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세르반테스의 문체가 어떤 것이며, 사물에 접하는 그의 방식이 어떠한 것인지 분명히 알 수만 있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얻을 텐데. -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 * *

 

훌륭한 책들은 한 번만 읽어도 오래도록 여운이 남는 것 같다. 어쨌든 자꾸 생각나고, 적당한 계기만 주어지면 언제라도 그 책을 다시 펼치게 된다. 움베르토 에코가 쓴 『궁극의 리스트』도 '잊을 만하면 다시 생각나는 책'이라는 점에서는 좋은 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궁극의 리스트』는 '한꺼번에' 읽기에는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총 408쪽이니 그리 두꺼운 책이 아니라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자세히 따지고 보면 엄청나게 두꺼운 책으로 볼 수도 있다. 판형도 제법 클 뿐만 아니라 한 페이지에 박힌 텍스트도 매우 빽빽하기 때문이다.(한 페이지에 41줄씩 두 열로 혹은 세 열로 인쇄되어 있다.)

 

가령, 『궁극의 리스트』에 '인용'된 『돈키호테』의 한 장은 11쪽 분량의 내용이 통째로 인용되어 있는데도 『궁극의 리스트』에는 똑같은 내용이 단지 3쪽을 살짝 넘길 뿐이다. 그렇다면『돈키호테』의 1부와 2부를 다 합한 1,720쪽 분량도『궁극의 리스트』와 같은 판형에서는 469쪽에 다 담길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1,720쪽 × 3/11 = 469쪽) 거꾸로 생각하면 『궁극의 리스트』는 열린책들에서 나온 『돈키호테』식으로 판형이 만들어졌다면 장장 1,496쪽으로 늘어날 뻔했다는 얘기다.

 

 

 

이런 얘기의 매우 간단한 결론 한 가지는 이렇다. 『궁극의 리스트』는 단번에 읽기에는 너무나 힘든 책이라는 것이다. 거기에 꼭 덧붙일 말도 필요하다. 이 책은 굳이 단번에 읽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다. 좀 더 과감하게 말한다면 '단번에 읽으면 안 된다'고까지 말해도 좋지 싶다. 숱한 이름난 고전들에서 나열된 '온갖 목록들'을 그대로 끌어다 옮겨 놓은 책을 도대체 무슨 수로 단 번에 '통독'할 수 있단 말인가. 설사 통독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그 사람이 무슨 재미로 그 책을 그런 식으로 읽으려고 애쓰는지를 도리어 물어보고 싶게 만드는 책이다. 그렇게 단번에 읽기에는 너무나 힘든 책인데도 왜 이 책은 한번 구경하고 나면 좀처엄 잊혀지지 않고 나중에 언젠가는 다시 그 책을 펼쳐보게 될까.

 

그 이유를 나는 두 가지 정도로 꼽고 싶다.

 

우선 첫째로,『궁극의 리스트』속에 인용된 책들을 우리가 미처 다 읽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거기에 인용된 책을 새롭게 읽고 나면 '옛날엔 낯설게만 느껴지던' 그 책과 책 속 문장들이 『궁극의 리스트』에서 어떻게 다시 '친숙한 모습'으로 뒤바뀌어 있는지를 문득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어쨌든『궁극의 리스트』속에 담긴 텍스트를 많이 알고 있는 독자들은 그만큼 '움베르토 에코도 인정하는 책들'을 많이 읽었다는 명백한 증거를 다시금 발견하게 된다.

 

나도 처음엔 이 책을 펼쳐 보고 내가 이미 읽은 책 몇 권을 발견하고는 무척이나 반겼었다. 이 책의 특징은 우리가 한번쯤은 익히 제목을 들어봤을 만한 유명한 책들에서 골라 뽑은 '인용문'들로 가득하다. 저자인 움베르토 에코의 목소리는 별로 들리지 않는다. 그야말로 '에코'가 이쪽 저쪽에서 가끔씩 울리는 수준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 책은 '다른 책 속에 담긴 각종 목록에 관한 대목들'을 그대로 '인용'해서 책으로 꾸민 아주 독특한 책이다.

 

구체적인 사례를 보면 금세 이해할 수 있다. 가령 이 책의 256쪽과 257쪽을 한번 살펴 보자.

 

 - 『궁극의 리스트』 256쪽

 

 

 - 『궁극의 리스트』 257쪽

 

이런 식으로 책이 구성되어 있다 보니 독자들에게 다가오는 느낌은 늘상 둘 가운데 하나일 수밖에 없다.『궁극의 리스트』에서 다시 만나는 텍스트가 몹시 반갑거나 아니면 그저 뜬금없이 생소하거나. 그나마 방금 우리가 살펴본 라블레의 책에서 인용된 대목들은 하나같이 '재미'라도 있어 다행이지만, 내가 미처 읽어 보지도 못한 책에서 인용된 '복잡하기 그지 없는 목록들'은 재미가 하나도 없는 경우도 수두룩하다.

 

가령, 움베르토 에코가 직접 정리했다는 '천사들의 목록'을 한번 살펴보자. 도대체 이걸 무슨 '재미'로 다 읽을 것이며, 이와 닮은 온갖 목록들을 무슨 수로 한 번에 '통독'할 수 있단 말인가.

 

 

 

나도 웬만하면 책 한 권 붙잡으면 끝까지 읽고 마는 성격인데, 이 책은 도저히 그럴 수 없겠다는 생각부터 들어서 저만치 밀쳐 두고 지내 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떤 책들을 읽다가 '유난히 기나긴 목록'이 나열되는 대목을 만나기만 하면 '어? 이거 혹시 '궁극의 리스트'에도 담긴 목록이 아닐까?' 하는 의심부터 갖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이 책은 나에게는 아주 가끔씩 들춰 보는 아주 이상한 책이 되었다.

 

어쨌든 이번 기회에『궁극의 리스트』에 인용된 숱한 작품들 가운데 내가 읽은 책들은 얼마나 될까 하고 꼽아 보니 대충 다음과 같았다.

 

호메로스, 『일리아스』

베르길리우스, 『아이네이스』

헤시오도스, 『신들의 계보』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그리스 철학자 열전』

단테, 『신곡』

라블레, 『가르강튀아 / 팡타그뤼엘』

셰익스피어, 『리처드 2세』

세르반테스, 『돈키호테』

괴테, 『파우스트』

마크 트웨인, 『톰 소여의 모험』

제임스 조이스, 『율리시스』

 

이렇게 '이미 읽은 책' 속에 나오는 문장들을 고스란히 『궁극의 리스트』속에서 다시 만나는 일은 몹시 기쁘다. 그런데 아주 유명한 책들이지만 내가 여태껏 읽지 못했기 때문에『궁극의 리스트』에 담겨 있어도 '닭쫓던 개가 지붕 쳐다보는 식'으로 멀뚱멀뚱 그저 눈만 굴리다가 다른 페이지로 슬쩍 건너 뛸 수밖에 없는 책들을 만나는 건 좀 괴롭다.

 

이번 기회에 그런 책들의 목록을 몇 권만 적어 본다. 많이 적을수록 창피하니까. 어쨌든 여태껏 못 읽은 이런 책들을 언젠가 읽고 나면 나는 다시금 『궁극의 리스트』를 펼칠 것이다. 그리고 그 목록이 의미하는 바가 무었이었는지를 움베르토 에코의 설명을 통해 다시금 찬찬히 되짚어 볼 생각이다. 어쨌든 『궁극의 리스트』는 그런 식으로 읽어야 할 책이니까.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토마스 만, 『파우스트 박사』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바우돌리노』

이탈로 칼비노, 『보이지 않는 도시들』, 『우주 만화』

파트리크 쥐스킨트, 『향수』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보르헤스 전집』

오스카 와일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이제 『궁극의 리스트』를 읽는 '두 번째' 재미를 얘기할 차례다.(첫 번째 이유와는 이미 너무나 멀리 벗어나 있더라도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 이 책에는 여러 훌륭한 그림들이 아주 풍성하게 수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림' 속에도 '훌륭한 목록들'이 숨어 있다는 게 움베르토 에코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림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는 독자들이라도 이 책에 담긴 훌륭하고, 놀랍고, 이색적이고, 인상적인 여러 그림들을 보고 나면 틀림없이 많은 매력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나도 그림에는 영 까막눈이어서 모르는 화가와 그림들이 수두룩하지만 그래도 익숙한 화가들이 가끔씩은 눈에 띈다. 가령, 레오나르도 다빈치, 살바도르 달리, 귀스타브 도레, 외젠 들라크루아, 알브레히트 뒤러, 르네 마그리트, 귀스타브 모로, 얀 브뤼헐, 피터르 브뤼헐, 엔디 워홀 등.

 

여기까지가『궁극의 리스트』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이후부터 다룰 이야기는『돈키호테』에 얽힌 이야기다. 왜 갑자기 뜬금없이『돈키호테』로 넘어가는 거냐고 항의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이유를 설명하자면 이렇다.

 

나는 최근에 '몇십 권의 책'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리스트는 따로 작성하지 않았다. 그 대신『궁극의 리스트』에 나오는 한 대목을 지렛대로 삼아 글을 하나 썼다. 뜻밖의 성공이었다!

 

그로부터 만 하루가 지난 뒤에 나는 대대적으로 책을 재배치하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누워 지냈던 책들을 일으켜 세워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이었다. 책장의 지붕에 쌓인 먼지까지 털어내고 '책장 지붕과 방의 천장 사이의 틈'까지 책장으로 활용했다. 그 덕분에 이제 더 이상 내 방에서 누워 지내는 책은 찾기 어렵게 되었다.

 

곧이어 난생 처음으로 떠나보내는 책들을 위해 '이별의 정'을 담은 고별사를 써봤다. 이번에도 반응이 뜨거웠다. 여름 날씨만큼이나. 수많은 댓글에 대해 답글을 다는 동안에 순간적으로 내 머릿속에 '돈키호테의 서재'가 불쑥 떠올랐다. 돈키호테는 자신이 쓰러져 잠든 사이에 자신이 아끼던 책들을 대부분 잃고 말았던 불쌍한 사람이었다. 중세에 대유행했던 '기사 소설'에 푹 빠져 지내며 책을 낙으로 삼던 그에겐 날벼락도 그런 날벼락이 없었다. '책' 때문에 '돈키호테 삼촌'이 너무 이상하게 변했다고 생각한 조카딸이 신부에게 '서재 검열'을 요청했고, 돈키호테의 책들은 대부분 주인장도 모르는 사이에 '화형'에 처해지는 대참극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런 돈키호테가 갑자기 내 머리속에 떠올라 나는 얼른 『돈키호테』를 다시 펼쳐 읽었다.(서재를 정리하고 나니 『돈키호테』를 다시 펼쳐 읽는 일이 그렇게 쉬울 수가 없었다! 그 책은 오랫동안 저 밑에 깔려 지내다가 마침내 두 발로 단단히 서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궁극의 리스트』도 다시 펼쳐 보았다. 그런데 거기엔 놀랍게도 '돈키호테의 서재에서 퇴출된 책들에 관한 목록'이 고스란히 전부 인용되어 있었다. 분량은 대략 3쪽이 살짝 넘었다. 열린책들에서 나온 『돈키호테』에서 무려 11쪽에 이르는 분량이 단 세 쪽에 다 담기다니, 『궁극의 리스트』는 알고 보니 엄청나게 많은 텍스트를 압축파일처럼 담아 놓은 책이었다!

 

『궁극의 리스트』에는 심지어 귀스타프 도레의 그림까지도 담겨 있었다. 그런데 그 그림은 놀랍게도 열린책들에서 별책으로 펴낸 『그림으로 읽는 돈키호테』에서는 볼 수 없었던 전혀 새로운 그림이 아닌가. 이런 놀라운 그림까지 보고도 아무 것도 모른 체하고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결국 이런 글까지 쓰게 되었다.

 

귀스타브 도레,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위한 삽화, 파리, 1863년.(385쪽에 담긴 그림)

 

 

『궁극의 리스트』에는 '책'에 관한 그림들도 아주 많다. 나는 이 그림을 보는 순간까지도 돈키호테를 내 머리속에서 완전히 떨쳐내지 못했다. 그의 서재가 이처럼 신중하게 '검열' 당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었던 것이다.

 

『책벌레』(부분), 카를 슈피츠베크, 1850년, 개인 소장. (『궁극의 리스트』390쪽에 담긴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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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토 에코가 『돈키호테』에서 골라 뽑아 자신의 책을 꾸몄던 바로 그 내용을 여기에 그대로 옮겨 본다. 이 대목은 소설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오는데, '세르반테스의 탁월한 이야기 솜씨와 해학'에 금세 매료될 만큼 내게는 몹시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세르반테스의 문장들' 속에 틈틈이 '나의 생각'까지 포함시켜 보았다. 이렇게라도 '나만의 주석'을 주렁주렁 달아 놓아야 나중에 또 읽어볼 수 있을 테니.

 

돈키호테는 아직도 잠들어 있었다. 신부는 돈키호테의 조카딸에게 그 모든 폐해의 원인이 된 책들이 있는 서재 열쇠를 달라고 했다. 조카딸은 두말없이 그것을 내주었다. 모두들 서재로 들어갔고 가정부도 따라 들어갔다. 서재에는 장정이 아주 잘된 커다란 책이 1백 권도 넘었고 몇 권의 소책자들도 있었다. 가정부는 책들을 보자마자 황급히 나가더니 곧 성수가 담긴 나무 그릇과 성수 솔을 들고 들어와 말했다.

 

「신부님, 이거 받으세요. 이걸 방에 뿌려서 이 책들 속에 있는 그 많은 마술사들을 한 놈도 남기지 말고 내몰아 주세요. 우리가 그들을 세상에서 내쫓고자 했다가 벌을 받아 오히려 마법에 걸리게 되면 큰일 난다니까요.

 

이 소설이 나올 때만 하더라도 유럽에서는 '마녀 사냥'이 유행할 정도로 까마득한 옛날이었다. 그러니 당대에 이 소설을 읽었던 독자들은 우리보다 훨씬 더 실감나게 이런 대화에 공감했으리라.

 

가정부의 순진한 말에 신부는 웃으면서 이발사에게 책들을 한 권씩 집어 달라고 말했다. 그것들 가운데 불에 던지지 않아도 될 책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어떤 내용인가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그러실 필요 없어요.」조카딸이 말했다.「이 책들은 모두 해를 입히는 것들이니까 하나도 남겨 둘 필요가 없어요. 창밖 마당에 던져 쌓아 놓고 불을 지르면 좋겠어요. 아니면 뒤뜰로 가지고 가서 모닥불을 피우든지요. 거기서라면 연기가 나도 괜찮으니까요.」

 

가정부도 그렇게 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두 여자들은 이 죄 없는 책들을 너무나 죽이고 싶었지만, 신부는 책의 제목조차 훓어보지 않고서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두 여자들이 '죄 없는 책들'을 너무나 죽이고 싶었다고 하는 데서 '책에 대한 돈키호테의 광적인 사랑'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그녀들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이를 보고 웃음을 터트리는 독자들 또한 자신들이 '책을 사랑한 댓가로 주위 사람들한테 받았던 핍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되고, 그때문에 작가는 독자들로부터 뜨거운 공감을 획득한다.

 

니콜라스 선생이 제일 먼저 그의 손에 건네준 책은 『네 권의 아마디스 데 가울라』였다.

 

「이 책은 불가사의지.」신부가 말했다. 「내가 듣기로 이 책이 에스파냐에서 출판된 첫 기사소설이라던데, 다른 책들 모두 이 책을 기반으로 하고 있네. 아주 사악한 분파를 만들어 낸 거짓 교리서인 셈이니 당연히 화형에 처해야겠지.」

 

「안 됩니다, 신부님.」이발사가 말했다. 「제가 듣기로는 이 책이야말로 지금까지 쓰인 기사 소설 중에서 가장 훌륭하다고 하더군요. 그러니 이런 책 중에서 유일하게 용서해 줘야 할 겁니다.

 

『아마디스 데 가울라』는 스페인 기사소설의 대표작이다.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권>에도 포함될 정도로 널리 알려진 작품이니, 스페인에서의 인기는 더 말할 필요가 없겠다. 소설 『돈키호테』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소설책'이기도 하다. 돈 키호테가 바로 그 책을 전범으로 삼아 '행동'하기 때문이다.

 

「하긴 그것도 그렇군.」신부가 말했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은 살려 두지. 어디 그 옆에 있는 것 좀 보게.」

 

「이것은 ……」이발사가 말했다. 「아마디스 데 가울라의 합법적인 아들 『에스플란디안 무용담』이네요.」

 

「그런데 말이지 ……」신부가 받아서 말했다. 「자기 아버지와 같은 대우를 해줄 순 없지 않나. 아주머니, 이 책을 받아서 창문으로 마당에 던지시죠. 모닥불을 많이 피워야 할 테니, 이건 그 불쏘시개요.」

 

가정부는 아주 만족스러워하며 하라는 대로 했다. 그 알량한 에스플란디안은 마당으로 날아가서 꾹 참고 화형식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원조가 아닌 '짝퉁'은 인정할 수 없다는 세르반테스의 작가적 마인드가 엿보인다. 또한 책 속의 주인공인 '에스플란디안'을 의인화해서 '마당으로 날아가서 꾹 참고 화형식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는 식으로 묘사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참을 수 없는 웃음'을 유발시키고 있다.

 

「다음.」신부가 말했다.

 

「다음은요 …….」이발사가 받았다. 「『아마디스 데 그레시아』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쪽에 있는 것은 모두 아마디스 가문의 무용담들 같은데요.」

 

「그렇다면 전부 마당으로 던지게!」신부가 말했다. 「핀티키니에스트라 여왕과 목동 다리넬 그리고 그가 부른 목가들, 아무튼 그 작자의 알아들을 수 없는 추악한 이야기들은 다 태워 버리게. 나를 낳아주신 아버지라도 편력 기사의 모습으로 나타나신다면 그것들과 함께 불살라 버릴 테니 말일세.

 

「저도 동감입니다.」이발사가 말했다.

 

「저도요.」조카딸도 거들었다.

 

「그렇다면 …….」가정부가 말했다. 「자, 이리들 주세요. 마당으로 가져가게요.」

 

그것들은 상당한 양이어서 그녀는 계단으로 내려가는 대신 창밖으로 던져 버렸다.

 

이 대목에서 가정부가 '계단으로 내려가는 대신 창밖으로 던져 버리는' 과감한 행동' 또한 '웃음'을 유발한다. '지나친 행동'은 철학자 베르그송이『웃음』에서 지적한 바 대로 '웃음'의 핵심 작동 원리 가운데 하나다. 또한 소설『돈키호테』에 담긴 수많은 '웃음 유발 장치'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그 두꺼운 책은 누구의 이야기지?」신부가 물었다.

 

「『돈 올리반테 데 라우라』입니다.」이발사가 대답했다.

 

「이 책의 작가는 …….」신부가 말했다. 「『꽃들의 정원』을 쓴 사람과 같은 인물이지. 아마 이 두 권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사실적인지, 다시 말해 어느 것이 덜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알기란 어려워. 확실한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무례하게 떠벌리는 이 책들은 마당으로 가야 한다는 것뿐이지.

 

「다음 책은 『플로리스마르테 데 이르카니아』입니다.」이발사가 말했다.

 

「플로리스마르테 님이 거기 계신가?」신부가 대꾸했다. 「그렇다면 당장 마당으로 가야겠군. 범상치 않은 탄생 일화와 꿈 같은 모험담은 많지만 문체가 멋이 없고 딱딱하단 말씀이야. 아주머니, 다른 것과 함께 마당으로 던져요.」

 

「그렇게 하고 말고요, 신부님.」가정부는 신바람이 나서 시키는 대로 했다.

 

「이것은 『기사 플라티르』입니다.」이발사가 말했다.

 

「오래된 책이지.」신부가 말했다.「그러나 사면할 이유가 없어. 다른 말 말고 다른 것들과 동행시키세.」

 

그래서 그렇게 처리됐다. 다른 책이 펼쳐졌는데, <십자가의 기사>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제목이 성스러워서 좀 무식해도 용서될 수 있었겠지만 여기 <십자가 뒤에 악마가 있다>는 말이 있거든. 이것도 불 속으로 ……」

 

이발사가 다른 책을 꺼내 들고 말했다.

 

「이건 『기사도의 거울』이네요.」

 

『돈 올리반테 데 라우라』(1564년 작품), 『꽃들의 정원』(1570년 작품), 『기사 플라티르』(1533년 작품), 『기사도의 거울』등은 모두 실재하는 작품들이다.

 

「내가 잘 아는 책이군.」신부가 대꾸했다. 「그 책에는 레이날도스 데 몬탈반이 지난날의 대도둑 카쿠스가 무색할 정도의 대도둑인 자신의 친구들과 동료들과 열두 용사들, 그리고 진실한 역사가인 튀르팽 등과 함께 일을 벌이지. 사실 나는 이들을 이 땅에서 영원히 추방하고자 하고 있었네. 비록 어느 부분에서는 유명한 마데오 보야르도의 창의력을 이어 받았고, 기독교인인 시인 루도비코 아리오스토도 여기서 자기 실을 자아냈지만 말일세. 만일 내가 아리오스토와 이곳에서 만나면, 그리고 그가 자기 나라 말이 아닌 다른 나라 말로 이야기를 한다면, 나는 그에게 조금도 경의를 표할 수가 없지. 그러나 자기 나라 말로 이야기한다면 그를 받들어 모실 거야.」

 

(번역본에 붙은 주석)

마데오 보야르도(1441∼1494). 15세기 이탈리아의 시인. 미완성 서사시 『사랑의 오를란도』는 아리오스토의 시 『광란의 오를란도』의 전편으로 여겨진다.

루도비코 아리오스토(1474∼1533). 이탈리아의 시인.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은 이탈리아 말로 되어 있는데요.」이발사가 말했다.「이해는 못 하겠지만요.」

 

「이해해 봤자 좋을 건 없네.」신부가 대답했다.「에스파냐로 데리고 와서 에스파냐어로 바꾸지 않았더라면 아마 이 자리에서 그 대장을 용서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옮기면서 원래의 가치가 크게 줄어들고 말았단 말일세. 하긴, 시를 다른 말로 옮기려 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처럼 할 거야. 아무리 고심하고 솜씨를 발휘해 봐도 원작에는 미치지 못하거든. 그러니까 이 책은 물론이거니와 이와 같이 프랑스의 기사들을 다룬 책들은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뚜렷한 방침이 설 때까지 마른 웅덩이에 집어넣어 보존해 두라는 걸세. 시중에 돌아다니고 있는 <베르나르도 델 카르피오>와 소위 <론세스 바예스>라는 시들은 예외로 하고 말일세. 이들은 내 손에 들어오는 즉시 아주머니 손으로 넘어가서 가차 없이 불 속에 떨어지고 말 테니까.」

 

이발사는 당연히 그렇게 한다고 신부의 말에 동의하면서 적절한 조치라고 했다. 훌륭한 신앙인에 진실을 사랑하는 사람인 신부가 세상일에 대해 틀린 소리를 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어 다른 책을 펼쳤는데, 그것은 『팔메린 데 올리바』였으며 그 옆에는 『팔메린 데 잉갈라테라』가 있었다. 이것을 보자 신부가 말했다.

 

「이 올리바는 당장 갈기갈기 찢어서 불 속에 집어넣어 재도 남지 않도록 해야 하네. 그 잉갈라테라는 유일본이니 소중히 보존해 두도록 하고. 알렉산더 대왕이 다리오 왕의 전리품 중에서 발견해 시인 호메로스의 작품을 보관하기 위해 싸워 빼앗았다는 그러한 상자를 이 책을 위해서도 꼭 장만해야 할 걸세. 이 책은 말일세. 이발사 양반, 두 가지 점에서 중요하다네. 하나는 작품 그 자체가 뛰어나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어느 신중한 포르투갈 왕이 이 작품을 썼다는 말이 있기 때문이지. 미라구아르다 성에서 일어난 모험담들은 모두 아주 훌륭히 잘 쓰였을 뿐 아니라 기교가 넘치지. 고상하고 명료한 구절들은 아주 정확하고 분별력 있는 그 인물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 주고 있다네. 그러니 자네만 좋다면 니콜라스 양반, 이 책과 『아마디스 데 가울라』는 화형에서 제외시키고, 그 밖의 것들은 모두 더 이상 볼 필요 없이 그냥 없애 버리세.

 

알렉산더 대왕이 '동방 원정'에서 획득한 '보물상자'에 호메로스의 책을 넣어서 보관했다는 일화는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나오는 유명한 일화다. 소설『돈키호테』속에는 이런 식으로 '그리스 로마 고전 속에 나오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등장하는데, 이런 대목들을 통해 세르반테스가 '고전'에 대해 아주 해박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아닙니다, 신부님.」이발사가 대답했다.「제가 지금 손에 들고 있는 것은 그 이름 높은 『돈 벨리아니스』인걸요.」

 

「그 책은 말일세 …….」신부가 말했다.「2, 3, 4부 모두 지나칠 정도로 성을 내는 대목이 많이서 그것을 없애기 위해 약간의 대황이 필요하다네. <명성의 성>에 관한 이야기 몽땅하고, 더 중요하게 다루었지만 말도 안 되는 다른 이야기들은 뺴야 마땅하지. 그렇게 하기까지는 엄청난 시간이 들 게야. 고쳐졌을 때야 자비나 정의를 베풀 수 있을 테니. 그때까지 자네 집에 두고 아무도 읽게 해서는 안 되네.」

 

「그게 좋겠군요.」이발사가 대답했다.

 

그러고는 더 이상 기사 소설들을 살피는 일이 힘들 것 같아서 가정부에게 큰 책들은 모두 마당으로 집어 던지라고 했다. 바보나 귀머거리 여자에게 말한 것이 아니며, 아무리 멋있는 최상품의 천을 짜는 일이라 해도 그보다 책 태우는 일을 훨씬 더 좋아하는 사람에게 시켰으니, 가정부는 한꺼번에 여덞 권을 창문으로 집어 던졌다. 한 번에 많이 집으려다 보니 그중 한 권이 이발사의 발치에 떨어졌다. 누구 작품인지 알고자 살펴보니 그것은 『유명한 티란테 엘 블랑코 기사 이야기』였다.

 

「이런!」신부가 큰 소리로 말했다.「여기 백의의 기사 티란테가 있었다니! 이리 줘보게, 친구. 이 책에 빠져 이게 오락의 전부가 된 적도 있었다네. 이 책에는 용감한 기사 돈 키리엘레이손 데 몬탈반과 그의 동생 토마스 데 몬탈반, 그리고 기사 폰세카가 나오고, 용맹한 티란테가 알라노족과 싸운 이야기며 플라세르데미비다 처자의 재치며 과부 레포사다의 연애며 속임수며 자신의 시종 이폴리토를 사랑한 왕후의 이야기도 있다네. 정말이지 친구여, 특히 문체로 보아 이건 세계에서 제일 잘 쓴 책일세. 다른 모든 기사 소설과 달리 이 책에서는 기사들이 먹고, 잠자고 자기 침대에서 죽고, 죽기 전에 유언을 하는 등 보통 사람들이 하는 짓을 그대로 하고 있다네. 무엇보다도 이 책을 쓴 작가는 기사를 갤리선에 평생 집어 넣는 그런 터무니없는 짓들은 하지 않았다네. 이 책을 집에 가지고 가서 읽어 보게. 그러면 내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될 걸세.」

 

「그렇게 하지요.」이발사는 대답했다. 「그건 그렇고, 남은 이 작은 책들은 어떻게 하지요?」

 

「이 책들은 기사 소설이 아닌 것 같네. 시집이군.」신부가 말했다.

 

한 권을 펼쳐 보니 호르헤 데 몬테마요르의 『라 디아나』여서, 나머지 것들도 모든 같은 종류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말헀다.

 

「이런 종류의 책까지 다른 것들처럼 태울 필요는 없지. 기사 소설들처럼 피해를 준 것도 아니고, 앞으로도 주지 않을 테니까. 다른 사람에게 해를 주지 않는 오락물이거든.」

 

「어머, 신부님!」조카딸이 말했다. 「이것도 아까 그 책들처럼 태우라고 하셔도 상관없어요. 삼촌이 기사병에서 다 나으신 다음 이번에는 그런 책을 읽다가 양을 기르는 목동이 되어 노래를 부르고 피리를 불면서 숲이나 초원으로 돌아다닐 생각을 하시게 될까 봐 그래요. 그것보다 더 큰일은, 시인이 되겠다고 하시면 어떡해요. 사람들 말로는 그건 낫기도 어렵고 벗어나기도 힘든 병이라던데요.

 

「이 아가씨 말도 맞는구먼.」신부가 말했다.「우리 친구에게 앞으로 또 일어날지 모르는 곤란한 일을 제거하는 것이 좋겠어. 그럼 몬테마요르의 『라 디아나』부터 시작하지. 내 생각에, 이 책은 태우는 대신 현명한 여인 펠리시아 이야기와 마법에 걸린 물 이야기와 시들만 없애고, 산문과 이런 종류의 책 중에서 제일 먼저 나왔다는 명예쯤은 남겨 두는 게 좋겠어.

 

「다음은 …….」이발사가 말했다.「살라망카 사람이 지은 『라 디아나』속편이라는 것인데, 제목은 같지만 작가가 힐 폴로네요.」

 

「살라망카 사람이 쓴 책은 …….」신부가 말했다. 「마당으로 던져지는 형벌에 처한 것들을 따라가게 하고, 힐 폴로가 쓴 것은 아폴론이 직접 쓴 작품인 양 소중히 보관되어야 하네. 자, 그다음은? 서둘러야겠어, 늦어지고 있어.」

 

(번역본에 붙은 주석)

몬테마요르가 『라 디아나』를 썼는데 1564년 발렌시아에서 두 종류의 속편이 출판됐다. 하나는 살라망카의 의사 알론소 페레스가 쓴 『라 디아나』 속편이고 다른 하나는 발렌시아 사람인 힐 폴로가 쓴 『사랑에 빠진 라 디아나』이다. 후자는 최고의 스페인 목가 문학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책은 …….」이발사가 또 다른 책을 펼치면서 말했다.「사르데냐의 시인 안토니오 데 로프라조가 지은 『사랑의 운명에 관한 열 권의 책』입니다.」

 

「신부의 명예를 두고 말하지만 …….」신부가 말했다.「아폴론이 아폴론이고, 예술의 신 뮤즈가 뮤즈이며, 시인들이 시인이었던 이래 이 책만큼 재미있으며 그다지 엉터리가 아닌 책은 쓰인 적이 없다네. 그리고 지금까지 이 세상에 나온 이런 종류의 책들 중 그 방면에서 가장 뛰어나고 유일한 작품이기도 하지. 그러니 이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은 결코 재미있는 책을 읽었다고 말을 할 수 없어. 이리 주게, 이 책을 발견한 것은 정말이지 최고급이라는 피렌체 천으로 된 승복을 받는 것보다 훨씬 값진 일이라네.」

 

그는 아주 만족스러워하며 그것을 받아 따로 놓아두었다. 이발사가 말을 이었다.

 

「다음으로 『이베리아의 목동』, 『에나레스의 요정』, 『질투의 환멸』인데요. 」

 

「그것들은 더 볼 필요도 없네.」신부가 말했다. 「아주머니의 저 속세의 팔에 넘겨주게. 이유는 묻지 말게. 말하자면 끝이 없을 테니까.」

 

『이베리아의 목동』(1591년 작품), 『에나레스의 요정』(1587년 작품), 『질투의 환멸』(1586년 작품) 등은 모두 당대의 베스트셀러(?) 였던 모양이다.

 

「이번 것은 『필리다의 목동』이에요.」

 

「그자는 목동이 아닐세.」신부가 설명했다. 「아주 점잖은 궁의 신하일세. 보물처럼 보관하게나.」

 

「이 큰 책은 …….」이발사가 읽었다. 「제목이 『다양한 시의 보고』라고 되어 있는데요.」

 

「좋은 작품이 되었을 텐데.」신부가 대답했다. 「그렇게 다양한 종류의 시를 담지만 않았더라면 말이야. 훌륭한 시들 사이에 들어 있는 천박한 몇몇 작품들을 솎아 내야 할 걸세. 작가가 내 친구이기도 하고, 그가 쓴 보다 영웅적이고 고상한 다른 작품들을 존경하는 의미에서 그건 놔두기로 하세.」

 

「이것은 …….」이발사가 말을 이었다. 「로페스 말도나도의 『가곡집』입니다.」

 

「이 책의 작가도 …….」신부가 대답했다. 「나와 아주 친한 사람이야. 그자의 입으로 그의 시를 들으면 감탄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네. 목소리가 참으로 부드뤄워서 사람의 혼을 빼놓거든. 목가가 길긴 한데 좋은 건 그리 많지가 않아. 이 책도 남긴 책들과 같이 두게. 그런데 그 옆에 있는 저 책은 뭔가?」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라 갈라테아』인데요.」 이발사가 말했다.

 

세르반테스도 내 오랜 친구지. 내가 알기로, 그 친구는 시 쓰는 일보다 세상 고생에 더 이력이 나 있는 사람이라네. 그 책은 무언가 기발한 구석이 있지만, 제시만 할 뿐 결론은 아무것도 없단 말이야. 속편을 약속했으니 기다릴 수밖에. 약간 손질만 하면 지금은 못 받고 있는 자비를 완벽하게 얻을지도 모르지. 그때까지 자네 집에다 간수해 놓도록 하게.」

 

이 대목에서 작가는 자신이 쓴 작품 『라 갈라테아』(1585년에 발표한 세르반테스의 첫 번째 작품)를 아주 자연스럽게 등장시킨다. 또한 '작가의 남다른 이력'을 슬쩍 고백하기도 한다. 그는 1571년(24세) 자원입대했고 그해 10월에 참가한 레판토 해전에서 부상을 당하여 왼팔을 잃고 <레판토의 외팔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1575년(28세)에 귀국길에 오르던 중 터키 해적선의 습격을 받아 포로가 되었고, 그 후 5년간 알제에서 노예생활을 하며 네 번이나 탈출을 시도하나 모두 실패한 경험도 있었다. 이런 경험들은 소설 『돈키호테』에도 자연스레 녹아들어 있는데, '남 이야기' 하듯 자연스레 펼쳐내는 그의 놀라운 이야기 솜씨는 '작가의 생생한 경험'이 뒷받침된 덕분에 비교 대상을 찾기 어렵다.

 

「그렇게 하지요.」이발사가 대답했다. 「자, 이번에는 한꺼번에 세 권입니다. 돈 알론소 데 에르시야의 『라 아라우카나』, 코르도바의 심문고나 후안 루포의『라 아우스트리아다』, 그리고 발렌시아의 시인 크리스토발 데 비루에스의 『델 몬세르라토』이네요.」

 

「그 책들은 …….」 신부가 대답했다. 「모두 에스파냐어로 쓴 영웅 서사시로 최고의 걸작들일세. 이탈리아의 가장 유명한 작품들과 겨뤄도 손색이 없지. 에스파냐가 낳은 가장 값진 보물이니 잘 보관해 두게.」

 

신부는 지쳐서 더 이상 책을 볼 기운도 없어 나머지는 한꺼번에 몽땅 불태워 버리고자 했다. 그때 이발사가 책 한 권을 펼쳐 들고 있었는데, 『앙헬리카의 눈물』이었다.

 

「내가 울 뻔했군.」 책 제목을 듣고는 신부가 말했다.「그 책을 태우라고 했더라면 말일세. 그 작가는 에스파냐뿐 아니라 세계에서도 가장 유명한 시인들 중 한 사람이지. 오비디우스의 우화를 몇 편 번역했는데, 정말 훌륭하더군.」(106∼116쪽)

 

 - 『돈키호테 1』, <우리의 기발한 이달고의 서재에서 신부와 이발사가 행한 멋지고도 엄숙한 검열에 대하여>

 

 

 

펼친 부분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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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7-08-08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Oren님 글을 읽다보니 고구려 동천왕 당시 관구검의 침략으로 수많은 국서(國書)가 불탔다는 기록이 떠오릅니다. 진시황제의 분서갱유(焚書坑儒) 역시 마찬가지였겠지요... 많은 책이 상실되기 전(前)과 후(後)는 분명 단절된 세계로, 서로 달랐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이러한 연장선에서 ‘돈키호테‘의 모험 역시 이런 단절 이후 일어난 상황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책이 불타지 않았다면, 돈키호테의 모험에 대한 동기도 불붙지 않았을텐데 하는 생각 등등 입니다.... 분명 <궁극의 리스트>등 목록에 관한 책들은 움베르트 에코의 말처럼 ‘전화번호부‘를 읽는 것만큼 재미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다만, 우리가 전화번호부를 통해 교훈을 얻거나 감동을 얻으려는 목적으로 읽는 것이 아니듯, 우리의 소중한 이웃을 찾기 위한 목적으로 활용되듯이 ‘목록류‘의 책을 찾게 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봤습니다.^^: 책장 정리를 하셨으니, 마치 분갈이를 하신 듯 Oren님 책장이 싱싱해졌겠습니다. 다시 한 번 축하드립니다.

oren 2017-08-08 11:12   좋아요 1 | URL
돈키호테의 모험은 ‘준비가 덜 된 상태로‘ 갑작스럽게 시작된 면이 있지요. 처음엔 종자(從子)인 산초도 없이 홀로 떠났으니까요. 결국 며칠 만에 만신창이가 되어 기진맥진한 상태로 집으로 되돌아온 후에 미치광이 취급을 받게 되고, 자신이 아끼던 책들도 저렇게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불태워지지만 돈키호테의 확고한 신념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답니다. 자신이 읽은 책들은 이미 자신의 내면으로 흡수된 상태라고나 할까요. 달리 보면 ‘책을 통해 배운 지식‘을 뒤로 하고 직접 ‘행동‘으로 옮기는 초기 단계에서 일어난 하나의 작은 에피소드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돈키호테는 언제나 말보다 행동을 앞세우는 인물이고 불굴의 도전 정신을 지닌 인물이어서, 자신의 책들이 불에 타 없어지는 정도로는 결코 좌절할 인물이 아니었지요.

『궁극의 리스트』는 겨울호랑이 님의 말씀처럼 ‘내가 찾고자 하는 부분만 찾아 읽으면 그만인‘ 전화번호부를 무척 닮았다는 생각도 듭니다. 내가 찾고자 하는 ‘목록‘을 발견하면 몹시 기쁘지만, 그 나머지에 대해서는 도무지 관심이 가지 않는, 그런 묘한 양면성을 지닌 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cyrus 2017-08-08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궁극의 리스트》. 제가 알라딘 가입하면서 처음으로 구입한 ‘비싼 책‘입니다. 책에 인용된 저서와 문학 작품 대부분 생소해서 안 읽고 넘어간 것들이 많았습니다. 관심 있는 내용만 골라 읽었습니다. ^^

oren 2017-08-08 13:42   좋아요 0 | URL
『궁극의 리스트』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은 사람은 아마도 ‘교열 담당자‘ 밖에 없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들더군요. 앞으로도 가끔씩 저 책을 펼쳐 보긴 하겠지만 끝내 완독하지는 못할 ‘궁극의 책‘이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들고요. 아무튼 참 묘한 책입니다. 비싼 책이지만 계속 외면하기도 힘들고요.^^
 

 

내가 여기에 터를 잡고 머문 지도 어느새 훌쩍 10년이 지났다.

 

세월 참 빠르다. 세월이 이렇게 빨리 흐를 줄은 나도 몰랐다.

그저 내 눈앞에서 흐르는 강물은 조금도 쉬지 않고 흐르고 또 흐르고,

그 강물을 바라보는 나는 단지 '여기'에 머물러 있을 뿐이고,

그 강물의 흐름을 따라 나도 함께 따라 흘러갈 수 없으니,

언덕 위에 서서 강물만 바라보다가 어느새 문득 늙어버린 여행객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동안 내가 여기에 자리를 잡고 나서  별로 한 일도 없는 것 같은데...

그저 아까운 10년의 세월이 어느날 갑자기 훌쩍 건너뛴 느낌마저 든다.

 

처음으로 이곳에 발을 들여놓을 때만 하더라도 나는 도대체 여기가 뭐하는 곳인지도 몰랐다.

도대체 어떤 친구들이 나와 함께 매일같이 얼굴을 맞대고 지낼 지도 몰랐다.

아무튼 끊임없이 새로운 친구들이 불쑥불쑥 예고도 없이 찾아 와서는,

아무런 '소개'나 '인사'도 없이 저마다 한 자리를 차지하고는 '이야기'를 꺼내 놓기 시작했다.

어떤 친구가 신이 나서 자신의 품 속에서 재미있는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으면,

다른 친구들이 서로 앞을 다투어 자신의 이야기를 거기에 보태는 경우도 자주 보았다.

 

그런 아름다운 추억들도 이젠 다 잊어 버리자.

어쨌든 나는 이제 여기서 서둘러 떠날 작정이다.

아니다, 좀 더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피치 못할 사정으로 급작스레 여길 떠나야 한다.

좀 더 솔직히 얘기하자면 결국 나는 여기서 쫒겨 나는 셈이다.

아무튼 그런 세세한 사정을 일일이 밝히자면 몹시 부끄럽지만 말이다.

아무튼 내가 여길 떠나는 이유나 나의 행방에 대해서는 차츰 알게 될 터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더니 여기도 가만 보면 참 많이도 변했다.

내가 여기에 계속 터를 잡고 버티기엔 이제 어느 정도 한계에 온 것도 사실이다.

사실 오래 전부터 계속 '눈치'를 보면서 근근히 버티며 살아 왔다.

왜 아니 그랬겠는가.

온갖 화려한 스펙으로 무장한 '새로운 친구들'이 끊임없이 밀려 드는데,

나같은 구닥다리가 여기서 어떻게 계속 버텨낼 재간이 있을 수 있으랴.

 

솔직히 여기서 이런 식으로 계속 버티며 살아 남을 자신이 없다.

여기도 알고 보면 은근히 '눈에 안 보이는 경쟁'이 치열한 곳이다.

친한 녀석들은 지들끼리 더욱 단결하여 구닥다리나 외톨이들을 배척하기 일쑤다.

저들끼리 온갖 비밀스런 대화들을 속닥거리면서도 도무지 곁을 내주지 않는다.

그런 꼴이 보기가 싫지만 나같은 뒷방 늙은이는 그저 꾹꾹 참고 못 본 체할 수밖에 없다.

혹여 그런 불만을 입밖에 냈다가는 즉시 벌떼같이 일어나서 나를 내쫒을 게 틀림없을 테니까.

 

그래서 오랫동안 고민해 온 끝에 마침 이참에 깔끔하게 여길 떠나기로 했다.

아니다, 거듭 밝히자면 내가 자발적으로 떠나는 게 아니라 쫒겨나는 게 맞다.

옛 정을 생각해서라도 그렇지, 이렇게 하루 아침에 여기서 쫒겨날 줄은 몰랐다.

 

신세 한탄일랑 이제 그만 하자.

이제 여길 영영 떠난다고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마음이 몹시 홀가분하기도 하다.

그렇다고 미련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 오래도록 죽치고 앉아 지내면서 재미있는 '세상 구경'도 참 많이 했다.

이제 어디 가서 그런 재미있는 세상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지,

나도 막상 여기를 떠나자니 앞길이 막막하고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질 않는다.

 

아, 되돌아 보면 이 좁은 공간에서 나는 얼마나 흥미로운 세상을 구경 했던가.

 

아는 거라곤 모르는 거 빼고 전부 다였지만 성깔 하나만은 언제나 까칠한 놈_니체 같은 놈,

온갖 유머를 다 갖췄지만 입이 걸레처럼 더럽고 가벼운 놈_라블레 같은 놈,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말만 잔뜩 늘어 놓는 놈_하이데거 같은 놈,

세상의 온갖 비밀은 저 혼자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늘상 가르치려 드는 놈_쇼펜하우어 같은 놈,

하느님조차 우습게 알고 까부는 놈_리처드 도킨스 같은 놈,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온갖 기막힌 말장난으로 세상을 비꼬는 놈_셰익스피어 같은 놈,

가진 건 쥐뿔도 없으면서 세상을 움직일 것처럼 위세 떠는 놈_헨리 데이빗 소로우 같은 놈,

낮이고 밤이고 허구헌 날 줄창 글만 쓰는 놈_카프카 같은 놈,

저 혼자만의 '독특한 의식의 흐름'을 늘어놓는 놈_조이스 같은 놈,

 

아... 이젠 좀 지겹다, 이런 녀석들을 계속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

떠나면 그런 더러운 꼴은 더 이상 안 보고 살 수 있을 꺼 아니냐.

이 참에 떠나자. 깔끔하게 떠나자. 차라리 잘 됐다.

다른 데로 쫒기듯 도망가더라도 여기보단 훨씬 나을 꺼다.

이대로 이런 푸대접을 받으면서 더는 못 버티겠다.

 

그래도 가만 생각해 보면,

여태까지 날 한 번도 심하게 쥐어박지도 않고 그럭저럭 대접해 줘서 고맙긴 하다.

사람이 오래 한 군데서 10년 씩이나 머물렀다가 이제 막 떠나는데,

그래도 '마지막 작별 인사'는 하고 떠나야겠지. 안 그래?

 

암튼 내가 며칠 전부터 짐을 꾸리고 있다는 소식에,

벌써부터 '얼씨구나 좋구나, 내 세상 왔네' 하며 입이 귀 잡으러 가는 놈들도 더러 내 눈에 보인다.

이왕 떠나는 마당에 내 그 녀석들을 일일이 불러 세우고 따져 보고도 싶지만,

아예 떠나는 마당에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일까. 그저 다 용서하고 깔끔하게 떠나자.

 

비록 나는 오늘 여기서 영영 떠나지만,

남은 친구들이여, 여기서 오래도록 버티면서 잘 먹고 잘 살아라.

재미난 세상 구경도 실컷 즐기고.

앞으로도 계속 새롭게 얼굴을 들이밀 참신한 녀석들도 잘 좀 대해 주고.

특히 나보다 훨씬 더 나중에 들어왔으면서도

나보다 훨씬 더 사랑받고 끝내 나를 여기서 쫒아낸 나쁜 놈들아.

내 말을 명심해라.

 

나는 이제 그만 가련다.

정작 길을 나설려니 막상 발길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날은 또 왜 이리 덥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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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잠시 쉬었다 가자.

우리들은 비록 이런 험한 꼴로 떠난다만, 살아남은 너희들도 이꼴 당하지 말란 법은 없느니라.

부디 몸 조심들 하고, 지금 있는 자리가 언제까지나 보장되는 거 아니란 걸 다시 한번 명심하거라.

 

 

아이구.. 저렇게 험한 꼴로 보쌈을 당해 떠나는 친구들 보니 영 남의 일 같지 않구먼.

그래도 천장 바로 아래까지 바싹 기어 올라간 우리들이 몹시 부럽제?

우리들도 하마터면 느그덜과 함께 도매금으로 한 방에 훅~ 날라갈 뻔했지.

주인장한테 두손 두발 모아 싹싹 빌고, 켜켜이 쌓인 먼지까지 싹싹 닦아낸 끝에 우리도 간신히 피신했지.

여기 천장 바로 밑에까지 기어 들어와 숨도 못 쉬고 엎드려 있다만 내심 쬐끔 불안한 것도 사실이야.

아무튼 우린 여기서 또 한 세월 낚아 볼란다.

주인장이 어디서 얼굴 반반한 연놈들 끌어 들이면 그땐 우리도 끝장이제.

언젠가 주인장이 우리까지 마저 쫒아내겠다면 그땐 우리도 미련없이 떠날 꺼여~

 

 

 

저렇게 한가운데 떡하니 자리잡고 환하게 빛을 받으며 마음놓고 지내는 저 친구들은 도대체 누구들이여?

시도 때도 없이 주인장의 사랑스런 손길까지 받아가며 속살을 헤쳐보이는 자네들은 도대체 무슨 상팔자여?

 

 

뭔 말이여? 이래뵈도 우린 태어날 때부터 느그덜과는 태생이 다르거든.

느그덜이야 고작 몇 년 반짝 하다가 이내 세상을 하직하기 바쁜 파리목숨들이지만,

우리들은 적어도 수백 년, 길게는 수천 년을 살아낼 작정으로 태어난 불사조 같은 존재란 말씀이야.

느그덜은 도대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를꺼여~

느그덜은 '시간의 테스트'를 견녀 낸다는 뜻이 무슨 말인지 아는감?

 

 

 

우린 그래도 천방 바로 밑에까지 기어 들어 왔으니 한동안 잠이나 푹 잘란다.

혹시나 주인장이 나를 잊지 않고 어여삐 여겨 찾아 준다면 몹시도 고맙겠지만.

그래도 쫒겨 나지 않고 여기서 버티고 있다는 게 어디냐.

 

 

저 가운데 몸집이 뚱뚱한 녀석들은 뭐여? 평소에 잘 보이지 않더만 아주 좋은 자리를 잡았네.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와 조이스가 나란히? 그 사람들이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다고?

아무튼 새롭게 좋은 자리로 옮긴 친구들이 한둘이 아니네. 암튼 잘혀 봐~

 

 

우린 '전세계의 도서관이 불타더라도' 우리부터 건져내 주겠다는 호언장담까지 들었던 존재란 말이여.

그러니 자네들은 너무 배아파 하지 말고 속히 여길 떠나게. 무디 헌책방 가서도 몸 조심 하고~

거기서 먼지 푹 뒤집어 쓰고 모진 세월 견디다 보면 혹 마음씨 좋은 새로운 주인이 자네들 모셔갈 지 알아?

 

 

 

이 사람들아, 우리도 이런 자리를 차지하기 까지는 필설로는 이루 다할 수 없는 고생들을 겪었다네.

그러니 자네들이 우릴 보고 너무 배아파 하지는 말게나.

우린 한 몸에서 태어난 친형제들인데도 수 년 동안을 '지척의 거리'에서 서로 쳐다만 보고 지내왔다네.

그 동안 한 이불을 덮고 잔 적도 없었고, 함께 음식을 나눌 기회조차도 영영 없었다네.

내 형이나 아우가 덩치 큰 녀석들 틈에 끼어 짓눌리며 낑낑대는 모습을 쳐다보는 일은 또 어땠고.

이제 겨우 이산가족들이 상봉한 셈이니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을라고.

그러니 부디 우리들을 위해 축하의 인사나 건네 주고 떠나게. 암튼 몸 조심 하고.

 

 

쇼펜하우어 : 어, 니체 오셨는가? 자넨 사후 나이가 어떻게 되나?

니체 : 아이구, 사부님. 이게 도대체 얼마 만이신지요? 저는 올해로 꼭 117살 됩니다만...

쇼펜하우어 : 그러고 보니 자네도 나이를 제법 먹었네 그려.

자네는 살아 생전에 나를 몹시 흠모한다고 들었는데, 지금도 그 마음 변치는 않았겠지.

니체 : 하이고, 이제 겨우 사부님 가까이 자리 잡았는데, 그 얘기부터 꺼내시면 어떡합니까.

         이젠 사부님 곁에 왔으니 좀 더 자주 옛날 얘기도 나누고 세상 변한 이야기도 나눠보자구요.

쇼펜하우어 : 그러자꾸나. 그런데 저 아래에서 얼굴을 내밀고 있는 저 빼빼마른 영감은 도대체 누군가?

니체 : 아이고, 쾨니히스베르크 영감이네요. 내가 저 영감 욕을 가끔씩 했던 걸 저 영감도 알고 있을까요?

쇼펜하우어 : 글쎼다, 하여간 인사부터 드리세. 저 영감은 어쩄든 우리에겐 둘 도 없는 스승님이 아닌가?

니체 : 그리시죠, 사부님.

 

 

여긴 또 뭐여? 며칠 전까지만 해도 책탑이 수두룩하게 쌓여 있던 곳이 아니었던가?

이렇게 자리가 널럴하구만 왜 하필 이런 삼복더위에 우릴 내쫒고 난리를 피운 게야?

글쎄 주인장이 마누라한테 혼이 났다는구먼. 책을 너무 쌓아 놓는 바람에 장롱 문이 안 열렸다나 뭐라나.

우리가 이번에 쫒겨난 것도 다 따지고 보면 주인장이 마누라 한테 한 방 제대로 얻어맞았기 때문이야.

아하, 그런 고약한 사정이 있었구먼.

글쎄 저렇게 장롱 위를 깔끔하게 비워 놓았다고 해서 저게 또 얼마나 갈지. 아무튼 두고 보자구.

 

 

얼씨구? 여기 자리잡고 있는 이 녀석들은 또 뭐야?

주인장 곁에 바싹 붙어 앉아서 고상한 음악까지 함께 듣고 있었어? 아주 놀고 있네.

나 원 참, 볼수록 성질 돋구는 구먼. 자세히 보니 여기 저기 빈 틈도 제법 있구만 그래.

왜 하필 우릴 기어이 쫒아내고 난리를 피우는 겨?

안 그래도 열이 달아 후끈거리는 이 삼복 더위에 말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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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닷없이 떠나 보낼 책들이 저렇게 초라한 행색으로 전락한 모습을 보자니 몹시 안쓰럽고 안타깝다.

이럴 땐 '몽테뉴'라는 사람이 정말로 너무 부럽다. 그래도 그 사람을 계속 부러워 하지는 말자.

내 방 하나만으로도 족히 1,000권을 수납할 책장이 있다는 것만 해도 얼마나 다행인가를 생각하자.

(이번에 '책장 정리'를 하고 난 뒤에 '재고 조사'를 해 보니 딱 924권이었다. 보따리에 담긴 책 76권 빼고.)

 

 

서재는 탑의 4층에 있다.


서재는 탑의 4층에 있다. 2층은 나의 예배실이고, 3층은 거처하는 방과 그 부속실이며, 혼자 있고 싶은 때에는 거기서 자는 일이 많다. 위에는 커다란 의장실이 있다. 그것은 지난날 내 집에서는 가장 쓸모없는 곳이었다. 나는 이 서재에서 내 생애의 대부분과 하루의 대부분을 보낸다. 밤에는 결코 거기에 있는 일이 없다.
 
······ 이 탑은 삼면으로 풍부하고 끝없는 조망이 내다보이며 실내에는 직경 16보의 공간이 있다.

겨울에는 나는 줄곧 거기 있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내 집은 그 이름이 말하듯 언덕 위에 올라앉아 있어서, 여기보다 더 바람 타는 곳도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떨어진 곳이라 찾아오기도 힘들어서 사람들의 소란도 물리쳐 주고 글을 읽기에도 효과적이기 때문에 더욱 마음에 든다. 여기가 내 자리이다. 나는 이 장소를 내 지배하에 두고, 이 구석 하나만은 아내이건 자식이건 일반 사람들이건 공동 생활에서 구애받지 않고 간직하려고 한다. 다른 데는 나는 모두 본질상으로 확실치 못한 명목상의 권위밖에 갖지 않았다. 자기 집에 있으며 자기대로 있을 곳도, 자기만의 궁전을 차릴 곳도, 몸을 감출 곳도 없는 자들은 내 생각으로는 아주 가련한 신세들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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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7-08-05 1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유, 놀래라.
저는 오렌님이 알라딘을 떠나신다는 줄 알고 덜컹했습니다.
제가 뭐 오렌님께 잘못한 거 있나 괜히 뒷꼭지가 쭈뼛해 오늘은 이렇게 자진 출두했다는 것 아닙니까?ㅎ

쟤들도 할 말이 많겠지요. 한때는 서재에서 위용을 자랑했을 텐데 말입니다.
저도 가끔 아우성을 듣습니다.ㅠ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으나 부디 잘 지냈으면 좋겠네요.
더운데 정리하시느라 고생하셨겠네요.^^

oren 2017-08-05 23:08   좋아요 0 | URL
저도 이렇게 갑자기 많은(?) 책을 한꺼번에 떠나 보낼 줄은 몰랐어요.
그래서 떠나보낼 책들을 바라보며 적잖이 안타깝고 서운한 느낌을 받고 있었더랬죠.
그러다가 갑자기 ‘천장 밑에‘ 새로운 공간을 발견하고는 전면적인 재배치에 착수했답니다.
그 덕분에 숱한 이산가족들도 한 곳에 쪼르륵 모을 수 있게 되었고요.
그래도 떠나보내는 책들 입장에서는 저한테 꽤나 서운했을 듯해요.
그래서 그들 입장에서 느낄 법한 솔직한 감정들을 써 보고 싶었는데, 그게 괜한 오해를 불러일으겼던가 봐요.
stella 님 댓글 보고 한 가지 더 생각난 게 있답니다.
알라딘 서재를 ‘진짜로‘ 떠나는 사람들은 절대로 이런 제목을 달고 글을 쓰지는 않는다는 사실이죠.
알라딘 서재의 특징은 언제나 ‘떠날 때는 말없이‘ 에요.
물론 처음 등장할 때도, 오랫동안 잠수했다가 디시 되돌아올 때도 마찬가지고요.

다크아이즈 2017-08-05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고전 다독하시니 글담에도 품격이!
내침을 당하는 책님들도 오렌님 서재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자부심을 가질 것 같습니다~

oren 2017-08-05 23:11   좋아요 0 | URL
떠나 보내는 책들한테까지 따스한 위로를 보내 주시니 제가 다 고맙습니다^^
고전이 읽을 때는 때로 힘들고 벅찰 때도 있지만, 그걸 한번 읽고 나면 두고두고 써먹기 좋은 장점도 있더라고요. 그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두고두고 오래도록 호소하는 매력이 있는 거겠죠, 작가님?

겨울호랑이 2017-08-05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oren님께서 갑자기 서재 활동을 그만두시는 줄 알고 놀랐네요.^^: 앞으로도 제게 많이 알려주셔야 하는데 말이지요. 더운 날 책장 정리하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남은 하루는 시원하게 보내세요^^:

oren 2017-08-05 23:16   좋아요 1 | URL
제가 늘 겨울호랑이 님 덕분메 도리어 배우는 걸요.
안 그래도 이번 기회에 ‘책장 위의 먼지까지‘ 털어내느라 땀 좀 흘렸답니다.
책들을 이리저리 옮기는 건 힘이 하나도 안 들고 생각보다 무척이나 재미있었어요.
제 손길에 따라 저런 거장들이 이리저리 서로 자리를 맞바꿔가며 줄서는 모습이 정말 웃기더군요.

hnine 2017-08-05 1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떠나보내며 얼마나 서운하셨으면 이런 글을 쓰셨을까 짐작이 됩니다. 떠나는 대상의 입장이 되어보는거죠.
한 자리에 오래 눌러있는다고 다 좋은 건 아닌 것 같습니다. 할일을 다 마치고 떠나는 모습도 좋아요.
저기 <축의 시대>가 눈에 들어오네요. 제가 읽을 수 있을까 눈여겨 보기를 1년 넘게 하고 있는 책이거든요. 너무 어려울 것 같아서요.
알라딘 서재의 품격을 높이시는데 oren님의 몫이 얼마나 큰데요. 아닐거라 생각하며 읽었지만 얼마나 다행인지요 ^^

oren 2017-08-05 23:23   좋아요 0 | URL
책이든 사람이든 이별은 늘 슬픈 거죠. 그것도 얘기치 않게 찾아오는 거라면 더욱 그럴 테고요.
hnine 님께서도 제가 느꼈던 감정을 이렇게 함께 공감해 주시니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축의 시대』는 다른 책에서 소개된 걸 보고 몇 년 전에 구입한 책인데 저도 여태껏 읽지 못했답니다.
hnine 님께서 오랫동안 눈독을 들이셨다니 먼저 읽으시거든 꼭 좀 글로 남겨주시길 바랄께요~

포스트잇 2017-08-05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충격..제가 알라딘 서재를 이렇게 몰랐나, 멀쩡해보이는 이곳의 물밑에서 도대체 뭔 일이 벌어지고 있는거여..라고 놀랐으나, 가엾게도 oren님의 품을 떠나는 책들의 한탄가였군요.
몸은 떠나도 내용은 오래전에 oren님 마음속에 남겨뒀을테고, 끝까지이리 마음써서 송가를 불러주셨으니 책귀신으로 떠돌지는 않겠지요.
일단 저녁더위에 헥헥거리다 일순 간담 서늘~ 했었네요. ㅎㅎ

oren 2017-08-05 23:33   좋아요 0 | URL
저 책들이 ‘입‘이 없어서 말을 못하는지, 제게 ‘귀‘가 없어서 그 말을 듣지 못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책들끼리 서로 대화를 나눈다고 생각하면 정말 재미있더군요.
이미 많은 작가들이 책들을 의인화해서 글로도 아주 재미있는 글을 많이 써냈었고요.
오늘 ‘책 팔러‘ 난생 처음으로 중고서점을 찾아갔는데,
마치 여태껏 애지중지 여물 주고 키워 왔던 소를 팔러 장터로 향하는 농부의 심정도 들더군요.
그렇지만 중고서점 책상 위에 올려지는 순간, 노련한 주인 아주머니의 재빠른 손놀림에 따라 순식간에 76권의 책들의 운명이 결정되는데 깜짝 놀랐답니다. 제가 여사장님께 물어봤더랬습니다. 아니, 사장님, 어떻게 그렇게 빨리 골라내실 수 있는 거죠? 그랬더니 사장님 하시는 말씀이, 늘상 하는 일인걸요, 뭘.... 절반쯤은 폐기처분될 듯하고, 나머지 절반쯤이라도 용케 살아남아서 새로운 주인을 잘 찾아갔으면 좋겠더라고요.


막시무스 2017-08-05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동입니다!

oren 2017-08-05 23:34   좋아요 0 | URL
많은 분들께서 이렇게 위로해 주시니 저도 괜시리 감동 먹네요! 고맙습니다^^

비연 2017-08-05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깜짝 놀라... 들어왔지 뭡니까..ㅜㅜ 에구 놀라라.. 하면서 장대한 책장들 구경에 넋을 잃어 봅니다.

oren 2017-08-05 23:37   좋아요 0 | URL
2001년엔가 저 책장을 산 듯한데, 생각보다 너무 튼튼해서 아주 만족하고 있답니다.
책장 지붕과 천장까지의 틈새까지도 이렇게 책장으로 활용할 수 있어서도 너무 좋고요.^^

북다이제스터 2017-08-05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쌈 당하여 버려지는, 눈에 보이는 맨 위 놓인 책 세권은 당연히 그런 대접 받아도 될 책으로 보입니다. ^^

oren 2017-08-05 23:41   좋아요 0 | URL
그래도 저 보따리 속에는 ‘알라딘 온라인 중고가‘로 28,000 원짜리, 18,000 원짜리도 숨어 있답니다.
그걸 미끼상품으로 삼아 중고서점에 내다팔았는데 76권에 38,000원 쳐주더군요.
권당 500 원씩인 셈인데, 절반쯤이 버려질 책들이어서 그나마도 꽤나 값을 잘 받은 느낌도 들더군요.^^

라로 2017-08-06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어제 이 글을 읽었는데 바빠서 좋아요만 눌렀어요. 읽으면서 마음 속으로 ˝도대체 왜요?˝라는 댓글을 달려고 벼르다가 마지막까지 다 읽고 무릎을 쳤습니다. 참 멋진 분이세요!!! 제가 떠나보낸 200여권의 책들에게 사죄를 하면서....

oren 2017-08-07 09:01   좋아요 0 | URL
아하, 그러셨군요. 한때는 사랑받았다가 아무런 예고나 이별 통보도 없이 숱하게 버림받는 책들을 생각하면 짠한 생각도 들어요. 그런데 라로 님께선 이미 200여 권씩이나 떠나보냈으면 이젠 책을 내다버리는 일이 ‘늘상 하는 일처럼‘ 느껴질 지도 모르겠군요.
저는 이 글 쓰고 난 뒤에 문득 ‘돈키호테의 서재‘가 떠올라 그 대목을 다시 찾아 읽어봤답니다. 그가 애지중지 간직하던 수많은 책이 ‘그가 잠든 사이에‘ 다른 사람들에 의해 무자비하게 ‘검열‘ 당하고 ‘화형‘에 처해지거든요. 돈키호테가 어찌나 불쌍하고 안타깝던지, 제가 다 울 뻔했답니다.
* * *
신부는 지쳐서 더 이상 책을 볼 기운도 없어 나머지는 한꺼번에 몽땅 불태워 버리고자 했다. 그때 이발사가 책 한 권을 펼쳐 들고 있었는데, 『앙헬리카의 눈물』이었다.

「내가 울 뻔했군.」 책 제목을 듣고는 신부가 말했다.「그 책을 태우라고 했더라면 말일세. 그 작가는 에스파냐뿐 아니라 세계에서도 가장 유명한 시인들 중 한 사람이지. 오비디우스의 우화를 몇 편 번역했는데, 정말 훌륭하더군.」

오후즈음 2017-08-07 1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다른분들처럼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한국에 가면 저도 이렇게 떠나 보낼 아이들이 많아서 마음이 울쩍하군요.
우선 가면 먼저 좀 쓰담 쓰담 해줘야 겠어요.

oren 2017-08-08 00:01   좋아요 0 | URL
가끔씩, 이별할 땐, 너무 지나치게 연연해 할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 * *
사람들은 오디세우스가 나우시카와 이별했을 때처럼, 그렇게 삶과 이별해야 한다.
ㅡ 연연해 하기보다는 축복하면서. (니체, 『선악의 저편』

무해한모리군 2017-08-08 18: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서재 정리해야하는데 생각만 하며 해해년년이 흐르네요. 과감해져야 하는데.

oren 2017-08-08 18:58   좋아요 1 | URL
서재 정리는 정말 권장할 만한 일입니다. 단점은 거의 없고(약간의 시간과 땀이 소요되는데, 이걸 꼭 ‘단점‘이라고 말하긴 약간 애매해서요.) 장점은 셀 수 없이 많답니다. 우선 기분이 몹시 상쾌해지고요, 이리저리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던 책들을 주제별로, 혹은 저자별로 한 데 모으는 데 따르는 쾌감도 생기고요, 자신의 책 구매 습관이나 독서 습관에 대한 ‘새로운 통찰‘도 얻을 수 있답니다. 무엇보다 가장 좋은 점은 ‘내가 원하는 책‘을 아무 때나 재빨리 꺼내 볼 수 있다는 점이겠죠. 점점 더 늪에 빠져드는 듯한 무력감에서 벗어날 때 느껴지는 통쾌한 기분을 어서 빨리 만끽하시길 바랄께요~

그랜드슬램 2017-08-19 0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렌님~~여름 잘 보내셨죠? 항상 글 잘보고 있는데 진짜로 떠나시는줄 알고 덜컹했습니다^^ 이메일번호 보내주실래요? 항상 건강하시고 좋은 하루되세요^^

oren 2017-08-19 13:07   좋아요 0 | URL
그랜드슬램 님께서도 여름 잘 보내셨는지요?
제 이메일 주소는 ojcojj@naver.com입니다.
늘 관심 가져 주시고 성원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2017-08-30 21: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8-31 0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8-31 09: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8-31 12: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8-31 12: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목록을 나열해 보는 일은 재미있다. 목록이 얼마나 다양한 성질을 지니는가에 대해서는 움베르토 에코가 쓴 『궁극의 리스트』를 보면 금세 이해할 수 있다. 사물의 목록, 장소의 목록, 신기한 것들의 목록, 현기증 나는 목록, 실용적 목록, 시적 목록은 물론 심지어 정상적이지 않은 목록까지, 그가 고찰해 보지 않은 목록을 찾기가 도리어 힘들 정도다.

 

이 가운데 '책의 목록'이 빠질 리는 없다.

 

책 목록에 대한 취향은 세르반테스부터 위스망스, 칼비노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가들을 매혹시켜 왔다. 더욱이 애서가들이 고서점의 카탈로그(확실히 실용적 목록으로 만들어진)를 무릉도원이나 욕망의 땅에 대한 황홀한 묘사처럼 읽는다는 사실도 잘 알려져 있다. 쥘 베른의 독자들이 고요한 심해 탐험이나 무시무시한 바다 괴물과의 조우에서 즐거움을 얻듯이, 그들은 책 목록에서 즐거움을 얻는다.

 

고서 애호가인 마리오 프라츠는 1931년 문학 박람회 서적 시장의 카탈로그 15를 위해 쓴 텍스트에서, 애서가들이 고서점의 카탈로그를 읽을 때 느끼는 즐거움은 보통 사람들이 스릴러물을 읽으면서 느끼는 즐거움과 똑같다고 지적했다. 그는 <그 어떤 독서도 흥미로운 카탈로그의 그것만큼 신속하고 감동적인 효과를 자아내지 않는다고 확신하게 될 것이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이 문장 뒤에 바로, 심지어 재미없는 카탈로그들도 똑같이 흥미롭게 읽힐 수 있음을 우리에게 깨우쳐 준다.(377쪽)

 

 - 움베르토 에코, 『궁극의 리스트』

 

 

딱 맞는 말이다. 내가 오늘 태어나서 거의 처음으로 경험한 일은 '쓸데 없는 책들을 골라내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추려낸 '내다버릴 책들의 목록'을 보니 문득 그것조차 몹시 흥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려질 책의 '가련한 신세'에 비춰 보나, 그 책을 내다버릴 내가 품게 되는 '온갖 어리석음과 회한의 감정'에 비춰 보나, 버려질 책들의 제목이 여간 웃기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개는 무엇을 보았나』 ---> 여기서 '개'는 결국 '나'인 셈이다. 내가 뭘 보았기에 이런 책을 사게 되었나?

『빌 게이츠의 미래로 가는 길』---> 빌 게이츠가 '미래'를 제시하던 시대는 벌써 까마득한 옛날 아닌가?

『iCON 스티브잡스』---> 스티브 잡스는 이미 '아이콘'이 아니라 '아이해브곤'이 된 사람이다.

『마음의 녹슨 갑옷』---> '너'야말로 '내 마음의 책장에서 녹슨 책'이 되었다.

『마이클 포터의 경쟁론』---> '너'야말로 '책장 경쟁'에서 밀려난 책인데?

『이건희 개혁 10년』---> 이건희 '병상' 10년?

『사다리 걷어차기』---> 결국 책장 사다리에서 걷어차인 책?

『스타벅스, 커피 한 잔에 담긴 성공신화』---> 커피 한 잔과 함께 쫒겨난 책.

『MARKETING is ... WAR』---> 책장 자리다툼 또한 전쟁이야. 살아 남거나 쫒겨나거나 결국 둘 중에 하나야.

『무엇이 내 아들을 그토록 힘들게 하는가』---> 무엇이 '내 책장'을 그토록 복잡하게 하는가

『우리는 여기서 천년을 산다』---> 우리는 여기서 10년도 못 살고 쫒겨나고 만다.

『1494년 베니스 회계』---> 2017년 여름 회계. 이미 계산은 끝났어.

『앤드류 그로브, 승자의 법칙』---> 10년도 못 견디고 책장에서 쫒겨나게 된, '패자가 된 책들의 법칙'은?

『보랏빝 소가 온다』---> 보랏빛 '수레'가 온다. 헌 책을 내다버릴 때 끌고 갈 수레가.

 

 

오른쪽 구석에 누워 있는 책들 가운데 땅바닥에 쌓인 책들은 곧 '쫒겨날 책들'이고, 그나마 조그만 장롱 같은 '받침대' 위에 누워 있는 책들은 언젠가 '책장 속으로 들어갈 책들'이다. 이 사진으로는 구분이 쉽지 않다.

 

 

곧 내쫒길 운명에 처한 책들은 '앞줄'에 쪼로록 모여 앉은 67권이다. 저자로부터 선물받은 책도 몇 권 있어서 눈에 밟히지만, 이런 저런 사정을 다 헤아리자면 '작별'이 어렵다. 내칠 땐 과감하게 내쳐야 한다. 책값이 아깝지만 그동한 '허투루 쓴 돈'이 어디 책값 뿐이랴.

 

 

이 각도에서 보면 '책장 속으로 들어갈 책들'이 확연히 구분된다. 책탑이 무려 '일곱 기둥'을 이룬 덕분에, 뜻하지 않게 '받침대'로 쓰여 왔던 '조그만 장롱'이 마침내 열리지 않게 되었노라고 (아내한테서) 타박을 받았다. '참을 수 없는 책들의 무거움'으로부터 장롱을 구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쫒겨나야 할 책들을 골라내는 수밖에.

 

 

고작 67권을 골라냈을 뿐인데, 책장이 한결 숨통이 트이는 듯하다. 저렇게 비워진 공간 덕분에 책탑을 세 개나 없앴고, 오랫동안 '책들의 압박'을 온몸으로 견디며 누워 지내다 마침내 벌떡 일어나 몸을 꽂꽂이 세운 책들은 한 눈에 봐도 입이 귀에 걸렸다. 가령,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잃어버린 '책장'을 찾아서.

『마담 보바리』---> 책장 밖에서 사는 동안 내가 얼마나 '멋진 책장'을 열망했는지 니들은 모를 꺼야.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나는 죽어 누워 가더라도 '꼭 가야 할 책장'이 있단다.

『말괄량이 길들이기』---> 거친 들판에서 오랜 시간 길들여진 덕분에 마침내 '책장'이라는 평화를 얻었어.

『한여름 밤의 꿈』---> 이게 꿈이냐? 생시냐?

『셰익스피어 전집_햄릿』---> 이대로 괜찮은가 괜찮지 않은가 그게 늘 문제였어.

『내게 셰익스피어가 찾아왔다』---> 내게도 책장이 찾아왔다.

『전쟁과 평화』---> 책장과 평화.

『로빈슨 크루소』---> 그런데 프라이데이는?

『걸리버 여행기』---> 내가 지금 어디로 날아온 거지? 천공의 섬 라퓨타? 기분이 붕붕~

『고도를 기다리며』---> (블라디미르) 고도를 기다려야지. / (에스트라공) 참 그렇지. 여기가 확실하냐?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먼바다에 섬들이 있소. …… 새들은 그곳에서 살다가 이곳에 와서 죽소."

『자기 앞의 생』---> "나는 이제 열 살이 되었다. 로자 아줌마는 내게도 생일이란 게 필요하다면서 한 날을 내 생일로 정해주었는데, 그게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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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글을 쓰고 나니 문득 로맹 가리의 소설들이 그립다. http://blog.aladin.co.kr/oren/7383466

갑자기 밀어닥친 파도에 아무 영문도 모른 채 휩쓸려 떠내려간 '불쌍한 책들'도 어느새 그립고...

 

"몇 미터만 더 갔으면 물결에 휩쓸려갔을 거요. 이곳 파도는 몹시 사납소."

 

그녀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두 눈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그녀의 얼굴은 어린아이를 연상시켰다. 사랑의 슬픔이군, 하고 그는 결론을 내렸다. 언제나 문제는 실연의 아픔이지.

 

"이 새들은 모두 어디서 오는 건가요?" 그녀가 물었다.

 

"먼바다에 섬들이 있소. 조분석 섬들이오. 새들은 그곳에서 살다가 이곳에 와서 죽소."

 

"왜요?"

 

"모르겠소. 갖가지 설명이 있을 수 있겠지요."

 

"그럼 당신은요? 당신은 왜 여기로 왔죠?"

 

 - 로맹 가리,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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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즈음 2017-08-03 0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갈하게 꼽혀 있는 책들. 보는것만으로도 즐겁네요.^^

oren 2017-08-03 11:36   좋아요 0 | URL
책은 아무리 봐도 누워 있는 모습보다 책장 속에 빽빽히 세워져 있는 모습이 좋은 것 같아요^^

겨울호랑이 2017-08-03 11: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정된 공간에 어떤 책을 남기는가는 누구에게나 고민이 되는 문제닌 듯 합니다. 마치 얼마 전 본 영화 「덩케르크」에서처럼 영국으로 돌아가는 배에 승선할 병사를 골라야하는 것과 같은 선택의 문제가 느껴집니다^^: 영화에서는 환자를 먼저 이송했습니다만, 책을 고를 때 그래서는 안되겠지만요.

oren 2017-08-03 11:40   좋아요 1 | URL
책이나 사람이나 어느날 갑자기 버림받는 존재로 전락할 때처럼 슬픈 순간은 없겠죠.
겨울호랑이 님 말씀처럼 ‘다 태울 수 없을 땐‘ 결국 누군가는 남아야겠죠. 책이든, 사람이든요.

qualia 2017-08-03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많은 책들을 모두 전자책으로 만들어 아이패드나 서피스 프로 같은 전자책 단말기에 저장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면 종이책들을 보관하기 위한 물리적 현실 공간이 없어도 되니까요. 손바닥보다 작은 SSD에 수천~수만 권을 저장할 수 있고, 필요할 때마다 화면에 띄워서 읽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을까요. 종이책과 전자책의 장단점,각각의 고유성 등등은 모두들 잘 알고 있는 사항이니까 재론할 필요는 없지요.

그런데 전자책 단말기의 기술 수준이 아직도 너무나 불완전하다는 생각입니다. 전자잉크(e-ink)에 기반한 전자종이(e-paper) 디스플레이를 채택한 단말기는 종이의 고유 질감(시각적 질감)을 어느 정도 구현할 수 있기 때문에 장시간 들여다봐도 눈에 거의 부담을 주지 않는다고들 하죠. 하지만 응답 속도가 너무 느려 잔상이 끌리고, 고해상도 구현이 비교적 어렵고, 컬러 화면 구현도 우수하지 않은 편인 데다 이쪽 방면 기술 개발도 지지부진한 형편이고, 동영상 구현은 아주 어려운 편이죠. 반면에 LCD나 OLED 디스플레이는 전자종이 디스플레이의 종이 질감을 거의 구현할 수가 없지요. 그래서 장시간 들여다볼 경우 눈에 상당한 부담을 주죠. 하지만 전자종이 디스플레이의 단점들은 거의 모두 극복한 현존하는 가장 우수한 형태의 디스플레이라고 할 수 있죠. 해서 전자종이 디스플레이의 종이 질감과 LCD/OLED 디스플레이의 빠른 응답 속도, 초고해상도, 완벽한 색재현율, 완벽한 동영상 재생 능력 등등, 양쪽의 장점들을 모두 지닌 최강의 전자책 디스플레이가 개발돼 나오기를 기다립니다. 헌데 지구인들의 과학기술 발전 속도가 의외로 느리다는 게 문제입니다. 지금 21세기 하고도 17년이 지난 시점인데요. 언론이나 대중서에서는 1970년대, 1980년대 미래학자들의 예측이 거의 맞아떨어졌다고 인간의 능력에 대해 자화자찬하고 지구인들의 놀라운 과학기술적 성과에 대해 호들갑을 떨어대고 있는데요. 제 판단엔 그건 지구인들의 자뻑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미래학자들의 과장으로 가득찬 환상적 혹은 공상적 미래 예측 대부분이 21세기 초에 실현은커녕 과연 원미래에라도 실현 가능이나 할 수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운 지경이니까요. 즉 그 시대 미래학자들이 21세기 초에 실현돼 일상화되리라 예측한 달 정복, 인간형 로봇과의 공존, 암 정복, 핵융합 상용화, 진정한 의미의 양자컴퓨터 상용화, 사이보그, 초인공지능, 홀로그램(예컨대 홀로그램 스마트폰), 우주 태양열 발전 전력 전송, 나노봇 수술 등등 수많은 환상적 혹은 SF 영화적 과학기술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전혀 실현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으니까요. 솔까 어느 원미래에 실현될 수 있을지 감을 잡기조차 어렵다고 보는 게 냉정하고도 정확한 실태 파악이라고 봅니다. 21세기 초의 지구인들은 할리우드가 양산하는 SF 영화 세례를 너무 많이 받은 나머지 과학기술적 착시에 빠져 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 단적인 예가 2016년 03월 AlphaGo의 화려한(?) 등장 뒤로 나타난 인공지능에 대한 지구인, 특히 한국인들의 일종의 신격화(신비화 혹은 우상화) 현상이라고 봅니다. 인공지능 관련 기사가 뜨면 터미네이터, 스카이넷, 특이점, 인류에 대한 반란, 인류 멸종, AI의 지구 접수 운운하는 SF 영화적 공상들이 댓글란 최상위 자리를 점령해버립니다. 인공지능에 대한 일반 대중들의 무작정스러운 공포, 다른 말로 신격화·신비화·우상화는 거의 맹신에 가까울 정도입니다. 댓글을 쓰다 보니까 제가 좀 멀리 와버린 느낌이 들긴 하는데요. 요컨대 21세기 초 지구인들의 과학기술적 역량과 성과가 지나치게 부풀려진 측면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유발 하라리 · 레이 커즈와일 · 닉 보스트롬(?) · 일론 머스크와 같은 유명 학자 · 미래학자 · 저술가 · 기업가들까지도 직간접/음양 여러 형태로 그런 부풀리기, 공포 조장, 선정적 발언에 가세하고 있다는 것이죠. 아이러니하게도 혹은 역설적으로 모두들 지구인의 역량을 과대 평가하는 측면이 있다는 겁니다. 아직도 지구인들은 (제가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쓸 만한 전자책 단말기 하나 제대로 만들지도 못하는 수준인데 말이죠.

저는 oren 님께서 저렇게 소중한 책들을 대거 내다버리기로 결단하신 데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솔까 저는 제가 입을 대로 입어서 해진 헌옷조차 버리지 못하는데 말입니다. 최근 저는 제가 작성해온 소중한 문서들을 대거 상실하는 아픔을 맛보았습니다. 그 사건은 저한테 한 개인의 정체성과 동일성은 과연 무엇이고, 어떻게 형성되며, 어떻게 유지되고, 심지어 어떻게 복제되고 전송될(mind-uploading)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다시 한번 사유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그런데 oren 님께서 「우리를 슬프게 하는 책들의 목록」이란 글을 올리셨지 뭡니까. 바로 oren 님의 이 글을 읽어보니 제 기록 상실의 아픔(슬픔)과 딱 겹치는 부분이 너무 많지 뭡니까. 하아~ 게다가 최근 어떤 일을 나갔다가 경험한 느낌과 너무나도 흡사했습니다. 자세히 밝히고 싶진 않지만 한 대학 도서관에서 폐기하기로 한 산더미 같은 외국어 원서들(Cambridge University Press, Oxford University Press 출간 책들이 대부분이었음)을 목격하고 경악했던 일이었습니다. 또한 그곳 도서관 한 서가에서 아마도 노년에 접어든 교육자나 학자였을 법한 분이 기증한 두어 책장 분량의 귀가 헐고 고색창연한(?) 책들을 보고 일종의 어떤 허무감을 느꼈던 일이었습니다. 이 많은 책을 기증하신 분은 어떤 분이실까? 자신의 기억과 추억이 이곳 도서관으로 옮겨와 다른 수많은 학생 · 독자들의 기억과 추억 속으로 다시 들어가 살기를 원하셨던 것일까? 그분이 기증한 책들은 희귀한 고가의 외국어 원서들까지 폐기되는 슬픈 운명을 과연 피해갈 수 있을까? 그날 도서관에서 느꼈던 허무감이 다시 느껴집니다. 해서 oren 님의 윗글은 다시금 저를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저 처분할 책들도 지금 이 순간까지 oren 님의 뇌신경망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oren 님의 기억과 추억을 형성했을 것이고, 그 기억과 추억은 oren 님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했을 것이고 동일성(identity) 또한 구축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도 어떤 방식으로든 처분해야 할 책들이 있습니다. 처분하기 전에 스캔해서 전자책으로 만들어 단말기 속에 저장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기억과 추억들은 더욱 더 온전하고 영구적인(?) 형태로 유지될 수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해킹을 당하거나 파괴돼 상실할 가능성도 있습니다만, 그에 대한 대책을 함께 강구해야겠지요. 옛날처럼 연필로 (볼)펜으로 공책에 직접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써가며 기록하던 때가 그리울 정도입니다. 컴퓨터 자판으로 치고 기록하는 것이 훨씬 빠르고 간편하고 많이 저장할 수 있기 때문에 이제는 펜과 공책은 거의 쓰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대규모 기록 상실을 경험하고 나니까 다시 펜과 공책을 꺼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기록 보존에 더 안전하다는 생각까지 들기도 하고요. (깊지도 못하지만) 뭔가 더 쓸 내용이 있는 것 같은데요. 하지만 동어반복 그만하고 컴퓨터가 불시에 다운되는 불상사를 피해 얼른 입력해야겠네요. 아무튼 여러 가지 깊은 생각거리를 주는 윗글을 써주신 oren 님께 감사드립니다.

oren 2017-08-03 12:35   좋아요 0 | URL
제가 쓴 보잘것 없는 글 하나에 qualia 님께서 아주 진지한 댓글을 달아주셨군요. 여러모로 생각해 볼 바가 많아서 아주 유익한 참고가 되었습니다. 정성스런 댓글에 우선 감사드리고요.

qualia 님께서 말씀해 주신 여러 내용들에 일일이 제 생각을 다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씀부터 드리고, 제가 이런 글을 쓴 취지나 배경을 살짝 덧붙여 말씀드려볼까 싶습니다.

무엇보다도 우선, 저는 ‘잡다한 책들‘을 좀 싫어하는 편입니다. 물론 어떤 책이든 없는 것보다야 내 주위에 가까이 있는 게 좋을 지 모르겠지만, 가만 보면 ‘쓰레기 같은 책들‘도 많은 게 사실이거든요. 제가 이런저런 책들을 내다버릴 생각으로 고르다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책들이 저마다 처음 나왔을 때에는 저자와 출판사와 서점과 독자들이 다들 ‘한때나마 뜨겁게 열광했을지 모르겠지만‘ 이젠 (제 기준으로 봐서는) 수명을 다한 책이 되고 말았구나, 싶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답니다. 낡고, 녹슬고, 쓸모가 없어지고, 진부하기 짝이 없는 책들을 도대체 내가 왜 ‘책장 속에 반듯하게 모셔 놓아야 한단 말인가‘ 라는 생각도 들었답니다. 그 자리에 대신 들어앉을 자격이 충분한 책들도 ‘책장 밖에서‘ 저토록 오래 짓눌려 신음하고 있는데 말이지요.(심지어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나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조차도 책장 속에 들어가지 못했답니다. 이번에도요.)

물론 책장을 거실 공간으로까지 확대하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될 수 있겠으나 굳이 그러고 싶지 않더군요. 제 기준으로는 이미 ‘폐기 처분‘ 받아도 충분한 책들이 꽤나 많이 있고, 굳이 그 책들을 끌어안으면서까지 다른 책들을 계속 수용하기 위해 ‘책장만 자꾸 늘리는‘ 어리석은 짓은 하고 싶지 않더군요. 최인호의 소설 『상도』에 나오는 계영배(戒盈杯) 생각도 했답니다. 비울 줄 알아야 채울 수 있겠지요.『부의 미래』라는 책에서 엘빈 토플러가 말했던 대로 미래에는 ‘쓰레기 정보‘를 얼마나 잘 관리하느냐가 무척 중요해질 거라는 지적도 떠올렸답니다. ‘잡다한 책들‘을 자주 내다버릴 수 있어야 보다 더 가치있고 훌륭한 책에 더 가까이 갈 수 있다고 저는 늘 믿습니다. 그런 면에서 제 책장엔 아직도 내다버릴 책들이 수두룩하답니다. 인생은 어쨌든 ‘여행‘이나 마찬가지인데, 떠메고 다닐 짐이 많으면 많을수록 여행은 번잡하고 힘이 들 수밖에 없겠지요.

보다 더 간소하게! 보다 더 단순하게! 아무튼 꾸준히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고 싶은 게 저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그것이 책이 되었든, 인간관계가 되었든, 여행이 되었든 말이지요. 그러니 ‘독서‘에서도 책은 늘 덜어내고, 다시 채워야 할 우물이나 샘물 같은 것이 되어야지 계속 쌓아놓기만 하는 웅덩이 같은 식으로 관리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책에서 길어올린 맑은 샘물 같은 청량한 느낌들은 ‘기억‘ 속에 가득 채우는 것으로도 이미 충분할테고요. 그 ‘기억‘ 마저도 언젠가는 다 반납할 날이 결국 찾아 오겠지만, 죽는 순간까지라도 ‘아름답고 소중한 기억들‘을 끊임없이 계속 채워나갈 수 있다는 희망에서 보람을 찾고 싶습니다. 제게 잡다하게만 느껴지는 책들을 이만큼 내다버리는 일은 그런 ‘시원한 물‘을 찾는 데 조금도 지장을 주지 않으리라 믿고요. 저도 쓰다보니 댓글이 엄청 길어졌군요. 아무튼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이 댓글을 쓰는 지금도 ‘오늘 저녁에라도‘ 내다버릴 다른 책들을 좀 더 골라내야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아무튼 저는 언제나 누워서 낑낑대는 저 책들을 하루라도 더 빨리 일으켜 주고 세워 주고 싶답니다.^^

라로 2017-08-03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3주 전에 200여권을 내다 팔고(알라딘), 밑줄이 많아서 매입 불가라고 한 책들은 알라딘 중고서점에 오신 분들에게 가져가라고 했어요. 님처럼 사진이라도 찍어둘 것을,,,그때는 알라딘을 안하던때라,,,막 아쉽네요. 처리하시는 책은 주로 자기 계발서이고 간직하시는 책은 역시 고전이군요!!

oren 2017-08-03 13:45   좋아요 0 | URL
200여 권을 한꺼번에 정리하셨다니 대단하시네요... 그 많은 책들을 나르느라 힘드셨겠어요. 저도 이번에 정리할 책들을 ‘알라딘 중고서점‘에라도 팔아볼까 싶어서 ‘검색‘해 봤더니 사주겠다는 책이 겨우 열 권 남짓이더군요. 그래도 몇 권은 ‘매입 단가‘가 제법 되던데, ‘1,000원짜리‘ 책으로 전락한 경우도 많아서 적잖이 놀랐답니다.

라로 2017-08-03 14:43   좋아요 0 | URL
큰 박스로 7박스정도 되었어요. 그 얘기는 언제 시간이 되면 하려고 했는데 오렌님께 먼저 하네요. ㅎㅎㅎㅎ 남편과 큰아들이 번갈아가며 날라왔는데 알라딘 직원이 한 명이었고 저는 문닫기 1시간 정도 전에 가서 그 직원이 고생하며 해준 기억이 나요. 그런데 거기에는 10권의 매입을 도와주는데 걸리는 시간이 5분이라고 적혀있더군요. 하지만 그 직원은 다른 손님들의 계산을 도와주랴 제 책을 매입하랴 정말 미안했어요. 영업시간이 끝나고도 계속 해야 했거든요. 제가 판매한 책도 대부분 $1.00에 책정된 책이 많더군요. 속상했지만 알라딘에서 매입을 안해주면 도서관에라도 기부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헐값에 팔았지요. 근데 그 책들 팔아서 아들 녀석 캠프 가는데 사용했어요. 허무하더군요.

oren 2017-08-03 19:49   좋아요 0 | URL
큰 박스로 7박스면 굉장한 부피와 무게였군요. 책이 또 오죽이나 무거운가요. 그런데도 대부분 1달러 아니면 빵달러였다니 그쪽 사정도 별로 좋진 않군요. 저도 ‘알라딘 매입 예상가‘ 조회를 해봤더니, 25,000원이나 28,000원씩 주고 샀던 비싼 책들도 단돈 1,000원밖에 안 쳐주겠다고 하니 시쳇말로 빡치겠더군요. 주위에 널려 있는 동네 도서관에 가져가서 기부하자니 거기서 과연 받아줄까 싶기도 하고 또 이런 책을 찾는 이들로 별로 없을 듯해서 그냥 식사동에 있는 ‘집현전‘이라는 중고서점에 갖다줄까 싶어요. 거기에선 어쩐지 ‘임자‘를 만날 책도 혹시나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cyrus 2017-08-03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탑의 높이가 어느 정도인지 궁금하군요. 저도 꽂지 못한 책들을 탑처럼 만들어서 보관하고 있습니다. 제 방에 있는 책탑은 피사의 사탑처럼 약간 기울어져 있는 상태입니다. 책을 더 올렸다간 무게를 견디지 못해 무너져버릴 겁니다. ^^

oren 2017-08-03 13:49   좋아요 0 | URL
사진으로 보시는 대로입니다. 새로운 탑을 만들면서 약간 낮아진 측면도 있고요. 책탑이 딱 한 번 무너진 적이 있었는데 엄청난 굉음이 나더라고요. 그때 얼마나 놀랐던지 ‘이건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카스피 2017-08-04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장속에 가지런히 놓여진 책을 보니 넘 부럽습니당.제 책은 둘곳이 없아 모두 박스에 있으니 말이죠.서울에서 책 나눌 공간 1평을 눌리는데 천만원이 필요하다고하니 돈 없는 사람은 책을 보관하기도 힘든 세상인것 같습니다ㅜ.ㅜ

oren 2017-08-04 18:42   좋아요 0 | URL
카스피 님께서는 책을 ‘박스‘에 보관하시는군요. 말씀을 듣고 보니 박스 안에 갇힌 책들이 너무 불쌍합니다. 박스에 보관하시면 읽고 싶은 책들을 찾는데도 엄청 불편할 듯싶고요. 어서 빨리 책장을 마련하셔서 갇혀 지내는 책들이 빛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본유 관념(innate idea)과 빈 서판(tabula rasa)

 

겨울호랑이 님께서 여러 책들에서 인용해 주신 문장들 때문에 '본유 관념'과 '빈 서판' 이론뿐만 아니라 앙리 베르그송의 '철학'까지도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됩니다. 베르그송은 그의 주저인 『창조적 진화』에서 과학의 역할과 철학의 역할을 아주 흥미롭고도 명쾌하게 비교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대목들 가운데 이번에 겨울호랑이 님의 글 때문에 다시금 펼쳐 읽고 거듭 음미해 볼 만한 대목들을 '먼댓글 형식'으로 덧붙여 봅니다.

 

한가지 덧붙일 점은,『창조적 진화』의 제4장에서 겨울호랑이 님께서 인용해 주신 철학자들인 플라톤,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등이 아주 흥미롭게 다뤄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제4장은 '창조적 진화'의 본문 내용과는 사뭇 동떨어진 내용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마치 부록과도 같은 장인데, 제목이 <사유의 영화적 기작과 기계론적 환상 - 철학 체계들의 역사 훑어보기 / 실재적 생성과 잘못된 진화론>입니다. 각 소절(小節)의 제목들은 <존재와 무>, <생성과 형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근대 과학>, <데카르트> ,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 <평행론과 일원론>, <칸트의 비판>, <스펜서의 진화론>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분량은 대략 140쪽 정도 됩니다. 아카넷에서 나온 『창조적 진화』는 전체 분량이 598쪽으로 조금 두껍지만 '문장이 워낙 아름다워서' 아주 재미있게 읽을 수도 있습니다. 1907년에 출간된 이 작품으로 그는 1928년에 '과학을 담은 철학책'으로서는 아주 드물게 '노벨문학상'까지 받기도 했답니다.

 

 * * *


 

바로 여기에 철학의 역할이 있는 것

 

…… 그러나 새로운 종의 생성에 대해 참인 것은 또한 새로운 개체의 생성에 대해서도 참이고, 일반적으로 생명체의 어떤 형태, 어떤 순간에 대해서도 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변이가 새로운 종을 생성하기 위해서 일정한 크기와 일반성에 도달해야 한다면, 그것은 각 생명체에서 매순간 연속적으로 보이지 않게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날 사람들이 말하는 돌연변이들 자체도 부화(孵化)의 작업 또는 차라리 숙성(熟成)의 작업이, 겉보기에는 불변적인 일련의 세대를 거쳐 이루어졌을 때만 가능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람들은 생명에 대해 의식과 마찬가지로 그것이 매순간 무언가를 창조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36)

 

생명의 진화가 빚어낸 우리의 지성은 행동을 조명하고, 우리가 사물에 대해 작용하도록 준비하며, 주어진 상황에 잇따르는 사건들의 유리함이나 불리함을 예측하는 것을 본질적 기능으로 한다. 따라서 지성은 한 상황에서 기지(旣知)의 것과 유사한 것을 본능적으로 분리해 낸다. 그것은 <동일한 것이 동일한 것을 낳는다>라는 자신의 원칙을 적용할 수 있도록 동일한 것을 찾는다. 상식적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바로 이런 과정 속에 존재한다. 과학은 이 작업을 가능한 한 최고도의 정확성과 엄밀성에 이르게 하지만 그것의 본질적 특성을 변화시키지는 않는다. 일상적 지식과 마찬가지로 과학은 사물로부터 반복의 측면만을 취한다. 모든 것이 독창적이라 해도 과학은 과거를 거의 유사하게 재생시키는 요소들과 국면들로 그것을 분석할 준비가 되어 있다. 과학은 반복된다고 간주되는 것, 즉 가정상 지속의 작용을 벗어나는 것 위에서만 작용할 수 있다. 한 역사의 잇따르는 순간들에서 환원불가능하고 비가역적인 것은 과학에 의해 포착될 수 없다. 이러한 환원불가능하고 비가역성을 표상하기 위해서는 사유의 근본적인 요구들에 부응하는 과학적 습관들과 결별해야 하며, 정신을 위반하고 지성의 자연적 경향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철학의 역할이 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생명이 우리의 목전에서 예측불가능한 형태의 연속적 창조처럼 진화한다고 해도 [지성에게는] 소용이 없다. 형태, 예측불가능성 그리고 연속성은 그만큼의 무지가 반영된 순수한 외양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언제나 남아 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상식에서 연속적인 역사로 나타나는 것은 잇따르는 상태들로 분해될 것이다. 당신에게 독창적 상태라는 인상을 주는 것은 분석하면 요소적 사실들로 분해되는데, 그것들 각각은 기지의 사실을 반복한 것이다. 당신이 예측불가능한 형태라고 부르는 것은 이전의 요소들을 새로이 배열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요소적 원인들의 전체가 이러한 배열을 결정하였으나, 그것들 자체는 이전의 원인이 새로운 순서로 반복되는 것이다. 그 요소들과 요소적 원인들을 알면 그것들의 총합이자 결과인 생명적 형태들의 윤곽을 미리 그려볼 수 있다. 현상의 생물학적 국면을 물리화학적 요소들로 분해한 후에 우리는 필요하다면 물리학과 화학 그 자체도 뛰어넘을 것이다. 우리는 물질 덩어리에서 분자들로, 분자들에서 원자들로, 원자들에서 미립자들로 갈 것이고, 결국 우리는 일종의 태양계처럼 천문학적으로 취급될 수 있는 어떤 것에 도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39) 만약 그것을 부정한다면 당신은 과학적 기계론의 원리 그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고, 생명적 물질이 다른 것과 동일한 요소들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고 독단적으로 선언하는 것이다 ── 우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할 것이다. 우리는 무기물과 유기물의 근본적인 동일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우리가 알아야 할 유일한 문제는 생명체라 불리는 자연적 체계를 과학이 무기물질에서 절단해 내는 인공적 체계와 동일시해야 하는가, 아니면 차라리 그것을 우주 전체인 이 자연적 체계와 비교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것이다. 생명이 일종의 기계장치라는 데에 나는 동의한다. 그러나 그것은 우주 전체 또는 실재 전체에서 인공적으로 고립될 수 있는 기계장치인가? 실제 전체는 하나의 불가분적 연속성일 수도 있을 것이라고 우리는 말한 바 있다. 그 때 우리가 거기서 절단해 내는 체계들은 엄밀히 말해 그것의 부분들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것들은 전체 위에서 취해진 부분적 외관들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부분적 외관들의 끝과 끝을 이어 맞추어 보아도 전체를 재구성하는 실마리조차 얻을 수 없다는 것은 한 대상의 사진들을 수천의 측면에서 겹쳐 찍어 보아야 본래서 물질성을 얻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생명을 물리화학적 현상들로 분해한다고 주장하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분석해 보면 아마도 유기적 창조의 과정에서 점점 더 많은 물리화학적 현상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물리학자들과 화학자들은 바로 거기서 멈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물리학과 화학이 우리에게 생명의 열쇠를 반드시 준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61∼66쪽)

 

36) 세아이유는 자신의 저서 『예술에서의 천재』에서 예술은 자연의 연장이며 생명은 창조라는 이중의 주장을 전개한다. 우리는 두 번째 정식(定式)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저작 말하듯이 창조는 요소들의 종합이라고 이해햐야 하는 것일까? 요소들이 이미 존재하는 곳에서 그것들로부터 이루어질 종합은 잠재적으로 주어져 있으며 가능한 배열 중 하니일 뿐이다. 초인간적 지성이라면, 이 배열을 그것을 둘러싸는 가능한 모든 것들 사이에서 미리 파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와 반대로 우리는 생명의 영역에서 요소들은 실재적이고 분리된 존재를 갖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것[샐재적이고 분리된 요소들의 존재]은 불가분적 과정에 대한 정신의 다양한 관점들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전진의] 과정 속에 극단적 우연성이 있고, 선행하는 것과 잇따르는 것 사이에 통약불가능성이 존재하며, 결국 지속이 있다.

 

39)(역주) 소립자 구조 안에서 일어나는 운동을 암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당시는 행성들이 태양 주위를 돌 듯 전자들이 원자핵 주위를 돈다는 양자 역학의 원자 모형이 나오기 이전이다.

 

 - 앙리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 <제1장> 생명 진화에 관하여, 기계론과 목적론

 

 

 

 

거대한 틈

 

…… 마지막으로 적충의 운동은 말할 것도 없고 아메바의 운동에 대한 물리화학적 설명은, 이 초보적 유기체를 자세히 관할한 많은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한 것으로 나타난다. 생명의 가장 미미한 형태들에서까지도 그들은 효과적인 심리적 활동성의 흔적을 파악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교훈적인 것은, 조직한적 현상들에 대한 연구가 심화될수록 모든 것을 물리화학적으로 설명하는 경향이 강화되는 대신 얼마나 자주 좌절하게 되는가 하는 것이다. 박물학자 윌슨이 세포의 발달에 바친 경탄할 만한 저서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요컨대 세포의 연구는, 생명의 가장 낮은 형태들조차도 무기계와 분리하는 거대한 틈을 좁히기보다는 넓히는 듯하다.>(71∼72쪽)

 

 - 앙리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 <제1장> 생명 진화에 관하여, 기계론과 목적론

 

 

 

 

충분히 독립적이지 않으며 충분히 고립되어 있지도 않다

 

…… 그러나 사실상 생기론의 입장이 매우 곤란해지는 것은 자연 속에는 순수하게 내적인 목적성도 없고 절대적으로 구분된 개체성도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개체를 구성하는 데 참여하는 유기적 요소들은 그 자체로 일정한 개체성을 가지고 있으며, 만약 개체가 자신의 생명 원리를 갖는다면, 그 요소들 역시 각각 자신의 생명 원리를 요구할 것이가. 그러나 다른 한편, 개체 그 자체는 우리가 그것에 고유한 <생명 원리>를 부여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독립적이지 않으며 [생명체의] 나머지로부터 충분히 고립되어 있지도 않다. 고등 척추동물과 같은 유기체는 모든 유기체들 가운데 가장 개체화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모체의 일부였던 난자와 부체(父體)의 일부였던 정자가 발달한 것에 불과하며, 알(즉 수정란)은 [부모 유기체의] 성분에 공통적이므로 부모 유기체 사이의 진정한 연결부라는 것을 주목한다면, 비록 인간의 경우리 하더라도 모든 개별적 유기체는 부모 유기체의 성분이 조합된 신체 위에서 자라난 단순한 싹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개체의 생명 원리는 어디서 시작하고 어디서 끝나는가? 점점 가까이 다가가 보면 우리는 가장 먼 조상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이고, 개체는 가장 먼 조상들 각자와 유대를 맺고 있으며, 어떠면 생명의 계통수의 근원에 있는 젤리 모양의 이 작은 원형질 덩어리와도 유대를 맺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개체는 어느 정도까지는 자신의 원시 조상과 일체를 이루고 있는 동시에 거기서부터 분산되어 내려오면서 분리된 모든 후손들과도 마찬가지로 유대를 맺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생명체 전체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목적성을 생명체의 개체성으로 좁혀 보아야 헛된 일이다. 생명계 안에 목적성이 있다면 그것은 생명 전체를 유일하고도 불가분적으로 한 아름에 포옹하는 것이다. 모든 생명체들에 공통적인 이 생명은 의심의 여지없이 많은 불일치와 많은 틈을 보여주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은 그렇게 하나인 것도 아니어서 각 생명체를 어느 정도까지는 개체화되도록 내버려 둔다. 그래도 역시 그것은 유일한 전체를 형성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그것은 목적성을 완전히 부정하거나, 아니면 한 유기체의 부분들을 유기체 자체와 조화를 이루도록 할 뿐만 아니라 각 생명체를 다른 것들 전체와 조화를 이루게 한다는 가설을 택하는 것이다.((82∼83쪽)

 

  - 앙리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 <제1장> 생명 진화에 관하여, 기계론과 목적론

 

 

 

 

응축된 것만큼 또는 그 이상으로 전체, 즉 유동체에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여전히 시간을 백지화하는 데서 일치하고 있다. 실재적 지속은 사물들을 갉아먹고 거기에 자신의 잇자국을 남기는 어떤 것이다. 만약 모든 것이 시간 속에 있다면 모든 것은 내적으로 변화하며, 동일한 구체적 실재는 결코 반복되지 않는다. 따라서 반복은 추상 속에서만 가능하다. 반복되는 것은 우리 감관, 특히 우리의 지성이 실재로부터 떼어낸 이러저러한 국면들이다. 우리 지성이 모든 노력을 집중하고 있는 행동은 반복들 속에서만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지성은 반복되는 것 위에 집중하고 같은 것을 같은 것에 접합시키는 데만 몰두해서 시간의 시야vision에 등을 돌린다. 지성은 흐르는 것을 혐오하고 자신이 접촉하는 모든 것을 고체화한다. 우리는 실재적 시간을 사유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체험한다. 생명은 지성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우리의 진화 그리고 순수 지속 속에 있는 모든 사물의 진화로부터 우리가 갖는 감정이 거기에 있어서, 이른바 지적 표상의 주위에, 밤 속으로 사라져 가는 불분명한 가장자리를 그린다. 기계론과 목적론은 중심에서 빛나는 핵만을 고려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그것들은 이 핵이 그 나머지[가장자리]가 응축에 의해 희생됨으로써 형성되었다는 것 그리고 생명의 내적 운동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응축된 것[핵]만큼 또는 그 이상으로 전체, 즉 유동체에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86∼87쪽)

 

  - 앙리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 <제1장> 생명 진화에 관하여, 기계론과 목적론

 

 

 

 

과학과 철학이 만나는 지점

 

사실상 단순한 크기의 변화와 형태 변화는 다른 것이다. 한 기관이 훈련에 의해 강해지거나 커진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반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로부터 연체동물의 눈과 척추동물의 눈과 같은 기관의 점진적 발달에 이르기에는 거리가 멀다. 이러한 결과를 수동적으로 받은 빛의 영향의 연장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우리가 방금 비판한 바 있는 주장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반대로 [여기서] 사람들이 내세우는 것이 진정한 내적 활동성이라면, 그 때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노력이라고 부르는 것과는 아주 다른 것이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노력이 기관의 최소한의 복잡화도 산출하는 것을 본 적은 없지만, 적충의 색소 얼룩에서 척추동물의 눈에 이르기까지는 서로 간에 놀랄 만큼 잘 조화된 막대한 양의 복잡화가 있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화 과정에 대한 이러한 개념을 동물에 대해서는 인정해 보자. 그것을 식물의 세계로 어떻게 확장시킬 것인가? 여기서 변이의 원인은 심리적 질서에 속한다면 그 말의 의미를 매우 확장하지 않고서는 그것을 여전히 노력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사실인즉 노력 자체를 파고들어가 더 심층적인 원인을 찾아야만 한다.

 

우리 생각으로 이러한 태도가 특히 요구되는 경우는 규칙적으로 유전되는 변이들의 원인에 도달하고자 할 때이다. 우리는 여기서 획득형질의 유전 가능성에 관한 세부 논쟁으로 들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하물며 우리의 역량에 속하지 않는 문제에서 명백한 입장을 취하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문제에 대해 완전히 무관심할 수는 없다. 이 문제만큼 오늘날 철학자들이 애매한 일반성에 머물러 있을 수도 없고, 과학자들의 뒤를 따라 세부 실험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결과를 논의해야 할 의무를 느끼는 것도 없다. 스펜서가 획득형질의 유전 문제를 먼저 제기하였다면 그의 진화론은 아마도 매우 다른 형태를 띠게 되었을 것이다. 만약 개체가 들인 습관이 아주 예외적인 경우에만 후손에게 전달된다면(우리에게는 이것이 그럴 듯한 일로 보이는데), 스펜서의 심리학 전체가 수정되어야 하며 그의 철학은 상당 부분 붕괴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문제를 어떻게 제기해야 하며 어떤 방향으로 그것을 해결할 수 있을지 말해보자.(130∼132쪽)

 

  - 앙리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 <제1장> 생명 진화에 관하여, 기계론과 목적론

 

 

 

 

획득형질의 유전

주지하다시피 라마르크는 생명체에게 기관의 용불용(用不用)에 의해 변화하는 능력과 이렇게 획득된 변이를 후손에게 전달하는 능력을 부여한 바 있다. 이와 유사한 종류의 학설에 오늘날에도 일정수의 생물학자들이 합류하고 있다. [그들에 따르면] 신종을 산출하기에 이르는 변이는 배 자체에 내재하는 우연변이가 아닐 수도 있다. 또한 그것은 유용성에 대해 아무런 고려도 하지 않고 일정한 방향으로 결정된 특성들을 전개시키는 고유한 결정론에 의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생존 조건에 적응하려는 생명체의 노력 자체에서 나오는 것일 수도 있다. 게다가 이러한 노력은 외적 환경의 압력에 의해 기계적으로 야기된, 특정한 기관의 기계적 훈련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의식과 의지를 내포할 수도 있는데, 이 학설의 가장 탁월한 대표자의 한 사람인 미국의 자연학자 코프Cope는 노력을 바로 그런 의미로 이해하는 것 같다. 그러므로 신라마르크주의는 비록 거기에 필연적으로 호소하는 것은 아니지만, 진화론의 현재적 형태들 전체에서 유일하게 진화과정의 내적이고 심리학적인 원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형태이다. 그리고 또한 그것은 서로 독립적인 발달선상에서 동일한 복잡한 기관들의 형성을 설명하는 것처럼 보이는 유일한 진화론이기도 하다.(130쪽)

사람들이 말하는 획득형질은 종종 습관이거나 습관의 결과이다. 그리고 길들여진 습관의 기초에 자연적 성향이 없는 경우는 드물다. 따라서 유전된 것이 개체의 soma이 획득한 습관인지 아니면 차라리 길들여진 습관에 앞서 있는 자연적 성향은 아닌지 항상 자문할 수가 있다. 이 성향은 개체가 자신 안에 보유하고 있는 germen에 내재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마치 그것이 개체에, 즉 배에 이미 내재적인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두더지가 앞을 못 보게 된 것은 그것이 땅 밑에서 사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은 전혀 증명되지 않는다. 아마도 두더지가 지하 생활을 할 운명에 처한 것은 그것의 눈이 쇠약해지는 과정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경우 시력을 잃는 경향은 두더지 자체의 신체의 의해 획득된 것도 잃은 것도 없이 배에서 배로 전달될 것이다. 검술 사범의 아들이 아버지보다 훨씬 더 빨리 탁월한 검술사가 되었다고 해서 부모의 습관이 아이에게 전달되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왜냐하면 증가하는 도상에 있는 어떤 자연적 성향들이 아버지를 낳은 배에서 아들을 낳은 배로 넘어가 원초적 약동의 결과로 도중에서 커지고 아버지가 했던 것과는 상관없이 아들에게 아버지의 것보다 더 큰 유연성을 확보해 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동물의 점진적 길들이기에서 나오는 많은 예들에 대해서도 그와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유전되는 것이 길들여진 습관인지 아니면 오히려 어떤 자연적 성향이 아닌지는 알기 어렵다. 이러한 성향이야말로 길들이기 위해 이러저러한 특수한 종이나 그것의 어떤 대표자들을 선택하게끔 한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132∼134쪽)

* (역주) 획득형질의 유전이 완전히 부정된 것은 20세기 중반 무렵이다. 여기서 베르그손은 아직 논쟁 중인 당대의 모든 실험과 가설을 검토함으로써 획득형질의 유전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에 서고 있다.

 

  - 앙리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 <제1장> 생명 진화에 관하여, 기계론과 목적론 


  

 

일탈의 유전과 형질의 유전

그러므로 우리는 일탈(逸脫
)의 유전과 형질의 유전을 구분할 것을 제안한다. 새로운 형질을 획득하는 개체는 이로써 자신이 가지고 있던 형태로부터 그리고 자신이 보유한 배들 또는 종종 반쪽의 배들이 발달하면서 재생하였을 혀애로부터 일탈한다. 이 변형[일탈]으로부터 배를 변형시킬 수 있는 물질이 산출되지 않거나 영양의 공급이 전반적으로 변질되어 배의 요소들중 어떤 것들이 결핍되지 않는다면, 그 변형은 개체의 후손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을 것이다. 아마 그와 같은 일이 가장 자주 일어날 것이다. 반대로 변형이 어떤 결과를 낳는다면 그것은 아마 생식질에서 야기되는 화학적 변화를 매개로 해서일 것이다. 이 화학적 변화는 배가 발달시킬 유기체 안에 예외적으로 본래의 변형을 일으킬 수는 있지만, 그것과 다른 것을 만들어 낼 기회가 그에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더 많다. 이 후자의 경우 자식 유기체는 부모 유기체만큼이나 정상적 유형으로부터 일탈할 수 있겠지만, 그 일탈은 [부모 유기체와는] 상이하게 일어날 것이다. 자식 유기체에게 유전되는 것은 일탈이지 형질이 아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한 개체가 들인 습관들은 자기 자손에게 아무런 반향도 불러일으키지 않는 듯하다. 그리고 반향이 있을 때는 자손들에게 생겨난 변형은 본래의 변형과 아무 유사성도 갖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이 우리에게 가장 그럴 듯하게 보이는 가설이다. 어쨌든 반증이 있기까지는 그리고 뛰어난 한 생물학자가 요구하는 결정적 실험이 확립되지 않는 한 우리는 현재까지의 관찰 결과에서 멈출 수밖에 없다. (138∼139쪽)

 

  - 앙리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 <제1장> 생명 진화에 관하여, 기계론과 목적론  

 

 

 

 

생명의 도약

 

우리는 이리하여 먼 우회를 통해 우리가 출발했던 생각으로 되돌아왔다. 그것은 배와 배 사이에서 연결부를 형성하는 성체를 매개로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경과하는 생명의 근원적 약동élan originel이라는 생각이다. 이 약동은 진화의 여러 노선들로 나뉘어 그 위에서 보존되면서 적어도 규칙적으로 유전되고 서로 참가되어 신종을 창조하는 변이들의 심층적 원인이 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종들이 공통의 뿌리에서 분기하기 시작하면, 그러한 분기는 진화를 향해 전지하면서 가속화된다. 그러나 공통적 약동의 가설을 받아들이면 그것들은 일정한 지점 위에서 동일하게 진화할 수 있고 심지어는 그럴 수밖에 없다. 이를 우리가 선택한 예, 즉 연체동물과 ㅓㄱ추동물의 눈의 형성이라는 예를 바탕으로 더 정확한 방식으로 보여주는 일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 <원초적 약동>이라는 생각은 또한 그렇게 해서 더욱 명확하게 될 것이다.

 

  - 앙리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 <제1장> 생명 진화에 관하여, 기계론과 목적론, <생명의 도약 Elan vital> 

 

(나의 생각)

이 대목은 앙리 베르그송 철학의 핵심을 이루는 '엘랑 비탈'이다. 이 절(節)은 약 14쪽에 걸쳐 설명되고 있다.

욕심 같아서는 전재(全載)하고 싶지만 이미 다른 부분들을 인용한 것만으로 너무 길고 충분하다 싶어 생략한다.

 

 

 

 

과학의 관점과 철학의 관점 

 

제작된 작품은 제작이라는 작업의 형태를 그린다. 내 말은 제작자가 작업에 투입한 것을 자기의 작품에서 재발견한다는 의미이다. 그가 기계를 만들려고 한다면 부품들을 하나하나 잘라 내고 나서 그것들을 조립할 것이다. 만들어진 기계는 부품들과 그것들의 조립을 다 보여준다. 결과의 전체는 여기서 작업의 전체이며 작업의 각 부분에 결과의 한 부분이 상응한다.

 

이제 나는 실증과학은 유기화 작업을 마치 [제작의] 작업과 같은 종류인 것처럼 진행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러한 조건에서만 그것은 유기체들에 효력을 가질 것이다. 실제로 과학의 목적은 우리에게 사물의 근본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에 작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런데 물리학과 화학은 이미 진보된 과학들이며, 생명체는 우리가 그것을 물리학과 화학의 과정으로 취급할 때에만 우리의 작용에 부응한다. 따라서 유기화 작업은 유기체가 우선 기계와 동일시되었을 때만 과학적으로 연구될 수 있다. 세포들은 기계의 부품들이며 유기체는 그것들의 집합이다. 그리고 부분들을 유기화한 요소적 작업들은 전체를 유기화한 작업의 실제적 요소들로 관주될 것이다. 과학의 관점은 바로 그러하다. [그러나] 우리의 견해로는 철학의 관점은 아주 다르다.

 

우리 생각에 유기화된 기계 전체는 유기화하는 작업의 전체를 엄밀하게 재현한다(비록 그것은 근사적으로만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러나 [여기서] 기계의 부분들은 그 작업의 부분들에 상응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기계의 물질성은 더 이상 사용된 수단들의 전체가 아니라 극복된 장애물의 전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적극적인 실재라기보다는 부정이다. 그러무로 우리가 이전의 연구에서 제시한 바 있듯이 시각은 권리적으로는en droit 우리의 시선이 접근할 수 없는 무한한 것들에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잠재력이다. 그러나 그러한 시각은 행동으로 연장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생명체가 아니라 유령에 적합할 것이다. 생명체의 시각은 작용할 수 있는 대상들에 한정된, 유효한 시각이다. 그것은 <운하로 집중된> 시각이고, 시각기관은 단지 운하 파기 작업을 상징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시각기관의 창조는 그 해부학적 요소들의 집합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흙의 퇴적이 운하의 둑을 만들지도 모르지만 운하를 파는 것은 그것으로 설명이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기계론적 주장은 흙이 한 수레씩 운반되었다고 말하는 것으로 구성될 것이다. 목적론은 흙이 아무렇게나 쌓이지는 않았으며 수레꾼이 하나의 계획을 따랐다고 덧붙일 것이다. 그러나 기계론과 목적론은 둘 다 잘못 알고 있다. 운하는 이와 다르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해서 우리는 자연이 눈을 만드는 절차를 우리가 손을 드는 단순한 행위에 비교했다. 그러나 우리는 손이 아무 저항도 받지 않을 것이라고 가정했다. 내 손이 공기 속에서 움직이는 대신에 내가 앞으로 나아감에 따라서 압축되고 저항하는 쇳가루더미를 관통하고 있다고 상상해 보자. 어떤 순간에 내 손은 그 노력을 고갈하게 될 것이고 바로 이 순간에 쇳가루의 낟알들은 일정한 형태로 병렬되고 조정될 것이다. 이 형태는 멈추어 버린 손과 팔의 일부 형태 자체일 것이다. 이제 손과 팔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남아 있다고 가정해 보자. 구경꾼들은 그것들의 배열의 근거를 쇳가루들 자체에서 그리고 그 더미 안에 있는 힘들에서 찾으려고 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각 쇳가루의 위치를 그 옆의 것들이 그것에 행사하는 작용에 관련시킬 것이다. 그들은 기계론자들이다. 다른 사람들은 전체의 계획이 이 개체의 작용들의 세부까지 지배하기를 바랄 것이다. 그들은 목적론자들이다. 그러나 진실은 단지 쇳가루더미를 관통하는 손의 불가분적 행위만이 있었다는 것이다. 쇳가루들의 운동의 끝없는 세부 및 그것들이 최종적으로 배열된 질서는 이 불가분적 운동을 말하자면 부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며, 저항의 가시적 형태이지 적극적인 개개의 작용들의 종합이 아니다. 그 때문에 쇳가루들의 배열에 <결과>라는 이름을 주고 손의 운동에 <원인>이라는 이름을 준다면, 엄밀히 말해 결과의 전체가 원인의 전체에 의해 설명되는 것이지 결과의 부분들이 원인의 부분들에 대응하는 것은 전혀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기계론도 목적론도 여기서 자신들의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어떤 고유한 설명 방식에 호소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제안하는 가설에서 시각과 시각기관의 관계는 거의 손과 쇳가루더미의 관계와 같은데, 쇳가루 더미는 손의 운동을 그려내고 운하를 트고 한정하는 것이다.

 

손의 노력이 현저할수록 그것은 쇳가루더미의 내부로 더욱 멀리 간다. 그러나 그것이 멈추는 곳이 어디든 간에 순간적으로 그리고 자동적으로 쇳가루들은 평형을 이루고 서로 간에 조화를 이룰 것이다. 시각과 그 기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시각을 구성하는 불가분의 행위가 다소간 멀리 전진함에 따라 기관의 물질성도 상호 조정된 다소간의 상당한 요소들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질서는 반드시 완전무결하다. 그것은 부분적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것을 낳은 실재적 과정은 부분들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그 점을 기계론도 목적론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우리도 눈과 같은 기관의 경이로운 구조에 놀라워할 때 거기에 주의하지 않는다. 우리의 놀라움의 근저에는 언제나 이 질서의 한 부분만이 실현될 수 있었을지 모르고 그것의 완벽한 실현은 일종의 은총이라는 생각이 있다. 목적론자들은 이러한 은총을 목적인에 의해 단번에 스스로에게 면제해 준다. 기계론자들은 그것을 자연선택에 의해 조금씩 얻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양쪽 다 이러한 질서에서 무언가 적극적인 것을 보고 따라서 그 원인에서는 완성 가능한 모든 정도를 포함하는 분할 가능한 어떤 것을 본다. 사실상 그 원인은 다소간 강도를 갖지만 단번에 그리고 완성된 방식으로만 결과를 산출할 수 있다. 그 원인이 시각의 방향으로 다소간 멀리 나아갈수록 그것은 하등 유기체의 단순한 색소 덩어리나 세르폴라(환형동물의 일종 ㅡ 옮긴이)의 이미 분화된 눈이나 조류의 놀랄 만큼 완성된 눈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매우 불균등한 복잡성을 가진 이 모든 기관은 반드시 동등한 조화를 나타낸다. 그 때문에 두 동물종이 서로 간에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해도 상관없다. 그 각각에서 시각을 향한 진행이 똑같이 멀리 가면 양측에는 동일한 시각기관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기관의 형태는 기능의 행사가 획득된 정도를 표현할 뿐이기 때문이다.(151∼155쪽)

 

  - 앙리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 <제1장> 생명 진화에 관하여, 기계론과 목적론, <생명의 도약 Elan vital> 

 

 

 

 

덧붙임)

 

『창조적 진화』를 읽으면서 제가 몹시 흥미를 느낀 부분은 특히 '획득 형질의 유전'을 다룬 부분이었답니다. 소위 '라마르크의 용불용설'과 관련된 이야기인데, 이 책이 출간된 1907년 까지만 하더라도 '라마르크 학설'이 타당한지 잘못되었는지에 대해서 논란이 분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점은 베르그송보다 훨씬 이전의 철학자였던 쇼펜하우어가 이미 그 학설의 잘못된 점을 아주 예리하고도 명쾌하게 밝혀 놓았다는 점입니다. http://blog.aladin.co.kr/oren/6067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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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7-08-01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oren님께서 소개해주신 글 속의 베르그송은 세계를 움직이는 힘을 다루는 ‘물리‘와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인 ‘화학‘을 시간과 공간의 장 속에서 철학을 통해 ‘사고실험‘을 한 철학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시대를 앞서간 베르그송과 같은 이들이 있었기에, 철학은 과학에게 길을 제시하는 과업을 부여받았다는 oren님 말씀이 더 와닿습니다. oren 님 글을 읽다보니 베르그송의 사상이 쉽지 않겠지만, 하루빨리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되네요. oren님 훌륭한 철학자의 사상을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oren 2017-08-02 00:20   좋아요 1 | URL
베르그송은 ‘철학‘을 전공한 철학자였지만,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포함한 어학과 문학에도 소질이 많았고, 수학, 물리학, 생물학 등 여러 분야의 과학에서도 아주 뛰어난 인물이었죠. 철학 중에서는 고대 그리스 철학, 그 가운데서도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에 정통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철학 중에서도 특히 ‘공간‘과 ‘시간‘에 대해서 자신만의 탁월한 경지를 개척할 수 있었던 듯합니다.

겨울호랑이 2017-08-02 07:12   좋아요 0 | URL
서양철학자 중 많은 이들이 그리스 철학에 정통함을 알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화이트헤드가 ‘서양 철학은 플라톤에 대한 일련의 각주‘라고 말한 것이 무리가 아님을 생각하게 되네요^^:

oren 2017-08-02 12:04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그렇게나 많은 철학자들이 아무리 기를 쓰고 ‘철학‘을 연구해도 결국 플라톤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점이 플라톤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셈이죠. 그리스는 위대한 철학자만 배출한 게 아니라 문학이나 역사, 건축과 조각 등 조형예술 분야에서까지도 두루 빛나는 금자탑들을 쌓아 놓았으니 생각할수록 놀라울 따름입니다. 그 까마득한 옛날에 말이지요.
 
그림과 함께 읽는 돈키호테
한가로운 독자분들께~
책의 날, 10개의 질문과 대답

 

 

넘어지는 것은 물론 똑같다. 하지만 한눈을 팔다가 우물에 빠지는 것과, 별만 바라보다가 우물에 빠지는 것은 다르다. 돈키호테가 열심히 보았던 것은 바로 별이다. 이 공상과 망상의 정신이 추구한 웃음의 깊이는 얼마나 심오한가.
- 앙리 베르그송, 『웃음』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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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즉시 마법 같은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 수 있고, 그 이야기가 현실에서는 도저히 있을 법하지 않다. 그렇지만 어느새 등장 인물의 말과 행동 속으로 빠져 들면서 모든 게 현실보다 더 생생하게 느껴지고, 그와 동시에 엄청난 재미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웃음을 끊임없이 터트리면서 읽을 수밖에 없는 소설이 있다. 게다가 주인공들의 이야기 속에 온갖 인생의 희로애락과 거대한 도전과 실패, 교훈과 더불어 슬픔까지도 간직한 소설이 있다. 하나의 이야기 속에 수많은 다른 이야기가 숨어 있고, 작가가 어느새 소설 속으로 슬며시 들어왔다가 다시 빠져나가는가 싶으면, 독자가 다시 작가를 찾아 나서야 할 때도 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놀라운 이야기의 마법'이 숨어 있으면서도, 소설에서 기대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요소들을 거의 다 담고 있는 소설이 있다. 아주 오래 전에 나왔으면서도 여전히 세계 최고의 소설로 널리 인정받고 있기도 하다. 그런 소설이 바로 『돈키호테』다.

 

이 소설의 유일한 단점이라면 전체를 다 읽기에는 시간이 제법 많이 걸린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게 과연 단점일까? 소설을 왜 읽을까? 멋진 주인공들과 함께 '멋진 여행'을 떠나보기 위해서? 현실에서는 도저히 있을 법하지 않은 이야기 속으로 흠뻑 빠져들고 싶어서? 어쨌든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나 꿈처럼 펼쳐지는 거대한 모험 속으로 빠져들기 위해서? 인생의 심오한 의미를 맛보기 위해서? 그것도 아니라면 실컷 한번 웃어나 보려고? 이런 독자들의 온갖 까다로운 희망사항을 두루 다 만족시켜 주는 데도 그 소설이 누구나 다 가볍게 읽을 수 있을 만큼 '얇은 책'이 될 수 있을까? 오히려 정반대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독자들의 온갖 까다로운 취향에도 불구하고, 소설이 제공하는 온갖 재미와 보람을 두루 만족시켜 주는 책이 있다면 그런 책은 도리어 분량이 두툼하고 이야기가 길수록 독자들에게 이득이지 않을까? 이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고 가장 훌륭한 소설이 아직도 독자들을 만나기 위해 끊임없이 기다려 주고 있다는 사실은 어찌보면 묘한 아이러니다. 소설을 읽는 데도 '마감 시한'이라는 게 있다면 이 소설만큼 '마감' 전에 서로 읽으려고 앞을 다투어 쇄도할 독자가 많은 경우도 없을 테니까. 그런데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바깥은 여름'이니 무슨 단장 죽이기에 훨씬 더 몰두한다. 이 또한 아이러니다.

 

최근에 스페인을 다녀왔다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그 사람들에게 『돈키호테』는 읽어 봤냐는 질문을 던져보면 대답이 한결같다는 이유 때문에 도리어 놀란다. 그 유명하지만 몹시도 두꺼운 소설을 어떻게 감히 읽었겠느냐고 도리어 질문하는 사람을 우스개로 만든다. 그게 그저 남의 얘기인 줄로만 알았더니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내년 1월에 보름이 넘는 일정으로 스페인을 다녀 오겠다는 두 모녀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그렇게 긴 일정을 단 둘이서 자유 일정으로 다녀올 꺼라면 '스페인'을 좀 더 잘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럴려면 최소한 소설『돈키호테』라도 꼭 읽어 보고 떠나라, 그 속엔 스페인의 온갖 지리(톨레도, 안달루시아,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등등)와 역사(오랫동안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다가 갑자기 벗어났던 역사에 얽힌 온갖 흥미로운 이야기)는 물론이고, 무엇보다도 스페인의 퇴락한 이달고(향사士) 신분의 돈키호테와 그의 종자(從子)로 함께 따라 나선 산초의 모험 이야기가 너무나 재미있다, 소설 읽는 재미와 보람을 보장한다, 그렇게나 설득해도 소용이 없다. 더군다나 대학 3학년에 다니는 딸아이는 전공이 '국문학'이다. 학교 수업에 필요한 소설은 열심히 읽고 과제도 제출하더니, 정작 학교 수업보다 훨씬 더 생생할 '여행 수업'에 필요한 책은 읽지 않는다. 이 또한 묘한 아이러니다. 그런데 나는? 정작 『돈키호테』를 몹시 좋아하고, 이 책을 읽은 이후로 줄곧 스페인을 가고 싶은 열망을 버리지 못한 나는 이번 여행에서 싹둑 짤렸다. 이보다 더한 아이러니도 없다.

 

다른 책에서 가끔씩 마주쳤던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유명한 책인『돈키호테 성찰』이라는 작품이 마침 오늘 <을유세계문학전집> 아흔 번째 책으로 출간된 걸 발견했다. 신간에 별로 관심이 없지만 이런 '신간'은 너무 반갑다. 스페인은 강렬한 태양으로도 유명한 나라다. 10년 전쯤이었을까. 여름 휴가때 스페인을 다녀온 어느 20대 여직원 한테서 들은 얘기가 생각난다. 여름엔 절대 스페인을 가면 안 된다는 거였다. 얼마나 더위와 뜨거운 태양에 시달렸으면 그런 넉두리부터 나올까 싶었다. 그런 날씨에도 불구하고 돈키호테는 기사 복장과 투구까지 뒤집어 쓰고 모험을 떠났다. 세상을 바로 잡기 위해서. 우리도 그런 모험에 동참할 수 있다. 비록 바깥은 한여름이고, 돼지 같이 생긴 녀석은 지난 밤에도 또다시 미사일을 발사했다지만, 어디 한 모퉁이, 시원한 바람이 조금은 불어 오는,『돈키호테』정도는 넉넉히 펼쳐 읽을 수 있는 그런 공간쯤은 쉽게 찾을 수 있는 땅에서 살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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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돈키호테』에 대해 여러 번 언급한 인물 가운데 헤럴드 블룸을 빼놓긴 어렵다. 그가 쓴 『교양인의 책읽기』를 읽은 후에 베껴 놓은 대목을 다시 덧붙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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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구엘 드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1547∼1616)

모든 소설의 선두요 최고를 차지하는 이 책은 소설 그 이상

 

소설을 읽는 방법과 읽어야 하는 이유를 말할 때 세르반테스의 『돈 키호테』는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 모든 소설의 선두요 최고를 차지하는 이 책은 소설 그 이상이다. 바스크 혈통 작가이자 세르반테스 비평가 미구엘 드 우나무노에게 『돈 키호테』는 스페인어로 쓰여진 바이블이자, 하나님 그 자체다.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

 

나는 지난 4세기 동안 상상력으로 흘러넘친 문학계에서 세르반테스야말로 셰익스피어의 유일한 경쟁자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돈 키호테는 햄릿의 대적자요 산초 판자는 폴스타프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 나는 그 이상의 찬사가 떠오르지 않는다. 두 사람이 같은 시대에 태어나서 같은 날 세상을 떠났는지는 모르지만, 셰익스피어는 분명히 『돈 키호테』를 읽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르반테스가 셰익스피어에 대한 얘기를 접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세르반테스도 남의 말을 듣는데 역시 뒤지지 않는다.

 

돈 키호테와 산초는 걸핏하면 다투지만 늘 화해한다. 사랑과 충성심, 돈 키호테의 무지, 경탄할 만한 산초의 지혜들 속에서 둘은 관계를 유지한다. 셰익스피어의 모든 인물들은 서로의 말을 잘 귀담아 듣지 않는다. 리어 왕도 상대방의 말에 관심을 기울인 법이 거의 없다.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는 때로는 아주 즐거운 듯 보이지만 아예 서로의 말을 들을 수조차 없다. 그렇지만 셰익스피어 본인의 경우는 벤 존슨과 함께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청자로서의 재능을 타고난 인물이다. 세르반테스도 남의 말을 듣는데 역시 뒤지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건 산초와 돈 키호테 간에 쉴새없이 이어지는 대화

 

돈 키호테』에서는 끊이지 않고 사건이 일어나는데, 가장 중요한 건 산초와 돈 키호테 간에 쉴새없이 이어지는 대화라고 볼 수 있다. 그냥 손길이 닿는대로 아무 페이지나 펼쳐 봐도 두 사람이 대화의 늪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다. 그 밑바탕에는 서로 으르렁거리며 변덕을 부리기는 해도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이 깔려 있다.

 

 

남의 얘기를 들음으로써 그들은 변화한다


금방이라도 파탄 날 정도로 싸워 대다가 곧 예의바른 모습으로 돌아온다. 상대가 하는 말에서 뭔가 배우려는 자세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남의 얘기를 들음으로써 그들은 변화한다. 세르반테스와 셰익스피어를 비교해 볼 때 우리는 변화, 다시 말해 자아를 심화시키고 내재화하는 작업이 서로간에 전혀 다를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세르반테스에 대한 괴테의 경외심과 프로이트의 찬사


허클베리 핀은 짐에게서 자신의 산초를 발견했기 때문에 고독으로 시들어가는 일을 피할 수 있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서 라스콜리니코프는 허무주의적인 스비드로가일로프의 이아고적 속성 안에서 반反 산초 판자와 마주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에 나오는 미시킨 왕자와 돈 키호테의 고상한 "광증"은 비슷하다. 세르반테스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토마스 만은 세르반테스에 대한 괴테의 경외심과 프로이트의 찬사를 자주 인용하고 있다.


"내게 생명을 달라!"


우나무노는 『돈 키호테』가 삶의 비극적 의미를 구현한다고 생각한다. 그의 "광증"은 죽지 않으면 안 되는 것에 대한 저항이다. 그것은 각각 다른 시대에 죽음을 예찬한 스페인적 기질에 대한 항거였다. 그는 터키와의 레판토 해전에서 왼손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는데, 비록 이런 상처뿐인 전사라도 세르반테스 내부에서는 언제나 폴스타프와 함께 이렇게 외친다. "내게 생명을 달라!" 나는 우나무노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 작품의 즐거움은 전적으로 산초 판자의 위대성에 있으며, 산초는 폴스타프나 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에 등장하는 파누지와 함께 우리 속의 죽지 않는 무엇에 대한 또 다른 예라고 볼 수 있다.

 

 

돈 키호테와 산초는 이 소설의 2부에서 거꾸로 독자들의 지식에 파고 든다.

 

독자들은 돈 키호테와 산초 판자로 인해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더 잘 알 수 있게 된다. 셰익스피어처럼 세르반테스도 독자들을 즐겁게 해 주며, 활동적인 독자들을 창조하게 될 것이다. 우리에 갇힌 사자와 마주친 돈 키호테는 사자들이 공격할지 어떨지 알고 있다.

 

그리고 돈 키호테, 산초와 함께 여행을 해 온 활기 넘치는 독자들은 등장 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그들의 지식을 공유한다. 돈 키호테와 산초는 이 소설의 2부에서 거꾸로 독자들의 지식에 파고 든다. 이는 그들이 비평가가 되어서 자신의 모험을 감상하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

 

이 소설의 제2부에서 세르반테스의 이토록 비상한 이야기 솜씨가 숨어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셰익스피어는 여러 가지 계획으로 독자들로 하여금 그 생각에 접근하지 못하게 한다.


셰익스피어는 20여 편이 넘는 위대한 희곡 작품들에서 자기 자신을 숨기는 놀라운 기법을 사용했다. 독자와 관객은 셰익스피어가 생각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싶어한다. 셰익스피어는 여러 가지 계획으로 독자들로 하여금 그 생각에 접근하지 못하게 한다.

 

세르반테스는 『돈 키호테』2부에서 이와 정반대되는 기법을 창안해 냈다. 그리고 작품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들을 창안했다. 그는 자신이 창조한 환상으로 들어가는 틈새를 잘라 버렸는데, 이는 돈 키호테와 산초가 1부에서 수행했던 역할을 2부를 통해 다시 언급했기 때문이다. 세르반테스와 돈 키호테는 바로크적이고 지적이여서 마술사들에게 불만을 지니고 있다. 세르반테스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표절자요 사기꾼들로 자신을 대신해 소설을 끝내려는 존재들이다.

 

 

세르반테스는 새로운 종류의 이야기꾼

 

토마스 만은 돈 키호테에 관해 말하면서 "자기 칭송에 대한 영광으로 사는" 독특한 주인공이라고 말했다. 산초는 너무나 영민한 나머지 거기까지 나갈 수는 없었다. 독자들을 당황스럽게 하는 것은 세르반테스라는 작가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다. 세르반테스는 새로운 종류의 이야기꾼으로서 권위를 가졌다. 그 권위의 궁극적인 상속자인 마르셀 프루스트는 세르반테스의 소설을 더욱 진전시켰다.

또 다른 계승자로 『율리시즈』의 제임스 조이스를 들 수 있으며, 그와 프루스트의 사도며 『몰리』,『말론 죽다』, <무명> 3부작의 작가 사무엘 베케트가 있다.


세르반테스의 작품은 모든 소설 중 으뜸이며 최상

 

돈 키호테』를 읽는 일은 즐겁다. 나는 독자들이 그것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해 몇 가지 측면을 언급했다. 세르반테스는 우리 중 대다수의 사람에게 돈 키호테적인 모습과 산초척인 측면이 섞여 있다고 생각했다. 왜 『돈 키호테』를 읽는가? 모든 극작가들 가운데 셰익스피어가 최고라면, 세르반테스의 작품은 모든 소설 중 으뜸이며 최상이다. 따라서 돈 키호테와 산초 판자를 알기 전에는 우리 자신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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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7-07-29 15: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돈키호테」를 읽을 때 저만 그런지 몰라도 진도가 쉽게 나가지 않더군요 ^^: 다른 분들은 재밌다고 하던데 각 장면 중간중간 시를 읽다보면 흐름을 놓치기도 하고... 참 어렵습니다^^:

oren 2017-07-29 16:16   좋아요 1 | URL
어려운 책들을 굉장히 많이 읽으시는 겨울호랑이 님께서 《돈키호테》를 어렵게 읽으셨다니 너무나 뜻밖이네요.. 사실 텍스트에서 주석이 필요한 부분은 ‘언어유희‘ 부분과 스페인의 역사에 대한 ‘배경 설명‘이 필요한 부분들 말고는 별로 없었던 듯해요. 다만 ‘심오한 철학적 깊이‘를 내포한 문장들도 적지는 않았던 기억도 납니다. 의외로 고대 그리스 로마 고전들에서 길어 올린 듯한 문장들이 꽤나 많았던 기억도 나고요... 아무리 그렇더라도 일단은 엄청나게 재미있는 소설임엔 틀림없지요.. 제가 한때 이 소설을 필사하고픈 욕망에 시달렸던 이유도 주로 ‘산초 어록‘ 때문이었죠. 아직도 그걸 따로 베껴놓지 못한 게 가끔씩 후회될 정도니까요...

겨울호랑이 2017-07-29 16:20   좋아요 1 | URL
^^: 그렇군요. 제가 너무 무겁게 접근해서인지도 모르겠네요..oren님 말씀처럼 우선 가벼운 마음으로 읽고 여러 번 읽다 보면 의미가 절로 밝아질 수 있을 것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라로 2017-07-29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유명하지만 몹시도 두꺼운 소설을 어떻게 감히 읽었겠느냐 - 여기 한사람 더 추가해주세요~~.ㅠㅠ
저도 요약본으로 읽은 게 다,,,입니다.
하지만 저는 <돈키호테>와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을 꼭 스페인어로 읽는게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입니다. 가능할까요???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백년 동안의 고독, 백년의 고독,,아무튼 그건 번역본으로 읽었는데 정말 재밌더군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던 게 기억나네요.
그런데 왜 스페인 못가게 되셨어요???? 모녀만의 다정한 여행을 방해하지 말라는 압박???? 표현을 재밌게 하셔서 궁금한 마음에 질문~~ㅋ

oren 2017-07-29 20:46   좋아요 0 | URL
《돈키호테》와 《백년의 고독》을 무려 스페인어로 읽으시겠다니 정말 대단한 도전이 될 듯싶어요. 특히 《돈키호테》는 옛날에나 쓰이던 스페인 고어는 물론이고 온갖 언어유희가 난무해서 번역자들도 무지 고생한다던데 말이지요. 《백년의 고독》은 읽은지 하도 오래 돼서 언젠가는 다시 읽어야 될 소설이 되고 말았어요. 그걸 1983년에 읽었으니 어느새 백년의 1/3이 훌쩍 지났더군요... 이번에 제가 스페인에 못 가게 된 건 일종의 벌당이랍니다.. 가족을 떼놓고 저 혼자 돌아다닌 지난 숱한 여행들에 대한... ㅠㅠ

라로 2017-07-31 12:42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그럼 번역본을 먼저 읽어봐야 겠어요. 오렌님 덕분에 무모한 도전을 하지 않아도 되었네요~~~^^;;
백년의 고독은 한국어로 읽었는데 저는 재밌지만 어려웠어요. 그것도 번역본을 다시 읽어야 될 것 같아요. 백년동안의 고독으로 번역된 것을 읽었는데 사실 원제목 대로라면 백년의 고독이 제목부터 원작에 충실한 것 같아요. 그것으로 다시 읽어봐야겠네요. 어쨌든 스페인어로 도전하는 것에 의의가 있는 것이니~~~.
벌당,,,ㅎㅎㅎ이라고 하시니 웃음이~~~ㅎㅎㅎ
어떻게 잘 하셔서 같이 가시면 좋겠네요 ~~~^^

oren 2017-07-31 14:24   좋아요 0 | URL
저는 스페인에 갈 기회가 되면 그곳(톨레도? 마드리드?) 서점에 들러서 ‘스페인어판‘ 『돈키호테』를 꼭 구경하고 싶어요. 저는 스페인어를 전혀 모르니 사 올 생각은 차마 못하겠고요. 『돈키호테』를 구경하고 나면 아마도 그 다음으론 스페인어판『백년의 고독』도 찾아보지 않을까 싶어요. 보르헤스의 작품은 아직 읽어본 게 없으니 ‘그냥 재미삼아 구경이라도 해 볼까‘ 싶기도 하고요. 그나저나 문제는 스페인을 언제 가 볼 수 있을지 그걸 도통 모른다는 점이에요. 내년 1월에 가는 건 이미 너무 늦었어요. 산초 식으로 말하자면 「삐악삐악 우는 게 늦었소.」라고나 할까요.

산초가 말힌 이 유명한(?) 말에 대한 자세한 뜻은 ☞ http://blog.aladin.co.kr/oren/7688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