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돈키호테 - 전2권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 지음, 안영옥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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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팅만 해오던 <돈키호테>를 드디어 완독했다. 한 2천 장쯤 되는 이 작품은 놀랍게도 전혀 지루할 틈이 없었는데다, 나처럼 느려터진 독자라도 후다닭 읽어낼 정도의 가독성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 압도적인 자태에 겁먹을 필요는 없겠다. 사실 벽돌책을 읽을 때마다, 이게 그렇게까지 길게 쓸 내용인가 싶은 생각이 꼭 있었다. 그 편견을 완전히 깨부순 게 <돈키호테>이다. 전세계 독자에게 검증된 이 작품은 뭐랄까, 백 마리의 토끼를 잡는다고 해야겠다. 포장지는 코미디 소설의 모양새를 하고 있으나, 실상은 온갖 팩트로 무장된 하드코어 인생교과서였다.


1권의 내용은 대강 이렇다. 시골사는 하급 귀족 영감님이 기사 소설에 심취하더니 직접 기사가 되기로 한다. 제 이름을 돈키호테라 칭한 뒤 불의로 가득 찬 세상을 구원하고자 모험을 나선다. 그는 출간된 기사 소설들이 전부 실화라 믿었으며, 소설에 나온 설정을 모조리 따라 한다. 아사 직전인 말을 타고, 옆집 농부를 종자 삼고, 가상의 귀부인까지 만드는 등 기본 조건들을 갖춘 다음 본격적인 기사 노릇을 시작한다. 이제 너무도 유명한 양떼 사건, 풍차 사건 등 별별별 해프닝이 반복된다. 이렇듯 가는 곳마다 사고 치는 초 역대급 민폐 아이콘이 바로 돈키호테 되시겠다.


환상 속에 빠져사는 이 영감님은 눈에 비친 모든 것을 왜곡되게 해석한다. 또 모든 상황을 제 입맛대로 끼워 맞춘다. 그렇게 세상은 그를 중심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보다시피 과한 덕질은 정신건강에 해롭다는 걸 명심하자. 기사 역할에 극도로 취한 돈키호테는 누구와도 멀쩡한 대화가 불가했고, 그래서 반박과 태클이 끊이질 않았더랬다. 간혹 말빨이 딸려 불리해질라 치면 꼭 마법사들의 장난을 탓해버린다. 이런 걸 가리켜서 인생 날로 먹는다 하는 건지도. 요 광기 충만한 능구렁이의 어디가 그렇게 매력적이냐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나는 돈키호테만의 역발상을 손꼽는다. 갖은 우롱에도 자신을 의심하긴커녕 애초부터 당신네들이 틀려먹었다는 우리 영감님의 뇌구조가 지금 봐도 쇼킹한데 뭐 당시에는 더했을 테지. 돈키호테의 넘사벽 언변과 신성한 기사도 앞에서는 되려 손가락질한 이들만 바보가 된다. 이게 참 웃기면서도 기분이 묘했다. 그는 자기를 무시하는 이들과 싸우지 않고 자리를 피하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의 위대한 뜻을 시기하는 날파리 정도로 여겼다. 역시 정신승리가 답이었던가.





고품격 젠틀맨의 껍데기와 달리 가슴에는 사랑과 낭만이 들끓는 떠돌이 기사님. 예고도 없이 폭발하는 감수성은 그냥 뭐 갱년기라서 그런 걸로 하자. 숨 쉬듯이 운명을 탓하고 사랑을 노래하는 돈키호테가 전혀 낯 뜨겁지 않았던 건 아마도 진지함과 망가짐을 왕복하는 텐션의 온도차 때문이렸다. 그래 뭐, 좋은 게 좋은 거라지만 정말x100 피곤한 타입이다. 그 곁에서 고생은 고생대로 한 산초는 왜 손절하지 않았을까. 주인과 싸우기도 참 많이 했고, 그래서 몇 번이나 종자를 관두려 했던 산초였다. 그럼에도 끝까지 동행한 이유는 언제나 자신의 허물을 덮어준 주인의 온화함 덕분이다. 결국 돈키호테는 '좋은 사람'이었고, 그걸 알아본 산초와 동료들은 어떤 빌런 짓을 해도 그를 이해하고 받아주었다. 과연, 사랑 없이는 평화도 없다는 말씀.


그나저나 늘 진지풀한 우리 기사님은 왜 그리도 에너지를 낭비하시는 걸까. 여기에도 나름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는데, 그가 모든 상황을 모험이라 하듯이 우리네 인생 또한 매 순간이 모험의 연속이라 하겠다. 생각해 보라.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드는 시련과 고난은 어느새 소소한 안줏거리가 되어있을 것이다. 그토록 심각해하던 고민도 나이 먹고 돌아보면 그렇게까지 감정 낭비할 일은 아니었구나 생각들 한다. 대부분 해프닝이었던 게지. 결론은 몸에 힘 좀 빼고 살자는 건데 그게 말이야 쉽지. 인생은 실전이고 두 번의 기회는 잘 없기에 물 들어오면 노 저어야지 별 수 있나. 나 같은 예민러들은 인생 공부를 두 배로 해둬야 한다.


자칭 기사라면서 기사 답지 못한 행동을 할 때가 더러 있다. 그는 자신의 모욕만큼은 절대 못 참으면서, 모욕당한 동료가 화내는 건 정당치 못한 연고로 그냥 참으란다. 거참, 완전무결해서 인간미 한두 방울 넣었다기엔 내로남불은 좀 킹 받지 않는가. 동료들은 이 궤변론자를 그러려니 했고, 일반인들은 기사님 비주얼에 그만 납득해버린다. 옷빨과 장비빨이 이렇게나 중요... 이게 아니고 암튼. 좀생이처럼 굴면서도 기사도를 외치는 게 난센스이긴 하나, 이렇게 양보 없이 내 방식대로 사는 것도 필요하겠더라. 혹여 이 책을 읽는다면 화려한 대사에만 집중하지 말고 상황별 행동에도 주목하길 바란다.


세상만사에 풍부한 학문과 식견을 갖춘 돈키호테는, 어떤 주제라도 막힘없이 설교하는 초 달변가이다. 그를 보필하는 산초 또한 어디 가서 꿀리지 않는 본투비 입담꾼이다. 두 명 다 주옥같은 명대사를 잔뜩 남겼는데, 작가는 뭐가 그렇게 할 말이 많았을까나. 듣자 하니 당시 스페인은 정치, 문화, 종교 등등 문제가 많았던갑다. 세르반테스는 '인간다움'을 잃어버린 사회를 풍자하고자 <돈키호테>를 써서 디스며 팩트며 온갖 뼈 있는 개드립을 사정없이 갈겨댄다. 그렇게 하고도 욕먹지 않을, 또는 욕을 먹어도 끄떡없을 캐릭터가 필요해 만든 것이 미쳐버린 돈키호테와 덜떨어진 산초였다. 이런 친구들이 비판 좀 했다고 정색해버린다면 스스로 바보 인증하는 꼴이 될 테니까. 작가가 짱구를 참 잘 굴렸다.





10년 뒤에 나온 2권의 내용은 이렇다. 누군가 돈키호테의 모험기를 책으로 출판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또다시 모험을 하려던 차에 한 속보가 날아든다. 마법에 걸린 돈키호테의 귀부인이 그만 추녀가 되었단다. 이 마법을 풀기 위해 여기저기를 떠돌던 두 사람은 어느 공작 부부의 성을 방문하게 된다. 부부는 극진히 대접하며 교묘히 장난치고 조롱한다. 그런 줄도 모른 채 기사 제도의 부활을 만끽하는 돈키호테. 그의 약속대로 섬의 통치자가 된 산초는, 공작 부부가 꾸민 계획에 고생만 하다가 돌아온다. 마침내 귀부인의 마법을 푸는 방법을 찾았으니, 그것은 종자가 자발적으로 엉덩짝을 수천 대 맞으면 된다는데...


1권에서는 돈키호테가 세상을 바보로 만들고, 2권에서는 반대로 세상이 그를 바보로 만든다. 동네방네 소문난 인플루언서 돈키호테의 무늬만 기사였던 시절은 이제 지나갔다. 그래서인지 예전보다 사랑 타령하고 기사도 운운하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가장 큰 변화는 주인공들이 확 점잖아졌다는 건데, 돈키호테는 둘째치고 산초가 뭐랄까, 제법 성숙한 말과 생각을 자주 한다. 주인 나리의 유식함이 물든 것처럼 말하지만 솔직히 세르반테스의 설정 미스 같았다. 이 설정 오류들 때문에 1권은 말이 많았는데, 안되겠는지 2권에서는 작가가 직접 개입하여 오류들을 바로잡아준다. 이 같은 전개와 연출은 처음 보는 방식인데 되게 자연스럽고 매끄러웠다. 이런 사기캐들은 왜 다 옛날에 태어난 걸까.


2권의 절반 이상이 공작 부부와 관련된 장면들이다. 부부는 돈, 장소, 사람, 시간을 다 써가며 방문객들을 놀림거리로 만든다. 나중에는 이걸 웃어도 되나 할 만큼 장난질의 사이즈가 달라진다. 그 많은 장난들이 대단원의 막을 내리기 위한 빌드업이니까 참고들 하시고. 것보다 돈키호테가 성에서 꽤 오래 머문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산초의 부재로 모험할 기분이 안 든다 쳐도, 귀부인 걱정을 너무 안 한다 싶을 정도다. 그거 때문에 떠나온 모험인데 말이지. 캐릭터가 바뀐 게 이렇게 아쉬울 줄은.


나는 속편의 주인공을 산초라고 본다. (솔직히 '반지의 제왕'도 샘이 주인공 아님?) 어느새부턴가 주인 나리의 화법을 따라 하면서 명석함까지 생겨난 산초. 그가 누구였던가. 수많은 지적과 호통에도 끄떡없는 철밥통 관심 종자 아니신가. 그랬던 산초에게 일어난 변화와 성장은 이제야 철 좀 들었네 하고 끝날 일이 아니란 말씀. 잘 먹고 잘 살면 땡이라던 그는 섬에 간 이후로 크게 달라진다. 꿈꾸던 통치자의 삶이란 고생 끝 행복 시작이 아닌, 불안과 고통의 허리케인 그 자체였다. 하여 육신은 고달파도 마음은 평온했던 옛 시절을 떠올리고, 마침내는 욕심에서 벗어나 본인에게 맞는 옷을 찾아간다. 이것이야말로 작품의 주제와 의미를 관통하는 예라 하겠다. 극 현실주의자인 산초는 평소 이상만 추구해대는 돈키호테를 이해치 못했었다. 그딴 게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닌데, 주인 나리는 왜 거기에 빠져서 이 나이 먹도록 앞가림도 잘 못할까 싶었겠지. 헌데 그렇게나 무시했던 이상주의가 알고 봤더니 인간 다운 삶의 유지 비결인 셈이었다. 아 물론 돈키호테는 도가 지나치긴 했다. 여튼 현실만이 전부인 양 살아가는 이들에게, 생계의 해결만으로는 결코 건강한 삶이 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테스형의 말씀이니 잘 새겨듣자.


그와 반대로 돈키호테는 서서히 현실에 눈을 뜬다. 이제 더 이상 멋대로 해석하고 왜곡하는 일은 없다. 대체 무엇이 그의 심경을 바꿔놨을까? 추측건대 산초와 마찬가지로 자기 욕심을 깨달은 연고이지 싶다. 산초가 적극적으로 희생해 줘야 귀부인의 마법이 풀릴 텐데 자꾸 회피하고만 있으니 이 얼마나 괘씸할랑가. 계속되는 닦달에 못 이겨 제 몸에 채찍질을 시작하는 산초와, 그 메소드 연기에 껌뻑 죽는 돈키호테의 맹렬한 현자 타임. 나 좋자고 둘도 없는 친구를 죽게 할 셈인가. 피로 물든 이상이 과연 신성하다 할 수 있을까. 자신의 이상주의가 그릇된 욕심인 것과, 어긋난 기사의 도리를 깨달은 후 점점 제정신을 찾아가는 주인공. 이야기를 끝내야 하는 이유도 있지만, 극단적인 두 인물의 변화를 보여준 데에는 '중용'을 강조하기 위함이라 생각한다. 뭐든지 어느 한쪽으로만 치우쳐지면 균형을 잃고 넘어지게 된다. 그러니 난 이런 사람이야, 나는 이래야만 해, 하며 자신을 가두고 채찍질하는 건 이제 그만들 하자.


1권 출간 이후, 가짜 후속작이 잔뜩 돌아다녔다나. 원작이 파괴돼가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던 작가는 직접 후편을 쓰고 더 이상 이런 일이 없도록 주인공을 퇴장시켰단다. 그리고 출간 1년 뒤에 세르반테스도 그만 퇴장했다고 한다. 알고보니 절망 그 자체였던 일평생이던데 이 같은 유머와 희망 가득한 글이 어떻게 나온 걸까. 그 답은 작중에서 언급한 작가의 인본주의에 달려있다. 인본주의는 절대 그냥 생겨나지 않는다. 완전히 밑바닥을 찍고 소망이 다 끊어졌을 그때에, 손길을 내어준 누군가에게서 삶의 의미를 발견한 자만이 얻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현자라 불리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여하튼 평소에 내가 글 쓰는 방식도 이 인본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눈치챈 사람이 몇이나 있을진 모르겠지만. 자 여기까지, 내 평생 가장 긴 리뷰였는데 정말 글 쓰면서 설레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더라. 다시 한번 읽기를 잘했다 생각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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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깨비 2023-02-14 16:1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 이게 완독이 가능한 책이군요. 사놓은지 이제 반년이 지난 것 같은데 아직 엄두를 못내고 있어요. 😭

물감 2023-02-14 16:50   좋아요 4 | URL
저도 제가 해낼 줄 몰랐습니다. 그리고 왜 이제사 읽었는지 반성하게 됩니다. 북깨비 님과 같은 분들을 위해, 나름 신경써서 적어봤어요 ㅎㅎㅎ 앞에 서문 같은거 건너뛰고, 한 5장만 읽어보세요. 그대로 푹 빠지실 거에요! 스토리도, 번역도 되게 현대적입니다. 정말 걸작이라고 하겠습니다^^

coolcat329 2023-02-15 07: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물감님, 먼저 고전 중의 고전 돈키호테 완독 축하드려요. 이 책이 이리 재미나군요. 저는 물감님의 글도 너무 재밌어서 웃으며 읽었습니다.
세르반테스 삶이 참 고난의 연속이던데 어쩜 이런 작품을 쓸 수 있었는지 저도 신기하네요.
저도 돈키호테 다시 생각해 봐야 겠습니다. 😂

물감 2023-02-15 08:48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쿨캣님 ㅎㅎㅎ 정말이지 너무 만족했던 책이었어요. 그 많던 찬사들이 정말 거짓 하나 없었음을 온 몸으로 느꼈습니다. 특히 저의 성향이나 가치관과도 너무 잘 맞는 작가여서, 리뷰에도 정성을 좀 들여봤어요 ㅎㅎㅎ 고달픈 삶이지만 유머를 잃지 않으려는 테스형의 속내를 저는 알 것 같아요. 이와 관련된 리뷰도 쓸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꼭 읽어봐주세요!

책읽는나무 2023-02-15 08: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완독!! 해내셨군요?
축하드립니다^^
산초가 주인공!! 맞는 말씀 같기도?ㅋㅋㅋ

물감 2023-02-15 08:53   좋아요 2 | URL
ㅎㅎㅎ 감사합니다. 축하받으니 리뷰 당선된 듯한 기분도 들고 좋은데요? ^^
책 추천을 잘 안하는 제가 이 작품만큼은 적극 추천을 해봅니다~
산초가 주인공!! 그래보이죠? ㅎㅎㅎ

페크pek0501 2023-02-16 14: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돈키호테는 동화책으로만 읽었고 유튜브나 팟캐스트로만 들었어요. 저도 언젠가는 원작을 읽어야지, 하고 있었네요.
길게 쓰신 리뷰, 알이 꽉 찬 리뷰 같네용^^

물감 2023-02-16 16:40   좋아요 2 | URL
이 책은 동화나 요약본으로 읽은 사람이 많아서, 읽었다고 착각하는 책중 하나라던데요ㅎㅎ
그렇게라도 읽으면 좋지만, 완독한 사람으로써 반드시 원작을 읽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겠습니다^^
스토리도 메세지도 촥촥 감겨서 그냥 리뷰쓰는 맛이 절로 나더라고용ㅎㅎㅎ

서니데이 2023-03-13 17: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