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습기 다이어트 위픽
김청귤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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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한테 이렇게 살을 빼주겠다고 한다면 어떤 선택을 할지, 이렇게 고민이 되었던 적이 또 있던가? 방 안에 제습기를 틀고 잠이 들었는데, 몇 시간 후 잠에서 깨어나서 보니 몸을 무겁게 했던 살들이 다 없어졌다면? 선아의 엄마는 제습기를 사고 만족감이 가득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수분이 어디에 숨어 있던 건지, 제습기 좀 틀고 나면 통에 물이 가득 찬 것을 보고 신기했다. 그러네. 눈에 보이지 않아도 집 안 구석구석 숨은 습기가 제습기 가동과 동시에 붙잡혀서 끌려 나오는 듯했다. 어느 날 자기 방에 누워있던 선아는, 엄마가 방에 틀어놓은 제습기를 무시하고 잠이 들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없는 곳에 틀어놓곤 하는 제습기. 옷장의 문을 모두 열어놓고, 침대 위의 이불도 뽀송해지기를 바라면서 제습기를 틀어놓고 방문을 닫는다. 보통은 외출할 일이 있을 때 틀어놓고 나가서, 집에 들어오면 제습기를 끄는 루틴이었다. 집에 들어와서 제습기를 끄고 물통을 확인하면, 내가 봐도 신기하긴 하다. 집안의 공기가 꿉꿉한 느낌이 들 때도 있고, 특히 장마철이나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리곤 하는 때에 제습기를 틀어놓을 때가 많은데, 손에 잡히지 않는 습기가 제습기 속으로 쏙~ 빨려 들어간다는 게 신기하지 않은가? 에어컨으로 공기를 시원하게 하고, 히터로 실내를 따뜻하게 데워주는 것도 비슷한 방식이겠지만, 반대로 공기 중의 습기를 잡아다가 작은 기계 안의 물통에 모을 수 있다니. 진짜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세상이 점점 좋아져.


암튼, 제습기의 용도는 그런 것인데, 그 사용 후기가 이상하게 들려오기도 한다. 엄마가 선아의 방에 제습기를 틀어놓으면서 농담처럼 했던 그 말이 사실이 되고 나니 세상의 모든 것이 달라진 것만 같다. 엄마가 혹시 우리 딸 미라 되면 어떻게 해!”라며 웃고 나갔는데, 그게 기적인지 저주인지 모를 결과를 낳고 말았다. 잠에서 깬 선아의 외모가 변했다. 3 수험생으로 살면서 찐 살이 불편했던 선아였다. 다이어트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시도조차 하지 않고 살았었는데, 자고 일어났더니 마른 몸으로 변해 있었다. 얼굴의 턱선이 그대로 살아 있고, 코는 오뚝해졌다. 목 아래의 쇄골은 도드라졌고, 눈은 평소보다 훨씬 커 보였다. 통통해서 치수를 늘려 신었던 발은 말라 있었다. 온몸의 수분이 사라진 것처럼 건조했다. 몸은 움직이고 있지만 심장은 뛰지 않았고, 추위나 더위도 느끼지 못했다. 손에 물이 닿아도 젖지 않았다. 음식 냄새가 코를 찔러도 먹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물조차도 목으로 넘길 수 없는, 미라가 되어버린 거다.


미라가 되었어도 보기 싫게 마른 게 아니었다. 예뻤다. 곧 다이어트를 해야겠다고 생각은 했는데 이렇게 갑자기 살이 빠질 줄은 몰랐다. 제습기가 내 모든 수분을 빨아들인 것처럼 온몸이 건조했다. 내가 살아 있는 게 맞는지 가슴 위에 손을 얹고 심장박동을 느껴봤다. 그러나 느껴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10페이지)


제습기로 다이어트를 하고 마른 몸의 미라가 되는 것이 붐처럼 일어난 세상이었다. 그런데 이 방식이 좀 이상한 게, 제습기 틀어놓고 잔다고 모두 미라가 되는 건 아니었다. 말 그대로 복불복. 누구는 미라가 되길 바라면서 제습기 틀어놓고 자도 몸에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아서 투덜거렸다. 누구는 우연처럼 미라가 되고 나니 인기인이 되어 있었다. 인플루언서나 모델로 일할 수도 있었다. 결과만 놓고 보자면, 좋은 건가? 지긋지긋한 살들이 내 몸을 떠나니 홀가분하고 기분 좋을까? 선아의 엄마는 갑자기 날씬(?)해진 딸이 너무 자랑스러워서 같이 쇼핑하러 다니고, 옷 가게 직원이 아끼지 않은 선아 몸매의 칭찬에 행복하다. 누구는 돈 들여 시간 들여 살을 빼려고 해도 안 되는데, 이건 뭐 로또에 당첨된 것처럼 선택받은 몸이 되었으니 얼마나 기쁘겠는가. 선아도 처음에는 당황하고 어색했는데, 점점 자기 몸이 예쁘다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인간 같지 않은 인간이 된 자기 몸이 불편해진다.


소설을 읽는 동안 우울했다. 늘 그 적당히가 되지 않아서 살이 찌거나 마르거나 하는 게 내 몸이었다. 솔직히 적당히 마른 적은 있어도 보기 싫게 마른 적은 없다. 그마저도 기억이 가물거리는 예전의 일이다. 이 소설의 부재처럼, 나는 지금 ‘Free 사이즈, 내 것이 절대 될 수 없었던시간을 살고 있다. 어느 순간 플러스 사이즈 쇼핑몰을 기웃거리고 있다. 이렇게 예쁜 옷들이 이렇게 큰 사이즈도 만들어지고 있다는 게 신기한 경험이었다. 내 몸의 수분으로 내 몸무게가 유지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만, 내 몸의 수분을 모두 날려 보내고 선아처럼 마른 몸이 되면 좋은 건지 잠깐 고민도 했지만, 역시 아직 나는 마른 몸이 아니라 내가 행복한 몸으로 살고 싶은 바람이 더 크다. 마른 몸의 선아를 예쁘다고 하면서 부러움과 질투를 동시에 보내는 시선에 간절해지지 않는다. 맛있는 음식 앞에서 기분 좋아지고, 이 음식을 함께 먹는 사람들과의 시간도 즐겁다. 코를 자극하는 맛있는 냄새를 맡고 있으면서도 정작 물 한 모금도 목으로 넘기지 못하는 미라의 삶을 부러워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말이다.


뚱뚱하다가 미라가 된 선아의 마음을 쥐고 흔드는 타인의 시선이 무서웠다. 살이 찌면 쪘다고, 마른 몸이 되니까 좀비 같다면서 뒷담화하고 비꼬는 말이 들려올 때마다 가슴 속에서 뭔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잃어버린 그 뭔가를 찾아와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다가 선아가 찾아낸 씨앗, 싹을 틔우고 묘목으로 성장한 이야기에 희망에 찬다. 생각의 방향을 바꾸니 금방 또 기분이 좋아지면서, 부드럽게 내리는 봄비에 활짝 피어날 꽃을 상상하며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다. 읽는 동안 우울했던 내 마음은, 다 읽고 나서는 행복해졌다. 수분을 머금은 선아의 몸에 다시 생기가 도는 것이 눈앞에서 그려지고 있다.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던 맨발에 닿는 느낌이 축축하고 따뜻했다. 그동안 튕겨 나가기만 했었는데 피부 위에 떨어진 빗방울들이 쏙쏙 흡수되는 게 보였다. 한 걸음 걸어가 나무 바로 아래 서서 고개를 들었다. 봄이라서 그런지 빗방울도 따뜻했다. 물기에 젖은 라일락 향기가 콧속으로 들어왔다. 내 안에서도 꽃이 퐁퐁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라일락을 보며 예쁘다고 감탄하고 눈을 감고 향기를 맡으며 행복해했다. 내가 지금 행복하듯이. (67페이지)



#제습기다이어트 #김청귤 #위픽 #위즈덤하우스 #소설 #한국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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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나라
허버트 조지 웰스 지음, 차영지 옮김 / 내로라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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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데스산맥의 깊은 골짜기 어디쯤으로 한 남자가 추락한다. 그의 이름은 누네즈. 같은 탐험을 하던 일행은 그를 구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철수하고, 그의 존재는 잊혔다. 하지만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한 그는, 추락한 곳에서 눈을 뜨게 되고 살길을 모색한다. 그는 어딘가로 계속 걸었고, 사람의 흔적이 있는지 그를 이 위기에서 구해줄 곳이 있는지 찾아 헤맨다. 그러던 중 마을을 발견하고 사람들의 생활 흔적을 확인하고 반가운 마음이 들지만, 이곳에서 그가 겪을 일을 전혀 상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누네즈가 도착한 곳은 눈먼 자들의 나라였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곳의 사람들은 점점 시력을 잃어갔고, 어느 세대부터는 아이들이 아예 눈이 보이지 않은 상태로 태어나기 시작했다. 세상을 모습을 보고 살았던 이들의 이야기는 시력을 잃어가면서 상상력을 더해 그 시절이 머물곤 했는데, 점점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세상이 이루어지면서, 앞을 보았던 그들의 이야기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변해갔다. 이제 이곳은 모두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들만의 또 다른 세상이 구축되었다. 그러니 누네즈가 마주한 사람들과 어떻게 소통하고 그의 위기를 전할 수 있을지 걱정스럽기도 했다.


눈먼 자들이 사는 나라는, 내가 상상했던 것과 사뭇 달랐다. 앞이 보이지 않으니 당연히불편했을 것이고, 여러 가지로 부족한 환경이지 않을까 싶었다.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 이렇게 계속 살아갈 수 있을까? 하지만 나의 이런 걱정은 아주 무시해도 될 듯한 그들만의 사회가 운영되고 있었다. 그들 나름의 체계가 자리잡혀 있었고, 눈이 보이지 않아도 살아가는 모습이 우리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는, 눈이 보이지 않은 채로 살아가는 일을, 장애가 있는 사람의 삶과 동일시했던 거다. 내가 가까이에서 봤던 그대로, 눈이 보이는 사람들의 사회에서 눈이 보이지 않은 채로 살아간다는 건, 우리가 아는 장애인의 삶이었다. 내가 사는 방식과 다른 불편함을 안고 살아가는 일로 인식했다. 내가 틀렸다.


노인의 목소리가 누네즈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평생을 눈먼 자들의 나라에 갇혀 어둠 속에서 살아온 장로들에게, 누네즈는 자신이 이곳에 떨어지기 전에 살았던 넓은 세상과 하늘, 그리고 자신이 보았던 경이로운 것들에 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의 반응은 누네즈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누네즈가 이야기하는 것 중 무엇 하나도 믿지 않았고 이해조차 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누네즈가 사용한 단어의 상당수를 알아듣지조차 못했다. (45페이지)


누군가, 무엇이 정상인지 묻는다면, 이 소설 속 이야기가 답이 될 듯하다. 눈먼 자들의 나라에서는 눈이 보이는 자가 비정상인 된다. 그 유명한 말, ‘눈먼 자들 가운데에서는 외눈이가 왕이다라는 말을 믿었던 누네즈는, 자신의 그들보다 위에 있다고 여겼다. 당연하지. 아무것도 안 보이는 사람보다 세상이 훤히 보이는 사람이 여러모로 유리한 상황에 있지 않겠는가. 그가 눈먼 자들의 위에서 군림할 거로 믿었는데, 그 믿음은 완전 꽝이 된 거다. 그 스스로 내가 너희들보다 잘났다. 나는 다 보이니까 너희들을 다스릴 수 있다. 눈이 안 보이는 너희들보다 내가 훨씬 월등한 존재다.’ 이런 마음으로 그들 세계에 속하려고 했던 누네즈는 곧 그의 방식이 틀렸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눈먼 자들의 세상에서, 내가 눈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본다고 아무리 외쳐도 믿는 사람이 없었다. 그의 외침이 계속될수록 오히려 그를 자기들보다 열등한 존재로 인식하며 바보 취급했다.


얼마나 비웃었을까. 처음부터 앞이 보이지 않은 세상을 살아왔던 그들에게, 누네즈가 하는 모든 말은 미친놈이 씨부렁거리는 것으로 들리지 않았을까. 우리가 보고 인식하며 정의했던 모든 것들이 그곳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오히려 정신 나간 사람의 헛소리로 들릴 뿐이다. 누네즈가 그들에게 세상의 모습을 알려주고 했던 것을 포기하고 적응할 무렵, 그는 아름다운 눈먼 여성과 사랑에 빠진다. 앞이 보이거나 보이지 않아도 통하는 마음은 똑같았다.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은 결혼하고 싶었지만, 여성의 집안 반대로 벽에 부딪힌다. 그 세상에서는 누네즈의 눈이 열등한 이유였고, 여성과 결혼하기 위해서는 그의 눈을 파내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 사회의 일원이 되려면 그들과 똑같은 형태로 살아가야 한다는, 선택을 빙자한 강요였다.


그는 어떤 선택을 할까? 사랑을 위해 두 눈을 파낼 것인가, 아니면 다 포기하고 이들 세계를 떠날 것인가, 그도 아니면 또 다른 선택이 가능할까. 아니, 애초부터 이런 문제의 갈림길에 설 일이 생길 수 있을까 싶은 마음도 들었으나, 대답은 우리는 언제나 이런 문제의 중심에 서서 살아왔다는 거다. 누네즈처럼 눈을 파낼 정도의 선택은 아닐 수 있겠지만, 항상 이것과 저것 사이에서 선택해야만 하는 순간을 경험하면서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런 문제도 대화가 통하고 우리가 상식이라고 믿는 선에서 가능한 일이다. 내가 정상이라고 믿어왔던 세상에서, 도저히 정상이라고 볼 수 없는 세상을 마주했을 때 혹은 정상이라고 믿을 수 없는 사람을 상대해야 할 때, 어떤 선택도 불가능해질 수 있다. 어떤 선택도 만족시켜주지 못할 거라는 말이다. 그녀와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 누네즈가 그곳에 머물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꼭 그의 눈을 파내야만 눈먼 자들의 세상에서 머물 수 있는 것일까?


주저앉고 나니 낙관적인 마음이 들었다. 싸움에 가담한 이들이 으레 느끼는 감정일지도 모르지만, 그것보다 조금은 더 난처한 마음이 들었다. 그는 깨달았다. 생각의 기반이 완전히 다른 사람과는 싸울 수도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63페이지)


어차피 우리는 다른 사람을, 다른 세상을 완벽히 이해하며 살아갈 수 없다. 한 집에서 오랜 세월 같이 살아온 가족 사이에서도 이해 못 할 일은 쌓이고 쌓인다. 사랑해서 결혼한 부부 사이에서도 서로 다른 방식의 삶에 다툼이 생긴다.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면 이 다름과 갈등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누어 생각하면 어떻게 될까. 영원히 정상비정상사이의 벽을 세우고 살게 되지 않을까? 내 방식이 맞으니까 나는 정상, 상대의 방식이 이해가 안 되니까 너는 비정상의 공식이 무너지지 않을 것만 같다. 서로 간의 틈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가는 게 인간이라면, 우리는 또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애쓰면 살아가려고 할 텐데, 그것도 허용되는 범위가 있다. 여기까지는 내가 감당할 수 있으니까, 내가 양보하고 노력해봐야지 하는 선이 분명히 있다. 그 선이 너무 멀리 있다면, 그 선까지 따라가려다가 지치기 전에 포기하기도 한다. 말이 어느 정도 통해야 노력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누네즈가 눈먼 자들의 마을의 산 위에서, 마을과 세상의 경계에 누워 하늘의 빛나던 별을 바라보던 그 순간에 어떤 답을 얻었을까? 어떤 선택으로 그의 삶을 이어가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작가의 다른 작품 여러 권을 오랫동안 목록에 올려 두었는데, 이 책을 먼저 읽게 되었다. 처음에는 오래전에 읽었던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와 같은 책인 줄 알았는데, 내용은 비슷한 듯하면서도 달랐다. 또 메시지를 생각하니 닮은 이야기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내로라 출판사의 단숨에 읽고, 깊어지자시리즈의 출간작들이 그러하듯, 분량은 짧으면서 책의 내용에 담긴 무게는 상당하다. 이 책 읽으면서 생각이 많아지더라. 지금도 여러 가지 상황에서 다른 사람과 방식이 달라서 갈등하곤 했는데, 그 다른 방식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좀 바꿔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감당할 수 있는 선이라면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 계속 노력해야 할 것이고, 이 정도는 버겁다 싶을 때는 그 사람 이해하기를 포기하는 것도 답이 되지 않을까 싶다는. 어쩌면 우리는 각자의 눈먼 나라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일지도 모르겠다.



#눈먼자들의나라 #하버트조지웰스 #내로라 ##책추천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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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에 피부가 벗겨지는 줄 알았는데, 며칠 사이에 여름 햇살의 뜨거움이 조금 사그라든 것 같다. 어제는 거의 두 달 만에 에어컨 없이 잠들 수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한낮의 더위는 견디기 힘들긴 하더라만. 지난밤에 좀 편하게 잠들었던 것만 기억하고 나갔다가, 여전한 더위에 근처의 카페부터 찾기 시작했다. 집에서도 에어컨을 켜고 있는데도 조금만 움직이면 덥고, 주방에서 뭘 좀 하다 보면 땀이 줄줄 흐른다. 그래서 아예 에어컨을 켜는 건 몸으로 움직이는 모든 일을 다 끝낸 후로 미룬다. 땀을 흠뻑 흘리고, 개운하게 씻고, 시원한 커피 한잔 만들어서 에어컨 앞에 자리 잡고 앉는다. 여기가 천국이고, 이 시간이 제일 행복하다. 이렇게 여름을 느끼다가도 곧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이번 여름이 잊힐 것 같지만 말이다.


언젠가 TV에서 어느 환경 전문가가 나와서 하는 말을 들을 적이 있다. 우리는 입버릇처럼 언제나 이번 여름이 가장 더운 것 같다고 말하지만, 오늘의 더위가 앞으로 우리가 경험할 더위 중에서 가장 덜 더운 날이 될 거라고. 지구가 그렇게 변해가고 있고, 그렇게 만든 건 우리 인간이고, 조금이라도 덜 덥게 지내려면 환경을 살피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건 아닌가 보다. 그래도 입버릇처럼 또 읊조린다. 이번 여름이 내가 경험한 여름 중에서 가장 더운 여름이었다고 말이다.


그래도 이 더위를 이기게 하는, 가성비 좋은 처방전은 추리소설이 아닐까 싶다. 요즘 예정에 없던 육체노동을 하다 보니, 안 그래도 책 잘 안 읽는 나날이었는데 더 안 읽고 있다. 몸을 움직이다 보니 평소보다 잠은 잘 잔다. 이번 여름이 가기 전에 읽겠다고 다짐하며 추리소설 여러 권을 옆에 쌓아두고 있었는데, 갈수록 책 읽는 속도가 더뎌지지만 그래도 천천히 페이지를 넘길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읽었다. 그나마 이 책들로 이 여름의 더위를 조금이라도 잊을 수 있었다. 비록 페이지를 넘기는데 손끝의 땀이 책장에 묻어나서 좀 거시기 했지만, 여전히 페이지 넘기는 맛이 나는 종이책이 최고라는 즐거움을 다시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나는 수화기를 잡지 않은 오른손을 슬며시 꽉 쥐었다. 유리창을 깨고 그 얼굴에 주먹이라도 날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누가 그 여자들을 죽였는지 말하시라고요.”

아버지는 나를 보며 눈만 깜박이더니 눈썹을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너잖아. 네가 죽였잖아. 아니야?” (핸디맨, 246페이지)


살인 용의자로 체포된 애런 니어링. 10년 동안 실종된 여성 열일곱 명의 잘린 손이 그의 집 지하실에서 발견되면서 그는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전혀 그럴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게 더 무서운 일이었다. 그는 핸디맨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그렇게 26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그때의 사건이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히는 줄 알았다. 그 사건 이후로 26년이 지난 지금, 애런 니어링의 딸 노라는 외과 의사로 일하고 있고, 다시 손목이 잘린 시신이 발견되면서 26년 전 사건과 주인공을 소환하게 된다. 경찰은 자연스럽게 핸디맨의 딸 노라를 의심하지만, 노라를 범인으로 만들 증거가 없다.


누가 범인일까? 당연하게도, 읽으면서 범인을 추리하게 되는데, 나는 그 범인을 맞추지 못했다. 새로운 등장인물이 등장할 때마다, 뭔가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를 보이면 그 사람이 범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지막에 가서야 전혀 다른 인물이 범인으로 지목되면서 나의 추리는 틀리고 말았다. 그런데 말이다. 진짜 인간의 본성은 유전력을 가지고 있을지 궁금하더라. 전혀 다른 환경에서 성장하고 살아왔어도, 핏줄로 이어진 그 본성이 영향력을 발휘하는 게 맞는 말인지...


프리다 맥파든의 모든 출간작을 섭렵하고자 마음먹었는데, 이 작품을 끝으로 작가의 모든 작품을 만났다. 우리나라 출간 기준으로는 이 책이 가장 먼저 출간되었는데, 어쩌다 보니 이 책을 가장 마지막으로 읽게 됐다. 그래서일까, 이 작품이 가장 단조롭게 느껴졌다. <하우스 메이드>를 처음 읽었을 때의 꽉 찬 느낌이 없었다. 나름의 반전은 있었으나, 그게 이 소설의 재미를 더해주는 요소는 아니었던 듯하다.




소개 글에 혹했다. 일본에서 드라마도 있었다고 하고, 18년 전의 부모 토막 살인 사건을 새롭게 취재해 또 다른 서사로 구성하는 방식이라고 하니 더 궁금해지기도 했다. 처음에는 재판 과정과 재판정 안의 장면을 묘사하는 법정 화가, 여러 인물의 증언들, ‘그래서 진실이 뭐냐고?’ 하는 질문을 계속 쏟아내게 하는 흐름이 이 작품의 매력이라면 매력으로 보였다. 부모를 살해했다는 잔혹함이 어떻게 펼쳐졌는지 보여주고, 이 끔찍한 이야기를 소설로 내놓으며 이익을 얻으려는 출판사는 또 얼마나 계산적으로 나오는지 기가 차기도 했다. 그 출판사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작가는 또 얼마나 자극적인 표현과 서사로 독자의 시선을 붙잡으려고 애쓰느라 발버둥을 치는지. 소설을 완성하기 위한 인터뷰가 계속될수록 새로운 사실들이 수면 위로 떠 오르고, 도대체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 건지 몰라서 헷갈리는 상황이 계속된다.


소재는 잔인했지만, 그보다는 등장인물들의 마음을 읽는데 더 초점이 맞춰지는 작품이 아니었나 싶다. , 인간이 그렇다. 각자의 욕망에 충실해지려는 본성, 그러다 보니 이 사건의 진실을 찾는 과정이 더 복잡하고 어긋나기도 하는 상황이 이어진다. 또 사회와 가족 그 내면의 이야기는 더 불편하고 어색하고, 결국은 되돌릴 수 없는 파괴의 결말을 만들기도 한다는 게 씁쓸했다. 다 읽고도 개운한 느낌은 별로 없어서 이런 장르의 책을 다시 읽게 될지는 모르겠다.




가정 폭력의 생존자인 렌. 아버지는 종말대비자로 세상의 구석으로 나와 자기만의 세상을 구축했다. 아무리 봐도 그냥 정신이상자에 불과한 아버지를 누구도 말릴 수가 없었다. 결국 그 가정은 파괴되었고, 렌은 엄마와 오빠를 잃었다. 세월이 흘러 그 상처를 조금 잊고 살아가는가 싶었는데, 그녀에게 또 다른 위험이 다가오고 있었다. 데이트 앱으로 만난 그 남자 애덤. 렌은 애덤에게 푹 빠져버렸는데, 어느 날 애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이게 무슨 일인지 가늠할 틈도 없이 렌에게 탐정이 찾아오고, 애덤의 정체를 알게 된 렌은 혼란에 빠진다.


감쪽같이 사라진 그 남자 애덤, 혹은 레이프 맨스, 그도 아니면 티모시 존스턴, 또 다른 이름 클리프 젠슨. 이 남자의 본명조차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렌은 이 남자의 등장으로 벌어졌던 일을 좇는 탐정 베일리와 함께 진실을 찾기 시작한다. 애덤을 만나고 사라진 여성들, 그 여성들과 애덤이 정말 연관이 있는지, 그 여성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살아있기는 한 건지.


어쩌면 요즘 우리는 진실을 감지하는 본능이 무디어지다 보니 진실과 거짓을,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지 못하게 된 걸지도 모른다. (고스팅, 155페이지)


애덤의 진짜 정체는 무엇인지 파헤치며 렌의 과거와 현재를 넘나든다. 그러면서 점점 맞춰지는 퍼즐에, 자기만의 세상을 머릿속에 집어넣고 사는 사람이 있다는 게 어떤 면에서는 공포가 될 수 있다는 걸 느낀다. 자기가 만든 세상, 이게 옳다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방식을 정하는 건 가능하다. 본인이 그렇게 살면 되니까. 하지만 자기만의 방식이 타인에게, 그런 방식의 삶을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 강요가 될 때 피해를 주는 거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그게 피해를 주는 건지 아닌지조차 관심 없다는 게 문제겠지만.


작가의 출간작 두 권을 추천받았는데, 당분간 나머지 작품은 못 만날 듯하다. 이 작품 읽으면서 속이 터져 죽을 뻔했다. 범인을 찾는 건 쉬웠으나, 그 과정을 읽어가는 게 좀 지루하게 느껴지더라. 세상에 나쁜 놈, 이상한 놈이 많으니 조심 또 조심하자는 메시지를 심어주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피터 스완슨의 작품을 몇 편 읽은 기억이 있다. 최근 출간작은 거의 안 읽었는데, 전작에서 등장했던 인물 릴리가 등장한다고 해서 궁금했다. 도서관 사서 마사는 평범하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다. 남편 앨런은 교육 관련 영업하면서 출장을 자주 다닌다. 그는 마사에게 항상 일정을 공유하고, 출장지에서도 자주 연락한다. 다정한 남편이라고, 읽는 나도 질투가 날 정도였다. 그런데 이상하다. 뉴스에서 어떤 여성이 살해되었다고, 자살했다고 소식을 전할 때마다 뭔가 조각을 잃어버린 퍼즐을 보는 기분이었다. 죽은 여성들이 있던 곳은 남편의 출장지였다. 어느 한 곳이라면 우연의 일치라고 할 텐데, 남편이 출장 간 곳에서, 남편이 출장 간 그 시기에 여성의 사망 사건이 연속으로 일어난다. 이게 정말 우연일까? 마사는 의심한다. 내가 아는 앨런의 모습은 진짜일까?


세상에서 살인이 가장 쉬웠어요.’ 살인마의 머릿속에 이 문장만이 남아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마저도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살인이 지루하게 느껴질 정도였으니, 이건 인간이 아니었다. 소시오패스나 다른 설명도 딱히 필요 없어 보였다. 그냥 인간이 아니라는 말 밖에는. 그래서 누가 범인이냐고? , 그건 직접 읽고 찾아내야 하지 않겠어?


앞서 읽은 작품들보다 집중력이 떨어지긴 했다. 잔인한 살인마가 등장하는 건 긴장되기도 했지만, 좀 밋밋했다. 읽으면서 계속 추리했던 범인, 누가 죽고 누가 살아남을 건가 하는 나의 예측이 어긋났기에 결말에 관한 기대가 더 커서 그랬나 싶기도 하고. 살인마의 최후보다 릴리의 등장으로 또 다른 이야기가 어떻게 나올까 하는 궁금증만 남았다.




처음 계획에는 8월이 가기 전에 읽고 싶은 목록을 15권이나 추려놓았는데, 그중 절반도 못 읽었다. 지금도 내 옆에는 다 읽지 못한 목록의 책이 쌓여있는데, 그 사이에 몇 권 더 늘었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다. ^^ 안 읽는데도 계속 책을 샀네. 못 살겠다. 에휴. 남은 더위를 이겨낼 추리소설을 마저 다 읽어야 할 것 같아서, 우선순위 목록을 정해서 다시 쌓아두었다. 그러다 보니 새로 들여온 책들이 우선순위에서 밀려버렸다. 그래도 자꾸만 높게 쌓여가는 책을 보는 마음은 괜히, , 괜히 더 즐거워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네.




#핸디맨 #살인재능 #고스팅 #언덕위의빨간지붕 #책 #추리소설 #책추천 #더위야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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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8-11 09: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핸디맨은 서사구조는 좀 떨어지죠. 마지막에는 좀 뜬금없기도... ㅎㅎ 그래도 저는 이 소설이 좋았던게 프리다 맥파든 소설 중 유일하게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인물이 나온달까요? ㅎㅎ 여름은 추리소설이죠. 저도 요즘 집에만 있어서 책을 쌓아놓고 독파하는 기쁨을 만끽 중입니다. ㅎㅎ

구단씨 2025-08-17 17:28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바람돌이님 말씀 듣고 보니 이 책에서는 특별히 나쁜 애들이 안나오네요. ^^
한편으로는 이 책을 마지막에 읽은 게 다행이다 싶기도 해요.
처음에 읽었다면 재미 없다고 작가의 다음 작품들 안 만났을지도 모르겠네요. ㅎㅎ

아직도 읽고 싶은 책 엄청 쌓여있어요. ㅠㅠ
이게 기쁜 건지 슬픈 건지 모르겠지만요....

여전히 더운 날이 계속입니다.
언젠가 끝날 여름이겠지만, 매일 땀 흘리고 있다 보니 좀 힘들긴 하네요.
 



내 몸이 이렇게 살이 찔 수 있다는 걸 새롭게 확인하는 날들이다. 매일 인생 최고의 몸무게를 경신하고 있다. 그냥 맛있는 것을 조금(?) 먹었을 뿐인데. ㅠㅠ 조심했어야 했다. 워낙 운동을 싫어하니 먹는 것으로 몸을 조절하며 살아온 인생이라, 그래, 그 맛있는 것(!)을 멀리했어야 하는데, 그걸 못 해서 이 몸뚱이가 되었다. 남편은 지금 자기가 결혼한 여자가 아니라 새로운 여자가 옆에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오랜만에 만난 언니와 여동생은 왜 이렇게 살이 쪘냐고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입던 옷이 맞지 않으니 더 큰 옷을 사야 하는데, 그게 싫어서 몇 년째 옷을 거의 사지 않았다. 몸이 커지니 여름의 더위를 견디기가 더 힘들어지고, 희한하게도 몸이 살찌니 손과 발까지 커진 듯하다. 매일 신던 슬리퍼도 꽉 끼네. 하아. 이번 여름의 이른 더위와 폭염, 폭우 속 꿉꿉함을 더 힘들게 견디는 중이다. 앞으로도 운동으로 몸을 만들지는 못 할 것 같은데, 다시 먹는 것을 조절하는 수밖에 없는데, 세상에 맛있는 게 너무 많아서, 진짜 힘들다. 이런 몸으로 고민이 많은 사람이 나뿐만은 아니라는 게 위로라면 위로가 될까.




이곳에서는 뚱뚱해도 놀림받지 않고 비키니를 입을 수 있습니다. 뚱뚱해도 옆 좌석의 눈치를 보지 않고 비행기를 탈 수 있습니다. 뚱뚱해도 어깨를 움츠리지 않고 자유롭게 길거리 음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내가 나여도 상처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빅토피아, 8페이지)


165cm, 몸무게 110kg의 고도비만 엄희지. 평범한 여고생이 몸 때문에 현실에서 주눅이 들어 산다. 사람들이 자꾸 자기만 쳐다보는 것 같다. 뚱뚱한 몸이 아닌 날씬한 몸으로 변신한 애프터의 세계에 살고 싶지만, 아마도 이번 생에는 불가능할 것 같다. 그래서 찾은 곳, 날씬한 사람은 입장할 수 없는 메타버스 빅토피아에서 친구를 사귀고 존재감을 느낀다. 어느 날 빅토피아의 이벤트가 열린다. 무려 1등 상품이 언리밋 테테크라고, 메타버스에서 맛만 느끼고 바깥 현실에서 아무것도 안 먹으면 쉽게 살을 뺄 수 있는 미각 동기화 시스템이다. 이걸 구매하려고 하면 3천만 원이 든다. . 3천만 원으로 이 시스템을 이용해서 살을 뺄 수 있다면 좋겠지만, 3천만 원이 흔하게 가지고 있는 돈도 아니고, 그 돈이 있다고 해도 이렇게 쓸 수 있는 금액인가 싶기도 하고. 그래, 이 경쟁에서 이기고 1등을 차지해서 언리밋 테테크를 상품으로 받고 애프터의 몸으로 살아가야지. 전투력 상승이다.


소설 빅토피아의 설정은 그냥 판타지처럼 보이지만, 날씬한 몸으로 살고 싶은 우리의 갈망을 솔직하게 드러낸 작품이다. 청소년 대상 소설인데도, 중년의 시간을 사는 나에게도 솔깃한 제안이긴 하더라. 미친 듯이 싸우고 이겨서 내 몸을 살이 찌기 전으로 돌려놓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성시경 오빠 도와줘요~) 그래서 희지는 이 싸움에서 이겨 1등을 차지하고 애프터의 몸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비수를 꽂은 것은 남편이었다. 지난달 시아버지의 장례식 때 있었던 일이다.

큰일인데.”

남편은 자꾸 그 소리를 하며 안절부절못했다.

뭐가 큰일이야?”

오늘 회사 사람들이 많이 조문 온대.”

그러면 감사하지. 다들 바쁜데 일부러 장례식에 와주시는 거잖아.”

회사에서 내 아내는 절세미인이라는 소문이 자자한데 말이야. 내 동기나 상사도 우리 결혼식 때 말고는 당신을 본 적이 없으니 그러고도 남지. 미안한데 노리코, 잠깐만 어디 좀 숨어 있으면 안 될까?

농담인 줄 알았는데 남편의 눈은 진지했다. 충격이다 못해 쓰러질 뻔했다. (당신의 살을 빼 드립니다, 19페이지)


남편이 저렇게 얘기할 수도 있구나 싶어서 정말 놀라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던 장면이다. 가키야 미우의 소설 당신의 살을 빼 드립니다에서 등장하는 네 명의 여성은 각각 다른 상황에 놓여 있지만, 살 때문에 힘든 시간을 보내는 건 비슷하다. 노리코는 갑자기 찐 살 때문에 집에서도 회사에서도 우울하다. 예쁘다는 소리만 듣고 살다가 갑자기 살이 찌니 자신감이 바닥이다. 어렸을 적부터 먹는 것을 좋아하고 뚱뚱했던 고기쿠는 파티시에가 되고 싶지만, 아버지가 강요하는 삶 때문에 고통스럽다. 그동안 뚱뚱한 사람을 혐오하면서 살아왔던 도모야는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나 보니, 자기 절제를 못 하고 먹어대기만 하는 뚱뚱한 몸이 되어 있었다.


뚱뚱한 몸이 사람들의 놀림감이 되고 따돌림의 대상이 되는 현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작품이다. 어떤 이유로든 살이 찌면서 이들의 인생이 바뀌었고, 다른 사람과 원만하게 지내기 어려워졌다. 불안감은 터질 것 같았고, 자기 인생인데 자기 의지를 담지 못한 시선으로 보게 된다. 나부터도 살이 찌면서 자신감이 떨어지곤 한다. 맛있는 것을 보면 행복하지만, 먹고 나면 금방 또 우울해지는 과정이 반복되기도 한다. 이 몸으로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없는데, 괜히 마음이 그렇게 흐르니 세상의 민폐족이 된 것 같은 기분도 든다. 이대로 놔두면 안 될 것만 같다. 소설 속 인물들은 나의 인생, 나의 미래라는 커다란 삶을 파괴하는 일을 이대로 두고 볼 수 없었기에 이 순간을 바꾸기 위해 달라졌다. 뭔가 시작하면서 용기를 내고 있었다.




플럼은 뚱뚱하다. 그녀의 낮아지는 자존감은 위의 두 소설 속 주인공과 다르지 않다. 그래도 회사에서 꿋꿋하게 버티는 이유를 상기하며 하루하루 희망을 품는다. 월급을 꾸준히 모아서 수술해야 하니까. 곧 그녀의 몸에 머물던 지방은 사라질 거고, 날씬한 여자가 되어 그녀의 원래 이름 얼리샤도 되찾고, 그녀가 바라던 인생으로 살아갈 수 있다. 소설 다이어트랜드의 플럼이 정말 수술해서라도 날씬해질 것을 기대하며 읽었다. 열심히 월급을 모은 보람과 꿈을 이룬 완성의 순간을 같이 기다렸다. 하지만 소설은 다른 방향으로 흐르는데, 플럼이 어느 회사의 다이어트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다른 이야기를 펼친다. 플럼이 날씬한 몸으로 변해가면서 진짜 좋은 프로그램에 참여했다고 생각했는데, 슬프게도 이건 해당 프로그램을 주최한 회사의 상술이었고, 여러 가지 사기성 이벤트였던 거다. 한참 소란스럽기는 했지만 플럼은 날씬한 몸을 얻기 위한 의지를 잃지 않는다. 다이어트 프로그램은 망했지만, 아직 그녀에게는 수술이 남아 있으니까.


처음에는 뚱뚱한 플럼의 날씬해지려는 계획을 지켜보는 재미로 흥미로웠는데, 중간에 한 명씩 등장하면서 그들과 어떤 조화를 이루며 흘러갈까 싶은 기대감이 생기더라. 얼굴 반쪽이 화상 흉터로 자리한 새너, 아름다운 여배우에서 비만의 아이 엄마로 변한 말로, 자유로운 영혼처럼 보였던 리타, 비밀이 가득해 보였던 줄리아, 칼리오페라는 성을 만들고 여성들의 자존감 회복과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가르쳐주려고 애쓰는 베레나. 그동안은 다이어트에 성공하는 게 행복이라고 생각했지만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찾아가는 플럼, 아니 얼리샤. 그리고 제니퍼. 제니퍼의 등장은 세상 모든 여성이 어떻게 살아가는 게 행복한 일인지, 자존감을 위해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보여주면서 소설의 느낌은 점점 무거워진다. 무거워지는 만큼 진지하고, 우리가 행복해질 거라는 기대를 품게 한다.


"체중은 언제나 그랬듯이 내게 되돌아올 것이었다. 나는 온갖 일들을 겪었음에도 겉으로는 예전과 다를 게 없어 보였지만 보이지 않는 부분은 달라져 있었다. 나는 변신을 거쳤다." (다이어트랜드, 318~319페이지)




어느 단식원의 코치 봉희가 이야기를 시작한다. 봉희는 단식원에서 사라진 회원 운남을 찾으러 다니지만 끝내 찾지 못한다. 단식원은 ‘Y의 마지막 다이어트라는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주인공이 운남이었기에, 반드시 운남을 찾아야만 했다. 체중을 30kg 넘게 감량한 운남은 이 프로그램의 최적인 주인공이었다. 현재 운남의 몸무게 50kg대 초반이 되었고, 이 정도면 충분히 성공한 다이어트 아닌가? 이 다이어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모른 채로 운남은 벼랑 끝으로 몰리고, 스스로 사라져 이 프로그램 관련자들을 곤란하게 한다. 특히 운남의 코치 봉희는 이 모든 책임을 감당해야 했다. 급기야 운남을 찾으러 그녀의 고향까지 갔지만 허탕을 치고, 오히려 운남의 진짜 모습을 발견하고 돌아온다.


얼마나 처먹으면 이렇게 되냐? 무거워서 이거 어떻게 들어?’ 죽고 싶었지만, 바로 죽지 않은 이유는 바로 이런 말을 듣게 될까 봐. 죽으면서까지 이런 말을 듣게 될까 봐. 삶의 끝에서조차 존중받지 못할 거란 게 너무 무서웠기 때문이에요. 죽으면 끝이라는데, 웃기죠? (내 생의 마지막 다이어트, 254페이지)


제목부터 비장한 내 생의 마지막 다이어트는 우리가 비만에 대해 어떤 인식을 뒀는지 솔직하게 보여준다. ‘살이 찐 몸이 낮은 신분이 되어버린 시대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묻는 듯하다. SNS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데도 시선을 빼앗기고, 누군가 눌러주는 좋아요팔로워수에 일희일비하는 삶. 우리는 타인의 시선을 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지만, 그 시선에 모든 인생을 걸어서도 안 된다는 걸 자주 잊기에 소설 속 상황 같은 일이 벌어지는 건 아닐까. 타인이 보내는 시선에 상처받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면서, 그 상처에 누군가는 목숨을 걸기도 한다는 걸 모르는 걸까? 이 소설은 그 목소리의 대변인이었다. 당신의 시선과 한 마디에 누군가는 상처 입고 좌절하며 생을 놓아버릴 수도 있다는, 그 상처의 주인공은 언제든지 바뀔 수도 있다는 경고였다. 그 주인공은 당신이 될 수도 있다. 단식원에서 사라진 운남의 존재를 다시 확인했을 때, 우리는 이 우스꽝스러운 프로그램의 결말에 만족하고 안심하게 된다. 당당하게 자기 삶을 만들어가는 이의 아름다움이야말로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으며, 그 어떤 아름다움보다 빛이 난다는 걸 확인하면서 읽게 되는 소설이다.



몸에 관한, 다이어트에 관한 책을 읽을 때마다 마음이 오락가락한다. 비슷한 경험과 괜히 혼자 상처받은 순간이 떠오르기도 한다. 건강 때문에라도 다이어트를 해야 하는 걸 아는데도, 이 몸으로 사는 게 얼마만큼 힘든 일인지 계산해 보기도 하지만, 아직도 잘 모르겠다. 맛있는 음식에 행복한 게 먼저인지, 손과 발까지 뚱뚱해진 내 몸을 관리해야 하는 게 먼저인지. 사실, 남편을 만나기 전까지 내 몸은 적당(?)했다. 불편함이 없었다. 맹장 수술 전에 초음파 검사를 받는데, 의사가 미안하다고 사과까지 했었다. 초음파 기기로 배를 눌러서 봐야 하는데, 양쪽 골반이 자꾸 기기에 걸려서 아프겠다고. (이런 날이 나에게도 있었다고. ㅠㅠ) 하루에 한 끼를 먹어도, 이틀에 한 끼를 먹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밥을 먹는다는 건, 하루 세끼를 챙겨야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배고플 때 먹는 일이라고 여겼다. 그러다가 남편을 만나고 자꾸만 뭘 먹으러 다녔는데, 앞에 앉은 사람이 혼자 먹기 어색할까 봐 같이 먹던 게 점점 습관이 되어 몸무게가 자꾸 늘었다. 입이 터졌다고 하는 그거 말이다. 평소 거의 안 먹던 사람이 한번 입이 터지니 그 터진 입을 꿰매지 못하고 오늘까지 이어진 거다. 먹는 게 즐거운 일이라는 걸 알게 되어 좋아해야 할지, 예전 몸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걸 슬퍼해야 할지, ...


다음 주에는 남편의 휴가가 있다. 평소 더운 날에는 움직이기 싫어서 휴가가 있어도 그동안 미뤄두었던 일을 처리하러 다니곤 했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다. 몇 개의 병원 진료와 검진을 예약했고, 평일에만 가능한 은행 일정을 정해놓았다. 엄마 집과 시골에 한 번 다녀오면 짧은 휴가가 다 끝나겠지만, 아쉽지는 않다. 그 일정들 사이에 맛집 투어가 있기 때문이다. ^^ 평소 어느 식당의 어떤 메뉴가 맛있다더라 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메모하고 저장해 두었는데, 이번 휴가 기간에 그 맛집들을 다녀오기로 했다. 메뉴도 소박하고 그동안 먹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텐데, 시간이 안 맞고 귀찮아서 포기했던 음식을 먹으러 간다. 여전히 내 몸은 하루가 다르게 커지고 있지만, 맞는 옷이 없어서 한 번씩 우울해지지만,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있으려니 기분이 좋아진다. 매번 음식을 앞에 두고 고민한다. 이 음식을 먹는 게, 마치 죄를 짓는 기분이 들 때가 있어서 말이다. 그럴 때마다 옆에 있는 이가 말한다. 이 순간만큼은 그냥 아무 생각하지 말고 맛있게 먹으면 된다고. (아휴, 이 인간은 그러다가 내 몸이 이렇게 되었다는 건 잊었나 보다)


그래, 다음 주까지 맛있게 먹고 8월부터는 살을 조금만 빼자. 올해 안에 병원 검진도 받아야 하니, 괜히 검진하고 안 좋은 결과 나와서 계속 약 먹어야 하는 것보다 낫겠지. 소박하게 감량 목표는 한 달에 3kg? 될까? 되게 해야지. 이유와 목표가 생겼으니까. 예전의 몸으로 완전히 돌아가는 건 어려워도, 옷 크기를 지금보다 한 크기는 줄어야 내 몸이 건강해진 걸 확인할 수 있을 듯해서. 내 몸을 내가 더 사랑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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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7-23 17: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깁자기 남편 폰에 입력된 제 이름이 신경쓰입니다. 절세미녀 ㅎㅎ 물론 제가 직접 입력해준겁니다. 구단씨님 이 글 읽다가 바꿔야하나 심각하게 고민 좀.... ㅎㅎ
한달에 3kg은 소박하지 않은거 깉아요. 대단한 목표예요.

구단씨 2025-07-23 18:06   좋아요 1 | URL
꺄아아아~~~
바람돌이님, 저희 남편 휴대폰에도 제 이름이 ‘절세미녀‘ 라고 저장되어 있어요. ㅎㅎ
맹세하지만 제가 그런 건 아니고요!!!
언젠가 제가 물어봤는데, 혹시라도 회사 동료가 보면 비웃을 거 같다고 했더니 상관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더 살을 못빼나봐요. 간절하지 않아서요. ㅠㅠ

바람돌이 2025-07-23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다씨님 승입니다.
저는 제가 입력해줬고 남편은 귀찮아서 안 바꾸는거라... ㅎㅎ
 
너무 늦은 시간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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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결혼을 유지하는 여자는 가끔 상상한다. 집을 떠날 때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으면 어떤 기분일까 하고. , 이런 상상 할 수도 있지. 그런데 소설의 첫 문장은 그녀가 행복한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게 맞는지 의심하게 한다. 지금 이 결혼생활이 너무 행복한데 다른 남자와 자고 싶은 상상을 한다는 게 흔한 일은 아닌 것 같다. 이 가정에서 자기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고, 남편과 아이들을 함께하는 시간이 소중하지만, 그녀에게 꽉 채운 행복을 주지는 못하는 듯하다. 단편 남극의 여자는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며 남편과 아이들 선물을 사러 도시로 갔다가 일탈을 경험한다. 평소와는 다른 옷차림으로 술집을 갔고, 거기에서 한 남자와 술을 마시고 그의 집으로 간다. 남자는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다 해주었고, 여자는 집에서 받지 못하는 대접을 이 남자에게서 받는다. 그렇게 하룻밤의 꿈 같은 일로 끝나면 좋았을 텐데, 여자의 일탈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 이 다정한 남자의 행동에 나도 반할 뻔했다. 항상 집에서 여자가 해왔던 일을 다른 사람에게서 받고 있을 때 얼마나 편안하고 행복할까. 그래서 더 긴장하지 않았던 걸까. 이 단편 보면서 더 끔찍한 생각이 들었던 건, 여자가 꿈꾸었던 작은 바람 하나가 이루어졌을 때 이런 결말을 보여주는 건 무슨 의미인가 싶어서다. 절대 해서는 안 될 일을 해서 그런 거라고 경고하고 있는 건가? 아니면, ‘여자가 무슨~’ 이런 사고방식에 그녀가 벌 받은 거라고 심판을 내리는 걸까. 나 정말 이 단편 보면서 좀 아주 무서웠다. 세상이, 남자가 너무 무서웠다고.


표제작 너무 늦은 시간의 주인공 남자에게서는 진짜 뭐랄까, 이 남자 어떤 여자를 만나고 연애하면서 서로 마음을 나누고 결혼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궁금했다고 해야 하나. 평소처럼 출근한 남자에게 동료들은 안부를 묻는다. 그냥 아침에 얼굴 본 사람에게 전하는 인사 정도로 여겼다. 반전은, 원래대로라면 오늘은 남자의 결혼식이 있는 날이었다는 거다. 그럼 결혼식이 취소됐다는 건가? 남자는 여자를 만나서 연애했고, 이 만남은 자연스럽게 결혼하기로 하는 과정까지 이어졌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남자가 여자에게 갖는 생각과 여자가 남자에게 바라는 마음이 어긋나곤 했다. 항상 여자가 장을 보면서 계산했는데, 어느 날 여자는 지갑을 두고 왔고 그때 장을 본 것을 남자가 계산했다. 남자는 그날의 일을, 자기가 쓴 돈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서 아차 싶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그때까지 차곡차곡 쌓아왔던 다름이 여자의 마음에서 폭발한다.


여자가 참 오래 참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남자를 계속 만나야 하는지 그만 헤어져야 하는지 수도 없이 생각했을 텐데, 그래도 혹시나 변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그 결정을 미루게 한 건 아닐까 추측해본다. 일말의 기대 같은 거 말이다. 나아지겠지, 서로의 생각을 조금씩 이해하고 양보하면서 맞춰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남자는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그동안 드러내지 않았던 민낯을 계속 보여왔던 듯하다. 어릴 적 집에서 어머니와 아버지, 동생이 함께 지내면서 엄마에게 했던 행동들이나 사고방식을 떠올리면서 후회하지만, 그때는 늦었다. 자라면서 봤던,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어떻게 했는지 봐왔던 삶의 태도는 어느새 그의 몸에 깊게 새겨져 있던 거다. 그러고 보니 그를 떠났던 여자가 오히려 현명한 결정을 내린 게 아닌가 싶어질 정도다. 이혼보다 파혼이 낫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요즘은 좀 달라졌을지도 모르지만 당신 또래의 남자 절반은 그냥 우리가 입 닥치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해주길 바란대. 남자들은 제멋대로 살아서 뭐든 자기 마음대로 안 되면 한심하게 군대.”

(중략)

그거 알아? 내가 이 집에서 저녁을 만들었을 때 당신은 고맙다는 말을 한 번도 안 했어. 식재료를 산 적도 없고, 아침 식사를 차려준 적도 없어.” (37~38페이지, 너무 늦은 시간)


유명 작가의 하우스에서 머물며 글을 쓸 기회를 얻은 여자가 있다.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속 여자는 이 기회를 이용해 그녀의 모든 역량을 쏟아부을 기세다. 그런데 어떤 남자가 이 집을 찾아와서 좀 보고 싶다고 한다. 미리 약속도 없이, 그녀의 일정을 무시한 배려를 할 수 없기에 다시 찾아오라고 한다. 저녁에 다시 찾아온 남자는 여자가 배려한 상황을 무시한 채로 멋대로 단정하고 판단하면서 여자에게 핀잔을 준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건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남자는 여자에게 막말을 퍼붓기 시작한다. 당신이 뭔데? ? 여자가 유명 작가의 하우스에 머물 기회를 얻은 건 정말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이뤄낸 일이다. 마치 감시자처럼 찾아와서 이러는 이유를 모르겠다. 왜 이렇게 예의가 없지? 남자는 여자가 내놓은 케이크를 처먹고 차를 마시면서도 손님 대접을 해준 것을 고마워하기는커녕 한껏 질책하고 떠난다. 처음 보는 여자에게, 막무가내로 와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떠나는 중에도 욕을 해대고 있는 이 남자가 가진 권력이 무엇이기에.


불균형한 권력관계를 말하는 듯하지만, 그 불균형이 유지되어왔던 건 어느 한쪽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오랜 세월 그런 희생이 강요처럼 이어져 오면서 당연하게 뿌린 내린 결과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세대 사이의 갈등, 남자와 여자 사이의 불평등한 여러 가지 문제가 역사와 문화, 관습적으로 계속된 게 이유라면, 이제는 그 이유를 파헤쳐 앞으로의 삶을 위한 변화가 답이 아닐까. 여성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무너뜨리는 균형의 아름다움을 찾아와야 할 때인 듯하다. 작가의 전작들을 떠올리면 고요하면서도 무게가 있었다. 조용히 물 흐르듯 흘러가는 이야기 속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정확했고, 독자에게 그대로 전달되곤 했다. 그래서인지 이번 단편집도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충분히 이해했다. 소설 속 이야기라고 하기에는 너무 현실적으로 생생한 내용들이어서 재미와 충격을 느끼게 하는 작품들이었다.



#너무늦은시간 #클레어키건 #문학 ##다산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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