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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 있는 나날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송은경 옮김 / 민음사 / 2021년 4월
평점 :
근래 들었던 것 중에 가장 인상 깊은 말을 옮겨본다. 『멋있게 나이가 드는 게 아니라 원래 멋있던 사람이 나이가 든 것이다.』 이 짧은 문구가 한동안 내 가슴을 헤집어놓았다. 어쩌면 나는 여기에 해당되지 못할까 싶어서. 여러 번 밝힌 바와 같이 나는 멋진 어른이 되는 게 꿈이다. 곱게 늙는 것이 나의 최종 목표다. 이 멋지다는 기준은 물론 주관적일 테지만 내가 고수하는 것들이라면 기본적인 예의범절과 청결, 그리고 유머러스 한 스푼 정도랄까. 무슨 귀족이나 양반을 흉내 낼 것도 아닐뿐더러 오늘날에 그렇게까지 했다간 유난 떤다는 소리나 듣기 십상이다. 그러니 꾸안꾸 패션처럼 은은하게 느껴지는 분위기로 호감을 준다면 그만이겠다. 아무튼 내가 본받고자 하는 멋진 어른들은 대개 차분하고 온화하며 감정 기복이 잘 없다는 게 특징이다. 그러면서 일이든 사생활이든 제시간들에 충실하고 또 자족할 줄도 알았다. 내게는 이런 타입이야말로 진국이라 생각되지만 아마도 당신을 포함한 대다수가 시대에 뒤처진 구식으로 여길 것이다. 그래서 젊은 세대가 이렇게 살아간다는 건 무척이나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스마트 시대가 되고부터 세상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각종 트렌드와 신 문화를 쫓아가기 바쁜 대중들은 여유를 잃어버렸고, 어느새 각자도생을 외치는 1인사회가 되고 말았다. 이 각박해진 세상 가운데서 나 혼자 템포를 늦추려니 자연히 사람들과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되고자 하는 멋진 어른은 뭐랄까, 매우 고독한 하나의 ‘직업‘이라 하겠다. 이제는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져버린 옛 직업 중 하나라서 무시당하기 일쑤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특별해질 수가 있다. 이 직업은 신기하게도 젊어서 보다 세월을 넘기면서 빛을 보게 되는데, 나이 들고도 무너지지 않는 분들의 비결이 바로 평생을 고집해왔던 반듯함 덕분이란 말씀. 삼십 대의 내가 이걸 느낄 정도면 말 다 한 게 아닐까.
감상에 젖어 얘기가 샜는데, <남아 있는 나날>은 내 취향을 100% 저격한 작품으로써, 이제껏 읽었던 저자의 작품 중 가히 최고였다. 이름 좀 날렸다 싶은 거장들은 그 이름만으로도 따라붙는 수식어 같은 게 있다. 예를 들어 카뮈에게는 부조리가, 헤세에게는 방황이, 하루키에게는 섹스가 곧 그것이다. 내가 생각한 이시구로의 수식어는 ‘소외‘이다. 저자는 영국에서 자란 일본인으로서 소외감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그 감정을 작품 곳곳에다 진하게 우려내왔다. <남아 있는 나날>은 다른 작품처럼 대놓고 소외된 느낌은 없었지만 스스로를 삶에서 소외시켰음을 깨닫는 한 남자의 회상으로 끝맺는다. 어쩌면 삶 전체에 크나큰 배신감을 느꼈을 법도 하지만 주인공은 끝까지 ‘멋진 어른‘으로 남기를 소망했다.
영국의 1세대 집사였던 아버지를 따라서 집사가 된 스티븐스. 업계의 명예 단체 ‘헤이스 소사이어티‘의 회원인 그는 자신이 왜 위대한 집사인지를 지난날의 일들과 함께 설명한다. 스티븐스는 현재 모시는 주인 어르신께 일주일 휴가를 받고 여행을 나선다. 그리고 하루의 일정을 소화하며 어느덧 노신사가 된 자신의 과거를 곱씹어 본다. 그는 전 주인을 섬기는 데에 대부분의 세월을 바쳤다. 저택과 하인들을 관리하며 방문객마다 최상의 서비스를 선사했던 집사 스티븐스는 그야말로 흠잡을 데가 없었다. 그러나 인간 스티븐스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많았더랬다. 언제나 직무의 원칙을 앞세웠던 그는 직원들의 해고나 부친의 운명까지도 어쩔 수 없는 일인 양 넘겼었다. 물론 당시에는 그만한 예를 표했으나 지나고 보니 못다 했던 선심에 미련이 남는 것이다. 정신없이 바빴던 일과 속에서 그 정도면 괜찮은 처신이었지 싶다가도 마음이 불편한 건, 왜 항상 시미치 떼면서 사느냐는 옛 동료 K의 발언 때문이었다. 스티븐스는 지금 그녀를 만나러 가는 중이다.
1급 집사로서의 가장 먼저되는 덕목이라면 곧 품위이다. 말과 행동 가짐의 교양도 물론이지만 무엇보다도 ‘확고한 소신‘을 지닐 줄 알아야 한다. 설령 나를 곱지 못한 시선 속에 가두는 상황일지라도 내 신념을 따라야 한다. 과연 그 말대로 스티븐스는 품위가 자질에서 나오는 게 아님을 증명해 보였다. 그렇게 평생을 지켜온 그 품위가 훗날 비난의 화살로 돌아오게 될 줄 누가 알았으랴. 극진히 모셔왔던 전 주인의 만행이 드러나자 스티븐스의 명예는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일이 이렇게 된 건 안타까우나 그는 자신의 도리를 다 한 것뿐이라며 애써 자위했다. 스스로가 위대한 집사임을 내내 강조했던 것은 어떤 자부심과 긍지 때문이 아니라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 걸었던 자기최면인 셈이다. 차마 고개도 들 수 없을 만큼 비참했지만 절대 내색하지 않았다. 인간으로서의 점수 미달은 그렇다 쳐도 집사로써 명예가 실추되는 일은 있어선 안되었다. 하여 프로정신으로 끝까지 자신의 확고한 소신을 밀어붙인 스티븐스는 진정 위대한 집사이다. 이렇듯 사람이 무너지지 않는 비결은 앞서 얘기했듯 평생 지켜왔던 본인의 반듯함에 달려있다. 나를 향한 타인의 비난과 질타를 나까지 따라 해서는 안 된다. 적어도 나만큼은 끝까지 자신을 믿고 응원해 주어야 한다.
드디어 K와 재회한 주인공. 사실 이 여행은 K의 편지로부터 시작되었다. 어쩌면 그녀가 다시 복귀하고 싶은 게 아닐까 하는 그의 생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결혼생활의 불만족이라는 염려 또한 필요가 없었다. 물론 그녀에게도 말 못 할 사정은 있었지만 마음이 가는 곳으로, 가슴이 시키는 대로 살았기에 후회는 하지 않았다. K에게는 있고 스티븐스에게는 없는 것. 바로 감정에 솔직해지는 태도이다. 그가 자신의 남은 날들을 잘 보낼 수 있도록 K는 다시 한번 솔직해지기로 한다. 잠깐 눈물 좀 닦고...
삶이 보내오는 신호를 나는 몇 번이나 놓쳤을까. 현실을 마주하고 싶지 않을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지금을, 오늘을, 현재를 충실하게 살아가야 한다. 가만있어도 흘러가는 시간이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해주진 않는다. 그러니 외면치 말 것. 숨지도 않을 것. 그렇게 걷고 또 걷다 보면 어떤 실망과 좌절에도 무너지지 않을 위대함에 도달할 것이다. 어떻게든 버티다 보면 찾아오는 주말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