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유 관념(innate idea)과 빈 서판(tabula rasa)

 

겨울호랑이 님께서 여러 책들에서 인용해 주신 문장들 때문에 '본유 관념'과 '빈 서판' 이론뿐만 아니라 앙리 베르그송의 '철학'까지도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됩니다. 베르그송은 그의 주저인 『창조적 진화』에서 과학의 역할과 철학의 역할을 아주 흥미롭고도 명쾌하게 비교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대목들 가운데 이번에 겨울호랑이 님의 글 때문에 다시금 펼쳐 읽고 거듭 음미해 볼 만한 대목들을 '먼댓글 형식'으로 덧붙여 봅니다.

 

한가지 덧붙일 점은,『창조적 진화』의 제4장에서 겨울호랑이 님께서 인용해 주신 철학자들인 플라톤,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등이 아주 흥미롭게 다뤄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제4장은 '창조적 진화'의 본문 내용과는 사뭇 동떨어진 내용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마치 부록과도 같은 장인데, 제목이 <사유의 영화적 기작과 기계론적 환상 - 철학 체계들의 역사 훑어보기 / 실재적 생성과 잘못된 진화론>입니다. 각 소절(小節)의 제목들은 <존재와 무>, <생성과 형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근대 과학>, <데카르트> ,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 <평행론과 일원론>, <칸트의 비판>, <스펜서의 진화론>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분량은 대략 140쪽 정도 됩니다. 아카넷에서 나온 『창조적 진화』는 전체 분량이 598쪽으로 조금 두껍지만 '문장이 워낙 아름다워서' 아주 재미있게 읽을 수도 있습니다. 1907년에 출간된 이 작품으로 그는 1928년에 '과학을 담은 철학책'으로서는 아주 드물게 '노벨문학상'까지 받기도 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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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여기에 철학의 역할이 있는 것

 

…… 그러나 새로운 종의 생성에 대해 참인 것은 또한 새로운 개체의 생성에 대해서도 참이고, 일반적으로 생명체의 어떤 형태, 어떤 순간에 대해서도 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변이가 새로운 종을 생성하기 위해서 일정한 크기와 일반성에 도달해야 한다면, 그것은 각 생명체에서 매순간 연속적으로 보이지 않게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날 사람들이 말하는 돌연변이들 자체도 부화(孵化)의 작업 또는 차라리 숙성(熟成)의 작업이, 겉보기에는 불변적인 일련의 세대를 거쳐 이루어졌을 때만 가능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람들은 생명에 대해 의식과 마찬가지로 그것이 매순간 무언가를 창조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36)

 

생명의 진화가 빚어낸 우리의 지성은 행동을 조명하고, 우리가 사물에 대해 작용하도록 준비하며, 주어진 상황에 잇따르는 사건들의 유리함이나 불리함을 예측하는 것을 본질적 기능으로 한다. 따라서 지성은 한 상황에서 기지(旣知)의 것과 유사한 것을 본능적으로 분리해 낸다. 그것은 <동일한 것이 동일한 것을 낳는다>라는 자신의 원칙을 적용할 수 있도록 동일한 것을 찾는다. 상식적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바로 이런 과정 속에 존재한다. 과학은 이 작업을 가능한 한 최고도의 정확성과 엄밀성에 이르게 하지만 그것의 본질적 특성을 변화시키지는 않는다. 일상적 지식과 마찬가지로 과학은 사물로부터 반복의 측면만을 취한다. 모든 것이 독창적이라 해도 과학은 과거를 거의 유사하게 재생시키는 요소들과 국면들로 그것을 분석할 준비가 되어 있다. 과학은 반복된다고 간주되는 것, 즉 가정상 지속의 작용을 벗어나는 것 위에서만 작용할 수 있다. 한 역사의 잇따르는 순간들에서 환원불가능하고 비가역적인 것은 과학에 의해 포착될 수 없다. 이러한 환원불가능하고 비가역성을 표상하기 위해서는 사유의 근본적인 요구들에 부응하는 과학적 습관들과 결별해야 하며, 정신을 위반하고 지성의 자연적 경향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철학의 역할이 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생명이 우리의 목전에서 예측불가능한 형태의 연속적 창조처럼 진화한다고 해도 [지성에게는] 소용이 없다. 형태, 예측불가능성 그리고 연속성은 그만큼의 무지가 반영된 순수한 외양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언제나 남아 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상식에서 연속적인 역사로 나타나는 것은 잇따르는 상태들로 분해될 것이다. 당신에게 독창적 상태라는 인상을 주는 것은 분석하면 요소적 사실들로 분해되는데, 그것들 각각은 기지의 사실을 반복한 것이다. 당신이 예측불가능한 형태라고 부르는 것은 이전의 요소들을 새로이 배열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요소적 원인들의 전체가 이러한 배열을 결정하였으나, 그것들 자체는 이전의 원인이 새로운 순서로 반복되는 것이다. 그 요소들과 요소적 원인들을 알면 그것들의 총합이자 결과인 생명적 형태들의 윤곽을 미리 그려볼 수 있다. 현상의 생물학적 국면을 물리화학적 요소들로 분해한 후에 우리는 필요하다면 물리학과 화학 그 자체도 뛰어넘을 것이다. 우리는 물질 덩어리에서 분자들로, 분자들에서 원자들로, 원자들에서 미립자들로 갈 것이고, 결국 우리는 일종의 태양계처럼 천문학적으로 취급될 수 있는 어떤 것에 도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39) 만약 그것을 부정한다면 당신은 과학적 기계론의 원리 그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고, 생명적 물질이 다른 것과 동일한 요소들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고 독단적으로 선언하는 것이다 ── 우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할 것이다. 우리는 무기물과 유기물의 근본적인 동일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우리가 알아야 할 유일한 문제는 생명체라 불리는 자연적 체계를 과학이 무기물질에서 절단해 내는 인공적 체계와 동일시해야 하는가, 아니면 차라리 그것을 우주 전체인 이 자연적 체계와 비교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것이다. 생명이 일종의 기계장치라는 데에 나는 동의한다. 그러나 그것은 우주 전체 또는 실재 전체에서 인공적으로 고립될 수 있는 기계장치인가? 실제 전체는 하나의 불가분적 연속성일 수도 있을 것이라고 우리는 말한 바 있다. 그 때 우리가 거기서 절단해 내는 체계들은 엄밀히 말해 그것의 부분들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것들은 전체 위에서 취해진 부분적 외관들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부분적 외관들의 끝과 끝을 이어 맞추어 보아도 전체를 재구성하는 실마리조차 얻을 수 없다는 것은 한 대상의 사진들을 수천의 측면에서 겹쳐 찍어 보아야 본래서 물질성을 얻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생명을 물리화학적 현상들로 분해한다고 주장하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분석해 보면 아마도 유기적 창조의 과정에서 점점 더 많은 물리화학적 현상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물리학자들과 화학자들은 바로 거기서 멈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물리학과 화학이 우리에게 생명의 열쇠를 반드시 준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61∼66쪽)

 

36) 세아이유는 자신의 저서 『예술에서의 천재』에서 예술은 자연의 연장이며 생명은 창조라는 이중의 주장을 전개한다. 우리는 두 번째 정식(定式)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저작 말하듯이 창조는 요소들의 종합이라고 이해햐야 하는 것일까? 요소들이 이미 존재하는 곳에서 그것들로부터 이루어질 종합은 잠재적으로 주어져 있으며 가능한 배열 중 하니일 뿐이다. 초인간적 지성이라면, 이 배열을 그것을 둘러싸는 가능한 모든 것들 사이에서 미리 파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와 반대로 우리는 생명의 영역에서 요소들은 실재적이고 분리된 존재를 갖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것[샐재적이고 분리된 요소들의 존재]은 불가분적 과정에 대한 정신의 다양한 관점들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전진의] 과정 속에 극단적 우연성이 있고, 선행하는 것과 잇따르는 것 사이에 통약불가능성이 존재하며, 결국 지속이 있다.

 

39)(역주) 소립자 구조 안에서 일어나는 운동을 암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당시는 행성들이 태양 주위를 돌 듯 전자들이 원자핵 주위를 돈다는 양자 역학의 원자 모형이 나오기 이전이다.

 

 - 앙리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 <제1장> 생명 진화에 관하여, 기계론과 목적론

 

 

 

 

거대한 틈

 

…… 마지막으로 적충의 운동은 말할 것도 없고 아메바의 운동에 대한 물리화학적 설명은, 이 초보적 유기체를 자세히 관할한 많은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한 것으로 나타난다. 생명의 가장 미미한 형태들에서까지도 그들은 효과적인 심리적 활동성의 흔적을 파악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교훈적인 것은, 조직한적 현상들에 대한 연구가 심화될수록 모든 것을 물리화학적으로 설명하는 경향이 강화되는 대신 얼마나 자주 좌절하게 되는가 하는 것이다. 박물학자 윌슨이 세포의 발달에 바친 경탄할 만한 저서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요컨대 세포의 연구는, 생명의 가장 낮은 형태들조차도 무기계와 분리하는 거대한 틈을 좁히기보다는 넓히는 듯하다.>(71∼72쪽)

 

 - 앙리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 <제1장> 생명 진화에 관하여, 기계론과 목적론

 

 

 

 

충분히 독립적이지 않으며 충분히 고립되어 있지도 않다

 

…… 그러나 사실상 생기론의 입장이 매우 곤란해지는 것은 자연 속에는 순수하게 내적인 목적성도 없고 절대적으로 구분된 개체성도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개체를 구성하는 데 참여하는 유기적 요소들은 그 자체로 일정한 개체성을 가지고 있으며, 만약 개체가 자신의 생명 원리를 갖는다면, 그 요소들 역시 각각 자신의 생명 원리를 요구할 것이가. 그러나 다른 한편, 개체 그 자체는 우리가 그것에 고유한 <생명 원리>를 부여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독립적이지 않으며 [생명체의] 나머지로부터 충분히 고립되어 있지도 않다. 고등 척추동물과 같은 유기체는 모든 유기체들 가운데 가장 개체화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모체의 일부였던 난자와 부체(父體)의 일부였던 정자가 발달한 것에 불과하며, 알(즉 수정란)은 [부모 유기체의] 성분에 공통적이므로 부모 유기체 사이의 진정한 연결부라는 것을 주목한다면, 비록 인간의 경우리 하더라도 모든 개별적 유기체는 부모 유기체의 성분이 조합된 신체 위에서 자라난 단순한 싹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개체의 생명 원리는 어디서 시작하고 어디서 끝나는가? 점점 가까이 다가가 보면 우리는 가장 먼 조상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이고, 개체는 가장 먼 조상들 각자와 유대를 맺고 있으며, 어떠면 생명의 계통수의 근원에 있는 젤리 모양의 이 작은 원형질 덩어리와도 유대를 맺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개체는 어느 정도까지는 자신의 원시 조상과 일체를 이루고 있는 동시에 거기서부터 분산되어 내려오면서 분리된 모든 후손들과도 마찬가지로 유대를 맺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생명체 전체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목적성을 생명체의 개체성으로 좁혀 보아야 헛된 일이다. 생명계 안에 목적성이 있다면 그것은 생명 전체를 유일하고도 불가분적으로 한 아름에 포옹하는 것이다. 모든 생명체들에 공통적인 이 생명은 의심의 여지없이 많은 불일치와 많은 틈을 보여주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은 그렇게 하나인 것도 아니어서 각 생명체를 어느 정도까지는 개체화되도록 내버려 둔다. 그래도 역시 그것은 유일한 전체를 형성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그것은 목적성을 완전히 부정하거나, 아니면 한 유기체의 부분들을 유기체 자체와 조화를 이루도록 할 뿐만 아니라 각 생명체를 다른 것들 전체와 조화를 이루게 한다는 가설을 택하는 것이다.((82∼83쪽)

 

  - 앙리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 <제1장> 생명 진화에 관하여, 기계론과 목적론

 

 

 

 

응축된 것만큼 또는 그 이상으로 전체, 즉 유동체에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여전히 시간을 백지화하는 데서 일치하고 있다. 실재적 지속은 사물들을 갉아먹고 거기에 자신의 잇자국을 남기는 어떤 것이다. 만약 모든 것이 시간 속에 있다면 모든 것은 내적으로 변화하며, 동일한 구체적 실재는 결코 반복되지 않는다. 따라서 반복은 추상 속에서만 가능하다. 반복되는 것은 우리 감관, 특히 우리의 지성이 실재로부터 떼어낸 이러저러한 국면들이다. 우리 지성이 모든 노력을 집중하고 있는 행동은 반복들 속에서만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지성은 반복되는 것 위에 집중하고 같은 것을 같은 것에 접합시키는 데만 몰두해서 시간의 시야vision에 등을 돌린다. 지성은 흐르는 것을 혐오하고 자신이 접촉하는 모든 것을 고체화한다. 우리는 실재적 시간을 사유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체험한다. 생명은 지성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우리의 진화 그리고 순수 지속 속에 있는 모든 사물의 진화로부터 우리가 갖는 감정이 거기에 있어서, 이른바 지적 표상의 주위에, 밤 속으로 사라져 가는 불분명한 가장자리를 그린다. 기계론과 목적론은 중심에서 빛나는 핵만을 고려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그것들은 이 핵이 그 나머지[가장자리]가 응축에 의해 희생됨으로써 형성되었다는 것 그리고 생명의 내적 운동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응축된 것[핵]만큼 또는 그 이상으로 전체, 즉 유동체에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86∼87쪽)

 

  - 앙리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 <제1장> 생명 진화에 관하여, 기계론과 목적론

 

 

 

 

과학과 철학이 만나는 지점

 

사실상 단순한 크기의 변화와 형태 변화는 다른 것이다. 한 기관이 훈련에 의해 강해지거나 커진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반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로부터 연체동물의 눈과 척추동물의 눈과 같은 기관의 점진적 발달에 이르기에는 거리가 멀다. 이러한 결과를 수동적으로 받은 빛의 영향의 연장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우리가 방금 비판한 바 있는 주장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반대로 [여기서] 사람들이 내세우는 것이 진정한 내적 활동성이라면, 그 때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노력이라고 부르는 것과는 아주 다른 것이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노력이 기관의 최소한의 복잡화도 산출하는 것을 본 적은 없지만, 적충의 색소 얼룩에서 척추동물의 눈에 이르기까지는 서로 간에 놀랄 만큼 잘 조화된 막대한 양의 복잡화가 있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화 과정에 대한 이러한 개념을 동물에 대해서는 인정해 보자. 그것을 식물의 세계로 어떻게 확장시킬 것인가? 여기서 변이의 원인은 심리적 질서에 속한다면 그 말의 의미를 매우 확장하지 않고서는 그것을 여전히 노력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사실인즉 노력 자체를 파고들어가 더 심층적인 원인을 찾아야만 한다.

 

우리 생각으로 이러한 태도가 특히 요구되는 경우는 규칙적으로 유전되는 변이들의 원인에 도달하고자 할 때이다. 우리는 여기서 획득형질의 유전 가능성에 관한 세부 논쟁으로 들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하물며 우리의 역량에 속하지 않는 문제에서 명백한 입장을 취하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문제에 대해 완전히 무관심할 수는 없다. 이 문제만큼 오늘날 철학자들이 애매한 일반성에 머물러 있을 수도 없고, 과학자들의 뒤를 따라 세부 실험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결과를 논의해야 할 의무를 느끼는 것도 없다. 스펜서가 획득형질의 유전 문제를 먼저 제기하였다면 그의 진화론은 아마도 매우 다른 형태를 띠게 되었을 것이다. 만약 개체가 들인 습관이 아주 예외적인 경우에만 후손에게 전달된다면(우리에게는 이것이 그럴 듯한 일로 보이는데), 스펜서의 심리학 전체가 수정되어야 하며 그의 철학은 상당 부분 붕괴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문제를 어떻게 제기해야 하며 어떤 방향으로 그것을 해결할 수 있을지 말해보자.(130∼132쪽)

 

  - 앙리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 <제1장> 생명 진화에 관하여, 기계론과 목적론

 

 

 

 

획득형질의 유전

주지하다시피 라마르크는 생명체에게 기관의 용불용(用不用)에 의해 변화하는 능력과 이렇게 획득된 변이를 후손에게 전달하는 능력을 부여한 바 있다. 이와 유사한 종류의 학설에 오늘날에도 일정수의 생물학자들이 합류하고 있다. [그들에 따르면] 신종을 산출하기에 이르는 변이는 배 자체에 내재하는 우연변이가 아닐 수도 있다. 또한 그것은 유용성에 대해 아무런 고려도 하지 않고 일정한 방향으로 결정된 특성들을 전개시키는 고유한 결정론에 의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생존 조건에 적응하려는 생명체의 노력 자체에서 나오는 것일 수도 있다. 게다가 이러한 노력은 외적 환경의 압력에 의해 기계적으로 야기된, 특정한 기관의 기계적 훈련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의식과 의지를 내포할 수도 있는데, 이 학설의 가장 탁월한 대표자의 한 사람인 미국의 자연학자 코프Cope는 노력을 바로 그런 의미로 이해하는 것 같다. 그러므로 신라마르크주의는 비록 거기에 필연적으로 호소하는 것은 아니지만, 진화론의 현재적 형태들 전체에서 유일하게 진화과정의 내적이고 심리학적인 원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형태이다. 그리고 또한 그것은 서로 독립적인 발달선상에서 동일한 복잡한 기관들의 형성을 설명하는 것처럼 보이는 유일한 진화론이기도 하다.(130쪽)

사람들이 말하는 획득형질은 종종 습관이거나 습관의 결과이다. 그리고 길들여진 습관의 기초에 자연적 성향이 없는 경우는 드물다. 따라서 유전된 것이 개체의 soma이 획득한 습관인지 아니면 차라리 길들여진 습관에 앞서 있는 자연적 성향은 아닌지 항상 자문할 수가 있다. 이 성향은 개체가 자신 안에 보유하고 있는 germen에 내재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마치 그것이 개체에, 즉 배에 이미 내재적인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두더지가 앞을 못 보게 된 것은 그것이 땅 밑에서 사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은 전혀 증명되지 않는다. 아마도 두더지가 지하 생활을 할 운명에 처한 것은 그것의 눈이 쇠약해지는 과정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경우 시력을 잃는 경향은 두더지 자체의 신체의 의해 획득된 것도 잃은 것도 없이 배에서 배로 전달될 것이다. 검술 사범의 아들이 아버지보다 훨씬 더 빨리 탁월한 검술사가 되었다고 해서 부모의 습관이 아이에게 전달되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왜냐하면 증가하는 도상에 있는 어떤 자연적 성향들이 아버지를 낳은 배에서 아들을 낳은 배로 넘어가 원초적 약동의 결과로 도중에서 커지고 아버지가 했던 것과는 상관없이 아들에게 아버지의 것보다 더 큰 유연성을 확보해 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동물의 점진적 길들이기에서 나오는 많은 예들에 대해서도 그와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유전되는 것이 길들여진 습관인지 아니면 오히려 어떤 자연적 성향이 아닌지는 알기 어렵다. 이러한 성향이야말로 길들이기 위해 이러저러한 특수한 종이나 그것의 어떤 대표자들을 선택하게끔 한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132∼134쪽)

* (역주) 획득형질의 유전이 완전히 부정된 것은 20세기 중반 무렵이다. 여기서 베르그손은 아직 논쟁 중인 당대의 모든 실험과 가설을 검토함으로써 획득형질의 유전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에 서고 있다.

 

  - 앙리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 <제1장> 생명 진화에 관하여, 기계론과 목적론 


  

 

일탈의 유전과 형질의 유전

그러므로 우리는 일탈(逸脫
)의 유전과 형질의 유전을 구분할 것을 제안한다. 새로운 형질을 획득하는 개체는 이로써 자신이 가지고 있던 형태로부터 그리고 자신이 보유한 배들 또는 종종 반쪽의 배들이 발달하면서 재생하였을 혀애로부터 일탈한다. 이 변형[일탈]으로부터 배를 변형시킬 수 있는 물질이 산출되지 않거나 영양의 공급이 전반적으로 변질되어 배의 요소들중 어떤 것들이 결핍되지 않는다면, 그 변형은 개체의 후손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을 것이다. 아마 그와 같은 일이 가장 자주 일어날 것이다. 반대로 변형이 어떤 결과를 낳는다면 그것은 아마 생식질에서 야기되는 화학적 변화를 매개로 해서일 것이다. 이 화학적 변화는 배가 발달시킬 유기체 안에 예외적으로 본래의 변형을 일으킬 수는 있지만, 그것과 다른 것을 만들어 낼 기회가 그에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더 많다. 이 후자의 경우 자식 유기체는 부모 유기체만큼이나 정상적 유형으로부터 일탈할 수 있겠지만, 그 일탈은 [부모 유기체와는] 상이하게 일어날 것이다. 자식 유기체에게 유전되는 것은 일탈이지 형질이 아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한 개체가 들인 습관들은 자기 자손에게 아무런 반향도 불러일으키지 않는 듯하다. 그리고 반향이 있을 때는 자손들에게 생겨난 변형은 본래의 변형과 아무 유사성도 갖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이 우리에게 가장 그럴 듯하게 보이는 가설이다. 어쨌든 반증이 있기까지는 그리고 뛰어난 한 생물학자가 요구하는 결정적 실험이 확립되지 않는 한 우리는 현재까지의 관찰 결과에서 멈출 수밖에 없다. (138∼139쪽)

 

  - 앙리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 <제1장> 생명 진화에 관하여, 기계론과 목적론  

 

 

 

 

생명의 도약

 

우리는 이리하여 먼 우회를 통해 우리가 출발했던 생각으로 되돌아왔다. 그것은 배와 배 사이에서 연결부를 형성하는 성체를 매개로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경과하는 생명의 근원적 약동élan originel이라는 생각이다. 이 약동은 진화의 여러 노선들로 나뉘어 그 위에서 보존되면서 적어도 규칙적으로 유전되고 서로 참가되어 신종을 창조하는 변이들의 심층적 원인이 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종들이 공통의 뿌리에서 분기하기 시작하면, 그러한 분기는 진화를 향해 전지하면서 가속화된다. 그러나 공통적 약동의 가설을 받아들이면 그것들은 일정한 지점 위에서 동일하게 진화할 수 있고 심지어는 그럴 수밖에 없다. 이를 우리가 선택한 예, 즉 연체동물과 ㅓㄱ추동물의 눈의 형성이라는 예를 바탕으로 더 정확한 방식으로 보여주는 일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 <원초적 약동>이라는 생각은 또한 그렇게 해서 더욱 명확하게 될 것이다.

 

  - 앙리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 <제1장> 생명 진화에 관하여, 기계론과 목적론, <생명의 도약 Elan vital> 

 

(나의 생각)

이 대목은 앙리 베르그송 철학의 핵심을 이루는 '엘랑 비탈'이다. 이 절(節)은 약 14쪽에 걸쳐 설명되고 있다.

욕심 같아서는 전재(全載)하고 싶지만 이미 다른 부분들을 인용한 것만으로 너무 길고 충분하다 싶어 생략한다.

 

 

 

 

과학의 관점과 철학의 관점 

 

제작된 작품은 제작이라는 작업의 형태를 그린다. 내 말은 제작자가 작업에 투입한 것을 자기의 작품에서 재발견한다는 의미이다. 그가 기계를 만들려고 한다면 부품들을 하나하나 잘라 내고 나서 그것들을 조립할 것이다. 만들어진 기계는 부품들과 그것들의 조립을 다 보여준다. 결과의 전체는 여기서 작업의 전체이며 작업의 각 부분에 결과의 한 부분이 상응한다.

 

이제 나는 실증과학은 유기화 작업을 마치 [제작의] 작업과 같은 종류인 것처럼 진행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러한 조건에서만 그것은 유기체들에 효력을 가질 것이다. 실제로 과학의 목적은 우리에게 사물의 근본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에 작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런데 물리학과 화학은 이미 진보된 과학들이며, 생명체는 우리가 그것을 물리학과 화학의 과정으로 취급할 때에만 우리의 작용에 부응한다. 따라서 유기화 작업은 유기체가 우선 기계와 동일시되었을 때만 과학적으로 연구될 수 있다. 세포들은 기계의 부품들이며 유기체는 그것들의 집합이다. 그리고 부분들을 유기화한 요소적 작업들은 전체를 유기화한 작업의 실제적 요소들로 관주될 것이다. 과학의 관점은 바로 그러하다. [그러나] 우리의 견해로는 철학의 관점은 아주 다르다.

 

우리 생각에 유기화된 기계 전체는 유기화하는 작업의 전체를 엄밀하게 재현한다(비록 그것은 근사적으로만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러나 [여기서] 기계의 부분들은 그 작업의 부분들에 상응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기계의 물질성은 더 이상 사용된 수단들의 전체가 아니라 극복된 장애물의 전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적극적인 실재라기보다는 부정이다. 그러무로 우리가 이전의 연구에서 제시한 바 있듯이 시각은 권리적으로는en droit 우리의 시선이 접근할 수 없는 무한한 것들에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잠재력이다. 그러나 그러한 시각은 행동으로 연장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생명체가 아니라 유령에 적합할 것이다. 생명체의 시각은 작용할 수 있는 대상들에 한정된, 유효한 시각이다. 그것은 <운하로 집중된> 시각이고, 시각기관은 단지 운하 파기 작업을 상징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시각기관의 창조는 그 해부학적 요소들의 집합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흙의 퇴적이 운하의 둑을 만들지도 모르지만 운하를 파는 것은 그것으로 설명이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기계론적 주장은 흙이 한 수레씩 운반되었다고 말하는 것으로 구성될 것이다. 목적론은 흙이 아무렇게나 쌓이지는 않았으며 수레꾼이 하나의 계획을 따랐다고 덧붙일 것이다. 그러나 기계론과 목적론은 둘 다 잘못 알고 있다. 운하는 이와 다르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해서 우리는 자연이 눈을 만드는 절차를 우리가 손을 드는 단순한 행위에 비교했다. 그러나 우리는 손이 아무 저항도 받지 않을 것이라고 가정했다. 내 손이 공기 속에서 움직이는 대신에 내가 앞으로 나아감에 따라서 압축되고 저항하는 쇳가루더미를 관통하고 있다고 상상해 보자. 어떤 순간에 내 손은 그 노력을 고갈하게 될 것이고 바로 이 순간에 쇳가루의 낟알들은 일정한 형태로 병렬되고 조정될 것이다. 이 형태는 멈추어 버린 손과 팔의 일부 형태 자체일 것이다. 이제 손과 팔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남아 있다고 가정해 보자. 구경꾼들은 그것들의 배열의 근거를 쇳가루들 자체에서 그리고 그 더미 안에 있는 힘들에서 찾으려고 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각 쇳가루의 위치를 그 옆의 것들이 그것에 행사하는 작용에 관련시킬 것이다. 그들은 기계론자들이다. 다른 사람들은 전체의 계획이 이 개체의 작용들의 세부까지 지배하기를 바랄 것이다. 그들은 목적론자들이다. 그러나 진실은 단지 쇳가루더미를 관통하는 손의 불가분적 행위만이 있었다는 것이다. 쇳가루들의 운동의 끝없는 세부 및 그것들이 최종적으로 배열된 질서는 이 불가분적 운동을 말하자면 부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며, 저항의 가시적 형태이지 적극적인 개개의 작용들의 종합이 아니다. 그 때문에 쇳가루들의 배열에 <결과>라는 이름을 주고 손의 운동에 <원인>이라는 이름을 준다면, 엄밀히 말해 결과의 전체가 원인의 전체에 의해 설명되는 것이지 결과의 부분들이 원인의 부분들에 대응하는 것은 전혀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기계론도 목적론도 여기서 자신들의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어떤 고유한 설명 방식에 호소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제안하는 가설에서 시각과 시각기관의 관계는 거의 손과 쇳가루더미의 관계와 같은데, 쇳가루 더미는 손의 운동을 그려내고 운하를 트고 한정하는 것이다.

 

손의 노력이 현저할수록 그것은 쇳가루더미의 내부로 더욱 멀리 간다. 그러나 그것이 멈추는 곳이 어디든 간에 순간적으로 그리고 자동적으로 쇳가루들은 평형을 이루고 서로 간에 조화를 이룰 것이다. 시각과 그 기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시각을 구성하는 불가분의 행위가 다소간 멀리 전진함에 따라 기관의 물질성도 상호 조정된 다소간의 상당한 요소들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질서는 반드시 완전무결하다. 그것은 부분적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것을 낳은 실재적 과정은 부분들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그 점을 기계론도 목적론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우리도 눈과 같은 기관의 경이로운 구조에 놀라워할 때 거기에 주의하지 않는다. 우리의 놀라움의 근저에는 언제나 이 질서의 한 부분만이 실현될 수 있었을지 모르고 그것의 완벽한 실현은 일종의 은총이라는 생각이 있다. 목적론자들은 이러한 은총을 목적인에 의해 단번에 스스로에게 면제해 준다. 기계론자들은 그것을 자연선택에 의해 조금씩 얻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양쪽 다 이러한 질서에서 무언가 적극적인 것을 보고 따라서 그 원인에서는 완성 가능한 모든 정도를 포함하는 분할 가능한 어떤 것을 본다. 사실상 그 원인은 다소간 강도를 갖지만 단번에 그리고 완성된 방식으로만 결과를 산출할 수 있다. 그 원인이 시각의 방향으로 다소간 멀리 나아갈수록 그것은 하등 유기체의 단순한 색소 덩어리나 세르폴라(환형동물의 일종 ㅡ 옮긴이)의 이미 분화된 눈이나 조류의 놀랄 만큼 완성된 눈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매우 불균등한 복잡성을 가진 이 모든 기관은 반드시 동등한 조화를 나타낸다. 그 때문에 두 동물종이 서로 간에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해도 상관없다. 그 각각에서 시각을 향한 진행이 똑같이 멀리 가면 양측에는 동일한 시각기관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기관의 형태는 기능의 행사가 획득된 정도를 표현할 뿐이기 때문이다.(151∼155쪽)

 

  - 앙리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 <제1장> 생명 진화에 관하여, 기계론과 목적론, <생명의 도약 Elan vital> 

 

 

 

 

덧붙임)

 

『창조적 진화』를 읽으면서 제가 몹시 흥미를 느낀 부분은 특히 '획득 형질의 유전'을 다룬 부분이었답니다. 소위 '라마르크의 용불용설'과 관련된 이야기인데, 이 책이 출간된 1907년 까지만 하더라도 '라마르크 학설'이 타당한지 잘못되었는지에 대해서 논란이 분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점은 베르그송보다 훨씬 이전의 철학자였던 쇼펜하우어가 이미 그 학설의 잘못된 점을 아주 예리하고도 명쾌하게 밝혀 놓았다는 점입니다. http://blog.aladin.co.kr/oren/6067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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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7-08-01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oren님께서 소개해주신 글 속의 베르그송은 세계를 움직이는 힘을 다루는 ‘물리‘와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인 ‘화학‘을 시간과 공간의 장 속에서 철학을 통해 ‘사고실험‘을 한 철학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시대를 앞서간 베르그송과 같은 이들이 있었기에, 철학은 과학에게 길을 제시하는 과업을 부여받았다는 oren님 말씀이 더 와닿습니다. oren 님 글을 읽다보니 베르그송의 사상이 쉽지 않겠지만, 하루빨리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되네요. oren님 훌륭한 철학자의 사상을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oren 2017-08-02 00:20   좋아요 1 | URL
베르그송은 ‘철학‘을 전공한 철학자였지만,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포함한 어학과 문학에도 소질이 많았고, 수학, 물리학, 생물학 등 여러 분야의 과학에서도 아주 뛰어난 인물이었죠. 철학 중에서는 고대 그리스 철학, 그 가운데서도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에 정통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철학 중에서도 특히 ‘공간‘과 ‘시간‘에 대해서 자신만의 탁월한 경지를 개척할 수 있었던 듯합니다.

겨울호랑이 2017-08-02 07:12   좋아요 0 | URL
서양철학자 중 많은 이들이 그리스 철학에 정통함을 알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화이트헤드가 ‘서양 철학은 플라톤에 대한 일련의 각주‘라고 말한 것이 무리가 아님을 생각하게 되네요^^:

oren 2017-08-02 12:04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그렇게나 많은 철학자들이 아무리 기를 쓰고 ‘철학‘을 연구해도 결국 플라톤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점이 플라톤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셈이죠. 그리스는 위대한 철학자만 배출한 게 아니라 문학이나 역사, 건축과 조각 등 조형예술 분야에서까지도 두루 빛나는 금자탑들을 쌓아 놓았으니 생각할수록 놀라울 따름입니다. 그 까마득한 옛날에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