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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 지켜보고 있어 스토리콜렉터 65
마이클 로보텀 지음, 김지선 옮김 / 북로드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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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좀 그래요. 드라마나 애니메이션은 연속으로 볼 수 있어도 시리즈 소설은 연속으로 읽는 게 힘들더라고요. 아무리 좋아하는 작가라도 그건 잘 안되더군요. 저는 치느님을 사랑하지만 치킨만 먹고살지는 않습니다. 백숙도 먹고 오븐 닭도 먹고 찜닭도 먹고 닭갈비도 먹고 닭볶음탕도 먹고 닭강정도 먹죠. 음식 얘기하니까 급 배고파지네요. 여튼 맛있는 음식이라도 자주 먹으면 질립니다. 간만에 잡숴줘야 더 맛있거든요. 소설도 비슷합니다. 이 시리즈를 마지막으로 읽은 게 재작년인데, 그땐 늘 비슷한 작품을 쓰는 작가에게 도약이 필요해 보였어요. 근데 어이없게도 오랜만에 읽으니까 여전한 패턴에도 볼 만은 합니다. 그럼 됐죠 뭐. 저는 독서 슬럼프에 걸릴 때마다 로보텀 작품을 찾는데요, 이번에는 반대로 슬럼프에 걸릴뻔했습니다. 이유는 뒤에 가서 설명하겠습니다.


마이클 로보텀은 이제 국내에서 꽤 알려진 하드보일드 소설가죠. 이 하드보일드 스타일에 대한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미국이 아닌 나라에서 쓴 하드보일드 소설은 잘 써봐야 중박이라고요. 김장도 외국인보다 한국인이 만든 게 더 맛있거든요. 사실 하드보일드 기법은 호불호도 심하고 잘 쓰기도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범죄소설을 쓴다고 굳이 하드보일드를 따라 할 필요는 없습니다만 그런 작품의 주인공들이 워낙 멋있다 보니 다들 그런 스타일을 추구하는 거겠죠. 근데 이 호주 작가의 하드보일드는 좀 각별합니다. 범죄물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심리학자가 주인공이기 때문인데요. 수사권이 없는 직업이라 그 자체만으로 핸디캡입니다. 그런데 로보텀은 이 단점을 장점으로 역이용합니다. 일단 심리학자만의 방식으로 사건을 해결하니까 뻔한 전개가 될 수 없습니다. 고로 타 작품들과 플롯이 겹치는 걸 막을 수가 있죠. 주인공의 상냥한 성격도 폭력적인 범죄소설에서는 단점이 됩니다. 점잖은 심리학자에게서 액션을 기대할 수가 없으니 결국 사건은 경찰들이 해결해주죠. 하지만 로보텀은 심리를 기반하여 기존의 하드보일드를 새로운 장르로 재창조해냅니다. 상황 설명 보다 인물의 독백을 더 많이 넣어서 부드럽고 유연한 분위기를 연출하거든요. 액션이 없는 하드보일드 작품의 허전함을 다른 방면으로 커버하는 것이죠. 오리지널을 넘지 않고 스스로 오리지널이 돼버린 특이 케이스입니다. 이런 게 바로 패왕색 패기 아니겠습니까?


제가 좋아하는 정유정 작가를 예로 들어보죠. 정유정 작가도 초기에는 지금 같은 독기가 없었어요. 그러나 작품을 위해 피나는 취재와 연구로 대작들을 뽑아냈습니다. 이렇듯 작가는 감각도 중요하지만 자질이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발로 뛰는 작가들은 그만한 보상을 받더라고요. 로보텀도 그렇습니다. 기자로 활동하며 축적해둔 데이터와 실제 범죄심리학자와의 인터뷰를 결합하여 지금의 고퀄리티 작품들이 탄생했죠. 이렇게 공들인 작품들은 대개 기본 이상은 합니다. 그리고 이런 작가들이 훗날 거장이 되고요. 여러 번 말한 거지만 소설가는 필력보다 스토리텔링이 우선입니다. 글만 잘 쓰는 작가와 글도 잘 쓰는 작가는 다르거든요. 로보텀의 경우는 후자입니다. 심리 스릴러다 보니까 아무래도 딱딱하게만 쓰는 건 무리일 겁니다. 간결하게만 써도 좋게 봐주는 장르문학에 인간미 있는 문체를 사용한 케이스가 몇이나 될까요. 로보텀이 독보적인 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이제 작품 이야기를 해볼까요. <조 올로클린 시리즈>는 제프리 디버의 <링컨 라임 시리즈>처럼 악역 또는 피해자 시점의 내용이 많은 편입니다. 앞에서 말했듯 주인공이 액션을 보여주질 못하니까요. 근데 그거대로 가지는 매력이 있죠. 악역이나 피해자의 분량이 많을수록 스토리는 생명력을 가지고 작품은 활력이 붙습니다. 간혹 악의 입장을 잘 다루지 않는, 그니까 악역을 너무 드러내지 않는 작품들이 있어요. 추리소설이라면 괜찮지만 일반 범죄소설에서는 마이너스입니다. 악당과 싸워 이기는 게 전부인 후레쉬맨 스토리랑 다를 바 없으니까요. 그런데 말입니다. 후레쉬맨이 더 재밌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버렸습니다.


한 여자를 염탐하고 관찰하는 X맨이 등장합니다. 저는 이런 관찰자 캐릭터가 나오는 작품을 싫어해요. 대부분 동기도 약하고 찌질하거든요. 이런 설정에서 벗어나는 게 어려운가 봅니다. 암튼 시작부터 김빠졌지만 X맨이 지켜보는 여자의 처절한 인생살이가 가히 인간극장 수준이라 몰입이 잘 되더군요. 여자는 주인공의 심리상담 환자입니다. 매 편마다 주인공이 여자와 엮이는 게 리 차일드의 <잭 리처 시리즈>하고 똑같죠. 알아서 여자가 꼬이고 썸꽃이 피어납니다. 사실 없어도 그만인 내용인데 분량 채우려고 그러는 거겠죠. 이게 중요한 건 아니고, 남편이 잔뜩 도박빚을 지고 장기간 실종 상태가 됩니다. 진짜 실종인 건지 잠수탄 건지는 몰라도 양쪽 다 좋은 게 아니죠. 그녀는 혼자 두 자녀를 돌보고 살림하느라 죽어납니다. 채권자의 협박으로 더러운 일까지 하게 되고요. 그런데 그녀를 괴롭힌 자들이 차례대로 죽습니다. 딱 봐도 X맨의 짓이지만 그녀는 모르는 일이고 억울하게 용의자가 됩니다. 흔한 설정에다 전개마저 뻔하다니 좀 너무하더군요. 처음 읽는데도 봤던 내용 같으니까요.


그런데 실망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알고 보니까 여자가 해리성 장애, 즉 다중인격이에요. 하아. 길 좀 막혔다고 이런 걸 히든카드로 쓰다니 참 너무하다 싶었습니다. 굴러다니는 이야기들을 모아다 그럴싸하게 묶어놓았을 뿐, 참신한 게 하나도 없어요. 그나마 작품을 지탱해주던 여자의 인간극장도 끝났습니다. 역시나 X맨도 별게 없어요. 여자와 아이들을 납치해가 잘 지내보자고 합니다. 그럼 이지경이 될 동안 조는 뭘 했느냐? 그녀의 다중인격과 X맨이 있다는 걸 알아냈는데요, 이게 다예요. 주인공이 뭘 하는게 없어서 내가 다 민망하네요.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뒷짐지고 불구경하는 수준입니다. 앞서 얘기한 단점을 장점으로 뒤집는 장면이 단 하나도 안 나와요. 대박 친 시리즈 소설들은 중간에 쪽박 작품이 꼭 있는데, 올로클린 시리즈는 이 작품이 쪽박이었습니다. 거장도 사람인데 슬럼프가 올 수도 있겠죠 뭐. 그래도 못하다가 한번 잘하는 것보다야 잘 하다 한번 못하는 게 더 낫습니다. 나름 인간미도 있고요. 근데 책값은 아깝습니다. 이만 로보텀 행님과 저의 슬럼프 극복을 응원하며 리뷰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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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비앤비의 청소부
박생강 지음 / 은행나무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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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전에 쓴 <데미안>의 리뷰에서 언급한 나의 바뀐 취향에 대해 이어서 적어본다. 학생 때부터 내가 즐겨듣는 음악 장르는 락이었다. 흔히 말하는 고음병이 도졌었고 그래서 다른 노래들은 전부 시시하게만 들렸다. 그러다 언젠가 <힐링캠프>에서 가수 이선희가 부르는 ‘추억의 책장을 넘기면‘을 숨죽여 듣다 눈물이 왈칵 흘렀다. 그렇게 죽어있던 감성세포가 깨어나기 시작했고 더 이상 락을 듣지 않게 되었다. 그 뒤로는 내가 시시하다고 했던 노래들을 즐겨 듣고 있다. 이것과 똑같은 패턴으로 독서의 취향도 변했다. 좋아하는 스릴러 소설만 편식하다 보니 즐거운 독서에도 감성이 죽어가는 게 느껴졌다. 그래서 장르 불문하고 읽다 보니 반전도 자극도 없는 작품에도 나름의 재미가 있는 것이었다. 늘 탄산음료만 먹다가 어느 날 전통차의 맛을 알아버린 거지. 그래서 쏘쏘한 이번 작품도 나름의 담백함을 즐기면서 읽었다.


이태원의 에어비앤비 숙소에서 애인에게 차이는 남자의 시점으로 시작한다. 그는 화풀이로 숙소의 악성 후기를 쓰려고 혼자 방을 잡는다. 뭔가 구차함으로 독자의 눈물샘을 자극하려는 게 느껴지는데 좀만 더 기다려보자. 남자의 방에 청소부 남청년이 들어와 급 말동무가 된다. 청소부는 깜빵을 다녀와서 이곳의 알바생으로 지내고 있단다. 응 그렇구나. 그러고 헤어지나 했더니 야근할 때마다 에어비앤비로 방을 잡는 남자는 청소부랑 점점 친해진다. 각자의 사연을 주고받으며 삶의 무게를 가늠해보는 두 사람의 이야기는 조금씩 독자의 심금을 휘젓는다. 


멀쩡한 집 놔두고 더러운 숙소로 굳이 가는 건 가족이 불편해서였다. 아버지가 은퇴한 후로 집안 분위기는 더 나빠졌고 각자가 방콕 생활만 한다. 여동생에게 소시오패스라고 불릴 만큼 감정 결핍된 남자는 삶이 무료하다. 현대인의 공감 포인트가 많아서 좋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한데 암튼, 아버지의 페이스북 계정으로 외국 여성이 동업하자는 연락을 받으며 작품 분위기가 변한다. 익명의 상대에게 푹 빠진 아버지를 말리는 가족들. 그게 온라인 사기란 걸 부정하고 돈까지 보내려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청소부에게 털어놓는 남자. 그는 말 못 할 얘기들을 누군가에게 꺼낼 수 있다는 것에 위안을 받았다. 이어서 청소부도 자신의 사정을 꺼내는데 글쎄, 자신이 쫓기는 신세의 해커란다.


중졸인 청소부는 부모를 잃고 고모네 PC방 알바를 하며 살았다. 거기서 해커의 세계를 알게 되었고, 해커 사이트에서 알게 된 블랙 해커의 권유로 중국을 갔다. 나름의 연수를 마치고 한국에 와서 활동하던 중 사업가로 위장한 경찰에게 걸려 빵에 들어갔다. 출소 후에는 그 블랙 해커가 자신을 쫓고 있다,는 얘기였다. 전반의 드라이한 감성이 참 좋았는데 갑자기 시리어스한 전개라니 좀 그렇다. 후반은 청소부의 고해성사라 크게 볼 건 없고, 그 친구 덕분에 주인공이 애인과 다시 잘 되는 것으로 끝이 난다. 대충 요약했지만 딱히 특별한 게 없는 보통의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독자의 궁핍한 마음을 미세하게 건드리는 힘이 있다. 갑분싸는 좀 아니었지만.


현대판 상실의 시대라고나 할까. 인물마다 감정 결핍을 앓고 있다. 연애 감정이 없는 주인공은 로맨스를 추구하고, 부모를 잃은 청소부는 타인의 애정을 원하고, 지위를 잃은 부친은 가장으로 인정받고 싶어 한다. 하지만 간절히 바랄수록 매몰찬 현실이었다. 주인공만 보더라도 제 뜻대로 악성 후기하나 못 쓰고 있지 않은가. 청소부는 말하길, 계속 살아가려면 자신의 불리함을 감춰야 한다고 했다. 말 그대로 우리 모두는 불리한 삶 속에서 무수한 약점들을 감추고 사느라 바쁘다. 여유가 없어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고 결핍된 채로 그렇게 살아간다. 요즘 같은 때는 더 그렇다. 주인공처럼 누군가에게 내 얘기를 털어놓거나, 아버지처럼 누군가가 관심을 가져주는 게 그토록 기쁜 일이 된 시대를 살고 있다. 공동체 사회에서 개인주의로 사회가 바뀌는 것을 기뻐하는 분도 있겠지만, 각자도생하는 주인공의 가족처럼 되어가는 건 역시 슬프다. 여튼 박생강 작가의 책은 처음인데 은은한 감성이 제법 매력 있었다. 당신도 전통차의 담백함을 느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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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1
헤르만 헤세 지음, 안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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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은 내가 맨 처음 읽었던 고전문학이다. 그때는 좋았던 기억은 하나 없고 역시 고전은 어렵다는 좌절만 안겨줬다. 복잡한 내용이 아님에도 뭘 말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친절하게도 서두에 답이 다 나와있었다. 인간이란 무엇인지 아무도 모른다,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애쓴다, 각기 다른 모두가 같은 심연에서 나왔다 등등. 온전히 흡수 못한 문장도 많지만 ‘나에게로 가는 길‘을 말하려는 건 충분히 이해했다. 이제야 어디 가서 데미안을 읽어봤다고 얘기할 수 있을 듯. 첫 독서 때는 경치 따윈 보이지도 않던 초행길의 운전 같았는데, 지금은 좋은 울림을 가진 문장들이 눈에 잘 들어온다. 어쩌면 별로라 여겼던 고전들도 훗날엔 대단하다 느낄지 모르겠다. 근데 이 책이 진짜 청소년문학인가? 성장소설치고 지나치게 하이레벨인데. 독일은 어린 친구들도 이만큼 수준이 높은가. 그렇다면 나 너무 자괴감 드는디.


주인공 싱클레어의 유년시절부터 대학생까지를 기록하였다. 소년은 데미안을 만나기도 전에 빛과 어둠의 세계가 공존하고 나란히 붙어있음을 보았다. 늘 그랬듯이 올바른 세계를 추구했지만 금지된 세계 또한 매력적이어서 거짓말을 시작으로 어둠에 발을 담근다. 그리고 기나긴 방황과 출구 없는 절규에 휩싸인다. 죄악의 늪을 인지한 순간 자신의 공존하던 두 세계가 분리됨도 느낀다. 화평과 안정을 주던 삶의 모두는 먼지가 되었고, 자신은 어느 축에도 속하지 못한 이방인과 나그네가 된 것이다. 어둠에 속한 것들이 왜 그렇게 매혹적인지 또 왜 금하는지를 직접 느껴보기 전까지는 감정 없는 글자에 불과하다. 헤세가 말하는 인간이란 그런 생물이다. 헤세는 한 사람을, 그것도 어린아이의 세계를 지독히도 파괴해버린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는 게 응당하다는 당연한 말보다 그것을 더 당연하게 말하고 있다. 고작 거짓말 하나 했을 뿐이나 소년에게는 감당 못할 형량이었다. 어둠에 잠식된 아이는 손닿는 곳에 구원의 손길이 있는데도 쉽사리 손을 뻗지도 못한다. 이것은 남녀노소 마찬가지인 인간의 어리석음과 나약함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소년은 데미안의 도움으로 늪에서 탈출한다. 가족에게 죄를 고백하고 서둘러 아벨의 부류로 돌아간다. 데미안은 그의 구원이었지만 가까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성경의 가인과 아벨 이야기를 제멋대로 해석하는 괴짜였다. 아벨보다 가인을 변호했고 금지된 세계와 그 부류도 올바르다고 주장했다. 그의 해석은 인류가 신성모독이라고 못 박아둔 전부를 완벽하게 뒤집었다. 소년은 아벨이고 데미안은 가인이었다. 자신을 죽인 자와 어울릴 수 없다는 두려움과 그의 해석이 주는 기쁨의 공존을 느낀 싱클레어. 이후 몇 년간 데미안을 멀리한 그는 아벨의 부류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방탕한 삶을 산다. 그러면서도 데미안과의 끈을 놓지 못한 것은 자신이 그에게 구원받았던 일 때문이었다. 결국 그에게로 돌아온 싱클레어는 자신도 가인의 표를 지닌 자임을 인정하게 된다. 더 이상 데미안은 괴짜가 아니었다.


이 책을 처음 읽은 독자들은 데미안의 해석을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성경에는 악을 선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는 자들에게 화가 있다는 구절이 있는데 딱 데미안에게 해당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전에는 나도 그의 이교도적인 주장이 불편해서 이야기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그때는 사실 뭘 말하려는 건지 파악도 못했다. 두 세계가 모두 거룩하고 존중해야 한다? 각자에게 허용된 것과 금지된 것이 다르다? 금지된 것이 누군가에겐 허용되기도 한다? 이 난해하고 아리송한 말들을 서두에 적힌 답에 기준하여 본다면 쉽게 이해된다. 선에 속한 자나 악에 속한 자나 다 같은 심연에서 나온 것이다. 예를 들어 찬송가를 부르는 이에게는 쉬즈곤이 금지된 것이지만 둘의 뿌리는 같다. 누군가에겐 허용된 것으로, 누군가에겐 금지된 것으로 완전한 자신을 찾고 만난다는 말이다. 좀 더 쉽게 풀자면 이렇다. 가인에 대한 해석은 분명한 신성모독이다. 그 해석을 불쾌해하는 부류도 있고 색다른 관점으로 받아들여 흥미롭게 보는 부류도 있다. 후자인 싱클레어는 금지된 것이 허용된 것이고 자신에게 맞는 옷을 찾은 셈이다. 그러나 이 같은 사고는 자칫 강도나 살인 같은 범죄도 같은 심연에서 나왔다고 오해할 수 있다. 나를 찾는 길을 방해한다면 그건 허용된 것이 아니라 금지된 것이니 모쪼록 잘 분별해야 하겠다.


싱클레어가 탕자 된 것은 데미안의 영향이 아주 없진 않았지만 내 눈에는 소심한 범생이가 늦바람이 든 정도로 보였다. 남들과 어울린다 한들 그들은 자신보다 낮게 여겼고 본인도 자기 경멸에 빠져 살 만큼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 또는 두 세계에 걸쳐있는 주인공이었다. 그러다 이상형을 발견하고 성욕에 눈을 뜬 뒤로 다시 정결한 아벨이 된다. 자신을 거룩하고 경건하고 순결하게 만드는 것이 추악하고 음탕하고 쾌락적인 것이라니. 가인의 표식을 가진 그는 데미안의 말을 이해하여 방탕을 끊고 자기 성찰에 들어간다. 이 책으로 헤세는 인간이 가진 무한의 가능성을 언급하려던 게 아닐까 한다.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통해 닫혀진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는 관점을 배운다. 그리고 교회 오르간 연주자를 통해 닫혀진 세상에서 도약하는 힌트를 얻는다. 헤세는 데미안과 연주자를 통해서 참 인간이 되는 과정을 새와 알의 상관관계로 반복 설명한다. 진정한 나 자신이 되려면 내 안의 기둥이 무너져야 진짜 세계가 펼쳐진다고.


데미안은 알을 깨고서 나오라고, 세계를 깨뜨려서 거듭나라고 했다. 오르간 연주자는 두려움을 이기고 계속해서 날아오르라고 했다. 온몸으로 부딪혀야만 알은 깨어지고, 죽어라 날갯짓을 해야만 비상할 수가 있다. 헤세가 말하는 인간이 지닌 무한의 가능성은 모든 힘의 근원과 연결돼있고 그 독자적인 힘으로 얼마든지 도약할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그러나 두려움과 위험성을 고려해서 현재를, 알 속의 세계를 만족해하는 자들도 많다. 헤세는 스스로를 개척하고 세계를 바꿀 마음이 없는 자들을 안타까워했던 걸까.


자신의 세계가 무너지는 건 분명 두려운 일이다. 이제까지 내가 살아왔던 게 부정당하는 기분이 들 테니까. 하지만 오늘의 내가 어제와 다르다 한들 부정당할 이유도 실망할 이유도 없다. 여러 경험과 실패를 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시행착오를 겪어서 나의 참 모습을 찾아가는 연습을 했을 뿐이다. 나만 해도 취향, 입맛, 패션, 취미, 문화, 가치관 등 모든 것이 바뀌었다. 한때 이것이 나라고 정의했던 것과 전혀 다른 지금의 내 모습이 오히려 더 좋다. 나도 싱클레어처럼 내 몸에 맞는 옷을 찾았기 때문에. 진짜 자신을 찾게 된다면 좋아하는 것에 자극을 받아 엔돌핀이 돌고 도는 게 아니라 공허했던 영혼이 풍요로워지고 안정감을 갖게 된다. 경험해보지 못한 분들에게 어서 알과의 투쟁을 시작하라고 말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번데기는 나비가 될 준비를 해야지, 송충이 시절을 그리워해선 안된다. 먹고살기 바빠죽겄는데 뭔 나비 타령이냐 하지 마시고 공허한 내 영혼을 진지하게 돌아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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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모자 2021-02-22 03:2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헤세가 융의 심리 상담을 받고 쓴 책 중 하나가 <데미안>입니다. 융 심리학 해설서인 이부영의 <그림자>를 읽어보면 싱클레어와 데미안이 나눈 대화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거에요. 꼭 읽어보세요~

물감 2021-02-22 11:10   좋아요 0 | URL
정보감사합니다. 기회되면 찾아읽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비종 2021-02-27 03: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방금 2018년 12월에 썼던 저의 리뷰를 읽고 왔습니다. 공통적인 생각도 군데군데 있지만 오늘 올린 리뷰와 접근 방식부터 다르더군요. 그때의 리뷰가 퀼트의 천 조각 몇 개였다면 이번에는 어설프게나마 장바구니 하나를 만들어낸 느낌이랄까요. 2년을 지나오면서 많이 성장한 제가 기특했습니다.ㅋㅋ^^;
저 역시 청소년 문학의 고퀄에 놀랐다는 ㅎㅎ <어린 왕자>와 비슷한 맥락일까요. 갈수록 보이는 요소들이 창대해지는 책입니다.

거짓말 하나에서 시작해서 늪처럼 빠져들어가는 과정의 심리묘사가 적나라하더군요. 그 상황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하며 측은하면서도 이해가 되었습니다. 고작 한 발짝처럼 보이는 간극을 넘는다는 게 얼마나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지. 달콤과 씁쓸에서 갈등하다 다크초코 맛의 매력을 알아버린 싱클레어~

저는 데미안을 카인과 아벨의 복합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벨과 카인을 둘 다 인정하는 존재라구요. 신과 악마가 결합된 아프락사스를 상징하는 인물이랄까요.
근데 카인을 가인이라고도 부르는가 봅니다. 종교 쪽은 잘 몰라서^^;;

허용된 것과 금지된 것을 분별해야 한다는 부분. 저도 인상적으로 읽었어요. 편하게 아무 생각없이 다른 이들을 따라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재판관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요. 결국 이 말들도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라는 메시지에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더라구요.

소심한 범생이 늦바람ㅋㅋㅋ 공감 척!입니다~
해설을 보면 오르간 연주자가 헤세와 상담하며 정신분석 치료를 담당했던 박사의 아바타 정도의 인물로 언급되더라구요. 연주자의 비중도 만만치 않게 크잖아요. 데미안이 달변이라면 피스토리우스는 다변?ㅋㅋ

어디서 본 지 기억은 안나지만 알의 과학적 구조에 대한 설명이 생각나네요. 밖에서는 잘 안깨지고 안에서 힘을 주어야 잘 깨지게 되어있다고. 은근 철학적인 구조죠? 알까기가.ㅎㅎ

변할 것 같지 않던 내가 돌아보면 변해있더라구요. 몇 십 년 전에는 절대로 상상하지 못했던 모습이었거든요. 과거의 저는 왜 그리 오만했을까요. 세상 다 아는 것처럼 초월한 인간이라도 된 듯 겉멋만 들어있었어요. 외형적인 면도 그렇지만 특히 내면의 변화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선명해집니다. 절대적인 고정불변의 것이 세상에 존재하기는 하나 싶어요.
알과의 투쟁. 이 말이 참 좋네요. 살아오면서 깨뜨렸던 몇 개의 알이 생각납니다. 그때는 뭐가 그리 어려웠던 건지. 깨고 나면 별것도 아닌데 말이죠.^^

다시 읽으니까 더욱 좋았습니다. 이런 기회를 가져다주신 물감님께 감사드려요~^^

물감 2021-02-27 22:07   좋아요 2 | URL
전에 쓰셨던 리뷰도 읽어봤는데 이번에 쓰신 글과 분위기가 확 다르던데요? 역시 고전은 재독을 해도 새로운 의미를 가지나 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려서부터 고전을 읽어야 한다고 강조하지만, 제 경우를 생각하면 오히려 성인일때 읽는게 더 이해가 잘되니까 꼭 어릴때 읽을 필요까지는 없다고 봐요ㅎㅎㅎ

저는 초반 내용이 가장 좋았어요. 싱클레어가 금지된 세계를 알게 되고 자기 파괴에 빠지는 과정이요. 정말 별거 없는 내용인데 웬만한 심리스릴러 소설보다 흡인력이 엄청났어요. 어린 아이의 고뇌가 고스란히 독자에게 전해지잖아요. 게다가 등장한 데미안이 금지된 세계를 존중해야 한다는 말을 하면서 독자를 확 뒤집어 놓는 것도 너무 좋았고요. 이 책이 왜 유명하고 인기가 많은지 실감했습니다^^

확실히 종교의 색이 짙은 작품이죠. 성경을 잘 모르는 독자에겐 이해가 안되는 내용도 많고요.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만이라도 따로 찾아보신 뒤에 다시 읽어보시면 또 새로울 거에요 ㅎㅎ 한글 성경에서는 ‘가인‘이라고 표기되어있습니다. 카인과 같은 말인데 성경 읽는 사람에게는 가인이 더 익숙하죠 ㅋㅋ

작품이 주는 여러 메시지가 있지만 저는 철저하게 ‘나를 찾는 여정‘에 포커스를 두고 읽었어요~ 내가 누군지 모를때는 롤모델을 참 많이도 삼았었어요 ㅋㅋㅋ 생각해보면 늘 나와 정반대인 타입들을 동경했었는데 알과의 투쟁을 할때마다 남을 닮아가려는걸 그만두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하나하나 다 그만두고보니 지금의 제 모습을 찾았네요. 지금의 내 모습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깊게 생각해본적이 없었는데 참 고마운 작품이네요 ^^ 저도 즐거운 독서였습니다. 함께해주신 나비종님께 감사드립니다 ㅎㅎㅎ
 

글 좀 쓴다는 이들에게 ‘좋은 글의 요건’을 물으면 서로 다른 주장을 내놓습니다.


"작가의 삶과 세계관이 드러나야 하죠."

"독자에게 감동을 주는 글이 좋습니다."

"글쓰기 목적을 달성하는 게 우선이죠."


이유는 간명합니다. 글쓰기 철학과 신념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죠. 일정한 경지에 오른 작가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읍니다.


"글은 알면 알수록 복잡합니다. 작가는 글쓰기를 어려워하는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다만 전 남보다 부지런히 읽고 열심히 쓸 뿐이죠!"


모범 답안입니다. 수능에서 수석을 차지한 학생이 “비법이 있느냐고요? 그냥 교과서 위주로 공부했어요" 라고 말하는 것처럼 무미건조한 대답입니다. 하지만 진리에 가까운 얘기입니다. 품을 들이지 않고 잘 쓰는 사람은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좋은 글을 쓰고 싶다면 읽고, 쓰고, 생각하는 일을 내려놓지 않아야 합니다.



1. 잘 선택하려면 잘 버려야 한다: 선택


불필요한 문장 성분,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으면서 본용언 뒤에 오는 보조용언 등은 잡동사니입니다. 군더더기죠. 군더더기는 ‘글쓰기의 적(敵)’입니다. 글의 논점을 흐리는 뿌연 안개와 같습니다. 군더더기는 멀쩡한 문장도 문법에 맞지 않는 비문으로 만듭니다. 불필요한 성분과 비문이 많으면 독자는 문장을 곱씹느라 전체 맥락을 놓칩니다. 군더더기를 말끔하게 발라내야 메시지를 명료하게 드러낼 수 있습니다.



2. 글을 특별하게 대하는 의식: 제목


제목은 쉽게 말해 전체 내용의 압축입니다. 독자는 내용을 읽기 전에 제목을 읽습니다. 제목을 통해 내용을 유추하고, 주제와 흐름을 짐작합니다. 어떤 독자는 제목만 보고 글을 읽을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하기도 하죠. 제목을 정할 땐 글을 관통하는 핵심 글귀를 추출하는 게 효과적입니다. 의문형 제목으로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거나 딱 떨어지는 제목으로 강한 인상을 남겨도 좋습니다. 모순되는 단어를 맞세워 차이를 부각하거나 대구법 등을 사용하는 것도 한 방법일 테죠.



3. 칼이냐 검이냐 그것이 문제: 문체


술술 잘 읽히는 글이 있습니다. 그런 글은 공통점이 존재합니다. 읽어내려 가다 보면 '강약 중 강약' 같은 리듬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아코디언 주름처럼, 주어와 서술어의 거리가 좁아졌다(단문) 넓어졌다(장문) 합니다. 단문과 장문을 적절히 혼용해서 탄력적인 문장을 구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떻게, 어떤 비율로 섞어 쓰면 효과적일까요? 사실 이런 질문에는 이미 답이 정해져 있습니다. 판단은 당신 몫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내리는 판단이 당신의 문체(文體)를 좌우할 테죠.



4. 따라가는 길과 개척하는 길: 능동


우린 문장을 적을 때 습관적으로 피동문을 적곤 합니다. 피동 형식의 문장은 우리 언어생활 깊숙이 똬리를 틀고 있습니다. 'A 작가가 소설을 썼다'고 해도 될 것을 '그 소설은 A 작가에 의해 씌어졌다'는 식으로 적습니다. 필요한 곳에선 피동을 써야 하지만, 일정한 단락에서 빈번하게 피동문을 남발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간결함이 생명인 보고서와 제안서를 피동문 위주로 작성하는 건 스스로 무덤을 파는 꼴입니다. 피동이 범람하면 글의 힘이 떨어집니다. 게다가 글쓴이의 의견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습니다. ‘자기 생각’을 담지 않고 ‘남 생각’만 백화점식으로 나열한 것처럼 비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글은 대개 독창성이 부족합니다. “누구나 쓸 수 있는 글”이라는 비아냥을 피하기 어렵죠.



5. 낯선 길에서 색다른 여행을: 시작


첫 문장을 쓰는 행위는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에 발을 딛는 것처럼 떨리는 일입니다. 조금만 용기를 내면 광활한 눈밭을 마음껏 뛰놀 수 있지만 걸음을 떼기가 쉽지 않죠. 설렘과 두려움이 교차합니다. 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작가와 기자도 힘 있는 첫 문장을 쓰기 위해 끙끙댑니다. 기자들은 기사 앞 부분에 리드(lead), 즉 첫 번째 문장을 적습니다. 취재를 통해 축적한 방대한 텍스트에서 곁가지를 쳐내고 핵심만 추려서 배치합니다. 몇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핵심을 요약해서 서두에 제시하는 압축형, 의문형 문장을 제시해 호기심을 자극하는 질문형, 관계자의 증언과 고백으로 생동감을 높이는 인용형 리드 등이 있죠.



6. 비우는 것은 곧 채우는 방법: 절제


"지옥으로 가는 길은 형용사로 포장돼 있다( The road to hell is paved with adjectives)." 스티븐 킹이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한 말입니다. 명쾌한 지적입니다. 수식어가 문장에 이바지하지 않으면서 공간만 차지하는 경우가 더러 있죠. 명사와 동사가 나무의 든든한 뿌리라면, 형용사와 부사는 가지와 이파리입니다. 나무는 일정한 시기마다 잔가지를 잘라줘야 합니다. 말라비틀어진 줄기, 멋대로 뻗은 가지를 솎아내야 열매를 잘 맺고 튼실하게 자랍니다. 문장도 가지치기가 필수입니다. 특히 글쓰기 훈련을 시작하는 단계라면, 형용사와 부사를 줄이면서 문장의 근본인 명사와 동사 중심으로 쓰는 버릇을 들이는 게 좋습니다. 글은 포장이 아니라 알맹이로 승부해야 합니다.



7. 주제가 없으면 주체가 없다: 핵심


언론사에 입사한 수습기자는 주로 사회부에서 취재를 시작합니다. 경찰서 기자실 구들장 위에서 쪽잠을 청하며 취재와 글쓰기의 기본을 터득합니다. 졸린 눈을 비벼가며 기사를 송고하면, 돌아오는 건 "야마가 없잖아"라는 선배의 불호령. 글에 핵심 주제가 없다는 겁니다. 참, '야마'라는 언론계 은어는'요지' 정도로 순화해서 부를 필요가 있습니다. 글의 요지는 화살과 비슷합니다. 화살촉이 뭉툭하면 아무리 큰 화살을 날려도 과녁을 뚫을 수 없습니다. 독자의 머릿속에 '흐지부지' '두루뭉술' 같은 단어만 맴돈다면, 이는 작가가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실패했다는 걸 의미합니다. 주제가 모호하거나 반대로 넘치는 글에서는 글을 쓴 주체가 잘 보이지 않습니다. 글 속에 '내'가 없기 때문입니다. ‘남의 글’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기 마련입니다.



8. 서론과 본론과 결론은 잊자: 구조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라는 말을 듣는 순간, 코끼리 모습이 머릿속에 맴돌지 않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고개를 내저으며 코끼리를 지우려 노력해 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이유는? 이미 코끼리라는 틀 안에 갇혔기 때문입니다. 글의 구조도 예외가 아닙니다. '한 편의 글=서론+본론+결론'이란 공식을 깨뜨리지 않으면 창의적인 글쓰기가 어렵습니다. 틀 밖으로 나와야 합니다. 다양한 방식으로 얼개를 짜는 게 좋습니다. 문단을 구성하는 과정은 '퍼즐 맞추기 게임'과 닮았습니다. 둘 다 다양한 조각을 쉴 새 없이 조합해야 한다는 것. 울퉁불퉁한 퍼즐 조각을 조합하는 방법과 순서는 천차만별입니다. 단, 낯선 조각을 집어 드는 순간 머릿속으로 큰 그림을 그리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유리할 테죠.



9. 글도 사람도 향기를 남긴다: 여운


좋은 글은 긴 여운을 남기는 법입니다.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가슴이 부풀고, 희망이 샘솟는 경우가 더러 있지 않습니까. 글을 마무리하는 방법에는 몇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우선, 마지막에서 내용을 추가하고 힘을 줘야 할 때가 있기 마련입니다. 힘을 준다는 건 앞에서 언급한 내용을 한 번 더 강조하고 환기하는 걸 의미합니다. 야구에 빗대면, 있는 힘을 다해 강력한 돌직구를 날리는 거죠. 반면 작가가 미주알고주알 얘기하기보다 독자에게 생각할 여유를 주는 게 효과적일 때도 있습니다. 글을 아끼고 여운을 남긴다고 할까요. ‘뺄셈형 마무리’입니다. 영화의 '열린 결말'도 여기에 해당할 겁니다.



10. 글의 궤적은 곡선에 가깝다: 퇴고


퇴고는 나무를 발견하고 숲을 바라보는 행위인지도 모릅니다. 숲이라는 공간에서 예전에 심어놓은 나무를 찾으려면 사방을 샅샅이 뒤져야 합니다. 매끄럽지 못한 어절, 맞춤법과 표기법에 어긋나는 표현을 찾아 수정하는 일도 이와 비슷하죠. 반대로 숲의 생김새와 규모를 파악하려면 잠시 숲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일부가 아닌 전체를 조망(眺望)할 수 있습니다. 퇴고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글의 흐름과 구조를 검토할 때는 넓은 시각으로 글을 들여다봐야 합니다. 숲 밖에서 숲을 관찰하듯 말입니다. 이때 원고와 잠시 거리를 두는 것도 좋습니다. 글을 마무리한 다음 곧바로 퇴고에 착수하는 게 아니라, 일정한 시간이 흐른 뒤 냉정한 자세로 원고를 대하고 ‘맑은 판단’을 하는 거죠.


초고에서 퇴고로 가는 경로는 험난하고 치열합니다. 험로를 완주하려면, 내가 어디에서 출발했는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틈틈이 뒤를 돌아봐야 하죠. 어디 글만 그러할까요. 인생길에서 중심을 잃고 넘어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지를 툭툭 털고 일어나 무작정 앞만 보고 내달리는 건 그리 현명한 자세가 아닙니다. 위기의 순간일수록 지나온 길을 차분히 복기(復棋)하고 나아갈 방향을 다시 설정한 뒤 걸음을 떼야 합니다. 삶이 그리는 궤적도 곧은 직선이 아니라 둥근 곡선에 가깝습니다.



처음부터 잘 쓰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좋은 문장은 평범한 사람의 노력으로 태어납니다. 누군가 "재능이 있어야 작가가 될 수 있나요?" 물으면, 전 이렇게 답해드릴 겁니다. "습관을 이길 수 있는 재능은 없습니다. 쓰는 습관을 기르고 생각을 멈추지 않으면, 훗날 당신이 더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있습니다. 꼭 그럴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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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1-02-19 10: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지옥으로 가는 길은 형용사로 포장되어 있다.) 이 말이 똭~ 눈에 들어오는건 제 기분탓일까요? 🙄😳 좋은 글 감사합니다!

물감 2021-02-19 10:35   좋아요 2 | URL
글에서 언급한 스티븐킹의 책을 읽어봐야겠어요ㅎㅎ
 
도로변 십자가 모중석 스릴러 클럽 31
제프리 디버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12년 7월
평점 :
일시품절


가끔 개인 정보 피해를 입고 민원을 거는 고객 전화를 받곤 한다. 가장 많은 민원은 명의 도용으로 회원가입이 되었다는 것, 두 번째는 아이디가 해킹되어 금전적인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다. 그런 고객들은 하나같이 본인은 잘못없다고 하는데 분명히 어딘가에서 개인 정보를 흘렸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피해자가 잘못한 건 아니지만 알다시피 나 혼자 운전을 잘해봤자 소용없다는 사실. 여러 온라인의 피해사례 중 가장 큰 이슈라면 자살 사건이 아닐까. 몇 년 전, SNS 계정에 본인의 노출 사진을 올리던 아이돌 가수가 악플들에 시달리다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악플러들을 옹호하는 사람들을 보며 이거 보통 심각한 게 아님을 느꼈었다. 이 같은 온라인 문제들과 위험성에 대해 스릴러소설로 경고하는 제프리 디버의 작품을 읽었다. 지금까지 읽은 디버 작품 중에서 이 책이 가장 스타일리시했다. 증말 팬심을 제외하고 리뷰를 쓰기가 불가한 그레이트 작가다.


도로변에 십자가가 생길 때마다 발생하는 살인 미수 사건. 용의자로 지목된 게임 중독인 남학생의 행방불명. CBI 요원 캐트린 댄스는 한 파워블로그를 통해 소년이 용의자가 된 경위를 파악한다. 자신을 마녀사냥한 블로그 회원들을 노리는 소년의 계획을 알고 다급해진 댄스 요원. 한편 1편에서 환자의 안락사를 도운 게 간호사인 댄스의 모친으로 밝혀져 대중의 비난을 받는 댄스와 가족들. 소년을 찾기도 바쁜데 가족도 보호해야 하고 오해도 풀어야 하는 초난감한 상황. 여태껏 국가와 시민에 헌신해온 그녀는 이대로 모두의 숙적이 되고 마는가.


이번 편의 주 무대는 가상세계, 즉 인터넷이다. 카페, 블로그, SNS, 이메일, 메신저 등등. 모든 온라인 활동 기록이 자신을 옭아매는 족쇄가 되고 위협하는 화살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우리는 인터넷으로 삶의 질이 엄청나게 향상되었지만, 반대로 입을 수 있는 피해의 크기도 엄청나게 증가했다. 이 책은 온라인의 여러 가지 위험성 중에서 마녀사냥 문제를 집중 공략하고 있다. 악플러들이 그럴싸한 거짓 정보를 올려놓으면 음지에 있던 사람들이 달려들어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긴다. 그러면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 것이고, 더 이상 진실은 중요하지 않게 된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중요한 걸까.


보이지 않는 온라인 상대 앞에서 댄스의 동작학은 무용지물이었다. 거기에 모친의 일까지 겹쳐서 하는 일마다 브레이크가 걸렸다. 소년의 범죄를 멈추기 위해 댄스는 블로그의 중단을 요청했으나 블로거는 표현의 자유를 운운하며 협조를 거절했다. 악플러들이 피해자를 양산하는데도 자유를 들먹인다면 소년의 이유 있는 살인도 타당한 범죄가 된다. 책임지지도 못할 행동에 무슨 자유가 있고 권리를 외친단 말인가. 블로그가 주는 권력에 취한 블로거는 위급 상황 중에도 자신의 목숨보다 블로그에 올릴 안내문 생각부터 한다. 정신 나간 사람 같겠지만 현실은 이것보다 더하다.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야 당연한 건데, 이 블로거처럼 뭐가 우선인지 분간도 못한다면 그야말로 인터넷의 폐해일 것이다.


작가는 가상세계의 범죄를 현실로 연결하여 개인의 부주의하고 무책임한 행동이 대중의 폭력을 낳고, 개인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악순환을 지적했다. 그것이 현대에는 흔하게 발생하는 일이다 보니 다들 무감각해져있다. 그래서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보라고 이 작품을 쓴 게 아닐까. 근데 사실 이런 건 디버의 스타일이 아니다. 지금껏 특정 분야를 전문적으로 다룬 적은 많았어도 그것을 사회적 이슈로 주제 삼지는 않던 디버였는데 이번에는 정치/사회의 색이 짙은 편이다. 기존의 디버 스타일을 원했던 팬들에게는 다소 어색하고 낯설고 시큰둥할 수도 있겠는데 내게는 작가의 새로운 매력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믿어야 할 사람을 의심하고 엉뚱한 사람을 믿어버린 결과 댄스의 모녀관계는 금이 가고 피해자는 속출했다. 그렇게 반복된 실수와 후회 속에서 자신을 넘어지게 만드는 요인이 무엇인지 깨닫고 중심 잡는 법을 터득한 댄스. 전편에 비해서 활약이 대폭 줄었지만 수사관으로서, 또 개인으로서 급성장을 보여준 작품이다. 스릴러소설에서 사건과 상황이 바퀴 역할이라면, 인물의 갈등과 심경 변화는 엔진 역할을 하는데 제프리 디버는 이 균형을 기가 막히게 잘 잡는다. 난장판인 사건과 난도질된 심정 가운데 피어나는 감정의 교차...


인간의 악을 연구하는 정유정 작가는 인간의 심연을 이렇게 표현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빛이 들지 않는 숲이 있는데, 그곳의 야수들이 어떤 계기로 봉인해제가 될 때 인간의 폭력성이 깨어난다고. 그 계기는 타인에 대한 시기나 질투일 수도 있고, 자기방어에서 나올 수도 있다. 아직도 게임에 중독된 청소년들이 범죄자가 되는 거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1차원적인 논리대로라면 프로게이머는 죄다 잠재적 범죄자란 말인가. 정유정 작가의 말대로 폭력적이게 된 계기를 살펴야 한다. 소년은 온/오프라인에서 마녀사냥을 하지 않았나. 그렇게 소년을 향한 대중의 화살은 고스란히 대중에게 돌아와 모두를 떨게 했다. 소년의 두려움이 대중의 몫으로 된 것은 결국 인과응보였음을 잊지 말자. 인간을 죽이는 괴물과 그것을 창조한 프랑켄슈타인 중 누가 더 잘못했을까. 잘 생각해보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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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종 2021-02-03 01: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서재에 글을 올리다 보면 묘해질 때가 있습니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가락을 경계로 두 개의 세상에 접속해있는 기분이랄까요. 인터넷은 손끝으로 자신이 만들어내는 또 다른 세상인 거죠.
글을 올릴 때마다 종종 생각해요. 인터넷으로 만들어내는 세상이 실제와 얼마나 가까울까. 이게 진짜 나인가. 내가 바라는 모습의 나인가. 나는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걸까. 진실인 듯하지만 진실이 아니기도 한 공간. 그 이중성과 몇 번의 클릭만으로 삭제가 가능하는 점에서 모래 위에 성을 쌓는 기분이 들어요.

마녀사냥 역시 불안정한 정보로 둘러싸인 외곽에서 출발해서 몇 번의 재가공을 거치다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운 상태에서 와르르 무너지는 것 같아요. 최초로 재가공한 이의 잘못일까, 도미노로 조금씩 툭툭 던지는 의견들로 힘을 보탠 사람들의 잘못일까, 이도 저도 아니라면 불안정한 성곽 자체를 지은 이의 잘못일까요. 쓰러지기 직전에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 사람만의 잘못은 아닐테니까 사실 콕 집어내기가 애매하거든요.

정유정 작가는 성악설의 입장이군요. 숲속 야수의 봉인해제로 비유한 내용에 공감이 갑니다. 소설에서 말씀하신 소년의 본성보다 계기에 무게를 두어야한다는 입장이군요. 대중의 화살이나 프랑켄슈타인의 창조 행위도 마찬가지 맥락이구요. 그래서 제가 내린 결론은 이거예요. 누구도 내 기준으로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거요.^^

물감 2021-02-03 21:52   좋아요 1 | URL
방금전까지 댓글 길게 썼는데 튕겨서 날라갔어요ㅜㅜ 어우 스트레스...

독서활동은 남한테 잘보이려는 의도땜시 온전한 나의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하고픈말 다 하는 저역시도 그렇고요ㅋㅋ

나비종님도 악에 관심이 참 많으셔요^^ 계기에 대한 관점이 신선해서 적어봤어요. 남을 판단하지 말것, 제가 좋아하는 말입니다. 반대로 남들은 내게 관심이 없다는 말도요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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