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세르반테스의 문체가 어떤 것이며, 사물에 접하는 그의 방식이 어떠한 것인지 분명히 알 수만 있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얻을 텐데. -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 * *

 

훌륭한 책들은 한 번만 읽어도 오래도록 여운이 남는 것 같다. 어쨌든 자꾸 생각나고, 적당한 계기만 주어지면 언제라도 그 책을 다시 펼치게 된다. 움베르토 에코가 쓴 『궁극의 리스트』도 '잊을 만하면 다시 생각나는 책'이라는 점에서는 좋은 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궁극의 리스트』는 '한꺼번에' 읽기에는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총 408쪽이니 그리 두꺼운 책이 아니라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자세히 따지고 보면 엄청나게 두꺼운 책으로 볼 수도 있다. 판형도 제법 클 뿐만 아니라 한 페이지에 박힌 텍스트도 매우 빽빽하기 때문이다.(한 페이지에 41줄씩 두 열로 혹은 세 열로 인쇄되어 있다.)

 

가령, 『궁극의 리스트』에 '인용'된 『돈키호테』의 한 장은 11쪽 분량의 내용이 통째로 인용되어 있는데도 『궁극의 리스트』에는 똑같은 내용이 단지 3쪽을 살짝 넘길 뿐이다. 그렇다면『돈키호테』의 1부와 2부를 다 합한 1,720쪽 분량도『궁극의 리스트』와 같은 판형에서는 469쪽에 다 담길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1,720쪽 × 3/11 = 469쪽) 거꾸로 생각하면 『궁극의 리스트』는 열린책들에서 나온 『돈키호테』식으로 판형이 만들어졌다면 장장 1,496쪽으로 늘어날 뻔했다는 얘기다.

 

 

 

이런 얘기의 매우 간단한 결론 한 가지는 이렇다. 『궁극의 리스트』는 단번에 읽기에는 너무나 힘든 책이라는 것이다. 거기에 꼭 덧붙일 말도 필요하다. 이 책은 굳이 단번에 읽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다. 좀 더 과감하게 말한다면 '단번에 읽으면 안 된다'고까지 말해도 좋지 싶다. 숱한 이름난 고전들에서 나열된 '온갖 목록들'을 그대로 끌어다 옮겨 놓은 책을 도대체 무슨 수로 단 번에 '통독'할 수 있단 말인가. 설사 통독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그 사람이 무슨 재미로 그 책을 그런 식으로 읽으려고 애쓰는지를 도리어 물어보고 싶게 만드는 책이다. 그렇게 단번에 읽기에는 너무나 힘든 책인데도 왜 이 책은 한번 구경하고 나면 좀처엄 잊혀지지 않고 나중에 언젠가는 다시 그 책을 펼쳐보게 될까.

 

그 이유를 나는 두 가지 정도로 꼽고 싶다.

 

우선 첫째로,『궁극의 리스트』속에 인용된 책들을 우리가 미처 다 읽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거기에 인용된 책을 새롭게 읽고 나면 '옛날엔 낯설게만 느껴지던' 그 책과 책 속 문장들이 『궁극의 리스트』에서 어떻게 다시 '친숙한 모습'으로 뒤바뀌어 있는지를 문득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어쨌든『궁극의 리스트』속에 담긴 텍스트를 많이 알고 있는 독자들은 그만큼 '움베르토 에코도 인정하는 책들'을 많이 읽었다는 명백한 증거를 다시금 발견하게 된다.

 

나도 처음엔 이 책을 펼쳐 보고 내가 이미 읽은 책 몇 권을 발견하고는 무척이나 반겼었다. 이 책의 특징은 우리가 한번쯤은 익히 제목을 들어봤을 만한 유명한 책들에서 골라 뽑은 '인용문'들로 가득하다. 저자인 움베르토 에코의 목소리는 별로 들리지 않는다. 그야말로 '에코'가 이쪽 저쪽에서 가끔씩 울리는 수준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 책은 '다른 책 속에 담긴 각종 목록에 관한 대목들'을 그대로 '인용'해서 책으로 꾸민 아주 독특한 책이다.

 

구체적인 사례를 보면 금세 이해할 수 있다. 가령 이 책의 256쪽과 257쪽을 한번 살펴 보자.

 

 - 『궁극의 리스트』 256쪽

 

 

 - 『궁극의 리스트』 257쪽

 

이런 식으로 책이 구성되어 있다 보니 독자들에게 다가오는 느낌은 늘상 둘 가운데 하나일 수밖에 없다.『궁극의 리스트』에서 다시 만나는 텍스트가 몹시 반갑거나 아니면 그저 뜬금없이 생소하거나. 그나마 방금 우리가 살펴본 라블레의 책에서 인용된 대목들은 하나같이 '재미'라도 있어 다행이지만, 내가 미처 읽어 보지도 못한 책에서 인용된 '복잡하기 그지 없는 목록들'은 재미가 하나도 없는 경우도 수두룩하다.

 

가령, 움베르토 에코가 직접 정리했다는 '천사들의 목록'을 한번 살펴보자. 도대체 이걸 무슨 '재미'로 다 읽을 것이며, 이와 닮은 온갖 목록들을 무슨 수로 한 번에 '통독'할 수 있단 말인가.

 

 

 

나도 웬만하면 책 한 권 붙잡으면 끝까지 읽고 마는 성격인데, 이 책은 도저히 그럴 수 없겠다는 생각부터 들어서 저만치 밀쳐 두고 지내 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떤 책들을 읽다가 '유난히 기나긴 목록'이 나열되는 대목을 만나기만 하면 '어? 이거 혹시 '궁극의 리스트'에도 담긴 목록이 아닐까?' 하는 의심부터 갖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이 책은 나에게는 아주 가끔씩 들춰 보는 아주 이상한 책이 되었다.

 

어쨌든 이번 기회에『궁극의 리스트』에 인용된 숱한 작품들 가운데 내가 읽은 책들은 얼마나 될까 하고 꼽아 보니 대충 다음과 같았다.

 

호메로스, 『일리아스』

베르길리우스, 『아이네이스』

헤시오도스, 『신들의 계보』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그리스 철학자 열전』

단테, 『신곡』

라블레, 『가르강튀아 / 팡타그뤼엘』

셰익스피어, 『리처드 2세』

세르반테스, 『돈키호테』

괴테, 『파우스트』

마크 트웨인, 『톰 소여의 모험』

제임스 조이스, 『율리시스』

 

이렇게 '이미 읽은 책' 속에 나오는 문장들을 고스란히 『궁극의 리스트』속에서 다시 만나는 일은 몹시 기쁘다. 그런데 아주 유명한 책들이지만 내가 여태껏 읽지 못했기 때문에『궁극의 리스트』에 담겨 있어도 '닭쫓던 개가 지붕 쳐다보는 식'으로 멀뚱멀뚱 그저 눈만 굴리다가 다른 페이지로 슬쩍 건너 뛸 수밖에 없는 책들을 만나는 건 좀 괴롭다.

 

이번 기회에 그런 책들의 목록을 몇 권만 적어 본다. 많이 적을수록 창피하니까. 어쨌든 여태껏 못 읽은 이런 책들을 언젠가 읽고 나면 나는 다시금 『궁극의 리스트』를 펼칠 것이다. 그리고 그 목록이 의미하는 바가 무었이었는지를 움베르토 에코의 설명을 통해 다시금 찬찬히 되짚어 볼 생각이다. 어쨌든 『궁극의 리스트』는 그런 식으로 읽어야 할 책이니까.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토마스 만, 『파우스트 박사』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바우돌리노』

이탈로 칼비노, 『보이지 않는 도시들』, 『우주 만화』

파트리크 쥐스킨트, 『향수』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보르헤스 전집』

오스카 와일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이제 『궁극의 리스트』를 읽는 '두 번째' 재미를 얘기할 차례다.(첫 번째 이유와는 이미 너무나 멀리 벗어나 있더라도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 이 책에는 여러 훌륭한 그림들이 아주 풍성하게 수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림' 속에도 '훌륭한 목록들'이 숨어 있다는 게 움베르토 에코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림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는 독자들이라도 이 책에 담긴 훌륭하고, 놀랍고, 이색적이고, 인상적인 여러 그림들을 보고 나면 틀림없이 많은 매력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나도 그림에는 영 까막눈이어서 모르는 화가와 그림들이 수두룩하지만 그래도 익숙한 화가들이 가끔씩은 눈에 띈다. 가령, 레오나르도 다빈치, 살바도르 달리, 귀스타브 도레, 외젠 들라크루아, 알브레히트 뒤러, 르네 마그리트, 귀스타브 모로, 얀 브뤼헐, 피터르 브뤼헐, 엔디 워홀 등.

 

여기까지가『궁극의 리스트』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이후부터 다룰 이야기는『돈키호테』에 얽힌 이야기다. 왜 갑자기 뜬금없이『돈키호테』로 넘어가는 거냐고 항의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이유를 설명하자면 이렇다.

 

나는 최근에 '몇십 권의 책'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리스트는 따로 작성하지 않았다. 그 대신『궁극의 리스트』에 나오는 한 대목을 지렛대로 삼아 글을 하나 썼다. 뜻밖의 성공이었다!

 

그로부터 만 하루가 지난 뒤에 나는 대대적으로 책을 재배치하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누워 지냈던 책들을 일으켜 세워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이었다. 책장의 지붕에 쌓인 먼지까지 털어내고 '책장 지붕과 방의 천장 사이의 틈'까지 책장으로 활용했다. 그 덕분에 이제 더 이상 내 방에서 누워 지내는 책은 찾기 어렵게 되었다.

 

곧이어 난생 처음으로 떠나보내는 책들을 위해 '이별의 정'을 담은 고별사를 써봤다. 이번에도 반응이 뜨거웠다. 여름 날씨만큼이나. 수많은 댓글에 대해 답글을 다는 동안에 순간적으로 내 머릿속에 '돈키호테의 서재'가 불쑥 떠올랐다. 돈키호테는 자신이 쓰러져 잠든 사이에 자신이 아끼던 책들을 대부분 잃고 말았던 불쌍한 사람이었다. 중세에 대유행했던 '기사 소설'에 푹 빠져 지내며 책을 낙으로 삼던 그에겐 날벼락도 그런 날벼락이 없었다. '책' 때문에 '돈키호테 삼촌'이 너무 이상하게 변했다고 생각한 조카딸이 신부에게 '서재 검열'을 요청했고, 돈키호테의 책들은 대부분 주인장도 모르는 사이에 '화형'에 처해지는 대참극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런 돈키호테가 갑자기 내 머리속에 떠올라 나는 얼른 『돈키호테』를 다시 펼쳐 읽었다.(서재를 정리하고 나니 『돈키호테』를 다시 펼쳐 읽는 일이 그렇게 쉬울 수가 없었다! 그 책은 오랫동안 저 밑에 깔려 지내다가 마침내 두 발로 단단히 서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궁극의 리스트』도 다시 펼쳐 보았다. 그런데 거기엔 놀랍게도 '돈키호테의 서재에서 퇴출된 책들에 관한 목록'이 고스란히 전부 인용되어 있었다. 분량은 대략 3쪽이 살짝 넘었다. 열린책들에서 나온 『돈키호테』에서 무려 11쪽에 이르는 분량이 단 세 쪽에 다 담기다니, 『궁극의 리스트』는 알고 보니 엄청나게 많은 텍스트를 압축파일처럼 담아 놓은 책이었다!

 

『궁극의 리스트』에는 심지어 귀스타프 도레의 그림까지도 담겨 있었다. 그런데 그 그림은 놀랍게도 열린책들에서 별책으로 펴낸 『그림으로 읽는 돈키호테』에서는 볼 수 없었던 전혀 새로운 그림이 아닌가. 이런 놀라운 그림까지 보고도 아무 것도 모른 체하고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결국 이런 글까지 쓰게 되었다.

 

귀스타브 도레,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위한 삽화, 파리, 1863년.(385쪽에 담긴 그림)

 

 

『궁극의 리스트』에는 '책'에 관한 그림들도 아주 많다. 나는 이 그림을 보는 순간까지도 돈키호테를 내 머리속에서 완전히 떨쳐내지 못했다. 그의 서재가 이처럼 신중하게 '검열' 당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었던 것이다.

 

『책벌레』(부분), 카를 슈피츠베크, 1850년, 개인 소장. (『궁극의 리스트』390쪽에 담긴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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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토 에코가 『돈키호테』에서 골라 뽑아 자신의 책을 꾸몄던 바로 그 내용을 여기에 그대로 옮겨 본다. 이 대목은 소설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오는데, '세르반테스의 탁월한 이야기 솜씨와 해학'에 금세 매료될 만큼 내게는 몹시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세르반테스의 문장들' 속에 틈틈이 '나의 생각'까지 포함시켜 보았다. 이렇게라도 '나만의 주석'을 주렁주렁 달아 놓아야 나중에 또 읽어볼 수 있을 테니.

 

돈키호테는 아직도 잠들어 있었다. 신부는 돈키호테의 조카딸에게 그 모든 폐해의 원인이 된 책들이 있는 서재 열쇠를 달라고 했다. 조카딸은 두말없이 그것을 내주었다. 모두들 서재로 들어갔고 가정부도 따라 들어갔다. 서재에는 장정이 아주 잘된 커다란 책이 1백 권도 넘었고 몇 권의 소책자들도 있었다. 가정부는 책들을 보자마자 황급히 나가더니 곧 성수가 담긴 나무 그릇과 성수 솔을 들고 들어와 말했다.

 

「신부님, 이거 받으세요. 이걸 방에 뿌려서 이 책들 속에 있는 그 많은 마술사들을 한 놈도 남기지 말고 내몰아 주세요. 우리가 그들을 세상에서 내쫓고자 했다가 벌을 받아 오히려 마법에 걸리게 되면 큰일 난다니까요.

 

이 소설이 나올 때만 하더라도 유럽에서는 '마녀 사냥'이 유행할 정도로 까마득한 옛날이었다. 그러니 당대에 이 소설을 읽었던 독자들은 우리보다 훨씬 더 실감나게 이런 대화에 공감했으리라.

 

가정부의 순진한 말에 신부는 웃으면서 이발사에게 책들을 한 권씩 집어 달라고 말했다. 그것들 가운데 불에 던지지 않아도 될 책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어떤 내용인가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그러실 필요 없어요.」조카딸이 말했다.「이 책들은 모두 해를 입히는 것들이니까 하나도 남겨 둘 필요가 없어요. 창밖 마당에 던져 쌓아 놓고 불을 지르면 좋겠어요. 아니면 뒤뜰로 가지고 가서 모닥불을 피우든지요. 거기서라면 연기가 나도 괜찮으니까요.」

 

가정부도 그렇게 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두 여자들은 이 죄 없는 책들을 너무나 죽이고 싶었지만, 신부는 책의 제목조차 훓어보지 않고서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두 여자들이 '죄 없는 책들'을 너무나 죽이고 싶었다고 하는 데서 '책에 대한 돈키호테의 광적인 사랑'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그녀들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이를 보고 웃음을 터트리는 독자들 또한 자신들이 '책을 사랑한 댓가로 주위 사람들한테 받았던 핍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되고, 그때문에 작가는 독자들로부터 뜨거운 공감을 획득한다.

 

니콜라스 선생이 제일 먼저 그의 손에 건네준 책은 『네 권의 아마디스 데 가울라』였다.

 

「이 책은 불가사의지.」신부가 말했다. 「내가 듣기로 이 책이 에스파냐에서 출판된 첫 기사소설이라던데, 다른 책들 모두 이 책을 기반으로 하고 있네. 아주 사악한 분파를 만들어 낸 거짓 교리서인 셈이니 당연히 화형에 처해야겠지.」

 

「안 됩니다, 신부님.」이발사가 말했다. 「제가 듣기로는 이 책이야말로 지금까지 쓰인 기사 소설 중에서 가장 훌륭하다고 하더군요. 그러니 이런 책 중에서 유일하게 용서해 줘야 할 겁니다.

 

『아마디스 데 가울라』는 스페인 기사소설의 대표작이다.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권>에도 포함될 정도로 널리 알려진 작품이니, 스페인에서의 인기는 더 말할 필요가 없겠다. 소설 『돈키호테』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소설책'이기도 하다. 돈 키호테가 바로 그 책을 전범으로 삼아 '행동'하기 때문이다.

 

「하긴 그것도 그렇군.」신부가 말했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은 살려 두지. 어디 그 옆에 있는 것 좀 보게.」

 

「이것은 ……」이발사가 말했다. 「아마디스 데 가울라의 합법적인 아들 『에스플란디안 무용담』이네요.」

 

「그런데 말이지 ……」신부가 받아서 말했다. 「자기 아버지와 같은 대우를 해줄 순 없지 않나. 아주머니, 이 책을 받아서 창문으로 마당에 던지시죠. 모닥불을 많이 피워야 할 테니, 이건 그 불쏘시개요.」

 

가정부는 아주 만족스러워하며 하라는 대로 했다. 그 알량한 에스플란디안은 마당으로 날아가서 꾹 참고 화형식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원조가 아닌 '짝퉁'은 인정할 수 없다는 세르반테스의 작가적 마인드가 엿보인다. 또한 책 속의 주인공인 '에스플란디안'을 의인화해서 '마당으로 날아가서 꾹 참고 화형식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는 식으로 묘사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참을 수 없는 웃음'을 유발시키고 있다.

 

「다음.」신부가 말했다.

 

「다음은요 …….」이발사가 받았다. 「『아마디스 데 그레시아』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쪽에 있는 것은 모두 아마디스 가문의 무용담들 같은데요.」

 

「그렇다면 전부 마당으로 던지게!」신부가 말했다. 「핀티키니에스트라 여왕과 목동 다리넬 그리고 그가 부른 목가들, 아무튼 그 작자의 알아들을 수 없는 추악한 이야기들은 다 태워 버리게. 나를 낳아주신 아버지라도 편력 기사의 모습으로 나타나신다면 그것들과 함께 불살라 버릴 테니 말일세.

 

「저도 동감입니다.」이발사가 말했다.

 

「저도요.」조카딸도 거들었다.

 

「그렇다면 …….」가정부가 말했다. 「자, 이리들 주세요. 마당으로 가져가게요.」

 

그것들은 상당한 양이어서 그녀는 계단으로 내려가는 대신 창밖으로 던져 버렸다.

 

이 대목에서 가정부가 '계단으로 내려가는 대신 창밖으로 던져 버리는' 과감한 행동' 또한 '웃음'을 유발한다. '지나친 행동'은 철학자 베르그송이『웃음』에서 지적한 바 대로 '웃음'의 핵심 작동 원리 가운데 하나다. 또한 소설『돈키호테』에 담긴 수많은 '웃음 유발 장치'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그 두꺼운 책은 누구의 이야기지?」신부가 물었다.

 

「『돈 올리반테 데 라우라』입니다.」이발사가 대답했다.

 

「이 책의 작가는 …….」신부가 말했다. 「『꽃들의 정원』을 쓴 사람과 같은 인물이지. 아마 이 두 권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사실적인지, 다시 말해 어느 것이 덜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알기란 어려워. 확실한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무례하게 떠벌리는 이 책들은 마당으로 가야 한다는 것뿐이지.

 

「다음 책은 『플로리스마르테 데 이르카니아』입니다.」이발사가 말했다.

 

「플로리스마르테 님이 거기 계신가?」신부가 대꾸했다. 「그렇다면 당장 마당으로 가야겠군. 범상치 않은 탄생 일화와 꿈 같은 모험담은 많지만 문체가 멋이 없고 딱딱하단 말씀이야. 아주머니, 다른 것과 함께 마당으로 던져요.」

 

「그렇게 하고 말고요, 신부님.」가정부는 신바람이 나서 시키는 대로 했다.

 

「이것은 『기사 플라티르』입니다.」이발사가 말했다.

 

「오래된 책이지.」신부가 말했다.「그러나 사면할 이유가 없어. 다른 말 말고 다른 것들과 동행시키세.」

 

그래서 그렇게 처리됐다. 다른 책이 펼쳐졌는데, <십자가의 기사>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제목이 성스러워서 좀 무식해도 용서될 수 있었겠지만 여기 <십자가 뒤에 악마가 있다>는 말이 있거든. 이것도 불 속으로 ……」

 

이발사가 다른 책을 꺼내 들고 말했다.

 

「이건 『기사도의 거울』이네요.」

 

『돈 올리반테 데 라우라』(1564년 작품), 『꽃들의 정원』(1570년 작품), 『기사 플라티르』(1533년 작품), 『기사도의 거울』등은 모두 실재하는 작품들이다.

 

「내가 잘 아는 책이군.」신부가 대꾸했다. 「그 책에는 레이날도스 데 몬탈반이 지난날의 대도둑 카쿠스가 무색할 정도의 대도둑인 자신의 친구들과 동료들과 열두 용사들, 그리고 진실한 역사가인 튀르팽 등과 함께 일을 벌이지. 사실 나는 이들을 이 땅에서 영원히 추방하고자 하고 있었네. 비록 어느 부분에서는 유명한 마데오 보야르도의 창의력을 이어 받았고, 기독교인인 시인 루도비코 아리오스토도 여기서 자기 실을 자아냈지만 말일세. 만일 내가 아리오스토와 이곳에서 만나면, 그리고 그가 자기 나라 말이 아닌 다른 나라 말로 이야기를 한다면, 나는 그에게 조금도 경의를 표할 수가 없지. 그러나 자기 나라 말로 이야기한다면 그를 받들어 모실 거야.」

 

(번역본에 붙은 주석)

마데오 보야르도(1441∼1494). 15세기 이탈리아의 시인. 미완성 서사시 『사랑의 오를란도』는 아리오스토의 시 『광란의 오를란도』의 전편으로 여겨진다.

루도비코 아리오스토(1474∼1533). 이탈리아의 시인.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은 이탈리아 말로 되어 있는데요.」이발사가 말했다.「이해는 못 하겠지만요.」

 

「이해해 봤자 좋을 건 없네.」신부가 대답했다.「에스파냐로 데리고 와서 에스파냐어로 바꾸지 않았더라면 아마 이 자리에서 그 대장을 용서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옮기면서 원래의 가치가 크게 줄어들고 말았단 말일세. 하긴, 시를 다른 말로 옮기려 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처럼 할 거야. 아무리 고심하고 솜씨를 발휘해 봐도 원작에는 미치지 못하거든. 그러니까 이 책은 물론이거니와 이와 같이 프랑스의 기사들을 다룬 책들은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뚜렷한 방침이 설 때까지 마른 웅덩이에 집어넣어 보존해 두라는 걸세. 시중에 돌아다니고 있는 <베르나르도 델 카르피오>와 소위 <론세스 바예스>라는 시들은 예외로 하고 말일세. 이들은 내 손에 들어오는 즉시 아주머니 손으로 넘어가서 가차 없이 불 속에 떨어지고 말 테니까.」

 

이발사는 당연히 그렇게 한다고 신부의 말에 동의하면서 적절한 조치라고 했다. 훌륭한 신앙인에 진실을 사랑하는 사람인 신부가 세상일에 대해 틀린 소리를 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어 다른 책을 펼쳤는데, 그것은 『팔메린 데 올리바』였으며 그 옆에는 『팔메린 데 잉갈라테라』가 있었다. 이것을 보자 신부가 말했다.

 

「이 올리바는 당장 갈기갈기 찢어서 불 속에 집어넣어 재도 남지 않도록 해야 하네. 그 잉갈라테라는 유일본이니 소중히 보존해 두도록 하고. 알렉산더 대왕이 다리오 왕의 전리품 중에서 발견해 시인 호메로스의 작품을 보관하기 위해 싸워 빼앗았다는 그러한 상자를 이 책을 위해서도 꼭 장만해야 할 걸세. 이 책은 말일세. 이발사 양반, 두 가지 점에서 중요하다네. 하나는 작품 그 자체가 뛰어나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어느 신중한 포르투갈 왕이 이 작품을 썼다는 말이 있기 때문이지. 미라구아르다 성에서 일어난 모험담들은 모두 아주 훌륭히 잘 쓰였을 뿐 아니라 기교가 넘치지. 고상하고 명료한 구절들은 아주 정확하고 분별력 있는 그 인물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 주고 있다네. 그러니 자네만 좋다면 니콜라스 양반, 이 책과 『아마디스 데 가울라』는 화형에서 제외시키고, 그 밖의 것들은 모두 더 이상 볼 필요 없이 그냥 없애 버리세.

 

알렉산더 대왕이 '동방 원정'에서 획득한 '보물상자'에 호메로스의 책을 넣어서 보관했다는 일화는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나오는 유명한 일화다. 소설『돈키호테』속에는 이런 식으로 '그리스 로마 고전 속에 나오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등장하는데, 이런 대목들을 통해 세르반테스가 '고전'에 대해 아주 해박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아닙니다, 신부님.」이발사가 대답했다.「제가 지금 손에 들고 있는 것은 그 이름 높은 『돈 벨리아니스』인걸요.」

 

「그 책은 말일세 …….」신부가 말했다.「2, 3, 4부 모두 지나칠 정도로 성을 내는 대목이 많이서 그것을 없애기 위해 약간의 대황이 필요하다네. <명성의 성>에 관한 이야기 몽땅하고, 더 중요하게 다루었지만 말도 안 되는 다른 이야기들은 뺴야 마땅하지. 그렇게 하기까지는 엄청난 시간이 들 게야. 고쳐졌을 때야 자비나 정의를 베풀 수 있을 테니. 그때까지 자네 집에 두고 아무도 읽게 해서는 안 되네.」

 

「그게 좋겠군요.」이발사가 대답했다.

 

그러고는 더 이상 기사 소설들을 살피는 일이 힘들 것 같아서 가정부에게 큰 책들은 모두 마당으로 집어 던지라고 했다. 바보나 귀머거리 여자에게 말한 것이 아니며, 아무리 멋있는 최상품의 천을 짜는 일이라 해도 그보다 책 태우는 일을 훨씬 더 좋아하는 사람에게 시켰으니, 가정부는 한꺼번에 여덞 권을 창문으로 집어 던졌다. 한 번에 많이 집으려다 보니 그중 한 권이 이발사의 발치에 떨어졌다. 누구 작품인지 알고자 살펴보니 그것은 『유명한 티란테 엘 블랑코 기사 이야기』였다.

 

「이런!」신부가 큰 소리로 말했다.「여기 백의의 기사 티란테가 있었다니! 이리 줘보게, 친구. 이 책에 빠져 이게 오락의 전부가 된 적도 있었다네. 이 책에는 용감한 기사 돈 키리엘레이손 데 몬탈반과 그의 동생 토마스 데 몬탈반, 그리고 기사 폰세카가 나오고, 용맹한 티란테가 알라노족과 싸운 이야기며 플라세르데미비다 처자의 재치며 과부 레포사다의 연애며 속임수며 자신의 시종 이폴리토를 사랑한 왕후의 이야기도 있다네. 정말이지 친구여, 특히 문체로 보아 이건 세계에서 제일 잘 쓴 책일세. 다른 모든 기사 소설과 달리 이 책에서는 기사들이 먹고, 잠자고 자기 침대에서 죽고, 죽기 전에 유언을 하는 등 보통 사람들이 하는 짓을 그대로 하고 있다네. 무엇보다도 이 책을 쓴 작가는 기사를 갤리선에 평생 집어 넣는 그런 터무니없는 짓들은 하지 않았다네. 이 책을 집에 가지고 가서 읽어 보게. 그러면 내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될 걸세.」

 

「그렇게 하지요.」이발사는 대답했다. 「그건 그렇고, 남은 이 작은 책들은 어떻게 하지요?」

 

「이 책들은 기사 소설이 아닌 것 같네. 시집이군.」신부가 말했다.

 

한 권을 펼쳐 보니 호르헤 데 몬테마요르의 『라 디아나』여서, 나머지 것들도 모든 같은 종류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말헀다.

 

「이런 종류의 책까지 다른 것들처럼 태울 필요는 없지. 기사 소설들처럼 피해를 준 것도 아니고, 앞으로도 주지 않을 테니까. 다른 사람에게 해를 주지 않는 오락물이거든.」

 

「어머, 신부님!」조카딸이 말했다. 「이것도 아까 그 책들처럼 태우라고 하셔도 상관없어요. 삼촌이 기사병에서 다 나으신 다음 이번에는 그런 책을 읽다가 양을 기르는 목동이 되어 노래를 부르고 피리를 불면서 숲이나 초원으로 돌아다닐 생각을 하시게 될까 봐 그래요. 그것보다 더 큰일은, 시인이 되겠다고 하시면 어떡해요. 사람들 말로는 그건 낫기도 어렵고 벗어나기도 힘든 병이라던데요.

 

「이 아가씨 말도 맞는구먼.」신부가 말했다.「우리 친구에게 앞으로 또 일어날지 모르는 곤란한 일을 제거하는 것이 좋겠어. 그럼 몬테마요르의 『라 디아나』부터 시작하지. 내 생각에, 이 책은 태우는 대신 현명한 여인 펠리시아 이야기와 마법에 걸린 물 이야기와 시들만 없애고, 산문과 이런 종류의 책 중에서 제일 먼저 나왔다는 명예쯤은 남겨 두는 게 좋겠어.

 

「다음은 …….」이발사가 말했다.「살라망카 사람이 지은 『라 디아나』속편이라는 것인데, 제목은 같지만 작가가 힐 폴로네요.」

 

「살라망카 사람이 쓴 책은 …….」신부가 말했다. 「마당으로 던져지는 형벌에 처한 것들을 따라가게 하고, 힐 폴로가 쓴 것은 아폴론이 직접 쓴 작품인 양 소중히 보관되어야 하네. 자, 그다음은? 서둘러야겠어, 늦어지고 있어.」

 

(번역본에 붙은 주석)

몬테마요르가 『라 디아나』를 썼는데 1564년 발렌시아에서 두 종류의 속편이 출판됐다. 하나는 살라망카의 의사 알론소 페레스가 쓴 『라 디아나』 속편이고 다른 하나는 발렌시아 사람인 힐 폴로가 쓴 『사랑에 빠진 라 디아나』이다. 후자는 최고의 스페인 목가 문학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책은 …….」이발사가 또 다른 책을 펼치면서 말했다.「사르데냐의 시인 안토니오 데 로프라조가 지은 『사랑의 운명에 관한 열 권의 책』입니다.」

 

「신부의 명예를 두고 말하지만 …….」신부가 말했다.「아폴론이 아폴론이고, 예술의 신 뮤즈가 뮤즈이며, 시인들이 시인이었던 이래 이 책만큼 재미있으며 그다지 엉터리가 아닌 책은 쓰인 적이 없다네. 그리고 지금까지 이 세상에 나온 이런 종류의 책들 중 그 방면에서 가장 뛰어나고 유일한 작품이기도 하지. 그러니 이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은 결코 재미있는 책을 읽었다고 말을 할 수 없어. 이리 주게, 이 책을 발견한 것은 정말이지 최고급이라는 피렌체 천으로 된 승복을 받는 것보다 훨씬 값진 일이라네.」

 

그는 아주 만족스러워하며 그것을 받아 따로 놓아두었다. 이발사가 말을 이었다.

 

「다음으로 『이베리아의 목동』, 『에나레스의 요정』, 『질투의 환멸』인데요. 」

 

「그것들은 더 볼 필요도 없네.」신부가 말했다. 「아주머니의 저 속세의 팔에 넘겨주게. 이유는 묻지 말게. 말하자면 끝이 없을 테니까.」

 

『이베리아의 목동』(1591년 작품), 『에나레스의 요정』(1587년 작품), 『질투의 환멸』(1586년 작품) 등은 모두 당대의 베스트셀러(?) 였던 모양이다.

 

「이번 것은 『필리다의 목동』이에요.」

 

「그자는 목동이 아닐세.」신부가 설명했다. 「아주 점잖은 궁의 신하일세. 보물처럼 보관하게나.」

 

「이 큰 책은 …….」이발사가 읽었다. 「제목이 『다양한 시의 보고』라고 되어 있는데요.」

 

「좋은 작품이 되었을 텐데.」신부가 대답했다. 「그렇게 다양한 종류의 시를 담지만 않았더라면 말이야. 훌륭한 시들 사이에 들어 있는 천박한 몇몇 작품들을 솎아 내야 할 걸세. 작가가 내 친구이기도 하고, 그가 쓴 보다 영웅적이고 고상한 다른 작품들을 존경하는 의미에서 그건 놔두기로 하세.」

 

「이것은 …….」이발사가 말을 이었다. 「로페스 말도나도의 『가곡집』입니다.」

 

「이 책의 작가도 …….」신부가 대답했다. 「나와 아주 친한 사람이야. 그자의 입으로 그의 시를 들으면 감탄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네. 목소리가 참으로 부드뤄워서 사람의 혼을 빼놓거든. 목가가 길긴 한데 좋은 건 그리 많지가 않아. 이 책도 남긴 책들과 같이 두게. 그런데 그 옆에 있는 저 책은 뭔가?」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라 갈라테아』인데요.」 이발사가 말했다.

 

세르반테스도 내 오랜 친구지. 내가 알기로, 그 친구는 시 쓰는 일보다 세상 고생에 더 이력이 나 있는 사람이라네. 그 책은 무언가 기발한 구석이 있지만, 제시만 할 뿐 결론은 아무것도 없단 말이야. 속편을 약속했으니 기다릴 수밖에. 약간 손질만 하면 지금은 못 받고 있는 자비를 완벽하게 얻을지도 모르지. 그때까지 자네 집에다 간수해 놓도록 하게.」

 

이 대목에서 작가는 자신이 쓴 작품 『라 갈라테아』(1585년에 발표한 세르반테스의 첫 번째 작품)를 아주 자연스럽게 등장시킨다. 또한 '작가의 남다른 이력'을 슬쩍 고백하기도 한다. 그는 1571년(24세) 자원입대했고 그해 10월에 참가한 레판토 해전에서 부상을 당하여 왼팔을 잃고 <레판토의 외팔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1575년(28세)에 귀국길에 오르던 중 터키 해적선의 습격을 받아 포로가 되었고, 그 후 5년간 알제에서 노예생활을 하며 네 번이나 탈출을 시도하나 모두 실패한 경험도 있었다. 이런 경험들은 소설 『돈키호테』에도 자연스레 녹아들어 있는데, '남 이야기' 하듯 자연스레 펼쳐내는 그의 놀라운 이야기 솜씨는 '작가의 생생한 경험'이 뒷받침된 덕분에 비교 대상을 찾기 어렵다.

 

「그렇게 하지요.」이발사가 대답했다. 「자, 이번에는 한꺼번에 세 권입니다. 돈 알론소 데 에르시야의 『라 아라우카나』, 코르도바의 심문고나 후안 루포의『라 아우스트리아다』, 그리고 발렌시아의 시인 크리스토발 데 비루에스의 『델 몬세르라토』이네요.」

 

「그 책들은 …….」 신부가 대답했다. 「모두 에스파냐어로 쓴 영웅 서사시로 최고의 걸작들일세. 이탈리아의 가장 유명한 작품들과 겨뤄도 손색이 없지. 에스파냐가 낳은 가장 값진 보물이니 잘 보관해 두게.」

 

신부는 지쳐서 더 이상 책을 볼 기운도 없어 나머지는 한꺼번에 몽땅 불태워 버리고자 했다. 그때 이발사가 책 한 권을 펼쳐 들고 있었는데, 『앙헬리카의 눈물』이었다.

 

「내가 울 뻔했군.」 책 제목을 듣고는 신부가 말했다.「그 책을 태우라고 했더라면 말일세. 그 작가는 에스파냐뿐 아니라 세계에서도 가장 유명한 시인들 중 한 사람이지. 오비디우스의 우화를 몇 편 번역했는데, 정말 훌륭하더군.」(106∼116쪽)

 

 - 『돈키호테 1』, <우리의 기발한 이달고의 서재에서 신부와 이발사가 행한 멋지고도 엄숙한 검열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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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7-08-08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Oren님 글을 읽다보니 고구려 동천왕 당시 관구검의 침략으로 수많은 국서(國書)가 불탔다는 기록이 떠오릅니다. 진시황제의 분서갱유(焚書坑儒) 역시 마찬가지였겠지요... 많은 책이 상실되기 전(前)과 후(後)는 분명 단절된 세계로, 서로 달랐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이러한 연장선에서 ‘돈키호테‘의 모험 역시 이런 단절 이후 일어난 상황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책이 불타지 않았다면, 돈키호테의 모험에 대한 동기도 불붙지 않았을텐데 하는 생각 등등 입니다.... 분명 <궁극의 리스트>등 목록에 관한 책들은 움베르트 에코의 말처럼 ‘전화번호부‘를 읽는 것만큼 재미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다만, 우리가 전화번호부를 통해 교훈을 얻거나 감동을 얻으려는 목적으로 읽는 것이 아니듯, 우리의 소중한 이웃을 찾기 위한 목적으로 활용되듯이 ‘목록류‘의 책을 찾게 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봤습니다.^^: 책장 정리를 하셨으니, 마치 분갈이를 하신 듯 Oren님 책장이 싱싱해졌겠습니다. 다시 한 번 축하드립니다.

oren 2017-08-08 11:12   좋아요 1 | URL
돈키호테의 모험은 ‘준비가 덜 된 상태로‘ 갑작스럽게 시작된 면이 있지요. 처음엔 종자(從子)인 산초도 없이 홀로 떠났으니까요. 결국 며칠 만에 만신창이가 되어 기진맥진한 상태로 집으로 되돌아온 후에 미치광이 취급을 받게 되고, 자신이 아끼던 책들도 저렇게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불태워지지만 돈키호테의 확고한 신념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답니다. 자신이 읽은 책들은 이미 자신의 내면으로 흡수된 상태라고나 할까요. 달리 보면 ‘책을 통해 배운 지식‘을 뒤로 하고 직접 ‘행동‘으로 옮기는 초기 단계에서 일어난 하나의 작은 에피소드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돈키호테는 언제나 말보다 행동을 앞세우는 인물이고 불굴의 도전 정신을 지닌 인물이어서, 자신의 책들이 불에 타 없어지는 정도로는 결코 좌절할 인물이 아니었지요.

『궁극의 리스트』는 겨울호랑이 님의 말씀처럼 ‘내가 찾고자 하는 부분만 찾아 읽으면 그만인‘ 전화번호부를 무척 닮았다는 생각도 듭니다. 내가 찾고자 하는 ‘목록‘을 발견하면 몹시 기쁘지만, 그 나머지에 대해서는 도무지 관심이 가지 않는, 그런 묘한 양면성을 지닌 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cyrus 2017-08-08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궁극의 리스트》. 제가 알라딘 가입하면서 처음으로 구입한 ‘비싼 책‘입니다. 책에 인용된 저서와 문학 작품 대부분 생소해서 안 읽고 넘어간 것들이 많았습니다. 관심 있는 내용만 골라 읽었습니다. ^^

oren 2017-08-08 13:42   좋아요 0 | URL
『궁극의 리스트』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은 사람은 아마도 ‘교열 담당자‘ 밖에 없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들더군요. 앞으로도 가끔씩 저 책을 펼쳐 보긴 하겠지만 끝내 완독하지는 못할 ‘궁극의 책‘이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들고요. 아무튼 참 묘한 책입니다. 비싼 책이지만 계속 외면하기도 힘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