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월되지 않는 엄마 - 임경섭의 2월 시의적절 14
임경섭 지음 / 난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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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월


그해 2월은

도무지 이월되지 않고

여기까지 와 있다


그해 2월은

잊히지 않고

기어코 여기까지 와 있다


그해 2월이,

아팠던 그해 2월이

죽어 사라지지 않고

여기까지 같이 와 보란듯이 옆에 서 있다


원망스러운 그해 2월이,

그해 2월만 아니었다면

지금의 내가 아닌 다른 내가

이런 글은 쓰지도 않을 것 같은 나로

살아가고 있을 것만 같은

그런 2월이

다른 길로 가지 않고 온전히 내 옆에 살아 있다


죽지 않고 여기에 있어서 다행이다

내가 죽을 때까지 죽지 않을 것 같아서

천만다행이다 (176페이지)



시의적절시리즈를 알고 있었지만, 크게 관심 두지 않았다. 세상에 책은 많고, 굳이 한번 안 읽고 지나간다고 해도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니니까. 그런데도 이번 2월의 책은 홀린 듯이 손이 갔다. 2월에 읽어야 할 것만 같았고, ‘이월되지 않는’, ‘이월될 수 없는존재와 마음에 관해 저절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항상 그 자리에 있을 것만 같고, 언제든 다음에라는 말로 지금 하지 못한 것의 미안함을 지울 수 있다고 생각했던, 그러다가 결국 아쉬움과 그리움만 남기는 존재와 마음에 관해서 말이다.


인터넷서점에 소개된 저자의 설명은 두 줄 정도였다. 1981년생. 비슷한 나이에 여전히 엄마한테 등짝을 맞으며 살았던 순간을 떠올렸다. 잠깐, 또 생각했다. 그 나이에 엄마를 잃었다면 는 어떤 모습일까. 잘 상상이 되지 않는다, 아직은. 저자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24년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 정도면 그리움이 무뎌질까?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내가 감당해야 할 엄마와의 이별에 관해 요즘 많이 떠올린다. 슬프고 아프겠다고 생각하지만, 시간이 그 감정을 흐릿하게 해주지 않을까 싶기도 했는데, 저자의 이야기를 듣고 막연하게 떠올린 그 무뎌지는 감정에 관해 물음표가 아닌 마침표를 얻게 되었다.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마음이라고 했다. 아무리 시간이 많이 흘렀어도, 더 단단해지는 가슴을 갖게 되는 어른이 된다고 해도, 그리워하는 마음은 여전히사라지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엄마가 세상을 떠나고 몇 년 동안은 그 괴로움이 너무나 버거워 시간이 빨리 지나가 버렸으면 하고 바라던 때가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나이가 들고 철도 좀 들고 그리하여 어른이라는 단어가 내게 조금은 어울리는 시점이 된다면 이 감정도 무뎌지겠지, 엄마를 잃은 슬픔이 허구한 날 나를 괴롭히지는 않겠지, 엄마가 보고 싶어서 눈물이 나는 일은 없겠지 싶었다.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갔다고 생각되는 이유는 여기 있었다. 마흔다섯이 되었는데도 엄마가 보고 싶은 마음이 가시질 않는다. 엄마의 표정과 엄마의 목소리가 불현듯 떠올라 아내 몰래 엉엉 우는 날이 여전히 잦다. (43~44페이지)


시와 에세이, 간혹 소설까지 담겼다. 21일부터 228일까지, 마치 매일 일기를 쓰듯 하루하루가 채워졌다. 저자는 왜, 일 년 열두 달 중 가장 짧은 2, 그것도 엄마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자 했을까 궁금했는데, 어쩌면 너무 짧은 달이어서 그랬던가 싶기도 하다. 마냥 그리워하고 싶은데, 일 년 내내 그리워해도 되지만, 특히 2월에 엄마를 더 만나고 싶은 마음이었던 건 아닐까 하고. 그러니까 2월에는, 이유를 찾지 않아도 그냥 보고 싶은 사람을 내내 떠올려도 좋은 때라고. 인생의 많은 처음중에서도 엄마와 함께 마신 술이 있었다. 젊은 엄마의 손을 잡고 밤하늘에서 떨어지는 별똥별을 보았다. 그 순간에도 죽음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는데, 한 번도 그 죽음에 관해 생각하지 않고 지내왔을 나이를 뒤늦게 기억한다.


저자의 엄마가 떠나면서 들려준 말은 좋은 시인이 되라는거였다. 아들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던 엄마가 좋은수식어를 더할 한 가지를 더 바라고 가셨다는 게, 그냥 엄마구나 싶었다. 더 하고 싶은 말도 다 묻어놓은 것만 같았다. 나이로는 성인이지만 아직 어리기만 한 마음으로 보냈던 이십 대 초반, 기꺼이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여야만 했던 순간에 건네는 말로 충분히 넘칠 듯했다. 남겨진 이 아이가 생각할 죽음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하기도 전에, 남겨진 아이는 너무 빨리 가버린 엄마를 그리워하기에도 모자란 시간이었다. 시간이 많이 흐른 후에 그 죽음을 생각하니 조금은 담담해졌으려나. 저자는 말한다. 우주에 관한 영상을 보고 있자니, 우리가 태어나 우주로 돌아가는 게 죽음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렇게 생각해보니, 죽음이 꼭 슬픔이나 두려움은 아닌 것 같다고, 그저 짧은 한순간을 같이한 동년배 친구 같다고.


언젠가는 만날 것이다. 이 세상이 아닌 그 어느 곳에서. 그동안 잘 지냈냐고 안부도 물으면서, 내가 이 세상 조금 더 살아오면서 겪은 많은 것을 이야기해주고 있을지도 모른다.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해서 적응하느라 힘들었다고, 붕어빵 몇 개 사 먹으려고 일부러 현금을 준비해서 다녀야 했다고, 휴대폰 클릭 몇 번에 음식이 현관문 앞에 놓여 있어서 추운 날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좋은 세상이었다고. 전자책을 보느라 시력은 더 나빠졌는데 이불 속에서 누워서 책을 보고 있었다고, 병원에 직접 가지 않아도 약을 처방받을 수도 있고, TV와 대화도 하면서 살았다고 하면 믿을까? 변하는 만큼 우리 몸은 편해졌지만, 가끔 이렇게 변한 세상이 괜히 섭섭하기도 하다고 말이다. 그래도 여전히 사람의 손으로 해야 할 것들이 많아서,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어느 시절을 그리워하며 살아가는 게 나쁘지만은 않았다고 말해줘야지.


부모의 죽음이라는 것은 막상 닥쳐온 바로 그때에는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빈자리가 문득문득 느껴질 때야 비로소, 그 시간이 켜켜이 쌓여 큰 무게로 돌아올 때야 비로소 진짜 슬픔이란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아무리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다는 걸 몸소 깨달을 때야 비로소 진정한 설움을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나의 엄마에 대한 추념은 끝이 없거니와 시간이 갈수록 더욱 커져만 가는 것이다. 어쩐다. 나는 엄마의 죽음에서 한 발짝도 빠져나오지 못했다. (170페이지)


죽음에 관한 이야기로 예상해서 그런 걸까. 마냥 슬프고 어두울 거로 생각했다. 부모의 죽음과 부재가 얼마나 그리울지 떠올려 보면 그저 편안한 웃음이 나오지는 않을 테니까. 읽다 보면, 오히려 담담한 말투가 안정감을 준다. 지금 우리는 죽음과 그리움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전혀 슬프지 않고 오히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 남긴 소중한 것을 이야기하는 기분이다. 저자의 말처럼, 엄마를 일찍 여의고 죽음에 의연해지게 되면서, 누군가의 앞에 닥친 죽음의 순간을 자기 경험으로 도울 수 있음이 선물 같다고 말하는 게, 무슨 말인지 알겠더라. 죽음의 대상은 달라도 비슷한 경험을 한 나도 저자의 말을 그대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여전히 엄마의 죽음에서 한 발짝도 빠져나오지 못했다고 무슨 큰일이 일어나는 건 아닐 테다. 빠져나오지 못하면 어떤가. 그대로 머물러 있고 싶다면, 그래도 되는 거 아닌가? 그래도 된다고, 엄마가 떠난 지 24년이 된 지금도, 앞으로 다시 24년의 세월 동안에도, 그래도 괜찮다고.


병원 대기실에서 이 책을 읽고 있었다. 다시 엄마의 검진 예약 때문에 기다리면서, 자기 차례가 언제 오는지 대기실 모니터를 바라보는 많은 환자를 둘러보며, 누구나 겪을 이별과 죽음의 순간을 계속 생각했다. 한 사람의 죽음으로 저절로 떠올리게 되는 많은 시간, 살아온 과정과 고단함, 순간순간 떠오르는 후회들, 죽음을 받아들였지만 간단하지 않았던 마음, 그리고 또 다른 마음들이 더해진 오늘을 슬픔으로만 기억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갑자기 찾아오는 설움마저 그러려니 하는 그리움으로 담아낼 수 있을 듯하다.


2월이 지나고, 시간이 한참 더 흘러도, 오래 기억될 것 같은 책이다.



#이월되지않는엄마 #임경섭 #시의적절 ##에세이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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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 죽은 자의 일기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29
정해연 지음 / 황금가지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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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연 작가의 작품을 계속 읽고 있다. 이 작품 역시 작가의 초기작에 가깝고, 출간일로 따지자면 거의 십 년이 다 된 작품이다. 정의를 위해 싸우는 형사와 그런 형사를 비웃듯이 악인이 뻔뻔하게 살아가는 세상을 적나라하게 비춘 작품이다.


영인시에서 최고위층만 산다는 주상복합 아파트에서 한 여성이 떨어져서 죽는다. 정황상 스스로 투신한 걸로 보인다. 거기에 죽은 여자의 집에 들어갔을 때 또 한 구의 시신이 발견되는데, 집안에서 죽은 이는 투신한 여자의 시어머니다. 두 사람이 죽은 사건이지만, 그리 복잡해 보이지는 않는다. 수사를 시작한 이들은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를 돌보던 며느리가 말기 암 시한부로 살다가, 이 고통을 끝내면서 시어머니를 죽이고 투신한 것으로 판단한다. 하지만 이 사건이 평범하게 보이지 않는 형사 서동현은, 이렇게 단순하게 사건을 마무리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정황을 보게 된다. 뭔가 더 있다. 수상하고 묘한 분위기 속에서 그들이 놓친 것을 찾느라 다른 게 보이지 않는다.


강호성은 차기 영인시장의 유력한 후보다. 곧 선거가 시작되고, 그의 평판은 누구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차기 시장으로 손색이 없다는 말이 돈다. 그런 그에게 갑자기 가족의 상실은 어떤 의미가 될까. 그의 아내가 어머니를 죽이고 투신했다는 소식에, 그는 세상 둘도 없는 불쌍한 남자가 됐다. 어머니의 치매를 돌보던 아들 부부, 특히 아내가 성심을 다해 어머니를 돌봤으나 그 자신의 투병으로 앞날이 암울해지자 같이 죽었다? 이런 스토리를 가진 시장 후보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눈에 그려지는 과정으로 이 소설이 흘러갈 거로 예상했다. 어느 정도 그 예상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했다. 글쎄, 형사는 어디까지 그의 신념을 펼칠 수 있을까. 시어머니 장옥란과 며느리 주미란의 죽음은 보이는 그대로였을까. 혼자 남은 강호성은 그의 어머니와 아내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자주 보았던 일가족 사망 사건의 배경은 비슷했다. 견디기 어려운 상황에 놓인 가족이,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죽이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결심이 이루어지고, 누군가의 발견으로 이 가족의 사건은 세상에 알려지게 되는 일 말이다. 스스로 견디기 힘든 상황에 놓였기에 그들(?)이 선택한 죽음은 나름의 이유가 설명되기도 하지만, 그 누구도 진실을 알 수는 없다. 모두 죽었기에. 그럼 남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이들의 죽음 이유를 추측할 수밖에 없는데, 그 추측도 완벽한 진실은 아니다.


군데군데 숨겨진, 정의를 위해 싸우는 이들의 고군분투가 보이지만, 그들의 힘은 약하기만 했다. 권력자의 온갖 추악한 면을 수집하고 제공하려다가 목숨을 잃기도 하고, 증거에 근거하여 권력자의 실체를 드러내는 데 힘을 보태고자 하는 이는 목숨이 위태롭다. 오히려 이를 계기로 악인들은 더 교묘해지고 치밀해질 뿐이다. 형사 서동현이 향하는 곳은 이 가족의 유일한 생존자 강호성이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다 의심쩍다. 선량하고 투명하게 보이는 정치인 강호성은 오롯이 절대 권력을 좇으며 살아갈 뿐이다. 그는 왜 그런 인물이 되었을까? 무슨 일이든, 어떤 사람의 지금 모습이든 시작점은 있다. 그의 어머니가 아들을 키우는 방식, 세상의 중심에 놓아주고 싶은 간절함은 자식이 어떤 인간으로 자라나는지 중요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신념은 아들의 성공뿐이었으며, 지금 강호성의 모습은 그 어머니의 작품이다. 장옥란이 만들어낸 작품의 쓸모나 가치가, 내가 보기에는 그냥 쓰레기 같은데, 어머니에게는 간절히 바라는 모습이라고 생각하니 참 기가 막힌다. 씁쓸하고, 답답하고, 누군가의 억울함이 그대로 느껴지는 이 기분이, 이 작품을 다 읽고 난 후 남겨진 감정이다.


여전히 우리는 세상의 정의가 이루어질 거로 믿으며 살아가지만, 언제나 그렇듯 때로는 그 정의가 너무 멀리 있기도 하다. 강호성의 아내 주미란이 남겨놓은 일기가 모든 힘을 다해 진실을 밝혀주리라고 믿었지만, 속이 시원하지는 않다. 한편으로는 오히려 이런 결말이 이 현실 세계를 적나라하게 비추고 있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언제나 정의가, 진실이 이기지 못하는 세상 말이다.


#악의 #정해연 #황금가지 #민음사 #소설 #한국소설 #추리소설 ##책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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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라 헤티 지음, 구원 옮김 / 코호북스(cohobooks)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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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마흔 살이 된 마당에 여전히 출생지를 떠나지 못하고 쥐가 들끓는 아파트에 세 들어 살며 적금이라고는 땡전 한 푼 없이 변변치 않은 수입으로 먹고사는 아이 없는 이혼녀라니. 내 결혼이 결딴났을 때 아빠가 건넨 조언을 실천하지 못한 모양이다. 앞으로는 정신 똑바로 차려라. 정신 똑바로 차리는 대신에 나는 계속해서 삶의 파도에 이리저리 휩쓸리며 아무것도 이루어내지 못했다.” (35페이지)


책 소개 글 보다가, ‘아이를 낳을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를 언급해서 섣불리 내용을 추측했다. 아이 문제는 언제나 답이 없는 화두가 되기에, 누구도 속이 시원한 답을 내놓을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하기에, 주인공이 겪는 이 혼란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을 거로 여겼다. 막상 읽다 보니, 아니었다. 아이를 낳을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하나의 질문이 아니었다. 책의 초반부에서 언급된 위의 말처럼, 거의 마흔 살을 살아오는 동안 자기가 이뤄낸 것이 없고 무엇 하나 분명하게 드러낼 수 없는 인생에 관해 무거운 마음을 들여다보게 한다. 저자 실라 헤티의 자전적 이야기라고 하는데, 이게 소설이든 에세이든 장르가 중요한 건 아닌 듯하다. 문장 속에서 전해지는 솔직하고 투명한 감정과 고민이 그대로 전해져오는 게 무서울 정도였다.


누구나 고민한다. 적당한 나이, 적당한 위치. 이 나이 정도면 이 정도는 이뤄놔야 하지 않나 싶은 마음. 그 기준이 각자 다르지만, 그걸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다. 주변 사람들이 이 정도로 가고 있으니까. 이때쯤 취직하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이 흐름에 편승하지 않으면 이상한 사람이 되고 마는 분위기에 휩쓸리다 자괴감에 빠지기도 한다. 누가 그렇게 만든 게 아닌데도 쉬지 않고 질문을 반복하게 된다. 누군가 정해놓은 보편적인 삶에 속하지 않음이 잘못된 것처럼 여기기도 한다. 글쎄, 자랑할 만한 커리어도 없고, 사람들이 말하는 기준에서 결혼도 늦었고, 아이도 없고, 앞으로 마음 놓고 살아갈 수 있을 만큼 여유롭지도 않은 나는 이 다른삶을 얼마나 신경 쓰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남들의 시선 따위 관심 없다고 말하곤 했는데, 속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상처받는 유리멘탈이라, 얼마나 감당이 될지 모르겠다.


현대 사회에서 결혼과 출산이 당연시되는 분위기는 과거보다 덜해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이 과정은 당연하게 여기는 분위기가 더 크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나의 친구는 결혼한 지 10년 차인데, 그 친구에게는 위로 오빠가 둘 있다. 오빠들은 결혼하지 않았고, 결혼을 절실하게 여기지도 않는 듯하다. 이 친구에게도 아이가 없다. 친구의 부모님은 곧 팔순이신데, 주변 친구들을 만나러 갈 때마다 화가 나서 들어오시곤 한다. 다들 자식 자랑, 손주 얘기에 바쁜데, 자기는 나이 오십이 넘어도 결혼하지 않은 아들이 둘이나 있고, 손주도 없어서 그들의 대화에 낄 수가 없다는 거다.


저자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화자인 는 같이 지내는 파트너가 있지만 둘 사이에 아이는 없다. 이대로 아이 없이 지내야 할지, 아이를 낳아야 할지 여전히 고민이다. 곧 마흔을 바라보는데, 가임기도 끝나가는데, 어떻게든 결정해야 선택하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있을 텐데. 그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는 지금 상황에 끝도 없는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답한다. 스스로 선택한 작가의 삶이 옳은 건지, 자기가 지금 쓰는 작품이 얼마나 인정받을지, 정말 아이를 원하는 건지, 아이를 원한다면 이유는 뭔지, 아이가 있는 게 작가의 삶에 영향을 미칠지, 묻고 또 묻는다. 이 모든 질문의 답을 동전점을 치면서 찾는다는 게 의아하지만 말이다. 처음에는 뭔가 아이 같은 기준으로 오늘의 문제를 바라보는 건가 싶었는데,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현명하다고 해야 하나, 솔직한 마음을 있는 그대로 확인하고 싶다고 해야 하나.


생각해보면 감정을 가진 누군가의 조언이나 의견이 아니라, 아무 감정 없이 오직 보이는 그대로만 전해주는 동전점이 진짜 객관적인 답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가 하는 고민은 우리도 똑같이 겪는 문제이면서 그 어떤 답도 100% 안심하게 만들지 않기 때문이다. 하루가 다르게 물가는 오르고, 내 집 마련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었고, 폭염에 혹한에 일상을 지내는 일은 버거울 때가 많고, 육아는 힘들고 돈도 많이 든다. 특히 여성에게는 여기에 한 가지 더 얹어진 선택의 문제가 따라온다. 경력 단절이 생길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또 하나의 다짐이 필요하다. 이런 고민과 답을 찾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이 당연함(?)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까지 추적하게 되면서, 이어지는 저자의 한마디가 의미심장하다. 출산하지 않기로 한 다짐을 누군가에게 이해시켜야 하는 고충, 어머니가 되지 않고 작가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까지 더해야 한다니. 똑같은 상황에서 똑같이 고민하고 결정했을 때 남성도 가 하는 걱정을 똑같이 할까?


아이를 낳지 않는 대신에 어떤 일을 할지 원대한 계획을 덧붙여야 해. 대단한 과업이어야만 하지, 그리고 자기 삶이 어떻게 진행될지 아직 그 삶을 시작하지도 않았더라도 설득력 있게 말할 준비가 되어 있는 편이 좋을걸.” (72페이지)


하지만 나이가 들며 다른 걱정거리가 생겼다. 어머니가 되어보지 않고서도 내가 충분히 좋은 작가가 될 수 있을까? 인간의 경험을 글로 오롯이 담아낼 수 있을까? 삶에서 매우 의미 있는 일 중 하나라고 점차 여겨지는 그 경험을 해보지 않은 채로?” (240페이지)


그러니까, 여성으로 살면서 아이를 낳지 않기로 했을 때, 그 이유를 이해시켜야 한다는 거다. 누구에게? 이 여성이 아이를 낳지 않은 결정에 궁금해하는 모든 사람에게. 여성이 아이를 낳아서 기르는 삶을 당연하다는 관습에 다른 방향을 튼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니. 지극히 개인적인 일에, 많은 고민 끝에 아이를 낳지 않기로 한 결정을 누구에게 이해시켜야 한단 말인가. 출산이 한 여성의 삶을 한 사람의 인생으로 만들지 않고, 어머니와 할머니의 삶에서 경험한 많은 부분이 인식하게 하는 임신과 출산의 문제를 다시 보게 하는 거다. 출산이 인생의 당연한 과정으로 여기며 살아온 그들이 포기해야만 했던 인생의 중요한 순간들, 결국 살아온 모든 시간을 통틀어 얼마나 많은 강요와 같은 포기를 해야만 했는지를. 그래서 의 동전점이 오히려 신뢰가 생길 정도다. 주변의 간섭으로 듣는 이야기가 아니라, 살아오는 과정 내내 증명하듯 보여준 엄마와 할머니의 삶으로 배운 결정이었다. 아이를 낳는가 낳지 않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이 사회에서 한 사람으로, 여성으로 살아가는 일에 대해 고민하는 이야기로 보게 된다.


나는 어머니가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대신에, 나는 그냥 사람이다.” (202페이지)


내가 해야 할 일은 뻔하다. 다른 삶에 환상을 품는 대신에 진정한 내 모습으로 사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인지 생각해보고 현재 삶에 충실하기. 환상의 날개를 실제 삶에서 펼치는 것이다. 처음으로 이 깨달음을 얻었을 때 어찌나 흥분했는지, 마치 자기 자신과 섹스를 하는 듯한 성적 흥분에 가까웠다.” (162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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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지 못하는 사람들
무레 요코 지음, 이수은 옮김 / 라곰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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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좁은 집이 더 좁아지는 느낌에 살펴보니, 짐이 늘었다. 작은 방 하나가 짐으로 가득 차서 뭔가 자꾸 쌓여만 간다. 할인한다고 한꺼번에 구매한 음료수, 명절에 필요해서 미리 구매해둔 선물들, 중고 거래로 내놓으려고 얼마 전에 정리한 물품들, 여름이 지난 지가 언제인데 제대로 자리를 못 찾아줘서 헤매는 선풍기(, 이 물건은 다시 자리를 잡을 사이도 없이 조만간 다시 거실로 나오게 되겠군. ㅠㅠ), 그리고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집안의 온갖 살림들. 하나씩 정리한다고 하는데도 변화가 없다. 뒤돌아서면 모든 게 다시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듯하다. 다른 사람들 정리해 놓은 것만 봐도 속이 시원해질 정도로 깔끔하던데, 비슷하게 한다고 하는데 나는 왜 안 되는 걸까. 한편으로는 그들의 방식을 다 따라하자니 게으른 내가 쫓아갈 수가 없다는 것도 인정해야 할 듯하다. 정리도 부지런해야 한다는 것을 새삼 알겠더라. 그래도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으니 어떻게 하긴 해야겠는데, 어쩐다.


요즘 내가 관심 두는 주제와 딱 맞아 떨어져서 홀리듯 집어 들게 된 책이다.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 버리지 못하는 각자의 이유가 있겠지만, 내가 느낀 결론은 하나다. 눈앞에 보이는 뭐가 없어야 정리가 되고 깨끗하게 보인다는 것. 나름 필요해서 하나씩 자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을 텐데, 꺼내어 보면 그게 꼭 자기 자리는 아니었다는 결론이 나오기도 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다양한 사연을 듣고 있자니 공감이 되기도 하지만, 역시나 이 공간에서 내보내야 하는 물건이 대부분이라는 해결책을 찾는다. 그 방법만이 해결이라는 건데, 그 결정이 생각처럼 단순하지 않다. 버리자니 아쉽고 갖고 있자니 짐이 되는 묘한 반복이 계속된다. 여러 번 고민해도, 아무리 다른 방법을 찾아도 답은 하나다. 버리는 것.


그럼 다시 어떻게 버려야 하는지 하는 문제가 생기는데, 그 버리는 기준 역시 각자 다르다. 미련 없이 쓰레기봉투에 넣거나, 아쉽고 또 아쉬워서 오랜 시간 또 망설이거나. 이 책에 담긴 다섯 편의 이야기가 나름 사정이 있는 정리가 되겠는데, 그중 압도적인 답답함은 책벌레와 피규어 수집가의 신혼집 논쟁이다. 제목만으로 이미 상황을 눈치 챘을 거다. 책이 가득한 여성과 피규어가 온 집안을 차지한 남성의 결혼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그들이 결혼하려고 구한 집은 각자의 모든 짐을 가지고 들어가기에 한계가 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서로의 짐을 줄이고 들어가야 하는데, 여성에게는 수집하듯 모았던 책이 많았고, 남성에게는 오랜 세월 애지중지 아끼면서 보살핀 피규어가 그 주인공이다. 여성이 고민 끝에 과감히 책을 정리하는 데 반해, 유리 진열장까지 맞춰서 피규어를 진열해 놓은 남자는 피규어 정리를 차일피일 미루기만 한다. 급기야 주변 사람들에게 피규어 보관을 부탁하지만 누구도 그의 부탁을 들어줄 수가 없다. 여성은 남성이 피규어 정리를 미루자 함께 사는 일도 미루는 상황에 이른다.


평생 아끼던 물건을 버리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안다. 그런데도 그 유명한 말이 적용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현실이다. 뭔가를 떠나보내지 않으면 새로운 걸 얻을 수 없는 법(148페이지, 책벌레와 피규어 수집가의 신혼집 논쟁)이라는 말은 진리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양보해야 한다는, 하나의 선택이 다른 것의 포기를 받아들여야 하는 게 세상의 이치라고 생각하는데, 물건 정리도 마찬가지다. 남성이 결혼을 앞두고 자기가 혼자 살 때의 환경을 100%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때 비로소 이 결혼이 완성될 것이다. 피규어 정리가 어느 정도 완료되지 않으면 함께 살 수 없다는 여성의 선전포고가 결혼을 두고 하는 협박이 아니라, 살아가는 내내 필요한 자세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아끼던 것도 때로는 놓아주어야 하는 위기가 닥칠 수 있고,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을 위해 양보해야 하는 부분도 생기는 게 인생이라고.


때로는 오래된 것들 속에서 추억을 느낄 수도 있지만(버리지 못하는 언니, 버리려는 동생), 그렇게 쌓인 것들 속에서 머물기만 하다가 나아가지 못하는 인생일 될 수도 있다는 것. 오늘의 웃음만으로 단순하게 사는 듯한 동생이 오히려 머뭇거리는 언니에게 과감하게 버릴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상황이, 언니에게도 틀에 박힌 환경에서 새로운 것을 보게 하는 시선을 만들어주기도 한다. 이런 걸 보면, 정리하다는 건 단순히 물건을 버리는 일에 머무는 건 아닌가 보다. 평생 엄마를 힘들게 한 아버지의 방에 침입(?)하면서 정리하고 찾아낸 것들로 이 가정의 새로운 관계를 찾는 사람들도 있고(남편의 방), 사라진 며느리의 방을 정리하게 된 시아버지의 일탈 같은 하루에 가슴이 뚫리기도 하는(며느리의 짐정리) 이야기에 정말 다양한 관계들이 있구나 싶다. 주인이 없는 방을 들여다보는 일, 그 방에서 찾아내고 싶은 이야기는 많겠지만, 결국 그 무엇도 찾지 못하고 빈 방의 문을 닫기도 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우리는 그 방의 주인과 물건의 이야기를 통해 어떤 연결 고리, 세월의 흔적으로 이어지고 싶으면서도, 물건을 버리면서 의미 없는 감정과 관계들을 정리하고 싶은 마음을 동시에 읽게 된다


아들보다 가까이 사는 딸을 종종 부르던 엄마의 부탁은 정말 놀라웠다.(쌓아두는 엄마) 같이 살지 않기에 엄마의 집 구석구석을 살펴볼 겨를이 없던 딸은, 방 한 칸을 완전히 짐으로 가득 채운 엄마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 지진이 날까 봐 비축해둔 식량은 어마어마하게 쌓여 있었고, 그중 어떤 것은 유통기한이 지난 식품들이었다. 도저히 한 사람의 식사로 처리할 수 없는 식품들을 나눠주고 폐기하기에 이르는데, 이렇게까지 했던 엄마의 마음을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고. 자기가 구입한 식품을 잊고 있다가 또 사기도 하고, 무슨 식품인지도 모른 채로 구입하기도 하는데, 어디까지 이해할 수 있을까. 나도 비슷한 경험이 많기에 주인공의 엄마를 나무랄 수는 없는데, 이 정도로 쌓아두면 눈에 보일 텐데 왜 몰랐을까 싶기도 하고. 아니면 불안한 마음에 눈앞에 뭔가 가득 쌓여 있을 때 안심이 되는, 뭐 그런 건가. 이런 거 보면 우리 엄마랑 비슷하기도 하다. 부족하게만 살아왔던 시절의 기억에, 겨울이 되기 전에 쌀과 연탄을 창고에 가득 채워 놨을 때 비로소 안심이 된다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


필요 없어진 물건을 가득 집어 들고는 봉투에 집어넣고 매듭을 단단히 묶었다. ‘아깝다는 말과 감정까지 함께 버릴 생각이었다. (25페이지, 못 버리는 언니, 버리려는 동생)


단순히 물건을 쌓아두기만 하거나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게 기억이든 시간이든, 물건에 사로잡힌 세월 안에 무언가가 자리하고 있다는 걸 느끼게 된다. 때로는 상처 받은 마음이기도 하고, 본인이 즐거웠던 흔적이기도 하다. 힘들지만 열심히 살아왔다는 증거이기도 하고, 위기와 불안에 대처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애매하게 붙잡고 있던 관계를 끊어내는 다짐이기도 하고, 후회하기만 했던 과거와의 이별이기도 하다. 뭐가 됐든 붙잡고 있는 삶의 문제들을 버리는 방식이 물건을 정리하는 일이 되기도 한다는 것. 몇 가지만 남겨두고 과감하게 버릴 목록에 넣어지는 것들을 보면서, 그것들이 쓰레기봉투에 가득 담아지는 것을 보면서 내 속이 시원해지더라. 마치 내가 쌓아두고 정리하지 못하는 것들을 이 책 속에서 다 처리해주는 느낌이랄까. 나도 누가 와서 눈이 시원하게 다 정리해줬으면 좋겠다. 버릴 것인지 놔둘 것인지 내가 고민하는 사이에 그냥 눈앞에서 사라지게 말이다. 마치 갈팡질팡하는 불안한 마음을 붙잡아주는 것처럼, 정리되지 못하는 것들이 깔끔하게 제 자리를 찾아 놓여 있을 때, 머릿속을 복잡하게 했던 모든 문제들이 다 해결된 것만 같은 착각이라도 좋으니까. 에혀~



#버리지못하는사람들 #무레요코 #라곰 #소설 ##책추천

#감정버리기 #의미없는관계정리 #후회의찌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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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뽑은 흰머리 지금 아쉬워 - 노인들의 일상을 유쾌하게 담다 실버 센류 모음집 2
사단법인 전국유료실버타운협회 포푸라샤 편집부 지음, 이지수 옮김 / 포레스트북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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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대 1950년대에 태어나서 2025년을 살아가는 일은 쉽지 않다. 그 시대에 익숙한 문화에 몸이 적응했고, 그렇게 살아오는 과정이 당연했겠지. 시간이 흐르면서 나이는 먹어가고, 그만큼 세상은 변화했다. 세상이 변하는 속도는 나이 먹어가는 속도와 비례하듯, 점점 더 빨라지는 듯하다. 나이를 먹어가는 만큼 저절로 알아지는 삶의 경험과 의미가 있지만, 한편으로는 변화하는 세상에 적응하기 어려운 문화를 마주해야 했다. 현금이나 토큰, 승차권으로 타고 다녔던 버스는 이제 카드 한 장의 알림음으로 요금을 대신한다. 내가 버스 토큰 세대가 아니었던지라 이런 얘기가 나에게도 낯설기는 마찬가지다. 매체로 보던 어떤 장면들은 나에게도 없는 경험이고, 내가 아는 현재의 또 다른 역사 같은 기분이다. 아마 오늘의 어떤 장면들은 훗날에 역사의 한 장면으로 소환될지 모른다. 앞으로 살아갈 세상의 낯선 경험과 비교하듯이 말이다.


실버 센류 모음집 첫 번째 작품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의 후속 작품이 나왔다. 그냥 편하게 펼치면서 웃어보고 싶었는데, 비슷한 내용의 구절이 여러 번 보여서 놀라면서도 우울했다. 우리 모두 생김새나 사는 곳은 달라도, 비슷한 어려움을 겪으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걸 실감하기도 했다. 일상 곳곳에 놓인, 언젠가부터 우리 일상에 너무 익숙한 셀프문화. 음식점에서도 물과 추가 반찬은 셀프, 주유소에서도 셀프 주유, 학원에 가서도 출석 체크는 모바일로 셀프. 찾아보면 셀프 아닌 게 거의 없을 수도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이용하기 심란한 게 셀프 계산대가 아닐까?


셀프 계산대 앞

얼어붙은 사람들

죄다 할배들

(39페이지)


셀프 계산대

날 보고 다가오려

준비하는 직원

(93페이지)


할 줄 몰라요

가까이도 안 가요

셀프 계산대

(94페이지)


이 짧은 문장들이 왜 이렇게 슬프게만 들리는지. 사실 다이소나 마트 계산대는 이용하는 게 어렵지는 않다. 내가 고른 물건 바코드만 찍어 옮기고 계산하고 내 장바구니에 담아서 나오면 끝이니까. 하지만 나 역시도 이용하면서 처음에 많이 떨렸던 게 셀프 계산대였다(공포의 키오스크 말이다). 단순하게 커피 한 가지만 주문해도 되는데, 원두나 샷 등 추가 옵션을 고르라는 것도 어리바리하면서 잠깐 주춤거리게 될 때가 있다. 그중 가장 무거운 마음으로 다가가게 되는 건 패스트푸드 셀프 계산대. 특히 샌드위치나 햄버거 등의 주문은 무슨 옵션이나 추가가 그렇게 많은지, 소스 종류는 또 뭐고. 그냥 알아서 다 만들어주면 안 되나? 대학에 들어가고 처음에 힘들었던 게 시간표 짜는 거였는데, 패스트푸드 셀프 계산대 앞에 처음 섰을 때 기분이 딱 그랬다. 그나마 다행인 건 갑자기 일상의 모든 것이 셀프인 시대를 맞닥뜨린 게 아니라 서서히 변화하는 세상 속 셀프 문화였다고 생각하는데, 어르신들이 마주한 셀프 문화는 어느 날 갑자기 자기 앞에 놓인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겠더라. 낯설고, 어렵고, 막막하고, 그래서 주문을 포기하고 뒤돌아서기도 하는... , 이 상황 이 마음이 너무 공감하게 되는 이 순간이, 슬프다.


이미 이 시리즈의 분위기는 알고 있기에 새로운 것을 기대하진 않았지만, 여전히 이 짧은 글에 공감하게 되는 마음의 떨림은 어쩔 수가 없더라. 모른 척하고 싶은데, 처음 듣는 말처럼 놀라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된다. 나의 엄마가 살아가는, 몇 년 후 내가 살아가야 하는 노년의 일상이 이런 모습이라는 걸 미리 보는 느낌이다. 어른답지 못하게 늙어가는 이들도 많겠지만, 이 책 속의 짧은 구절들은 어르신들이 경험한 삶의 해학이 그대로 담겼다. 마냥 무겁게 느껴질 법한 삶의 순간들을 재치 있는 문장으로 마음을 표현한다. 나이 드는 것도 막을 수 없고 노녀의 일상이 크게 다르지도 않게 살아가야 한다면, 이렇게 유쾌한 자세로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현실을 바꿀 수 없다고 마냥 우울하게만 살아가야 하는 건 아니지 않나. 어쩔 수 없이 마주해야 한다면, 조금이라도 더 웃으면서 지내는 날들을 만들어야겠지. 진짜, ‘어쩔 수 없음을 대하는 자세는 긍정적뿐인가 싶기도 하다.


들었던 것 같은데

알았던 것 같은데

했던 것 같은데

(79페이지)


늦은 오후에 엄마한테 걸려온 전화로 심란했는데, 잠깐 이 책 읽으면서 우중충한 마음을 조금 내려놓는 시간이었다. 엊그제부터 갑자기 무릎이 아프기 시작했는데, 당장 병원에 갈 수 없으니 무릎 보호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나 보다. 항상 놓인 자리에 있어야 할 무릎 보호대가 보이지 않자 여기 저기 집안을 뒤져가며 찾기 시작했고, 아무리 찾아도 안 보이자 나에게 전화를 한 거다. 사실 이런 경우가 처음이 아니라 짜증이 났는데, 짜증을 표현하지 않겠다고 하면서도 한숨부터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엄마는 항상 자기가 사용한 물건을 제자리에 놓아두었다고 하지만, 이런 식으로 물건을 찾는 일은 종종 있었고, 엄마가 찾는 물건을 내가 찾아주곤 했다. 내가 지금 엄마 집으로 갈 수 없으니 이 분실(?) 사건을 해결해줄 수도 없고, 엄마의 아픈 무릎은 계속 아픈 채로 있어야 하니, 참 답답하다. 그만 찾고 집 근처 약국에서 새로 사라고 하면서 전화를 끊었는데, 나중에 다시 전화해보니 내일 새로 산다고 하면서 그냥 파스를 붙였단다. 아니, 약국이 먼 것도 아니고 집에서 걸어가면 1분도 안 되는 거리인데, 사용하던 무릎 보호대도 못 찾고, 무릎은 계속 아픈 채로 있어야 하고, 내가 그걸 어디에 두었을까 하면서 머리 아픈 채로 오늘 밤을 보내야 한단 말인가. 에휴. 진짜 한숨이 가득한 날들이다.


이 책 유쾌하고 웃긴데, 읽으면서 웃긴 했는데, 다 읽고 책을 덮고 나니 그냥 또 우울해지는 게 현실이네.



#실버센류모음집 #그때뽑은흰머리지금아쉬워 #사랑인줄알았는데부정맥

#노년의일상 #셀프 #변화하는세상이무서워 ##책추천 #포레스트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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