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베르토 에코가 『돈키호테』에서 골라 뽑아 자신의 책을 꾸몄던 바로 그 내용을 여기에 그대로 옮겨 본다. 이 대목은 소설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오는데, '세르반테스의 탁월한 이야기 솜씨와 해학'에 금세 매료될 만큼 내게는 몹시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세르반테스의 문장들' 속에 틈틈이 '나의 생각'까지 포함시켜 보았다. 이렇게라도 '나만의 주석'을 주렁주렁 달아 놓아야 나중에 또 읽어볼 수 있을 테니.
돈키호테는 아직도 잠들어 있었다. 신부는 돈키호테의 조카딸에게 그 모든 폐해의 원인이 된 책들이 있는 서재 열쇠를 달라고 했다. 조카딸은 두말없이 그것을 내주었다. 모두들 서재로 들어갔고 가정부도 따라 들어갔다. 서재에는 장정이 아주 잘된 커다란 책이 1백 권도 넘었고 몇 권의 소책자들도 있었다. 가정부는 책들을 보자마자 황급히 나가더니 곧 성수가 담긴 나무 그릇과 성수 솔을 들고 들어와 말했다.
「신부님, 이거 받으세요. 이걸 방에 뿌려서 이 책들 속에 있는 그 많은 마술사들을 한 놈도 남기지 말고 내몰아 주세요. 우리가 그들을 세상에서 내쫓고자 했다가 벌을 받아 오히려 마법에 걸리게 되면 큰일 난다니까요.」
이 소설이 나올 때만 하더라도 유럽에서는 '마녀 사냥'이 유행할 정도로 까마득한 옛날이었다. 그러니 당대에 이 소설을 읽었던 독자들은 우리보다 훨씬 더 실감나게 이런 대화에 공감했으리라.
가정부의 순진한 말에 신부는 웃으면서 이발사에게 책들을 한 권씩 집어 달라고 말했다. 그것들 가운데 불에 던지지 않아도 될 책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어떤 내용인가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그러실 필요 없어요.」조카딸이 말했다.「이 책들은 모두 해를 입히는 것들이니까 하나도 남겨 둘 필요가 없어요. 창밖 마당에 던져 쌓아 놓고 불을 지르면 좋겠어요. 아니면 뒤뜰로 가지고 가서 모닥불을 피우든지요. 거기서라면 연기가 나도 괜찮으니까요.」
가정부도 그렇게 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두 여자들은 이 죄 없는 책들을 너무나 죽이고 싶었지만, 신부는 책의 제목조차 훓어보지 않고서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두 여자들이 '죄 없는 책들'을 너무나 죽이고 싶었다고 하는 데서 '책에 대한 돈키호테의 광적인 사랑'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그녀들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이를 보고 웃음을 터트리는 독자들 또한 자신들이 '책을 사랑한 댓가로 주위 사람들한테 받았던 핍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되고, 그때문에 작가는 독자들로부터 뜨거운 공감을 획득한다.
니콜라스 선생이 제일 먼저 그의 손에 건네준 책은 『네 권의 아마디스 데 가울라』였다.
「이 책은 불가사의지.」신부가 말했다. 「내가 듣기로 이 책이 에스파냐에서 출판된 첫 기사소설이라던데, 다른 책들 모두 이 책을 기반으로 하고 있네. 아주 사악한 분파를 만들어 낸 거짓 교리서인 셈이니 당연히 화형에 처해야겠지.」
「안 됩니다, 신부님.」이발사가 말했다. 「제가 듣기로는 이 책이야말로 지금까지 쓰인 기사 소설 중에서 가장 훌륭하다고 하더군요. 그러니 이런 책 중에서 유일하게 용서해 줘야 할 겁니다.」
『아마디스 데 가울라』는 스페인 기사소설의 대표작이다.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권>에도 포함될 정도로 널리 알려진 작품이니, 스페인에서의 인기는 더 말할 필요가 없겠다. 소설 『돈키호테』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소설책'이기도 하다. 돈 키호테가 바로 그 책을 전범으로 삼아 '행동'하기 때문이다.
「하긴 그것도 그렇군.」신부가 말했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은 살려 두지. 어디 그 옆에 있는 것 좀 보게.」
「이것은 ……」이발사가 말했다. 「아마디스 데 가울라의 합법적인 아들 『에스플란디안 무용담』이네요.」
「그런데 말이지 ……」신부가 받아서 말했다. 「자기 아버지와 같은 대우를 해줄 순 없지 않나. 아주머니, 이 책을 받아서 창문으로 마당에 던지시죠. 모닥불을 많이 피워야 할 테니, 이건 그 불쏘시개요.」
가정부는 아주 만족스러워하며 하라는 대로 했다. 그 알량한 에스플란디안은 마당으로 날아가서 꾹 참고 화형식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원조가 아닌 '짝퉁'은 인정할 수 없다는 세르반테스의 작가적 마인드가 엿보인다. 또한 책 속의 주인공인 '에스플란디안'을 의인화해서 '마당으로 날아가서 꾹 참고 화형식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는 식으로 묘사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참을 수 없는 웃음'을 유발시키고 있다.
「다음.」신부가 말했다.
「다음은요 …….」이발사가 받았다. 「『아마디스 데 그레시아』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쪽에 있는 것은 모두 아마디스 가문의 무용담들 같은데요.」
「그렇다면 전부 마당으로 던지게!」신부가 말했다. 「핀티키니에스트라 여왕과 목동 다리넬 그리고 그가 부른 목가들, 아무튼 그 작자의 알아들을 수 없는 추악한 이야기들은 다 태워 버리게. 나를 낳아주신 아버지라도 편력 기사의 모습으로 나타나신다면 그것들과 함께 불살라 버릴 테니 말일세.」
「저도 동감입니다.」이발사가 말했다.
「저도요.」조카딸도 거들었다.
「그렇다면 …….」가정부가 말했다. 「자, 이리들 주세요. 마당으로 가져가게요.」
그것들은 상당한 양이어서 그녀는 계단으로 내려가는 대신 창밖으로 던져 버렸다.
이 대목에서 가정부가 '계단으로 내려가는 대신 창밖으로 던져 버리는' 과감한 행동' 또한 '웃음'을 유발한다. '지나친 행동'은 철학자 베르그송이『웃음』에서 지적한 바 대로 '웃음'의 핵심 작동 원리 가운데 하나다. 또한 소설『돈키호테』에 담긴 수많은 '웃음 유발 장치'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그 두꺼운 책은 누구의 이야기지?」신부가 물었다.
「『돈 올리반테 데 라우라』입니다.」이발사가 대답했다.
「이 책의 작가는 …….」신부가 말했다. 「『꽃들의 정원』을 쓴 사람과 같은 인물이지. 아마 이 두 권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사실적인지, 다시 말해 어느 것이 덜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알기란 어려워. 확실한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무례하게 떠벌리는 이 책들은 마당으로 가야 한다는 것뿐이지.」
「다음 책은 『플로리스마르테 데 이르카니아』입니다.」이발사가 말했다.
「플로리스마르테 님이 거기 계신가?」신부가 대꾸했다. 「그렇다면 당장 마당으로 가야겠군. 범상치 않은 탄생 일화와 꿈 같은 모험담은 많지만 문체가 멋이 없고 딱딱하단 말씀이야. 아주머니, 다른 것과 함께 마당으로 던져요.」
「그렇게 하고 말고요, 신부님.」가정부는 신바람이 나서 시키는 대로 했다.
「이것은 『기사 플라티르』입니다.」이발사가 말했다.
「오래된 책이지.」신부가 말했다.「그러나 사면할 이유가 없어. 다른 말 말고 다른 것들과 동행시키세.」
그래서 그렇게 처리됐다. 다른 책이 펼쳐졌는데, <십자가의 기사>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제목이 성스러워서 좀 무식해도 용서될 수 있었겠지만 여기 <십자가 뒤에 악마가 있다>는 말이 있거든. 이것도 불 속으로 ……」
이발사가 다른 책을 꺼내 들고 말했다.
「이건 『기사도의 거울』이네요.」
『돈 올리반테 데 라우라』(1564년 작품), 『꽃들의 정원』(1570년 작품), 『기사 플라티르』(1533년 작품), 『기사도의 거울』등은 모두 실재하는 작품들이다.
「내가 잘 아는 책이군.」신부가 대꾸했다. 「그 책에는 레이날도스 데 몬탈반이 지난날의 대도둑 카쿠스가 무색할 정도의 대도둑인 자신의 친구들과 동료들과 열두 용사들, 그리고 진실한 역사가인 튀르팽 등과 함께 일을 벌이지. 사실 나는 이들을 이 땅에서 영원히 추방하고자 하고 있었네. 비록 어느 부분에서는 유명한 마데오 보야르도의 창의력을 이어 받았고, 기독교인인 시인 루도비코 아리오스토도 여기서 자기 실을 자아냈지만 말일세. 만일 내가 아리오스토와 이곳에서 만나면, 그리고 그가 자기 나라 말이 아닌 다른 나라 말로 이야기를 한다면, 나는 그에게 조금도 경의를 표할 수가 없지. 그러나 자기 나라 말로 이야기한다면 그를 받들어 모실 거야.」
(번역본에 붙은 주석)
마데오 보야르도(1441∼1494). 15세기 이탈리아의 시인. 미완성 서사시 『사랑의 오를란도』는 아리오스토의 시 『광란의 오를란도』의 전편으로 여겨진다.
루도비코 아리오스토(1474∼1533). 이탈리아의 시인.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은 이탈리아 말로 되어 있는데요.」이발사가 말했다.「이해는 못 하겠지만요.」
「이해해 봤자 좋을 건 없네.」신부가 대답했다.「에스파냐로 데리고 와서 에스파냐어로 바꾸지 않았더라면 아마 이 자리에서 그 대장을 용서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옮기면서 원래의 가치가 크게 줄어들고 말았단 말일세. 하긴, 시를 다른 말로 옮기려 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처럼 할 거야. 아무리 고심하고 솜씨를 발휘해 봐도 원작에는 미치지 못하거든. 그러니까 이 책은 물론이거니와 이와 같이 프랑스의 기사들을 다룬 책들은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뚜렷한 방침이 설 때까지 마른 웅덩이에 집어넣어 보존해 두라는 걸세. 시중에 돌아다니고 있는 <베르나르도 델 카르피오>와 소위 <론세스 바예스>라는 시들은 예외로 하고 말일세. 이들은 내 손에 들어오는 즉시 아주머니 손으로 넘어가서 가차 없이 불 속에 떨어지고 말 테니까.」
이발사는 당연히 그렇게 한다고 신부의 말에 동의하면서 적절한 조치라고 했다. 훌륭한 신앙인에 진실을 사랑하는 사람인 신부가 세상일에 대해 틀린 소리를 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어 다른 책을 펼쳤는데, 그것은 『팔메린 데 올리바』였으며 그 옆에는 『팔메린 데 잉갈라테라』가 있었다. 이것을 보자 신부가 말했다.
「이 올리바는 당장 갈기갈기 찢어서 불 속에 집어넣어 재도 남지 않도록 해야 하네. 그 잉갈라테라는 유일본이니 소중히 보존해 두도록 하고. 알렉산더 대왕이 다리오 왕의 전리품 중에서 발견해 시인 호메로스의 작품을 보관하기 위해 싸워 빼앗았다는 그러한 상자를 이 책을 위해서도 꼭 장만해야 할 걸세. 이 책은 말일세. 이발사 양반, 두 가지 점에서 중요하다네. 하나는 작품 그 자체가 뛰어나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어느 신중한 포르투갈 왕이 이 작품을 썼다는 말이 있기 때문이지. 미라구아르다 성에서 일어난 모험담들은 모두 아주 훌륭히 잘 쓰였을 뿐 아니라 기교가 넘치지. 고상하고 명료한 구절들은 아주 정확하고 분별력 있는 그 인물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 주고 있다네. 그러니 자네만 좋다면 니콜라스 양반, 이 책과 『아마디스 데 가울라』는 화형에서 제외시키고, 그 밖의 것들은 모두 더 이상 볼 필요 없이 그냥 없애 버리세.」
알렉산더 대왕이 '동방 원정'에서 획득한 '보물상자'에 호메로스의 책을 넣어서 보관했다는 일화는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나오는 유명한 일화다. 소설『돈키호테』속에는 이런 식으로 '그리스 로마 고전 속에 나오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등장하는데, 이런 대목들을 통해 세르반테스가 '고전'에 대해 아주 해박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아닙니다, 신부님.」이발사가 대답했다.「제가 지금 손에 들고 있는 것은 그 이름 높은 『돈 벨리아니스』인걸요.」
「그 책은 말일세 …….」신부가 말했다.「2, 3, 4부 모두 지나칠 정도로 성을 내는 대목이 많이서 그것을 없애기 위해 약간의 대황이 필요하다네. <명성의 성>에 관한 이야기 몽땅하고, 더 중요하게 다루었지만 말도 안 되는 다른 이야기들은 뺴야 마땅하지. 그렇게 하기까지는 엄청난 시간이 들 게야. 고쳐졌을 때야 자비나 정의를 베풀 수 있을 테니. 그때까지 자네 집에 두고 아무도 읽게 해서는 안 되네.」
「그게 좋겠군요.」이발사가 대답했다.
그러고는 더 이상 기사 소설들을 살피는 일이 힘들 것 같아서 가정부에게 큰 책들은 모두 마당으로 집어 던지라고 했다. 바보나 귀머거리 여자에게 말한 것이 아니며, 아무리 멋있는 최상품의 천을 짜는 일이라 해도 그보다 책 태우는 일을 훨씬 더 좋아하는 사람에게 시켰으니, 가정부는 한꺼번에 여덞 권을 창문으로 집어 던졌다. 한 번에 많이 집으려다 보니 그중 한 권이 이발사의 발치에 떨어졌다. 누구 작품인지 알고자 살펴보니 그것은 『유명한 티란테 엘 블랑코 기사 이야기』였다.
「이런!」신부가 큰 소리로 말했다.「여기 백의의 기사 티란테가 있었다니! 이리 줘보게, 친구. 이 책에 빠져 이게 오락의 전부가 된 적도 있었다네. 이 책에는 용감한 기사 돈 키리엘레이손 데 몬탈반과 그의 동생 토마스 데 몬탈반, 그리고 기사 폰세카가 나오고, 용맹한 티란테가 알라노족과 싸운 이야기며 플라세르데미비다 처자의 재치며 과부 레포사다의 연애며 속임수며 자신의 시종 이폴리토를 사랑한 왕후의 이야기도 있다네. 정말이지 친구여, 특히 문체로 보아 이건 세계에서 제일 잘 쓴 책일세. 다른 모든 기사 소설과 달리 이 책에서는 기사들이 먹고, 잠자고 자기 침대에서 죽고, 죽기 전에 유언을 하는 등 보통 사람들이 하는 짓을 그대로 하고 있다네. 무엇보다도 이 책을 쓴 작가는 기사를 갤리선에 평생 집어 넣는 그런 터무니없는 짓들은 하지 않았다네. 이 책을 집에 가지고 가서 읽어 보게. 그러면 내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될 걸세.」
「그렇게 하지요.」이발사는 대답했다. 「그건 그렇고, 남은 이 작은 책들은 어떻게 하지요?」
「이 책들은 기사 소설이 아닌 것 같네. 시집이군.」신부가 말했다.
한 권을 펼쳐 보니 호르헤 데 몬테마요르의 『라 디아나』여서, 나머지 것들도 모든 같은 종류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말헀다.
「이런 종류의 책까지 다른 것들처럼 태울 필요는 없지. 기사 소설들처럼 피해를 준 것도 아니고, 앞으로도 주지 않을 테니까. 다른 사람에게 해를 주지 않는 오락물이거든.」
「어머, 신부님!」조카딸이 말했다. 「이것도 아까 그 책들처럼 태우라고 하셔도 상관없어요. 삼촌이 기사병에서 다 나으신 다음 이번에는 그런 책을 읽다가 양을 기르는 목동이 되어 노래를 부르고 피리를 불면서 숲이나 초원으로 돌아다닐 생각을 하시게 될까 봐 그래요. 그것보다 더 큰일은, 시인이 되겠다고 하시면 어떡해요. 사람들 말로는 그건 낫기도 어렵고 벗어나기도 힘든 병이라던데요.」
「이 아가씨 말도 맞는구먼.」신부가 말했다.「우리 친구에게 앞으로 또 일어날지 모르는 곤란한 일을 제거하는 것이 좋겠어. 그럼 몬테마요르의 『라 디아나』부터 시작하지. 내 생각에, 이 책은 태우는 대신 현명한 여인 펠리시아 이야기와 마법에 걸린 물 이야기와 시들만 없애고, 산문과 이런 종류의 책 중에서 제일 먼저 나왔다는 명예쯤은 남겨 두는 게 좋겠어.」
「다음은 …….」이발사가 말했다.「살라망카 사람이 지은 『라 디아나』속편이라는 것인데, 제목은 같지만 작가가 힐 폴로네요.」
「살라망카 사람이 쓴 책은 …….」신부가 말했다. 「마당으로 던져지는 형벌에 처한 것들을 따라가게 하고, 힐 폴로가 쓴 것은 아폴론이 직접 쓴 작품인 양 소중히 보관되어야 하네. 자, 그다음은? 서둘러야겠어, 늦어지고 있어.」
(번역본에 붙은 주석)
몬테마요르가 『라 디아나』를 썼는데 1564년 발렌시아에서 두 종류의 속편이 출판됐다. 하나는 살라망카의 의사 알론소 페레스가 쓴 『라 디아나』 속편이고 다른 하나는 발렌시아 사람인 힐 폴로가 쓴 『사랑에 빠진 라 디아나』이다. 후자는 최고의 스페인 목가 문학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책은 …….」이발사가 또 다른 책을 펼치면서 말했다.「사르데냐의 시인 안토니오 데 로프라조가 지은 『사랑의 운명에 관한 열 권의 책』입니다.」
「신부의 명예를 두고 말하지만 …….」신부가 말했다.「아폴론이 아폴론이고, 예술의 신 뮤즈가 뮤즈이며, 시인들이 시인이었던 이래 이 책만큼 재미있으며 그다지 엉터리가 아닌 책은 쓰인 적이 없다네. 그리고 지금까지 이 세상에 나온 이런 종류의 책들 중 그 방면에서 가장 뛰어나고 유일한 작품이기도 하지. 그러니 이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은 결코 재미있는 책을 읽었다고 말을 할 수 없어. 이리 주게, 이 책을 발견한 것은 정말이지 최고급이라는 피렌체 천으로 된 승복을 받는 것보다 훨씬 값진 일이라네.」
그는 아주 만족스러워하며 그것을 받아 따로 놓아두었다. 이발사가 말을 이었다.
「다음으로 『이베리아의 목동』, 『에나레스의 요정』, 『질투의 환멸』인데요. 」
「그것들은 더 볼 필요도 없네.」신부가 말했다. 「아주머니의 저 속세의 팔에 넘겨주게. 이유는 묻지 말게. 말하자면 끝이 없을 테니까.」
『이베리아의 목동』(1591년 작품), 『에나레스의 요정』(1587년 작품), 『질투의 환멸』(1586년 작품) 등은 모두 당대의 베스트셀러(?) 였던 모양이다.
「이번 것은 『필리다의 목동』이에요.」
「그자는 목동이 아닐세.」신부가 설명했다. 「아주 점잖은 궁의 신하일세. 보물처럼 보관하게나.」
「이 큰 책은 …….」이발사가 읽었다. 「제목이 『다양한 시의 보고』라고 되어 있는데요.」
「좋은 작품이 되었을 텐데.」신부가 대답했다. 「그렇게 다양한 종류의 시를 담지만 않았더라면 말이야. 훌륭한 시들 사이에 들어 있는 천박한 몇몇 작품들을 솎아 내야 할 걸세. 작가가 내 친구이기도 하고, 그가 쓴 보다 영웅적이고 고상한 다른 작품들을 존경하는 의미에서 그건 놔두기로 하세.」
「이것은 …….」이발사가 말을 이었다. 「로페스 말도나도의 『가곡집』입니다.」
「이 책의 작가도 …….」신부가 대답했다. 「나와 아주 친한 사람이야. 그자의 입으로 그의 시를 들으면 감탄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네. 목소리가 참으로 부드뤄워서 사람의 혼을 빼놓거든. 목가가 길긴 한데 좋은 건 그리 많지가 않아. 이 책도 남긴 책들과 같이 두게. 그런데 그 옆에 있는 저 책은 뭔가?」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라 갈라테아』인데요.」 이발사가 말했다.
「세르반테스도 내 오랜 친구지. 내가 알기로, 그 친구는 시 쓰는 일보다 세상 고생에 더 이력이 나 있는 사람이라네. 그 책은 무언가 기발한 구석이 있지만, 제시만 할 뿐 결론은 아무것도 없단 말이야. 속편을 약속했으니 기다릴 수밖에. 약간 손질만 하면 지금은 못 받고 있는 자비를 완벽하게 얻을지도 모르지. 그때까지 자네 집에다 간수해 놓도록 하게.」
이 대목에서 작가는 자신이 쓴 작품 『라 갈라테아』(1585년에 발표한 세르반테스의 첫 번째 작품)를 아주 자연스럽게 등장시킨다. 또한 '작가의 남다른 이력'을 슬쩍 고백하기도 한다. 그는 1571년(24세) 자원입대했고 그해 10월에 참가한 레판토 해전에서 부상을 당하여 왼팔을 잃고 <레판토의 외팔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1575년(28세)에 귀국길에 오르던 중 터키 해적선의 습격을 받아 포로가 되었고, 그 후 5년간 알제에서 노예생활을 하며 네 번이나 탈출을 시도하나 모두 실패한 경험도 있었다. 이런 경험들은 소설 『돈키호테』에도 자연스레 녹아들어 있는데, '남 이야기' 하듯 자연스레 펼쳐내는 그의 놀라운 이야기 솜씨는 '작가의 생생한 경험'이 뒷받침된 덕분에 비교 대상을 찾기 어렵다.
「그렇게 하지요.」이발사가 대답했다. 「자, 이번에는 한꺼번에 세 권입니다. 돈 알론소 데 에르시야의 『라 아라우카나』, 코르도바의 심문고나 후안 루포의『라 아우스트리아다』, 그리고 발렌시아의 시인 크리스토발 데 비루에스의 『델 몬세르라토』이네요.」
「그 책들은 …….」 신부가 대답했다. 「모두 에스파냐어로 쓴 영웅 서사시로 최고의 걸작들일세. 이탈리아의 가장 유명한 작품들과 겨뤄도 손색이 없지. 에스파냐가 낳은 가장 값진 보물이니 잘 보관해 두게.」
신부는 지쳐서 더 이상 책을 볼 기운도 없어 나머지는 한꺼번에 몽땅 불태워 버리고자 했다. 그때 이발사가 책 한 권을 펼쳐 들고 있었는데, 『앙헬리카의 눈물』이었다.
「내가 울 뻔했군.」 책 제목을 듣고는 신부가 말했다.「그 책을 태우라고 했더라면 말일세. 그 작가는 에스파냐뿐 아니라 세계에서도 가장 유명한 시인들 중 한 사람이지. 오비디우스의 우화를 몇 편 번역했는데, 정말 훌륭하더군.」(106∼116쪽)
- 『돈키호테 1』, <우리의 기발한 이달고의 서재에서 신부와 이발사가 행한 멋지고도 엄숙한 검열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