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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 ㅣ 소담 베스트셀러 월드북 28
J.D. 샐린저 지음, 김재천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1년 7월
평점 :
품절
안녕, J. 오랜만이야. 건강히 잘 지내지? 우리 헤어진 지가 벌써 10년도 더 넘었네. 코시국인데 사는 건 좀 괜찮아? 나는 뭐 퇴근하면 집에서 책이나 읽고 평이나 쓰면서 느긋하게 살아. 신기하지? 그렇게 싸돌아다니던 애가 왜 갑자기 집돌이가 됐냐고 다들 그래. 글쎄,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어. 아무튼 평소같이 책 읽다가 문득 네 생각이 나는 거야. 그래서 이렇게 전하지도 못할 편지를 써. 근데 우리 옛날에 쪽지랑 편지 되게 많이 주고받았잖아. 싸이월드 방명록이랑 댓글도 많이 썼고. 그러니까 갑작스러운 편지에 어색해하지는 마. 어차피 이 편지는 수취인 불명이 될 테니까. 우리는 한 번도 책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네가 책을 좋아하는 건 알고 있었어. 네 방에는 높다란 책장이 있었고 많은 책들이 꽂혀 있었으니까. 내 기억에는 비문학이 더 많았는데 소설도 몇 권 있었던 거 같아. 해리포터 원서도 기억이 나네. 혹시 <호밀밭의 파수꾼> 이거 읽어봤어? 네 취향상 안 봤을거 같긴 한데, 여튼 이 책 주인공이 예전의 우리하고 좀 닮았어. 에, 그러니까.. 인싸처럼 보이고 싶어 하는 아싸의 몸부림이랄까.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지? 모르겠으면 계속 읽어봐.
이제는 그림도 악기도 다 접었어. 아, 노래 부르는 건 여전히 좋아해. 언젠가 다시 만나 노래방이라도 간다면 네가 좋아한 노래는 불러줄게. 나는 너의 <kiss the rain> 연주를 다시 듣고 싶어. 너도 나처럼 음악 접었으려나. 아무튼. 위에서 말했듯이 책 읽고 글 쓰는 게 유일한 낙인데, 이 편지를 빌려 서평을 같이 써볼까 해. 물론 너도 이 책을 읽었으면 하는 바램도 있고. 일단 네가 안 읽었다고 가정하고 쓸게. 이 책은 청소년 베스트 필독 도서인데 그보단 본격 중2병 소설로 더 유명하거든? 세상만사가 불만이던 남학생이 홧김에 일탈하는 다소 낡은 내용인데 이게 뭐라고 전 세계가 좋아하나 싶은 거야. 그래서 읽어보니까 왜 다들 호밀밭, 호밀밭 했는지 알 것도 같애. 우리가 그토록 방황하고 허무해하던 때로 되돌아간 기분이었어. 이게 뭐랄까, 반갑기도 하고 그립기도 하고 또 잘 잊고 있었는데 억지로 생각난 것도 같고 참 기분이 묘하네. 네 기분도 나 같을까.
전에 내가 사는 게 따분하다고 했던 거 기억나? 학교 애들이 죄다 유치해서 못 놀겠다 했던 것도? 이 책의 주인공이 그때의 나와 딱 비슷했어. 사교성 있고 친화력 좋은 너도 가끔 무기력하고 만사가 허무하다 그랬었잖아. 그래서 너도 읽어보면 금방 공감할 거라 생각해. 주인공이 뭐랄까, 하여간 진짜 답 없는 놈이야. 근데 이런 애들이 워낙 많아서 읽어도 별생각은 안 들어. 이 친구는 네 번째 옮긴 학교에서도 낙제 받아 퇴학당한 몸인데, 학교고 집이고 뭐고 다 싫어서 그냥 가출하고 자유인이 돼. 그리고 가진 돈을 신나게 탕진해버려. 성인인 척 같잖은 허세를 부려대고 온갖 거짓말과 감언이설을 달고 살아. 반마다 문제아들이 한 둘씩 꼭 있었는데, 여튼 그런 애들이랑 호밀밭 주인공 하고는 좀 결이 달라. 한없이 삐딱했다가 갑자기 사랑을 외치고, 환멸 나다가도 낭만을 추구하는 게 딱 나 같은 성격이야. 나도 얘처럼 세상이 나를 미워한다고 생각했으니까. 우리의 그 많던 고민들은 사실 별게 아니었는데 그땐 왜 그리 심각했던 건지 모르겠다. 이 책은 우리의 지난날 구석구석을 떠올리게 해줘. 아마 J, 너도 너만의 경험과 감정으로 주인공을 이해하고 공감하게 될 거야. 이 책은 작가의 의도가 크게 중요치 않은 그런 책이야.
보니까 가족들이 소년만 빼고 다 머리가 좋아. 거기서 오는 열등감도 그렇고, 사랑했던 여동생의 죽음과, 나를 이해 못 하는 사람들에 대한 실망, 속물들에게 느낀 염증 등등. 이 정도면 뭐 삐뚤어질만한 하네, 안 그래? 이제야 말하는 건데 너의 헤픈 그 씀씀이를, 너의 당연한 물욕을 감당하기가 어려웠어. 나는 너로부터 속물근성이 뭔지를 알게 됐고, 그런 타입들을 꺼려 하게 되었어. 그때는 좋아하는 감정이 더 커서 티 내지 못하고 미련하게 오랜 속앓이를 했던 거야. 그래서 나는 이 소년의 투정과 어리광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수 있었어. 너도 이 편지를 읽고 이 책을 읽는다면 그때의 나를 더 잘 이해하리라 생각해. 나도, 호밀밭 소년도 절대 자존감이 낮은 건 아니야. 다만 믿었던 사람에게 이해받지 못하니까 괜히 더 소심해지는 거지.
세상은 충분히 지겨웠고 사람들은 다 한심해 보였어.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다 제 나이보다 일찍 성숙해서 그랬던 거야. 난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제멋대로인 주인공의 하나부터 열까지가 전부 공감이 돼. 일탈해본 적이 없어도 얘가 사사건건 왜 그랬는지 알 것 같아. 그때는 나도 산다는 것 자체가 막막했고, 세상이 만든 시스템들이 싫었고, 조금만 탈선해도 날아드는 시선과 비난이 짜증 났었어. 그건 어쩔 수가 없어. 어릴 때는 다 그런 거야. 느껴본 적 없는 감정에 대처할 줄을 모르니까 아 몰라 하고 외면해버리지. 그걸 자주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지쳐서 자꾸 엇나가는 거야. 싸운 뒤에 내가 잠수타고 했던 것도 그런 이유였어. 찌질해보이기 싫어서 했던 행동들이 더 찌질하다는 걸 어릴 때는 잘 몰라. 소년도 그래. 상대와 의견이 안 맞으면 우겨서 설득하려 들고 그래도 안되면 미련 없이 떠나버려. 그게 상처로부터 나를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야. 내가 똑같이 했던, 바보 같은 짓이었으니까 그 마음 아주 잘 알아.
작중에서 소년이 자꾸 하는 질문이 있어. 호수가 얼면 오리들은 다 어디로 가느냐고. 대답들이 다 비슷해. 그게 왜 궁금하냐, 그런 걸 알아서 뭐 할 거냐, 알게 뭐냐 등등. 그냥 소년이 원하는 대화에 맞춰줄 수는 없었던 걸까. 세상은 어린애한테 장단 맞춰줄 여유 따윈 없는 것일까. 어디론가 사라진 오리들처럼 소년도 소리 없이 떠나버리고 싶어 했어. 이 장면에서 너는 분명히 나를 떠올리게 될 거야. 내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페이드아웃, 기억하지? 나도 주변 사람들이 다 지긋지긋해서 멀리 사라져버리고 싶었어. 사실은 지금도 그래. 소년의 꿈은 이거야. 아이들만 있는 호밀밭에서 혼자 어른으로 있는 것. 그 아이들을 지키는 파수꾼이 되는 것. 어때. 사회 부적응자의 한심한 헛소리로 들려? 난 너무도 낭만있게 느껴졌는데. 우린 서로를 이해한다면서도 끝내 이해하지 못했지. 그때로 돌아간대도 달라지진 않을 것 같아. 그래서 많이 늦었지만 이렇게라도 속마음을 적어봤어. 고맙고, 고마웠어. 잘 지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