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이스 콜드 ㅣ 리졸리 & 아일스 시리즈 8
테스 게리첸 지음, 박아람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5월
평점 :
절판
‘사람은 혼자 살아도 전혀 문제가 없다‘ - 이 의견은 1인 가구/N포세대가 늘고 있는 요즘, 온라인에서 엄청나게 찬반이 나뉘고 있다. 남들과 관계를 맺는 게 부담이 되고, 있는 관계도 끊고 사는 시대인데 혼자 사는 게 뭐가 대수라고 그렇게 호들갑이냐는 사람들도 많다. 이제 시장도 상품을 1인 가구에 맞춰서 내놓는 추세이므로 돈만 있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사회에 가득하다. 그 말에 나는 뭐 반반 입장이다. 그러나 절대 사람은 혼자서 모든 걸 해결할 수가 없다. 마이웨이 독고다이의 싱글 플레이어 캐릭터들(007요원이나 람보나 셜록 홈스 같은)도 사실은 누군가에게 계속 도움을 받는다. 그러면 호신술도 할 줄 모르고 사고 대처도 못하는 우리가 납치되거나 인적 없는 곳에서 사고 나거나 조난당했을 때도 혼자서 해결할 수 있을까? 내가 위급상황일 때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다면, 내가 죽거나 없어져도 아쉬워할 사람이 하나도 없다면 너무나 괴로울 것 같다. 이런 상상만 해봐도 사람은 완벽하게 혼자일 수는 없다. 그 생각은 이 책을 보면서 더욱 확신이 들었다. 이번 편은 인적 없는 설산에 갇힌 병리학자 마우라 아일스의 이야기이다.
성직자와 밀애 중인 마우라는 절대 평범치 않은 이 관계를 계속 유지하는 게 맞는 건지 고민 중이다. 생각도 정리할 겸 병리학 컨퍼런스를 참석하러 날아간 캘리포니아에서 대학 동기를 만난다. 기분전환을 위해 그의 친구들과 놀러 갔다가 산 길에서 차 사고가 나서 다친 동료를 주변 마을로 데려가게 된다. 그런데 이 마을은 모두 빈 집이었고 집문이 전부 열려있다. 바깥은 폭설 중이고 전화는 안 터지고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는 상황이다. 그리고 상처하나 없이 죽어있는 반려동물들과 의문의 피 웅덩이... 한편 그녀의 실종을 눈치챈 형사 리졸리 일행은 마우라의 사고 차량을 발견하고 근처에 죽은 시신들이 마우라 일행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래서 살아있는 진짜 마우라는 이제 아무도 찾으려 하질 않게 된다. 그리고 그녀에게 서서히 다가오는 하나의 그림자. 마우라는 자신을 반기는 위험과 공포 가운데에서 무사히 구조될 수 있을까.
고립된 장소에서 일어나는 조난 사건과 사고들. 흔한 소재라 딱히 기대감 같은 건 가지지 않았다. 다만 같은 소재라도 추리소설과 스릴러소설의 패턴이 다른 것에 흥미가 생겼다. 보통 추리소설이 밀폐 장소에서 범인을 밝히는 게 기본 플롯이라면, 스릴러소설은 건물 안과 밖에서 두 이야기가 동시에 진행되어 범인도 찾으면서 위기에 빠진 자들을 구하는 과정까지가 기본 플롯이다. 이 책은 밀폐된 공간을 집안 같은 좁은 장소에서 마을과 지역 전체로 확산시켰다. 무대가 커지면 써먹을 장치도 더 많이 늘어난다. 작가는 텅 빈 곳에서 인기척을 느끼게 함으로 공포감을 형성하였고, 일행들이 의견 불일치로 싸워서 흩어지게 한다. 여기까지는 어느 조난 장르물이나 비슷한 흐름이다. 그러나 후반전이 전혀 다르게 흘러간다. 그녀가 잠깐 밖에 나간 사이에 누군가가 집들을 불질러서 일행들이 전부 죽었고, 그 지역의 보안관들이 그녀를 죽이려는 황당무계한 전개가 진행된다. 이렇게 뻔하면서도 예측불허한 특징이 장르소설만의 매력이다.
이번 작품은 유독 마우라의 심리상태가 뒤집히는 상황이 자주 있다. 항상 시크하고 완벽주의에다 일 외에는 모든 게 서툴고 유연치 못했던 그녀였다. 그러나 이번 일을 통해서 사람들을 그리워할 줄 알게 되고, 사랑하는 이와 가족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고, 타인의 아픔에 대해서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 늘 죽은 사람만 상대해온 마우라는 처음으로 산 사람을 수술해야 하는 상황을 겪는다. 죽은 사람은 해부할 때 피도 안 흐르고 비명 지르는 일도 없고 옆에서 통곡하는 가족도 없었다. 그러나 산 사람은 모든 게 정 반대였다. 환자의 고통을 고스란히 느껴야 하는 괴로움은 그녀의 전공이 아니었다. 그러나 눈앞에서 죽어가는 환자는 그녀의 돌 같은 심장을 깨뜨렸고, 산 사람이 가진 생명의 가치를 느끼게 된다. 여러 가지로 마우라의 성장을 보여주었던 작품이다. 그런데 꽤 비중 있었던 일행들이 화재 이후로 갑자기 다 퇴장해버려서 급 당황스러웠다. 뭔가 있어 보였던 등장인물이 알고 보니 병풍 역할이라면 이 얼마나 허무한가. 스릴러 장르는 이렇게 김빠진 콜라 하나가 작품의 완성도를 좌지우지하기 때문에 사소한 것에도 주의해야 한다.
스릴러 소설은 문학의 여러 장르 중에서 가장 외면받는 장르이다. 이유야 많겠지만 잔인하고 폭력적인 게 싫은 것과, 문체가 딱딱해서 싫다는 이유가 가장 많다. 전자는 어쩔 수 없지만 후자의 이유라면 이 작가의 책으로 해결이 가능하다. 테스 게리첸은 감성 스릴러 작가로 유명한데, 이 시리즈의 주인공들을 여성으로 설정하였고, 사건 사고마다 여성만의 아픔과 연민의 감정으로 연결시키는게 특징이다. 그래서 어찌 보면 사건보다 캐릭터들의 인간적인 면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아무튼 글도 하드보일드 하지 않고, 작품의 거친 면만 보여주고 땡이 아니기 때문에 이 작가의 책은 스릴러 장르에 입문용으로 적격이다. 플롯도 그리 복잡하지 않으면서 재미는 재미대로, 교훈은 교훈대로 다 갖춘 편이라 부담이 덜할 것이다. 그런데 국내에 출간된 테스 게리첸의 작품은 2013년도에 출간된 이 책이 마지막이었다. 더 이상 후속작이 없는 건 국내에서 인기가 없기 때문에 안 나오는 걸까. 수요가 없으니 공급도 끊어진 걸까. 그래 뭐 나중에라도 작가의 신간을 볼 수 있길 희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