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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어주는 남자 ㅣ 시공사 베른하르트 슐링크 작품선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시공사 / 2013년 3월
평점 :
To, H.
너의 가장 오래된 친구로서 해주고 싶은 말들이 있어 편지를 쓴다. 전보다는 표정이 많아진 것 같던데, 좀 어때? 이제는 그 지독했던 환멸과 염세에서 떠나온 거니? 아마 너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한때 네가 그토록 어둡고 부정적이었다고는 상상조차 못할걸. 그만큼 지금의 네 모습이 보기 좋다는 얘기야. 그나저나 이제 우린 젊다고는 할 수 없는 나이가 돼버렸네. 게을리 살든, 바삐 살든 지나간 시간들이 아까운 건 다 똑같은가 봐. 주변에서 하나둘씩 세월을 그리워하는 게 느껴지거든. 그런데 너하고 나는 그 반대였어. 오히려 시간이 약이라서 다행이다 싶어 했지. 특히 너의 영원할 것만 같았던 고통과 증오가 옅어진 걸 보면 더욱 실감 나. 그래서 옛날 어르신들이 오래 살고 볼일이라는 말들을 했던가 봐.
참. 러브스토리의 드라마를 즐겨본다는 말에 솔직히 놀랐어.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정말 의외였어. 너는 드라마 자체를 잘 보지 않는 데다 그런 장르는 취향이 아니었던 걸로 아는데. 내 기억으로는 J와의 실패한 연애로부터 어떤 연애물도 찾는 법이 없었지, 너는. 그래서 완전히 달라진 네 모습 가운데 그 점이 가장 신선했어. 사랑했던 이에게 배반당하는 기분, 그 경험과 기억들은 좀처럼 극복하기 힘들지. 어떤 이들은 또 다른 사랑을 잘만 찾아가는데 너는 그런 성격도 아니었잖아. 한 사람에게만 마음을 다 쏟아부어서, 다음 사람에게 줄 것이 남아있지 않은 그런 타입이잖아. 솔직히 너의 순애보가 이해되면서도 현실감이 모자라서 큰일이라고 생각했었거든. 때마침 우연하게도 이번에 읽은 <책 읽어주는 남자>를 통해서 H, 너의 해소되지 않는 미련과 앙금들이 확 이해가 되었어. 그래서 내가 느낀 것들이 맞는지 어떤지 확인받고 싶어졌거든. 잘 들어봐.
내가 읽은 책의 내용들을 곁들여 설명할게. 먼저 중학생 남자애가 삼십 대 여자의 섹스 파트너가 돼. 매일을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정이 들었지. 물론 여자는 소년의 어설픈 구애 따위에 걸려들지 않아. 물론 그러시겠지, 짬 차이가 얼만데. 근데 사귀자는 말만 안 했지, 연인들이 하는 건 다 하는 사이야. 아무튼 소년을 쥐락펴락하는 그녀를 보면서, 모든 남자들의 첫 연애는 무조건 여자한테 잡혀사는 주종 관계가 된다고 느꼈어. H, 너도 그랬듯이 이건 남자들이 호구이기를 자처하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어. 남자들에게 있어서 첫사랑의 위력은 ‘개츠비‘ 하나로 설명이 가능하지. 그런데 여기서 두 유형으로 갈라져. 첫 연애가 짧은 사람은 이내 상처를 회복하고 곧이어 성숙한 사랑을 하게 돼. 반대로 첫 연애가 좀 길었다 싶은 사람들이 문제야. 가장 순수했던 시절의 첫 경험들이 저주가 되어서 평생을 따라다니니까. 어느 노래의 가삿말처럼,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에 그 사람이 있는 거야. 하등 의미 없는 일들까지도 그 사람의 기억이 대신해버리지. 그래, 맞아. 다 네가 나한테 해줬던 얘기들이야. 그만큼 <책 읽어주는 남자>의 주인공은 딱 너를 닮아있어.
어느 날 그녀는 말 한마디 없이 소년을 떠났어. 그녀에게 뭔가 잘못했던 걸까? 소년에게 그만 싫증이 난 걸까? 좋았던 관계가 갑자기 틀어져 버리면 아무래도 내 잘못인 것만 같잖아. 그래서 H, 너도 그토록 자책했었던 거였고. 사랑이란 놈은 말하자면, 자동차끼리의 교통사고 같은 거야. 나만 운전을 잘해봤자 소용이 없거든. 그게 내가 살면서 보고 듣고 배운 사랑에 대한 결론이야. 소년도, 너도 차라리 확실한 이별이었다면 덜 괴로웠을까. 너를 보면서 흐지부지하게 끝난 사이에는 납득이 들어설 자리가 없단 걸 알게 됐어. 현실에는 열린 결말 따윈 없다는 사실까지도. 아무튼 위대하신 첫사랑이 대 실패로 끝난 남자들은 거의 대부분 각성하는 것 같아. 외모를 가꾸고, 스펙을 쌓고, 명성을 키우는 등 광적인 자기 계발에 들어가더라고. 난 그것이 다음 사랑에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 더는 호구로 남아있기 싫어서라고 생각되지 않아. 분명히 그 밑바닥에는 ‘후회하게 해주마‘라는 무의식이 깔려있어. 다시 만날 거라는 보장도 없지만, 혹시 모를 그 언젠가를 계산에 넣는 게 남자들이니깐. 다만 H, 너는 각성이 아니라 흑화에 가까웠어. 그래서 안타깝긴 했어도 뭐라 할 생각은 없어. 너의 전부를 지켜본 나로서는 네가 자살하지 않은 것만 해도 대단하다고 생각하니깐.
몇 년 후, 소년은 법대생이 되었어. 어느 법정의 재판에 참관했던 그는, 피고인으로 앉아있는 그녀를 보게 돼. 놀랍게도 그녀는 친위대에 들어가 수용소의 감시원이 되었다고 해. 그리고 수감자들을 건물 안에 가두고 화재로 전부 죽게 했다는 게 죄목이래. 옛사랑과의 재회가 온통 배드 뉴스라니. 너와 내가 학수고대하던 그림은 이런 게 아니었잖아. 너를 버리고 떠났던 J의 ‘죄‘가 밝혀졌음에도 너는 습관처럼 스스로에게서 원인을 찾고 죗값을 물었지. 주인공도 마찬가지였어. 내가 정말 저 정도 밖에 안되는 사람을 사랑했던 것인가 하고. 그처럼 너도 실망과 비난의 화살은 전부 J가 아닌 너에게 겨눴지. 이제 슬슬 편지의 목적을 눈치챘길 바래. 아무튼 주인공은 하루도 안 빠지고 재판에 참석했어. 예외 없이 각성했던 그는 전과 달리 이성적으로 그녀를 바라볼 수 있게 된 거야. 그 덕분에 동기 여학생과 결혼도 하고 딸까지 얻은 미래를 만들 수가 있었어. 하지만 너도 느꼈다시피 ‘두 번째‘ 애인과는 십중팔구 배드 엔딩이 되고 말지. 그런 의미에서, 모든 남자들의 ‘두 번째‘는 가장 불쌍한 운명이 아닐까 싶어.
다시 잘해보고 말고 할 것도 아닌, 전혀 가망이 없음에도 놓지 못하는 너의 그 감정들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또 사랑까진 아니라 한들 달리 무엇으로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을까. 지나온 날들처럼 앞으로도 종용히 삭히는 것 말고는 없을 테지. 그래서 주인공도 종신형을 선고받은 그녀를 멀리서 바라보는 게 다였어. 더는 할 말이 없다면서 냉소적인 태도를 하고는 있지만, 누가 알겠어?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던가, 그걸로 됐다던가 하는 말들은 다 허울좋은 변명에 불과하단 걸 네가 더 잘 알잖아. 진상을 규명해서 득이 될 게 전혀 없다 해도 남겨진 자들은 알아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해. 그치만 주인공은 그녀를 직접 마주할 뜻은 없었고, 단지 지금도 내가 당신을 기억한다는 의사만 전달하고 싶어 했어. 그래서 한때 그녀에게 책을 읽어주었던 것처럼, 낭독을 녹음한 카세트테이프를 교도소에 보냈어. 무려 10년이 넘도록 그걸 했다네. 사랑이 죽어버린 요즘 같은 시대에는 그게 대단해 보일지 모르겠다. 우리 때는 ‘싸이월드 댓글 100개 쓰기‘ 같은 것들도 아무렇지 않게 했었는데. 너와 J가 주고받은 편지들이 생각나. 상자에 가득 채울 만큼 차고 넘쳤던 편지들. 또 그것들을 하나씩 불태우던 네 얼굴까지도. J의 흔적을 다 없애면 후련해질 거라던 너의 확신은 보기 좋게 빗나갔어. 그러게, 다른 건 몰라도 편지는 간직하라고 말했잖아. H, 너는 꼭 내 말을 안 듣고 나중에 가서 후회하더라.
언젠가 네가 스치듯이 해준 얘기가 있어. 차라리 괴로운 기억이 하나도 없는 사람들이 부럽다던. 요즘 뉴스에서는 갈수록 연애 자체를 하지 않는 사람들이 늘고 있대. 그러면 네 말대로, 사랑을 해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더 낫다는 걸까? 글쎄. 나는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 그 끔찍한 터널을 지나오면서 우리는 성숙해지고 인간에 가까워질 수 있었으니까. 오히려 지워버릴만한 추억조차 없는 이들이 불쌍해 보여, 나는. 이 얘기를 네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냐. 이제 너는 속박과 굴레를 벗어던진 나비가 되었으니까. 너도 참 징글징글한 놈이야. 그래서 말인데, 이젠 그만 좀 잊으라고 했었던 말들을 철회할게. 그런 말은 하는 게 아니라는 것도, 그게 얼마나 잔인한지도 잘 알았어. 너처럼 삶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한테 내가 너무 몰아붙였던 것 같아서 정말 미안해. 그냥 지금처럼 잊고 살아가다 한 번씩 회상하고 울적해지고 추억 팔이 하는 정도여도 좋을 것 같아. 그러니 앞으로는 너를 통제하거나 고치려 들지 않을게. 그리고 H, 나는 네가 다시 한번 ‘편지 쓰는 남자‘가 되기를 바라. 그것이 너의 아이덴티티라는 걸 부디 잊지 말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