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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터
김호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4월
평점 :
이제껏 참여했던 서평단 책 중에 가장 만족스러운 책이었다. 드럽게 까탈스러운 나에게서 별 5개를 뽑아먹은 슈퍼 그뤠잇한 작품이다. 몇 년 전, 아바타 조종으로 소개팅을 하던 예능프로그램이 기억난다. 직접 소개팅에 나가는 사람은 아바타가 되어 주인의 통신 명령을 무조건 이행해야 한다. 예능이라 그저 웃고 넘겼지만, 그 시스템이 평생 유지된다면 과연 어떨까? 내 삶의 모든 과정과 결과가 나 스스로 정하고 이뤄낸 게 아니라, 누군가가 그렇게 이끌었고 나는 그대로 따르기만 한 거라면 정녕 나는 존재한다고 볼 수 있을까? 김호연 작가는 그에 대한 질문을 이 작품으로 대답해주었다.
메이저리그 진출을 준비하는 투수 박준석은 교통사고를 당하고 병실에서 만난 최경에게 빅뉴스를 듣게 된다. 내 머릿속에 들어있는 거머리가 나의 감각정보를 누군가에게 전달한다는 것이었다. 그 말이 진실임을 알게 되자 주인공은 자신을 해킹한 X맨을 잡기 위해 그녀와 손을 잡는다. 그녀에게 들은 바로는 자신들을 조종하는 ‘파우스트‘와 그들을 운영하는 ‘메피스토‘라는 단체가 있고, 조종당하는 자신은 ‘파우스터‘로 불린다고 했다. 준석은 자신의 스폰서를 추궁해 메피스토가 정부와도 연결되어있음을 알게 되고, 파우스트의 최종 목적이 자신의 메이저리그 진출이었단 것도 알게 된다. 준석은 자신의 꿈이 파우스트의 꿈으로 이뤄지기 전에 그를 찾아내어 결판을 지으려 한다. 그러나 파우스트들의 권력은 어마어마했고, 메피스토의 시스템은 너무도 견고해서 함께 맞서는 자들이 전부 죽어나갔다. 과연 준석은 보이지 않는 사슬을 끊고서 진정한 자유의 땅을 밟을 수 있을 것인가.
어딘가 익숙한 분위기의 이 작품은 정유정 작가와 장용민 작가의 스타일을 합쳐놓은 듯했다. 사건보다는 인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과, 딱 필요한 문장만으로 채우는 것과, 제 삼자가 내레이션 읽듯이 감정을 절제해가며 쓰여진 문체는 정유정 작가를 닮았다. 기발한 상상력과, 거대한 스케일의 무대와, 빠른 진행 속에 묵직함과, 리얼한 팩션 기법은 장용민 작가와 닮았다.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했다는 영화나 책들도 허구의 이야기로 와닿을 때가 많은데, 이런 팩션 문학은 다큐멘터리 방송 같은 현장감이 들게 한다. 진짜 장점이 눈에 띄게 많은 작가다.
작품 속 메피스토 회사는 젊음을 누리고 싶은 노인들을 위한 첨단 시스템이다. 메피스토와 계약을 맺은 노인들은 파우스트가 되고, 젊은 육체의 인간을 선택해 자신과 동화시켜 청춘의 기분을 느끼고 대리만족하는 변태들이었다. 하필 준석의 파우스트는 메피스토 한국지사의 창립 멤버여서 주인공을 옥죄는 내공이 다른 이들보다도 더 뛰어났다. 노인들은 파우스터의 가족과 지인들을 돈으로 매수하여 파우스터를 도와주었고, 날마다 승승장구하는 파우스터들은 자신의 능력으로 성공가도를 달리는 줄 착각한다. 그러다 진실을 마주한 파우스터는 지난 수고와 노력들에 대해 보상을 받은 게 아니었음을 알고 크게 절규한다. 자신이 힘들 때나 즐거울 때나 느꼈던 감정들이 실은 그렇게 느끼도록 조종당한 것이라면, 나의 감정들은 정녕 내 것이라 할 수 있을까. 나의 선택과 판단들이 내 뜻이 아니었다면 ‘나‘라는 존재를 부정당하는 게 아니고 뭐겠는가. 어쩐지 조지 오웰의 1984가 생각난다.
젊음을 조종한다는 게 노인들이 청춘의 육체를 얻는 건 아니고, 파우스터가 느끼는 기분과 감정들을 똑같이 느껴서 젊은 감각으로 사는 것이었다. 이게 뭐가 좋은 걸까 싶다가도, 내 몸이 10대, 20대 시절로 돌아간다고 생각해보니 미친 듯이 좋을 것만 같았다. 스무 살로 되돌릴 수만 있다면 군대조차 재입대 할 의향이 있다. 30대가 이러한 생각일진대 하물며 노인들은 얼마나 젊음을 원할까. 파우스트들의 그릇된 욕망이 잘못된 것인 줄 알면서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된다는 게 참 씁쓸하다. 그건 그렇고 작품 속 노인들은 대부분 갑부에다 자식농사도 성공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집안 사정도 비슷비슷했는데 유독 자식들과 틀어진 관계의 내용들이 자주 나온다. 그래서 자식보다는 본인의 꼭두각시를 더 사랑하고 줄기차게 매달리고들 있었다. 준석의 파우스트는 말하길 ‘자식들은 부모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지만 파우스터는 그게 된다‘고 했다. 이 생각 또한 기성세대의 속마음을 대변하는 장면이었다. 젊은 날에 뼈 빠지게 고생한 만큼 자신의 권위가 당연하다는 일종의 보상심리가 아랫사람들과의 벽을 쌓고 건강한 소통을 단절한다. 이렇게 자신의 기득권을 잃지 않기 위해 누구라도 무참히 짓밟는 기성세대의 현실을 고발하고 비판하는 김호연 작가였다.
부패한 사회의 이모저모를 다양하게 풍자했는데, 그중 베스트는 준석과 타락한 목사의 대화 장면을 손꼽는다. 세속에 물든 목사는 준석의 할머니를 사주하고 컨트롤한 것을 부인하기 바빴고, 종교라는 그림자에 숨어 끝까지 발뺌하려고 했다. 그 와중에 돈 밝히는 습성은 여전하여 준석은 물질로 목사의 배후를 추궁하는데 성공한다. 현대의 종교계를 비판하는 따끔한 장면이다. 스토리와 메시지의 힘을 동시에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하겠다. 두 번째는 둘째 오빠와 최경의 대화 장면이다. 기성세대는 아집으로 제자리를 지키는 게 아니라, 사회를 이끌어가는 중심에서 묵묵히 견뎌내야 하는 위치라고 오빠는 말한다. 아마도 이 작품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메시지가 아닐까 싶다. 요즘에 꼰대 기질을 가진 젊은 친구들이 갈수록 늘고 있는데 그게 다 윗사람들 보고 배워서 그런거다. 윗물이 더러운데 아랫물이 어떻게 깨끗하랴.
결국 준석과 그의 파우스트는 메이저리그에 진출하여 미국으로 건너갔고, 메피스토 본사에서 엄청난 진실을 마주한다. 나는 이 반전을 정통으로 맞아버렸고 눈과 뇌가 몇 초 동안 굳어져 버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충분히 예측 가능한 거였는데, 워낙 푹 빠져 읽느라 다른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정말 여러 번 반하게 만든다. 만약 메피스토 회사가 무너지지 않고 파우스터들이 해방되지 않고 배드 엔딩으로 끝나면 어땠을까. 디스토피아식의 결말도 나쁘지 않았을 듯? 쓴맛 가득한 이 책은 신의 영역을 침범한 인간의 추악한 말로를 보여준다. 인간은 절대 전지전능할 수 없으며, 고생 없는 성공 또한 불가능하다. 인간은 대가를 감당해내고 얻은 기회만큼만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이 사실을 간과하기 때문에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는 말까지 탄생했다. 그 말에 해당되지 않도록 독서 많이 하고 견문을 넓혀서 정도의 길을 걷는 현자들이 되시길 바란다.
※ 출판사에서 지원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