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책들에서 나온 『돈키호테 1』은 781쪽,『돈키호테 2』는 927쪽, 들러리로 나선『평생독서계획』은 512쪽)
올해는 소설 『돈키호테』의 속편이 출간된지 꼭 400년째 되는 해이다. 그러다 보니 이 놀라운 작품에 대한 관심이 예년보다는 분명 더 높아질 듯한 성급한 예감도 조금은 든다. 특히나 작년 연말쯤 전편과 속편을 1,2권으로 나눠 출판한 '열린책들' 판본은 세르반테스의 걸작 소설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데 크게 기여할 듯하여 독자의 한사람으로서도 괜히 고맙고 기쁜 생각부터 앞선다.
이 뛰어난 소설을 읽는 데 장애가 될 만한 요소는 이제 거의 다 사라졌다.(책의 외관만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듯이 방대한 분량이 적지 않은 부담을 주는 건 분명한 사실이지만.) 종전에 나와 있던 시공사판 『돈키호테』도 물론 번역이 훌륭하고 충실한 주석들이 적지 않아 '스페인 소설의 백미'로 꼽히는 이 작품을 즐기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나, 그 책은 결정적으로 1605년에 나온 '돈키호테의 전편'만 번역해 놓은 한계점이 있었다. 다행히 그 책을 번역하신 분이 전편을 내놓은 지 10년 만이자 돈키호테 후편이 출간된지 400주년이 되는 올해 봄에 마침내『돈키호테』의 후편까지 마저 출간할 예정이라고 하니,『돈키호테』를 시공사판으로 '전편'만 읽은 독자들은 똑같은 역자가 내놓을 후편을 마저 읽는 계기로 삼아도 좋겠다 싶다.
시공사판과 열린책들판을 서로 비교할 생각에서 이 글을 쓰는 게 아닌 만큼, 곧장 내가 하고 싶은 얘기로 관심을 돌리면 그건 바로 두 출판사에서 약속이나 한 듯이 똑같이 실어 놓은 귀스타브 도레의 '삽화'이다. 그 유명한 화가의 삽화는 이 걸작 소설에 필수불가결한 요소처럼 따라다닌 지 이미 오래다. 마치 단테의 『신곡』을 읽는 사람들이 윌리엄 블레이크의 그 유명한 삽화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말이다.
귀스타브 도레는 1832년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에서 태어나 미술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채 성장했으나, 15세의 나이에 그린 스케치로 파리 출판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특히 그가 그린 『돈키호테』의 삽화는 그 생생한 묘사력으로 극찬을 받았다. 그의 세밀한 터치에 피카소마저 매혹되었으며, 반 고흐는 <최고의 민중 화가>라 그를 칭송하기도 했다. 도레가 그린 『돈키호테』의 여러 인물들은 그 생김새와 상황에 대한 뛰어난 묘사가 아우러져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는 것만 같은 착각까지 불러일으킨다.
- 귀스타브 도레 그림, 안영옥 옮김『그림으로 읽는 돈키호테』중에서
소설『돈키호테』를 다 읽어보지 못한 사람이라도 귀스타브 도레가 그린 그림만은 어쩌면 한번쯤 봤을지 모르겠다. 그가 그린 유명한 그림 가운데 하나가 바로 돈키호테와 로시난테, 산초 판사와 당나귀(소설의 후반부에 이르면 산초는 그를 그저 '잿빛'이라고만 부른다.)를 함께 그린 다음의 그림이다.
분명 처음 보는 낯선 그림은 아닌데 싶은 생각이 드는 분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 그림은 물론 돈키호테의 전편에 나오는데 이 글을 계속 읽을 사람이라면 한번쯤 그림에 딸린 '설명글'까지도 눈여겨 봐둘 필요가 있다. 지극히 현실적이고 이해타산에 빠른 돈키호테의 종자(從者) 산초가 주인 나리를 그토록 충실하게 따르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모험이 성공하면 자네가 통치할 섬을 하나 떼주겠다'는 천금같은 약속 때문이었고, 그들 사이에 맺은 약속이 어떤 식의 결말을 맺으며, 그 즈음 산초는 과연 어떤 모습을 보여주는지가 바로 내가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서로의 필요에 따라 그렇게 의기투합한 두 인물은 익히 알려진 대로 성격이 너무나 판이하게 다르다. 돈키호테는 언제나 모험과 이상을 꿈꾸며 물불을 가리지 않고 자신이 믿고 생각하는 대로 곧장 '현장 속으로' 돌진하며 뛰어든다. 서양 문학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상징적 인물이 바로 돈키호테임을 누가 모를까. 그는 햄릿과는 정반대의 성격으로 '무모함의 대명사'가 된 지도 벌써 400년이나 된 인물이다. 그에 반해 그를 따르는 산초 판사는 언제나 '지극히 현실적'이다. 자신의 눈 앞에 빤히 보이는 이익과 손실 앞에서는 두뇌회전이 놀랍도록 빠르게 돌아가지만 조금만 더 멀리 떨어진 미래까지를 포함한 '장기 전망'에 대해서는 지극히 눈이 어두운 인물이다. 그는 그저 오늘 등따습고 배부른 걸 최고로 여긴다. 그런 두 인물이 '편력 기사의 모험'을 오랫동안 함께 했으니 웃어야 좋을지 울어야 좋을지 분간조차 하기 어려운 수많은 일들이 벌어질 게 너무나 뻔하다. 게다가 돈키호테는 '기사도 소설'을 너무 많이 읽는 바람에 이미 소설과 현실조차 제대로 분간할 줄도 모르는 반쯤 미쳐버린 인물로까지 묘사되고 있으니 이 이야기가 얼마나 기가 막히고 놀라울지는 새삼스레 길게 얘기할 필요도 없다.
그런 돈키호테에게 풍차가 거인으로 보이고 양떼가 군대로 보이고 객줏집이 성으로 보인다고 한들 이상할 게 조금도 없는 셈이다. 물론 그런 황당한 시츄에이션에 꼭 함께 끌려가는 산초는 늘 '이게 도대체 뭐냐고요.'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닐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 상황을 묘사한 숱한 그림들 가운데 하나를 예로 들자면 바로 다음의 그림이다.
그런데 이런 황당하고도 기발한 중세 기사를 흉내낸 모험담이 도대체 왜 그토록 문학사에서 높은 위치를 차지하는 작품이 된 것일까. 그런 평가를 제대로 실감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아주 꼼꼼하게 읽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될지 모르겠다. 나로서도 이 소설을 다 읽기 전까지는 도대체 그런 평가가 왜 나오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깊이 음미하면서 온전히 다 읽어 보면 이 속에 정말 놀라운 이야기가 숨겨져 있음을 차츰 깨닫게 되고, 나중엔 정말 엉엉 울어버릴 정도로 사람의 내면을 깊디깊게 파고드는 정말 대단한 소설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저 읽는 내내 황당하고, 무모하고, 기발하고, 놀라우며, 재미있고, 안쓰럽고, 웃기기만 하던 소설이 어떻게 후반부로 점점 더 다가갈수록 그렇게나 놀라운 '우리들의 이야기'로 바뀔 수 있는지, 그래서 왜 이 작품을 '인간 최대의 희극이자 비극'이라고 말하는지를 깨닫게 되면 이런 놀라운 소설을 그려낸 작가 세르반테스라는 인물에 대해 경외심마저 느끼게 된다.
전편이 출판되고 10년이 지난 1615년, 돈키호테가 한 달간 집에서 요양하다가 세 번째로 집을 나서는 내용으로 속편 『기발한 기사 돈키호테 데 라만차』가 출판된다. 돈키호테와 그의 종자 산초가 한 일이 책으로 출판되어 세간의 호평을 받고 있으며, 이제 세상 사람들 모두가 이 두 사람에 대해 알고 있다는 전제하에 이야기는 시작된다. 마술적 사실주의의 시작이 된 허구와 현실의 문제, 상호 텍스트성 및 관점의 차이와 존재와 언어의 불일치에 따른 독자 비평으로의 초대 등, 현대 문학론의 싹이 전편에서와 같이 속편에서도 움트고 있다. 전편을 통해 이들을 알게 된 공작 부부가 주변 사람들과 함께 이 두 주인공을 가지고 집요하게 장난을 치고, 이런 장난과 더불어 돈키호테를 고향으로 데리고 가기 위한 삼손 카라스코 학사의 끈질긴 추적이 이어진다. <하얀 달의 기사>에게 패배하여 모험에 종지부를 찍게 되는 돈키호테의 최후는 현실 앞에서의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생각해 보게 한다.
- 귀스타브 도레 그림, 안영옥 옮김『그림으로 읽는 돈키호테』중에서
그런데 나는 이 소설을 거의 다 읽어 갈 무렵까지도 좀처럼 속시원히 드러나지 않는 '한 가지' 때문에 미칠 지경이었는데, 그건 바로 이토록 흥미로운 두 인물인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의 '자세한 얼굴 표정'을 한 번도 제대로 구경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왜 귀스타브 도레는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의 '자세한 얼굴'을 도무지 내놓을 줄 모르는 것일까. 혹시 무슨 다른 꿍꿍이라도 있는 건 아닐까. 혹시라도 나처럼 이 두 인물의 '자세한 몰골'을 몹시 궁금해 하는 독자가 있을지도 모르니 그걸 일부러라도 꼭꼭 숨겨 놓아야지... 하는 그런 고약한 심보로 나같은 독자들을 골탕먹일 속셈으로 그러는 건 아닐까 싶은 생각을 정말 한동안 떨쳐내기 힘들었다.
『돈키호테』속편이 출간된 지 250여 년이 지난 1863년, 프랑스의 저명한 삽화가 귀스타브 도레가 그린 『돈키호테』의 삽화는 현재까지 그려진 『돈키호테』의 삽화 중 가장 세밀하고도 유명한 삽화가 되었다. 그가 생전에 남기고 간 190여 점의 『돈키호테』돈키호테 삽화 중 본 책에는 1백 점의 삽화를 수록했다.
- 귀스타브 도레 그림, 안영옥 옮김『그림으로 읽는 돈키호테』중에서
어떻게 그 많은 그림들 가운데 돈키호테와 산초의 얼굴 표정을 '보란듯이' 시원스럽게 그려놓은 그림은 이토록 찾기가 어렵단 말인가. (이 책을 앞에서부터 차근차근 읽어 나간 나같은 우직한 독자들만이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앞에서 소개한 두 그림뿐 아니라 이 책에 실린 거의 대부분의 그림들이 정말 놀랍도록 한결같이 그 두 사람의 얼굴을 교묘하게 감추기 일쑤여서 나같은 독자들의 갈증을 속시원히 만족시켜주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런데 그런 오랜 궁금증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는듯이, 마침내 그 화가는 우리의 두 주인공을 큼지막하게 그린 그림들이 '잇따라' 내놓았으니 그 첫 번째 그림이 바로 다음의 그림이다.(당연한 얘기지만 그 반가운 그림들을 발견한 때는 물론 이 소설이 거의 다 끝나갈 무렵이었고, 그리 멀지 않은 시간에 어쩔 수 없이 이 두 주인공과 슬픈 결별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는 걸 조금씩 느끼기 시작하면서 '웃음'보다는 '슬픔'이 점점 더 크게 밀려올 무렵이었다.)
나같은 독자의 '감정의 기복'까지도 귀스타브 도레는 일부러 고려했던 것일까. 어쨌든 그 두 인물이 크게 클로즈업된 그림들은 결국 '너무나도 슬픈 몰골'로 나타났다. 다음과 같은 모습으로 말이다.
이 얼마나 가엾은 몰골인가. 안 그래도 그에게는 '슬픈 몰골의 기사'라는 별명이 늘 붙어 다니는 처지인데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나 만신창이가 된 처지로 침대에 누워 지내면서도 그는 여전히 '놀라운 상상'을 그칠 줄 모르니, 그 이야기를 잠깐만이라 살펴 보기 위해 나는 세르반테스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여기까지 직접 끌고 왔다.
형편없이 부상을 당한 돈키호테는 신의 손도 아니고 고양이 발톱에 할퀸 자국 때문에 얼굴에 붕대를 감은 채 아주 슬프고도 우울하게 지내고 있었으니, 편력 기사로 지내다 보면 이러한 불행도 따르기 마련이다. 그는 엿새 동안이나 사람들 앞에 나가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자기의 불운과 알티시도라의 집요한 구애를 생각하면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있을 때, 누군가 열쇠로 자기 방문을 여는 듯한 기척을 느꼈다. 그 순간 그는 사랑에 빠진 처녀가 자신의 귀부인 둘시네아 델 토보소를 위해 지켜야만 하는 그의 정절을 급습하여 믿음을 지키지 못하게 할 상황으로 몰아넣으러 온 것이라고 상상했다. (589쪽)
- 『돈키호테 2』, <48 돈키호테와 공작 부인의 과부 시녀 도냐 로드리게스에게 일어난 일과 기록으로 남겨 영원히 기억할 만한 다른 사건들에 대하여>
그날밤 자신의 방으로 찾아온 여인은 엉뚱하게도 자신에게 구애하던 알티시도라가 아니라 과부 시녀 도냐 로드리게스였다. 그 두 사람과의 '오밤중 대화'도 '기억할 만한 코미디'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다음의 인용문을 보며 웃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우리 아무 일 없는 거죠, 기사 나리? 나리께서 침대에서 일어나 계신 게 그리 점잖은 것으로 생각되지 않아서 말이에요.」
「바로 내가 묻고 싶은 말입니다, 부인,」돈키호테가 대답했다. 「그래서 묻소만, 내가 기습을 당한다거나 강간을 당하거나 하는 일은 없겠지요?」
「누구로부터요? 아니, 누구에게 그에 대한 대답을 요구하시는 겁니까, 나리?」과부 시녀가 되물었다.
「당신에게, 그리고 당신으로부터 구하는 겁니다.」돈키호테가 대답했다. 「나는 대리석으로 된 인간이 아니고, 당신 또한 청동으로 된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오전 10시도 아니고 한밤중인 지금, 아니 내 생각에는 한밤중보다 조금 더 된 야심한 이 시간에, 배신자이자 무모했던 아이네이아스가 아름답고 인정 많은 디도를 취했던 동굴도 분명 그러했을, 아니 그보다 더할 정도로 밀폐되어 있고 은밀한 방 안에 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부인, 그 손을 주시지요. 내가 가장 믿어야 할 것은 다름 아닌 바로 나의 자제력과 신중함, 그리고 당신의 공경스럽기 그지없는 그 두건이 보장해 주는 안전함입니다.」(593∼594쪽)
- 『돈키호테2』, <48 돈키호테와 공작 부인의 과부 시녀 도냐 로드리게스에게 일어난 일과 기록으로 남겨 영원히 기억할 만한 다른 사건들에 대하여>
그런데 나는 돈키호테의 이야기를 이토록 길게 계속 이어나갈 형편이 되지 못한다. 우리의 불쌍한 산초에 대한 얘기를 결코 빼놓을 수 없으니 말이다. 이제는 '통치 일을 열심히, 그리고 아주 재치 있게 하고 있는 산초 판사를 보러' 가 보자.
이 기나긴 이야기의 장면은 수도 없이 바뀌고 또 바뀌어 마침내 산초에게도 '진짜로 섬을 통치할 기회'가 주어진다. 물론 이 모든 것이 공작 부부가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를 놀리기 위해 꾸며낸 거대한 연극의 일부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드디어 섬의 통치자로 부임한 산초 판사는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을 못할 정도가 되었지만 제법 훌륭하게 '통치자'의 역할을 너끈하게 수행해 낸다. 그가 마침내 그토록 소원이었던 '섬의 통치자'로 부임하게 된 사실을 고향에 두고 온 자신의 아내에게 재빨리 알렸음은 '당근'이니 세세한 이야기는 모두 생략하고 훌쩍 건너뛰는 대신에, 그의 소식과 편지를 읽은 아내가 쓴 답장 일부부터 소개하면 이렇다.
테레사 판사가 남편 산초 판사에게 보내는 편지
내 영혼의 주인인 산초 여보, 당신 편지를 받고 어찌나 좋았는지 내가 미쳐 돌아 버릴 것 같았다는 걸,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인으로서 당신께 약속하고 맹세해요. 여보, 당신이 통치자라는 말을 들었을 때 정말 기뻐서 그 자리에 그냥 거꾸러져 콱 죽어 버리는 줄 알았다니까요. 당신도 알다시피 큰 슬픔과 마찬가지로 갑작스러운 기쁨도 사람을 죽인다고들 하잖아요. 당신 딸 산치카는 그저 좋아서 그만 자기도 모르게 오줌을 싸버렸어요. 나는 당신이 내게 보낸 옷을 앞에 두고, 공작 부인 마님께서 내게 보낸 산호 묵주를 목에 걸고, 편지는 손에 쥐고, 그 편지를 가지고 온 사람이 내 앞에 있는데도, 그러고도 내가 보고 만지는 게 모두 끔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믿었다니까요. 글쎄 산양이나 치던 목동이 섬의 통치자가 될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할 수 있었겠느냐고요. 당신도 알다시피 많은 일을 보려거든 오래 살고 볼 일이라고 우리 엄마가 말씀하시곤 했지요. 더 오래 살다 보면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하니 이제 그 말을 내가 하게 되네요. ···
올해 올리브 농사는 형편없는 데다, 온 마을을 뒤져도 식초 한 방울이 없어요. 보병 부대 하나가 이 마을을 지나가면서 그 길로 마을 처자 세 명을 데려가 버렸고요. 누구누구인지는 말하지 않겠어요. 아마도 돌아올 거고, 흠이 있든 없든 아내로 맞이할 사람도 있을 테니까요.
산치카는 레이스 장식을 뜨고 있어요. 매일 꼭 8마라베디를 버는데 자기 시집갈 때 보탠다고 저금통에 넣고 있어요. 하지만 이제는 통치자의 딸이 되었고 당신이 지참금을 줄테니 걘 일할 필요가 없어졌지요. ···
당신의 아내
테레사 판사
(651∼654쪽)
그런데 나는 돈키호테의 슬픈 몰골에 '잇따라' 산초 판사의 몰골이 나온다는 얘기를 결코 잊은 게 아니다. 산초 판사의 '슬픈 몰골'을 마저 보기 위해 나는 조금만 더 참아 달라고 부탁할 참이다. 이런 쓸데 없는 이야기로 내 글이 좀처럼 마무리될 기색이 보이지 않더라도 너무 답답해 하지 말아 달라. 이 글의 끝도 그리 멀지 않았다. 이쯤에서 작가 세르반테스의 얘기를 다시 한번 더 들어 보자.
삶에 있어서 모든 것이 늘 같은 상태로 지속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부질없는 짓이다. 오히려 삶은 모두 원을 그리며 흘러가는 듯하다. 말하자면 중심에다 한 점을 놓고 그 주위를 빙글빙글 도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봄은 여름을 추적하고, 여름은 한여름을 추적하며, 한여름은 가을을 추적하고, 가을은 겨울을, 그리고 겨울은 봄을 추적하니, 이렇게 세월은 멈출 줄 모르는 바퀴를 타고 구르고 또 구른다. 단지 인간의 목숨만이 세월보다 더 가볍게 그 종말을 향해 치닫는다. 다시 시작해 볼 희망도 없이 말이다. ··· 하지만 여기 우리의 작가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산초의 통치가 순식간에 끝나 소멸되고 붕괴되어 그림자나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655쪽)
- 『돈키호테 2』, <53 산초 판사의 힘들었던 통치의 결말에 대하여>
제법 긴 나날 동안 아주 현명하게 그 섬을 다스리던 산초 판사는 어느 날 한밤중에 느닷없이 그 섬에 갑작스레 들이닥친 적들과 싸우느라 무엇 하나 제대로 정신을 차릴 겨를도 없이 '전쟁의 지도자'로 나서게 된다. 급한 대로 두 개의 방패로 자신의 몸을 앞뒤로 두른 채 전쟁터에 떠밀리듯이 나선 그는 '자신의 껍질에 덮인 채 그 안에 갇힌 큰 거북이, 아니면 모서리가 좁은 두 개의 장방형 나무 상자 사이에 낀 절인 돼지고기 반쪽, 아니면 모래에 걸려 넘어진 배 같은, 바로 그런 꼴'로 쓰러져, 이리 저리 마구 짓밟히며 엉망진창이 되고 혼쭐이 난 산초는 공포와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인해 그만 기절해 버리고 말았는데, 산초가 정신을 차리고 나자 전쟁은 벌써 끝나고 적들이 모두 물러난 뒤였다.
산초가 몇 시인지 묻자 그들은 벌써 동이 트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는 한마디 말도 없이 절대적인 침묵 속에서 잠자코 옷을 입기 시작했다. 무슨 일로 저렇게 급하게 옷을 입는지 몰라 모두가 그를 지켜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옷을 다 입은 산초는, 워낙 녹초가 되어 있었기에 성큼성큼 걷지도 못하고 느릿느릿 걸어 마구간으로 갔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그의 뒤를 따라갔다. 산초는 자기의 잿빛에게 다다르자 그를 얼싸안더니 이마에 입을 맞추는 인사를 하고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이리로 오렴, 나의 동료이자 친구이며 나와 고생과 가난을 같이해 온 잿빛아. 너와 마음을 나누고 네 마구를 손질하고 네 작은 몸뚱이나 먹여 살릴 일 이외에는 다른 생각일랑 하지 않으면서 보낸 나의 시간들과 나의 나날들과 나의 해들은 행복했었지. 하지만 너를 내버려 두고 야망과 오만의 탑 위에 오르고 난 이후부터는 내 영혼 속으로 수천 가지 비참함과 수천 가지 노고와 수천 가지 불안이 들어오더구나.」(659∼660쪽)
- 『돈키호테 2』, <53 산초 판사의 힘들었던 통치의 결말에 대하여>
바로 이런 놀라운 반전 속에 마침내 이 책 속에 삽화를 그려 넣은 화가가 산초의 '자세한 얼굴'을 내보였으니 그게 바로 다음의 그림이다. 이 얼마나 안타깝고 안쓰러우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감동적인 그림인가!
그가 이런 말만 남기고 당나귀에 길마를 얹자 말자 훌쩍 그 자리를 떠난 건 물론 아니다. 그는 당나귀에 오르고 난 뒤 그 자리에 있던 많은 사람들에게 '일장연설'이라고 할 만한 명대사를 남겼으니 (그림 한 장 덕분에) 훨씬 더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듯한 존재로 우리에게 확 다가온 그(산초 판사)의 얘기를 직접 들어 보자.
「여러분, 길을 비켜 주시오. 그리고 내가 옛날의 자유로운 몸으로 돌아가도록 놔두시오. 현재의 이 죽음과 같은 생활에서 되살아나도록 지난 삶을 찾으러 가게 해주시오. 나는 통치자가 되려고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오. 도시나 섬을 공격하고자 하는 적으로부터 그것들을 방어하려고 태어난 사람도 아니라오. 나는 법을 만들고 땅이나 왕국을 지키는 일보다 밭을 일구고 땅을 파고 포도나무를 베고 가지를 치는 일에 대해 훨씬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오. 성 베드로는 로마에 있을 때 제일 편안하다는 말처럼, 사람마다 각자 타고난 일을 하는 것이 제일 어울린다는 얘기요. 손에 통치자의 권위를 나타내는 표상인 왕홀보다 낫 한 자루 쥐고 있는 게 내게는 더 잘 어울린다오. 나를 굶겨 죽이려 하는 염치없는 의사가 내리는 처방의 비참함에 얽매여 사느니, 차라리 가스파초312나 질리도록 먹고 싶소. 그리고 통치한답시고 거기에 구속된 채 네덜란드산 이불 잠자리에 들고 검은담비 옷을 입고 사느니, 차라리 자유롭게 여름에는 떡갈나무 그늘에 드러눞고 겨울에는 새끼 양가죽을 입고 살고 싶다오. 그대들은 안녕히 계시오. 그리고 내 주인이신 공작님께는, 내가 벌거숭이로 태어나 벌거숭이로 남았다고 전해 주시오. 나는 잃은 것도 얻은 것도 없소이다. 이 말은 곧 내가 다른 섬의 통치자들과는 완전히 반대로, 일전 한 푼 없이 이 섬에 들어와 일전 한 푼 없이 나간다는 뜻이오. 자, 나갈 수 있게 비키시오. 난 고약으로 치료하러 간다오. 오늘 밤 내 몸 위를 산책한 적들 덕분에 갈비뼈가 모두 주저앉은 듯하오.」
(660∼661쪽)
312 gazpacho. 토마토, 파프리카, 양파, 올리브기름 등을 넣어 만든 차가운 수프. 주로 더울 때 먹는다.
이렇게 아주 그럴싸한 고별사를 남긴 산초를 의사가 다시 한번 붙잡아 두려 하자 그는 자신의 결연한 마음을 다시금 확실히 밝히는데 이 책의 번역자는 그걸 다음과 같이 우리말로 옮겨 놓고 있다.
「삐악삐악 우는 게 늦었소.」313 산초가 대답했다. 「그런다고 떠나기로 한 걸 그만두면 내가 터키인314이지. 두 번 다시 이런 장난은 하지 않을 거요. 회복기에 들어간 환자에게 정성 들여 식사를 내놓듯 나를 대접한다 해도 내가 이곳에 남거나 다른 통치직을 허락하는 일은, 날개 없이 하늘을 나는 일과 마찬가지로 결단코 두 번 다시 없을 거요. 나는 판사 가문의 사람으로 이 집안 사람들은 모두가 고집불통이라, 한번 <아니>라고 하면 일이 실제로 돌아가는 게 <그렇고> 세상 모둔 사람들이 <그렇다>고 해도 <아닌> 게 되어야 하오. 제비나 다른 새들한테 잡아먹히라고 나를 공중에다 띄워 준 이 개미의 날개는 여기 마구간에 남기고 우리는 다시 평범하게 땅으로 돌아다닐 거요. 장식을 단 코르도바 가죽 구두로 발을 멋들어지게 할 수는 없겠지만, 끈으로 동여맨 투박한 삼으로 만든 신발은 없지 않을 게요. 양마다 자기의 짝이 있는 법, 이불이 아무리 길더라도 그보다 더 다리를 뻗지는 말아야 하는 법이오. 가게 내버려 두시오. 늦어지고 있소.」(661∼662쪽)
313 기회가 이미 지난 다음에 해결하려 한다는 뜻. 16세기의 해석에 의하면, 병아리를 품은 달걀을 먹어 삼킨 후에야 병아리가 삐악거리는 소리를 들었다는 어떤 사람이 한 말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314 turco. 당시 지중해 해상권을 놓고 터키와 스페인이 싸우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 종족에 대한 적개심으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또한 이 단어 자체에 <술주정뱅이>, <만취>라는 뜻도 있다.
이렇게 긴 글을 쓰고 나니 문득 나 자신이 이불은 생각지도 않은 채 다리를 너무 길게 뻗은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나도 이제는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와 함께 한 긴 여정을 마무리하고 그 두 사람을 내 눈 앞에서 떠나보내는 일만 남겨 두고 있다. 그들과 마지막 슬픈 작별 인사를 나누기 위해서라도 나는 이쯤에서 글을 마쳐야겠다. 이 글 때문에 그들과의 작별이 자꾸만 너무 늦어지고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