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 (리커버) - 제19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문미순 지음 / 나무옆의자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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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롱패딩의 계절이 돌아왔다. 바깥은 찬바람이 쌩쌩 불지만 카페 안에서는 여전히 아이스커피를 마신다. 길가에는 낙엽이 다 져서 앙상해진 나무도 있고, 사시사철 녹음을 자랑하는 나무들도 있다. 어떤 이는 춥다며 히터를 틀고, 누군가는 건조해서 가습기를 켠다. 이렇듯 겨울은 다양한 생활양식을 제공하는 신기한 계절이다. 문득 사람마다 겨울을 인지하는 기준이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입동이 시작돼야 겨울의 시작이라거나, 기온이 영하권으로 되어야 한다거나, 수능일을 기준으로 겨울이라거나, 패딩을 입기 시작할 때부터라거나. 각자의 기준에는 계절변화를 인식시켜준 어떤 추억이 들어있을 것이다. 그게 또 무엇이냐에 따라서 겨울은 추운 계절이기도 하고 따뜻한 계절이 되기도 한다. 예외도 있는데, 내 마음은 1년 내내 겨울이라서 추운 줄도 모르겠다고나 할까.


예전부터 읽고 싶었던 이번 작품은 일부러 겨울이 올 때까지 참았다가 읽었다. 올해 읽은 책 중에 베스트 5 안에 들 만큼 좋았지만 너무 애처로워서 두 번은 못 읽을 작품이었다. 진짜 울컥하고 숨이 막혀서 읽다가 멈추기를 여러 번 반복했단 말이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은 리뷰를 남기고 싶지 않은데 그랬다간 이 감정들이 길게 갈 것 같아서 빨리 털어내는 게 나을 듯하다. 말하자면 양 옆집에 사는 이들의 불행 잔치인데, 이거야말로 하이퍼리얼리즘이라며 박수 친 나와는 달리 요즘은 너도나도 불행하므로 이런 이야기에 별 감흥이 없을 수도 있겠다. 도파민에 절여진 현대인들에게 주어진 계절은 겨울뿐이다.


701호 사는 50대 여성 공명주. 모친의 시신을 집안에 보관해두고, 모친의 연금으로 겨우 생활하는 중이다. 이혼한 데다 화상을 입어 일할 몸도 아니었고 재산도 없었던 그녀는, 불행한 삶을 안겨준 세상에 그렇게라도 복수하기로 했다. 문제는 여기저기서 모친의 안부를 묻거나, 모친의 휴대폰으로 연락이 오는 등 아주 난처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 연출된다는 거였다. 여기에 곧 대학을 졸업하는 딸이 갑자기 찾아와 돈을 요구한다. 또 얼마 뒤에는 익명의 전화가 와서 당신이 한 일을 알고 있다며 계속 협박해댄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발생하는 불행들이 그녀를 대체 어디까지 데려가려는 걸까.


702호 사는 20대 남성 박준성. 뇌졸중 환자인 부친을 고등학생 때부터 홀로 모시고 있다. 도망 친 형이 남긴 대출금의 빚과 부친의 치료비 때문에 그는 밤마다 대리운전을 뛴다. 간병하느라 학교도 못 다니고 직장도 구하지 못했지만 그는 결코 부친과 집안을 원망 않고 건실하게 살아간다. 그러다 가스레인지 사고로 부친이 입원하게 되자 이제는 부친의 건강보다도 돈 걱정이 앞서기 시작한다. 다급한 마음에 외제차를 대리 뛰다가 기어이 사고가 났고, 그 피해 보상을 메꾸려면 장기라도 적출해야 할 판이었다.


적어도 내겐 이들의 불행이 허구의 이야기로 느껴지지 않았다. 대체 누가 신은 공평하다고 했는가? 노력이 재능을 이길 수 있다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다 꺼지라 그래. 이제는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도 안 하는 세상이올시다. 한때는 불우이웃을 보면서 위안을 삼아야 했던 시기도 있었다. 근데 그렇게 정신승리해 봤자 내 삶이 더 안락해지는 것도 아니다. 어떨 때는 내가 불우이웃하고 어디가 다른지도 모르겠거든. 죽지 못해 산다는 말을 이해할 나이가 되고 보니 불행이 불행을 불러온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두 주인공의 연쇄적인 불행을 보며 온통 극단적인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안개가 걷히고 빛이 들 거라는 확신이 들어야 희망을 갖는 거지, 안 그래?


기쁨을 나누면 배가 된다더니, 불행 또한 그러했다. 각자의 불행을 공유한 두 사람의 걱정은 더 커지기만 했다. 상대방에게 의지하고 말 것도 없었지만 동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된다. 아마도 이것이 저자의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닐까 한다. 지금 현대인들의 삶은 여러 가지의 이유로 고립되어 있다. 그렇게 모든 희로애락이 개인의 몫이 되다 보니 타인의 호의를 무슨 빚진 것처럼 여긴다. 이 꼬여있는 사회문화를 어디까지 이해해 줘야 할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잡다한 이유로 우리는 단절되었고, 그래서 타인의 불행과 아픔에도 무관심해져버렸다. 하지만 어두울수록 작은 불빛도 잘 보인다지? <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은 도무지 희망을 찾아볼 수가 없는 작품이다. 저자는 삶의 터전을 철저하게 파괴하고 박살 내버린다. 그런데도 나는 두 사람의 공유된 불행에서 어떤 빛을 발견했다. 차마 그것을 희망이나 용기라고 부를 순 없겠지만 불행에 삼켜짐을 막아줄 무언가가 분명하다. 이 겨울이 영원토록 지속될지 스쳐가는 계절이 될지는 그 무언가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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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남극 탐험기
김근우 지음 / 나무옆의자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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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양각색의 인간승리를 보고 들을 때마다 역시 인간은 위대하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지구상에서 인간은 사라져야 할 1순위라고 생각하는 나조차도 그 불굴의 의지에 반할 때가 많다. 지금 얘기하는 승리가 곧 성공을 가리키는 게 아니란 걸 그대들도 알 것이다. 빤히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나아가기를 희망하는 인생들이 모여서 미래에 대한 불안을 조금씩 지워나간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요, 문학이다. 따라서 모든 문학은 실패자들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결국 인간의 위대함은 실패에서 만들어진다고 하겠으며, 그중에 성공한 사람은 지난날의 실패를 자랑해야 할 것이다. 토끼를 이긴 거북이는 자신의 느림을 전혀 탓하지 않았으니까.


오랜만에 김근우 작가의 소설을 읽었다. 주로 판타지물을 써오던 분인데, 2015년에 쓴 <고양이를 잡아먹은 오리>로 문학상을 받고부터는 장르가 완전히 바뀌었다. 말하자면 차분한 B급 정서의 대중문학인데, 정세랑의 명랑함과 한차현의 괴랄함 경계선에 있는 느낌? 어쩐지 표현하기가 어렵다. 안 내키면 그냥 보지 마시라. <우리의 남극 탐험기>는 마치 기안84가 책을 쓰면 이렇겠구나 싶었던 작품이다. 뇌절도 끝까지 가면 예술이 된다는데, 그 정도는 아니지만 꽤 그럴싸한 병맛이 줄줄 나온다. 딱 봐도 욕먹을 작정하고 썼던데 오히려 그래서 봐준다는 마음으로 읽어나가게 되는 묘한 작품이었다.


프로 야구의 벽에 부딪혀 탈선한 ‘나‘는 재수까지 해서 지방의 삼류 대학에 들어간다. 학생도 교수도 수업도 다 개판이던 그곳에서 만난 강 교수와의 질긴 인연으로 ‘나‘는 혜진의 연인이 된다. 머리도 집안도 좋았던 그녀를 반년 만에 차버린 데에는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야구도 전공학도 인간관계도 재능이 없었던 ‘나‘는 ‘지금 여기서 뭐 하냐‘는 마음의 소리를 계속 듣는다. 이후 의경이 된 그는 시위대와 싸우다가 ‘정답이 없는 인생의 죄‘와 마주한다. 하여 전역하고 학교를 자퇴한 후 느닷없이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문학이 뭔지도 몰랐던 ‘나‘는 오직 날것의 감성으로 부딪혔고, 그것이 두 번이나 문학상을 가져다주었다. 상금 때문에 시작한 일이었고 또 잘 풀려서 다행이었지만 그는 전업작가의 뜻이 없었다. 좋아하지 않는 일도 잘할 수 있고, 좋아하는 일도 못할 수 있다던 과거 자신이 내뱉은 말이 이뤄질 때마다 마음의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지금 왜 여기에 있느냐고. 정답을 말해야 하는 세상에서 오답을 꺼낸 ‘나‘는 곧 죄인이었다. 죄를 인식함과 동시에 무명작가가 되어 서서히 잊혀져가는 ‘나‘라는 존재.


‘나‘와 평행선을 밟은 듯한 섀클턴 박사의 내용이 번갈아 나온다. 태어나길 맹인이었던 박사는 다 예상되듯이 험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영국의 귀족 가문에서 났기에 전폭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는 건데, 이 배경 때문에서라도 박사는 또래들에게 먹잇감이 되곤 했다. 장애인이면서도 일반 학교를 고집한 이유로 학생과 선생들에게 비난받았던 박사 또한 ‘지금 여기‘의 마음의 소리를 듣는다. 하여 비상한 머리를 풀가동해서 명문 대학까지 조기졸업해버리고 23세에는 최연소 대학교수가 된다. 인간관계에 기대할 수가 없었던 그는 본업에 충실하기로 한다. 이후 박사의 경제 논문들은 정치인들의 오해를 샀고, 좌우 진영에게 맹공격을 받는다. 박사가 느낀 ‘정답이 없는 인생의 죄‘는, 그 가문이 만든 장애인 재단에서도 볼 수 있었다. 어릴 때 박사를 괴롭혔던 가해자의 아이가 선천성 녹내장을 앓고 있었고, 지금은 재단의 후원을 받고 있단다. 안절부절못하는 가해자와는 달리 아이는, 다 이해한다는 듯이 말하는 박사에게 비아냥 거린다. 당신 같은 귀족과 자신의 고통이 절대 같을 수가 없다면서. 재단의 이사장 직을 달고 있는 박사는, 어쩌면 여기도 자기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다시피 ‘나‘와 박사는 전혀 다른 삶이었음에도 완벽한 대칭의 고뇌와 위기를 겪는다. 하여간 김근우는 진짜 하이브리드형 작가가 틀림없다. 아무튼 박사는 한국 경제 연구소의 초청장을 받아 한국을 방문하고, 나중에는 아예 한국에 눌러앉아버린다. 그러다 어느 지하철에서 ‘나‘를 만나 인연을 맺고 ‘지금 여기‘의 정답을 찾아 남극 횡단을 하러 떠난다. 여기서부터는 설명도 많이 생략되고 비현실적인 설정이 등장하지만, 이미 여기까지 달려온 독자라면 그런갑다 하고 읽게 될 것이다. 왜 뜬금없이 남극이었냐 하면, 박사에게 들려왔던 목소리의 주인이 바로 옛 남극 탐험가였기 때문이다. 박사와 동명이인의 그 탐험가는 무모한 탐사를 나섰다가 대 실패를 했지만 동료들과 살아 돌아온 기적의 인물이었고, 그의 행적을 따라서 박사와 ‘나‘는 ‘지금 여기‘의 해답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죄인‘이 있어야 할 곳은 어디이며, 이유가 없었던 수많은 실패의 이유를 알아내야만 했다. 이렇게만 보면 루저들의 훌륭한 도전기 같은데, 앞서 말했듯이 병맛 가득한 작품인지라 퍽 진지하지도 않다. 괜히 과몰입하지 마시길.


작품 내내 반복해서 강조하는 메시지가 있다. ‘끝나지 않는다면 시작할 필요가 없지만, 언젠가 모든 것이 끝난다면 시작해야 한다고(287p). 그 말은 곧 불확실성에 뛰어들어야 의미를 가진다는 것으로 와닿았다. 토끼에게 뻔히 질 것을 알고도 시합을 했던 거북이처럼. 다 정해진 결과만을 위한 삶에는 한계를 돌파한다는 개념이 없다. 그래서 인간은 질 것을 알고도 싸워야만 하는 때가 있는 법이고, 설령 실패하더라도 포기하지 않았음에 박수갈채를 받는 것이다. 꼭 기록을 경신하고 훌륭한 퍼포먼스를 선보일 필요는 없다. ‘지금 여기‘를 찾아 계속 방황하는 것이야말로 불굴의 의지 아니겠나. 헤밍웨이도 <노인과 바다>에서 다 보여주었다. 패배했지만 굴복하지 않은 인간의 위대함에 대하여. 가파른 절벽 아래 핀 들꽃에도 벌과 나비는 날아드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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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인을 위한 축구 교실
오수완 지음 / 나무옆의자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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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이 축 처지는 소설만 계속 읽었더니 유쾌한 작품이 읽고 싶어졌다. 뭐가 좋을지 둘러보다가 눈에 띈 이 작품은 기분전환용으로 그만이었다. 줄거리는 대강 이렇다. 외계인이 지구인들에게 축구 시합을 제안한다. 모든 지구인은 단 한 번 외계인 팀과 축구 시합을 할 수 있고 이기면 소원을 들어주겠단다. 또한 출전할 멤버의 수준에 맞는 외계인 팀이 나올 거라 형평성은 걱정하지 말란다. 그렇게 사람들은 드림팀을 만들어 외계인들과 경기를 했고 어쩌다가 승리를 거머쥐기도 했다. 벼락부자가 되고 영원한 젊음을 얻는 등 소원성취한 자들은 전 인류의 부러움을 샀고, 너도나도 시합에 나갈 준비하느라 아주 난리가 난다. 미디어는 축구 방송만을 다루었고, 시장에서는 축구 용품만을 판매했고, 대중들의 관심사도 온통 축구뿐이었다. 이렇듯 축구는 전인류 대통합을 이뤄냈지만 축구 외에는 전부 가치를 잃어버렸다.


다신 없을 인생역전의 기회가 모두에게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환자 및 노약자들은 시합에 나가고 싶어도 그럴 수 없으니까. 10년 전에 무릎 부상으로 축구선수를 은퇴한 ‘욘‘은 억울해서 미칠 지경이다. 파산하기 직전인 그는 이 기회에 동네 축구 교실을 열고 수강생을 모집한다. 그들과 함께할수록 기쁨과 보람을 느끼고 마음의 안정을 찾는 욘의 나날들. 한편 악화돼가는 무릎을 그의 파트너 ‘리오‘가 마사지해주자 기적처럼 다리가 나았다. 그 길로 욘은 축구 교실을 접고 파트너와 함께 외계인 시합을 준비한다. 그의 기쁨이었던 수강생들은 낙동강 오리알이 되었고, 파트너 리오는 시합 불가 판정을 받았으며, 벤치만 지키던 욘은 팀의 패배로 모든 게 무너져버린다.


보다시피 소재와 설정만 다를 뿐 흔한 전개라서 예측이 가능하다는 게 단점이다. 그러나 이것은 패배한 주인공의 인생역전 스토리가 아니다. 축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패스, 즉 팀워크에 주목해서 읽어야 하는 작품이다. 그렇게 선수 간의 호흡을 강조해놓고 정작 일상에서는 아무도 의존하지 않는 욘. 경기장 바깥에서는 얘기가 다르다고? 과연 그럴까. 우리는 더불어 사는 세상을 강조하지만 절대 타인과 엮이지 않으려고 한다. 웬만한 일들은 혼자 처리할 수가 있고, 힘든 일들은 비용을 내고 서비스를 받으면 된다. 이 같은 일인 체제의 사회에서는 개인주의가 이기주의의 동의어가 되었고, 미덕이었던 관심은 대단한 실례처럼 돼버렸다. 허나 손익계산에 따라 돌변하는 인간관계로는 절대 시합에서 이길 수가 없는 법이다. 겉으론 멀쩡해 보이는 이들도 말 못 할 속 사정은 다 있고, 해결 못해서 끙끙 앓는 경우도 다반사다. 우리는 그런 이들에게 손을 내밀어 주어야 하고, 공을 패스해 주어야 한다. 세상은 절대 일인 체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어야 한다.


외계인과의 시합 패배는 과거의 무릎 부상보다도 더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옛적 광야 생활보다 못한 시궁창의 삶이 찾아온 것이다. 완전히 녹다운 상태였던 욘은 자신에게 남아있는 게 무엇인지 돌아본다. 그리고 자기가 버려두고 떠났던 수강생들을 찾아가 사과를 한다. 또 서로가 슬픔을 주고받으며 팀워크, 신뢰, 호흡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그러면 시합은 됐다 치고 현실에서는 어떻게 패스를 주고받느냐 하는 의문이 들 것이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게임을 팀전이라고 생각 못 하고 개인전이라고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패스하는 방법은커녕 패스가 뭔지도 모르는 것이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삶이 일상의 조각 모음으로 이뤄져 있으며, 그 일상에서는 ‘스몰토크‘가 패스의 개념을 대신한다. 별거 없어 보이는 패스가 시합에서 매우 중요하듯이, 시간 낭비에 불과한 스몰토크가 인생게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팀전에 약한 사람, 즉 패스할 줄 모르는 사람은 공을 뺏긴다고 생각해서 가지고만 있으려고 한다. 그러나 인생은 절대 개인전이 아니며, 혼자서는 절대 골을 넣지 못한다. 당신이 메시급 선수가 아니라면 말이다. 아직 못다 한 말들이 있지만 이쯤 해두자. 아주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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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오피스 오늘의 젊은 작가 34
최유안 지음 / 민음사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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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말하길, ‘노동‘이란 자발적으로 뛰어들 만큼의 매력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했다. 반대로 노동에 강제성이 요구될수록 개인은 기계의 부품이 되어 무력해질 뿐이란다. 허나 자본주의라는 공룡을 생쥐가 무슨 수로 상대한단 말인가. 그냥 위에서 시키는 거나 잘해야지, 괜히 나의 이상과 뜻을 내세웠다간 찍혀서 피곤해질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계획대로 되는 게 없음을 경험할수록 우리의 사고와 태도는 소극적이게 되고, 노동은 매력과 가치를 잃어버리고, 그렇게 개인도 기업도 사회도 다 같이 침몰하는 형국이 되고 만다. 이런 물음들 앞에서 늘 돌아오는 대답은, 너 아니어도 잘만 굴러간다는 고의성 짙은 팩트였다. 따라서 현대인들이 서있는 갈림길은 공룡과의 투쟁이나 협상이 아니다. 오직 복종과 패배만이 기다릴 뿐이다.


앞만 내다보며 달려온 사람도, 실패를 거듭하며 주저앉은 사람도 결국 같은 의심을 한다. 대관절 노동이란 무엇이며 이토록 매달리지 않으면 안 되는가. 그런 걸 신경 쓸 여력이 있으면 차라리 자기 계발이나 해야 할까?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것마저 여의치 않으면 입 다물고 하던 일이나 잘하라고?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닐 거다. 현재의 내 모습들은 전부 나 자신의 선택으로 이뤄진 결과물이다. 그러므로 투덜거릴 자격도 없다는 말은 어쩐지 너무 가혹하다. 그 불평들은 자아실현의 단계에 훨씬 못 미치는, 전혀 보장되지 않는 삶의 안정성 때문이란 말이다. <백 오피스>는 그러한 불안요소를 안고 살아가는 현대사회를 그린 작품이었다.


대기업 태형그룹과, 태형의 신 프로젝트를 맡은 기획사와, 컨벤션 호텔의 이해관계가 얽힌 내용인데 솔직히 정신 산만해서 피곤했다. 큰 무대와 많은 인물에 비해 분량이 퍽 모자랐고, 복잡한 인물관계 구도가 오히려 집중력을 분산시켰다.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 많다는 건 알겠지만 욕심이 너무 과했다. 한 400p 이상의 분량으로 뽑았으면 대박이었겠는데 참 아쉽다. 인물들의 신경전, 직장인의 생존법, 업계의 명암 등 리뷰할 게 많으나 시간상 메인 요리만 다루도록 하겠다.


태형 그룹의 홍지영 대리부터 시작하자. 그녀는 교활한 사수한테 걸려서 몇 년째 시달려왔다. 세상은 순진한 토끼보다 꾀 많은 여우를 더 알아주는 법이었다. 자신의 공을 가로챈 사수의 비리를 고발한 그녀는 이번 컨벤션 행사의 총괄을 맡는다. 이제부터 홀로서기를 해야 하는데 문제는 그녀가 사수처럼 잔머리도 없고 인간관계도 서툴다는 것. 하여 더욱 빈틈없는 책임자의 탈을 쓰려는데, 그 과정에서 이런저런 현타가 연달아 찾아온다. 자신의 능력 부족과 고발정신과 융통성 없음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직장에서, 대체 무엇 때문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싶어진다. 일에 대한 보람은 없고, 평판은 나빠지고, 급여 인상은커녕 일거리만 늘어간다. 지금의 현대인들이 하고 있는 고민거리가 딱 이런 형태다. 그래도 잘해보겠다는 나의 의욕을 확 밟아버리는 이 거지 같은 환경을 참아내기가 정말 힘들다. 심지어 ‘빌런‘들도 자기가 피해자라며 남들과 똑같은 고민을 한다. 그걸 이상히 볼 것도 없다. 우리 모두가 기계의 부품이 되었기 때문에.


다음으로 기획사 직원 임강이를 알아보자. 업계 1위와의 경쟁을 이기고 태형 그룹의 프로젝트를 따낸 그녀. 이번 행사에 진심이었던 그녀는 이름 없는 중소기업의 신화를 새로 쓰고 싶어 했다. 아무튼 행사 기획은 좋았으나 행사 무대를 구현하는 데에는 많은 리스크가 있었다. 디데이는 다가오고, 예산은 부족하고, 세팅은 시작도 못해서 조급해지는 그런 상황.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알게 된다. 담당 업무가 자신의 역량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를. 그 일이 내 능력을 훨씬 초과한다면 아예 도전의 영역을 넘어가 버린다. 마치 만 원짜리 낚싯대로 참다랑어를 잡겠다는 것과도 같다. 임강이는 이번 프로젝트가 버겁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여 업계 1위의 경쟁사에서 온 스카웃에 흔들린 것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규모가 큰 곳으로 가면 지금처럼 하나부터 열까지 일일이 신경 쓸 필요도 없을 테니. 괜히 욱해서 무리하게 계획을 밀어붙인 탓일까. 우려했던 무대 사고가 일어났다. 보통 이런 경우는 불명예를 안고 떠나거나, 죄인이라는 낙인이 찍혀 쥐 죽은 듯 지내야 한다. 사고가 날 줄 누가 알았겠냐마는, 의욕이 과다해서 너무 오버한 건 아닌지 등등 온갖 자책과 후회를 하게 된다. 신기하게도 꼭 이런 일들은 요령 피우지 않는 사람한테만 일어나더라. 아무튼 옐로카드를 받고도 레드카드를 받은 것처럼 좌절하거나 재기 불능의 상태가 된 현대인들이 나는 가장 안타깝다.


끝으로 호텔의 백 오피스 지배인인 강혜원을 살펴보자. 호텔에는 전반적인 사무와 응대를 담당하는 프런트 오피스 팀이 있고, 그 일들이 원활하게 처리되도록 받쳐주는 백 오피스 팀이 있다. 육아 휴직을 마치고 복귀하여 다시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는 그녀는, 육아보다도 차라리 일하다 죽는 쪽을 더 선호하는 편이었다. 원래도 바빴지만 태형 그룹의 행사로 더욱 바빠진 그녀를 더 이상 참지 못한 남편은 이혼을 요구한다. 가정에 소홀하기도 했거니와 자신이 ‘아내‘와 ‘엄마‘에 맞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아무리 그렇다 한들 나의 가족과 집을 포기할 만큼 직장 일이 나에게 중요한가? 나 자신만 챙기며 잘 살라던 엄마의 모호한 유언을 따라 지금의 자리까지 올랐지만 행복도 보람도 잘 모르겠다는 그녀. 프런트 오피스를 위해 존재하는 백 오피스처럼 자신은 업무에 최선을 다했을 뿐 가정을 외면할 의도가 없다면서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그러다 아수라장이 된 행사장을 보면서 자신이 망쳐버린 가정을 떠올린다. 엄청 극단적이긴 해도 일과 자신의 분리 과정을 제대로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광경을 볼 때마다 나는 맞아야 정신 차린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매우 꼰대스러운 발상이지만.


어디서 읽은 건데, 사람이 무기력해지는 이유는 얄궂게도 너무 잘해보려고 해서란다. 누구나 처음에는 적당히 보다 제대로 하는 게 낫다는 생각으로 열과 성을 다한다. 한참을 그러다가 이내 깨닫는다. 적당히 하는 것조차 쉬운 게 아니라는 것을. 영혼까지 갈아 넣어 최대 효율을 내는 것도 한두 번이지, 그게 당연시되면 잘하고도 질타를 받거나 더 높은 목표를 요구받아 완전히 사기가 저하된다. 그때부터는 내가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일이 나를 지배하는 구조로 바뀐다. 현대산업의 악조건과 문제점들에 대해서 쭉 살펴봤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으로선 괜찮은 해결책이 없다. 언론에서는 청장년들의 ‘쉬었음‘을 계속 보도하지만, 현실에서는 구직 공고마다 수십수백 명이 지원하고 있다. 어떤 취준생들은 면접을 위해 수년을 준비하는 반면, 고생해서 들어간 직장을 제 발로 뛰쳐나오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누구 말마따나 중간만 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는 현실이다. 죽을 것 같다면서도 잘 참고 사는 분들을 보노라면 내가 꼭 고장 난 부품처럼 느껴진다. 이러나저러나 우리는 공룡을 이길 수 없겠지만 최소한 무기력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어쩌면 그 과제가 취업보다도 더 우선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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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구의 사랑 오늘의 젊은 작가 21
김세희 지음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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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내가 읽은 최초의 퀴어 문학인 듯하다. 그걸 알았다면 굳이 안 읽었을 테지만 일단 몰랐으니까 읽어봄. 이제는 ‘커밍아웃‘이 흔하게 사용되고 있으나 그 용어의 탄생은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던 기억이 난다. 금기시하던 동성애가 스멀스멀 사회 밖으로 나오더니 어느덧 하나의 문화 현상처럼 자리 잡게 되었다. 내가 느낀 바에 의하면 우리 문화에서의 동성애는 곧 ‘남자+남자‘를 뜻했다. 더는 동성애라고 해서 놀라지 않게 된 지금에도 그건 여전히 남성들의 문화처럼 다뤄지고 있다. 방송이나 유튜브에서도 게이는 개그 소재로 사용되는 반면 레즈비언에 관련된 콘텐츠는 절대 나오지 않는다. 그만큼 ‘여자+여자‘는 수면 아래에 있었다. 내가 남자라서 그런가. ‘남자+남자‘는 꺼림직한데, ‘여자+여자‘는 별생각이 없다. 여자끼리 팔짱도 끼고 포옹도 해주고 하는 걸 많이 봐와서 그럴 거다. 그런 여자들만의 문화 속에서는 자신이 진짜 동성애자인지도 모르고 분위기에 휩쓸리기도 할 듯하다. 그게 <항구의 사랑>을 읽으면서 느낀 점이다.


별점이 짠 것은 순전히 재미가 없어서이다. 정체성에 눈 뜬 소녀의 학창 시절을 기록한 일기장 느낌. 그걸 덤덤하게 읽어가는 내레이션 같았달까. 논란을 의식해서인지 조심성이 과한 탓에 이도 저도 아닌 작품을 낳았다. 차라리 ‘진짜‘ 일기였다면 훔쳐보는 재미라도 있었을 건데. 내가 ‘정보원‘들에게 들은 바로는 여중-여고는 남자에 굶주린 아이들과 전혀 그럴 생각이 없는 아이들이 반반이라고 했다. 후자 중에는 남자 연예인이나 애니메이션 주인공을 덕질하는 걸로 만족하기도 한다. 현실 남자든 디지털 남자든 뭐라도 좋아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어느 쪽에도 관심이 없는 아이들은 소위 별종 취급을 받는다. 하물며 동성을 좋아한다는 건 별종을 넘어서 돌연변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이것을 곱게 받아들일지 말지는 각 지역, 학교, 세대의 문화 특성에 달려있다. 다행히 주인공과 저자의 학창 시절에는 동성애를 막 걸고넘어지진 않은 듯하다. 그러니 이렇게 옛일을 추억하며 책으로까지 낸 거겠지.


주인공 준희는 2차 성징이 시작된 초6부터 대학생이 될 때까지 여러 ‘후보자‘를 만난다. 그들은 하나같이 시원시원하고 털털한 성격이며, 외모나 행동에서 남성미를 느낄 수 있는 부류였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 남자다운 남자에게 끌릴 법도 할 듯한데 그게 아니다. 남자들은 여자들의 예민하고 섬세한 감정을 이해해 주지 못하지만 같은 성별끼리는 그게 되거든. 사랑과 우정을 동시에 이룬다니, 이 얼마나 가성비 좋은 전략인가. 일반적인 커플의 경우 애인 주변에 있는 모든 이성이 다 ‘적‘으로 간주되지만, 동성 커플에게는 그 같은 적들도 없었다. 간혹 동성 커플을 보며 괜히 따라 해보는 경우도 있지만 거진 한때의 철없는 불장난으로 끝나고 만다. 그걸 알기 때문에 여학생들의 동성애를 막 혐오스럽게 생각하진 않는다. 만약 다 커서도 그렇다고 하면... 취향 존중한다. 반대로 남자 커플은... 알아서 생각하시길.


이 작품은 딱히 스토리랄게 없는 작품이라서 길게 리뷰할 것도 없다. 처음 읽은 퀴어문학치고는 매우 순한맛인데 그래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자들끼리 사랑에 빠지는 구조나 원리는 대강 이해했는데, 그게 남성 커플한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건가? 어쩐지 아닐 것 같은데, 그러면 대체 남자끼리 스파크가 튀는 건 어떤 이유인가? 아, 아니다. 전혀 알고 싶지 않습니다. 비록 저는 오메가 메일이지만 그래도 여자가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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