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이 이렇게 살이 찔 수 있다는 걸 새롭게 확인하는 날들이다. 매일 인생 최고의 몸무게를 경신하고 있다. 그냥 맛있는 것을 조금(?) 먹었을 뿐인데. ㅠㅠ 조심했어야 했다. 워낙 운동을 싫어하니 먹는 것으로 몸을 조절하며 살아온 인생이라, 그래, 그 맛있는 것(!)을 멀리했어야 하는데, 그걸 못 해서 이 몸뚱이가 되었다. 남편은 지금 자기가 결혼한 여자가 아니라 새로운 여자가 옆에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오랜만에 만난 언니와 여동생은 왜 이렇게 살이 쪘냐고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입던 옷이 맞지 않으니 더 큰 옷을 사야 하는데, 그게 싫어서 몇 년째 옷을 거의 사지 않았다. 몸이 커지니 여름의 더위를 견디기가 더 힘들어지고, 희한하게도 몸이 살찌니 손과 발까지 커진 듯하다. 매일 신던 슬리퍼도 꽉 끼네. 하아. 이번 여름의 이른 더위와 폭염, 폭우 속 꿉꿉함을 더 힘들게 견디는 중이다. 앞으로도 운동으로 몸을 만들지는 못 할 것 같은데, 다시 먹는 것을 조절하는 수밖에 없는데, 세상에 맛있는 게 너무 많아서, 진짜 힘들다. 이런 몸으로 고민이 많은 사람이 나뿐만은 아니라는 게 위로라면 위로가 될까.




이곳에서는 뚱뚱해도 놀림받지 않고 비키니를 입을 수 있습니다. 뚱뚱해도 옆 좌석의 눈치를 보지 않고 비행기를 탈 수 있습니다. 뚱뚱해도 어깨를 움츠리지 않고 자유롭게 길거리 음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내가 나여도 상처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빅토피아, 8페이지)


165cm, 몸무게 110kg의 고도비만 엄희지. 평범한 여고생이 몸 때문에 현실에서 주눅이 들어 산다. 사람들이 자꾸 자기만 쳐다보는 것 같다. 뚱뚱한 몸이 아닌 날씬한 몸으로 변신한 애프터의 세계에 살고 싶지만, 아마도 이번 생에는 불가능할 것 같다. 그래서 찾은 곳, 날씬한 사람은 입장할 수 없는 메타버스 빅토피아에서 친구를 사귀고 존재감을 느낀다. 어느 날 빅토피아의 이벤트가 열린다. 무려 1등 상품이 언리밋 테테크라고, 메타버스에서 맛만 느끼고 바깥 현실에서 아무것도 안 먹으면 쉽게 살을 뺄 수 있는 미각 동기화 시스템이다. 이걸 구매하려고 하면 3천만 원이 든다. . 3천만 원으로 이 시스템을 이용해서 살을 뺄 수 있다면 좋겠지만, 3천만 원이 흔하게 가지고 있는 돈도 아니고, 그 돈이 있다고 해도 이렇게 쓸 수 있는 금액인가 싶기도 하고. 그래, 이 경쟁에서 이기고 1등을 차지해서 언리밋 테테크를 상품으로 받고 애프터의 몸으로 살아가야지. 전투력 상승이다.


소설 빅토피아의 설정은 그냥 판타지처럼 보이지만, 날씬한 몸으로 살고 싶은 우리의 갈망을 솔직하게 드러낸 작품이다. 청소년 대상 소설인데도, 중년의 시간을 사는 나에게도 솔깃한 제안이긴 하더라. 미친 듯이 싸우고 이겨서 내 몸을 살이 찌기 전으로 돌려놓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성시경 오빠 도와줘요~) 그래서 희지는 이 싸움에서 이겨 1등을 차지하고 애프터의 몸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비수를 꽂은 것은 남편이었다. 지난달 시아버지의 장례식 때 있었던 일이다.

큰일인데.”

남편은 자꾸 그 소리를 하며 안절부절못했다.

뭐가 큰일이야?”

오늘 회사 사람들이 많이 조문 온대.”

그러면 감사하지. 다들 바쁜데 일부러 장례식에 와주시는 거잖아.”

회사에서 내 아내는 절세미인이라는 소문이 자자한데 말이야. 내 동기나 상사도 우리 결혼식 때 말고는 당신을 본 적이 없으니 그러고도 남지. 미안한데 노리코, 잠깐만 어디 좀 숨어 있으면 안 될까?

농담인 줄 알았는데 남편의 눈은 진지했다. 충격이다 못해 쓰러질 뻔했다. (당신의 살을 빼 드립니다, 19페이지)


남편이 저렇게 얘기할 수도 있구나 싶어서 정말 놀라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던 장면이다. 가키야 미우의 소설 당신의 살을 빼 드립니다에서 등장하는 네 명의 여성은 각각 다른 상황에 놓여 있지만, 살 때문에 힘든 시간을 보내는 건 비슷하다. 노리코는 갑자기 찐 살 때문에 집에서도 회사에서도 우울하다. 예쁘다는 소리만 듣고 살다가 갑자기 살이 찌니 자신감이 바닥이다. 어렸을 적부터 먹는 것을 좋아하고 뚱뚱했던 고기쿠는 파티시에가 되고 싶지만, 아버지가 강요하는 삶 때문에 고통스럽다. 그동안 뚱뚱한 사람을 혐오하면서 살아왔던 도모야는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나 보니, 자기 절제를 못 하고 먹어대기만 하는 뚱뚱한 몸이 되어 있었다.


뚱뚱한 몸이 사람들의 놀림감이 되고 따돌림의 대상이 되는 현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작품이다. 어떤 이유로든 살이 찌면서 이들의 인생이 바뀌었고, 다른 사람과 원만하게 지내기 어려워졌다. 불안감은 터질 것 같았고, 자기 인생인데 자기 의지를 담지 못한 시선으로 보게 된다. 나부터도 살이 찌면서 자신감이 떨어지곤 한다. 맛있는 것을 보면 행복하지만, 먹고 나면 금방 또 우울해지는 과정이 반복되기도 한다. 이 몸으로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없는데, 괜히 마음이 그렇게 흐르니 세상의 민폐족이 된 것 같은 기분도 든다. 이대로 놔두면 안 될 것만 같다. 소설 속 인물들은 나의 인생, 나의 미래라는 커다란 삶을 파괴하는 일을 이대로 두고 볼 수 없었기에 이 순간을 바꾸기 위해 달라졌다. 뭔가 시작하면서 용기를 내고 있었다.




플럼은 뚱뚱하다. 그녀의 낮아지는 자존감은 위의 두 소설 속 주인공과 다르지 않다. 그래도 회사에서 꿋꿋하게 버티는 이유를 상기하며 하루하루 희망을 품는다. 월급을 꾸준히 모아서 수술해야 하니까. 곧 그녀의 몸에 머물던 지방은 사라질 거고, 날씬한 여자가 되어 그녀의 원래 이름 얼리샤도 되찾고, 그녀가 바라던 인생으로 살아갈 수 있다. 소설 다이어트랜드의 플럼이 정말 수술해서라도 날씬해질 것을 기대하며 읽었다. 열심히 월급을 모은 보람과 꿈을 이룬 완성의 순간을 같이 기다렸다. 하지만 소설은 다른 방향으로 흐르는데, 플럼이 어느 회사의 다이어트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다른 이야기를 펼친다. 플럼이 날씬한 몸으로 변해가면서 진짜 좋은 프로그램에 참여했다고 생각했는데, 슬프게도 이건 해당 프로그램을 주최한 회사의 상술이었고, 여러 가지 사기성 이벤트였던 거다. 한참 소란스럽기는 했지만 플럼은 날씬한 몸을 얻기 위한 의지를 잃지 않는다. 다이어트 프로그램은 망했지만, 아직 그녀에게는 수술이 남아 있으니까.


처음에는 뚱뚱한 플럼의 날씬해지려는 계획을 지켜보는 재미로 흥미로웠는데, 중간에 한 명씩 등장하면서 그들과 어떤 조화를 이루며 흘러갈까 싶은 기대감이 생기더라. 얼굴 반쪽이 화상 흉터로 자리한 새너, 아름다운 여배우에서 비만의 아이 엄마로 변한 말로, 자유로운 영혼처럼 보였던 리타, 비밀이 가득해 보였던 줄리아, 칼리오페라는 성을 만들고 여성들의 자존감 회복과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가르쳐주려고 애쓰는 베레나. 그동안은 다이어트에 성공하는 게 행복이라고 생각했지만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찾아가는 플럼, 아니 얼리샤. 그리고 제니퍼. 제니퍼의 등장은 세상 모든 여성이 어떻게 살아가는 게 행복한 일인지, 자존감을 위해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보여주면서 소설의 느낌은 점점 무거워진다. 무거워지는 만큼 진지하고, 우리가 행복해질 거라는 기대를 품게 한다.


"체중은 언제나 그랬듯이 내게 되돌아올 것이었다. 나는 온갖 일들을 겪었음에도 겉으로는 예전과 다를 게 없어 보였지만 보이지 않는 부분은 달라져 있었다. 나는 변신을 거쳤다." (다이어트랜드, 318~319페이지)




어느 단식원의 코치 봉희가 이야기를 시작한다. 봉희는 단식원에서 사라진 회원 운남을 찾으러 다니지만 끝내 찾지 못한다. 단식원은 ‘Y의 마지막 다이어트라는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주인공이 운남이었기에, 반드시 운남을 찾아야만 했다. 체중을 30kg 넘게 감량한 운남은 이 프로그램의 최적인 주인공이었다. 현재 운남의 몸무게 50kg대 초반이 되었고, 이 정도면 충분히 성공한 다이어트 아닌가? 이 다이어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모른 채로 운남은 벼랑 끝으로 몰리고, 스스로 사라져 이 프로그램 관련자들을 곤란하게 한다. 특히 운남의 코치 봉희는 이 모든 책임을 감당해야 했다. 급기야 운남을 찾으러 그녀의 고향까지 갔지만 허탕을 치고, 오히려 운남의 진짜 모습을 발견하고 돌아온다.


얼마나 처먹으면 이렇게 되냐? 무거워서 이거 어떻게 들어?’ 죽고 싶었지만, 바로 죽지 않은 이유는 바로 이런 말을 듣게 될까 봐. 죽으면서까지 이런 말을 듣게 될까 봐. 삶의 끝에서조차 존중받지 못할 거란 게 너무 무서웠기 때문이에요. 죽으면 끝이라는데, 웃기죠? (내 생의 마지막 다이어트, 254페이지)


제목부터 비장한 내 생의 마지막 다이어트는 우리가 비만에 대해 어떤 인식을 뒀는지 솔직하게 보여준다. ‘살이 찐 몸이 낮은 신분이 되어버린 시대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묻는 듯하다. SNS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데도 시선을 빼앗기고, 누군가 눌러주는 좋아요팔로워수에 일희일비하는 삶. 우리는 타인의 시선을 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지만, 그 시선에 모든 인생을 걸어서도 안 된다는 걸 자주 잊기에 소설 속 상황 같은 일이 벌어지는 건 아닐까. 타인이 보내는 시선에 상처받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면서, 그 상처에 누군가는 목숨을 걸기도 한다는 걸 모르는 걸까? 이 소설은 그 목소리의 대변인이었다. 당신의 시선과 한 마디에 누군가는 상처 입고 좌절하며 생을 놓아버릴 수도 있다는, 그 상처의 주인공은 언제든지 바뀔 수도 있다는 경고였다. 그 주인공은 당신이 될 수도 있다. 단식원에서 사라진 운남의 존재를 다시 확인했을 때, 우리는 이 우스꽝스러운 프로그램의 결말에 만족하고 안심하게 된다. 당당하게 자기 삶을 만들어가는 이의 아름다움이야말로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으며, 그 어떤 아름다움보다 빛이 난다는 걸 확인하면서 읽게 되는 소설이다.



몸에 관한, 다이어트에 관한 책을 읽을 때마다 마음이 오락가락한다. 비슷한 경험과 괜히 혼자 상처받은 순간이 떠오르기도 한다. 건강 때문에라도 다이어트를 해야 하는 걸 아는데도, 이 몸으로 사는 게 얼마만큼 힘든 일인지 계산해 보기도 하지만, 아직도 잘 모르겠다. 맛있는 음식에 행복한 게 먼저인지, 손과 발까지 뚱뚱해진 내 몸을 관리해야 하는 게 먼저인지. 사실, 남편을 만나기 전까지 내 몸은 적당(?)했다. 불편함이 없었다. 맹장 수술 전에 초음파 검사를 받는데, 의사가 미안하다고 사과까지 했었다. 초음파 기기로 배를 눌러서 봐야 하는데, 양쪽 골반이 자꾸 기기에 걸려서 아프겠다고. (이런 날이 나에게도 있었다고. ㅠㅠ) 하루에 한 끼를 먹어도, 이틀에 한 끼를 먹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밥을 먹는다는 건, 하루 세끼를 챙겨야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배고플 때 먹는 일이라고 여겼다. 그러다가 남편을 만나고 자꾸만 뭘 먹으러 다녔는데, 앞에 앉은 사람이 혼자 먹기 어색할까 봐 같이 먹던 게 점점 습관이 되어 몸무게가 자꾸 늘었다. 입이 터졌다고 하는 그거 말이다. 평소 거의 안 먹던 사람이 한번 입이 터지니 그 터진 입을 꿰매지 못하고 오늘까지 이어진 거다. 먹는 게 즐거운 일이라는 걸 알게 되어 좋아해야 할지, 예전 몸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걸 슬퍼해야 할지, ...


다음 주에는 남편의 휴가가 있다. 평소 더운 날에는 움직이기 싫어서 휴가가 있어도 그동안 미뤄두었던 일을 처리하러 다니곤 했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다. 몇 개의 병원 진료와 검진을 예약했고, 평일에만 가능한 은행 일정을 정해놓았다. 엄마 집과 시골에 한 번 다녀오면 짧은 휴가가 다 끝나겠지만, 아쉽지는 않다. 그 일정들 사이에 맛집 투어가 있기 때문이다. ^^ 평소 어느 식당의 어떤 메뉴가 맛있다더라 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메모하고 저장해 두었는데, 이번 휴가 기간에 그 맛집들을 다녀오기로 했다. 메뉴도 소박하고 그동안 먹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텐데, 시간이 안 맞고 귀찮아서 포기했던 음식을 먹으러 간다. 여전히 내 몸은 하루가 다르게 커지고 있지만, 맞는 옷이 없어서 한 번씩 우울해지지만,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있으려니 기분이 좋아진다. 매번 음식을 앞에 두고 고민한다. 이 음식을 먹는 게, 마치 죄를 짓는 기분이 들 때가 있어서 말이다. 그럴 때마다 옆에 있는 이가 말한다. 이 순간만큼은 그냥 아무 생각하지 말고 맛있게 먹으면 된다고. (아휴, 이 인간은 그러다가 내 몸이 이렇게 되었다는 건 잊었나 보다)


그래, 다음 주까지 맛있게 먹고 8월부터는 살을 조금만 빼자. 올해 안에 병원 검진도 받아야 하니, 괜히 검진하고 안 좋은 결과 나와서 계속 약 먹어야 하는 것보다 낫겠지. 소박하게 감량 목표는 한 달에 3kg? 될까? 되게 해야지. 이유와 목표가 생겼으니까. 예전의 몸으로 완전히 돌아가는 건 어려워도, 옷 크기를 지금보다 한 크기는 줄어야 내 몸이 건강해진 걸 확인할 수 있을 듯해서. 내 몸을 내가 더 사랑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빅토피아 #당신의살을빼드립니다 #다이어트랜드 #내생의마지막다이어트 #제습기다이어트 

#책 #책추천 #여름 #건강하게다이어트 #입터짐방지 #문학 #소설 #내몸을존중하는일






댓글(3)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람돌이 2025-07-23 17: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깁자기 남편 폰에 입력된 제 이름이 신경쓰입니다. 절세미녀 ㅎㅎ 물론 제가 직접 입력해준겁니다. 구단씨님 이 글 읽다가 바꿔야하나 심각하게 고민 좀.... ㅎㅎ
한달에 3kg은 소박하지 않은거 깉아요. 대단한 목표예요.

구단씨 2025-07-23 18:06   좋아요 1 | URL
꺄아아아~~~
바람돌이님, 저희 남편 휴대폰에도 제 이름이 ‘절세미녀‘ 라고 저장되어 있어요. ㅎㅎ
맹세하지만 제가 그런 건 아니고요!!!
언젠가 제가 물어봤는데, 혹시라도 회사 동료가 보면 비웃을 거 같다고 했더니 상관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더 살을 못빼나봐요. 간절하지 않아서요. ㅠㅠ

바람돌이 2025-07-23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다씨님 승입니다.
저는 제가 입력해줬고 남편은 귀찮아서 안 바꾸는거라... ㅎㅎ
 
너무 늦은 시간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행복한 결혼을 유지하는 여자는 가끔 상상한다. 집을 떠날 때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으면 어떤 기분일까 하고. , 이런 상상 할 수도 있지. 그런데 소설의 첫 문장은 그녀가 행복한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게 맞는지 의심하게 한다. 지금 이 결혼생활이 너무 행복한데 다른 남자와 자고 싶은 상상을 한다는 게 흔한 일은 아닌 것 같다. 이 가정에서 자기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고, 남편과 아이들을 함께하는 시간이 소중하지만, 그녀에게 꽉 채운 행복을 주지는 못하는 듯하다. 단편 남극의 여자는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며 남편과 아이들 선물을 사러 도시로 갔다가 일탈을 경험한다. 평소와는 다른 옷차림으로 술집을 갔고, 거기에서 한 남자와 술을 마시고 그의 집으로 간다. 남자는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다 해주었고, 여자는 집에서 받지 못하는 대접을 이 남자에게서 받는다. 그렇게 하룻밤의 꿈 같은 일로 끝나면 좋았을 텐데, 여자의 일탈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 이 다정한 남자의 행동에 나도 반할 뻔했다. 항상 집에서 여자가 해왔던 일을 다른 사람에게서 받고 있을 때 얼마나 편안하고 행복할까. 그래서 더 긴장하지 않았던 걸까. 이 단편 보면서 더 끔찍한 생각이 들었던 건, 여자가 꿈꾸었던 작은 바람 하나가 이루어졌을 때 이런 결말을 보여주는 건 무슨 의미인가 싶어서다. 절대 해서는 안 될 일을 해서 그런 거라고 경고하고 있는 건가? 아니면, ‘여자가 무슨~’ 이런 사고방식에 그녀가 벌 받은 거라고 심판을 내리는 걸까. 나 정말 이 단편 보면서 좀 아주 무서웠다. 세상이, 남자가 너무 무서웠다고.


표제작 너무 늦은 시간의 주인공 남자에게서는 진짜 뭐랄까, 이 남자 어떤 여자를 만나고 연애하면서 서로 마음을 나누고 결혼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궁금했다고 해야 하나. 평소처럼 출근한 남자에게 동료들은 안부를 묻는다. 그냥 아침에 얼굴 본 사람에게 전하는 인사 정도로 여겼다. 반전은, 원래대로라면 오늘은 남자의 결혼식이 있는 날이었다는 거다. 그럼 결혼식이 취소됐다는 건가? 남자는 여자를 만나서 연애했고, 이 만남은 자연스럽게 결혼하기로 하는 과정까지 이어졌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남자가 여자에게 갖는 생각과 여자가 남자에게 바라는 마음이 어긋나곤 했다. 항상 여자가 장을 보면서 계산했는데, 어느 날 여자는 지갑을 두고 왔고 그때 장을 본 것을 남자가 계산했다. 남자는 그날의 일을, 자기가 쓴 돈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서 아차 싶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그때까지 차곡차곡 쌓아왔던 다름이 여자의 마음에서 폭발한다.


여자가 참 오래 참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남자를 계속 만나야 하는지 그만 헤어져야 하는지 수도 없이 생각했을 텐데, 그래도 혹시나 변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그 결정을 미루게 한 건 아닐까 추측해본다. 일말의 기대 같은 거 말이다. 나아지겠지, 서로의 생각을 조금씩 이해하고 양보하면서 맞춰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남자는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그동안 드러내지 않았던 민낯을 계속 보여왔던 듯하다. 어릴 적 집에서 어머니와 아버지, 동생이 함께 지내면서 엄마에게 했던 행동들이나 사고방식을 떠올리면서 후회하지만, 그때는 늦었다. 자라면서 봤던,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어떻게 했는지 봐왔던 삶의 태도는 어느새 그의 몸에 깊게 새겨져 있던 거다. 그러고 보니 그를 떠났던 여자가 오히려 현명한 결정을 내린 게 아닌가 싶어질 정도다. 이혼보다 파혼이 낫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요즘은 좀 달라졌을지도 모르지만 당신 또래의 남자 절반은 그냥 우리가 입 닥치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해주길 바란대. 남자들은 제멋대로 살아서 뭐든 자기 마음대로 안 되면 한심하게 군대.”

(중략)

그거 알아? 내가 이 집에서 저녁을 만들었을 때 당신은 고맙다는 말을 한 번도 안 했어. 식재료를 산 적도 없고, 아침 식사를 차려준 적도 없어.” (37~38페이지, 너무 늦은 시간)


유명 작가의 하우스에서 머물며 글을 쓸 기회를 얻은 여자가 있다.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속 여자는 이 기회를 이용해 그녀의 모든 역량을 쏟아부을 기세다. 그런데 어떤 남자가 이 집을 찾아와서 좀 보고 싶다고 한다. 미리 약속도 없이, 그녀의 일정을 무시한 배려를 할 수 없기에 다시 찾아오라고 한다. 저녁에 다시 찾아온 남자는 여자가 배려한 상황을 무시한 채로 멋대로 단정하고 판단하면서 여자에게 핀잔을 준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건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남자는 여자에게 막말을 퍼붓기 시작한다. 당신이 뭔데? ? 여자가 유명 작가의 하우스에 머물 기회를 얻은 건 정말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이뤄낸 일이다. 마치 감시자처럼 찾아와서 이러는 이유를 모르겠다. 왜 이렇게 예의가 없지? 남자는 여자가 내놓은 케이크를 처먹고 차를 마시면서도 손님 대접을 해준 것을 고마워하기는커녕 한껏 질책하고 떠난다. 처음 보는 여자에게, 막무가내로 와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떠나는 중에도 욕을 해대고 있는 이 남자가 가진 권력이 무엇이기에.


불균형한 권력관계를 말하는 듯하지만, 그 불균형이 유지되어왔던 건 어느 한쪽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오랜 세월 그런 희생이 강요처럼 이어져 오면서 당연하게 뿌린 내린 결과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세대 사이의 갈등, 남자와 여자 사이의 불평등한 여러 가지 문제가 역사와 문화, 관습적으로 계속된 게 이유라면, 이제는 그 이유를 파헤쳐 앞으로의 삶을 위한 변화가 답이 아닐까. 여성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무너뜨리는 균형의 아름다움을 찾아와야 할 때인 듯하다. 작가의 전작들을 떠올리면 고요하면서도 무게가 있었다. 조용히 물 흐르듯 흘러가는 이야기 속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정확했고, 독자에게 그대로 전달되곤 했다. 그래서인지 이번 단편집도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충분히 이해했다. 소설 속 이야기라고 하기에는 너무 현실적으로 생생한 내용들이어서 재미와 충격을 느끼게 하는 작품들이었다.



#너무늦은시간 #클레어키건 #문학 ##다산책방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너무 건조해서 답답하고, 더위까지 한몫 하니 힘들고.

그런 날들을 보내다가 비가 오니 반갑긴 하다.

그런데, 너무 몰아서 과하게 오니 이게 또 피해로 이어지니 그것도 문제네.


비가 적당히 내려서 우산을 받고 나갔다.

꼭 오늘이 아니어도 괜찮을 일이지만, 그래도 마음 먹을 때 가야지 하면서 나갔는데,

버스를 타고 이동 중에 갑자기 비가 엄청 쏟아졌고,

목적지에서 내려야 하니까 내렸을 뿐인데 비는 더 쏟아졌고,

그 와중에 보니 길가에 사람이 정말 한 명도 없는데 천둥 번개가 번쩍거려서 더 무서웠고,

어디 비를 피해 들어갈 만한 데도 없어서 이러다 번개 맞고 죽는 건가 싶어서 또 무서웠다.

그렇게 목적지에 도착하고 보니 팔다리가 다 젖었고(혹시나 해서 반바지에 슬리퍼 신고 가서 다행),

보이는 곳만 닦아내고 다시 에어컨 바람에 뽀송뽀송해졌지만,

다시 집으로 돌아갈 일이 걱정이더라.

그래도 집에 무사히 도착하긴 했다. 오늘 밤에는 에어컨이나 선풍기 없이도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여전히 책을 거의 못 읽고 있지만, 이기호 작가의 신작이 나왔다는 알림에 반가워서 구매.











소설 보다 시리즈 올해의 출간 도서 표지가 너무 예뻐서 얘들도 구매.











클레어 키건의 <너무 늦은 시간>은 읽긴 읽었는데, 음,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덮음.

세 번째 이야기 <남극>의 결말이 충격적.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람돌이 2025-07-17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가 정말 겁나게 내리는군요. 제가 사는 남쪽은 아직입니다. 비가 온다온다 하면서 계속 부슬거려요. 너무 인와서 여긴 걱정이고... 집까지 무사히 도착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이기호작가 좋아하는데 신작 소식 저도 반가웠어요

구단씨 2025-07-20 22:50   좋아요 0 | URL
여기도 다른 지역에 비하면 비가 많이 오지는 않았네요.
하지만 국지성 폭우가 위협적이었어요.
오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해가 뜨겁네요.
올 여름 참 힘들어요...
 
나에게 없는 것 하영 연대기 3
서미애 지음 / 엘릭시르 / 202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하영 연대기의 마지막 작품이 출간되었다. 눈앞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는 것을 보고서도 아무 감정이 없는 것처럼 보였던 열한 살 하영의 표정이 섬뜩했는데(잘 자요, 엄마), 그 아이는 자라서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해서 많은 독자의 요청에 답하듯 그 이후 하영의 청소년기를 이어서 보여줬다(모든 비밀에는 이름이 있다). 그래서? 미성년자였던 그 아이의 심성은 거기서 어떻게 달라졌을까 궁금했다. 언제까지나 보호자의 사인이 필요한 미성년으로 살아갈 수는 없을 테니까. 성인이 된 하영은 앞선 출간작에서 확인했듯이 악이 가득한 인간으로 보였다가도, 선한 인간으로 거듭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게 하기도 했다. 악의 근원이 하영의 아버지일까, 아니면 자라면서 익숙해진 습관 같은 것일까.


성인이 된 하영은 미국으로 떠난다. 하영이라는 이름도 버리고, 부모의 경제적 지원도 받지 않았다. 그런 현실이 뉴욕 생활을 더 힘들게 했다. 카페의 아르바이트만으로는 뉴욕의 높은 물가와 월세를 감당하는 게 어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 한국의 유명한 아트센터 대표로부터 제안받는다. 자기 딸 세나와 친구가 되라고, 자기에게 세나의 일상을 알려주면 된다고. 말로는 간단해 보이지만 이게 가능할까 고민할 사이도 없었다. 돈이 필요했다. 하영에게 관심을 두고 먼저 카페로 찾아오는 세나와 친해지는 건 어렵지 않았다. 돈이 생기니 일상이 여유로워진 하영도 이 일이 나쁘지 않았다. 다만, 궁금했다. 세나의 엄마는 왜 감시하듯 딸을 지켜보는 것인지, 세나의 몸에 있는 흔적은 어떤 이유로 생긴 것인지, 이 관계가 언제까지 이렇게 지속될 수 있는지.


세나가 친구라고 카페에 데리고 온 아이들을 본 그날, 세나의 친구가 하영에게 무례하게 굴었고, 세나는 응징하듯 그 친구의 애인을 지하철에 떠밀어버렸다. 그 장면을 하영이 목격했다. 하영은 다시 떠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항상 자기 주변에 떠도는 죽음의 냄새, 죽음을 도구처럼 휘두르는 사람들의 체취를 다시 느끼기 시작한다. 어쩌면 세나는 자기와 너무 닮았다고 생각했다. 하영은 수시로 자기 귓가에 속삭이는 죽음의 목소리를 떨쳐내려고 애썼지만, 그것마저도 쉽지 않다. 그래서 떠났다. 조용히 살아가면서, 자기에게 있는 줄도 몰랐던 그림의 재능을 찾아내고 화가로 이름을 떨치게 된다. 운이 좋았는지 첫 전시회를 크게 하게 되었고, 거기에서 세나를 다시 만난다. 그리고 그날, 또 한 번 화재가 일어나고 하영은 또 한 번의 죽음을 목격한다. 이제 정말 떠날 때가 되었다.


여전히 냉혹한 모습으로 죽음을 일으키는 주인공의 자리에 있을 거로 생각했다. 내가 생각한 하영은 선함이 있으면서도 언제나 악함이 먼저 그 힘을 발휘하곤 한다고 여겼으니까 말이다. 그동안 많은 죽음의 한가운데 있던 하영을 생각하면, 여전히 드러나지 않은 비밀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이런 예감이 틀린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도 어떤 기대가 사라지지 않는다. 악의 힘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찾게 만드니까. 하영이 세나를 보면서 마치 거울을 보는 느낌을 받았을 때, 비슷하게 이유를 찾게 된다. 하영에게 죽음을 행하게 했던 아버지, 세나를 조종하듯 감시하며 기대에 부응하게 하는 세나의 엄마. ‘너를 위해서라는 꼬리표를 달고, 엄마니까 믿고 엄마니까 의심하지 않게 하면서 따르게 하는, 주문 같은 말에 빠지게 되는 거다. 자기가 원하는 게 뭔지 고민할 사이도 없이 엄마가 갖고 싶어?’라고 묻는 순간 세나는 자기가 그걸 원한다고 믿었다. 아이는 그렇게 자란다.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엄마의 간절함에 부응하듯, 엄마가 만드는 완벽한 인형으로.


태어나는 순간 탯줄을 끊었음에도 여전히 아이가 자기 품에 있어야 한다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라야 한다고 믿는 부모들이 너무 많다. (328페이지)


앞서 출간된 두 작품과 달리 이번 작품에서는 다양한 모녀 관계가 등장한다. 엄마에게 느끼는 죄책감, 딸에게 느끼는 미안함 같은 마음이 선경이 의뢰받은 상담 과정에서 들려온다. 이 부분 읽으면서 가슴이 답답해졌다. 부모와 자식이 단순한 관계가 아니어서,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답을 찾는 것도 간단하지 않았던 시간이 떠올랐다. 마음의 상처가 말 한마디로 치유될 수 없듯이, 이미 상처가 아물었다고 해도 그 자리에 흉터가 그대로 남아 있듯이, 우리는 가족으로 살아가면서 온전히 치유될 수 없는 관계를 이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결국 이 작품은, 이 시리즈는 부모와 자식이라는 관계,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휘두르는 폭력의 실체를 제대로 보지 못해서 일어나는 일들, 그 과정에서 아이가 어떤 인간으로 자라는지 보여주는 게 아닐까. 마냥 평범하고 다정한 부모를 만나지 못한 하영은, 또 다른 아이들은 어떻게 상처받으며 자라고 있는지, 어떻게 그 상처를 회복하고 부모의 폭력을 끊어내면서 혼자 서는지 보여줬다. 살아가는 매 순간 이렇게 부딪히고 상처받고 또 싸워가면서 혼자 서는 법을 배우는 게, 이렇게 어른이 되어가는 건가 싶기도 하다.


2010년 처음 독자 앞에 나타난 하영. 그 아이가 성장하는 과정이 궁금해서 계속 지켜보게 했던 작가는, ‘하영이는 이렇게 자랐는데, 어때?’라고 묻는 것처럼 이렇게 어른이 된 하영을 또 독자 앞에 등장시켜 지켜보게 했다. 글쎄, 결말을 보니 하영은 잘 자란 건가 싶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한 마디로 결론을 낼 수 없었다. 어쩌면 살아가는 방법을 배운 것 같기도 하고. 작가의 말처럼, 우리 삶은 늘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렇기에 살아가면서 누구를 만나느냐, 내 주변에 어떤 사람들이 있느냐에 따라 그 삶은 변하기 마련이라고. 어린 시절 부모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건 당연하고, 성장하면서 가정과 학교가 삶에 영향을 미치는 존재였다면, 성인이 된 우리는 다양한 경험과 인연으로 또 다른 삶을 만들 수 있다는 건 아닐까? 소설 속 결말의 하영의 모습이 이럴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서미애 #나에게없는것 #잘자요엄마 #모든비밀에는이름이있다 #엘릭시르

#하영연대기 #하영시리즈 ##책추천 #신간추천 #한국소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진짜를 만들 수가 없어서요
강진아 지음 / 한끼 / 202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열일곱의 성차경. 공부는 잘하는 편이고 특히 미술 실력이 뛰어나다. 딱히 좋은 관계의 친구도 없고 할머니와 둘이 사는, 어려운 형편의 아이다. 어느 날, 늘 혼자였던 차경에게 같은 반 도희가 친한 척 접근한다. 그렇게 가까워진 둘은 함께 위조지폐를 만들어 사용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함께 위조지폐를 사용하던 또 다른 친구 혜미가 죽게 된다. 놀랄 사이도 없이 시간은 빠르게 흐른다. 차경은 일상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하지만, 혜미의 죽음이 꿈에서 계속 나올 정도로 불안한 날들이었다. 정작 위조지폐를 만들자고 먼저 말을 꺼낸 도희는 유학을 가버린다.


아니, 원래 도희가 차경에게 관심이 있었는데 주변에 관심이 없던 차경이 도희의 호감을 몰랐던 걸까? 처음부터 의심스러웠다. 갑자기 나타난 도희가 차경에게 친근한 척 구는 게, 이상하게 보기 싫더라. 뭔가 의도를 갖고 접근하는 것만 같은 불길함이 번졌다. 사실 우리 현실에서 누군가 가까이 다가오면 서로 친해질 기회라고 생각하고 좋아해야 하는데, 너무 나쁜 것만 먼저 봐서 그런지 오히려 의심의 눈초리로 보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도희를 보자마자 나는 의심을 거두지 못했다. 서로 형편이 너무 다른 두 아이가 어떤 접점으로 친해질 수 있을까 잠시 기대하기도 했지만, 역시나...


위조지폐를 사용하다가 한 사람은 죽고, 한 사람은 도망치듯 떠났다. 남은 차경이 얼마나 불안한 마음으로 살아왔을지 안 봐도 알 것 같다. 그렇다고 살아가는 일을 멈출 수는 없어서 차경은 자기 방식대로 열심히 살았다. 대학 졸업반이 되고 유명 기업에 입사 지원서를 냈다. 차근차근, 그 문을 열고 들어가는 길이 점점 짧아지고 있던 그때, 이제 인생 좀 피려나 싶어서 두근거렸던 그때, 도희가 나타났다.


왜 사는 일은 이렇게 팍팍할까. 그래도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기회를 좀 주면 안 되나? 못된 것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잘 살아가게 하면서, 왜 힘들다는 사람에게 더 힘든 상황만 던져주는 걸까. 그때의 기억은 차경의 머릿속에서 잊히지도 않아서 하루도 편하게 잠든 날이 없었는데, 도희는 다시 나타나서 또 다른 위조를 요구한다. 이번에도 도희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하나? 안 하면?


사람이 벼랑 끝으로 몰리면 선택은 둘 중의 하나다. 벼랑 끝에서 뛰어내리거나, 눈앞의 상대를 벼랑으로 밀어서 떨어뜨리거나. 매 순간 안간힘을 써도 살아가는 일이 버겁던 차경은 완전히 변한다. 살아남기 위해 이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자기만의 방식으로 해답을 찾는다. 더는 머뭇거리면서 끌려다닐 수 없다.


생각해 보니 차경은 살아가는 모든 순간 악몽을 떨치기 위해 발버둥 친 건 아닐까 싶다. 고등학생 때도 미술로 대학을 가기 위해 손끝의 모든 감각을 키웠다. 결국은 대학 등록금이 문제가 되었지만, 어떤 식으로든 이 형편을 끝내기 위해서 차경의 재능은 훨훨 날아야 했다. 대학 지도 교수는 엉망인 사람이었지만, 차경은 추천서를 받기 위해서 대놓고 요구 사항을 말하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그리고 꿈에 그리던 회사에 들어가기 위해, 완성된 작품을 진열하기만 하면 되는 그 순간을 지켜내야 했다. 거기까지 가는데 저질렀던 범죄는 물론 해서는 안 될 짓이었지만, 진짜 인생을 만들기 위해 달리던 그녀가 버티는 방식이었다고 이해해주면 안 될까? 진짜를 가질 수가 없어서, 진짜를 만들 수가 없어서 가짜라도 만들어야만 했던 상황을 들여다보면, 누구라도 한 번쯤은 이해해주고 싶을 거라고 말하고 싶은데, 너무 오지랖인가 싶기도 하다.


처음 위조지폐를 만들고 그것을 사용하는 순간에, 들킬지 안 들킬지 지켜보는 재미가 상당했다. 들키면 망한다. 아니, 인생 끝장이다. 안 들키고 넘어갈 수 있다면 차경의 실력을 검증하는 순간이 될 테고. 한편으로는 이 아이들이 이 순간을 들켜야 하는 게 맞는 건가 싶었다. 자신들이 저지른 일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그 죄의 대가를 얼마나 크게 치러야 하는지 한 번쯤은 겪어봐야 세상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다고 알려주어야 하는데, , 어렵다. 평범하게 살아가는 일이 이렇게 어려운 일이 되어버린 세상을 원망하고 싶기도 하더라. 그래서 더 갸우뚱하면서 읽게 된다. 이 소설이 그냥 드라마 같은 느낌인지, 한 편의 스릴러인지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어서.


책의 앞표지와 뒤표지의 두 사람은 같은 사람인데, 묘하게 다르다. 고등학생 성차경과 회사의 입사 직전의 성차경의 표정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 같은 사람이지만, 표정에 나타난 분위기와 단단함이 다르다. 진짜를 찾아가는 그 시간이 만들어준, 가짜를 덮어버릴 수 있는 진짜 같은 표정이, 지금 성차경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 되었다. 생존의 문제만 남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보여주는, 그 생존을 위해 욕망이 깃든 사람의 표정으로 바뀌는 과정을 지켜보게 하는 소설이다.


#진짜를만들수가없어서요 #강진아 #한끼 #한국소설 #소설 ##책추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