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적
김호연 지음 / 나무옆의자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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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하다 말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소설은 찌질한 사람들이나 읽는 거라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소설만 빼고 읽는다거나 아예 책을 읽지 않거나 둘 중 하나일 거다. 내가 말한 찌질함은 표면적인 게 아니라 내면에 숨어있는 어떤 응어리를 말함인데, 이것을 인식하는 사람은 그에 대한 갈증해소와 현실도피의 이유로 소설을 찾게 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독자는 자신의 찌질함을 건드는 이야기를 만날 때라야 공감이 우러나오고, 간접적인 경험과 감정을 느끼는 과정에서 치유를 받는다. 나는 보이지 않는 내면에 못처럼 박힌 응어리를 밖으로 끄집어내는 이야기야말로 위대한 작품이라 믿는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소설의 힘이고 소설다움이다. 그런 작품을 쓰는 소설가의 반열에는 항상 김호연 작가가 있었다. 인생을 실전으로 배웠던 그는 힘들게 얻은 내공을 작품 안에 얇게 펴 발라 독자의 찌질함을 살살 어루만져 준다. 설령 의도한 바가 아니래도 그만큼 독자에 대한 배려가 깊다는 뜻일 테다.


납골당의 한 유골함을 들고 튄 황당한 두 남자 이야기. 유골은 이들이 사랑한 여인의 것이었고, 그녀가 좋아했던 여행 장소에 가서 뿌려주자는 충동적인 계획을 실행한다. 그리하여 연적이지만 뜻을 위해 임시 동맹을 맺었는데, 어째 하는 일마다 펑크가 나서 티격태격한다. 틀어진 계획을 다시 짜기 위해 두 사람은 그녀와의 추억들을 하나씩 공유하였고, 알지 못했던 혹은 알고 싶지 않았던 정보들로 더욱 착잡해진 동행이 돼버린다. 여행이 길어지면서 직장이 걱정되는 주인공과, 그녀보다 회사가 더 중요하냐며 자존심을 긁어대는 파트너. 그렇게 가슴이 시키는 대로 하다가 결국 제주도까지 날아간 이들의 충동 여행은 얼마나 더 가야 끝이 나려나.


재미는 있지만 겨우 브로맨스 얘기라면 좀 곤란하다 싶었는데 역시나 괜한 걱정이었다. 일단 인물 소개 먼저 하자면 고인이 된 그녀는 무명의 시나리오 작가이자 출판사와 계약한 소설가였고, 주인공은 그 출판사의 팀장이며, 그의 연적은 최근에 사업을 말아먹은 헬스장 대표이다. 너무도 다른 두 캐릭터의 아슬아슬한 케미가 기본 베이스인데, 이들의 계획이 꼬일수록 짠하기는커녕 웃음만 나오는 게 아이러니이다. 나름대로 애도 중인 둘의 감정에 독자들도 맞춰줘야 하거늘, 시트콤 같은 상황이 반복되니 실례인 줄 알면서도 참지 못할 웃음이 곧 킬링 포인트인 셈. 확실히 김호연 작가는 연속 단타로 독자를 무장해제 시키는 게 주특기이다. 적당한 템포와 선을 지키면서 필요할 때만 텐션을 끌어올리는 것도 볼 때마다 감탄이 나온다. 진정 독자와의 호흡만큼은 김호연을 따라올 작가가 없다고 본다.


이 작품은 <망원동 브라더스>, <고스트라이터즈>와 함께 ‘작가 3부작‘으로 불린다. 세 권 다 주요인물의 직업이 작가이고, 작가의 쓰라린 현실을 조명하는데 <연적>은 그 비참함이 가장 두드러진 작품이다. 작중에선 죽은 그녀에 대한 회상 신을 통해 무명작가들이 어떻게 생계를 유지하는지, 권위 앞에서 어떻게 휘둘리고 착취 당하는지, 출판시장이 얼마나 넘사벽인지를 자세히도 말해준다. 그렇게 맑고 화창했던 하늘에 먹구름이 끼더니 지독한 장마가 시작된다. 주인공은 무단결근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했고, 가족 간에 불화가 커졌으며, 부모 집에서 반강제로 쫓겨나게 된다. 그리고 그녀의 시나리오를 작품화하여 스타가 된 영화감독의 소식을 듣는다. 마침내 퓨즈가 끊어지자 유골함을 훔칠 때의 돌발행동을 하는 주인공과 파트너. 통쾌한 한 방, 아니 두 방을 먹여 복수하고 나니 어느새 장마는 물러가있었다. 


김호연 작가의 위로 방식은 독특하다. 모두가 잘못된 길이라 하지만 나는 그저 멀리 돌아가고 있을 뿐,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을 심어준다. 자신도 한 명의 루저로써 그 길을 걸었기에, 모든 루저들이 멈추지 말고 가던 길을 갔으면 하는 마음이지 않을까. 그래서인지 작품마다 루저가 꼭 있는데, 작가는 이들의 찌질함을 반드시 극복시키고 자기혐오에서 구해낸다. 이대로도 괜찮다고, 지금도 잘하고 있다는 흔한 말보다 이런 은은한 위로가 더 고맙고 힘이 된다. 여하튼 이것으로 김호연 작품의 도장 깨기가 끝났다. 또 어떤 작품으로 돌아올지, 그의 귀환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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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단씨 2021-12-20 23:3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정말 재밌어요.
이 책 읽고 김호연 작가 더 관심 생겼거든요.
저는 이제 망원동 브라더스만 완독하면 됩니다. ^^
이런 작품 자주 만나고 싶어요.

물감 2021-12-20 23:53   좋아요 3 | URL
ㅎㅎㅎ정말 최고에요. 구단씨님도 거의 다 읽으셨군요! 저도 이런 작품, 이런 작가들이 더 많았으면 좋겠어요~ 🙂

미미 2021-12-20 23:5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를 읽고 김호연작가의 책을 외면할수 있을까요? 호불호가 분명하셔서 더 신뢰가 가요!😉 (우유부단 미미)

물감 2021-12-21 00:01   좋아요 3 | URL
리뷰 성공했나요?ㅋㅋ알라딘 마을 홍보요정 미미님만 끌어들이면 제 역할은 다한 겁니다ㅋㅋㅋ

scott 2021-12-21 00:2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물감님 웬쥐 이 리뷰 담달 🥇느낌이 사알 짝 ^ㅅ^

물감 2021-12-21 07:14   좋아요 3 | URL
그런가요! 예언가 스캇님을 믿어봅니다ㅎㅎ

책읽는나무 2021-12-21 05:3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니깐 김호연 작가의 책을 읽으면 물감님의 취향을 알 수 있는 거로군요??^^
믿고 읽어볼 책이로군요!!!
소설은 찌질한 사람들이 읽는, 응어리를 끄집어 내어 치유하는 글이 좋은 소설...👍고개 끄덕끄덕하고 갑니다!!!ㅋㅋㅋ

물감 2021-12-21 07:17   좋아요 3 | URL
제 취향은 진짜 단순한 1차원인데 아무튼 맞습니다ㅎㅎ공감해주셔서 감사해요🙂

공쟝쟝 2021-12-21 07:5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와 제게 올해의 찌질은 닉혼비의 <하이피델리티>였는데요, 내년의 지질로 김호연 작가님 담아둬볼게요! 뚜둥!

물감 2021-12-21 08:55   좋아요 3 | URL
제가 어지간해선 책 추천은 안하는데 김호연 작가의 책들은 그래도 추천해봅니다 ㅋㅋ 대신 별로라도 저 뭐라하시면 안돼요 ㅋㅋㅋㅋ

공쟝쟝 2021-12-21 11:31   좋아요 2 | URL
제가 뭐라고 하지 말라고 한다고 해서 뭐라고 안할 사람인가 ㅋㅋㅋㅋㅋ님이 뭐라고 한다고 해서 눈깜짝할 사람이신가ㅋㅋㅋㅋ 물감님 닉혼비 읽어보셨어요? 아주 찌질한데요. 뭐랄까 너드남의 문학 버전인데요... 그 영화 <연애사용설명서>에 오정세 같았어요. 그래서 잤냐? 잤냐고? 잤어? 잤냐고?의 원본을 봐버림. 근데 오정세가 너무 웃기고 찌질해서 밉지가 않잖아요. 그거를 구축해버리심. 왜 이렇게 길게 댓글 달고 있냐면.... 물감님 글에서 비슷한 냄새 나요. 킁킁 ㅋㅋ (욕인가.)

물감 2021-12-21 13:21   좋아요 1 | URL
오호 저 너드남 좋아하는데 닉 혼비의 책이 그렇단거죠? 일단 접수하겠음요 ㅋㅋ 원래 루저가 루저를 알아보는 법이라 누구보다 루저답게 읽고 쓰는 것입니다(뭐라는건지). 암튼 땡큐요. ㅋㅋㅋ

coolcat329 2021-12-21 12: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김호연 작가 책 <파우스터>만 읽어봤는데 망원동부터 3부작 다 읽어봐야겠어요.

물감 2021-12-21 13:30   좋아요 2 | URL
쿨캣님의 파우스터 리뷰 읽었던 기억이 나요. 다른 책들도 리뷰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Conan 2021-12-21 16: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망원동 브라더스‘랑 ‘불편한 편의점‘ 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연적‘은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안읽었었는데요 물감님 리뷰를 보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물감 2021-12-21 17:40   좋아요 2 | URL
사실은 저도 같은 이유로 손이 안가 마지막에 이책을 읽었더랬습니다ㅎㅎ 알맹이와 다르게 제목이 좀 아쉽긴 해요😅 여튼 후회없을 독서가 되리라 장담할게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