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카레니나 세트 - 전3권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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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유명하다던 <안나 카레니나>를 드디어 독파했다. 명성과는 달리 드럽게도 재미없었고, 마구마구 스킵 하면서 읽었는데도 한 달이 넘게 걸렸다. 아무래도 나는 교양 있는 톨스토이보다도 야만적인 도스토옙스키가 취향인가 보다. 일단 나님은 ‘이름‘이 제목인 작품들에 대한 어떤 편견이 있다. 그런 작품들은 대체로 노잼이거나 아님 난해하거나 둘 중 하나이다. 내가 좋아하는 <스토너>도 솔직히 노잼이 맞고, <데미안>도 심오하기 짝이 없다. 또한 나님의 인생책인 <돈키호테>도 굉장히 호불호 갈리는 작품이 아니던가. 그런고로 <안나 카레니나>도 별 기대 없이 읽긴 했지만 진짜 이 정도일 줄은 짐작도 못했다네.


나에게 크나큰 상처를 준 사람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까. 나는 속이 좁아서 그런지 가해자들을 결코 용서해 줄 마음이 없다. 가끔 학폭 연예인에게 사과받은 피해자들이 용서했단 소식을 듣는데,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도 안 가고 용납도 안된단 말이다. 가해자가 죄를 뉘우치고 갱생의 삶을 보낸다 한들 그건 그거고, 내 심정은 그가 평생 저주와 고통 중에 살아가길 바랄 뿐이다. 그것처럼 나는 주인공 안나의 용서받지 못할 죄와 허물을 죽어도 용서해 줄 수가 없음을 미리 밝혀둔다.


읽는 내내 안나가 진짜 미치도록 혐오스러웠다. 온갖 교양 있고 고상한 척은 다 해놓고, 불륜남의 애까지 가진 채 남편을 대놓고 상처 주고 욕보이는 그 꼬라지가, 정녕 사람이라면 이럴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런 안나 부부에게 이런저런 상황을 줘가면서 참회와 용서를 하는 것이 최고의 미덕인 양 연출하고 있는데, 아무리 시대와 정서가 다르대도 그렇지, 이건 진짜 아니잖냐는 말 밖에 안 나왔다. 나의 이 수준 낮은 감상이, 전 세계가 극찬하는 명작의 진정한 가치를 깎아내렸는지도 모른다. 그래, 지금 나는 작품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읽고 이상한 포인트에 꽂혀 헛소리를 하는 걸 수도 있다. 설령 그렇다 해도 지금으로썬 그럴듯한 작품성을 논하기가 어렵다. 근 몇 년간 읽은 것 중에 이토록 불쾌한 작품도 없었단 말이다.


키티가 레빈을 두고 훨씬 스펙 좋은 남편감을 골랐을 때는 내가 다 수치스러워서 혼났다. 곧이어 똥차를 골랐다는 걸 알고서 바로 태세 전환을 한 키티도 솔직히 밥맛이었고, 그녀에게 치욕과 모멸감을 받은 레빈이 그렇게 금방 헬렐레하는 것도 너무나 한심했다. 퇴짜 맞고 그렇게나 괴로워했으면서 레빈 네놈은 자존심도 없더냐는 말이 계속 올라왔더랬다. 결국 키티를 차지한 그에게는 ‘사랑 앞에 자존심 따위가 무슨 소용이냐‘는 말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심지어 그를 비교질했던 키티의 모친도 마지못해 기뻐해 주는데, 아주 그냥 역겨워서 미칠 지경이었다. 원래 사랑이란 게 지들만 좋으면 장땡이래도 이들의 내막을 아는 독자로써 절대 축복해 줄 수가 없었다.


작품 초반에 안나는 친오빠의 바람을 새언니가 용서하도록 설득한 데에서 자신의 성숙하고 고상함을 비췄으나, 정작 자신은 오빠보다도 더한 불륜으로 가족과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고도 뻔뻔하게 남편 탓으로 돌린다. 처음부터 양심도 없고 싹수도 노란 캐릭터라면 그러려니 할 텐데 온갖 고고한 척, 교양 있는 척은 다 해놓고 막상 불리하다 싶으면 회피하거나 합리화해대니 참 가증스럽기 짝이 없다. 심지어 뒤에 가서는 자기가 나쁜 X이고 남편은 선하다는 말로 호소하여 주변 모두의 연민과 동정을 끌어낸다. 그렇게 상황은 역전되어 남편은 죄인이 되고, 안나는 고통과 죄책감을 덜어낸다. 재차 말하지만, 이런 내용일 거라고는 진짜 상상도 못했다.


역겨움의 향연은 끝이 없다. 온 도시와 사교계가 안나와 이혼하려는 남편을 흉보고 욕하고 뜯어말린다. 안나가 혼외자까지 낳았음에도 다들 하나같이 그녀를 너그럽게 용서하고 봐달란다. 어쩜 단 한 명도 남편의 손을 들어주는 이가 없을까. 아무리 안나의 평판이 우수했다 한들 그 가면이 다 발가벗겨진 마당에서조차 남편이 대신 몰매를 맞아야 하냔 말이다. 기독교 문화가 지배적인 러시아 사회에서, 굳건하고 신실한 신앙인인 남편보다도 거의 탕자나 다름없는 안나가 더 높은 대우를 받는다는 게 이해가 가질 않는다. 진정 ‘트루먼쇼‘가 따로 없다.


새로운 안나 부부는 시골에서 그들만의 건축사업을 바탕으로 오손도손 살아간다. 본판이 총명했던 그녀는 새 남편 못지않게 지식을 익혀서 사업에 적극 보탬을 주었다. 하여 모든 게 순탄히 굴러가다 보니 새 남편은 점차 삶에 권태를 느끼고, 또 남자만의 독립성을 잃었다고 느꼈는지 지방자치 선거에 나가기로 한다. 여기에는 진짜 후보자의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미세하게 부딪히는 아내와의 거리감을 두기 위한 목적이었을 터. 안나는 그와 주변의 바람대로 전 남편과의 이혼을 추진하지 않는 데다가, 그녀의 능력이 자기 사업에 영향을 주는 게 내심 불편했을 것이다. 그러나 기싸움의 무의미함을 알기에 스리슬쩍 상황을 넘겨버릴 때가 잦아들고, 안나는 그이의 마음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걸 깨닫는다. 자신의 모든 걸 포기하고 사랑에만 매달렸던 그녀,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딸보다도 더 남편을 사랑한 안나에게, 새 남편의 애정이 식어버린 눈빛은 절망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둘 다 겉으로는 이상적인 부부의 역할과 책임을 다하는 중이었지만 이미 쇼윈도 부부나 다름없었다.


공직자였던 첫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했다고 느껴 불륜까지 저지르고 참 사랑을 쟁취한 그녀. 그러나 콩깍지가 벗어진 새 남편이 슬슬 사회생활에 전념하자, 안나는 그의 느슨해진 사랑에 전과 같은 외로움으로 고통을 받는다. 이제 자기랑 놀아줄 사람이라곤 현 남편 하나뿐인데, 별 영양가도 없는 수다나 떠는 것을 어느 남자도 좋아할 리 없다는 사실 때문에 그녀의 속은 곪아만 간다. 진정 사랑 말고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지만 이쯤 되니 사랑이 밥 먹여주는 게 아님을 깨닫는 중이었다. 결국 그녀는 전 남편에게서 느꼈던 불만과 권태를 똑같이 느끼며 그 불화의 과정을 되풀이하게 된다. 그리하여 가면 갈수록 안나의 사랑 타령은 막장 드라마를 찍는다. 의부증, 편집증, 신경증, 온갖 증상으로 남편을 몰아세워 싸우고 자책하기를 반복한다. 이렇게 안나가 미쳐 날뛰는 장면이 그나마 볼만했는데, 이 재밌는 구간도 오래 가진 못했다. 결국 그녀는 철도에 뛰어들어 자살함으로 생을 마감한다. 사실 작품 초반부터 안나의 외도와 그 말로는 이미 예견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결코 스포가 아니라는 나름의 합리적 변명을 해본다.


안나의 죽음 이후로도 약 100p의 분량이 남아있었다. 뒷 내용에서 안나에 대한 언급은 일절 없었으며, 키티의 남편인 레빈의 뜬금없는 종교적인 자아성찰 퍼레이드가 시작된다. 쭉 무신론자였던 레빈은 결혼 이후 존재와 삶의 이유 같은 거대한 의문들에 휩싸이고, 톨스토이는 레빈의 입술을 빌려 온갖 철학적인 방향과 대안들로 자문자답을 반복한다. 어쩌면 이 마지막 챕터의 질문과 대답들이, 납득하기 어려운 안나의 사상을 이해시켜줄 만한 단서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러거나 말거나 전혀 흥미가 없었던 나님은 열심히 스킵 해버렸다. 명성에 대한 기대 때문에 첫 장부터 끝 장까지 꼼꼼하게 읽을 필요는 없다는 말과 함께 이만 리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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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턴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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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석하게도 나님은 여태까지 단편소설의 매력을 못 느끼는 중이다. 그 누가 썼든지 간에 단편은 내게 쓰다 만 미완의 원고로 느껴질 뿐. 소설을 하루 24시간으로 비유하자면, 장편은 최소 9 to 6이다. 그 정도면 개인의 일과를 충분히 파악할 만한 분량이다. 한데 단편은 뭐랄까, 가장 루즈한 시간대인 2 to 3라는 인상을 받는다. 고작 그 정도로 누군가에 대해 알면 뭐 얼마나 알겠냐는 거다. 그래서 단편은 아무리 잘 써봤자 팥 없는 붕어빵이 되고 만다.


가즈오 이시구로를 참 좋아하지만 단편집은 솔직히 그냥 그랬다. 원래도 글에 잘 힘주지 않는 양반인데, 분량이 줄어든 만큼 더 밍밍한 맛이랄까. 총 다섯 편으로, 전부 음악과 관련된 내용이다. 다 다른 인물의 이야기지만 한 사람의 연속된 내용으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뮤지션이 되고픈 이들의 잡다한 고충과, 영감을 주는 주변인들과의 만남.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오가는 수만 가지 감정들. 고통과 희망이 공존하는 세상에서, 나의 선택은 도약과 미련 중에 무엇인지를 알아가는 나날들. 이제는 흔하디흔한 예술가들의 낡아빠진 이야기라서, 더욱 재미없게만 느껴지기도 한다. 이시구로 특유의 잔잔 바리 감성은 볼 수 있었다만, 딱히 뭐.


막상 읽어보면 음악에 관한 내용보다는 삶에 대한 태도를 다루는 것에 더 가깝다. 사람이 한 우물만 파다 보면 시야는 좁아지고, 편협한 사고를 갖게 되고, 세상과의 단절로 고립되는 수순을 밟는다. 하는 일들이 잘 풀리면 그나마 다행인데, 어디 그러기가 쉽나. 그래서 내 신념과 부닥치는 상황이 오거나, 나의 굳건한 신조를 한 수 접어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괴로움의 크기는 배가 된다. 하지만 그런 순간이야말로 자신의 아집과 편견을 깨뜨리고 한 층 더 성장할 기회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 뭐, 기왕이면 실패보다는 성공을 통해서 성장하고 싶겠지. 헌데 호락호락하지 않은 현실 앞에서 뭐 어쩌겠어. 정 굴복하기 싫다면 유연하기라도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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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 복덕방 - 신비한 공간을 빌려드립니다
도선우 지음 / 나무옆의자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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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고전문학 위주로 읽다 보니 아무래도 국내 문학을 안 찾게 된다. 국내 문학은 앞서 힘겨운 작품을 완독한 뒤에 숨 좀 돌릴 겸 읽곤 했는데 그마저도 잘 안 하게 된다. 올해는 고작 2권 읽었더라. 사실 내가 국내 문학하고 멀어지게 된 이유가 있는데, 몇 년 전부터 나오는 주류 작품들이 죄다 sf 장르여서 그렇다. 그 트렌드의 시작은 아마도 정세랑 작가였던 것 같다. 그 후로 국내 작가들이 우후죽순 근미래 sf 일상물을 찍어내는데, 일단 나님은 그 바닥을 썩 좋아하질 않는단 말이다. 한동안 관심을 끊었더니 요즘 국내 작가라는 누가 누군지도 잘 모르겠어서, 그나마 내가 잘 아는 선우 행님의 <도깨비 복덕방>을 읽어주었다. 줄곧 묵직한 작품만 내다가 갑자기 힐링 물이라니, 결국 이 행님도 자본주의에 굴복했구나 했는데 읽어보니 그게 아니었다. 이제야 비로소 내가 알던 과거의 비토씨로 복귀하셨더군. 개인적으로 반갑고 기뻤다.


말 그대로 도깨비가 운영하는 복덕방의 소유지(매물)에서 단기 거주하게 된 인물들의 에피소드들을 다루고 있다. 어쩌다 그 복덕방을 찾게 된 사람들은 세상에 버림받아 물러날 곳이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그들의 입장을 꿰뚫어 본 도깨비들은 복덕방으로 그 발걸음들을 이끌었다. 평범한 사람의 외모를 하고 있는 그들이 도깨비라는 걸 알리 없는 손님들은 뭔가에 홀린 듯이 도깨비와 계약을 맺고 소개해 준 집들에 들어가 고통에서 잠시나마 해방 받는 휴식기를 가지게 된다. 이렇게만 보면 뭔가 시시한 얘기들 같지만, 이 작품의 액기스는 복덕방을 방문하기 전까지의 손님들 이야기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좀처럼 해결되지 않는 문제와 고충을 담고 있어, 마치 나의 일처럼 와닿고 느껴지는 그런 게 있었다. 반대로 나 같은 기분이 들지 않는 독자가 있다면 아직 살만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각 편의 분량이 길지 않아 줄거리는 생략하는 게 맞겠다.


한 201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과 일본에서 사회소설이 참 많이도 출간되었다. 그때는 이 같은 사회 이슈에 한 명이라도 더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런 노력의 덕분일까, 이제는 갖가지 문제마다 국민의 높은 관심과 참여도를 볼 수가 있다. 헌데 그러면 뭐 하냐. 해결되거나 나아지기는커녕 갈수록 모든 것이 악화돼가고 있다. 일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경기는 더욱 침체되고, 인심은 전부 사라지고, 교육들도 다 무너지고 있다. N포세대는 NN포세대가 되었고, 근면 성실로 열심히 살아본들 보상 하나 없는 현실인데.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사는 인간들마저 한숨짓고 좌절하는 오늘날, 어쩌면 개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더는 없다고도 생각된다. 그런 나에게 도선우 작가는 ‘사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었다. 나같이 삶에 의미를 찾고 부여하는 타입들은, 이제 그런 태도와 자세를 좀 내려놓긴 해야 한다. 어딘가에서 본 건데 인생이란 하나의 산책과도 같다고 하였다. 우리가 산책을 하러 나갈 때 거기에 어떤 대단한 의미를 두는 건 아니지 않냐면서. 그냥 걷는 것 자체가 목적인 산책처럼, 우리네 삶과 인생도 그럴 필요가 있다는 얘기였다. 그런 맥락으로 선우 행님은 이 작품을 써낸듯하다. 뭔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냐는 분들은 아직도 인생을 헛살고 있는 것이다. 그 무엇도 당연한 것은 없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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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 을유세계문학전집 74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장희창 옮김 / 을유문화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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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책을 고르는 기준은 없지만 올해는 비교적 네임밸류가 있는 작품 위주로 노력 중이다. 그렇게 영 손이 가질 않았던 <파우스트>를 도전했고, 이것이 올해의 가장 잘한 일중 하나가 되기를 바랐으나 어림도 없었다. 보통 어렵고 난해한 작품을 만나면 내 독서력이나 수준을 탓하는 편인데, <파우스트>는 전적으로 작품 탓을 하게 만드는 뭔가가 있었다. 아무튼 이번 리뷰는 망했으니 짧고 굵게 간다.


삶이 따분해진 척척박사 파우스트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 계약을 맺는다. 악마는 하인이 되어 그의 생애 동안 향락을 제공할 것이고, 만사에 흥미 잃은 주인공은 절대 타락하지 않을 자신감으로 승낙한다. 혹여 악마의 접대가 흡족하기라도 하는 날에는 기꺼이 파멸을 맞겠다며 악마에게 영혼의 권리를 넘긴다.


나님은 악마가 지상 최대의 똥꼬쇼 따위로 주인공의 흥을 돋워주나 했다. 허나 그런 기대와 달리 악마는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일깨울 뿐이었다. 지성과 이성의 끝판왕인 파우스트한테 그딴 게 과연 먹혀들까? 아주 효과 만점이었다. 악마는 파우스트에게 에로스를 통한 쾌락을 선사하고, 사탄의 파티에도 초대하고, 섬과 궁궐로 데려가서 온갖 볼거리를 제공한다. 그나마 1부는 어찌어찌해서 따라갔는데, 2부는 흐름을 놓쳐서 억지로 읽었다. 진짜 지루해서 혼났다.


내가 기대했던 건 사단에게 시험받는 욥이나 그리스도 같은 성경 속의 이야기였다. 헌데 <파우스트>는 그런 내용과 딴판에다 너무 방정맞고 산만하고 촐싹대는 분위기이다. 비록 무대를 위한 극본이라곤 해도 서사의 핵심은 두각 되어야 하는데 전혀 그런 게 느껴지질 않았더랬다. 아무튼 1막 2부부터는 영 이해도 안 가고 상황과 흐름 파악도 안되어 내내 스킵 하다가 3막에서 하차해버렸다. 그냥 해설의 도움이나 받는 게 낫겠더군. 해설에서는 악마가 주인공을 지상과 천상과 지옥을 다 데려갔다고 나오는데, 하도 장면이 확확 바뀌어서 어느 파트가 지옥이고 천상이었는지도 잘 모르겠더라. 그리고 뒤로 갈수록 파우스트와 악마는 쏙 들어가고 별별 인물들이 무대를 차지하여, 도무지 뭐가 뭔 내용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아오.


못다 읽은 분량은 해설로 만족하고 싶었는데, 그 해설마저도 하차해버렸다. 서사보다는 각 대사에 들어간 힘과 의미를 강조하는 작품이라 해설 또한 갖가지 해석에만 맞춰져있어 재미가 읎다. 이번에도 읽었다는 데에 의의를 두기로 한다. 완독도 안 하고서 이런 말 하기 민망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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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종말
그레이엄 그린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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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의 인트로를 어떻게 시작할지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그냥 쓴다. 대체 사랑이 무엇이관대 저마다의 정의가 이토록 다른 것인가. 시작조차 못 해본 사랑도, 영영 끝나버린 사랑에도, 우리는 여전히 살아 숨 쉬는 현재진행형으로 대한다. 그런즉 엄밀히 말해서 사랑의 시작과 끝을 논하는 일은 무의미하다는 결론이다. 사실 인간이 느끼는 모든 감정들이 다 그러하다. 그래서 한번 각인된 강렬한 기억들은 소멸치 않고 평생 안줏거리로 남는다. 그 말은 곧 그 감정의 시효가 따로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째서 특정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오래 지속될까? 나는 모든 감정이 사랑에 뿌리 두고 있어서라고 결론을 내렸다. 분노, 슬픔, 허무, 괴로움, 우울 등의 어두운 감정들도 잘 보면 하나같이 사랑의 결핍과 연결돼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롬13:10)이라고도 하지 않았던가.


<사랑의 종말>에서는 사랑의 마침표를 신앙의 탓으로 돌리는 두 남녀가 등장한다. 모리스가 사랑하는 세라는 이미 유부녀였다. 그녀의 남편은 집안과 아내를 방치했고, 그래서 주인공과 세라는 실컷 사랑을 나눴다. 이 관계에는 반드시 끝이 있음을 알고도 뛰어들었지만 그 끝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찾아왔다. 평소처럼 꽁냥거리던 두 사람은 갑작스러운 공습을 받게 된다. 그리고 죽다 살아난 주인공은, 그녀에게서 실망의 기색을 마주한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일까.


이들의 관계는 수년간 중단되었고, 주인공은 세라에게 또 다른 정부가 있을 거라고 추측했다. 그는 사람을 시켜서 그녀와 가까운 남정네들을 알아낸다. 역시 그럼 그렇지, 하던 중에 확보한 세라의 일기장을 통해 그만 눈물바다가 된다. 일기장에는 온통 주인공을 향한 사랑의 고백으로 가득했던 것. 진실은 이러했다. 공습 사건이 있던 날, 죽은 줄로만 알았던 주인공을 보며 세라는 믿지도 않던 신에게 그를 살려달라고 빌었다. 살아나기만 한다면 그이를 영원히 단념하겠다면서. 그리고 일어난 기적을 보자, 이제는 그를 잊어야 한다는 생각에 그만 실망의 표정을 감추지 못한 거였다. 이로써 그녀가 여태 불신해오던 ‘신앙‘을, 억지로 가져야만 하는 입장이 되고만 것이다.


이 모든 사태의 전말을 알게 된 주인공은 곧바로 세라를 찾아가 다시 시작하자며 힘껏 밀어붙인다. 그리고 얼마 뒤에 그녀는 세상을 떠난다. 그는 이 모든 게 신이 개입해서 그렇다며 열렬히 증오한다. 종교도 없는 세라가 억지로 신에게 했던 맹세가 훗날 저주가 되어 그녀를 죽게 만들었다고 믿는다. 이에 독자들은 전혀 다른 데에 원인이 있음을 알고도 왈가왈부할 수가 없다. 세라의 죽음 이후로 주인공은 종교와 신앙, 또 그와 관련된 것들을 부정하고 비난한다. 이렇게 신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온갖 악행과 사고와 재앙으로 피조물에게 늘 원망을 받는다. 그도 그럴 것이, 신앙인들은 안녕과 평화, 구원을 위해 신을 찾고 종교를 갖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소망과 정반대의 결과를 얻었을 때 신앙은 하등 보잘것없어지고, 비종교인들은 덩달아 조롱할 이유가 생겨난다. 아무리 명확한 인과관계가 있다 해도 인간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대로만 믿는다. 그런 존재이다.


작품의 주제의식은 이제 사랑을 가로막는 신앙 그 자체로 향한다. 주인공은 그녀가 어엿한 신자가 되고 싶어 했음을 알게 되고, 그 배신감으로부터 해방되려고 안간힘을 써보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그런 식으로 이야기는 끝이 난다. 뒷심이 딸려서 좀 이상하다 싶었는데, 원래는 저자가 분량을 더 붙이려다 말았다고 한다. 아무튼 <사랑의 종말>은 신앙에 포커스를 두면 재미가 덜하고, 사랑에만 집중한다면 꽤나 재밌을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저자의 일화였다는 비하인드를 듣고서, 그린의 순애보에 박수를 보내고 싶어졌다. 그가 완전히 눈을 감던 날까지도 그의 사랑은 멈추지 않았을 거라고 본다. 남은 평생을 증오로 보냈든, 후회와 미련 속에 살았든 간에 말이다. 이렇듯 진정한 사랑에는 결코 마침표가 새겨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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