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여기에 터를 잡고 머문 지도 어느새 훌쩍 10년이 지났다.
세월 참 빠르다. 세월이 이렇게 빨리 흐를 줄은 나도 몰랐다.
그저 내 눈앞에서 흐르는 강물은 조금도 쉬지 않고 흐르고 또 흐르고,
그 강물을 바라보는 나는 단지 '여기'에 머물러 있을 뿐이고,
그 강물의 흐름을 따라 나도 함께 따라 흘러갈 수 없으니,
언덕 위에 서서 강물만 바라보다가 어느새 문득 늙어버린 여행객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동안 내가 여기에 자리를 잡고 나서 별로 한 일도 없는 것 같은데...
그저 아까운 10년의 세월이 어느날 갑자기 훌쩍 건너뛴 느낌마저 든다.
처음으로 이곳에 발을 들여놓을 때만 하더라도 나는 도대체 여기가 뭐하는 곳인지도 몰랐다.
도대체 어떤 친구들이 나와 함께 매일같이 얼굴을 맞대고 지낼 지도 몰랐다.
아무튼 끊임없이 새로운 친구들이 불쑥불쑥 예고도 없이 찾아 와서는,
아무런 '소개'나 '인사'도 없이 저마다 한 자리를 차지하고는 '이야기'를 꺼내 놓기 시작했다.
어떤 친구가 신이 나서 자신의 품 속에서 재미있는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으면,
다른 친구들이 서로 앞을 다투어 자신의 이야기를 거기에 보태는 경우도 자주 보았다.
그런 아름다운 추억들도 이젠 다 잊어 버리자.
어쨌든 나는 이제 여기서 서둘러 떠날 작정이다.
아니다, 좀 더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피치 못할 사정으로 급작스레 여길 떠나야 한다.
좀 더 솔직히 얘기하자면 결국 나는 여기서 쫒겨 나는 셈이다.
아무튼 그런 세세한 사정을 일일이 밝히자면 몹시 부끄럽지만 말이다.
아무튼 내가 여길 떠나는 이유나 나의 행방에 대해서는 차츰 알게 될 터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더니 여기도 가만 보면 참 많이도 변했다.
내가 여기에 계속 터를 잡고 버티기엔 이제 어느 정도 한계에 온 것도 사실이다.
사실 오래 전부터 계속 '눈치'를 보면서 근근히 버티며 살아 왔다.
왜 아니 그랬겠는가.
온갖 화려한 스펙으로 무장한 '새로운 친구들'이 끊임없이 밀려 드는데,
나같은 구닥다리가 여기서 어떻게 계속 버텨낼 재간이 있을 수 있으랴.
솔직히 여기서 이런 식으로 계속 버티며 살아 남을 자신이 없다.
여기도 알고 보면 은근히 '눈에 안 보이는 경쟁'이 치열한 곳이다.
친한 녀석들은 지들끼리 더욱 단결하여 구닥다리나 외톨이들을 배척하기 일쑤다.
저들끼리 온갖 비밀스런 대화들을 속닥거리면서도 도무지 곁을 내주지 않는다.
그런 꼴이 보기가 싫지만 나같은 뒷방 늙은이는 그저 꾹꾹 참고 못 본 체할 수밖에 없다.
혹여 그런 불만을 입밖에 냈다가는 즉시 벌떼같이 일어나서 나를 내쫒을 게 틀림없을 테니까.
그래서 오랫동안 고민해 온 끝에 마침 이참에 깔끔하게 여길 떠나기로 했다.
아니다, 거듭 밝히자면 내가 자발적으로 떠나는 게 아니라 쫒겨나는 게 맞다.
옛 정을 생각해서라도 그렇지, 이렇게 하루 아침에 여기서 쫒겨날 줄은 몰랐다.
신세 한탄일랑 이제 그만 하자.
이제 여길 영영 떠난다고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마음이 몹시 홀가분하기도 하다.
그렇다고 미련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 오래도록 죽치고 앉아 지내면서 재미있는 '세상 구경'도 참 많이 했다.
이제 어디 가서 그런 재미있는 세상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지,
나도 막상 여기를 떠나자니 앞길이 막막하고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질 않는다.
아, 되돌아 보면 이 좁은 공간에서 나는 얼마나 흥미로운 세상을 구경 했던가.
아는 거라곤 모르는 거 빼고 전부 다였지만 성깔 하나만은 언제나 까칠한 놈_니체 같은 놈,
온갖 유머를 다 갖췄지만 입이 걸레처럼 더럽고 가벼운 놈_라블레 같은 놈,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말만 잔뜩 늘어 놓는 놈_하이데거 같은 놈,
세상의 온갖 비밀은 저 혼자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늘상 가르치려 드는 놈_쇼펜하우어 같은 놈,
하느님조차 우습게 알고 까부는 놈_리처드 도킨스 같은 놈,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온갖 기막힌 말장난으로 세상을 비꼬는 놈_셰익스피어 같은 놈,
가진 건 쥐뿔도 없으면서 세상을 움직일 것처럼 위세 떠는 놈_헨리 데이빗 소로우 같은 놈,
낮이고 밤이고 허구헌 날 줄창 글만 쓰는 놈_카프카 같은 놈,
저 혼자만의 '독특한 의식의 흐름'을 늘어놓는 놈_조이스 같은 놈,
아... 이젠 좀 지겹다, 이런 녀석들을 계속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
떠나면 그런 더러운 꼴은 더 이상 안 보고 살 수 있을 꺼 아니냐.
이 참에 떠나자. 깔끔하게 떠나자. 차라리 잘 됐다.
다른 데로 쫒기듯 도망가더라도 여기보단 훨씬 나을 꺼다.
이대로 이런 푸대접을 받으면서 더는 못 버티겠다.
그래도 가만 생각해 보면,
여태까지 날 한 번도 심하게 쥐어박지도 않고 그럭저럭 대접해 줘서 고맙긴 하다.
사람이 오래 한 군데서 10년 씩이나 머물렀다가 이제 막 떠나는데,
그래도 '마지막 작별 인사'는 하고 떠나야겠지. 안 그래?
암튼 내가 며칠 전부터 짐을 꾸리고 있다는 소식에,
벌써부터 '얼씨구나 좋구나, 내 세상 왔네' 하며 입이 귀 잡으러 가는 놈들도 더러 내 눈에 보인다.
이왕 떠나는 마당에 내 그 녀석들을 일일이 불러 세우고 따져 보고도 싶지만,
아예 떠나는 마당에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일까. 그저 다 용서하고 깔끔하게 떠나자.
비록 나는 오늘 여기서 영영 떠나지만,
남은 친구들이여, 여기서 오래도록 버티면서 잘 먹고 잘 살아라.
재미난 세상 구경도 실컷 즐기고.
앞으로도 계속 새롭게 얼굴을 들이밀 참신한 녀석들도 잘 좀 대해 주고.
특히 나보다 훨씬 더 나중에 들어왔으면서도
나보다 훨씬 더 사랑받고 끝내 나를 여기서 쫒아낸 나쁜 놈들아.
내 말을 명심해라.
나는 이제 그만 가련다.
정작 길을 나설려니 막상 발길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날은 또 왜 이리 덥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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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잠시 쉬었다 가자.
우리들은 비록 이런 험한 꼴로 떠난다만, 살아남은 너희들도 이꼴 당하지 말란 법은 없느니라.
부디 몸 조심들 하고, 지금 있는 자리가 언제까지나 보장되는 거 아니란 걸 다시 한번 명심하거라.
아이구.. 저렇게 험한 꼴로 보쌈을 당해 떠나는 친구들 보니 영 남의 일 같지 않구먼.
그래도 천장 바로 아래까지 바싹 기어 올라간 우리들이 몹시 부럽제?
우리들도 하마터면 느그덜과 함께 도매금으로 한 방에 훅~ 날라갈 뻔했지.
주인장한테 두손 두발 모아 싹싹 빌고, 켜켜이 쌓인 먼지까지 싹싹 닦아낸 끝에 우리도 간신히 피신했지.
여기 천장 바로 밑에까지 기어 들어와 숨도 못 쉬고 엎드려 있다만 내심 쬐끔 불안한 것도 사실이야.
아무튼 우린 여기서 또 한 세월 낚아 볼란다.
주인장이 어디서 얼굴 반반한 연놈들 끌어 들이면 그땐 우리도 끝장이제.
언젠가 주인장이 우리까지 마저 쫒아내겠다면 그땐 우리도 미련없이 떠날 꺼여~
저렇게 한가운데 떡하니 자리잡고 환하게 빛을 받으며 마음놓고 지내는 저 친구들은 도대체 누구들이여?
시도 때도 없이 주인장의 사랑스런 손길까지 받아가며 속살을 헤쳐보이는 자네들은 도대체 무슨 상팔자여?
뭔 말이여? 이래뵈도 우린 태어날 때부터 느그덜과는 태생이 다르거든.
느그덜이야 고작 몇 년 반짝 하다가 이내 세상을 하직하기 바쁜 파리목숨들이지만,
우리들은 적어도 수백 년, 길게는 수천 년을 살아낼 작정으로 태어난 불사조 같은 존재란 말씀이야.
느그덜은 도대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를꺼여~
느그덜은 '시간의 테스트'를 견녀 낸다는 뜻이 무슨 말인지 아는감?
우린 그래도 천방 바로 밑에까지 기어 들어 왔으니 한동안 잠이나 푹 잘란다.
혹시나 주인장이 나를 잊지 않고 어여삐 여겨 찾아 준다면 몹시도 고맙겠지만.
그래도 쫒겨 나지 않고 여기서 버티고 있다는 게 어디냐.
저 가운데 몸집이 뚱뚱한 녀석들은 뭐여? 평소에 잘 보이지 않더만 아주 좋은 자리를 잡았네.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와 조이스가 나란히? 그 사람들이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다고?
아무튼 새롭게 좋은 자리로 옮긴 친구들이 한둘이 아니네. 암튼 잘혀 봐~
우린 '전세계의 도서관이 불타더라도' 우리부터 건져내 주겠다는 호언장담까지 들었던 존재란 말이여.
그러니 자네들은 너무 배아파 하지 말고 속히 여길 떠나게. 무디 헌책방 가서도 몸 조심 하고~
거기서 먼지 푹 뒤집어 쓰고 모진 세월 견디다 보면 혹 마음씨 좋은 새로운 주인이 자네들 모셔갈 지 알아?
이 사람들아, 우리도 이런 자리를 차지하기 까지는 필설로는 이루 다할 수 없는 고생들을 겪었다네.
그러니 자네들이 우릴 보고 너무 배아파 하지는 말게나.
우린 한 몸에서 태어난 친형제들인데도 수 년 동안을 '지척의 거리'에서 서로 쳐다만 보고 지내왔다네.
그 동안 한 이불을 덮고 잔 적도 없었고, 함께 음식을 나눌 기회조차도 영영 없었다네.
내 형이나 아우가 덩치 큰 녀석들 틈에 끼어 짓눌리며 낑낑대는 모습을 쳐다보는 일은 또 어땠고.
이제 겨우 이산가족들이 상봉한 셈이니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을라고.
그러니 부디 우리들을 위해 축하의 인사나 건네 주고 떠나게. 암튼 몸 조심 하고.
쇼펜하우어 : 어, 니체 오셨는가? 자넨 사후 나이가 어떻게 되나?
니체 : 아이구, 사부님. 이게 도대체 얼마 만이신지요? 저는 올해로 꼭 117살 됩니다만...
쇼펜하우어 : 그러고 보니 자네도 나이를 제법 먹었네 그려.
자네는 살아 생전에 나를 몹시 흠모한다고 들었는데, 지금도 그 마음 변치는 않았겠지.
니체 : 하이고, 이제 겨우 사부님 가까이 자리 잡았는데, 그 얘기부터 꺼내시면 어떡합니까.
이젠 사부님 곁에 왔으니 좀 더 자주 옛날 얘기도 나누고 세상 변한 이야기도 나눠보자구요.
쇼펜하우어 : 그러자꾸나. 그런데 저 아래에서 얼굴을 내밀고 있는 저 빼빼마른 영감은 도대체 누군가?
니체 : 아이고, 쾨니히스베르크 영감이네요. 내가 저 영감 욕을 가끔씩 했던 걸 저 영감도 알고 있을까요?
쇼펜하우어 : 글쎼다, 하여간 인사부터 드리세. 저 영감은 어쩄든 우리에겐 둘 도 없는 스승님이 아닌가?
니체 : 그리시죠, 사부님.
여긴 또 뭐여? 며칠 전까지만 해도 책탑이 수두룩하게 쌓여 있던 곳이 아니었던가?
이렇게 자리가 널럴하구만 왜 하필 이런 삼복더위에 우릴 내쫒고 난리를 피운 게야?
글쎄 주인장이 마누라한테 혼이 났다는구먼. 책을 너무 쌓아 놓는 바람에 장롱 문이 안 열렸다나 뭐라나.
우리가 이번에 쫒겨난 것도 다 따지고 보면 주인장이 마누라 한테 한 방 제대로 얻어맞았기 때문이야.
아하, 그런 고약한 사정이 있었구먼.
글쎄 저렇게 장롱 위를 깔끔하게 비워 놓았다고 해서 저게 또 얼마나 갈지. 아무튼 두고 보자구.
얼씨구? 여기 자리잡고 있는 이 녀석들은 또 뭐야?
주인장 곁에 바싹 붙어 앉아서 고상한 음악까지 함께 듣고 있었어? 아주 놀고 있네.
나 원 참, 볼수록 성질 돋구는 구먼. 자세히 보니 여기 저기 빈 틈도 제법 있구만 그래.
왜 하필 우릴 기어이 쫒아내고 난리를 피우는 겨?
안 그래도 열이 달아 후끈거리는 이 삼복 더위에 말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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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닷없이 떠나 보낼 책들이 저렇게 초라한 행색으로 전락한 모습을 보자니 몹시 안쓰럽고 안타깝다.
이럴 땐 '몽테뉴'라는 사람이 정말로 너무 부럽다. 그래도 그 사람을 계속 부러워 하지는 말자.
내 방 하나만으로도 족히 1,000권을 수납할 책장이 있다는 것만 해도 얼마나 다행인가를 생각하자.
(이번에 '책장 정리'를 하고 난 뒤에 '재고 조사'를 해 보니 딱 924권이었다. 보따리에 담긴 책 76권 빼고.)
서재는 탑의 4층에 있다.
서재는 탑의 4층에 있다. 2층은 나의 예배실이고, 3층은 거처하는 방과 그 부속실이며, 혼자 있고 싶은 때에는 거기서 자는 일이 많다. 위에는 커다란 의장실이 있다. 그것은 지난날 내 집에서는 가장 쓸모없는 곳이었다. 나는 이 서재에서 내 생애의 대부분과 하루의 대부분을 보낸다. 밤에는 결코 거기에 있는 일이 없다.
······ 이 탑은 삼면으로 풍부하고 끝없는 조망이 내다보이며 실내에는 직경 16보의 공간이 있다.
겨울에는 나는 줄곧 거기 있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내 집은 그 이름이 말하듯 언덕 위에 올라앉아 있어서, 여기보다 더 바람 타는 곳도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떨어진 곳이라 찾아오기도 힘들어서 사람들의 소란도 물리쳐 주고 글을 읽기에도 효과적이기 때문에 더욱 마음에 든다. 여기가 내 자리이다. 나는 이 장소를 내 지배하에 두고, 이 구석 하나만은 아내이건 자식이건 일반 사람들이건 공동 생활에서 구애받지 않고 간직하려고 한다. 다른 데는 나는 모두 본질상으로 확실치 못한 명목상의 권위밖에 갖지 않았다. 자기 집에 있으며 자기대로 있을 곳도, 자기만의 궁전을 차릴 곳도, 몸을 감출 곳도 없는 자들은 내 생각으로는 아주 가련한 신세들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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