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햇살이 눈부셔서 얼굴을 찡그리고 다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모르는 사이에 계절이 바뀌어 있었다. 그것도 여름 다음의 계절이 아닌, 곧 시작될 겨울을 예고하는 날씨에 마음이 더 추워진 듯하다. 어제 모처럼 생긴 여유에 아파트 놀이터에 잠깐 앉아 있었는데, 바쁘고 피곤하다고 노래하면서 살다 보니 못 봤던 장면들이 눈에 들어왔다. 놀이터 한쪽에 자리한 은행나무 잎이 진한 노랑으로 물들었고, 단풍잎은 금방이라도 타버릴 듯한 붉은색이 되어 있었다. 그러네, 가을이었네. 몰랐다. 조금 더 덥고, 조금 더 서늘하고, 그저 아침에 나갈 때 점퍼를 챙길까 말까 하는 생각만 했는데, 계절이 이렇게 흐르고 있었다.
다 지나간다, 기운 내라, 다 잘 될 거다. 너무 잘 아는 뻔한 말들이 귀에 들어올 때가 있다. 이런 말들이 눈앞의 현실을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한 번쯤 듣고 지나가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 머뭇거리고 싶을 때 말이다. 요즘 나의 일상이 그런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래서일까. 평소 같으면 손이 가지 않았을 이 책들에 오늘은 잠깐 마음을 내려놔 볼 수 있었던 건, 내일 다시 시작될 한 주의 마음이 정돈되기를 바라는 간절함에서다. 오랜만에 찾은 도서관에서 신청한 책을 받아들고 나오다가 이상하게 눈길이 갔던 자리에, 이용자들이 읽고 반납한 도서를 놓아두는 자리에 쭉 늘어선 책들이 있었다. 한 사람이 빌렸을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읽고 반납한 책들이 이렇게 모여 있는 걸까. 상처받고 힘든 사람이 이렇게 많은 건가, 그것도 아니면 많은 사람이 지금 위로의 한 마디가 필요했던 걸까.
“이왕이면 둥글게 살아가는 것이 좋다. 무슨 일이 생기든 조금 더 배려하며, 그저 그러려니 하고 살아가는 것. 근심과 걱정이 휘몰아칠 땐, 결국 시간이 다 해결해 줄 거라는 대담한 마음가짐을 갖는 것. 책임감의 무게를 애써 버틸 줄 아는 것. 그렇게 성숙하게 살아가는 것.” (남에게 좋은 사람보다 나에게 좋은 사람, 227페이지)
그래서 병이 났다. 그저 그러려니 하지 못해서, 둥글게 살아가지 못해서. 시간이 다 해결해줄 거라는 믿음을 가지 못해서. 어쩔 수 없다는 말을 참 싫어하는데, 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순간은 너무 자주 찾아왔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선뜻 그러지 못해서 마음이 불안하고 조급했다. 그러니까 별것 아닌 이런 일들을 머릿속에 담아두지 않아야 하는데 성격이 그러지 못해서. 지난달에는 예정에 없던 지출이 있었다. 우리 집 한 달 소득 이상의 금액이었다. 어쩔 수 없는 지출이었고, 그만큼 오래 고민하고 결정한 일이었지만, 막상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벌어지는 일은 알면서도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다. 한번은 소비할 수 있는 지출이었으니 그런 날도 있는 거지 하면 될 것을, 필요한 지출이었으니 살아가는 날들에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지나가면 될 것을, 머릿속은 갑작스럽게 구멍 난 금액을 채워 넣어야 하는 계획으로 다시 분주해졌다. 그래봤자 뾰족한 다른 수가 없는데도 말이다. ㅎㅎ 별 수 있나. 그저 살던 대로 열심히 살면서, 평소의 소비 습관대로 또 살아가면서, 조금 더 아껴가면서 살아가는 수밖에. 그러면 되는 일인데, 왜 속에서는 안달복달 불안함만 남은 것인지. 이런 마음을 다독여줄 어떤 문장이 박혔으면 싶어서 페이지를 또 한 장 넘겨본다. 그저 그러려니 하고, 시간이 지나가면서 좀 나아질 테니 하면서.
“일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고 너무 많은 것을 곁에 두려고 하면 스스로 견디기 힘들어진다. 가끔은 내려놓기도 하고, 또 떠나보내기도 하면서 무겁게 걸어가지 않았으면 싶다. 짊어져야 하는 것들이 가벼울수록 멀리 갈 수 있으니까. 떠나보내고 내려놓아도 괜찮다. 모든 걸 짊어지고 걸어가지 않아도 된다. 버리고 놓아주고 잊으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신선한 기분. 뭐든 될 것만 같다.” (내가 죽으면 장례식에 누가 와줄까. 159페이지)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기대와 실망이 뱅글뱅글 돌며 함께 추는 왈츠와 닮았다. 기대의 동작이 크면 실망의 동작도 커지고 기대의 스텝이 작으면 실망의 스텝도 작다. 큰 실망을 피하기 위해 조금만 기대하는 것이 안전하겠지만 과연 그 춤이 보기에도 좋을까?” (단 한 번의 삶, 61페이지)
언제부턴가 누굴 옆에 두려고 애써 노력하지 않았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상대에게 닿지 않을 때도 많았고, 사람의 만남과 헤어짐을 자연스럽게 여겼다. 시절 인연이라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한때 서로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헤아리는 관계였다가도 여러 가지 이유로 끝난 인연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이제는 너무 잘 안다. 그래서 사람 관계에 어느 정도 느슨해졌다고, 언제 끊어질지 모를 마음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또 그게 말처럼 쉽지 않아서 마음 한구석이 편하지 않다.
친하게 지내는 지인과 일주일에 2~3일 같이 일하고 있다. 겪어 보니 이 사람의 성격을 어느 정도 알고 있어서 많은 순간 그러려니 했다. 문제는 점점 그 성격을 감당하기 어려운 순간이 자주 찾아온다는 거다.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으니까 이해하고 넘어가려고 했지만, 나란 인간의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어서 어디까지 지켜봐야 하는 건가 싶어서 고민이 많아진다. 그 사람과 나, 둘 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이 일터에서 보이는 태도 때문에 나는 물론이고 주변이 불편해지는 걸 몇 번 보고 나니, 이 문제에 대해 언젠가는 대화해 보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말이 쉽게 나오지 않더라. 분명 유쾌하게 받아들일 문제는 아닐 테고, 내가 이 말을 꺼내는 순간에 이 사람을 다시 안 보고 살 수도 있겠다는 다짐이 아직 서지 못했다. 이 사람과의 인연에 연연하지 않으려고 생각하면서도, 그래도 나쁜 마지막은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서다. 생각해보니 이런 바람도 너무 과한 욕심인가 싶기도 하다. 그래도, 아직 어떤 마음도 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조금은 내려놓고 기다리는 일이 아닐까 싶다. 너무 많은 것을 곁에 두려고 애쓰지 말고, 내려놓기도 떠나보내기도 하면서 가볍게,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순간을 찾는 것이 먼저가 아닐까 하고.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설명하기 어려운 기대감이 너무 컸나 싶기도 하고. 역시, 살면서 가장 어려운 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였던가 보다. 아직 까지는 그렇더라.
“무조건 해결해야 한다고 애쓸수록 마음의 짐은 오히려 더 무거워진다. 피하는 것이 무조건 비겁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시간이 지나야 가벼워지는 짐도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몰아붙이지 않고 때로는 느슨하게 자신을 다루는 것. 그것도 충분히 용기 있는 선택이다.” (어른의 품위, 87페이지)
“지쳐서 나가떨어지기 전에 조금 일찍 나를 쉬게 하는 일. 쉬는 것도 감각이다. 그 감각을 무시한 채 앞으로만 나아가면 나만 흐려진다. 누구에게 강요받지 않고 내 선택으로 결정해서 멈췄다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일. 내가 생각하는 휴식의 방법이다.” (어른의 품위, 92페이지)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내는 사람은 없다고 하지만, 많은 사람이 자기 앞에 주어진 일을 완벽하게 마무리하고 싶어 하지 않을까. 아주 사소한 것도 잘 정리하고 싶은 게 인간의 마음이라고 여겼다. 나 역시 마찬가지고. 최고의 것만 향해 가고, 좋은 것만 갖고 싶은 노력으로 나아가는 게 아니라, 정말 사소한 순간 하나도 잘 끝내고 싶었다. 다 잘하고 싶은 마음, 그게 얼마나 사람 속을 태우는지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았다.
일주일에 2~3일 일하면 나머지 시간은 정말 여유로울 것 같았는데, 아니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엄마를 살피러 다녀오면 하루가 지나가고, 가끔 한 달에 서너 번쯤 엄마와 병원 투어를 하면 또 하루가 사라진다. 또 어떤 날은 밀린 집안일을 하다 보면 어느새 저녁이다. 그럴 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다. 아이를 키우면서 일하는 엄마들은 하루가 얼마나 빨리 지나갈까 하고 말이다. 이번 달에는 또 예정에 없던 병원 일정이 늘어나 있었고, 시어머니의 병원 일정까지 챙기게 되면서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아, 내일 하루는 좀 늦잠을 자고 밀린 은행 일을 보고, 시간이 남으면 혼자 커피라도 마셔야겠다’라는 생각으로 잠이 든 게 어젯밤에 세운 계획이었는데, 언제나 계획대로 되는 날은 없었던 것 같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시간을 빠듯하게 사는 건 아닌데, 왜 항상 시간이 없다는 말이 입에 붙어있는 건지 모르겠다. 정말 고단했다. 몸이 먼저 알아채는 고단함은 잠잠했던 대상포진으로 표시를 냈고, 마음마저 물렁물렁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출근도 못 하고 종일 호되게 앓았다.
내가 해야 한다고 여기던 일들이 사실은 내가 아니어도 되었던 것을, 내가 없어도 어떻게든 그 순간은 흘러갔을 것을, 왜 내가 하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마음을 볶아댔는지. 안 된다고, 싫다고, 핑계든 거절의 말이든 하면서 피해도 괜찮았던 것을 왜 못하고 그랬는지. 그래도 조금은 시간 여유가 되는 사람이 해야 한다는 강박 같은 마음이 있었나 보다. 마음의 짐이 무거워지는 것도 모른 채로, 지쳐서 나가떨어지는 순간이 올 것처럼 위태로웠던 것도 무시한 채로 말이다.
“우리는 다 알면서 못 하곤 한다. 하다 보면 하게 되고, 일어서다 보면 걷게 되고, 잘하기 전까지 부족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다 안다. 사는 동안, 살아 있으면, 살아가다 보면 또 살아지게 된다는 것을. 아는 대로 배운 대로 해 오던 대로 이겨 내면 된다는 것을. 결국 잘 이겨 내리란 것을 안다.” (행복할 거야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12페이지)
주말이라 도서관은 5시에 폐관한다. 5시가 거의 다 되어가는 시간인데도, 자료실에 놓은 의자에 앉은 많은 사람이 자기만의 시간에 빠져있다. 책을 읽고 있는 사람들의 집중력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무슨 책을 읽고 있을까. 저마다의 목적에 맞게 선택한 책의 문장에 빠져있는 모습은 편안해 보였다. 그들 틈에서 내가 오늘 이 책을 만났던 것은 의외의 인연이기도 하다. 평소에 자주 만나던 책들이 아니었기에, 그 뻔한 말들이 싫어서 화가 날 때도 있었기에. 잠깐이었지만, 그 문장들에 눈길이 머물렀던 순간은 좋았다. 거추장스러운 마음 한 조각 떼어내서 한쪽에 던져둘 수도 있었고, 변덕이 죽 끓듯 이랬다저랬다 하는 마음을 한 번 더 살필 수도 있었다. 이 순간이 지나고 금방 또다시 잊을지도 모르지만, 마음이 고달파질 때마다 한 번씩 생각날 것 같기는 하다. 살짝 등을 한번 두드려주는 것처럼, 잊었던 다짐을 떠올리게 하는 것처럼.
나를 먼저 돌보는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 나이를 먹고, 참 새삼스럽다. 그걸 몰라서 고민하고 있다니. 아니, 고민보다는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하는 게 더 맞는 것 같다. 몰라서가 아니라 알면서도 못 했던 것, 상대방을 먼저 살피느라 내 마음 그대로 표현하는 데 주저했던 것을 드러내는 일을 이제부터라도 잘해야겠다고. 나를 불편하게 하는 주변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도, 내가 책임지고 감당해야 한다고 여겼던 어른들의 존재도 잠시 잊고, 잠깐이라도 나를 먼저 챙기고 돌보는 일을 해야 할 때라고 말이다.
주말 잘 쉬었으니, 다시 시작되는 내일을 잘 준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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