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위픽 클래식
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 지음, 박정은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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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나는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이 모든 것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고, 내 안에서 들끓던 그 많은 감정들 가운데 어느 하나도 제대로 이름 붙일 수 없었다. 아니, 만약 그 모든 것을 하나의 이름으로 불러야 했다면, 그것은 오직 지나이다였을 것이다. (74페이지)


열여섯 살 블라디미르는 이웃집에 이사 온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 그녀, 스물한 살의 지나이다는 가난한 집안 배경 따위 무시할 만큼 매력적인 여성으로 묘사된다. 뭐 다섯 살 연상쯤이야 문제가 안 되겠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건 순진한 열여섯 살 청년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였다. 그녀를 둘러싼 여러 명의 남자가 그녀를 우러러본다. 그녀가 이 남성들을 갖고 노는 것이 눈에 훤해 보이는데도, 이 자리에 있는 남성들은 오직 그녀의 마음만 얻을 수 있다면, 그녀의 손등에 입맞춤 한번 할 수 있다면 죽어도 좋다는 마음을 온몸으로 표현한다. 배경이 탄탄해서 누구라도 탐낼만한 남성들이 여성 한 명을 둘러싸고 있는 장면을 상상해 봤는데, 아 그냥 좀, 잘 이해가 되지 않아서 오랫동안 생각했다. 그녀의 매력은 뭘까. 도대체 그녀의 아름다움은 어느 정도이기에, 이 남성들이 자존심이고 뭐고 다 내려놓고 저녁마다 그녀의 집에 모여서, 그녀의 눈길 한번 받아보고자 이렇게 애를 쓰고 있는 거냔 말이지. 누구보다 블라디미르의 대혼란은 그녀의 인성 따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직 그녀 자체로 모든 게 허락되었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음이 불타올랐다.


위에서 인용한 문장처럼, 블라디미르의 마음을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다는 게 첫사랑이라는 걸까. ‘내 안에서 들끓던 그 많은 감정에 이름 붙일 수 없고, ‘내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의 이유도 모른 채로, 오직 이 모든 혼란은 지나이다라는 이름 하나로 정의할 수밖에 없다고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 답답하지는 않았을까. 그런데도 이 감정의 흐름을 멈출 수 없는 건, 처음 경험하는 마음 때문이었을 거다. 이거 뭐지? 미칠 것 같은데, 보고 싶어서 그 집 담벼락을 기웃거리고, 그녀의 방 창문 불빛이 언제 켜지나 확인하고, 그녀가 보고도 못 본 척 지나치는 일에 가슴이 무너지고. 다른 조건 없이 오직 그녀 하나만 바라보는 마음이 너무 곧아서 그 순수함에 나도 함께 취하고 싶기도 했지만, 내 눈에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는 현실적인 장면들이었다. 공작 집안이면서도 돈이 없어서 생계에 부담이 될 정도이고, 손님들에게 대접할 변변한 음식이 없는데도 매일 찾아오는 손님에게 문을 활짝 열어두고, 아무 자리에서나 소리 지르는 어머니는 부끄러움도 모르는, 돈이 없다고 징징대는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사람들의 체면은 어디쯤 머물러 있는 걸까 싶어서 말이다.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기에, 이런 현실 속에서도 좀 더 교양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품위 있는 거로 생각했는데, 그녀가 이 남자들을 모아두고 자기가 어느 남자의 배경에 손을 뻗어야 하는지 재고 있는 게 그대로 보였다. 남자들 역시 오직 그녀를 향한 사랑만은 아니었으리라 생각된다. 이 여자와 연애 한번 하고 싶었을 뿐인지, 이 여자의 배경 중에 돈 빼고 모든 게 만족스러웠을지 알 수는 없으나, 그녀나 그녀를 둘러싼 남자들이나 서로 비슷한 마음으로 머릿속 계산기를 막 두드리고 있지 않았을까. 그들 가운데 어색하게 섞인 블라디미르의 순수한 마음은 아직 시작되지도 않은 싸움에서 패배한 것처럼 보였다. 설상가상 그가 마음을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할 상대는 그녀의 집 거실에 모인 남자들이 아니었다. 그녀의 마음속에 누군가 있다. 그 사실을 알고 나서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뿐이었다. 깔끔하게 그녀를 향한 마음을 접어야지. 하지만 사람 마음이 그렇게 쉽게 접어진다면 그건 또 사랑이 아니겠지. 그녀가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해 미칠 즈음, 그녀가 좋아하는 사람이 누군지 알게 된 후 그 충격은 엄청났다. 어느 정도 의심스럽고 긴가민가했던 나도, 그 의심이 사실이 되었을 때 놀라긴 했다. , 열여섯 청년의 마음을 어떻게 다독여줘야 그의 인생에서 이 충격을 지울 수 있을지 걱정스럽기만 하다.


사랑을 겪으면서 소년이 남성으로 성장하는 과정이 그대로 보인 것은 좋았으나, 그 시대에도 인간은 변함이 없는 모습이었구나 싶어서 씁쓸했던 건 어쩔 수 없더라. 가난에서 구원해줄 남성을 찾아 헤매는 듯하면서도 그 와중에 자기만의 방식으로 사랑을 찾는 지나이다의 모습도, 블라디미르가 겪었던 불가항력적인 사랑의 민낯도, 그렇게 겪은 사랑이 지독하게 흔적을 남기는 것도, 고통이나 상처보다도 행복한 기억으로 남겨질 수 있는 것도 결국은 사랑인 걸까.


오랫동안 보관함에 있던 책을 이제야 꺼내주었다. 너무 유명한 고전이고, 이번 기회가 아니면 앞으로도 안 읽을 것 같은 예감에 펼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이 책은 왜 오랫동안 독자들에게 언급됐을까. ‘첫사랑이라는 말랑말랑한 단어에 무게감 있는 의미가 담겨 있기라도 했을까. 정말 오랜만에 얼마나 순수한 마음을 마주할 수 있을지 기대되기도 했다. 어쩌면 이 책은 집 나간 지 오래된 나의 연애 세포를 불러올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데 막상 읽고 보니 나에게 이 책은 쉽지 않았다. 주인공이 하는 사랑이, 아니 내가 아는 첫사랑이 이 정도의 혼란한 감정이었던 건지 의문이 들었다. ‘첫사랑을 떠올리면 저절로 수줍어지는 마음 따위 사라진 지 오래였으니 알 턱이 있나. 그래도, 어느 정도의 설렘 폭발일 줄 알았는데, 유감이지만 이 소설의 결말까지 보고 나니 사랑과 전쟁 고전판 같았다. 와장창, 폭풍처럼 몰아치던 사랑이 깨지고 나니 인생의 커다란 산 하나를 넘은 기분으로 블라디미르를 보게 된다. 다 끝나버린 사랑에 마치 제 사랑이 왜 당신에게 필요했던 건가요?’라고 묻는 듯한 이 녀석, 다음 사랑은 또 어떤 모습이려나. 안타깝게도 집 나간 나의 연애 세포는 돌아오지 않았으나, 각자의 방식으로 사랑을 대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즐거움은 좋았다. 그저 이 소설의 끝에 함께한 이장욱 작가의 고급진 해설에 전혀 닿지 못한 나의 후기가 부끄러울 뿐.



#첫사랑 #이반세르게예비치투르게네프 #위픽클래식 #소설 #문학 #고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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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와 연
청예 지음 / 래빗홀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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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보를 받으리.

무당이 내게 물었지. 사랑이 이뤄지는 날인데 왜 웃지 않느냐고. 가슴 아래에 숨긴 대답은 간단했다. 사랑이 아니니 웃질 않아요. 아랫입술을 깨물고 전력을 다해 뛰었다. 옥상 난간 너머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팔을 펼쳤다. 저녁 하늘을 활주로 삼아 비행했다. 추락에 필요한 시간은 단 5. 곤두박질친 머리가 땅과 부딪을 때 수박이 으깨지는 소리가 났다. 뼈가 부서지는 통증과 질금질금 새어 나오는 뻘건 핏물이 내게 물었다. 이제 무어승로 다시 태어나고 싶니. (17페이지)


이런 복수. 정말 재밌겠구나 싶었다. 어설픈 용서가 의미 없다고 믿는, 용서한다고 고통의 시간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더 화가 나는 한 사람으로, 괜히 좋은 사람인 척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며 살아왔다. 내 상처는 사라지지도 않았는데 왜 자꾸 용서하고 화해하래, 왜 자꾸 잊고 지내라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 물론, 이런 감정 역시 여러 가지로 좋을 리 없다는 것도 안다. 그럼 용서할지 말지, 복수할지 말지, 이 고통의 소멸을 위해 어떤 선택을 하던 자기 마음 아닌가? 자신과 엄마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바람난 아버지, 그 아버지가 새로 꾸린 가정의 아이로 태어나서 그들에게 고통을 선사하리라.


무당의 부적 한 장으로, 오주희는 계모의 딸 오연린으로 다시 태어난다. 17년간 살아온 전생을 아무렇지도 않게 버릴 수 있던 건 아니다. 오주희에게는 아버지에게 똑같이 버림받은 엄마가 있었으니까. 엄마를 생각하며 선택했다. 아버지와 계모에게 철저하게 복수할 기회를 잡아야만 했다. 오연린으로 환생한 두 번째 삶의 목표는 오직 하나. 오주희 모녀에게 고통을 준 이들을 모두 벌하겠다는 거였다. 아버지, 계모, 무당인 계모의 어머니. 이미 한번 살아본 17년의 기억을 모두 가지고 다시 태어났으니, 이 아이는 영재 대접받았다. 남들이 처음 배우는 것을 이미 습득한 채였으니 이번 생의 처음이 얼마나 쉬웠을까. 사실 오연린이 살아갈 시간은 17년 플러스이기도 하지 않은가. 어린아이의 천진함을 가장하여 교묘하게 계모와 외할머니를 괴롭혔다. 아버지가 한눈팔았던, 계모가 기억하는 여자의 이름을 언급하고, 외할머니의 품 안에서 마냥 아이처럼 굴었으나 이들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법을 정확하게 알았다. 어른들은 아버지의 과거, 계모가 깨부순 남의 가정사를 비밀에 부쳤으나 아이는 모르는 척 언급하면서 이들의 평온한 삶에 풍파를 일으킨다.


복수는 말이야, 당했다는 사실을 평생 못 잊게 만들어야지. 복수는 사건이 아니라 기억이라고.” (95페이지)


이런 설정이 굉장히 신선하다고 생각하진 않았으나, 흥미롭긴 했다. 너무 궁금했다. 내가 가장 죽이고 싶은 대상의 아이로 태어나다니. 두 사람은 자기 자식이 마냥 예뻐서 물고 빨고 할 것이고, 이 아이의 영특함에 천재가 태어났나 싶을 기쁨에 찬물을 끼얹을 타이밍을 재고 있다는 것이. 모든 사실을 알았을 때, 아니면 아이가 자신들의 기대와 다른 방향으로 괴롭힐 때 받는 고통의 순간을 두 눈 크게 뜨고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 그대로 전해진다. 오연린이 언제쯤 이 모든 사실을 밝힐 것인지 궁금해 미칠 것 같은 마음으로 읽다가 생각해 보니, 보나 마나 이 부부가 삶의 안정과 풍요로움을 느끼며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있을까 싶을 때 터트리지 않을까 싶었다. 알게 모르게 서서히 균열을 일으키고, 이 미세한 틈을 무시하고 모른 척하며 넘어가곤 하면서 잊을 때, 애써 무시하던 것이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눈앞에서 펼쳐졌을 때. 이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들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 좌절과 고통을 느끼는 순간이야말로, 복수를 다짐하고 목숨을 버렸던 의미가 새겨지는 거 아닐까. 현실 나이에 17년을 더해 살아간다고 해도 아이다. 이 아이가 계획한 복수를 마무리까지 잘 할 수 있을지 걱정되기 시작할 무렵, 오연린과 비슷한 복수심을 가진 박은정이 등장한다.


오연린은 박은정을 동정하기도 하면서, 자기 복수의 조력자로 옆에 둔다. 은정을 보면서 마치 자기를 보는 것 같기도 했고, 은정이 가진 복수심에 자기도 조력자로 함께 한다. 영악한 아이 둘이 함께하니 어설프게만 보였던 복수가 점점 완전해져 가는 게 보인다. 아이의 공격으로도 인간의 마음이 흐트러지고, 서로의 신뢰가 무너지고, 자기 스스로 파멸할 수 있구나 싶어서 새삼 놀라웠다. 물리적인 폭력이 아니더라도 인간이 이렇게 때려 맞을 수 있다는 게, 자신에게 가하는 폭력이 되어 스스로 무너뜨리는 게 이렇게 쉬운 거였나. 비슷한 복수심을 가진 두 사람이 한편을 넘어서서 한 몸이 되려고 애쓰는 힘이 굉장했다. 복수가 완벽해지는구나 싶을 때, 설명하기 어려운 불안함이 생기기 시작한다. 어떤 균형이 깨지는 것만 같았다. 분명 서로가 가진 복수심을 해결하려고 뭉친 사람들 같았는데, 한쪽이 밀고 들어오는 힘이 너무 셌다. 오연린은 한편이 되는 것으로, 박은정은 한 몸이 되는 것으로, 이들이 향해 가는 목표가 달랐던 거다.


간단하지 않았다. 복수가 쉽지도 않았다. 처음 계획대로 가지도 않았다. 사랑과 애정이 상처받아 탄탄하게 새겨진 복수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상처와 고통이 된다는 걸 알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이 정도로 무너질 거였으면 죽음을 불사하고 다시 태어나지도 않았을 거다. 그런데도 복수가 진행되는 동안, 틈틈이 묻게 된다. 이 선택이 맞는 건가? 이대로 끝까지 가도 되는 걸까? 박은정의 맹목적인 사랑이 점점 오연린의 숨통을 조이게 될 때, 또 다른 인연 이현이 다가온다. 오연린의 여섯 번째 손가락을 보고 아무 말 하지 않고 그저 지켜볼 줄 아는 사람이 곁에 있다. 이현의 사랑 방식에 경험하지 못한 편안함을 느낀 오연린은 박은정과의 관계, 그동안 해온 복수, 앞으로 더 미워할 사람들, 많은 것을 향한 생각이 변해간다. 또 어떤 선택을 해야만 하는 걸까. 지금 이 상황이 온전하게 맞는 걸까. 그게 아니라면, 무엇을 해야 하는 걸까. 또다른 선택과 답을 찾아야만 했다.


사랑이 문제였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사랑이라 믿었던 감정의 기준이 달랐고, 계모가 아버지를 선택한 것도 사랑이었다. 딸의 행실을 바로잡아주지 않고 그대로 결혼을 진행하게 한 계모의 어머니가 선택한 것도 딸을 향한 사랑이었으리라. 오주희가 엄마를 위해 복수를 다짐하며 죽음을 선택한 것도 사랑 때문이었는데, 정말 이 모든 게 사랑이 맞긴 한 건가. 각자가 믿는 사랑을 위해 선택하고 다시 태어났음에도, 그 누구도 사랑을 완성하거나 행복하지 않았다. 태어나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마치 형벌을 받는 것처럼 고단하고 힘들었다. 복수를 선택해서 다시 태어난 삶은 끊을 수 없는 인연의 굴레를 또 촘촘히 엮고 있었다. 읽으면서 복수의 통쾌함을 다 즐기기도 전에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이름 모를 불안감은 소설의 결말에서 확인하게 되면서,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결말에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내 맘대로 복수를 꿈꾸며 다시 태어났고, 그대로 착착 이뤄질 것 같았던 복수의 끝이 이렇게 두려울 수가. 역시 거울 치료가 답이었던가. 아니면 복수하면서 누군가에게 준 상처가 자신을 조금씩 파먹고 있다가 이렇게 눈앞에 나타난 건가. 복수하겠다고 맺은 인연들은 때로 저주가 되어 되돌아온다.


살면서 내내 경험하게 될 사랑, 용서, 복수의 끝은 우리 생에 어떤 의미로 남을 것인지 묻는다. 피폐해져도 복수를 완성하고 뒤돌아보지 않을 것인지, 상대가 고통스러워하는 게 그대로 보이는 데도 내 마음은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는지, 그런데도 다시 사랑하며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는 게 맞는 건지.



#주와연 #청예 #래빗홀 #한국문학 #한국소설 #추리소설 #복수의부메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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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즈음 2026-08-06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이 책 주어갑니다.!
 
빅토리안 사이코
버지니아 페이토 지음, 배지은 옮김 / 현대문학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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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모르지 않은 감정이었다. 폭발할 것 같은 분노, 죽이고 싶을 정도의 미움, 왜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지, 왜 상처받은 내 감정을 이렇게도 무시하는지. 무엇보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이유를 받아들일 수조차 없다고 여길 때. 아무것도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내가 받아들일 수 없다는데, 내가 믿었던 사실에서 벗어날 이야기가 없는데, 자꾸 아니라고 하니까 열 받는다. 다 부숴버려야지.


위니프레드 노티를 엔저 저택에 새 가정교사로 고용되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저택에 도착한 그녀는 호기심 충만한 눈빛이지만, 저택의 고용주가 그녀에게 바라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아이들이 잠들기 전에 이야기를 들려주고, 프랑스어와 바느질도 가르치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언제나 미소 띤 표정을 장착하는 것. 뭐 빅토리아 시대의 숙녀다운 품위 유지 그런 걸 가르치라고 하는데, 이 저택의 아이들은 도통 관심이 없다. 좀 멍청하고 버릇이 없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업무의 어려움 따위 아랑곳하지 않는 노티는 이 저택에서 그녀의 숨겨둔 내면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아이들의 귓가에 공포를 속삭인다. 다른 사람들이 다 잠이 든 밤에 혼자 저택을, 저택 주변을 서성이며 어둠을 즐긴다. 저택의 초상화에 흔적을 남기고, 불편한 눈빛을 보내는 저택의 주인을 무시하며,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거리낌 없이 피가 낭자한 잔인함을 표출한다. 이름 그대로 가정교사인데, 아이들이 이 시대의 지성인으로 자라는데 필요한 품위를 가르치라는데, 이런 임무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로 아이들을 제압한다. 그렇다고 아이들이 노티의 가르침을 존중하지도 않은 채로 자기 멋대로 구니, 뭐 이것도 크게 죄책감 느낄 필요는 없는 일인가 싶기도 하다.


엔저 저택에 사람들이 모여든다. 노티는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손님들이 다 가고 나면 해고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저택의 파운즈 부인의 눈 밖에 나버려서, 이 저택의 크리스마스 행사가 그녀의 마지막 임무가 될 터였다.


크리스마스라는 단어가 행복이나 즐거움이 아니라, 이 소설 안에서는 점점 크기를 키워가는 공포가 된다. 아무것도 모른 채로 축제 같은 이 기간을 즐기려고 모여드는 사람들, 엔저 저택의 우아함을 칭찬하며 헐뜯을 게 없나 찾는 교활한 눈빛들, 아내의 텅 빈 머리에서 나오는 말을 깡그리 무시해버리는 남자들, 아들에게 물려주기 위한 가문의 재산을 자랑하며 우월함을 뽐내고 싶은 여자들. 저택에 모인 그 많은 사람이 쏟아내는 말은 좀, 혐오스러웠다. 유모차에 누워 있는 아이에게 물려줄 재산 이야기 말고는 자랑할 얘기가 그렇게 없었나. 돈과 가문, 계급으로 나눈 사람들을 무시하면서, 벽에 고정된 장식처럼 아이들 옆이나 뒤에서 시중들며 서 있는 보모들을 하찮게 여기는 말에, 나도 읽으면서 상처받았다. 사실 이런 분위기는 소설 속에서, 이 시대에만 머물러 있는 환경은 아니지 않은가. 사회 불평등이나 약자를 혐오하는 태도는 지금도 너무 흔하고, 이런 부조리는 인간의 내면에 어둠을 키운다고.


얼마나 꼴 보기 싫었으면, 미운 인간들을 찌르고 부수고 때리고 하는 상상이 현실이 되어버리는 걸까. 생고기를 뜯어 먹으며 입으로 피가 줄줄 흘러도 민망함이 없고, 귀족이라고 같잖은 허세 부리는 인간들의 민낯을 보면서 그녀의 상상은 현실이 되어 행동에 옮겨진다. 머릿속으로 잠깐 상상하듯 생각한 거 같은데, 눈 앞에 펼쳐진 장면은 상상이 아니었다. 너무 잔혹했지만 춤을 추듯 아름다웠고, 올림픽 경기하듯 우아하게 활시위를 당기고 있었으며, 허공을 휘젓는 내장이 장미의 꽃잎 같다는 말에 토할 것 같았다. 어떻게 이렇게 표현할 수가 있지?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도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기대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책 속의 문장이 눈앞에서 그대로 펼쳐지는 황홀함이 이런 걸까. 오싹하지만 눈을 뗄 수가 없는, 어쭙잖게 귀족의 권력을 내세웠던 인간들의 참혹한 최후에 이상한 쾌감까지 느껴지는 게 이상한 건가. 잔인하리만큼 소름 끼치지만, 그녀의 광기에 미친 듯이 웃음도 나는 내 마음을 또렷하게 표현할 수가 없다.


나는 무대 위 배우 같은 그들에게서 피 묻은 실크 스카프를 잡아당긴다. 그들의 내장이 한 줌의 장미 꽃잎처럼 허공으로 흩뿌려진다. (248페이지)


설명하기 어려운 시원함에 죽을 것 같은 이 폭염이, 잠깐이지만 용서가 되기도 했다. 처음부터 위니프레드 노티의 삶이 평탄하지 않았기에, 그런 환경에서 차곡차곡 쌓이는 정서의 어둠도 이해가 되더라만, 그렇다고 다들 이렇게 성장하지는 않는다. 웃으면서 석궁을 당기고, 환한 미소를 뿌리며 상대의 가슴에 칼을 쑤셔 넣고, 아무 표정 없이 목을 가르는 일들이, 이렇게 쉬운 거였어? 마지막 파티에서 그녀의 계속된 춤(?)이 이렇게 즐겁게 다가올 수 있다니 내가 이상한 인간인 건가 무섭기도 하지만, 그건 또 아닌 것 같고. 그녀 안의 악이 어떻게 커질 수밖에 없었는지 그 과정을 지켜보면, 지금 그녀가 쏟아낸 광기의 정체를 알 것도 같다. 너무 눌렀어. 여자라서 하지 말라는 금기와 규칙은 너무 많았네. 이 정도의 살인이 어느 시대에서 벌어졌어도 당연히 사형인데, 이상하게 시원해지는 독자의 마음은 뭘까. 말로 해도 안 들어주고 법이 해결해주지도 못할 거라서 그런 건가.


근데 궁금한 거 하나 남았는데, 그 아저씨는 진짜 아빠야, 아니야?




(피가 낭자한 잔인한 장면쯤이야, 싶다면 추천)

 

 

#빅토리안사이코 #버지니아페이토 #현대문학 #소설 #공포 #스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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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선인
김호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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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그랬듯이, 작가의 문장은 쉬웠다. 잘 읽히는 데다, 착한 사람들이 열심히 살아가려고 애쓰니 저절로 응원하게 된다. 하지만 거기까지. 주인공이 잠시 내려놓았던 삶의 의미를 찾게 하려는 시도는 좋았으나, 재미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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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도둑 성장기 위픽
함윤이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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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알았으려나, 사소해 보여도 누군가의 소중한 무엇이 사라진다는 슬픔이 어떤 것인지. 바늘 도둑은 소도둑이 되지 못했고, 그래서도 안 된다는 결말 같았다. 차게 식은 커피를 들이켜며, 어디로 가야 할지 ‘그것’이 알려줄 때까지, 사미는 공항의 카페에 앉아 있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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