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여 잘 있거라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86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권진아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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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를 전혀 하지 않았던 과거의 내가 기억하는 소설가의 이름은 헤밍웨이 딱 하나였다. 그만큼 나에게는 머시기한 기억 보정이 들어가 있는 분인데, 정작 독서의 세계를 알고 나서는 영 손이 가지 않는 작가이다. 일단 헤밍웨이는 타 작가들과 달리 활동 초기와 후기 작품의 갭이 막 크지는 않다. 일찍이 그의 인생은 전쟁에게 집어삼킨 바 되었고, 그렇게 전쟁이 낳은 사상들을 문학이라는 배설물로 내보냈다. 따라서 헤밍웨이의 작품은 어쩔 수 없이 시대를 타는 데다 스타일마저 시크하고 간결하여 썩 친해지기 쉬운 편은 아니다. 그렇다고 그가 비주얼은 포기하고 맛으로만 승부하려는 타입도 아니다. 아무튼 여러모로 내게는 연구 대상인 작가임에 틀림없다.


<무기여 잘 있거라>는 은근히 기대했던 작품이었다. 제목이 지닌 분위기가 어떻게 흘러갈 거라는 상상력을 잔뜩 불어넣었단 말이다. 허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고 모든 장면을 뻔하게 설명해서 이만저만 실망한 게 아니었다. 물론 좋은 장면이나 의미심장한 문장도 있었지만 그 비중이 정말 코딱지만 했달까. 내가 생각했던 시나리오는 별거 없었다. 전시 중에 느끼는 주인공의 감정 교차를 보고 싶었다. 전우들의 죽음 가운데 적군과 싸워 이기는 것만을 생각해야 하고, 길어지는 전쟁으로 가족과 연인들의 미래가 사라져가는 뭐 그런 거 있지 않나. 오히려 독자들한테는 이런 내용들이 뻔한 것일 텐데, 헤밍웨이의 뻔함은 있는 그대로를 설명하는 선에서 그친다. 차를 타고 이동한다, 전우들과 식사를 한다, 병원을 들린다와 같은, 정말 메시지랄 것도 없는 업무 일지를 읽는 기분이었다. 대체 이런 작품을 오늘날까지도 떠받드는 이유가 뭘까.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전쟁에 염증을 느낀 주인공의 이야기이다. 이탈리아 군대의 구급차 운전병으로 지원 후 장교가 된 헨리의 국적은 미국이다. 미국인이 어째서 이탈리아 군에 온 건지 다들 의아해하고, 여기에 헨리도 별다른 답변을 내놓지 못했다. 그의 직별 및 계급상 전선에 나설 일은 없었고 의무대와 군 병원 주위를 어슬렁대는 게 다였는데, 툭하면 지겨운 전쟁 운운하는 걸로 보아 군인으로서의 사기는 오래전에 저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 어느 간호사와의 썸 타기로 답답한 군 생활에 조금씩 활력이 붙는 주인공. 뭐 그런 즐거움이라도 있어야지 했는데 얼마 못 가서 적군의 포격으로 다리를 크게 다치면서 병상 생활이 시작된다. 여기까지가 1부이고 헤밍웨이가 겪었던 일들이다. 그래서인지 재미가 쏠쏠했는데 2부부터는 텐션이 점점 떨어지다 끝내 핵노잼이 돼버린다. 후반부에 가면 좀 달라질까 싶었는데 정말 끝까지 기대를 저버렸음. 피츠제럴드가 딱 이런 스타일이라 손절했는데 헤밍웨이도 같은 과란 말이지? 고민 좀 해봐야겠고만.


딱히 이렇다 할 내용이 없어 그만 쓰고 싶지만 계속해 보겠다. 부상 회복 후 복귀한 헨리는 곧바로 전쟁에 투입된다. 부상자들을 나르던 헨리는 적군의 습격을 피하고 피하다가 탈영병들을 제거하는 아군들에게 붙잡힌다. 개죽음 당하기 싫어 진짜 탈영병이 된 그는, 그 길로 애인을 찾아가 사정을 설명한 뒤 함께 도주하기로 한다. 임신 중이었던 그녀는 오직 사랑 하나만 바라보며 그를 따르기로 마음먹는다. 결국 그녀의 숭고한 사랑이 전쟁의 아픔도 이겨낸다는 걸 말하려나 싶었는데 그렇다 하기도 뭐 한 것이, 간호사의 대사가 온통 자길 사랑하느냐는 질문뿐이어서 내가 다 노이로제 걸릴 뻔했단 말씀이야. 그리고 또, 군인이 전쟁을 등지고 떠나려는 것만으로 반전 소설이라 부르는 것도 뭔가 납득이 안돼. 다 떠나서 억지로 분량 채운다는 인상이 강하게 들어서 힘들었다. 헤밍웨이도 나님한테 걸리면 얄짤없습니다, 예.


그럼에도 헤밍웨이는 좀 더 읽어볼 생각이다. 어쨌거나 이분이 가진 허무주의는 과거 나에게도 있었던 것들이라 반갑긴 하거든. 헤밍웨이가 입대하기 전 기자로 활동하지 않았다면 호불호 심한 하드보일드 문체를 쓰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반대로 그 덕분에 작가로 살아갈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고. 여튼 대단한 건 알겠는데 솔직히 맘에 안 듭니다요. 이 F형 인간을 T형 인간으로 만들지 좀 마시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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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12-03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여간 투덜이십니다. 근데 그게 좀 귀엽습니다. ㅋㅋ
하지만 별 두 개는 좀 박하지 않나요? 그래도 노벨문학상 수상잔데.
전 오래 전 노인과 바다 괜찮게 읽었습니다. 이 책 별로라시니 언제 읽을지 모르겠네요. ㅋ

물감 2024-12-03 11:53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 ‘업무일지‘를 재미로 읽을 순 없으니까요...
<노인과 바다>는 저도 아주 좋았습니다! 딱 그 정도로 짧고 굵게 가는 편이 이 분에게는 딱인듯 싶어요. 아무리 살을 다 쳐내고 간결하게 썼대도 길고 지루하게 느껴지니 말이에요 ㅋㅋㅋㅋ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
요시노 겐자부로 지음, 김욱 옮김 / 양철북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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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그렇듯 나 역시 동명의 영화를 보고서 원작에 관심이 생겼다. 알고 보니 제목만 같을 뿐 책 내용은 영화하고 전혀 달랐다. 이 책은 스토리텔링의 철학 에세이라고 보면 되는데, 갓 중학생이 된 아이들에게 쓴 글들이지만 성인들도 가벼이 흘려들을 수 없는 깨달음과 울림을 지녔다. 처음엔 이토록 진지한 제목이어야만 했나 싶었는데, 다 읽고 난 지금은 너 자신을 알라는 정도의 무게감이 느껴진다. 이렇게 묻혀있던 보물이 주목받고 재조명되는 경우가 많아졌으면 한다.


중학생이 된 코페르의 일상과, 외삼촌의 조언이 담긴 노트 기록으로 구성된 이야기들. 작중에 나오는 갖가지 내용과 가르침들을 한뜻으로 묶자면, ‘당연하게 여긴 것들이 실은 당연하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그 점을 캐치할 줄 아는 감각과 사고력 및 그에 따른 선행들도 필요하겠고. 혹자는 그런 게 뭐가 대단하냐고 할 텐데 세상은 어느 것 하나도 당연하게끔 설계된 것이 없다는 얘기다. 순도 100%의 내 힘과 능력만으로 이룬 건 아무것도 없으면서, 사람들은 마치 무에서 유를 만들어낸 창조자라도 된 것처럼 스스로를 과신한다. 다시 말하지만 당연한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볼 법한 대사 중에 우리 집이, 학교가, 국가가, 세상이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냐는 불평불만이 떠오른다. 그 말의 뜻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여기에도 역설이 존재한다. 자신이 누린 일상의 전부가, 제삼자의 수고 덕분에 가능하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특정 대상을 탓하고 헐뜯고 비난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을 좀 더 인간답게 만드는 데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이 책에서는 감사를 느낄 줄 아는 마음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니,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혹 그것이 저자의 의도는 아니었을까 하고.


막상 읽어보면 다 어디서 들어봤던 내용들뿐인데 어째서 색다르게 들리는 걸까. 언제나 그랬듯 진리라 함은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하다는 말이렸다. 옛 선조들과 현인들과 성인군자들이 하는 말에는 낯설고 생소한 표현이 잘 없다. 그런즉 누구나가 진리를 품고는 있으되 온갖 더럽고 추악한 장막에 가리어져 보지 못할 뿐이다. 성경에서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마 7:13)고 하지 않았던가. 그저 내가 편하고 싶어서 나 좋을 대로만 믿고, 그게 옳다 여기는 태도들이 우리 사회를 얼마나 부패시켰는지 생각해 보라. 나는 재앙을 내리고 세상을 갈아엎는 신들의 마음을 알 것도 같다. 담백하고 마일드한 이 책에서 매콤함을 느낄 독자는 과연 몇이나 될까.


개인적으로 반성과 후회할 줄 아는 사람이 위대하다(222p)는 표현이 가장 좋았다. 자신의 비겁함을 인정함과, 옳고 그름의 판단이 섰다는 증거이고, 앞으로 더 나은 사람이 될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므로. 또한 받기만 하던 소비자에서 줄 줄도 아는 생산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에도 아주 공감한다. 누구나가 세상에 쓸모 있는 존재가 될 순 없겠지만, 인간이란 그저 태어난 김에 살아가는 존재여선 아니 된다. 나에게 도움을 준 세상에 뭐라도 기여하려고 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당연함이 아닌 감사로써 나아갈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 끝으로, 나의 보잘것없는 글이라도 당신과 세상을 이롭게 만드는 발판이 된다. 그러므로 난 계속해서 읽고 쓸 것이다. 부디 당신도 그러기를 바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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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11-26 19: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작가가 능력이 남다른가 봅니다.
어디서 들어 본 얘기 같은데 색다르게 들리다니.
좀 기독교적 사고관도 느껴지고.^^

물감 2024-11-26 21:02   좋아요 1 | URL
사실 이 책은 일본 철학자의 가르침을 기반으로 편집인??이 엮어낸 책이랍니다. 그러니 작가라고 하기도 안하기도 애매하군요 ㅋㅋㅋ 어쨌거나 철학적인 면이 들어있어 같은 내용이라도 색다른듯 싶어요. 100년전에 쓴 글치고 제법 현대적이라 더 좋았습니다. 그리고 종교 색채는 전혀 못느꼈어요. 단지 저의 아웃풋에 성경 구절을 녹여냈을 뿐^^
 
쓰는 여자, 작희 - 교유서가 소설
고은규 지음 / 교유서가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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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관심사가 전부 떨어져 나가고 이제 남은 취미라곤 독서와 글쓰기뿐이다. 글쓰기는커녕 독서조차 하지 않던 내가 어쩌다 10년이 넘도록 글쟁이로 살아가고 있을까. 나의 첫 시작은, 사회생활과 인간관계의 답답한 속내를 블로그에 쓰면서부터였다. 그렇게라도 해서 속이 후련해지고 다시 스트레스받고 일기에 하소연하기를 반복하면서, 나도 모르게 글쓰기에 지친 몸과 정신을 기대고 있었다. 피할 곳이 생기자 수시로 들락날락하면서 같은 입장인 타인의 글에도 관심을 갖게 되고, 심신안정을 위한 에세이와 산문집을 찾아 읽으며 자연스레 독서까지 하게 됐다. 또 내가 읽은 책을 남들은 어떻게 평했는지도 궁금해서 리뷰를 찾아다녔고, 어느새 그들처럼 내 감정과 생각들을 자유롭게 끄집어내고 싶었고, 나의 글로 누군가에게 공감과 위로와 재미와 정보를 주고 싶어졌다. 치유의 글쓰기로 출발하여 건강한 사유에 도달한 지금은 숨 쉬듯 당연하게 읽고 쓰고 있으며, 가만두어도 증식하는 생각들을 독서로 정돈하여 배출해낼 뿐이다. 어느 이웃에게도 했던 얘기인데, 생각이 고여있지 않고 어디론가 흘러가야 운동에너지를 갖는 법이므로, 나의 살아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쳇바퀴를 굴려야만 하는 것이다.


블로그나 sns가 활성화되고부터 글쓰기의 대중화가 된 것은 환영하지만, 반대로 진지한 태도의 글쟁이들은 찾아보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물론 글쓰기가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그럴 시간에 자기 계발 하나라도 더 해야 하는 게 현실이라 할 말은 없다만, 현재 대한민국은 정서적으로 너무 병들어있다는 게 눈에 보이지 않는가. 이 얘기는 10년 전에도 지적했었고, 그전에도 누군가가 계속해왔던 말이다. 나는 그것을 교양 문제로 보았는데, 갖가지 활동도 좋지만 기초적인 베이스는 역시 독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글도 쓰고 토론까지 하는 문화가 필요하다고 본다. 혹자는 그런 게 밥 먹여주냐고 할 텐데, 아무런 영양가도 없다면 그런 문화를 지양하는 이들은 뭐 바보라서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고 있겠는가. 현대인들은 달과 6펜스 중에서 어느 한쪽만을 골라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냥 둘 다 가져가도 된다. 다만 우선순위가 다를 뿐인데, 흔히 돈을 좇지 말고 돈이 쫓아오게 만들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나는 이 말에도 뭐가 우선인지를 아주 잘 나타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글쓰기에 관한 담론은 언제나 즐겁고 흥미롭다. 이번에 읽은 소설이 글 쓰는 여자들에 관한 내용이었다 보니 앞서 잡설이 길었다. 창작자를 방해하는 귀신이 들러붙는다는 업계의 소문이 돌았다. 늦깎이 작가 은섬은 하도 글이 안 써져 ‘작가 전문 퇴마사‘를 찾아간다. 퇴마사는 그녀에게 붙어있는 잡귀 둘을 설명했고, 99일간 퇴마 방침에 따를 것을 권한다. 잡귀의 이름은 작희와 그녀의 어머니 중숙이었는데, 마침 은섬은 큰아버지가 건네준 일제강점기 시절에 쓴 이작희의 일기와, 오 작가의 미발표 초고를 검토하는 중이었다. 오호라, 일기의 주인께서 귀신 되어 직접 행차하신 거로군. 그렇담 무엇이 원통하여 자신의 창작을 방해하는지를 알아볼 차례다. 이제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데, 미리 말하자면 현재 시점에서는 딱히 건질만한 게 없었다. 그런고로 과거의 내용만 다루겠다.


아들 집안의 막내딸로 태어난 중숙. 억지 결혼으로 학업이 중단되었지만 밤마다 글 쓰는 기쁨으로 아픔을 달래곤 했다. 이후 태어난 딸도 어미를 따라 글쓰기에 재능을 보였고, 책방을 운영하면서 모녀는 소박한 행복을 이어나갔다. 이들은 자기가 좋아서 글을 쓰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현실 도피 수단에 가까웠을 것이다. 글쓰기를 고집하는 이유에 대해, 나만이 아는 세계가 있다고 대답한 것을 보면 말이다. 모녀는 서로의 글을 보여주고 비평하며 창작의 세계를 낙으로 삼았다. 싸돌아다니는 남편과 적대적인 시댁들 가운데 오 작가가 등장하여 모녀의 삶에 가느다란 활력소가 되어준다. 그러다 중숙이 세상을 떠나고 홀로된 작희가 책방을 지키다 오 작가와 눈이 맞는다. 한편 곳곳에서 연재 마감의 압박을 받던 오 작가는 작희의 투고 작을 도둑질하여 제 것인 양 세상에 내놓는다. 억울함을 호소해 본들 아무도 그녀를 알아주지 않았고, 사고로 오른손을 다쳐서 작가의 꿈마저 물거품이 된 상황. 마치 글 쓰는 여성의 앞길을 온 세상이 작정하고 막아서려는 듯했다.


다시 현대로 돌아와, 은섬은 이제라도 오 작가의 행패를 밝히기로 한다. 말없이 사라져간 옛 여성 작가들의 원한을 풀려면 현재의 오류들을 바로잡아야 했다. 마침내 귀신들은 물러가고 퇴마는 무사히 끝이 난다. 솔직히 테마가 너무 뻔해서 쏘쏘했었는데, 이 사회가 짜고 치는 도박 판이었음을 고발한 데에서 마음이 움직였다. 따라서 여성의 서사이지만 넓게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된다고도 볼 수 있겠다. 자유의 개념조차 없었던 1세대의 중숙, 자유를 억압당한 2세대의 작희, 해방의 갈림길에 들어선 3세대의 은섬. 시대와 입장이 다른 여성 작가들에게 필요한 것은 물질적 풍요나 평등한 자유보다도 ‘존재의 증명‘이 아니었을까. 가족과 남자와 사회에게 가려져있던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내고 더 나아가 인정받게 되는 것, 그러니까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는 욕구와 자아실현을 항해 여성들도 힘껏 외치는 시대가 되었다. 매우 바람직하지만 간혹 상황 파악 못하고 제 생각만을 내뱉는 무리들이 그동안의 수고와 노력을 헛되게 만들어버린다. 하여 극단적 우월주의가 아닌 전체의 균형과 조화를 찾아가야 할 텐데, 더이상 대한민국은 돌이킬 수 없다는 게 지금 내 솔직한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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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24-11-22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만 보고 산문이 아닐까 싶었는데 소설이네요.

물감 2024-11-22 12:11   좋아요 0 | URL
단순한 플롯과 서사이지만 제법 울림이 있습니다. 가독성도 좋아서 읽어보셔도 좋을 거에요~~
 
데이비드 코퍼필드 동서문화사 월드북 138
찰스 디킨스 지음, 신상웅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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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간 벼르고 있었던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겨우 독파했다. 벽돌 책이지만 가독성도 좋고 몰입감 또한 대단해서 겁먹을 필요가 없는 작품이다. 디킨스의 자전소설로써, 그가 가장 사랑했다던 이 작품은 정말 어느 한 장면도 지루한 구석이 없는 명작 중에 명작이다. 그 시대의 수많은 소설가들이 억지로 글자 수를 늘려서 작품을 루즈하게 만들었던 점을 생각해 본다면 디킨스는 타고난 재주꾼이 틀림없다. 그보다도 읽으면서 동화같이 투명하고 정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전소설인 것도 그렇지만 독자에게 웃음과 희망을 주려는 디킨스의 성향 때문이었을 듯. <데이비드 코퍼필드>는 당대 평론가들의 의견대로 이렇다 할 화두가 없어서 통속 소설로 취급했다가 나중에 가서 그 진가를 인정받았단다. 결국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란 말인가.


책 뒤쪽에는 디킨스의 생애에 관해 100장 넘게 적혀있는데, 쭉 살펴보면 이 작품이 정말 자전소설이 맞나 싶기도 하다. 아무리 봐도 코퍼필드가 디킨스를 닮았다는 생각이 안 들던데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깐. 중산층 가정의 도련님 코퍼필드는 모친의 재혼으로 불행 열차에 탑승한다. 의붓아버지와 그의 누이는 주인공 모자를 맘대로 요리하였고, 코퍼필드를 질 나쁜 기숙학교로 멀리 보내버렸다. 그러다 모친의 장례를 치른 코퍼필드는 이제 학생이 아닌 노동자로 살아간다. 실제 디킨스는 어려서 부모와 사별하진 않았으나 집안이 파산하면서 일찍이 공장을 다녔다고 하니, 이만하면 하드코어 인생이라 볼 수 있겠다. 그처럼 코퍼필드에게도 험난한 가시밭길이 주어지는데, 정작 디킨스는 감정에 동요되지 않고 덤덤하게 써 내려간다. 진정 프로답다.


일터에서 도망친 꼬마는 유일한 혈육인 대고모를 찾아간다. 작품 전체를 통틀어 이 구간이 베스트였는데, 어린 친구가 절망하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이 어찌나 짠하던지. 한 성깔 하시는 대고모였지만 조카의 성품을 보고 양자로 삼아 제대로 된 교육을 받게 한다. 그렇게 학업과 생활이 안정되자 코퍼필드의 진가가 날로 드러난다. 일찍부터 산전수전을 다 겪은 터라 또래들보다 훨씬 의젓하고 성숙하고 거기다 총명하기까지 했으니 주변에서 이뻐하지 않을 수가 없는, 그야말로 엄친아 도련님의 재탄생이었다. 인생을 실전으로 배운 소년의 세계관은 점점 확장되어 다양한 이웃들과 친분을 쌓는다. 그리고 대고모의 뜻을 받아 법률인이 되기로 한다. 모든 게 잘 풀리다 보니 작품 초반의 우여곡절에 비하면 텐션이 떨어진 것도 사실이다. 물론 앞으로도 많은 허들이 설치돼있으나 내게는 코퍼필드의 유년 시절이 가장 인상 깊었다.


소년은 제 또래의 소녀가 있는 변호사의 집에서 하숙하게 된다. 그리고 이때 만난 여사친이 평생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준다. 그녀는 연애 상담과 조언을 아끼지 않았는데, 먼 훗날 코퍼필드가 그녀에게 빠진다는 뻔한 클리셰가 있지만 좋게 넘어가자. 어느덧 학교를 졸업하고 독립하여 자취남이 된 주인공. 그 기념으로 나선 여행 중에 반가운 옛 친구 S와 조우한다. 질 나쁜 학교에서 인기 원탑이었던 S는 코퍼필드를 챙겨준 은인이었다. 하여 가는 곳마다 제 친구를 자랑하고 다녔던 주인공은 어마 무시하게 뒤통수를 맞게 된다. 그가 한때 사랑했던, 지금은 누군가와 결혼을 앞둔 짝녀를 S가 데리고 튀었단다. 이 사건은 많은 이들의 분노를 샀고, 코퍼필드의 순수에 비로소 때가 묻기 시작한다. 역시 예나 지금이나 잘 먹히는 건 사랑과 전쟁이로군.


그 사건을 뒤로한 채 사회생활에 집중하는 주인공. 이윽고 여사친을 통해 또 다른 배드뉴스를 듣는다. 변호사 아빠의 밑에 있던 서기가 약점을 쥐고서 동업을 요구했단다. 모녀를 쥐락펴락해대는 서기가 실상 대표자나 다름없었고, 주종 관계가 바뀐 상태로 모녀는 그렇게 긴 세월을 보내게 된다. 코퍼필드가 손쓸 방법도 없는 데다 여사친도 그냥 모른 척해달라고 하니 별 수 있나. 한편 주인공은 직장 상사의 딸에게 반하여 매달리다가 결혼에 골인한다. 헌데 살림은 관심 없고 놀며 즐기는 게 전부인 철부지 아내였다. 몇 번의 시도로 기대를 접고 가정의 평화를 택했으나, 힘들 때에 의지할 곳이 없던 그의 우울함은 남몰래 익어가고 있었다. 잡념을 지울 생각인지 낮에도 일하고 집에 와서도 글을 쓰기 시작한 코퍼필드. 물론 가계를 위함도 있지만, 현실 도피의 이유가 크지 않았을까. 하다 보니 자신의 재능도 발견하게 되고. 실제로 디킨스가 변호사 사무실에 다녔고 신문기자로 활동하는 등 일에만 몰두하다가 현타가 와서 저술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단다. 아무튼 먹고사는 게 해결되고 나니 이때다 하고 날아드는 시련들에, 역시 인생은 실전이란 말이 절로 나온다.


어찌어찌해서 여사친의 문제도 해결되고, S의 도주 사건도 정리되어 하나둘씩 제자리를 찾아가나 싶더니, 철부지 아내가 병마 끝에 세상을 떠난다. 어쩜 이렇게 산 넘어 산인 걸까. 주변을 다 정리하고 외국으로 떠난 코퍼필드는 요양 중에 쓴 소설로 명성을 얻게 된다. 작가로서 인정받은 그의 상처는 아물었고, 다시 귀국하여 여사친과 재혼하고 행복하게 살아간다. 보다시피 이 작품은 많은 굴곡을 정직과 인내로써 이겨내는 착하디착한 소설이다. 단 한 번의 변화구도 없이 직구로만 승부하기 때문에 독자들 사이에서 평이 갈리는 편이지만, 등장인물마다 제 역할에 100% 충실했다는 점에서 나는 후한 점수를 주었다. 문학이 인간을 들여다보게 하는 수단임을 생각해 볼 때에, <데이비드 코퍼필드>는 그 기능을 훌륭하게 해냈다고 본다. 사실 자전소설이 지니는 화두나 교훈들은 다 거기서 거기이므로 괜히 뭔가를 끄집어내고 언급할 필요는 없겠다. 두꺼운 책들은 꼭 없어도 그만인 구간들이 많다고 입버릇처럼 투덜거렸는데, 이 작품에는 그런 구간이 일절 없었는데다 감정 개입하지 않고 끝까지 차분함을 보여준 것에 대해 경의를 표한다. <돈키호테> 이후로 만족스러웠던 벽돌 책 깨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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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11-19 16: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돈키호테 이후로!저도 읽어봐야겠어요.
근데 동서문화사판으로 읽었군요. 가성비가 좋긴하죠?
이게 보통 두 세 권인데 그걸 감안하면 비싼 건 아닌데 말이죠.
근데 천 페이지 넘는 걸 어찌 다 읽으셨습니까? ㅠ

물감 2024-11-20 08:48   좋아요 2 | URL
엄청난 페이지터너 였습니다. 디킨스가 글을 잘 쓰긴 하네요 ㅎㅎ
저도 분권을 싫어해서 이거 고른건데 번역도 훌륭하고 오탈자도 거의 없었어요. 동서문화사 짱짱맨! 아 요즘 진득하게 글 쓸 시간이 잘 안나서 일부러 벽돌책 골랐습니다. 1년에 한두 권정도는 벽돌책 뽀개기 하려고요 ㅎㅎㅎ

자목련 2024-11-20 11: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1120쪽! 어마어마하네요.
저는 요즘 500쪽만 넘어가도 힘들어요 ㅠ.ㅠ

물감 2024-11-20 20:50   좋아요 0 | URL
자목련 님은 다독하시니까 그게 그거라고 생각됩니다만, 힘들다고 느끼시는건 리뷰의 부담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ㅋㅋㅋ
 
버마 시절 열린책들 세계문학 103
조지 오웰 지음, 박경서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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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의 첫 장편소설인 <버마 시절>을 읽었다. 재미와 몰입감이 정말 대단하시더군. 출간 당시 막 서른을 넘긴 나이로써 생각보다 좀 늦은 감이 있는데 그래서인가, 작정하고 정치 소설을 쓰겠다는 인상을 여러 번 받았더랬다. 양측 간에 갈라치기 해대는 오늘날의 정치 기사들만 보다가 오웰의 글을 읽었더니 바보들의 행진에서 빠져나온듯한 기분이 든다. 오웰의 정치적 비판은 언제나 자신이 속한 세계를 향하고 있다. 무조건 내가 옳고 당신네들은 틀렸다는 식의 현대인들과는 사뭇 다른 입장이다. 오웰은 중립보다도 철저하게 세력 싸움을 일으켜 끝장을 보는 스타일인데, 다소 야만적인 이 방식에서 그의 영리함이 드러난다. 잘 살펴보면 오웰은 정반합 및 변증법 사고를 써서 현 정책과 방침을 양날의 검처럼 보이게 한다. 그리하여 승자와 패자가 없는 결말, 즉 너 죽고 나 죽자는 진흙탕 싸움이 되고 말 것을 경고하는 식이다.


<버마 시절>은 오웰이 20대 때 버마 지역에서 경찰로 근무하던 경험을 토대로 썼단다. 이것은 식민지인 버마 원주민을 지배하는 영국 관리들의 이야기이다. 열명 남짓의 영국인들은 관할별로 원주민들을 통치하며 지루하게 살아간다. 뼛속까지 제국주의인 이들 가운데 원주민과 공생관계를 이어가는 플로리의 애매한 수난이 펼쳐진다. 영국의 명예를 실추시킨다며 동료들에게 비난을 사고, 원주민들도 다른 영국인들보다 플로리를 만만하게 여기곤 하였다. 원주민을 가축으로 대하는 제국주의를 반대하지만 본인의 입장도 있고 해서 늘 어중간한 태도로 일관하는 주인공. 그러나 이 생활도 더는 못 해먹겠다 싶을 때쯤 뿅 하고 나타난 젊은 영국 여인 앞에 도파민이 과다 분비하는 그의 인생 2막이 시작된다.


주인공에게 호감을 느낀 그녀는 그를 따라 곳곳을 동행한다. 헌데 이 남자는 저 미개한 원주민들과 동양의 문화를 왜 자꾸만 치켜세우는 것일까. 플로리는 혹시라도 자신과 결혼하게 될 그녀가 이곳에 애정을 갖게 하자는 속셈이었다. 저가 돌연변이라는 자각이 없었던 주인공은 결국 그녀를 지치게 만들었고, 적당한 남편감을 찾지 못한 그녀는 훤칠한 헌병 하나가 등장하자 잽싸게 노선을 변경한다. 검둥이들의 반란이 날 거라는 풍문으로 파견된 헌병은 그녀와의 만남으로 시간을 때웠고, 이에 위축된 주인공은 전보다 더 삶의 의미를 잃어갔다. 한편 출세에 눈먼 현지인 하급 판사가 일으킨 원주민 폭동으로 영국인 관리들은 위기에 처한다. 여기서 판사가 폭동을 막아 공을 세울 계획이었는데, 하필 플로리가 나서서 사태를 해결해버린다. 제대로 물먹은 판사는 타깃을 바꿔서 주인공을 사회적으로 매장시켜버린다. 하, 진짜 미친듯한 빌드업이다.


결과만 놓고 보면 역시 영국인들이 옳았다고 할지 모른다. 저 통제불능의 짐승들한테는 매가 약이라면서. 그런데 식민주의의 억압 속에 자라난 적개심의 원인 제공을 누가 해왔던가. 그들 위에 군림하며 신사 놀음을 즐기는 게 다인 그 정책의 어디를 대체 옹호해 줄 수 있단 말인가. 실제로 오웰이 버마에 근무하던 시기에도 분위기가 험악했다고 한다. 이에 회의감을 느꼈을 그는 자신들의 정치 이념이 어떻게 파멸로 이어질지를 훗날 이 작품으로 그려냈다. 인간이 태어나고 나라가 형성된 이래로 전쟁은 끊임없이 반복되어왔다. 나와 뜻이 다르다 해서 힘으로 제압해버리는 방식은 오웰이 말하는 진흙탕 싸움밖에 되지 않는다. 현재 이 좁은 땅덩어리만 해도 얼마나 다양한 세력 싸움이 일어나는가. 다들 내 말이 맞다고만 하지, 상대의 주장은 들으려 하지도 않는다. 시대는 갈수록 발전하고 후세대는 날로 똑똑해져 가는데 서로를 이해하는 방식은 왜 아직도 그대로인가. 그것은 각자의 이념에 어떤 맹점이 있는지 볼 줄 모르기 때문이다. 당신은 구멍 난 배를 고칠 것인가, 아니면 배에서 탈출할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함께 침몰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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