 다루기 쉬운 인물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능력이 뛰어난 인간을 왕으로 삼고 싶어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들의 부정적인 기대와는 정반대로, 루돌프 1세는 황제로 활약했다. 루돌프 1세의 황제 취임을 기점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은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그리고 1438년 이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사실상 합스부르크 가문이 세습하게 되었다.
p97. 루터에서 시작된 가톨릭교회를 향한 비판운동은 유럽 전역을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로 갈랐으며, 이는 내전과 전쟁으로 발전했다. 그 정점에 선 전쟁이 신성로마제국을 무대로 1618년에 시작된 30년 전쟁이다.
요컨대 30년 전쟁은 가톨릭 대 프로테스탄트라는 종교 전쟁과, 합스부르크가 대 부르봉가의 대립이라는 두 가지 측면을 지닌 국제전쟁으로 확대되었던 것이다. 30년 전쟁이 끝난 1648년에 종전 처리를 위한 강화회의가 독일 북서부인 베스트팔렌 지방에서 열렸다. 여기서 체결된 조약이 베스트팔렌조약이다.
베스트팔렌 조약은 ‘주권국가에 의해 구성되는 유럽’이라는 세계의 질서를 창출하고, 전쟁을 초래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긴 대립에 종지부를 찍음으로써 중세와 근대를 가르는 명실상부한 기준점이 되었다.
근대적인 네이션은 1789년 프랑스혁명 당시 탄생했다.
독일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나폴레옹에게 정복당한 국가들에서는 민족의식과 국민의식의 각성을 촉구하는 내셔널리즘이 싹트기 시작했다.
합스부르크가의 오스트리아제국은 현재의 헝가리를 포함하는 당시 최대의 다민족국가였다. 오스트리아제국의 영토는 독일인, 마자르인(헝가리인), 체코인, 폴란드인, 루마니아인, 슬로바키아인, 우크라이나인, 세르비아인, 마케도니아인 등 다수의 민족을 아울렸다. 이들 민족이 19세기의 내셔널리즘 안에서 자치와 독립을 요구하는 움직임을 강화했던 것이다.
헝가리는 1867년에 자치를 인정받아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이 성립했다.
1877년부터 이듬해까지 벌어진 러시아 –튀르크전쟁에서 오스만제국은 남하정책을 펴는 러시아제국에 패했고, 이후 루마니아와 세르비아, 몬테네그로가 오스만제국에게서 독립했다.
1908년에는 오스만제국에서 일어난 혁명의 혼란을 틈타 불가리아가 오스만제국에게서 독립했다. 같은 해 오스트리아가 보스니아 헤르체코비나를 병합했는데, 보스니아 헤르체코비나에는 슬라브족인 세르비아인이 다수 거주했기 때문에 세르비아는 이 병합에 반발했다. 그 후에 발발한 발칸전쟁이 제1차 세계대전의 불씨가 되는데, 러시아 제국을 리더로 하는 범슬라브주의와 독일, 오스트리아제국을 중심으로 하는 범게르만주의 사이의 민족적인 대립이라는 구도를 띠었다.
p105. 세계사 교과서나 참고서는 결코 가르쳐주지 않는 강력한 무기를 소개하겠다. 바로 베네딕트 앤더슨, 어니스트 겔너, 앤서니 스미스 세 사람의 내셔널리즘론이다.
p106. 먼저 앤더슨의 논의를 소개하겠다. 내셔널리즘 문제를 생각할 때, 원초주의와 도구주의라는 상반되는 두 가지 사고가 있다. 원초주의란, 일본 민족은 2,600년 동안 이어졌다든가 중국 민족의 역사는 5,000년이라든가 하는 식의, 민족에게는 근거가 되는 구체적인 원천이 있다는 실체주의적인 사고다. 이때 구체적인 근거로 거론되는 것은 언어, 혈통, 지역, 경제생활, 종교, 문화적 공통성 같은 것들이다.
도구주의는 민족이란 개념을 엘리트들이 만들었다고 보는 사고다. 다시 말해 국가 엘리트가 통치 목적을 위한 도구로 내셔널리즘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이 도구주의의 대표적인 학자가 앤더슨이다. 앤더슨에 따르면, 국민이란 마음속에 이미지로 그려지는 상상의 정치적 공동체다. 이미지일뿐 실체적인 근거는 없다. 우리는 같은 민족이라는 이미지를 모두가 공유함으로써 국민의식이 성립한다는 것이 앤더슨의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같은 민족이라는 이미지는 어떻게 공유되는가? 앤더슨이 강조한 것은 표준어 사용이다. 표준어는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표준어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앤더슨은 ‘출판자본주의’의 힘이라고 답한다.
앤더슨의 논의에서 하나 더 중요한 개념으로 ‘관주도 내셔널리즘official nationalism’이 있다. 이는 도구주의와 관련이 있다.
다음으로 소개할 어니스트 겔너 역시 도구주의의 대표적인 학자다. 그의 주요 저서인 <민족과 민주주의>는 <상상의 공동체>와 더불어 내셔널리즘론의 명저다.
내셔널리즘 사상이 있고 나서 내셔널리즘 운동이 생겨난 것이 아니라, 내셔널리즘 운동이 있고 나서 내셔널리즘 사상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 결과 민족 또는 국민이라 번역되는 ‘네이션’이 탄생했다.
겔너는 왜 내셔널리즘을 근대 특유의 현상이라고 여겼을까? 산업사회가 아니고서는 문화적인 동질성이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일본에서 앤더슨이나 겔너만큼의 인지도는 없으나, 앤서니 스미스의 주저인 <내셔널 아이덴티티>와 <네이션의 종족적 기원>은 획기적인 내셔널리즘론이다.
스미스는 근대적인 네이션을 형성하는 ‘무언가’가 있다고 보았다. 이 ‘무언가’를 나타내는 개념이 고대 그리스어인 에스노스 또는 현대 프랑스어인 에스니ethnie다. 그렇다면 에스니란 무엇인가? 스미스는 “에스니란 공통의 조상, 역사, 문화, 어떤 특정 영역과의 결합을 지니며 내부에서의 연대감을 소유한, 이름을 가진 인간 집단”이라고 정의했다. 스미스에 따르면 근대적인 네이션은 반드시 에스니를 가지고 있다.
근대에 체코 민족이 형성된 것은 중세에 체코라는 에스니가 있었기 때문이다. 후스는 그것을 결정화하는 역할을 완수했다. 후스는 스스로를 근대적인 체코 민족이라 여기지 않았다. 체코라는 출신지, 체코어라는 언어와 결합된 자의식이 있었을 따름이다.
에스니는 민족의식이 탄생한 후 역사적인 근거로서 사후에 발견된다. 에스니를 발견한 것은 문화 엘리트였다. ....요컨대 에스니가 있기 때문에 네이션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네이션이 생겨났기 때문에 에스니가 발견되는 것이다.
p125.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했다. 그 결과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분리되었고, 1918년에 헝가리는 독립했다. 제국은 해체되었으며 체코슬로바키아와 유고슬라비아가 독립했다. 헝가리 왕국의 동부 지역은 루마니아가 차지했다. 앤더슨은 관주도 내셔널리즘의 본질을 민중적 내셔널리즘에 대한 권력 집단의 응전이라고 말한다. (사실 이승만 초기에 대중들에게 인기있었던 체제는 사회주의, 공산주의였다. 그래서 기회주의자 박정희도 빨갱이가 된 것이다. 민중적 내셔널리즘을 대항한 이승만의 응전이 반공주의였던 것)
보헤미아는 오스트리아제국 내에 있는 슬라브족의 연대를 주장했는데, 이를 오스트리아슬라브주의라고 일컫는다. 오스트리아슬라브주의가 드러난 전형적인 사례가 ‘팔라츠키 서간’이다.
팔라츠키는 체코의 역사가이자 민족운동의 지도자다.
(독일 통일에 대한)입장은 두 가지로 나뉘었다.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독일을 통일하려는 대독일주의, 오스트리아와 나뉘어서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통일하려는 소독일주의였다. 보헤미아의 팔라츠키에게도 대독일주의 대표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회의에 참석하라는 요청이 있었다. 이 참석 요청을 거부한 서간이 팔라츠키 서간으로, 체코의 민족운동을 논할 때 가장 중요한 자료다.
그(팔라츠키)의 주장은 오스트리아에서 독일을 분리해 체코인, 슬로바키아인, 폴란드인, 슬로베니아인과 같은 슬라브계 민족의 연방으로 오스트리아를 재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오스트리아슬라브주의다. 따라서 같은 슬라브족이라 해도 세계 제국을 지향하는 러시아와의 연대는 거부했다. 또한 독일은 독일 내부에서 통합되어야 한다고 여겼으며, 그 과정에 오스트리아제국은 관여하지 않기를 바랐다.
p130. 러시아 제국 시대까지의 중앙아시아는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 땅이었고, ‘투르키스탄’이라 불렀다. ......스탈린은 1920년대부터 1930년대에 걸쳐 투르키스탄에 자의적인 분할선을 그었다.
나아가 레닌은 잠재적인 피억압민족으로 중앙아시아의 캅카스의 소수민족을 눈여겨보았고, 무슬림 공산주의자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이 무슬림 공산주의자에게 중앙아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실행하게 한다는 것이 레닌의 속셈이었다.
스탈린은 이슬람원리주의혁명이 확대되는 것에 점점 더 위기를 느꼈다. 그래서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위에서부터 여러 민족을 만들어냈다. 다시 말해 투르키스탄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리기스, 투르크메니스탄, 카자흐스탄 이렇게 다섯의 민족 공화국으로 분할했다.
1990년대의 타지키스탄 내전과 같이 국가가 분열하고 민족별로 국가가 등장해, 서로 지독한 살육을 자행하는 형태로 민족의식이 높아지고 말았다. 이는 내셔널리즘이 인간을 살해하는 사상이 되었음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난 이 ‘혁명’에 이어 2014년 3월에는 우크라이나의 크림자치공화국에서 주민투표가 실시되었으며, 러시아 편입을 요구했다. 그리고 러시아는 크림자치공화국의 편입을 결정했다. 2014년 4월 이후에는 친러파 세력이 우크라이나 동부를 장악하고 분리독립을 주장했다. 그러자 새 정권은 치안 부대를 투입했으나 사태는 점점 더 혼미해지는 가운데 내전으로 발전했다. 2014년 9월, 도네츠크 주와 루간스크 주를 실효 지배하는 친러파와 우크라이나 중앙정부 사이에서 정전협정이 체결되었으나, 무력 충돌이 완전히 종결된 것은 아니다.
우크라이나 서부의 중심인 갈리시아 지방은 원래 야기에우워 왕조 시기 폴란드왕국의 영토였다. 폴란드는 18세기에 접어들자 지방 귀족의 대립에 주변국이 개입하게 되었고, 결국 18세기 후반 인접 국가였던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삼국에 의해 분할되었다. 이때 갈리시아 지방은 오스트리아 제국(훗날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합스부르크령이 되었는데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이 제 1차 세계대전에서 패하면서 1918년에 붕괴된 후, 다시 폴란드령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과 소련이 잇달아 침공했는데, 갈리시아 지방이 정식으로 소련령 우크라이나에 통합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일이었다. 그때까지는 러시아에 한 번도 지배받은 적이 없던 땅이었다.
우크라이나 동부의 역사는 서부와 완전히 다르다. 동부 지역은 17세기에 러시아제국령으로 편입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혁명을 틈타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그 후 내전 상태에 빠졌으며 1920년에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으로 편입되었다. ....종교도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러시아정교회를 믿는다.
이와 달리 서부의 우크라이나인들은 ‘우리는 결코 러시아인이 아니며 우크라이나인이다’라는 우크라이나 민족의식이 강하다. .....우니아트 교회(동방규일교회, 동방전례가톨릭교회)신자가 다수였다.
서우크라이나 루흐(운동)는 기본적으로 ‘우크라이나가 독립하면 핵무기를 보전하면서 대국으로서 러시아에 대항하겠다’라는 강경 노선을 채택했다. 서부의 민족주의자들은 러시아의 영향을 배제하고 EU와의 연대를 강화하고자 하는 반면, 동부, 남부는 러시아에 강한 친근감을 나타내며 우크라이나에서의 분리독립에도 긍정적인 주민이 다수 존재한다.
여기에는 자기 자신이 영국의 일원이라고 느끼는 ‘유니오니스트(아일랜드 자치에 반대하는 통일당원) 이언과 아일랜드인이라는 사실에 강한 민족 정체성을 가지는 ’내서널리스트 패트릭‘이라는 대조적인 두 사람의 청취자 모델이 등장한다.
“제 이름은 이언입니다. 저는 유니오니스트입니다. 저는 제가 영국의 일원이라고 느끼고 있으며, 아일랜드가 영국의 일부로 계속 존재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저는 패트릭이라고 합니다. 저는 내셔널리스트입니다. 저는 북아일랜드가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19세기가 되자 아일랜드는 영국의 정식 식민지가 되었다. 19세기 중반에 아일랜드를 덮친 기근으로 약 100만 명이 굶어 죽었지만, 영국 정부는 냉담한 태도를 보였을 따름이다. ...1922년 북부 아일랜드(얼스터 6주)는 영국의 일부로 잔류하고 나머지 지역은 아일랜드자유국(1949년에 아일랜드 공화국으로 개칭)으로 독립했다.
2014년 9월 18일에 시행된 스코틀랜드 독립에 대한 찬반을 묻는 주민투표에서도 앞서 살펴본 우크라이나 및 아일랜드와 똑같은 구도를 발견할 수 있다. 1707년의 연합법에 따라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웨일스 포함)에 병합되었다. 그때까지 스코틀랜드는 독립된 왕국이었다.
가령 스코틀랜드가 독립을 가결했다면 어떠했을까? 북해 유전은 스코틀랜드의 배타적 경제수역 내에 있다. 따라서 스코틀랜드가 독립할 경우, 영국은 북해 유전을 상실한다. 영국이 이를 순순히 받아들였을리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전쟁이 발발하거나, 또는 스코틀랜드 내부에서 잉글랜드 통합파와 스코틀랜드 독립파가 충돌을 빚게 될 것이다.
그리스어에는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라는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시간 개념이 존재한다. 크로노스란, 매일 흘러가는 시간을 가리킨다. 연표나 시계열로 나타낼 수 있는 시간은 크로노스다. 이와 달리 카이로스는 어느 사건이 일어나기 전과 일어난 후 의미가 달라지는, 크로노스를 잘라내는 시간이다. 영어로는 타이밍(시기)에 해당한다.
스코틀랜드의 주민투표를 통해 잉글랜드인과 스코틀랜드인은 서로 카이로스가 다르다는 점이 가시화되었다. 주민투표가 시행될 즈음, 영국 정부뿐 아니라 여당과 야당 모두가 독립에 반대했고, ‘독립하면 경제적으로 곤궁해질 것’이라며 스코틀랜드에 압력을 가했다. 영국의 이러한 대응에 수많은 스코틀랜드인들은 자신들이 차별당하고 있다는 인식을 품었다.
신제국주의가 진행되고 있는 현재, 내셔널리즘이 다시금 소생하고 있다. 합리성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내셔널리즘은 근현대인의 종교라고도 할 수 있다. 종교인 이상, 누구든 무의식 차원이라 하더라도 내셔널리즘을 각자의 내면에 품고 있다. 내셔널리즘의 폭주를 저지하기 위해 역사에는 다양한 견해가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P159. 2014년 6월 이후, 이슬람 수니파 무장집단인 ISIS(이슬람, 시리아 이슬람국가, 이후 이슬람국가 IS로 개칭)가 국제정세를 크게 뒤흔들었다. IS의 확대는 시리아 정세와 관계가 깊다. 시리아 정세를 읽을 때 중요한 키워드가 알라위파다. 시리아의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은 알라위파가 설립했다. 일본 언론들은 알라위파가 시아파 가운데 하나라고 보도했으나, 이 둘은 완전히 다르다. 알라위파는 기독교와 토착 산악종교 등 다양한 요소가 섞여 있는 특수한 토착 종교다. 시리아 국민의 70%는 수니파이며, 알라위파는 10%정도다. 소수에 불과한 알라위파가 시리아를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는 프랑스가 시리아를 위임, 통치하던 시대의 영향 때문이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시리아는 프랑스의 위임통치령이 되었다. 프랑스는 시리아를 지배하기 위해 알라위파를 중용했고, 현지 행정과 경찰, 비밀경찰에 알라위파를 임명했다. 식민지를 지배할 때 소수파를 우대하는 것은 상투적인 수단이다. 다수파 민족이나 종교집단을 우대하면 독립운동으로 번질 수 있기 때문에 소수파를 우대함으로써 종주국에 의존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1994년에 제노사이드가 벌어진 르완다에서도 종주국인 벨기에는 소수파인 투치족ㅇ르 다수파인 후투족보다 더 우대한 바 있다.
P161. 그러나 시리아에는 무슬림동포단이 없었다. 현재 알아사드 대통령의 부친인 하페즈 알아사드 전 대통령이 몰살시켰기 때문이다. 사정이 그러한 까닭에, 반체제운동이 일어났어도 통일성을 갖출 기미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시리아는 내전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나아가 알아사드의 지원을 받아 레바논에서 들어온 시아파의 과격파 무장세력인 헤즈볼라(레바논 이슬람 저항을 위한 신의 당)가 혼란을 가속화시켰다. 덕분에 알아사드 쪽은 세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시아파에 대항하기 위해 알카에다계 사람들이 시리아에 들어와서 대 혼란에 빠졌다. 여기에 편승한 것이 IS다.
IS는 반체제파를 공격해 자금과 무기를 획득하고, 시리아 북부를 제압해 이라크로 세력을 확대했다. 왜 이라크였을까? 지정학적으로보면 이라크에는 유전이 있다.
후세인 정권 시절 이라크는 이란과 대립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독재 치하였다고는 하나 기본적으로는 이라크인이라는 국민의식이 존재했다. 수니파인지 아니면 시아파인지는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데 신생 이라크에서는 다수파인 시아파가 권력을 쥐었고 수니파는 푸대접을 받았다. IS는 바로 그 지점을 파고들었고, 이라크의 수니파도 IS에 복종하기 시작했다.
이 시리아 문제와 이라크 문제가 중동 정세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올 것인가? 핵심은 미국과 이란의 접근에 있다.
IS의 침공을 받은 시점에 이라크를 통치하고 있었던 말리키 정권은 쉽게 말해 미국의 괴뢰정권인데, 종교적으로는 이란의 국교인 시아파와 같은 뿌리였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란 입장에서 현재의 이라크는 지원해야 할 대상이다. ....이란은 반미정권으로 알려져 있으나 온건파인 로하니 대통령이 집권한 후로는 미국에 양보하고 다가서는 자세를 보였다. 그리하여 이번 이라크 문제에서 미국과 이란 양쪽이 이라크를 지원하는 보기 드문 상황이 벌어졌던 것이다.
러시아와 미국의 대립이 깊어질수록 IS의 기쁨도 커진다.
P164. IS나 알카에다로 대표되는 이슬람원리주의의 특징은 앞서 서술했듯이 단일 칼리프가 지배하는 세계제국 수립을 지향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세계제국 수립을 위한 행동은 반드시 성공을 거둔다. .....이슬람 원리 주의를 위해 행동한 이슬람 혁명이 성공하면, 당연히 성공한 것이다. 한편 그 과정에서 전사하더라도 알라를 위해 싸우다 순교한 셈이므로 저세상에서 행복을 얻는다. 따라서 이 또한 성공한 것이다. 이처럼 이슬람원리주의 교의에 따른다면, 혁명에 참여할 경우 반드시 승리하게 되어 있다.
2013년 2월, 바티칸에서는 이례적인 사건이 있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생전 퇴위였다. 같은 해 3월에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새 교황 프란치스코가 즉위했다. ....교황의 생전 퇴위는 1415년 그레고리우스 12세 이후 598년 만에 일어난 사건이다.
후스를 화형에 처한 후, 교회는 정립 상태에 있던 교황들을 모두 퇴위시키고 새로운 교황인 마르티노 5세를 선출해 교회의 통일을 회복했다. 따라서 2013년 베네딕토 16세의 퇴위는 가톨릭교회가 당시와 필적할 만한 위기를 인식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사건이다.
1958년에 요한 23세가 교황에 취임했다. 개혁파였던 요한 23세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개최했다. 이는 역사상 처음으로 전 세계 5대륙에서 모인 회의로, 이후 교회개혁의 기점이 되기도 했다. 이 공의회를 통해 이슬람, 프로테스탄트, 무신론자, 공산주의와 대화하겠다는 대화 노선으로 방향이 바뀌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도출된 대화 노선은 폴란드 출신인 요한 바오로 2세가 1978년에 교황에 취임하며 다시 한 번 크게 바뀐다. 그는 중유럽과 동유럽의 사회주의 국가에서 배출된 첫 번째 교황이라는 점에서 커다란 주목을 받았다.
바티칸의 세계 전략 첫 단계는 요한 바오로 2세 시대에 공산주의를 붕괴시키는 것이었다. 이 전략은 1991년 소련 붕괴로 실현되었다. 두 번째 단계는 이슬람에 대한 전략이다.
바티칸이 이슬람원리주의를 봉쇄하기 위해 내놓은 수단은 ‘대화’다. ....먼저 이문화와의 대화를 통해 이슬란 온건파를 아군으로 삼는다. 그리고 아군이 된 이슬람교도가 ‘테러 행위를 벌이는 과격파로 인해 우리 이슬람교가 세계의 적으로 몰려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과격파가 물러나기를 바라자’라고 여길 수 있도록 유도한다. 대략 이런 시나리오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한편 바티칸 입장에서 이슬람 과격파 다음으로 성가신 존재가 중국이다. 중국 정부는 자국 내 가톨릭 교회의 고위 성직자 인사권이 바티칸에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전근대적인 사고의 특징은 ‘보이는 세계’를 통해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는 것이다. 우리를 포함한 근대인이 보이는 세계를 중시하는 까닭은 이 시대가 존재하는 방식 자체가 근대적인 사고의 제약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경제가 대표적이다.
인간의 노동력도 상품화되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만들어진 상품도 전부 돈응로 환산되며, 그렇게 환산된 돈을 증식하는 일을 목적으로 삼는 것이 자본주의 경제다. 그 같은 자본주의 경제에 젖어들면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향한 상상력이나 사고력이 고갈되고 만다. 요컨대 초월적인 것을 사고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초월성의 결여를 메우는 것이 내셔널리즘이다. 인간과 초월성을 적당히 결합하는 것, 다시 말해 초월성으로 가는 지름길이 종교적 원리주의다. 때로는 초월성이 살인을 쉽게 저지르게 만든다.
P171. 먼저 헤브라이인을 알아야 하는데, 그들은 유일신 야훼에 대한 신앙을 굳게 지키고 있었으며, 그들에게서 선민 사상과 구세주 출현을 바라 마지않는 유대교가 확립되었다. 헤브라이 왕국은 기원전 1000년경에 세워졌다. 이 왕국은 다윗 왕과 솔로몬 왕 치하에서 번영을 구가한 후, 이스라엘 왕국과 유다왕국으로 분열되었다. 이슬라엘 왕국은 기원전 722년에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했다. 유다왕국 또한 신바빌로니아제국의 공격으로 기원전 586년에 멸망했고, 유다왕국의 주민들은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바빌론은 현재의 이라크 중앙에 해당하는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빌론유수’라고 불리는 유명한 사건이다.
바빌론으로 끌려간 헤브라이인들은 서아시아를 통일한 아케메네스왕조의 페르시아에 의해 해방되었고, 팔레스타인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야훼 신전을 재건했다. 이는 대체로 로마공화정이 시작되는 무렵과 맞물리는 동시에, 유대교가 확립되었다고 보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얼마 못 가 유대교는 율법을 엄격히 지키는 바리새인이 권력을 장악했다. 그들은 로마의 지배하에서 무거운 세금을 부과해 유대 민족을 고통에 빠뜨렸다. 사정이 그러했던 까닭에 민중 사이에 구세주를 바라는 기운이 고조되었다. 그때 등장한 것이 바로 예수였다.
로마 제정하에서 기독교는 계속해서 확대되었고, 313년 밀라노칙령에 의해 공인되었을 무렵에는 신자가 300만 명 안팎까지 늘어났다. ....현재 전 세계의 기독교 신자는 대략 20억명이으로 추정된다. 기독교라는 종교를 창출한 사람이 바로 바울이다.
문자로 이루어진 헌법은 없으나 영국인들은 헌법이 확실히 존재한다는 감각을 가지고 있다. 그 감각이 저마다의 시대 상황에 맞게 구체적인 문서 형태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렇게 표현된 것인 1215년의 마그나카르타이고, 1689년의 권리장전(국회의 의회의 권리를 명시한 문서)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르네상스는 복고운동이지만 그 중심에는 이성에 대한 신봉이 있었으며, 그러한 의미에서 보았을 때 르네상스는 계몽주의로 이어지는 측면이 있다. 그리고 르네상스에 의해 합리주의적인 요소가 가톨릭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그런데 16세기 종교개혁에는 계몽주의로 이어지는 요소가 없었다. 도리어 반지성적인 운동으로 보는 편이 옳다. ......종교개혁을 통해 예수가 주창한 소박한 원시 교회로 돌아가자는 것이 16세기의 종교운동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종교개혁은 복고유신 운동인 것이다.
예수회는 이 군사력을 바탕으로 프로테스탄트 타도를 목표로 ‘프로테스탄트 정벌 십자군’을 준비했다. 그들의 군사력은 막강했던 터라, 보헤미아와 슬로바키아를 석권해 프로테스탄트를 모조리 몰아낸 후 러시아정교회가 있는 우크라이나까지 진입했다.
러시아정교회가 그들의 관습을 지키고자 계속해서 저항했기 때문에 교황청은 타협안으로 특별종파를 창설했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동방전례가톨릭교회, 동방귀일교회, 우니아트교회 등이라 불리는 교회다.
현재 러시아는 우니아트 교회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러시아와 바티칸의 관계가 여전히 긴장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은 이 우니아트 교회를 통해 가톨릭이 러시아 내부를 침식할 가능성을 러시아정교회가 크게 경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슐라이어마허는 칸트나 헤겔에 견줄만큼 중요한 인물로 ‘근대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아버지’라고도 불린다. 그는 종교의 본질이 직관과 감정이라고 주장했다. 즉 하느님은 마음속에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신학적으로 슐라이마허가 주창한 “신은 마음속에 있다”라는 설을 깨뜨린 사람이 현대 신학의 아버지인 칼 바르트다. ......인간은 신이 아니므로 신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설교를 하는 목사는 신을 이야기해야 한다. 그러한 까닭에 신학이란 ‘불가능의 가능성’에 도전하는 일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P193. 무함마드가 사망한 후 이슬람교도는 선거를 통해 최고 통치자로서 칼리프를 선출한다. 칼리프란 ‘신의 사도의 대리인’이라는 의미다. 4대 칼리프에 선출된 알리는 무함마드의 사촌 동생이자 사위였다. 네 명의 칼리프 중에서 혈통상 무함마드와 가장 가깝다. 이를 근거로 알리와 그의 자손이 진짜 후계자라고 주장하는 당파가 나타났는데, 바로 시아파다. 처음에는 ‘알리의 시아’라 불렀으나 알 리가 빠지고 시아로만 불리게 되었다. 이러한 시아파와 달리 수니파는 역대 칼리프를 정통이라 간주하는 이슬람의 다수파다. 무함마드의 관행을 뜻하는 ‘수나’에 따르는 자를 의미한다.
시아파에서 최고 지도자를 이맘이라 부른다. 알 리가 초대 이맘이며, 알리의 자손이 그 뒤를 이은 이맘이 된다. ......시아파의 주류는 이란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12이맘파다. 열한번째 이맘이 9세기에 죽었을 때, 열두 번째 이맘이 등장했으나 금세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이렇게 사라진 이맘이 구세주로 나타나 이 세상을 구하리라 교의를 핵시믕로 하는 종파가 12이맘파다.
12이맘파의 교의는 현재의 국세정세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바로 이란의 핵무기 문제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핵을 써서 공격해도 사라진 이맘이 나타나 이란을 지켜줄 것이 분명하다고 이란의 지배층이 믿고 있다면, 핵무기 개발과 관련해 이란이 폭주할 가능성도 있다.
한편 이슬람 과격파는 대부분 수니파인 한발리파에 속해있다. ...이 한발리파 가운데 하나로 와하브파가 있다. 와하브파는 18세기 중반에 중교개혁가인 와하브가 창시했다. 와하브는 사우디아라비아 국왕과 협력해 와하브 왕국을 세웠고, 와하브왕국은 훗날 사우디아라비아왕국의 바탕이 되었다. 그러한 까닭에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교는 와하브파다.
와하브파는 <코란>과 무함마드의 언행록인 <하디스>만 인정한다. 성인 숭배나 참배도 하지 않는다. 무함마드 시대의 원시 이슬람교로 회귀할 것을 주창하며 극단적인 금욕주의를 내세운다. 알카에다가 이 와하브파의 무장단체이며, IS 또한 마찬가지다.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마그레브 알카에다, 체첸의 테러단체, 아프가니스탄의 탈리반 등 이슬람 과격파는 모두 와하브파 계통이다.
와하브파와 가까운 것이 프로테스탄트인 칼뱅파다.
기독교의 세계관에서 지상은 죄 있는 자로 가득 차 있으므로, 인간 세계에 차별, 억압, 질병, 고통, 빈곤이 존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상태라 여긴다. 반면 이슬람교의 경우 ‘진’이라는 영적인 존재가 악한 행위를 저지른다고 여긴다. 내부에 존재하는 악에 대한 반성이 없으므로, 이슬람교를 믿기만 한다면 어떠한 폭력이라도 긍정되는 것이다.
16세기, 이슬람의 역사에 중요한 전기가 찾아온다. 1501년 이란에 사파비왕조가 들어선 것이다. 이 사파비왕조는 시아파인 12이맘파를 국교로 정했다. 그 전에는 모로코에서 신장위구르까지가 하나의 이슬람 벨트로 이어져 있었다. 그런데 시아파가 이란을 장악하면서 이 벨트가 끊기고 말았다. 사파비왕조 서쪽에는 오스만제국, 동쪽에는 무굴제국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둘 다 수니파였다. 요컨대 사파비왕조는 수니파의 대국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낀 형태였다.
그렇다면 왜 사파비왕조는 시아파를 국교로 삼았던 것인가? 페르시아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였다.
전후 이란에서는 친미 성향의 팔레비 국왕이 강권적으로 근대화 정책을 취하며 세속화를 진행했다. 이를 ‘백색혁명’이라고 부른다. 백색혁명으로 경제는 성장했으나 격차 확대와 지배층 부패 등 국민의 불만도 커져갔다. 그 결과 시아파 지도자 호메이니의 주도로 이란 혁명이 일어났다. .그 결과, 1979년에 이슬람교를 국가 원리로 하는 이란이슬람공화국이 성립했다.
지금의 이란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12이맘파의 이슬람원리주의와 페르시아 제국주의라는 두 가지 측면을 모두 살펴보아야 한다.
이란이 수니파 원리주의를 내세운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와 양호한 관계를 구축한 것도 종교적인 동기보다는 페르시아 제국주의적 발상에 기초한 것이다.
P199. 팔레스타인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모두에게 성지인 곳이다. 지중해 동쪽 연안에 위치한 팔레스타인은 기원전 1000년경에 유대인이 왕국을 건설한 지역의 명칭이다. 옛날에는 가나안이라고도 불렀다.
바빌론 유수에서 해방된 이후, 유대인은 팔레스타인에 있는 도시 예루살렘에 신전을 재건했다.
기독교입장에서 팔레스타인이 성지인 이유는,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렸던 골고다가 예루살렘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슬람교에서는 왜 예루살렘이 성지인가? 이는 ‘무함마드의 승천’이라 일컬어지는 전승에서 유래한다. 이슬람 전승에 다르면, 무함마드는 어느 날 밤 천사 가브리엘의 인도를 받으며 예루살렘에 있는 커다란 바위에서 천마에 올라타고 승천해 알라를 알현했다고 한다. 즉 무함마드의 승천 체험의 출발점을 예루살렘이라 여기는 것이다.
대부분의 시기에 세 종교는 평화적으로 병존했다. 이곳에서 종교 분쟁이 일어나는 것은 1948년 이슬라엘 건국 이후의 일이다.
건국과 동시에 이스라엘과 아랍의 여러 국가 사이에서 제1차 중동전쟁이 일어났고 이스라엘이 승리했다. 그러자 이스라엘은 더욱 영토를 확장했으며, 팔레스타인에서 국가는 오직 이스라엘뿐인 상황이 되었다. 이를 기점으로 네 차례에 이르는 전쟁과 여러 교섭을 거쳐, 지중해에 면한 가자 지구와 내륙의 요르단 강 서안 지구에 팔레스타인 자치구가 생겨났다.
현재 이 지역의 가장 큰 문제는, 가자 지구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수니파 원리주의 과격파인 하마스다. 하마스의 사상은 IS나 탈레반과 같다.
가자 지구에 거주하는 일부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하마스에 매료되었다. 하마스와 같은 이슬람원리주의 내부에는 복지를 중시하는 사람들이 다수 존재한다. 그들은 알라 앞에서 인간이 모두 평등하다고 생각하므로 무척 검소하며 가진 것을 동포에게 나누어 준다.
현재 하마사의 전략은 요르단 국왕을 타도하는 데 맞추어 있다. 요르단에는 수많은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있기 때문에 하마스는 그들을 동원해 요르단에서 분쟁을 일으키고자 한다. 왜 그런가? 현재 요르단 왕실은 이스라엘과 양호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만약 요르단 왕제가 전복된다면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등 페르시아 만 연안의 왕제도 함께 동요할 것이다. 하마스는 그 기회를 틈타 IS와 손을 잡고 중동에 세계 이슬람혁명을 수출할 거점 국가를 건설하려는 것이다.
EU의 본질을 이루는, 라틴어로 ‘코퍼스 크리스티아눔’이라는 개념이 있다. 코퍼스 크리스티아눔이란 유대 기독교의 일신적 전통, 그리스 고전철학, 로마법의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된 이른바 문화 종합체를 가리킨다. 번역하자면 기독교 공동체라는 의미다.
EU가 러시아나 우크라이나로 뻗어가지 않은 것은 기독교 공동체가 가톨릭, 프로테스탄트 문화권의 산물이어서 정교회 문화권을 포섭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터키의 EU가입이 여의치 않은 것은 기독교 공동체라는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EU가 탄생한 가장 큰 목적은 내셔널리즘 억제에 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며 너무나도 막대한 규모의 희생자가 나오고 말았다. 독일인이든 프랑스인이든 전쟁만큼은 하고 싶지 않다는 강한 염원이 EU라는 형태의 결정체로 나타난 것이다.
P210. 먼저 이슬람원리주의의 신앙 대상과 관습을 존중하고 마찰이 일어나지 않도록 한다. 스탈린은 이슬람법인 샤리아를 존중할 것을 강하게 주장했다. 두 번째로 이슬람계 여러 민족에 존재하는 에스니를 자극해 이슬람교에 대한 귀속의식보다도 민족의식을 강화한다. .....즉 에스니를 자극함으로써 이슬람원리주의의 침투를 막는다는 점이다.
P212. 또 하나의 보조선은 소련형 사회주의가 붕괴한 후 자본주의국가가 돈에 대한 통제를 상실하고 있는 상황이다. 사회주의라는 눈에 보이는 위협이 존재했을 때 자본주의국가는 자국에서의 혁명을 저지하기 위해 부유층에게 집중되는 부를 누진세나 법인세로 흡수해 중하층에게 재분배했다. 그러나 공산주의 국가가 붕괴함에 따라 재분배의 필요성이 사라졌다. 그 결과 상위 일부에게 부가 집중되는 극심한 격차가 자본주의 국가를 덮쳤다.
이상의 정보를 종합해보자. 먼저 제 1차 세계대전을 통해 제국주의국가가 장악하고 있었던 식민지와 부가 요동쳤다. 그다음으로 사회주의국가가 붕괴함에 따라 자본주의국가의 돈에 대한 통제가 흔들리고 있다. 어느쪽이든 권력기반이 불안정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러시아의 크림 반도 편입과 지금도 여전한 미국의 합리주의 신봉을 보면, 냉전 시대의 양대 대국이 현재 제1차 세계대전 전후의 상황과 흡사한 국면에 놓였음을 이해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다시 한번 계몽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인권,존엄,사랑,신뢰 같은 손때 묻은 개념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이야기해야 한다. 즉 바르트가 말하는 ‘불가능의 가능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계몽주의의 귀결을 반성하고 모든 이념과 개념을 상대화한 결과, 사람들은 아무것도 믿지 못하고 동물적으로만 행동하게 되고 말았다. .....여기서 말하는 근대의 힘이란 앞서 말한 계몽주의다.
두 번째는 전근대의 정신, 바꾸어 말하자면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감각을 연마하는 것이다.
P222. 그러고는 분필로 칠판에 점을 잔뜩 찍은 뒤 선을 그어 점들을 이은 다음, 후지시로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여기에 그린 그림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해하겠습니까? 이 점들은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입니다. 그 인간 하나하나가 저마다 다양한 이들과 서로 관계되어 있어요. 이 세상 안에서 생을 부여받은 사람을 한 명이라도 제외한다면 역사는 성립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헤겔이 말했듯 절대정신이 변증법으로 발전한다는 식의 단순한 흐름을 취하지 않아요. 역사는 훨씬 복잡한 현상입니다. 타인의 마음이 되어 생각하는 것, 타인을 추체험하는 것을 얼마나 거듭했느냐에 따라 역사에 대한 이해의 깊이가 달라집니다. 그리고 역사는 아날로지를 통해 이해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직 젊으니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를 것입니다. 헤겔이나 마르크스처럼 강력한 세계관에 기초해서 역사를 역동적으로 독해하는 수법에 매력을 느끼리라고 봅니다. 그러나 그러한 철학이나 신학이 어딘가에서 구체적인 인간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저는 염려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