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걸 두고 ‘얻어 걸렸다’고 한다. 창비 이벤트 당첨으로 럭키 박스를 받지 않았더라면, 나는 어쩌면 권여선이란 소설가를 평생 몰랐을지도 모른다. 멈춰야 했거늘, 하루 만에 다 읽어버렸다. 어라, 다 읽고 신형철이 해설을 썼음을 알게 된다. 신형철이 해설한 책은 사실 더 이상 쓸 게 없다. 중언부언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태까지 권여선이라는 작가를 모르고 살아왔음을 참회하는 심정으로, 무언가를 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절박함을 느낀다.
<안녕 주정뱅이>에 실린 7편의 단편의 공통점이라면 뭐니 뭐니해도 마치 홍상수 영화처럼, 등장인물들이 술 푸는 장면이 꼭 들어있다는 것이다. 작가는 분명 작정하고 썼으리라. ‘술을 마시지 않는 인물이라면, 내 소설에 출연할 수 없다.’ 신형철 해설의 제목은 <‘호모 파티엔스(homo patience)’에게 바치는 경의>다. 호모 파티엔스는 ‘고통 – 받는 인간’이라기보다는 ‘고통 – 하는 인간’이다.
신형철은 역시나 가려운 곳을 제대로 긁어준다. “유사성과 인접성, 어느 쪽이 우리에게 더 큰 기쁨을 주는 것일까요?”나, “매초 매초 알코올의 메시아가 들어오는 게 느껴집니다.” 같은 문장의 경우, 신형철은 놓치지 않고, 기시감의 원인을 밝혀준다. 첫 문장은 로만 야콥슨의 인용이요, 뒷 문장은 발터 벤야민의 인용이다.
신형철이 맞을 것이다. 권여선의 단편은 고통을 겪는, 혹은 삶을 견디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럼에도 나는 각 단편들을 재밌게 읽었다.
“내가 생각해봤는데 이 비유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시킬 수 있을 것 같아. 분자에 그 사람의 좋은 점을 놓고 분모에 그 사람의 나쁜 점을 놓으면 그 사람의 값이 나오는 식이지. 아무리 장점이 많아도 단점이 더 많으면 그 값은 1보다 작고 그 역이면 1보다 크고.”
- <봄밤> 중
분자/분모의 비유는 톨스또이의 <부활>을 응용한 것이다. <부활>에 등장하는 혁명가 노보드로프에 대해 톨스또이는 이지력은 남보다 뛰어나지만 자만심 또한 굉장하여 결국 별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말한다. 이지력이 분자라면 자만심은 분모여서 분자가 아무리 크더라도 분모가 그보다 측량할 수 없이 더 크면 분자를 초과해버리기 때문에.
<봄밤>의 수환과 영경은 ‘병’이 분모를 무한대로 늘리고 있어 점점 0에 수렴되어 가는 중이었고, 결국 수환 먼저 0에 수렴한다.
모기약 찾는 손님이 많은가봐. 내가 모기약 같은 거 없냐고 그러니까 잽싸게 모기약 같은 거 절대 없대. 그래서 내가 여기 방 안에 모기 같은 게 있는 것 같다고 했더니 얘가, 하면 규가 또 웃었다.
왜?
모기 같은 건 고객님 부담이래.
훈도 웃었다.
모기 같은 건 우리 부담이래?
응, 우리 부담이래.
어쩌냐 부담스러워서.
- <삼인행> 중.
“장어 사준대서 가보니 꼼장어네. 꼼장어면, 꼼장어, 해야지 왜 씨발 그걸 장어래냐고? 윤선생, 내가 꼼장어 먹고 몸보신한다는 얘기는 듣다듣다 첨이야. 끝까지 아주 큰 놈으로 달래는 거 보라고. 꼼장어가 커봐야 꼼장어지, 꼼장어 크면 장어 되냐고?”
- <층> 중.
호모 파티엔스의 이야기이긴 하나, 인용한 문장에서 알 수 있듯, 작가는 매 순간 고통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권여선은 술자리에서 절대로 먼저 일어나는 법이 없다고 한다. 한국 작가 중 술 친화적인 작가는 누가 있을까? 외국 작가로는 스콧 피츠제럴드, 존 치버, 잭 런던 등이 떠오르지만 역시나 레이먼드 카버에 비견할 술고래가 있을까. 카버의 친구는 말했다. ‘존, 당신도 술 먹는 거 좋아하고 나도 술 먹는 거 좋아하지만, 레이가 술 먹는 거 좋아하는 것처럼 술 먹는 거 좋아하는 사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카버는 눈을 뜨면 술을 마셨고, 술을 마시다 잠들었다. 이런 일과가 매일매일 되풀이되었다. 어쩌면 카버의 소설보다, 술을 끊은 그의 행위가 더 위대해 보이기도 한다.
어쩌다 보니, <안녕 주정뱅이>에 이어 기타무라 가오루의 <술이 있으면 어디든 좋아>를 읽고 있다. 낮술로 시작해 주말 이틀 연속 술을 퍼마셨건만, 또 다시 술 생각이 나다니! 아, 장어엔 소맥이 딱 인데. 꼬치가 맛있는 이자카야에서 차가운 사케를 마셔도 좋겠고, 토마토 스파게티에 레드 와인도 좋고, 비비큐 후라이드 치킨에 맥주여도 좋고, 양꼬치에 칭따오도 좋고, 갓 잡은 농어회에 소주도 좋고, 녹두전에는 역시 막걸리가. ......
술을 좋아하는 건지, 안주를 좋아하는 건지.
술이 없었으면 어떻게 살았을까.
고통이 있어도 술이 있어 위로가 된다.
잠시나마.
이웃님들은 어떤 안주에 어떤 술을 즐기시는지요? 댓글 설문입니다. 댓글 달아주세요. ^^
술집이나 안주도 추천 해 주세요. ^^
저는 오늘......홍대 천하, 아스파라거스 삼겹살말이가 땡기네요.
아, 술 고프다.
p.s 방금 유진 식당서 술 푸자는 친구의 호의를 거절했다. 아, 이 놀라운 나의 자제력이여!!
레몬에 데킬라도 땡긴다. 오렌지 쥬스와 혼합한 보드카도. 하루키를 읽은 밤이면 언더락 위스키를 마시곤 했었는데.
안 되겠다. 산책나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