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굴레 동서문화사 월드북 150
서머싯 몸 지음, 조용만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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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서평을 눈팅해오던 친구가 그러는데, 내가 비평만 써서 그런지 글이 죄다 어둡단다. 그게 컨셉이라는 걸 몰라주다니 매우 섭섭하고만? 전에도 했던 얘기인데 나님은 그렇게 생각한다. 앞서 수많은 칭찬 일색의 평을 꼭 나까지 따라 쓸 필요가 있느냐고. 내 글이 아무나 쓸 수 있을 수준이라면, 또 남들이 쓴 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면 평을 남기는 의미가 있을까 싶고. 하여 레드오션을 피하고자 비평을 고른 거란다, 벗이여. 물론 이런 나라도 딱히 비평할 게 없다거나 칭찬하지 않을 수 없는 작품은 얼마든지 호평을 남긴단다. 더군다나 이제는 여성호르몬이 많아져서 예전 같은 까칠함은 죽었다고 볼 수 있지. 그래도 요즘에 쓴 것들을 보면 많이 담백해졌다고 생각하는데. 아니야?


서머싯 몸의 자전소설이자 유일한 벽돌 책인 <인간의 굴레>를 읽었다. 다른 작품들에서 보여준 저자만의 위트와 풍자는 온데간데없고 시종일관 칙칙한 분위기로 흘러갔다. <인간의 굴레>는 인생의 해답을 갈구하는 어느 소년의 방황기이다. 부모를 여읜 필립은 목사관인 큰아버지 집으로 보내진다. 소년을 성직자로 키우고자 했던 큰아버지의 뜻대로 반듯하게 자란 필립은 신학대를 앞두고 탈선해버린다. 이후 독일로 건너가 하숙하면서 회계사가 되기로 한 필립. 그러나 자신이 생각했던 삶과 맞지 않아 또다시 낙담한다. 답답했던 고향만 벗어나면 잘 될 거라던 자신감은 어디 가고 벌써 회의감으로 가득 차버린다. 이어서 독일과 프랑스와는 달리 영국은 행동과 사상의 자유가 없다던 모 하숙생의 지적에 날벼락을 맞는다. 비록 탈선했다지만 자타 공인 정직한 삶이었는데 지적을 받고 보니 뭔가 헛살았다는 허탈감이 드는 거다. 그렇게 해서 필립은 저만의 돌파구를 필사적으로 찾아 떠나는 우물 밖 개구리가 되기로 한다.


필립은 신앙심을 벗어던지고 싶어 하나 막상 그러지는 못해 괴로워한다. 한편 필립이 주목하게 된 하숙생 W는 비국교파라면서 기독교인의 생활을 실천하고 있었다. 종교에 관심이 많다던 W는 어떤 종교의 이론이라도 결점을 찾아내 반박하고 입증시켰다. 그러면서 자신은 남들이 믿는 것들은 아무것도 믿지 않는단다. 정말 그런가? 인간이란 그 시대 나름으로만 믿을 수밖에 없는 건가? 과거의 믿음들이 과오였듯이 지금의 믿음도 틀릴 수가 있다는 뜻일까? 교육받아왔던 국교회의 권위와 믿음의 가치는 절대적인 게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피어난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신을 왜 믿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말하는 자신에게 놀란다. 이것은 신앙심을 버린 게 아니라 본래 필립 자신이 신앙심이 없는 인간임을 깨닫게 된 거였다. 마침내 종교라는 무거운 허물을 벗고서 홀가분해진 필립의 인생 2라운드가 시작되었다.


큰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술을 하겠다며 무작정 파리로 떠난 주인공. 미대를 가서 친구도 사귀고 그림도 배워가며 보란 듯이 낭만을 즐긴다. 재능이 없음을 느끼지만 예술이 가진 자유가 좋다니까 그거면 됐지 싶었다. 그러다 파리의 유명 시인인 크론쇼와 인생 가치관에 대한 논박을 주고받는데, 시인은 필립의 윤리관이나 도덕률이 기독교 바탕의 정의라고 지적했다. 이에 신앙인이 아니라고 대꾸하지만, 선을 행하는 방식과 태도가 세속적이지 않다면 결국 시인의 말이 맞는 셈이었다. 따라서 같은 행동에도 누군가에겐 죄책감이 들고, 누군가는 자유의지라는 말인데, 그것이 선이라고 해서 공을 세울 수도 없거니와 악이라고 해서 비난받을 이유도 없다는 뜻이었다(272p). 필립은 갈수록 혼란스럽다. 종교를 떠나 선악이 무의미하단 것도, 사회의 무질서는 개인의 선입관일 뿐이란 것도, 삶은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으로 움직인단 것도 전부 회의주의자의 헛소리로 들렸다. 시인의 말마따나 자신이 실천한 일들에는 기분 좋은 쾌감이 깔려있고, 결국 쾌락을 추구하는 게 곧 행복을 찾는 것과도 같다면 세상의 온갖 것들은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 걸까. 정녕 인생의 의미는 자기실현에 있는 게 아니었나. 필립이 필사적으로 반박하는 것은 그 자신도 태어나 살아가는 데에 어떤 의심이 들었을 테고, 시인의 전혀 다른 관점과 해석을 영 터무니없다고 생각되지 않아서였다.


이리하여 2년간 미술을 전공하던 필립은, 과거 공부했던 예술과 인생관, 문학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모조리 경멸하게 되었다. 때마침 옛 하숙집 동료 H와 재회하여 응어리 좀 풀었더니 아 글쎄, 옛날에 들려준 사상과 철학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어 실망이 대단했다. 한때 필립이 존경했던 친구였고, 그의 정신세계에 작게나마 구원받기까지 했었단 말이다. 그랬던 필립은 H의 전혀 진보하지 않은 사상에도 경멸을 느꼈다. 지가 경험해 보지 않았으면 부정해대는 게 아주 습관인데, 솔직히 이런 애들은 무시하는 게 정답이다. 이어서 필립은 자신이 인정한 화가의 작품을 H에게 소개하며 예술적 가치를 설명해 준다. 그러나 문외한이었던 동료는 필립의 설명만큼 대단하다고 느끼질 못한다. 이런 장면들은 삶의 가치나 의미가 다 달라서, 내가 옳다 믿고 인정한 것들이 누구나에게 들어맞을 수 없다는 점을 시사한다. 필립이 옛 신앙과 각종 사상들을 의심했던 것처럼, 그의 절대 확신이 누군가에게 거부당하기도 하는 역지사지를 보여주었다.


한편 방학 동안 외국 곳곳을 다녀온 미술학과 동기가 현재 잘나가는 인상파 미술을 비난하여 분위기가 싸해진다. 이 논란을 잠자코 지켜보던 필립도 그 주장에 매료되고 만다. 이런 식으로 세상은 기존의 믿음과 관념들이 무너지고 신문물의 기초가 생겨나기를 반복해왔다. 그런즉 시대별 가치관은 계속 바뀌는 법이어서, 필립은 고향 집을 찾아가 미술을 접겠다는 의사를 밝힌다. 성직자도 관두고 회계사도 관두고 이젠 화가까지 그만둔다는 필립의 대책 없는 태도에 큰아버지는 억장이 무너진다. 더욱이 총명하고 사리분별 잘 하는 애가 성인이 되고서도 진로 하나 못 찾는 게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 제멋대로 해서 다 실패했으니 이제는 큰아버지 조언대로 해야 할 처지였지만, 꼴에 사회 물 좀 먹었다던 필립은 도전과 실패로 운명을 경험하는 쪽을 택하겠단다. 이 장면에서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가 절로 연상되었는데, 큰아버지는 나르치스처럼 직관과 통찰로 생을 다스려야 한다 말하고, 필립은 골드문트처럼 경험과 창조로 한계를 깨고 싶어 했다. 그런 성향을 탓하려는 게 아니라, 필립이 세상 물정 모르는 헛똑똑이에다 등골 브레이커라는 게 문제였다. 현실에서도 참 피곤하다 싶으면 다 이런 타입이었지, 아마?


이때부터 필립은 여러 위인들의 철학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온갖 사상을 종합해 봤더니 모두가 개인의 주장일 뿐이고 개개인이 철학자여야 한다는 결론이었다. 그러니까 어떤 완벽한 패러다임이라도 그 시대의 전유물에 불과하다는 것. 이것은 필립이 타국에 가서, 이해 안 되는 문화와 체계를 고수하는 현지인들을 제 삼자의 입장에서 보고 듣고 깨달은 값진 탐험과 통찰이었다. 즉 각자만의 진리가 어디에나 있으며 어디에도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필립 자신이 배웠던 선과 미덕과 지혜들도 지금 속해있는 세계와 시대의 전유물과 선입관이라는 말이렸다. 이쯤에서 필립이 어떻게 헛똑똑이냐고 따질 법도 한데, 여기에는 필립의 콤플렉스인 절름발이를 원인으로 들 수 있다. 신학교를 다니는 내내 놀림거리였는데다 친구 하나 사귀지 못해 늘 고립된 생활을 지내온 주인공. 그렇다 보니 뭐든지 혼자 생각하고 판단해 버릇 하여 사회성이 심하게 무너진 것이다. 또 그로 인한 열등감, 자의식 과잉, 피해 망상은 덤으로 따라오는 종합선물세트였다. 하여 이렇게 배배 꼬인 성격을 이해한다 쳐도 연민의 마음까진 들지 않았다. 그의 밑바닥은 오만과 경멸로 가득했기 때문에.


당시 영국의 4대 직업은 종교, 의료, 법학, 예술, 이렇게 네 가지였다. 어쩔 수 없이 의학생으로 지원한 필립은 또 얼마 못 가서 흥미를 잃고 만다. 사회에서 알아주는 직업을 다 겪어봤지만 어느 것도 필립의 심장을 뛰게 하지 못했다. 게다가 배운 건 많아서 동기들의 수준은 한참 낮아 보였고, 그놈의 절름발이 때문에 우정을 쌓는 일도 없었다. 철학마저 소용없는 그에게 내려오는 빛줄기, 그것은 엘.오.뷔.일.럽!(feat.에이핑크). 그는 자신을 무시하는 카페 직원에게 굴욕을 갚아주려다가 역으로 사랑에 빠진다. 보통내기가 아니었던 그녀에게 갖은 모욕과 수치심을 받아 가면서도 기어코 연인이 된다. 과연 위대하신 사랑은 필립의 기나긴 번민을 말끔히 지워주었다. 그러나 인간관계를 글로도 배우지 않았던 필립이 호구가 되는 건 당연지사. 대개 남자들의 첫사랑은 자신과 반대되는 타입일 때가 많은데, 그것은 나에겐 없는 매력의 이성을 신격화하기 때문이다. 어쩌다 운 좋게 사귀었다 해도 나와 전혀 다른 성향의 이성을 대할 줄 모르기 때문에 첫사랑은 실패하도록 되어있다. 그래서 보통은 각성하거나 트라우마에 걸리거나 하는데 필립은 엄연히 후자였다. 그는 돈으로밖에 애인을 잡아두지 못했고, 그래서 통장이 줄어드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 쓰면서도 참 답답하다.


감정의 교류도 없는 이 관계가 부적절하다면서, 또 이 사랑은 고문이나 다름없다면서 왜 그토록 맞지도 않는 사람과의 인연을 고집했을까. 돈으로 누군가의 기쁨과 행복을 살 수 있다면 차라리 나았겠다. 속물 그 자체인 자유로운 영혼의 애인은 전혀 고맙지 않다면서 매번 튕겨냈으니까. 필립의 병적으로 뒤틀린 애착은 부모에게 받지 못한 사랑의 부재와, 불구로 인한 사회적 고립이 낳은 결과물이다. 그런 것치곤 잘 자라주었다 하겠으나 인간을 썩 좋아하지 않는 그에게 친화력을 갖기란 나님이 우사인 볼트를 이기는 것만큼이나 불가한 일이다. 어쩌면 필립은 굴레에서 해방되기에 지친 나머지 그냥 주어진 대로 살고 싶어진지도 모른다. 하여 그토록 갈망했던 주체성을 버리고 예전 같은 굴종의 삶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이건 뭐 개그콘서트가 따로 없군.


결국 애인은 딴 남자한테 가고, 솔로가 된 주인공은 별거 중인 한 유부녀에게 푹 빠져버린다. 누구와는 다르게 상냥하고 속 깊은 그녀는 필립의 지난 상처를 하나하나 치유해 주었다. 자신을 전적으로 지지해 주는 사람을 만나 안심했더니 곧바로 전 애인이 돌싱이 되어 필립을 찾아온다. 그것도 임신까지 한 상태로. 남편에게 버림받아 갈 곳이 없어진 그녀를 보자, 옛 감정이 돋아나 또다시 호구 짓을 반복하는 필립이 이해가 되면서도 제발 정신 좀 차렸으면 싶었다. 애인의 여전한 속물근성과 박쥐같은 태도에도 마냥 좋아서 직진하는 이유가 뭘까? 나 같은 불구자도 누군가를 사랑해 줄 자격이 생겼다는 기쁨 때문이라고 생각되었다. 여하간 이 친구는 고통에 적응해서 그런지 더 좋은 선택권이 주어져도 거부반응을 보였다. 그 때문에 항상 지는 게임을 좋아했고, 무언가 결여된 듯한 관계를 선호했다. 아직 세상 때가 묻지 않은 풋내기라면 모를까, 이렇게 알 거 다 아는 사람이 연애 초보자라면 좀 많이 위험하지.


필립의 호구 짓은 계속된다. 정녕 내가 본 것들 중에서 베스트 아닐까 싶을 정도. 그는 애인에게 필요한 모든 비용을 아낌없이 대준다. 애인이 고마워하긴커녕 상처되는 말들을 쏘는데도 그저 좋단다. 심지어 콤플렉스가 있는데도 애인이 돌아와 줬으니, 별 노력 없이도 열등감을 극복했다고 믿는 눈치였다. 그러다 필립의 친구와 그녀 사이의 야릇한 기류를 감지하는데, 여기서 필립의 삐딱한 악마적 반항심이 작용하여 두 남녀를 여행까지 보내준다. 돈도 없다면서 경비까지 보태주는 건 뭐냐고 진짜. 여행을 마치면 애인이 자기한테 돌아올 거라는 그 근본 없는 믿음을 보면서, 이 찐따시끼는 아주 호되게 당해서 하루빨리 각성하지 않는 한 답이 없을 성싶었다. 결국 애인은 종적을 감추었고, 드디어 망상에서 탈출하나 했더니 이번에는 걷어찼던 유부녀한테 찾아가 잘해보자며 애걸복걸하는 게 아닌가. 필립은 자길 버리고 딴 남자에게 갔다가 후회하고 돌아온 애인의 행동을 고대로 되풀이하고 있었다. 야 이건 뭐 작가가 아주 엿맥이려고 작정했네. 비록 미숙하긴 했어도 언제나 이성적이었던 필립이 언제 이렇게 감정적으로 변해버렸는지 모르겠다.


인간은 삶에 권태가 오면 사랑을 찾고, 사랑에 패배하면 본업에 매진한다. 지친 마음을 씻어내릴 출구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가. 하여 필립은 다시 의대 시험을 치르고 모 병원의 조수로 들어간 데에 썩 만족해했다. 또 천차만별의 환자를 대하면서 인생의 공평함을 서서히 알아갔다. 드디어 작가의 장난질이 끝났는지, 원래의 이성적이던 모습으로 돌아온 필립은 조금씩 성숙한 내면을 갖추게 된다. 이윽고 주어진 시련은, 정신적 지주였던 시인 크론쇼의 죽음이었다. 간경화로 사망한 시인의 죽음은, 의사인 자신의 무력함과 위대하다던 생명의 덧없음을 실감케 했다. 사랑에 배반당했을 때와는 다른 종류의 좌절과 절망이 삶의 목적을 무로 돌려놓았다. 성경에도 이 같은 기록이 있다.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으니라(마 6:29).』 정녕 인생의 허무를 설명하기에 이만한 것도 없다는 생각이다.


과연 필립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세계란 없다고 봐야 할까. 어떻게 살아본들 맥없이 굴러가는 쳇바퀴나 마찬가지일까. 그러다 어느 기자와의 대화로 평생 질문에 조금씩 접근하자 흥분하기 시작한 닥터 필립. 그 기자는 제 외모부터 집안 사정까지 딱 봐도 하자가 많았는데, 열등감은커녕 발랄하고 긍정적인 데다 조건과 환경 탓을 일절 하지 않아 필립의 호기심을 샀더랬다. 특히 처자식을 교회에 보내면서 정작 본인은 무신론자라는 말에, 자신이 얼마나 뻣뻣하고 폐쇄적인 사람인지를 깨닫는다. 철저한 질서의 세계에서 자라난 탓에 모 아니면 도라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고집했고, 거기에 부합하지 않으면 이해가 불가하여 무의미한 대상으로 치부했던 것이다. 하여 결함 따위는 무시하고 자신의 쾌감과 만족에만 집중하는 그 기자의 열린 사고가 일종의 힌트가 된 셈이다. 작품을 통틀어서 이 구간이 가장 중요하다고 느꼈다. 종교라는 꽉 막힌 질서의 세계를 탈출하여 자유로운 예술의 세계로 갔더니 오히려 혼돈을 마주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필립은 이 혼돈이 뼛속 깊이 박힌 신앙 때문이라 여겼고 그것을 떼어내는 게 정답이라고 믿었었다. 그러나 기자의 사고를 통해 꼭 분리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유연하게 살아갈 수 있음을 어렴풋이 알게 된다. 이것을 정신분석학에서는 인간 사회가 종교를 분리하여 사는 것이 불가하다고 얘기한다. ‘절대성‘은 오직 신에게만 있는 속성이므로, 그 밖에 불완전한 혼돈 속에서 어떤 불변의 진리를 찾는다는 게 불가하기 때문이다. 이점을 이해한다면 존재와 세상의 부조화를 그럭저럭 이겨낼 수가 있을 것이다.


필립은 길거리에서 발견한 애인을 기어이 찾아가 아는 체를 하고서 집으로 데려온다. 나는 진심으로 저자의 멱살을 잡아뜯고 싶어졌다. 이것은 주인공의 성장을 위한 게 아니라 소재 고갈로 인한 재탕처럼만 느껴졌다. 이제 그녀를 봐도 심장이 뛰지 않는다 말하지만, 또 지난날의 자신이 어리석었다 시인하지만, 대체 어떤 의무로 그녀와 아이를 챙겨주려는 건지 내 머리로는 영 납득이 안된다. 애인은 구직할 생각도 없었고, 툭하면 필립의 재산을 낭비해댔다. 사실 이렇게 될 줄 몰랐다 할 필립도 아니었으나 꼭 애인 앞에 서면 어딘가 낙천적인 성미가 튀어나와서 문제였다. 오직 기도로써 불구가 고쳐질 거라던 옛 자신의 순진함을 비웃더니, 지금도 그 하찮은 순진함에 고생하고 있지 않나. 그래도 본투비 똥멍청이는 아니었는지, 애인의 같잖은 플러팅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열뻗친 그녀가 수치와 모욕을 퍼붓는데도 웃어넘길 만큼 성숙해진 주인공. 그의 성장은 실패한 연애의 학습 덕분이 아니라 온갖 환자를 상대하며 터득한 눈썰미와 인간 심리와 이타심에 있었다. 그러니까 요지경 세상을 이해하는 길은 개개인의 특별함보다도 전 인류의 보편성을 파악하는 데에 있지 않았을까. 부자도 현자도 알파메일도, 불구로 태어나 고통받는 필립 그 자신과 다를 바 없다는 말이다. 이러한 인정이 실존의 이분법적 모순을 해결하고 삶에 의미를 부여하며 자연과의 균형을 회복하는 유일한 방법임을 알기까지, 인간은 얼마나 깨어지고 부서져야만 했는가.


드디어, 드디어 애인이 떠나갔다. 집안을 왈칵 뒤집어놓은 덕에 하숙집을 옮겨야 했지만 어쨌거나 필립은 여러 의미로 해방되었다. 자 이제 좀 풀리려나 했더니, 아 그놈의 주식 때문에 파산 직전까지 가고야 말았다. 여기서 또 한 번 필립의 순진무구함을 야단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전의 경험들로 경각심을 얻기는커녕 뭐든 계획대로 되리라는 그 확신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거지? 생판 남남인 애인과 아이에게 재산을 갖다 바치는 이유는 또 뭐지? 예술이나 성공 같은 이상주의를 경멸한다면서, 그렇다고 막 현실주의자도 아닌 필립의 방관자식 태도는 어쩐지 불행을 긁어모으는 소악마에 가까웠다. 결국 의사 조수도 관두고 쫄쫄 굶어가며 일거리를 찾아다니는 필립은 자신의 길을 반대한 큰아버지에게 대들던 것과, 친구들 앞에서 박식함을 자랑하곤 했던 게 떠올라 비참해서 죽을 맛이었다. 이처럼 본인은 아니라는데, 꼭 잘되면 내 탓 안되면 남 탓을 하는 콧대 높은 인간들이 있다. 그래서 작가는 이 오만한 줄 모르는 청년을 가차 없이 굴리는 것인가 싶더랬다.


어느 상회의 판매 직원이 된 그는 간신히 의식주를 해결하지만, 스스로가 싸구려 상품이 된 것만 같아서 또 죽을 맛이다. 돈도 없거니와 제 모습이 창피해서 모든 인맥을 끊어버렸고, 날마다 상대하는 고객들과 숨 막히는 기숙사 생활로 인간 혐오증에 걸릴 지경이다. 환자들을 대할 때의 이타심은 다 어디 가고 이 같은 증오의 감정만이 남았는가. 이 기나긴 여정 끝에 도달한 해답은 곧 인생의 무의미함이었다. 그렇게 믿고 나니 차라리 가슴이 뛸 정도였다. 이어서 큰아버지가 죽고 유산을 물려받아 다시 의학생으로 복귀한 필립은, 애정과 인류애가 다분했던 예전과는 달리 좀 더 초연한 태도로 환자들과 마주하게 된다. 앞전에 실직과 가난을 겪어본 터라 환자들의 기분을 헤아리는 일에도 그만이었다. 특히 죽음에 관해서 더 그러했다. 시인도 죽고, 절친도 죽고, 애인의 아이도 죽고, 큰아버지도 죽었다. 친애하는 이들의 죽음은, 인생의 무의미를 쫓아 청춘을 탕진했었던 자신을 반성하게 해주었다. 역시 거울 치료와 충격요법이 최고라니깐.


그래도 작가가 양심에 찔렸던지 해피엔딩으로 잘 마무리해 주었다. 기왕 괴롭히기로 한 거, 끝까지 고통의 굴레였어도 나쁘지 않았겠다만. 어찌어찌해서 필립은 증오와 공허의 비극을 극복해낸다. 필립처럼 영혼의 갈증에 시달려본 사람이라면 방황이 끝나는 지점이 어딘지를 알고 있을 것이다. 아직 모른다면 알게 될 때가 분명히 올 것이다. 신앙의 족쇄, 가난한 집안, 신체적 결함, 사랑의 배반 등 여러 가지로 필립과 닮아있는 나님은 더더욱 그의 감정 선과 심리적 상태변화에 공감되었고, 움켜쥘수록 달아나는 행복의 모순과 법칙도 충분히 이해되었다. 작품 해설에 따르면, 인간 존재의 불가지성이 서머싯 몸의 전 작품을 관통하는 인간성의 비밀이라고 했다. 하여 의미를 지닌 인생은 없으며 단지 각자가 의미를 부여하기 나름이라고 생각한다. 달리 말하자면, 무의미한 인생에도 나름의 작품성을 가질 수 있다는 얘기다.


역시 벽돌책이라 그런지 서평마저도 딥다 길어진다. 진짜 역대급인듯 한데 도저히 짧게 쓸만한 작품이 아니어서 말이죠. 어차피 읽는 사람도 없는데 괜한 걱정이로군. 수고한 나 자신에게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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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5-02-06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머싯 몸의 광팬으로서 제가 엄청 좋아하는 소설입니다.
미술에 재능이 있나 알아보고 실패를 맛보며 자기 길을 찾아가는 이야기도 흥미롭고,
삼각관계에 빠져 쓴 맛을 보는 부분도 흥미로웠어요.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다음과 같은 사색적인 글입니다.
“사상 자체는 실상 그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에게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사상을 마치 경매장에 나온 도자기들처럼 다루었다. 손에 들고 형태와 빛깔을 즐기면서 마음속으로 값을 매겼다. 그런 다음 다시 상자 속에 넣어두고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인간의 굴레에서 2>, 25쪽. - 제 서재의 페이퍼에서 복사해 왔어요. 저는 민음사의 두 권짜리로 읽었어용.

물감 2025-02-06 15:33   좋아요 1 | URL
저자의 다른 작품들과 성격이 달라서 좀 이질적이었어요. 읽는 내내 어찌나 <데이비드 코퍼필드> 같았던지요. 그보다는 매운 맛이라서 좋았습니다만.

인용하신 문구처럼, 주인공 필립이 세상에서 으뜸이라 하는 것들을 제 식대로 타파해가는 게 신선하더라고요. 저는 평에 적은 것처럼, ˝인간이란 그 시대 나름으로만 믿을 수밖에 없는가˝라는 사색이 참 와닿았습니다. 누구나 자신의 생각이 맞다고만 생각하니까요~~

저는 민음사 세계문학은 판형이 좁고 길어서 읽기가 불편하더라고요. 그래서 벽돌책은 동서문화사를 선호합니다요 ㅋ
 
젊은 베르터의 고뇌 창비세계문학 1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임홍배 옮김 / 창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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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로 고전문학은 20세기보다 19세기 이전의 문학들이 더 쉽게 읽힌다. 적어도 내게는 20세기의 문학들이 더 심오하고 복잡하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오래된 작품일수록 버거울 거라는 예상이 깨질 때마다, 슬슬 세월을 더 거슬러 올라가 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일부러 피했던 괴테를 이제서야 만났다. 무려 1749년생이라는데 괜스레 예의를 갖춰야 할 것만 같았다는. <젊은 베르터의 고뇌>는 사랑에 빠진 남자의 절규를 담아낸, 다소 평범하기 그지없는 짝사랑 이야기에 불과하다. 실화를 바탕으로 해서인지 썩 재미있게 풀어가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나 또한 높은 점수를 줄 수밖에 없었는데, 남정네들의 뻔한 감정이 아닌 거대한 우주 전쟁과도 같아서였다. 아마도 나 같은 F들은 과몰입하지 않을 수가 없을듯한데.


주인공 베르터는 예비신부인 로테를 사랑하게 되었다. 할 수 없이 친구로서 곁에 있는 정도로 만족해야 했고, 그녀의 약혼자와도 가까워져 이중삼중으로 고통이 더해만 갔다.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커져서 멀리 떠나기도 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로테는 친구라는 명목으로 베르터를 곁에 두고 싶어 했다. 보다시피 짝사랑으로 열병을 앓는 내용이 전부지만 그래서 볼만한 작품이다. 음식도 아는 맛을 자꾸 찾게 되듯이 말이다. 읽는 동안 이 책은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해 본 적 있는 사람이나 몰입하겠다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좋아하는 사람 때문에 구차해져본 적이 있는 사람만이 공감할 작품이라고 생각되었다. 하여 베르터의 고뇌가 마치 내 이야기만 같은 착각을 주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면 상대방이 행복해지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 행복이 나 아닌 다른 사람과 이뤄지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비겁하고 옹졸한 나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결국 나는 제 삼자의 입장이 되고 말았다. 첫 연애를 되돌아 볼 때, 갖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파괴한다는 심정이 어떤 건지를 처음으로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것조차 용기가 있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 행위였고, 나같이 자존감 없는 사람은 그저 먼발치에서 바라보고 신세한탄과 현실 부정에 그칠 따름이었다. 나 역시 베르터처럼 속내를 고작 글로만 남겨서 응어리를 덜어내곤 했었다. 그렇게 긴 시간을 힘들어하느니 되든 안되든 그냥 지르고 볼 것을, 그때는 그렇게 본심을 꺼내기가 두렵고 겁이 났다. 그래서 베르터 혼자 오두방정 떨어대는 모습들이, 누가 보면 구차하고 한심하다 할 그 모습들이 과거의 나를 보는 듯 하여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로테는 이미 임자가 있는 몸이었기에 어쩔 수 없는 양보와 타협이 필요하단 걸 알고 시작한 게임이었다. 이러나저러나 질 수밖에 없는 게임을 시작했다면 판을 엎지 않는 이상 결말은 정해져 있으므로, 불리한 입장을 자처한 베르터는 사실 할 말이 없는 게 맞다. 그나마 베르터 정도면 양반이다. 나는 애인이 절친과 눈이 맞아 결혼까지 간 최악의 경우였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행복을 만들어가는 광경을 보고만 있어야 하는, 지옥도 참 그런 지옥이 없었다. 한국이 총기 소지가 허용되었다면 나도 자살했을지 모르겠다. 정신이 갈 때까지 갔을 때는, 혹여 내가 잘못된다면 나를 봐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어쩌면 자살한 베르터도 그 같은 생각이었는지 모르지만, 자신의 비겁한 사랑과 운명의 농간에 반항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누군가는 베르터가 개츠비처럼 사랑 자체를 숭배한 게 아니냐고 할 텐데 솔직히 그게 뭐가 중요한가.


작중에서 베르터는 자신의 처지와 똑같은 어느 하인을 만난다. 그 하인은 자신의 안주인을 사모하고 있지만 딱히 어쩔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 장면을 굳이 넣은 건 베르터의 거울 치료 때문인가 했는데, 알고 보니 본 작품을 쓰게 된 계기였다고 한다. 실제로 유부녀를 사모한 괴테가, 자기와 똑같은 상황인 친구의 일화를 집어넣은 거였다. 다만 현실에선 친구가 자살했고, 소설에서는 주인공이 자살한 것으로 바뀌었다. 놀랍게도 괴테의 친구가 자살할 때 쓴 총기는, 괴테가 사모하던 여인에게서 빌렸다고 하니 괴테의 죄책감이 얼마나 컸을지 상상조차 안 된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그 사람한테는 상처가 될 수도 있잖아요‘라는 현대 명언이 문득 떠오른다.


이 작품은 절반가량이 주인공의 성향을 나타내는 내용들로 채워져있다. 그러니까 메인 테마인 짝사랑만큼이나 인물 묘사의 비중이 높다는 얘기다. 과거 문인들이 대개 그렇듯 베르터도 둘째가라면 서러운 낭만파 중에 낭만파이다. 이웃과 아이들을 사랑하며, 줄곧 적선도 하고, 하인들의 고민도 들어주는 고운 심성을 지녔다. 자연과 시를 사랑하고, 잘려나간 호두나무에 슬퍼했으며, 궁정 상관들의 불의를 참지 못하는 청렴한 사람이었다. 마치 사랑을 누릴 자격은 이런 사람에게나 주어져야 한다는 듯한 무언의 경고로 느껴질 정도. 이렇게 평화와 질서로 살아가는 베르터의 삶에 방문한 전쟁 같은 사랑은 축복이 아닌 저주였다. 과연 베르터에게 사랑의 자격이 있기나 했을까.


로테는 하루도 빼먹지 않고 찾아오는 베르터를 보고도 어떻게 아무런 의심을 안 했는지 모르겠다. 자신은 이미 결혼한 몸이니 설마 별일이야 있겠냐는 생각이었다면 차라리 낫겠다. 대체 어떤 남자가 매일같이 찾아와 가벼운 말동무나 하고 앉았겠냐. 결국엔 우정을 가장한 별개의 감정이라는 촉이 오지만, 그럼에도 우린 친구일 뿐이라며 아찔한 줄다리기를 이어나가는 그녀. 로테의 남편은 베르터만큼 애정 어린 성격이 아니었기에 베르터와의 묘한 관계를 우정이라는 이름하에 유지하고 싶었을 것이다. 여기에 악의는 없었지만 베르터에게 일말의 여지를 준 셈이니, 아주 고약하고 잔인한 장난질이라 해야겠다. 물론 유부녀에게 접근한 베르터 역시 또이또이니까, 그래서 이 작품은 페이소스보다 휴머니즘에 초점을 갖게 한다고 생각된다.


<젊은 베르터의 고뇌>가 지금까지도 영광을 누리는 데에는 해설처럼, 답답한 사회환경에서 자아실현의 가능성을 찾지 못했던 청춘들의 열정을 해소해 주었기 때문이다. 비극적인 결말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삶에 권태를 느낀 사람들이 막혀있던 담을 허물 수 있겠다는 희망의 사실이 중요하다. 이 작품을 통해 괴테가 청춘들의 아픔을 어떻게 대변했고 얼마나 응원했는지 잘 알았다. 어느덧 청춘이라 할만한 나이는 지나버렸지만 괴테를 읽고 가슴이 뛸 수 있어서 참 고마웠다. 베르터 신드롬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져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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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5-01-15 19: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유, 물감님, 고맙습니다. 잘 했습니다.
그때 만약 잘못했으면 어찌할뻔했습니까?
저랑 이렇게 댓글도 못 나눌뻔했잖아요. 그죠?
뿐만아니라 물감님을 아는 모든 사람에게는요.
모든 건 지나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세상엔 안 좋은 만남만 있는 건 아니란 걸 물감님도 잘 알죠?
물감님은 심지가 곧고 착하니까 좋은 만남이 더 많을 거예요. 믿으세요.
근데 괴테도 트라우마가 상당했겠어요.
반면 괴테 할배 땜에 물감님이 위로 받았겠어요.
덕분에 괴테 할배 어깨가 백두산만큼 높아졌겠는데요? ㅎㅎ

예전엔 베르테르라고 했는데 베르터가 맞을까요? 좀 낮선데요? ㅋ
내가 이 책을 읽었나 했더니 안 읽었네요. 언젠가 영상으로 찍은
연극을 본 적은 있네요.
사랑이나 실연 이야기는 영 땜기지 않아서.
나중에 함 읽어 보겠습니다. 잘 지내죠?
전 요즘 여기서 안 놀아요. 딴데서 놉니다. 그래도 가끔 일케...

물감 2025-01-15 20:11   좋아요 1 | URL
와 스텔라님 엄청 오랜만이에요, 잘 계시죠^^?
그러게요, 어떻게든 살아있어서 이렇게 괴테같은 작가도 만나보고 재미나게 살아가네요. 한 권 읽고 말하긴 뭐하지만 괴테도 꽤나 유리감성이 아니었나 싶어요. 저는 이런 작가들이 좋은가봐요, 헤세도 그래서 좋아하고 ㅋㅋㅋ
듣자하니 베르터가 독일어 발음에 더 가깝다고 하네요? 베르테르는 콩글리쉬인가...
이 책은 뭐 전형적인 1인칭 남성의 서사라 안 읽으셔도 될 거 같아요~
아 그리고 저도 알라딘에서 안 놀아요. 그래서 글만 올리고 주로 블로그만 합니다. 예전의 따숩던 알라딘 마을이 그립네요.

2025-01-15 2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1-15 20: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oolcat329 2025-01-16 08: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물감님 아 ㅠㅠ 어찌 그런 일이ㅠㅠ
그 고통은 제가 감히 뭐라 말할 수가 없는 그런 거라 ㅠㅠ
잘 이겨내셨습니다. 저도 베르터를 창비책으로 읽었어요. 저는 사실 로테같은 친절한 여자 싫어요. 베르터가 어떤 마음인지 뻔히 알면서 친구라는 명목으로 계속 친절하게 맞아주며 베르터를 더 힘들게 하잖아요.
저라면 상처를 주더라도 제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할텐데요.
오늘도 힘내시고 좋은 하루되세요!

물감 2025-01-16 12:42   좋아요 0 | URL
쿨캣님도 오랜만입니다, 건강하시죠? ㅎㅎ

세상은 비극과 고통이라는 걸 저는 어릴 때부터 많이 보고 자란 듯 해요. 그래서 빨리 나이를 먹고 싶단 생각을 자주 했는데, 어느덧 세월이 훅 지났네요 하하핳

베르터도 그렇고 로테도 그렇고, 현대와 영 맞지 않는 이성관이지만 그래서 또 매력적이기도 하네요. 원래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지는 법이니까 불가항력이었다고 생각하면 이해 안될 것도 없더라고요. 제삼자들은 속터지겠지만요 ㅎㅎ

맥락없는데이터 2025-02-07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베르터의 고뇌를 단순한 짝사랑 이야기로 보지 않고, 인간의 감정과 존재의 무게까지 깊이 들여다본 해석이 인상적이네요. 특히 베르터와 괴테의 현실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느껴지는 비극성과 인간적인 연민이 잘 담겨 있어 공감하며 읽었습니다. 당선을 축하드립니다. :)
 
혼돈의 도시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13 RHK 형사 해리 보슈 시리즈 13
마이클 코넬리 지음, 한정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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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에 계속 무겁고 우중충한 분위기의 작품들만 냅다 읽었더니 좀 질려가지고 오랜만에 장르소설이나 읽어주었다. 이럴 때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코넬리 옹의 작품을 고르면 된다. 보아하니 아직도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시던데, 내 부모님 나이보다도 몇 년은 더 높으신 56년생의 할아버지가 어쩜 그렇게도 활력이 넘칠 수가 있는 걸까. 더 놀라운 것은 젊었을 때에 보여준 하이 퀄리티가 지금도 여전하다는 데에 있다. 그렇게 코넬리의 작품들은 늘 젊은 감각을 지니고 있어, 독자들이 저자의 건강 염려를 잊어버리게 된다. 어느덧 뱀파이어 같았던 톰 크루즈도 늙었고, 키아누 리브스마저 간달프를 닮아가는 걸 보니 세월이 참 야속하단 생각이 든다. 그처럼 언젠가는 코넬리도 은퇴할 텐데 지금으로썬 상상이 안된다.


<혼돈의 도시>는 ‘해리 보슈 시리즈‘ 중에 가장 분량이 짧은 데다 미친 속도감으로 하루 이틀 만에 다 읽었다. 다만 주인공 혼자 치고 나가는 스트레이트 플롯이라 가벼웠던 점과, 인물 간에 갈등보다는 사건 중심으로만 흘러가서 좀 싱거웠던 점이 아쉬웠다. 그래서 별 셋을 주려다가 후반부에 급 하이 텐션으로 재미가 휘몰아쳐서 후하게 별 넷을 주었다. 이번 사건은 방사능 물질인 세슘을 다루는 병원 관계자가 총살 당한 장면으로 시작한다. 평생의 앙숙관계인 LA 경찰국과 FBI가 동시에 사건을 맡았는데, 어쩐 일로 FBI는 경찰 수사에 순순히 협조하는 분위기였다. 아무튼 사건 담당인 해리 보슈는 살인 쪽을, FBI는 병원에서 도둑맞은 세슘을 중점으로 수사를 맡는다. 알몸으로 결박된 피해자의 아내와 살해 현장 목격자의 진술을 통해, 범인들은 이슬람권 아랍인으로 추정되었다. 한편 FBI의 블랙리스트인 반미주의자의 집에서 범인들의 차량이 발견되었고, 이로써 방사능 물질로 사제 폭탄을 만드려는 테러범들의 소행으로 간주되어 초 비상사태가 된다. 의사들의 말로는, 세슘에서 나오는 감마선이 퍼지면 농도에 따라 몇 시간 내로 사망하며, 노출 지역은 수백 년간 폐쇄를 해야 한단다. 따라서 이번 수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촌각을 다투게 생겼는데, 왜 갑자기 FBI는 해리 보슈에게 배타적으로 대하는 것일까.


99%의 본능과 1%의 직감으로 살아가는 LA의 코요태, 해리 보슈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구린내를 맡는다. 노련한 베테랑답게 시간 잡아먹는 수사 과정은 건너뛰고 지름길로만 쏙쏙 다니는데, 체계와 질서를 무시하는듯한 그의 독단적인 행동은 언제나 동료들의 미움을 샀더랬다. 그 때문에 이번 수사도 남들과 부딪히며 설득하기에 바빴고 별다른 수확 없이 제자리걸음만 하는 중이었다. 오히려 살인범보다 방사능 노출과 국제 테러 문제로 번질 위기는 파악하지 못한다는 꾸중만 듣는데 솔직히 할 말 없었다. 보슈는 뭔가에 꽂히면 집요하게 파고드는 반면에 큰 그림은 잘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런 단점이 <혼돈의 도시>에서는 유독 크게 부각되었는데, 이번 편의 서브 테마가 ‘관료주의와 대립‘이기 때문이다. 일분일초가 급하다 보니 보고쳬계를 가볍게 무시하는 보슈와, 그로 인해 골치 아픈 뒤처리를 떠안아야 하는 기관들의 고충 장면이 자주 나온다. 어쨌건 사건이 잘 마무리돼서 망정이지, 보슈의 태도는 국가를 어지럽히는 문제아가 틀림없다. 물론 그에게는 파리 하나 잡겠다고 도끼를 꺼내드는 저 얼간이들이 답답하겠지만, 왜 파리채가 적격인지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 보슈에게도 잘못이 있단 말씀이야.


이 짧은 분량 속에서도 코넬리 옹은 여러 번의 미스디렉션을 선보인다. 세슘 운반책의 차량에서 세슘을 발견한 보슈는 방사능에 노출된다. 그는 현장에서 빠져나와 병원으로 가는 척하면서 FBI 요원에게 사건의 개요와 용의자의 동선 등등 자신의 추리들을 들려주고 다음 현장으로 달려간다. 마침내 마주한 범인의 정체를 통해, 이번 사건은 국제 테러 사건 쪽으로 눈 돌리기 위한 속임수라는 것을 확인한다. 이렇게 경찰국 아니, 해리 보슈와 FBI의 공동 수사에서 그의 활약이 여러 차례 증명되었음에도 여전히 보슈가 요주의 인물로 지목된다는 점이 참 아이러니하다. 저자는 해리 보슈의 시선으로 LA 경찰국의 무능함과 FBI의 융통성 없음을 신랄하게 비난해대는데, 아마도 과거 범죄 사건기자였을 때에 받았던 영향이 아닐까 싶다. 한 마디로 뒤끝이 쩐다는. 그래도 주인공의 소속이 경찰인 만큼 FBI 쪽을 악마의 집단으로 몰아가긴 하는데, 한두 번도 아니고 거의 매 작품마다 그러고 있으니 FBI의 명예훼손으로 소송당하지 않는 게 참 용하다. 아무튼 킬링 타임용으로 그만이었던 코넬리 옹의 작품이었다. 굿 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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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올레타 페이지터너스
이사벨 아옌데 지음, 조영실 옮김 / 빛소굴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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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째 연말보다 연초에 약속이 더 많이 잡혀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래서 독서에 집중을 못 하다 보니까 앞의 내용들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머리가 점점 녹슬어가는 걸로 보아 이제는 한 작품을 너무 길게 붙들지 말아야겠다. 어느덧 페이지터너스의 도장 깨기도 다 끝나간다. 전체적으로 만족도가 높은 편이라 재미나게 읽은 반면, 하나같이 결핍 가득한 작품들이어서 이젠 좀 지치려고 한다. <비올레타>는 칠레와 중남미의 현대사와 여러 인물의 서사를 다루는 거대한 역사서이다. 또한 사회의 억압을 뚫고 자기 발현을 해나가는 여성주의의 내용까지 담겨있다. 여러 가지 볼거리와 주제를 다룬 의미 있는 작품이지만 큼직큼직한 내용 위주로 흘러가서 전체적으로 투박한 느낌이었다. 숲을 논하다 보면 디테일이 떨어질 수밖에 없으니까 뭐.


아들부잣집의 막내딸인 비올레타는 스페인 독감이 유행하던 팬데믹 시대에 태어났다. 미국 대공황과 함께 집안 사업이 망하자 가족들은 남부 지방으로 유배 아닌 유배를 가야 했다. 팍팍한 삶이었지만 어려운 이웃들끼리 오손도손 하며 잘 견뎌냈다. 비올레타는 영국인 가정교사와 이웃 교사 부부를 통해 기초교육과 인생 경험과 체험학습을 배워나간다. 그리고 목격한 여러 가정들의 폭력으로 순수를 잃어버리게 된다. 분명히 무지와 빈곤에서 악이 발생한다고 배웠는데, 그녀가 보기에는 어느 곳에서든지 선악이 존재했다. 하여 교양인보다는 좀 더 현실적인 삶에 접근하기로 방향을 튼다. 가볍게 지나간 이 장면이 훗날 그녀에게 얼마나 많은 혼돈을 낳았는지에 주목해 보자.


성인이 된 비올레타는 큰오빠의 건축 사업을 도우면서 재능을 발견한다. 덕분에 형편도 나아지고 삶의 재미도 보던 와중에 2차대전이 발생했다. 다행히도 그녀가 사는 곳은 전쟁의 피해가 닿지 않았고, 얼마 뒤에는 괜찮은 집안의 남자와 결혼식까지 올리게 된다. 이만하면 아주 탄탄대로의 인생일 텐데도 그녀의 마음은 어쩐지 공허하다. 이 원인 모를 비올레타의 갈증은 결국 외도로 해소가 되었다. 남편과 정반대의 육식남인 비행기 조종사와의 쾌락과 유희를 즐기며 살림을 차려버린 그녀. 하지만 조종사는 저밖에 모르는 카사노바였고, 비행기 타고 세계 곳곳을 놀러만 다녔다.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더라도 당연한 여성들의 삶이라 생각하며 혼자 감내하는 비올레타의 속앓이가 앞으로도 계속된다. 전에는 이런 걸 인과응보의 일부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원래 인간의 본성이 배움과 노력의 고생길보다도 폭력과 충동의 지름길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비올레타>는 인간의 타고난 본성과 아슬아슬하게 타협하는 장면으로 도배된 작품이다. 세계사, 가정사, 여성주의 등 독자마다 포커스가 다를 텐데, 나의 관심사는 화자인 주인공의 심리상태였다. 비올레타의 복잡한 인간성은 단순히 좋고 나쁨과 옳고 그름으로 나눌 수 없는, 아주 흥미로운 연구 대상이었다.


비올레타는 아들과 딸을 낳았다. 조종사는 여성스러운 아들과 달리 자신을 쏙 빼닮은 딸을 예뻐하고 애지중지했다. 아들은 크면서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졌고, 딸은 아빠와 함께 쾌락주의자로 살아간다. 그러다 딸이 마약중독으로 개차반이 되고 나서야 엄마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는 주인공. 거기에다 민간 비행기 사업으로 갱단의 불법거래를 담당하는 조종사 남편까지, 비올레타의 고통과 근심은 마를 날이 없었다. 결국 그녀는 정신과 상담을 받고야 마는데, ‘왜 비극적인 삶을 원하느냐‘는 의사의 질문이 작품을 관통하는 대사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50대가 돼서야 비올레타는 자신의 외로움을 인지했다. 가족, 인맥, 재산, 능력까지 다 갖췄으니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그런 외로움의 유형은 아닐 터. 그렇다면 그녀의 결핍은 무엇으로부터 비롯된 것일까. 나님은 이 질문의 해답을, 그녀의 가정교사였던 조세핀의 삶과 대조하여 알아냈다. 조세핀은 이혼이 금지되었던 그 시대에도 당당히 동성애자로 살아가며, 파트너와 함께 여성 투표권, 가부장제 반대, 여성 사회 진출 등 여성주의에 힘을 쏟는 중이었다. 어렵지만 의미를 찾아가는 조세핀과 상반된 비올레타의 공허한 삶에는 ‘쟁취‘가 없었던 것. 둘 다 진취적이었지만 비올레타는 자기 충동에 따라 저항했고, 조세핀은 자유의지에 따라 저항하며 살아갔다. 그 결과 비올레타의 부실한 독립성은 맥없이 무너지고, 조세핀의 견고한 조화성은 자신과 주변을 지켜주었더랬다.


조종사를 따라 비올레타의 거처도 자주 바뀌었다. 어쨌거나 그녀 또한 사업가였고, 그렇다 보니 나이가 들어서도 왕성한 활동을 유지하며 젊은 인생을 살았다. 딸의 죽음, 남편의 바람, 대 지진, 독재 정권, 블랙리스트가 된 아들 등 많은 아픔과 난관을 겪었음에도 할 일이 많아서 어렵지 않게 이겨내지 않았나 싶다. 전개가 휙휙 널뛰는 데다 화자의 담백한 말투 때문에 생략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닐 테지. 비올레타의 응어리가 또 한풀 꺾이는 시기가 언제였냐면, 조종사의 n번째 애인이 주인공을 찾아왔을 때였다. 오래전에 그녀와 한바탕했던 이 어린 친구는 이제 와서 조종사를 엿 먹이고 싶어 했다. 조종사의 비행 사업 행정을 맡았던 애인은 불법 장부를 증거로 제출하여 조종사를 소송하고 그의 사업까지 무너뜨렸다. 불행의 원흉이었던 조종사는 비올레타가 자처한, 그것도 떳떳하지 못한 방식으로 선택한 것이었기에 마지못해 끼고 살아왔으나, 기회를 얻어 한방 먹여주고 나니 쟁취한 삶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 것도 같았다. 그것은 죽은 딸의 이름으로 설립한 여성재단에 더욱 열과 성을 다하는 계기가 되어주었다. 오래전에 버렸던 교양인의 모습을 다시 찾아간 비올레타의 인생 3막이 그렇게 열렸다.


이 작품은 비올레타의 죽기 직전까지도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는다. 다 기억도 안 나지만 일일이 나열할 수도 없는 대 서사라서 이 정도로 줄여야겠다. 어떻게 보면 무지몽매한 인간의 성장소설 같기도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개과천선이나 사필귀정하고는 거리가 멀다. 그녀는 닥쳐오는 파도를 넘는다기보다 온몸으로 부딪혀 경험하는 타입이었으니. 마침내 오르막길을 걷게 된 것은 칭찬할 일이지만 비올레타는 어떤 위인이나 성인군자가 되려 한 게 아니었다. 그래서 지나간 과오들을 후회하지도 않았고, 지금의 업적들에 막 자부심을 갖지도 않았다. 돌아보면 비올레타는 항상 그랬다. 되는대로 사는 듯하면서도 열정을 쏟았고, 무심한듯하면서도 친절하려 했고, 수없이 좌절하면서도 삶을 내려놓지 않았다. 그것들은 어떤 원대한 목표나 책임감도 아니고 개인의 강인한 기질 때문도 아니었다. 비올레타에게 인생이란 불을 무서워하지 않는 요리사처럼, 파도를 겁내지 않는 서퍼처럼 일단 부딪히고 볼 일이었으니까. 하여 그녀의 무수한 혼돈을 보면서도 안쓰럽다는 인상을 받지 못했다. 이처럼 우리는 혼돈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오르막길을 걷고 파도에 맞서가며 쟁취하는 삶을 이어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들도 어째서 비극적인 삶을 원하느냐는 질문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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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도박 페이지터너스
아르투어 슈니츨러 지음, 남기철 옮김 / 빛소굴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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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게 느린 나님조차 반나절 만에 다 읽은, 말 그대로 페이지 터너인 작품이었다. 그렇다 보니 어떤 인사이트를 도출하기도 전에 끝나버렸다. 솔직히 지금 뭘 적어야 할지 모르겠는데 일단 써보겠다. 저자 슈니츨러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기법을 토대로 글을 쓴 작가라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한밤의 도박>에서도 심리 묘사가 잘 드러나는데, 작가 이력을 보니까 병원까지 개업한 의사 출신이어서 더 놀랬다. 지금껏 내가 보아온 사자 직업군들은 감성이 메말라서 섬세한 표현에 참 서툴다는 인상만 받았거든. 그런데 슈니츨러한테는 그런 닭 가슴살의 감성이 느껴지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유대인의 핏줄 덕분이 아닐까 싶다. 아님 말고.


육군 장교 빌리는, 민간인이 된 옛 동료에게 돈 좀 빌려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그리 친하지도 않은 데다 자기도 거지면서 기꺼이 돕겠다니 참 이해가 안가지만, 한창 테스토스테론이 넘칠 나이의 수컷들은 어떻게든 가오를 잡으려 한단 말이지. 초장부터 객기 부리는 걸 보니 결말이 뻔해서 김빠지긴 했는데 그래도 재미있었다. 빌리는 노름판에 가서 돈을 잃고 따내길 반복하다가 빚쟁이가 된다. 유일한 혈육인 외삼촌은 돈을 주지 않았고, 외삼촌이 흘린 정보를 따라 있는지도 몰랐던 외숙모를 찾아간 주인공. 놀랍게도 외숙모는 언젠가 자신이 즐겼던 원나잇 상대였던 것. 이제는 성공한 사업 투자자가 되어 빌리의 거만한 콧대를 꺾어버리는 그녀. 내일까지 빚을 갚지 못하면 군에서 잘린다는 사정 앞에 외숙모는 알 수 없는 웃음만 짓는다. 예나 지금이나 정신 나간 것들은 금융 치료가 정답이란 말씀.


빌리는 나름 건실한 청년이었다. 대대로 군인 집안이라는 자부심이 있었고, 품위를 생각할 줄도 알았고, 씀씀이도 전혀 헤프거나 하지 않았다. 다만 출처를 알 수 없는 자신감이 그를, 마치 타고난 럭키가이처럼 몰아가고 있었다. 근본 없는 믿음과 신념으로 냅다 뛰어든 노름판에서 운 좋게 거액을 몇 번 거머쥐기도 했다. 동료와 자신한테 쓰고도 남아돌 만큼의 돈을 따자, 냉정히 물러날 생각도 했던 빌리의 모습은 꽤나 쿨가이 다웠다. 하지만 사람 심리라는 게, 행운이 반복되면 이 운발이 어디까지 닿을지 알고 싶어지는 법이다. 하여 기어이 그 끝을 확인해야만 멈추게 되는 것 또한 정해진 수순이고. 여하튼 빌리는 한심하다고 느꼈던 동료보다 훨씬 더 한심한 놈이 되어버렸다.


외삼촌에게 빠꾸먹고 찾아간 외숙모 앞에서 온갖 동정과 연민 작전을 펼치는 주인공. 폼생폼사를 외치던 쿨가이는 어디 가고 이렇게 비굴한 인간으로 전락했을까나. 외숙모는 그를 돌려보낸 뒤, 빌리의 생활관을 직접 행차한다. 돈 얘기는 일절 꺼내지 않고 긴 시간을 노닥거리는데, 괜히 말 꺼냈다가 미움 살까 봐 그녀의 비위를 맞추기에 급급한 주인공. 이 장면에서 천당과 지옥을 수십 차례 오가는 빌리의 원맨쇼가 참 볼만하다. 그렇게 있다가 겨우 쌈짓돈 쥐여주고 떠나버리는 외숙모에게 뒤늦은 분노를 표하는 빌리. 그것은 지난날 외숙모와의 원나잇 후에 보여준 자신의 행동이었으니. 크게 한 방 먹은 빌리는 조용히 생을 마감한다. 그리고 나타난 외삼촌의 양손에는 외숙모가 건네준 돈다발이 들려있었다.


단순한 플롯 가운데 독자를 들었다 놨다 하는 솜씨가 대단한 작가였다. 슈니츨러 역시 도박으로 탕진하여 뼈저린 후회를 했었다고 하는데, 그런 값진 경험 치고는 좀 가벼운 작품이었달까. 의사로서도 성공했고 늦깎이 작가가 되어서도 성공했으니 아주 그냥 자신감이 하늘을 찔렀을 테지. 부와 명예를 다 이룬 연예인들이 끝내 마약에 손을 대듯이, 연속된 성공에 길들여진 슈니츨러도 자연스럽게 노름판으로 고개가 돌아갔을 것이다. 프로이트와 가깝게 지낸 것치곤 매우 실망스러운 꼴이지만 작가와 작품은 별개로 치는 게 맞다고 본다. 작중에서 빌리는 빚쟁이가 된 자신을 가리켜 억울한 희생양이라고 말한다. 냉정함을 잃어버린 그는 자기가 시키지도 않은 일에 발 벗고 나섰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이 같은 빌리의 심리상태가 오늘날 현대인들의 질병이 아닐까 싶다. 원인을 꼭 엉뚱한 데에서 찾는 사람들이 있단 말이지. 스스로를 괴롭힌 것도 모르면서 늘 자기는 피해자라고만 생각들 하지. 안타깝게도 세상은 원래 불공정한 법이라네, 젊은 그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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