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여 안녕 클래식 라이브러리 1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김남주 옮김 / arte(아르테)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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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랜만에 사강의 작품을 읽었습니다. 그녀의 작품은 언제라도 독자를 청춘기로 데려간다는 말에 백번 동의합니다. 특히나 저같이 낭만에 취약한 사람에게는 더 그렇고요. 스스로를 형식에 가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아니 에르노‘와 비슷하다고도 하겠으나 그보단 좀 더 라이트하면서 러블리한 사강이 제 취향입니다. 게다가 사강이란 사람은 제가 정말 좋아했던, 지금까지도 잊지 못하는 사람과도 많이 닮아있어서 볼 때마다 기분이 참 묘합니다. 어쩌면 남자를 미치게 만드는 여자들은 다 비슷하구나 싶고요.


낭랑 18세의 사강이 썼다던 <슬픔이여 안녕>의 파급력은 어마 무시했답니다. 읽는 내내 그 정도인가 했는데, 한국의 고등학생이 이만한 수준의 글을 쓸 수 있겠는가? 라고 하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겠던데요. 한창 감수성 풍부한 여학생의 글이라는 인상을 팍팍 받았지만, 평론가 및 문학 연구자들은 이 짧은 작품에서 발견한 갖가지 분석들을 내놓았습니다. 알면 알수록 놀라워요. 순진한 동네 꽃집 아가씨와 같은 행세를 하고 있지만 사실은 인간을 해부하는 외과의사였다고나 할까요? 두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하는데 그것이 계산된 행동이 아니어서 더 매력적으로 와닿았습니다.


주인공 세실과 그의 아버지는 바닷가 근처의 한 별장에서 여름휴가를 보냅니다. 태생이 자유로운 영혼인 부녀는 하고 싶은 대로, 그저 마음이 가는 대로 몸을 맡기죠. 부친은 한참 어린 동거녀와, 세실은 어느 법대생과 연애사업을 키워갑니다. 적당히 무심하고 취향을 존중하는 부녀의 성향이 모두를 행복하게 해주었죠. 이들의 평화를 깨뜨리는 중년의 여성이 별장을 찾아옵니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옛 친구이자, 한동안 세실을 맡아주었던 사교계의 스승인 ‘안‘의 등장으로 분위기가 확 뒤집혀요. 부친의 환심을 사던 그녀는 결국 동거녀를 몰아내고 부친과 재혼하기로 합니다. 부녀의 좋은 시절도 다 지나갔다고 할 수 있겠네요. 하지만 사랑에 푹 빠진 부친과, 사교계를 선망하는 세실은 오히려 긍정적입니다. 인간은 언제나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해 꿈꾸는 법이니까요.


부친과 달리 사사건건 간섭하는 안에게 세실은 불만을 갖기 시작합니다. 세실은 자신이 길들여질 수 없는 야생마라는 사실을 난생처음 깨달았죠. 하지만 아버지가 사랑하는 사람인 데다 그녀 자신도 안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거든요. 불편하지만 미워할 수만도 없는 두 마음이 생겨나면서 세실의 자아도 확장합니다. 다만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들이 대개 그렇듯이 반항심을 통해 자신의 영향력을 확인하고 싶어 하죠. 영리한 세실은 안이 아니라 부친을 공략합니다. 세실은 동거녀와 법대생을 설득하여, 두 남녀가 부친 앞에서 애정행각을 벌이도록 계획합니다. 욕망에 솔직한 부친이라면 그 광경을 보면서 충분히 흔들릴 테니까요. 세실이 이렇게까지 한 것은 안을 몰아내기 위함도 있지만, 안이 세실과 법대생의 연애를 비난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 계획을 실행하는 동안에도 세실은 사랑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었죠.


안은 그녀에게 말합니다. 네가 안다고 자부하는 것들은 사랑이 아니라고요. 그게 꼭 틀린 말은 아닐 겁니다.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무작정 달려들었던, 그저 가슴이 시키는 대로 따랐던 미흡한 연애를 사랑이었다 말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저는 그 나이대에 겪는 사랑이나 연애법이 따로 있다고 생각해요. 세실이 하고 있는 사랑이 어른들 눈에는 풋내기 연애에 불과할지 몰라도요. 한때 대한민국의 연애 시장을 주름 잡았던 ‘나쁜 남자‘에 열광했던 것도 비슷한 맥락이 아니던가요. 뭘 모르면 그럴 수도 있다, 즐거웠으면 그걸로 됐다 치고 넘기는 거죠, 뭐.


안의 보수적인 연애관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세실의 태도에서, 사강이 추구하던 개방적인 사랑의 공식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그녀의 관념은 애인의 홀어머니를 대하는 태도에서 크게 드러나요. 법대생의 모친은 홀로되고부터 쭉 어머니의 역할만을 수행했으며, 그런 자신의 삶에 매우 만족해했습니다. 하지만 세실은 그런 애인의 모친이 결코 위대해 보이지 않았어요. 누군가를 사랑할 특권을 스스로 박탈시키고 자식만을 위해 살아간다는 건, 세실이 보기에는 그리 자랑할 만한 게 못되었거든요. 그녀에게는 고결한 성녀로 살기보다도 실컷 사랑을 하는 음녀가 더 나아 보였을 겁니다. 차라리 사랑은 이제 필요 없다고 하면, 애인의 모친이나 안처럼 전통, 교양, 품위, 헌신에 힘쓰며 살아가도 되죠. 허나 사랑을 바라면서 체통을 지키는 어른들의 세계관에 세실은 납득할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새장에 갇힌 것과 다름없는 성녀의 삶을 비난했던 거겠죠. 작품 통틀어서 세실이 성낸 유일한 장면인 만큼 유의미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진정 18세의 여고생한테서 이만한 통찰력이 나올 수 있다니요.


앞서 말했듯, 자유분방한 연애를 추구하는 세실도 속으론 품격 있는 어른들의 세계를 동경했어요. 그래서 아빠의 재혼으로 이제 자신도 지성인의 균형 잡힌 삶을 갖게 되리라 기대했고요. 작중에서 균형이란 표현이 나온 것은, 질서와 혼돈 사이에 서겠다는 뜻으로 저는 이해했습니다. 저쪽 세계로 아예 넘어가겠다는 말이 아니라요. 하지만 안의 간섭과 통제는, 세실이 동경했던 세계가 질서 아닌 혼돈이었음을 알게 해줬죠. 아무튼 세실의 계획이 성공하고 안은 후다닥 퇴장합니다. 안 자신도 동거녀를 밀쳐내고 평화를 깨부순 장본인이면서, 자신도 그렇게 되자 펑펑 우는 게 어이없긴 합디다. 남을 울렸으면 자기도 피눈물 흘릴 각오가 돼있어야죠. 아무튼 이 작품은 주인공의 로맨스나 복수혈전을 다루는 게 아닙니다. 안에게 상처를 입힐 때마다 괜히 찜찜하고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세실을 지배하거든요. 이 과정에서 자아가 분리되고, 경우의 수를 하나하나 따져보게 됩니다. 역시 성장에는 실수와 상처, 좌절만 한 게 없다는 얘기겠죠.


저는 이 작품이 저자의 최고 걸작이라고 생각해요. 후속작들이 얼마나 대단하든 간에 <슬픔이여 안녕>을 넘어서진 못하리라고 감히 단언합니다. 데뷔한 이후로 단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던 스타 작가에게도 이처럼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이 있었다는 게 신선한 충격이에요. 그녀의 소녀 감성이 어찌나 별처럼 반짝거리던지, 이 작품만 두고 보면은 저는 사강을 한 여자로서 사랑할 수도 있을 듯합니다. 세상에, 봄이 되니까 낯간지러운 글도 잘만 써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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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아비 - 사막의 망자들,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25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
마이클 코넬리 지음, 이창식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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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그러더라고요. 오마카세가 더 맛있지만 또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쪽은 정크푸드 같은 것들이라죠. 그 말에 적잖이 공감하는 바입니다. 독서도 그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세계문학이 아무리 우수하다 한들 현대문학의 도파민은 못 이긴다고요. 특히나 스릴러 같은 장르소설은 더더욱이요. 저는 어디까지나 재미로 독서하기 때문에 장르, 형식, 시대, 사상을 불문하고 재미있었다면 그만입니다. 그게 종합예술이라는 뮤지컬 공연보다도 관객을 들었다 놨다 하는 코미디 무대를 훨씬 선호하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근래에 묵직한 작품을 연달아 읽었더니 피로해져서 오랜만에 코넬리 옹의 작품 하나 읽었습니다. 초기 작품인 <시인>에서 활약한 매커보이 기자를 일회용으로 써먹지 않고 시리즈로 만들었더군요. 솔직히 <시인>에서는 주인공의 매력이 그다지 돋보이지 않았었는데, 이번 편에서는 제법 정감이 가는 캐릭터로 나와주었습니다. 보니까 13년 만에 나온 후속작인데, 그만큼 여러 피드백을 반영하여 캐릭터에 힘 좀 썼구나 싶었네요. 다만 텀이 너무 길다 보니 이전 내용들이 가물가물해서 그냥 스탠드얼론처럼 읽었습니다. 물론 전개나 흐름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고요. 이런 게 코넬리 옹의 가장 큰 강점이 아닐까 합니다. 사랑받는 작가들은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네요.


LA 신문사 ‘타임스‘의 베테랑인 주인공은 감원 대상에 포함되어 해고되기까지 2주 남았습니다. 나가기 전에 특종기사를 써서 신문사에 빅 엿을 먹이자는 복수심에 사로잡히죠. 그가 계획한 특종이란, 무고한 사람을 범죄자로 몰아간 살인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겁니다. 그런 보도가 나가고 나면 이제 신문사는 온갖 연락을 받으며 곤욕을 치러야 할 테죠. 저는 이렇게 사회와 정의를 위해 일하는 직업군들이 삐딱선을 타는 이야기를 참 좋아라 합니다. 아무튼. 갱단 소속의 흑인 소년이 방치돼있던 차를 몰았는데, 알고 보니 트렁크에 여성 시신이 있더랍니다. 경찰 측은 소년을 용의자로 간주했고, 압박 심문 끝에 소년이 저지른 범죄처럼 된 거였죠. 진실을 조사하던 매커보이는 매우 유사한 사건을 찾아내, 어쩌면 연쇄살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슬슬 판이 커지려는 게 보이죠?


주인공의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해리 보슈‘같은 공권력이나 액션이 없어 밋밋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작가는 사건 외에 다른 요소들을 집어넣습니다. 앞으로 매커보이를 대체할 후임 여기자가 들어오는데요, 깍듯한 선배 대우를 하면서도 교묘히 선을 넘곤 합니다. 더불어서 이제껏 함께 했던 타 직원들과의 믿음도 식어버리고요. 게다가 특종을 다룰수록 신문사 측에서는 퇴사 일을 조금씩 더 연장시키는 모습들도 나옵니다. ‘야비한 직장‘의 특징과 패턴을 골고루 볼 수 있다는 게 이번 편의 핵심이에요. 이로써 작가 또한 기자 생활하며 얼마나 수모와 치욕을 겪었을지도 상상이 갑니다.


유사 사건의 발생지역인 라스베이거스로 달려간 메커보이는 사건 담당 변호사를 비롯하여 이곳저곳을 방문하다가 알 수 없는 봉변을 당합니다. 신용카드가 정지되고, 통신이 차단되고, 이메일 등의 온라인 접속이 전부 막혀버려요. 누군가가 그를 본격적으로 방해하기 시작했고, 다급해진 주인공은 최후의 보루를 꺼냅니다. 옛 연인이었던 FBI 요원 레이철에게 연락하여 도움을 받게 되죠. 레이철은 해리 보슈와도 얼레리꼴레리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여기서는 매커보이와 더 깊은 관계로 보입니다. 개인적으로 사건 수사보다도 견우와 직녀의 애정선을 구경하는 맛이 더 좋았어요. 스릴러소설에서 연애 씬을 더 좋아하다니, 저도 나이가 들긴 했나 봅니다.


한편 매커보이의 마지막 기사를 공동작업하던 후임은 덫에 걸립니다. 트렁크 살인사건을 조사하다가 어느 사이트에 접속한 뒤로 종적을 감춰버려요. 주인공들은 해당 사이트의 출처를 따라 모 데이터 보안센터를 방문합니다. 아 참고로, 범인은 이 센터의 서버 관리자입니다. 시작부터 범인의 시점이 번갈아 나오므로 이건 스포가 아니에요. 범인을 지독하게도 감춰놨었던 <시인의 계곡>에 비하면 차라리 이런 구도가 더 낫다고 봅니다. 아무튼 허탕치고 LA로 귀가한 두 사람은, 주인공의 집에서 후임 기자의 시신을 발견합니다. 누가 봐도 명백한 경고였고, 이로써 사건의 주인공이 돼버린 매커보이는 특종을 동료 직원에게 건네주어야 했습니다. 매번 느끼지만 코넬리 옹은 캐릭터 굴리기에 가히 천부적입니다.


글이 길어져 슬슬 마무리하겠습니다.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데이터를 지켜내는 ‘허수아비‘의 단서를 따라 주인공들은 범인과의 사투 끝에 간신히 승리합니다. 그 장면은 직접 읽어보시고, 전도유망한 능력자들이 어쩌다 빌런의 길로 들어서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영화나 만화에서도 꼭 미친 과학자들이 악당으로 나오곤 했었죠. 단순히 불우한 시절을 지나와서 그렇다기엔 증오나 집념의 정도가 너무 괴랄합니다. 자신의 뛰어난 능력과 기술을 인정받지 못해, 다른 방면으로 재능을 펼치며 욕구를 충족한다고 생각했었는데요. 지금 보니 능력 자체가 목표인 것과, 능력을 ‘수단‘으로 쓴다는 차이가 아닐까 합니다. 요리를 예로 들어볼까요. 대개 남자들은 요리 자체를 잘 하는 게 목표인 반면, 여자들은 가족과 이웃을 먹이는 데에 목표를 둔다죠. 애초에 출발선부터가 다릅니다. 그 때문에 실력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만, 적어도 뭐가 옳고 그른지는 따져봐야 한다는 거죠. 그렇다고 무조건 선이 옳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법이 없으면 죄도 죄가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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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치 1~2 세트 - 전2권 지식을만드는지식 도스토옙스키 4대 장편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정아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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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 4대 장편이래서 매우 기대했건만 실망스럽다 못해 화병이 날듯 하오나 이번 연도부터는 작고 소중한 나님의 고혈압을 생각하여 깔 때 까더라도 교양 있게 까주자는 선서를 해봅니다. 이 같은 결심이 얼마나 갈지는 모릅니다만 앞으로는 기존의 마당쇠 문체를 벗어나 양반 문체를 지향할 때가 됐다는 신내림을 받았다고나 할까요. 그런 심경 변화의 기념으로 이번 리뷰는 최대한 정중하게 즈려밟고 가겠습니다.


솔직히 얘기해서 이번 작품은 평을 쓰고 싶지도 않았거든요. 이렇다 할 줄거리도 없는 데다 재미까지 없으며 우리가 사랑하는 도스토옙스키의 매력이 온데간데없어서 적잖이 당황스러웠습니다. 하여 저로서는 퍽 좋은 말이 나갈 수가 없겠는데, 혹여 이 책을 읽지 않은 예비 독자들에게 감히 제가 심심한 상처를 드리지는 않을까 그것이 염려되더랍니다. 겨우 소설책 하나 갖고 웬 호들갑이냐 하실 수도 있는데, 그래도 명색이 도스토옙스키 아닙니까. 이분의 브랜드 파워를 고려하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모두들 입을 모아 제게 말해주면 좋겠습니다.


도스토옙스키는 자신의 여러 작품 중 <백치>를 가장 애정했다고 하네요. 이 작품이 기념비가 된 이유는 무엇인지, 저자의 애착했던 이유는 또 무엇인지를 발견하는 데에 중점을 두고 읽었습니다. 마침내 이유를 찾긴 찾았는데요, 그것들이 기대에 한참 못 미쳐서 억울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게, 분량이 폭력적이니까요. 뭐 오늘날의 감성과 맞지 않을 뿐, 당시 19세기에는 독자들의 배꼽과 눈물을 책임졌다 믿기로 했습니다.


이 작품이 말하는 백치는 우리가 정의하는 그 의미보다는 ‘호구‘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어요. 주인공 미시킨 공작은 사람 자체는 선하고 긍정적이지만, 막말로 착하기만 한 사람입니다. 장점이 없는 사람을 칭찬할 때 흔히들 ‘애는 착해‘라고 하잖아요? 그 정도로 주인공은 특성 없는 인간에 가까운 무매력의 표본이라 하겠습니다. 그런 이유로 이 친구에게 재미는커녕 어떤 볼거리를 기대하지는 마시길 바랍니다.


스토리가 부실하면 인물이라도 잘 잡아야겠죠. 반대로 캐릭터가 약하면 작품성으로 간극을 메꾸기도 하고요. 그런데 이 작품은 정말 이도 저도 아니라는 인상을 계속 주더군요. 예를 들어, 한 인물을 심도 있게 다뤘으면 나중에 가서 그 인물이 결정적 역할을 하리라는 예상을 안고서 읽어나가겠죠? 하지만 계속 읽어봐도 그 인물의 활약이나 복선 회수 같은 장면은 나오지 않아요. 게다가 등장인물 대부분이 아군과 적군, 주연과 조연의 역할을 수시로 바꿉니다. 내내 이런 식이라 내용이 어디로 튈지 감도 안 잡혀요. 예측 불허가 독자의 긴장감을 유발하는 장치라지만 이렇게 과유불급이면 좋은 소리는 듣기 힘들죠.


원래 도스토옙스키가 생계형 작가이긴 했어도 다른 작품들은 이 정도로 볼멘소리가 나오진 않았어요. 제가 다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좀 재미가 없네‘ 정도였었지, 이렇게까지 실망할 건 아니었단 말입죠. 개인적으로 크게 실망했던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조차도 메인 사건을 중심으로 흘러갔거든요. <백치>는 메인 사건이랄 게 없고 등장인물은 한가득에다 이내용 저 내용했다를 너무 반복합니다. 특히 주변에서 아이같이 투명한 공작을 좋아했다 싫어하는 장면이 가장 많아요. 공작이 말실수를 해서가 아니라 남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이해하는 데서 오는, 그러니까 맥락을 파악 못하고 분위기를 읽지 못하는 데서 오는 어벙함 때문인데요. 아마도 주인공이 지닌 ‘공작‘이라는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사회성이 그를 웃음거리로 만들었겠죠. 저도 지금은 그 이유를 알지만 읽는 도중에는 공작을 궁지로 몰아가는 모든 상황들이 영 이해가 안 되더군요. 덕분에 기가 많이 빨렸습니다.


챕터마다 등장하는 각종 사상과 주의에 관한 논쟁, 설파, 토론 등이 주인공과 이 작품에 무슨 관련이 있는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21세기의 한국인에게는 너무 지루하고 따분하기만 했네요. <안나 카레니나>도 주인공들의 내용보다는 농업, 정치, 사상 이야기가 더 많아서 힘들었거든요. <백치>도 거의 비슷해요. 아무튼 <죄와 벌>에 비하면 너무 형편없는 전개와 살 붙임이랄까요. 등장인물이 그렇게 많은데도 핵심 인물은 없으니 이건 뭐 산으로 가는 것도 아니고 아예 방향 자체가 없는 작품입니다. 사람들이 주인공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알아채지 못한다는 게 관전 포인트라면, 그로 인한 내적 갈등이나 심경 변화라도 있어야죠. 허나 공작은 너무나도 수동적이라서 어떤 사건을 발생시키는 법이 없고, 남들이 다가와 이러쿵저러쿵할 때까지 기다리기만 합니다. 그러다 보면 또 다른 상황으로 홀랑 넘어가버리며, 다음 상황은 앞의 일들과 퍽 연결점도 없어요. 내내 이런 식이라 숨이 턱턱 막혔네요. 도스토옙스키가 어지간히도 돈이 궁했나 보다 싶어지고.


러시아 문학이 진짜 골 때리는 게, 고작해야 중고등학생 나이밖에 안됐는데도 자기가 수치를 겪었다 싶으면 결투를 신청한다느니, 자기 명예를 더럽혔다느니, 콱 죽어버리겠다느니 식의 발언을 서슴지 않아요. 귀족도 아닌 일개 소시민이 이런 말들을 마구 내뱉는데, 대체 자기한테 무슨 체면이 있다고 저렇게나 욱하는 건지 알 수가 없던데요. 한국인들이 분노조절장애다 뭐다 해서 말이 많지만 러시아인들에 비할 바가 못됩니다. 기분 상해죄의 근원은 아마도 러시아가 확실하지 싶네요. 오늘날의 러시아 사람들이 도스토옙스키를 읽으면 웃고 넘길지, 저처럼 뜨악해할지 궁금하네요.


물론 이 기나긴 분량이 알쏭달쏭 한 사상만 운운하는 건 아닙니다. 이성 얘기도 했다가 가십거리도 나왔다가 돈 얘기도 오갔다 합니다. 그게 딱히 흥미 있지도 않은 데다 최소한의 일관성도 없어, 건너뛰며 읽어도 흐름에는 아무 지장이 없어요. 차라리 저자가 늘 다루던 ‘가난‘이나 좀 얘기해 줬으면 싶었네요. 그나마 일관된 거라면, 공작이 타인의 말을 곧이곧대로만 알아듣고 반응하여 바보 취급 당하고 내내 조리돌림을 당한다는 정도인데요. 이게 뭐랄까, 그래도 공작이기 때문에 다들 예의는 갖추고 있어, 제가 봐도 그들의 말속에 어떤 이중성이 담겨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날 현대사회에서는 어떤가요. 타인의 말을 괜히 넘겨짚거나 확대해석했다가 문제 된 경우가 더 많죠. 그래서 텍스트 그대로만 이해하고 그 안에서 최소한의 행간만 읽어야 한다는 지적도 있고요. 헌데 어느 쪽도 아닌 이 작품에서는 정말이지 대화다운 대화를 찾아볼 수가 없어서 속 터집디다. 얘기하다 말고 갑자기 샛길로 빠지기도 하고, 이유 모를 함박웃음과 극대노가 빈번하고, 방금 전까지 철천지원수였다가 볼 키스를 하는 등 혼돈 그 자체입죠. 이것이 바로 19세기 러시아의 야생 바이브인가 봅니다.


이 작품의 치명적인 결함은 4부 초입에 나옵니다. 앞서 말한 이도 저도 아닌 전개를 잠깐 멈추고, 작가가 직접 개입해서 평범한 사람들이 사실은 더 행복하다는 점을 미주알고주알 떠들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작가 본인 생각에도 부연 설명이 들어가질 않으면 전개가 매끄럽지 못하고, 독자들이 오해하거나 엉뚱한 길로 빠질 거란 걸 감지했다는 뜻이겠죠. 뒤늦게라도 개선해 보려는 노력은 가상하나, 오히려 안 하느니만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철저하게 해석을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놓는 게 차라리 나았어요.


‘내가 귀엽다는 사실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는 어떤 댓글을 보고 조언했던 어느 유튜버가 생각이 나네요. 귀여움을 설명해야 한다면 그건 귀여운 게 아니라고요. 말 그대로 귀여움은 애써서 척하거나 설명이 없이도 누구나 느껴지는 영역일 테니까요. 아기들이나 강아지, 고양이들이 이유가 있어서 귀여운 게 아니거든요. 마찬가지입니다. 저자가 창조한 백치의 ‘우수함‘은 철저히 설명되고 있어, 전혀 와닿지도 공감되지도 않는단 게 낭패라 하겠습니다. 오죽했으면 직접 개입했겠나요.


저는 흥미가 뚝 끊어지면 만회하더라도 일절 감흥이 없는 고질병 비슷한 게 있습니다. 김정아 대표님의 번역을 봐서라도 어찌어찌 완독은 했지만 내내 중도 하차가 마려웠던 작품이었네요. 횡설수설에 다름없는 이 작품도 완전 후반부로 접어들면 그럭저럭 내가 알고 있던 도스토옙스키의 폼이 나오긴 합디다. 그쯤 되니까 뭔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건지도 알 수 있었지만, 바람피운 애인을 용서할 마음이 없듯이 눈밖에 나버린 작품에게 줄만한 애정은 남아있지를 않아서요. 이렇게까지 악평을 남긴다는 자체가 애정이 없다곤 할 수 없으려나요.


저자가 시베리아에 유배될 동안 신약성경을 읽으며 그리스도의 생애에 깊이 매료되었다는 일화는 유명하죠. 그 영향으로 그리스도의 원형을 담은 <죄와 벌>이 탄생했고, 그 작품의 흥행에 힘입어 한층 더 심도 있는 작품을 만든 것이 <백치>로 보입니다. 이것저것 재고 따지고 보완하여 낸 작품일 테니 저자가 가장 사랑한 작품일 수밖에 없겠단 생각도 듭니다. 이럴 때 보면 작가와 작품은 역시 분리하는 게 아니다 싶어요. 어쨌거나 이 작품도 그리스도의 생애를 주축으로 한 포맷입니다. 저급하고, 무식하고, 난폭하고, 오만하고, 교만한 무리들이 만만하게 여겼던 이에게 찾아와 의지하고 조언을 구한다는, 전형적인 메시아의 구원 서사입니다. 그리스도 역시 주변의 온갖 병자들이 다가와 은총을 구하고 수군대고 소문내길 반복했죠. 여하튼 이 젊은 공작에게는 그리스도와 같은 인류애가 있었고, 답답하네 못 미덥네 해도 주변인들은 이 백치 선생을 찾아와 힘과 위로를 받아 갑니다. 제가 지금 좋게 포장해놨지만 지루해 죽을 뻔했어요.


분량이 방대한 고전을 만날 때마다 이렇게까지 길어야 할 이유가 없으며 과유불급은 역시 독이다 라는 생각이 지워지질 않습니다. <백치>는 어지러운 세상을 저항정신이 아닌 정화 운동으로 변화시켜야 하며, 그래서 메시아의 존재가 필요하다는 저자의 핵심 사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매 챕터마다 새로이 등장하는 일화들은 전혀 흥미를 유발하지 않을뿐더러 어느 메시지로 귀결되는 것도 아니었거든요. 그래서 세상을 정화할 선구자가 필요하다는 거창한 혁명의 구호를 보면서도 다소 뜬금없게만 느껴질 따름이죠. 공작의 열변을 지켜본 사교계 사람들의 반응과 제 반응은 비슷했습니다. 주인공을 쭉 지켜본 독자 입장에서도 ‘얘 뭐지?‘ 싶으면 말 다 한 거 아닌가요. 따라서 이 작품은 실패작이라고 봅니다.


저는 도스토옙스키가 작가주의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톨스토이 못지않은 사상가이자 철학자지만 좀 더 캐주얼한 스토리텔러에 가깝다 보거든요. 또 그래서 전 세계가 그를 좋아하는 걸 겁니다. 허나 <백치>는 그만의 강점이나 매력을 전혀 담아내지 못했어요. 한편으로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보려다 결국 놓친, 일종의 시험작으로 보였고요. 어쩌면 <죄와 벌>로 확장된 영적 세계관을 좀 더 시험해 보고 싶었던 게 아니었나 합니다. 아무튼 글이 길어져 이만하기로 하죠. 나름대로 최대한 교양을 유지했습니다. 여기까지 따라와 주신 분들께 감사하모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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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다르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3
헤르만 헤세 지음, 권혁준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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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제나 참여하는 쪽이 아니라 관람하는 쪽이었다. 감정과 의욕은 있었지만 다스리고 표현할 줄 몰라서 항상 울타리 밖을 맴돌았고,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직관이 발달한 케이스였다. 알다시피 직관적인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도 보이지 않는 것들에 관심을 쏟는 편이며, 버릇 같은 의미 부여와 습관적인 본질 파악으로 스스로를 학대하는 젠틀한 사디스트라고 볼 수 있다. 한창 성장기일 때만 해도 다들 나랑 똑같은 줄 알았는데, 말로만 들었던 잔잔한 돌아이가 나였다는 사실에 놀랐던 기억이 난다. 아무튼 나의 ‘남다름‘을 감추고 살아봤지만 정말이지 온통 나사 빠져있는 세상과 친구 하기가 너무나도 어려웠다. 하여 나는 심신의 평화를 찾아 여기저기에 정신과 시간을 쏟았고, 얼마간은 그것들에 위로와 평안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비대해진 자아는 매번 제자리에 돌아왔고, 그렇게 번민과 해탈, 좌절과 초월을 되풀이하며 고통 중에 살았다. 여전히 방황하는 산책자이지만 지금은 정답 따윈 없다는 것과 선악의 조화를 깨달아 무던히 살아가고 있다.


<싯다르타>를 읽으며 비슷한 고민들로 절망했던 내 과거를 꺼내놓는다. 사실 헤세의 작품이 다 그렇지만, 이 작품은 고통받는 데에 그치지 않고 원인을 해결하러 나섰다는 점에서 박수를 주고 싶다. 브라만의 아들 싯다르타는 힌두교 내에서 해소되지 않는 갈증 때문에, 브라만을 관두고 고행하는 승려인 사문의 길을 간다. 하지만 3년이나 사문으로 있으면서도 열반은커녕 이렇다 할 변화는 없었고, 고타마(부처)를 통하여 누군가의 가르침이 아니라 스스로가 자신의 스승이 되어야만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제 그는 틀에 박힌 형식을 내려놓고 속세를 경험하기 시작한다. 창부를 만나 관능의 세계를 탐험하고, 상인과 함께 일하며 물질의 세계에 마음을 뺏겨도 본다. 속세에서도 배울 점은 많았고, 사람들은 이 되다만 고행자에게 지혜를 구하였다. 뭐가 됐든 자기만 좋으면 다 그만인 것인가.


창부 카말라는 싯다르타에게, 우리 같은 사람은 ‘사랑‘을 할 수가 없다고 했다. 너무 많은 걸 알아버렸기에 순수한 사랑이 불가하다는 뜻일까. 그는 오직 어린아이만이 사랑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랑을 알고 싶다 해서 어린아이로 되돌아가고 싶다는 뜻은 아니었다. 이때의 주인공을 두고 하기엔 좀 이른 말이지만, 배움을 통한 진보와 성장에는 이처럼 아쉬움이 없어야 하는 것일 테다. 아무튼 그가 자랑스럽게 여겼던 재산인 단식, 사색, 인내까지 모두 잃고 나서야 자신이 그토록 업신여겼던 어린아이의 세계로 들어서게 된다. 배움의 경지에 이른다 해도 절대 이해불가한, 내 것이 될 수 없었기에 차라리 경멸했던 그 순수의 타이틀을 마침내 획득한 싯다르타. 진흙탕을 실컷 뒹굴고 마흔에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갔으니 그 기쁨의 충동은 말할 것도 없었겠지.


사람마다 자아를 인식하는 능력치가 판이하다. 똥인지 된장인지를 꼭 먹어봐야만 아는 사람이 있고, 딱 보면 모르냐며 경험 없이도 쉽게 구별하는 사람이 있다. 헌데 이 같은 지각 및 감각은 개인의 타고난 영적 수준과 크게 상관없어 보인다. 브라만, 사문, 구도자, 현인, 부처의 길을 쫓은 고차원의 주인공이 세속에 물들고 관능에 빠진 것은 그의 지능 때문이 아니었으니까. 헤세는 작품마다 ‘체험‘하는 인물의 어리숙함을 꼬집곤 한다. 물론 체험은 좋은 것이고 뭐든 경험해서 나쁠 건 없지만, 헤세처럼 직관이 뛰어난 사람이 왜 항상 체험하는 인물을 다루나 싶었다. 헤세가 그리는 체험의 세계도 결국 탐욕, 관능, 타락 등의 덧없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도 이 나이가 되고 보니 알 것도 같다. 생각만 하는 사람은 가시에 찔릴 게 무서워 다가가지 못하고 멀리서 장미를 바라만 본다. 허나 행동하는 사람은 가시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장미에 다가가 꽃향기를 맡는다. 내가 생각하는 헤세의 갈증은 그 차이에 있다고 생각한다. 아는 것만으로는 해소가 되지 않으니까.


헤세의 작품을 순서대로 읽었다면 되게 감명 깊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미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와 <황야의 이리>를 읽고서 본 싯다르타의 유리방황과 각성의 과정들은 너무 생략되었다는 인상을 준다. 갑자기 번뜩했다가 시들시들해지는, 괜히 이랬다저랬다 하는 기분파처럼 그려놨달까. 아무튼 인간은 결국 자기만의 진리보다도 행복의 근원을 찾으려고 해야 한다. 문제는 인간이란 게 서있으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은 법이라, 쾌락 가운데서 행복을 찾는다는 데에 있다. 하지만 많은 선각자들이 주장하듯 쾌락이 아닌 즐거움을 추구해야 하며, 그 즐거움이란 손해를 입더라도 넘어갈 만큼의 몰입이 가능한 ‘무언가‘여야 한다. 이제 독자들은 결과보다도 과정 자체가 기쁨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주인공은 깨달았을 때보다도 정답을 구하는 데서 활력이 돈다는 점을 자각하지 못했다.


빈 그릇일수록 더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다. 허나 인간은 삶의 만족을 비움보다도 채움에서 얻고자 한다. 돈을 버느라 건강을 갈아 넣고, 나중 되면 돈이 있어도 건강을 되찾지 못한다는 교훈을 숱하게 듣지만 그 누구도 주의하지 않는다. 역으로는 자기 관리라는 종교에 빠져 끝없이 채워 넣기에 바쁘다. 인간이란 비워져있는 것을 견딜 수 없어하고, 그렇게 본인의 ‘옳음‘을 수집하지만 결코 쾌락이 정당화될 수는 없는 법이다. 문득 걸어온 날들에 회한이 드는 것이 그 증거이다. 안타깝게도 인간은 채워보질 않으면 비움의 가치를 알 수가 없기 때문에, 끝없는 실수와 후회를 반복하게끔 되어있다. 왜 그런 노래 가사도 있었지.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았다던.


지혜의 왕 솔로몬이 남긴 말이 있다. 『내 아들아 또 경계를 받으라. 여러 책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케 하느니라(전12:12).』 싯다르타도 그리 말한다. 너무 많은 지식과 지나친 금욕, 행위, 노력이 오히려 방해였다고. 나 또한 지인들과 그런 말을 했었다. 아는 것이 힘이란 말보다 모르는 게 약이란 말이 더 좋다고. 다시 말해 알기만 해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으며, 다만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결론이다. 허나 결론을 안다 해서 누구나 실천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에 차라리 모르던 때가 좋았다는 얘기다. 그런고로 싯다르타의 말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야말로 참 사랑의 존재인 것이다.


하지만 순수하다는 것은 쉽게 악해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뱃사공으로 살아가던 싯다르타 앞에 창부 카말라와 아들이 나타난다. 뱀에 물려 죽은 창부의 아이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제공하는 주인공. 하지만 그의 헌신과 정성에 욕설과 불평으로 화답하는 아이였고, 자신을 떠나버린 아이를 보며 브라만이었던 부친과 여러 스승들을 떠나온 자신을 떠올린다. 비록 실망했으나 그는 어린아이의 투정, 원망, 욕심, 자랑, 탐욕, 허영심 등의 감정들이 밉다기보다 오히려 사랑해야 할 무언가로 느껴졌다. 그 강한 충동들이 심장을 뛰게 하며, 죽어있는 지식과 사상이 아니라 살아움직이는 불멸의 행위를 갖게 하였다. 결국 정답이라 생각되는 ‘도‘만을 좇는 것은 잘못되었으며, 조화로움과 정반합, 그리고 욕망을 흘려보낸다는 것이 중요했다. 강물은 끊임없이 흘러가지만 늘 그 자리에 존재한다. 감정도 시간도 생각도 그렇게 순환하는 법이었다.


싯다르타는 재회한 옛 친구에게 완전함의 균형을 설명한다. 하나의 돌멩이는 모든 것을 짊어진 브라만으로써 숭배할 가치가 있다고. 불교 신자가 아닌 나님의 해석은 이러하다. 모든 존재는 하나의 씨앗이다. 씨에 들어있는 dna에는 그 존재의 설계도가 담겨있으며, 다 성장한 후의 모습도 이미 새겨져 있다. 결국 씨는 과거부터 미래까지의 시간과, 존재를 발산하는 에너지가 압축된 형태로써, 그 잠재력이 깨어날 때마다 인간은 그 경이로움에 말을 잇지 못한다. 이처럼 가치와 의미는 내 주변에도 얼마든지 있으며, 그것을 발견해낼 줄 아는 감각을 길러야 한다. 더 나아가 그것들을 온전히 긍정하는 마음이 갈증을 지워준다. 따라서 우리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것만이 남다름과 불안함의 수렁에 빠진 나와 당신을 건져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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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 전2권
앤서니 도어 지음, 최세희 옮김 / 민음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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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날수록 좁혀져가는 인간관계란, 현실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었다. 온라인에서 만나 정들었던 분들도 어느샌가 소식이 끊어져, 어쩌다 한 번씩 생각날 때면 괜히 허전해진다. 블로그 활동 초기에, 이제 막 글쓰기의 매력을 알아가던 즈음에 종종 찾아와 말 걸어주셨던 몇몇 분들이 있었다. 지금보다도 훨씬 수준 낮았던 당시의 내 리뷰를 좋아해 준 분들에게서, 현실에서는 절대 느껴보지 못할 감사를 배웠다. 자존감이 바닥 치던 나를 일으켜준 그 은인들은 현재 전부 연락 두절 상태이다.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을 읽으면서, 한때 나의 빛이 돼주었던 분들이 스치듯 떠오른다. 제목처럼 ‘볼 수 없는 빛‘이 된 사람들. 잘들 지내시는지. 건강은 하신지.


제2차 세계대전의 배경이고, 독일 소년병과 프랑스 장님 소녀의 시점이 교차되며 진행된다. 여동생과 함께 고아원에서 지내던 소년은 기계 수리에 재능을 보였고, 이후 독일군의 특기병으로 입대한다. 그의 임무는 정보를 전파하는 송신기의 좌표를 찾아내는 일이었고, 팀원들은 그 현장의 저항군들을 섬멸하였다. 이건 뭔가 잘못됐다고 느끼지만 복종할 수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소년의 눈빛은 잿빛이 되어간다. 한편 공습을 피해 작은할아버지 네로 피난 온 소녀와 부친은, 독일군의 감시망을 피해 가며 죽은 듯 지낸다. 박물관의 관리자인 부친이 챙겨온 게 있는데, 전설의 다이아몬드인 ‘불꽃의 바다‘였다. 이 보석을 지니면 영생하는 대신 주변인들이 죽는다는 저주를 품고 있단다. 그래서 부친은 보석을 감춰둔 모형 집을 딸에게 선물한 뒤 수용소로 끌려간다. 저주의 시작이었다.


무난한 가독성에 비해 진도가 매우 더딘 작품이다. 게다가 두 남녀의 접촉은 후반부에 가야 나온다. 그전까지는 꽤나 루즈한 구간이 많은데, 소녀 쪽은 숨어지내는 내용이 많아서 그렇고, 소년 쪽은 직접 총질하기 보다 정찰하러 다녔기 때문이다. 그러다 폭격당한 건물에 갇혀 서서히 죽어가는데, 그제야 이 작품이 반전 소설임을 알게 되었다. 그만큼 반전의 요소가 미미했다는 말이다. 아무튼 두 사람의 접촉 전까지, 작품의 재미를 담당한 것은 보석을 찾아다니는 독일군 원사였다. 병마로 죽어가던 그는 영생의 돌을 쫓아서 소녀의 집까지 찾아왔다. 다 무너진 도시에서 홀로 멀쩡한 집 한 채가 곧 ‘좌표‘라는 증거였다. 하지만 보석은커녕 원사의 방문 의도조차 모르던 소녀는, 집 안에서 숨바꼭질을 해가며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한다.


후에 소년이 무너진 건물을 탈출하고, 원사에게서 소녀를 구해낸다는 내용이다. 그 뒤에도 더 있지만 이 정도로 하고, 두 인물의 설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앞 못 보는 소녀만큼이나 군에 복종한 소년도 눈이 멀어있다고 볼 수 있다. 소녀는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들이 위험했고, 소년은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들이 위험한 요소였다. 집안에 갇힌 소녀는 빛을 볼 수 없어 절망하고, 건물 아래 갇힌 소년은 빛이 차단되어 절망한다. 이렇듯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입장 속에서 대칭 구조를 이룬다. 그 가운데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지를 시사하고 있다. 평생을 장님으로 사는 것과 꼭두각시로 사는 것. 살아도 사는 게 아닌 건 마찬가지겠지만 육체로도 모자라 영혼까지 지옥에 밀어 넣을 필요가 있을까.


평화가 찾아온 지도 벌써 수십 년이 지났다. 헤어졌던 이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가 없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며 살아있기를 바랄 뿐. 생존자들의 사명은 최선을 다해 남은 생을 보전하는 일이다. 아픔을 잊기 위해서라도 현생에 충실하며 살아보지만 꼭 한 번씩 정신을 낚아채는 순간들이 찾아든다. 나에게 다정했던, 그래서 고마웠던 누군가의 부재를 느낄 때마다 온 신경이 마비된다. 나 같은 인간도 관심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준 옛 은인들이 오늘따라 많이 생각난다. 그 작은 응원 덕분에 여태껏 버틸 수 있었다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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