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완전히 저물기 전 뉘엿뉘엿 어두워지는 때 있죠. 노을빛이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사람들이 하나둘 집으로 돌아갈 때. 여기선 그 시간을 북새라고 그래요. 나 시집왔을 때 어머님이 알려준 말인데 그때는 옛날 말이 그렇게 듣기 싫더니 요즘엔 정겨워서 좋아요. 북새에 강변 하늘을 바라보면요, 누가 저렇게 세상을 아름답게 칠해놨을까 싶어요.”(뜻밖의 우정, 69페이지)
우리가 걷는 모든 시간이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 갑작스러운 사고나 급성으로 찾아온 질병이 아니라면, 우리는 모두 노년의 시간을 거치며 죽음과 가까워진다.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그 사이에 무슨 일을 만나는 게 아니면 시간의 흐름에 맡겨 놓은 것처럼 죽음의 문을 향해 걷고 있는 거다. 오랜 기간 아버지의 투병이 아니었다면, 매달 출석 체크하듯 병원을 찾는 엄마의 상태가 아니었다면, 나는 노년을 겪는 사람이나 죽음과 가까운 상황에 관해 잘 몰랐을 거다. 지금도 잘 아는 건 아니지만, 그들이 경험했거나 지금도 경험하는 그 순간을 그래도 조금을 알 것 같아서 마음이 서늘하다. 별로 좋은 경험은 아니었기에 말이다. 몸이 아프고 마음은 쓸쓸해지고, 자식들은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주변의 친구들이 하나둘씩 세상과 이별하는 것을 지켜보는 게 어떻게 유쾌하기만 할 텐가. 딱히 할 일이 없어서 TV만이 유일한 친구가 되는 일, 그게 노년의 시간이라면 나도 그 시간을 만나고 싶지는 않을 듯하다. 그리고 내가 아는 많은 어르신이 그렇게 지내고 있다. 나의 노년도 그런 모습일까?
『뜻밖의 우정』을 쓴 김달님 작가는 내가 알듯 말듯 한 노년의 모습을 누구보다 많이 봐온 사람으로, 그들을 보는 시선이 다를 수도 있겠다. 태어나서 줄곧 할머니 할아버지 손에서 자라면서 가장 이해하고 싶은 대상이었다는 것은, 작가의 전작을 읽으면서 어느 정도 느끼기는 했다. 그런 느낌을 이런 방식으로 시도할 것을 알지 못했을 뿐. 작가는 각자의 방식으로 노년을 지내는 어르신들을 만났다. 그 시기를 사는 모습이 다들 비슷할 거로 여겼는데, 비슷하면서도 달라서 읽으면서 많이 놀랐다. 일흔여섯의 정열 어르신은 래퍼 연습생이 된 것으로 마치 한을 풀어낸 것처럼 좋아했다. 순자 어르신은 중년에 시작해서 예순여섯 살에 검도 6단의 고수가 되었다. 영화와 책으로 일상을 꽉 채우는 승기 어르신은 내가 닮고 싶은 모습이기도 하다. 홍자와 옥순 어르신은 같이 노인 돌봄 일하면서 마치 여고생 단짝이 된 것 같았다. 트로트 아이돌의 활발한 활동을 지켜보면서 삶의 활력을 찾은 선자 어르신의 바람이 계속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작가가 만난 많은 노년의 삶이 내가 아는 모습에서 조금은 벗어나 있었다. 아니, ‘모습’이 아니라 그 ‘마음’을 듣는 게 낯설었다고 해야겠다. 아마 누구나 갖는 일상을 바라보는 마음이었을 텐데, 노인이라고 그 마음이 다를 거라는 선입견을 품고 있었나 보다. 생각보다 유쾌하게, 축 처지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이 즐거웠다. 우리 대부분, 각자의 일상을 그렇게 살아가고자 애쓰고 있지 않나? 어쩔 수 없이 현실을 받아들이며 지내기도 하지만, 누구나 가슴에 품고 있는 오래된 바람 하나 이뤄가면서 만족하는 삶. 시대가 그래서, 하루하루 먹고사는 게 우선이어서, 바쁘게 살다 보니 잠시 잊힌 꿈이 너무 오래 잊히기도 했다. MBTI ‘슈퍼 I’인 내가 그들의 일상을 보는 마음이 좀 떨리기도 했다. 노래를 쫓아 아이돌을 따라다닐 수 있지도 않았고, 운동하겠다고 체육관을 찾아가는 것도 선뜻 떠올릴 수 없는 일이다. 랩은커녕 문화센터 노래 교실에 가볼 생각도 못 하는 심장을 가졌고, 좋아하는 책도 무슨 하루 루틴처럼 읽어내지 못하는 게으름은 덤으로 갖고 있으니, 나는 그들이 보여준 일상의 방식과 다른 방향의 루틴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에게 닮고 싶은 마음이 있다. 노년의 시간을 긍정적으로, 안 되는 것만 생각할 게 아니라 하고 싶은 것을 떠올리는 시간이 많아야겠다는 거다.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힘들겠다는 지레짐작으로 포기하는 일보다, ‘한번 해볼까’하는 마음으로, 비록 그게 무모한 시도라고 할지라도 해봤으니 됐다는 시원한 기분을 느껴보는 것.
엄마가 한 달에 한 번씩 규칙적으로 가는 내과 병원이 있다. 나도 항상 같이 가서 선생님을 만나곤 하는데, 환자 대부분이 노인들이라서 선생님이 괜히 우스갯소리로 대화를 시작할 때도 많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 다른 아픈 데는 없는지 물으면서 다른 이상이 없으면 평소와 같은 약을 처방해주신다. 그러면서 인사를 하신다. “어머님, 다음 달에 꼭 오세요. 또 만나요.” 그러자 엄마가 흥칫뿡 하면서 대답하신다. 병원에 오는 게 뭐가 좋다고, 또 만나자고 하냐고. 그러니까 또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매달 꾸준히 오는 어르신들이 있는데, 다음 달 안 오고 또 그다음 달 안 오고 그래서 알아보면, 돌아가셨다고. 어떤 면에서 어르신들이 꾸준히 다니는 병원에 매달 정해진 약속처럼 방문하는 일은, 그 어르신의 생사를 확인하는 또 다른 방식이기도 하다. 작가가 ‘독거노인 안부 묻기’ 봉사활동을 하면서 부딪힌 그 순간, 어떤 어르신 이름에 두 줄이 그어진 채로 사망하셨다는 표시에 당혹스러운, 더는 이 어르신의 안부를 확인하지 않아도 된다는 결론이 아니라 일주일 사이에 세상과 이별했다는 걸 받아들여야 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닥칠 수 있는 일인 거다. 그래서 이 마음을 더 알고 싶어진다. 작가가 권하는 ‘독거노인 안부 묻기’ 봉사활동 참여에서 보고 알고 느끼게 되는 게 더 많아질 거라는 건 확실하다. 내가 향해 가는 그 시간, 지금 그 시간을 살아가는 이에게 관심 두며 마음을 나누는 일이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지 말이다.
“작가님은 아직 모를 거예요. 아무도 나를 궁금해하지 않고,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 않는 하루가 어떤 건지. 그분들에겐 어쩌면 작가님과 나누는 통화가 하루의 유일한 대화일지도 몰라요. 오늘 아침엔 무얼 먹었고, 지금은 무얼 하는지, 오늘 하루 기분은 어떤지, 그런 사소한 이야기들을 누구와 나눌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무슨 말이든 즐겁게 나눠주세요.” (뜻밖의 우정, 198페이지)
어쩔 수 없는 순간이 늘어나는 게 노년의 시간이다. 중년을 살아가는 나도 많이 느끼는데, 나보다 더 나이 든 시간을 살아가는 이들이 겪는 어쩔 수 없는 순간은 더 많겠지. 엄마가 소화가 불편해서 내과에서 여러 가지 검사를 해도 이상할 게 없었는데, 결과는 나이가 들어서 위장도 늙었다는 말이었다. 눈이 침침해서 찾은 안과에서도 별다른 이상이 없는데 나이가 들어서 그렇다는 말에 절망이 앞서곤 했다. 엄마 때문이 아니더라도, 어느 순간부터 나보다 연장자들과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전에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그들의 행동이 이제는 어느 정도 이유를 알 것 같다. 내가 노년을 향해 가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나의 노년을 생각할 엄두가 나지 않아서다. 버스 안에서 큰 소리로 통화하고, 처음 보는 사람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걸고, 집안에서도 자기 주변을 정리하지 않고 모든 걸 늘어놓은 채로 살아가도 이상하지 않게 바라볼 수 있는 마음. 나도 그런 모습으로 늙어가지 않을까 싶은 어색함도 있지만, 지금 가장 가까이서 보는 엄마의 현재를 생각하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을 듯하다.
이미 작가의 전작을 읽어서 그런지, 작가가 노년을 주제로 이분들을 만나고 이야기하는 게 낯설지는 않다. 오히려 전작보다 더 피부로 와닿는 노년의 시간을 이야기해주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내가 노년의 시간에 더 가까워지고 있어서 그런 걸까. 어쨌든 확실한 건, 우리가 그 시간을 만나지 않고 생의 끝에 닿을 수는 없다는 거다. 그러니 누군가가 앞서 걸었던 그 시간, 곧 우리가 걸어갈 그 시간을 모른 채로 살아가지는 말자는 것.
사실 이 책 때문만은 아니라, 요즘 특히 노년과 죽음을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진 이유가 있긴 하다. 이제 팔순을 넘긴 엄마가 더 노쇠해지는 게 더 눈에 보이기도 하고, 그만큼 병원에서는 어떤 치료를 적극적으로 할 수 없는 상황이기도 하다. 내 몸이 불편한데 그 불편함을 해소할 수 없다는 게 답답한 건 나뿐만 아니라 환자 본인이 가장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들더라. 늙어간다는 게 이런 걸 그냥 받아들이라는 말 같아서 괜히 섭섭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거기에, 오십 대 중반의 나이에 갑작스러운 병으로 삶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가까운 이를 보고 있자니, 죽음이 항상 우리 곁에 있었다는 걸 너무 잊고 살았나 싶기도 하다. 애써 내 몸의 늙어감도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던 게, 이제는 더 부정할 수 없기도 했다. 몇 년 전에 노안을 진단받았다. 그래서인지 책을 읽는 게 예전처럼 마냥 편하지 않다. 책 읽으면서 늙어가는 할머니로 살아가고 싶었는데, 그게 불가능한 일이 되면 어쩌나 지레 걱정부터 앞선다. 좋은 생각만 할 수 없던 요즘이었는데, 이 책을 읽고 보니, 또 요즘에 같이 읽고 있는 다른 책들을 떠올려 보니, 다른 이들이 전하는 노년의 시간, 상황, 마음을 들으면서 사는 일이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아니, 오히려 더 들으면서 살아가야 하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부정할 수 없게, 언젠가 마주할 내 모습을 미리 보는 건지도 모르니까. 그러니 안 되는 것보다 하고 싶은 것을 떠올리며 행복하게, 좋아하는 것을 해보는 시간 준비하며 즐겁게 하루를 보내고 싶다. 그렇게 쌓인 하루가 나의 노년을 채울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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