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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월되지 않는 엄마 - 임경섭의 2월 ㅣ 시의적절 14
임경섭 지음 / 난다 / 2025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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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월
그해 2월은
도무지 이월되지 않고
여기까지 와 있다
그해 2월은
잊히지 않고
기어코 여기까지 와 있다
그해 2월이,
아팠던 그해 2월이
죽어 사라지지 않고
여기까지 같이 와 보란듯이 옆에 서 있다
원망스러운 그해 2월이,
그해 2월만 아니었다면
지금의 내가 아닌 다른 내가
이런 글은 쓰지도 않을 것 같은 나로
살아가고 있을 것만 같은
그런 2월이
다른 길로 가지 않고 온전히 내 옆에 살아 있다
죽지 않고 여기에 있어서 다행이다
내가 죽을 때까지 죽지 않을 것 같아서
천만다행이다 (176페이지)
‘시의적절’ 시리즈를 알고 있었지만, 크게 관심 두지 않았다. 세상에 책은 많고, 굳이 한번 안 읽고 지나간다고 해도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니니까. 그런데도 이번 2월의 책은 홀린 듯이 손이 갔다. 꼭 2월에 읽어야 할 것만 같았고, ‘이월되지 않는’, ‘이월될 수 없는’ 존재와 마음에 관해 저절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항상 그 자리에 있을 것만 같고, 언제든 ‘다음에’라는 말로 지금 하지 못한 것의 미안함을 지울 수 있다고 생각했던, 그러다가 결국 아쉬움과 그리움만 남기는 존재와 마음에 관해서 말이다.
인터넷서점에 소개된 저자의 설명은 두 줄 정도였다. 1981년생. 비슷한 나이에 여전히 엄마한테 등짝을 맞으며 살았던 순간을 떠올렸다. 잠깐, 또 생각했다. 그 나이에 엄마를 잃었다면 는 어떤 모습일까. 잘 상상이 되지 않는다, 아직은. 저자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24년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 정도면 그리움이 무뎌질까?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내가 감당해야 할 엄마와의 이별에 관해 요즘 많이 떠올린다. 슬프고 아프겠다고 생각하지만, 시간이 그 감정을 흐릿하게 해주지 않을까 싶기도 했는데, 저자의 이야기를 듣고 막연하게 떠올린 그 무뎌지는 감정에 관해 물음표가 아닌 마침표를 얻게 되었다.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마음이라고 했다. 아무리 시간이 많이 흘렀어도, 더 단단해지는 가슴을 갖게 되는 어른이 된다고 해도, 그리워하는 마음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엄마가 세상을 떠나고 몇 년 동안은 그 괴로움이 너무나 버거워 시간이 빨리 지나가 버렸으면 하고 바라던 때가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나이가 들고 철도 좀 들고 그리하여 어른이라는 단어가 내게 조금은 어울리는 시점이 된다면 이 감정도 무뎌지겠지, 엄마를 잃은 슬픔이 허구한 날 나를 괴롭히지는 않겠지, 엄마가 보고 싶어서 눈물이 나는 일은 없겠지 싶었다.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갔다고 생각되는 이유는 여기 있었다. 마흔다섯이 되었는데도 엄마가 보고 싶은 마음이 가시질 않는다. 엄마의 표정과 엄마의 목소리가 불현듯 떠올라 아내 몰래 엉엉 우는 날이 여전히 잦다. (43~44페이지)
시와 에세이, 간혹 소설까지 담겼다. 2월 1일부터 2월 28일까지, 마치 매일 일기를 쓰듯 하루하루가 채워졌다. 저자는 왜, 일 년 열두 달 중 가장 짧은 2월, 그것도 엄마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자 했을까 궁금했는데, 어쩌면 너무 짧은 달이어서 그랬던가 싶기도 하다. 마냥 그리워하고 싶은데, 일 년 내내 그리워해도 되지만, 특히 2월에 엄마를 더 만나고 싶은 마음이었던 건 아닐까 하고. 그러니까 2월에는, 이유를 찾지 않아도 그냥 보고 싶은 사람을 내내 떠올려도 좋은 때라고. 인생의 많은 ‘처음’ 중에서도 엄마와 함께 마신 술이 있었다. 젊은 엄마의 손을 잡고 밤하늘에서 떨어지는 별똥별을 보았다. 그 순간에도 죽음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는데, 한 번도 그 죽음에 관해 생각하지 않고 지내왔을 나이를 뒤늦게 기억한다.
저자의 엄마가 떠나면서 들려준 말은 ‘좋은 시인이 되라는’ 거였다. 아들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던 엄마가 ‘좋은’ 수식어를 더할 한 가지를 더 바라고 가셨다는 게, 그냥 엄마구나 싶었다. 더 하고 싶은 말도 다 묻어놓은 것만 같았다. 나이로는 성인이지만 아직 어리기만 한 마음으로 보냈던 이십 대 초반, 기꺼이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여야만 했던 순간에 건네는 말로 충분히 넘칠 듯했다. 남겨진 이 아이가 생각할 죽음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하기도 전에, 남겨진 아이는 너무 빨리 가버린 엄마를 그리워하기에도 모자란 시간이었다. 시간이 많이 흐른 후에 그 죽음을 생각하니 조금은 담담해졌으려나. 저자는 말한다. 우주에 관한 영상을 보고 있자니, 우리가 태어나 우주로 돌아가는 게 죽음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렇게 생각해보니, 죽음이 꼭 슬픔이나 두려움은 아닌 것 같다고, 그저 짧은 한순간을 같이한 동년배 친구 같다고.
언젠가는 만날 것이다. 이 세상이 아닌 그 어느 곳에서. 그동안 잘 지냈냐고 안부도 물으면서, 내가 이 세상 조금 더 살아오면서 겪은 많은 것을 이야기해주고 있을지도 모른다.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해서 적응하느라 힘들었다고, 붕어빵 몇 개 사 먹으려고 일부러 현금을 준비해서 다녀야 했다고, 휴대폰 클릭 몇 번에 음식이 현관문 앞에 놓여 있어서 추운 날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좋은 세상이었다고. 전자책을 보느라 시력은 더 나빠졌는데 이불 속에서 누워서 책을 보고 있었다고, 병원에 직접 가지 않아도 약을 처방받을 수도 있고, TV와 대화도 하면서 살았다고 하면 믿을까? 변하는 만큼 우리 몸은 편해졌지만, 가끔 이렇게 변한 세상이 괜히 섭섭하기도 하다고 말이다. 그래도 여전히 사람의 손으로 해야 할 것들이 많아서,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어느 시절을 그리워하며 살아가는 게 나쁘지만은 않았다고 말해줘야지.
부모의 죽음이라는 것은 막상 닥쳐온 바로 그때에는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빈자리가 문득문득 느껴질 때야 비로소, 그 시간이 켜켜이 쌓여 큰 무게로 돌아올 때야 비로소 진짜 슬픔이란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아무리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다는 걸 몸소 깨달을 때야 비로소 진정한 설움을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나의 엄마에 대한 추념은 끝이 없거니와 시간이 갈수록 더욱 커져만 가는 것이다. 어쩐다. 나는 엄마의 죽음에서 한 발짝도 빠져나오지 못했다. (170페이지)
죽음에 관한 이야기로 예상해서 그런 걸까. 마냥 슬프고 어두울 거로 생각했다. 부모의 죽음과 부재가 얼마나 그리울지 떠올려 보면 그저 편안한 웃음이 나오지는 않을 테니까. 읽다 보면, 오히려 담담한 말투가 안정감을 준다. 지금 우리는 죽음과 그리움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전혀 슬프지 않고 오히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 남긴 소중한 것을 이야기하는 기분이다. 저자의 말처럼, 엄마를 일찍 여의고 죽음에 의연해지게 되면서, 누군가의 앞에 닥친 죽음의 순간을 자기 경험으로 도울 수 있음이 선물 같다고 말하는 게, 무슨 말인지 알겠더라. 죽음의 대상은 달라도 비슷한 경험을 한 나도 저자의 말을 그대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여전히 엄마의 죽음에서 한 발짝도 빠져나오지 못했다고 무슨 큰일이 일어나는 건 아닐 테다. 빠져나오지 못하면 어떤가. 그대로 머물러 있고 싶다면, 그래도 되는 거 아닌가? 그래도 된다고, 엄마가 떠난 지 24년이 된 지금도, 앞으로 다시 24년의 세월 동안에도, 그래도 괜찮다고.
병원 대기실에서 이 책을 읽고 있었다. 다시 엄마의 검진 예약 때문에 기다리면서, 자기 차례가 언제 오는지 대기실 모니터를 바라보는 많은 환자를 둘러보며, 누구나 겪을 이별과 죽음의 순간을 계속 생각했다. 한 사람의 죽음으로 저절로 떠올리게 되는 많은 시간, 살아온 과정과 고단함, 순간순간 떠오르는 후회들, 죽음을 받아들였지만 간단하지 않았던 마음, 그리고 또 다른 마음들이 더해진 오늘을 슬픔으로만 기억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갑자기 찾아오는 설움마저 그러려니 하는 그리움으로 담아낼 수 있을 듯하다.
2월이 지나고, 시간이 한참 더 흘러도, 오래 기억될 것 같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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