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급 한국어 ㅣ 오늘의 젊은 작가 30
문지혁 지음 / 민음사 / 202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볍게 읽을만한 책을 고르긴 했는데 이렇게 가벼울 줄은 몰랐네요. 현대문학의 경계선이 어디까지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이런 작품도 대중소설로 쳐주는군요. 그 정도로 재미없었냐고 하면 그건 또 아니고, 알맹이가 없느냐고 하면 그것도 잘 모르겠습니다. 호흡이 매우 짧은 편이라 되게 건성으로 썼다는 인상이 강하네요. 그러면서 이 얘기 했다, 저 얘기 했다를 자주 반복해서 산만하기까지 해요. 작가님이 무얼 말하고 싶은지는 대강 알겠는데 진짜 이게 맞냐고 되묻고 싶네요.


미국 대학에서 한국어 강의를 맡게 된 문지혁 씨의 이야기. 초보 강사의 애환과, 외국인들을 상대하는 이방인의 고충들을 가볍고 위트 있게 써 내려갑니다. 시트콤의 장면 장면들을 잘게 쪼개어, 마치 유튜브 쇼츠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들더군요. 이주 노동자의 팍팍한 삶을 다큐로 찍지 않은 건 좋았지만 ‘찍먹‘을 남발해대니 내가 지금 책을 읽는 건지 누군가와 스몰토크를 하고 있는 건지 분간이 가질 않던데요. 뭐, 좋습니다. 외국인들의 한국어 수업에서만 볼 수 있는, 오직 한국 독자만 피식할 수 있는 썰이라면 이런 기법도 나쁘지 않아요. 헌데 수업뿐만 아니라 다른 내용들도 다루겠다면 그에 걸맞은 변화를 줬어야죠. 한국에 계신 어머니가 뇌졸중으로 입원했다는데 무슨 뫼르소라도 된 것마냥 일정한 톤으로 흘러가는 건 좀 아니었습니다.


별로 특별한 서사도 아니고, 인상 깊은 장면도 딱히 없어서 길게 리뷰하고 싶은 마음이 없네요. 강사로 지내면서 틈틈이 글을 써 소설가가 되겠다는 설정도 참 진부해 보였습니다. 주인공이 스스로를 제법 반듯하고 건실한 인물로 묘사하던데, 정작 독자의 시선에서는 깃털처럼 가벼운 사람으로만 보입디다. 어학수업 해프닝 한 스푼, 가족이냐 꿈이냐 한 스푼, 이주민의 고충 한 스푼. 패턴도 비슷해서 그 어느 것도 중요해 보이지가 않아요. 이제 막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한 외국 학생들처럼, 모든 인생 수업도 그와 같다는 걸 말하고 싶었나요? 작가님 프로필을 보니까 대학에서 글쓰기와 소설 창작을 가르친다고 쓰여있던데... 진짜 이게 맞나요? 그렇다면 저는 굉장히 혼란스럽네요.


보니까 차기작이 두 편이나 있데요? 이거 시리즈였나 봐요. 다른 독자들은 칭찬 일색이었지만 후속편들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아 기대는 안 합니다. 원래는 SF를 주로 쓰신 듯 한데 제가 또 SF를 좋아하질 않아서요. 엔간해서는 이제 볼 일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럼 2000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리스본행 야간열차
파스칼 메르시어 지음, 전은경 옮김 / 비채 / 202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복잡하고 난해하기로 유명한 작품이라도 그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단어가 있기 마련입니다. 저는 그 단어를 찾아내어 서사를 해석해나가는 독서를 즐기는 편인데요, 아쉽게도 이번 작품은 끝내 그 무언가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페이지마다 밑줄 쳐야 할 정도로 훌륭한 문장이 많았지만 그 문장들이 일관된 메시지를 던진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어요. 그저 떠다니는 철학적 질문들을 이 한 권에 압축시켜놓았다는 인상만 받았습니다. 아무튼 평을 하기가 적잖이 부담되어 남들이 쓴 글들을 훑어봤지만 딱히 이거다 싶은 건 없더라고요. 하는 수없이 제가 그나마 발견한 ‘부재‘를 중점으로 해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부재의 사전적 의미는 ‘그곳에 없다‘입니다. 즉 마땅히 있어야 할 무언가가 빠져있어 느껴지는 공허함이죠. 친숙했던 것들이 한순간에 낯설어지는 그런 감각은, 부재가 끝나고도 계속해서 남아있는 경우가 있어요. 그런 기분과 경험들이 겹겹이 쌓이다 보면 공황으로까지 이어지기도 합니다. 내 일부를 잃어버린듯한 공포가 나 자신을 얼어붙게 만들고 더 이상 이전의 나 자신이 아니라고 믿게 만들거든요. 여기서 좀 더 들어가면 자기혐오나 실망으로까지 번지는데, 파스칼 메르시어가 다룬 부재들도 그런 실망으로 가득했더랬죠. 따라서 이 작품에서의 부재란, 사람보다도 감정의 부재라는 표현이 더 맞을 겁니다. 혼란하고 뒤숭숭한 기분이 드는 건 본인의 감정들이 가만있질 못하고 둥지 밖으로 이탈했기 때문이에요. 정확히는 이 감정의 부재가 존재를 증명한다고 봐야겠죠.


고전문헌학 교수인 그레고리우스는 다리 밑으로 뛰어내리려는 포르투갈 여성을 구해낸 뒤로 완전히 딴 사람이 됩니다.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언어학자인 그가 강의하다 말고 뛰쳐나가서는, 교수직을 내려놓고 이곳 스위스를 떠나 포르투갈로 떠나겠다는 겁니다. 아까 만났던 포르투갈 여성에게 반해서였을까요? 재미없게도 이번 주인공은 그런 원초적인 감정에 휘둘릴만한 인물은 아니고요, 단지 그 여성이 내뱉은 포어 발음에 깊은 매력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의 충동적인 결심에 불을 지핀 것은 따로 있습니다. 우연히 들린 서점에서 발견한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포르투갈 책 내용에 완전히 매료되었거든요. 그 책의 저자인 프라두 의사는, 자신이 알던 고대 사상가들에 가까운 깊이의 질문들을 담아내고 있었습니다. 바위처럼 확고부동한 그레고리우스의 심장을 요동치게 한 포르투갈이라는 국가는 대체 무엇일까. 이리하여 주인공은 무작정 리스본으로 가서 프라두 의사를 만나보기로 합니다.
​

책만 읽던 양반께서 갑자기 모험가의 탈을 쓴다는 전개가 제법 그럴듯하죠? 허나 현실은 무계획으로 배낭여행을 나서는 대학생만도 못한 일정이었습니다. 읽을 땐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주인공이 일부러 그런 상황으로 자신을 몰아넣은 게 아닌가 싶어요. 나 자신의 전혀 다른 면을 끄집어낼 필요가 있었다면, 그것 또한 내 안에 무언가가 부재 중임을 느꼈기 때문일 겁니다. 프라두 의사의 글처럼, ‘우리가 많은 경험 가운데 기껏해야 하나만 이야기한다면(30p)‘, 그레고리우스가 일평생을 바쳤던 고전 학문들도 겨우 일부분만을 논할 따름이란 얘기겠죠. 단지 그뿐일까요? 살면서 경험한 수많은 것들 중 우리의 눈과 귀와 입술에 남아있는 모두를 다 합쳐봐야 얼마 되지도 못합니다. 그게 다 삶을 소유하려고만 하고, 인생을 정복의 대상으로 여긴 탓입니다. 특히나 천재 소리 듣고 자란 그레고리우스 같은 유형들은 여기서 벗어날 수가 없었죠.


앞으로의 여행에서 주인공이 만나게 될 인물들은 하나같이 크고 작은 울림과 영감을 주고 갑니다. 열차에서 만난 사업가 실베이라는 이런 말을 건넸죠. ‘자기가 지닌 공포의 진짜 이유를 알 사람이 어디 있겠냐고요(69p)‘. 인간은 전체 중에서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하기 때문에, 그 밖에 미지의 영역들은 그저 막연하게만 이해할 따름이죠. 그렇게 미지의 영역들은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작은 경험 한두 조각만으로 큰 그림을 이해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이 상태에 익숙해지면, 늘 존재했지만 사회적인 의식 뒤에 숨어있어 깨닫지 못했던 낯섦, 즉 부재에 당황하게 되겠죠. 잘 지내다가도 한 번씩 아픈 기억들에 압도된다면 그것은 감정의 빈자리를 메꾸지 못해서가 아닐까요?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던 그레고리우스가 계속 감상에 젖어있는 이유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
주인공은 <언어의 연금술사>를 발행한 출판사를 찾다가 프라두 의사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듣고, 그의 병원을 지키고 있다는 여동생을 찾아갑니다. 듣자 하니 프라두 의사는 그레고리우스보다도 더한 천재였고, 선생과 교수들도 벌벌 떨게 한 사상가였답니다. 그랬던 그의 유일한 오점이, 자신의 병원에서 비밀경찰 고위 간부를 치료하여 살려놨다는 거였습니다. 그 사건으로 모두에게 질타와 비난을 받았고, 그제야 프라두 의사는 자기 관념 세계에 관한 공상이 해악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일반들에게는 매우 당연하다지만 고차원의 사람들에게는 그게 당연하지가 않아요. 이 친구는 학교 졸업 연설문에도 종교와 신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했단 말이죠? 근데도 워낙 애가 물건인지라 아무도 반박하거나 신성모독으로 몰아가지 않았어요. 정작 이렇게 욕먹어야 할 상황에서 욕먹지 않았던 그가, 의사로서의 본분을 다했을 뿐인데 평생의 욕을 다 먹었으니 멘탈이 나갈 수밖에요. 다들 그렇게 말렸는데 바보가 아닌 이상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를 리가 없어요. 허나 원칙대로 자기 판단에 확신을 가졌던 것이고, 언제나처럼 그 확신은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이들에게 빛이 되어줄 거라 믿었을 겁니다. 정녕 프라두 의사의 오만함이 문제였을까요?

​
귀족의 아들로 태어나 사제가 되려고 했지만 매사에 역설적인 견해를 지녔던 프라두는 소위 세상만사가 아니꼬웠나 봅니다. 많은 일들 중에, 판사인 부친이 타하팔(독재정권)에 연관된 피고인을 봐주었던 장면에서, 프라두는 부친에게 크게 실망하여 자신은 그러지 않으리라는 결심을 했을 거예요. 그랬던 사람이 비밀경찰을 구하여 독재 정권의 편에 선 것처럼 되었으니 스스로에게 얼마나 실망이 컸을까요? 그리하여 프라두 의사는 저항운동가가 되어 속죄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요, 신비주의 프라두 의사 이야기는 실상 여기까지가 다입니다. 그 뒤로도 여러 비하인드가 있지만 기본 틀은 정말 이게 전부예요. 그보다도 읽는 내내 그레고리우스가 이미 죽은 프라두의 일생을 파헤쳐 가면서까지 얻어낼 게 무엇인지 잘 모르겠더군요. 프라두 의사가 쓴 책 속의 물음들, 마치 자신의 것과 같은 그 고뇌들이 해결됐다 해서 주인공의 삶이 바뀌거나 하진 않았으니까요.

​
집안 배경도 그렇고, 성격이나 살아온 방식도 그렇고, 어딘가 묘하게 닮아있는 두 사람. 하지만 주인공이 프라두 의사의 삶을 통해 어떤 위로를 받고 결핍을 채웠다고는 생각되지 않는군요. 이렇게 자기만의 선악과 그 대비가 뚜렷한 사람들은 그 혼돈 때문에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잘 모를 거예요. 저도 참 많이 찔리는 데, 진리에 도달하고자 할수록 오히려 그것과 멀어지기만 할 뿐입니다. 원래 진리는 계산되고 설명되는 성질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프라두, 그레고리우스, 그리고 저의 집착들도 결국 덧없음에 불과합니다. 불쾌한 논리와 서글픈 감정들을 떨쳐내려 힘껏 부정하고 반항해 보지만, 이미 내가 이해하고 있다는 점과 그것들에 압도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방황할 수밖에 없는 거겠죠. 모든 현상에서 양쪽을 헤아릴 줄 알게 되면 옳고 그름의 기준 또한 모호해져요. 그래서 모든 것을 품게 된다면 차라리 나을 것이나 몹쓸 세상은 어느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고요. 하지만 앞서 얘기한 삶을 소유하고 정복하려는 마음을 내려놓는다면 부재도 결핍도 더는 그것이 아니게 될 겁니다.

​
일의 결국을 다 들은 그레고리우스는 여전히 부재와 힘겨루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부재는, 주인공이 확신하고 있던 호메로스의 작품 속에 나오는 단어의 부재 문제로 이어져요. 분명 작품 어느 자리에 있었어야 할 단어가, 아무리 찾고 뒤져봐도 보이질 않는 것이었죠. 이 일은 그간에 있었던 자신의 확신을 완전히 뒤흔들어놓습니다. 망각은 평생 쌓아두고 지냈던 자신의 언어들을 산산이 부술지도 모른다는 공포로 밀려왔죠. 마침내 그 단어를 찾아내긴 했습니다만, 겨우 그 자그마한 경험 한 조각에 죽고 못 사는 게 인생이라니 얼마나 허탈한지요. 이쯤에서 프라두 의사가 남긴 다음 문장으로 슬슬 마무리를 짓고 싶네요. ‘가끔 기차가 언제든지 탈선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깜짝 놀라기도 한다. 그렇다, 나를 놀라게 하는 생각은 대부분 이것이다(532p)‘. 어느새 굳어져 버린 낡은 사고방식, 제때 작동하지 않는 감정들, 이 정도면 됐다 싶은 빛바랜 앎... 이 모두가 한 조각의 경험을 삶의 전체로 받아들인 결과입니다. 또 그럴수록 내 안의 부재들은 실망으로 채워질 테고요. 그러니 이 작품을 읽었다면, 그리고 이 글까지 읽었다면 부디 용감히 탈선하시길 바라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외로운 남자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7
외젠 이오네스코 지음, 이재룡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는 어려서부터 잦은 이사와 전학으로 인해 극 소심한 성격으로 자라났습니다. 친구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도 모를뿐더러, 이미 친해져있는 무리들은 저를 상대해 주지 않았죠. 그 같은 환경이 수차례 반복되다 보니 외로움은 극복의 대상이기보다도 그냥 때 되면 배고파지는 인간의 생리현상 같은 거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저는 점점 세상에 흥미를 잃었고, 장난감이나 군것질 같은 즐거움에도 시큰둥한 태도로 살았어요. 내일이 기대되긴커녕 무의미한 나날들이 참 지겹기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영화 <매트릭스>를 접하고서, 어쩌면 이 세상도 가상 현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영화 <트루먼 쇼>를 보고 나서, 이 현실도 그런 거라고 누가 말해줬으면 싶었었고요. 그렇지 않으면 제가 살면서 느껴온 괴리감들이 도무지 설명되지 않을 것만 같았거든요. 매번 세상은 한 편의 연극처럼 진행된다는 인상을 주곤 했습니다.


남들과 섞이지 못하고 늘 소외돼있던 저는 한국에 와서 적응 못하는 외국인들의 고충을 쉽게 알 수 있었어요. 아마 그래서, 나중에 한국을 떠나 외국에 나가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조차 못 했던 것 같아요. 내가 느낄 외로움은 국내나 국외나 피차일반일 것만 같았거든요. 아무튼 성인이 되어서도 불안, 소외, 외로움, 허무의 근원을 찾아보았지만 전부 허사였습니다. 누군가는 삶에 목적이나 이유 같은 건 없다고도 하고 이제는 저조차 그렇다고 믿지만, 그럼에도 나를 주눅 들게 하는 삶을 볼 때면 억지로라도 그 답이 듣고 싶어지거든요. 근데 살면서 만났던 그 어떤 사람도 저와 같은 부류는 없었어요. 비슷한 정도는 있었어도 깊은 대화까지는 불가했죠. 그런 자리를 만들 때마다 내가 남들을 불편하게 만든다는 생각이 들어, 저조차도 점점 그런 대화를 삼가게 될 뿐이었습니다. 왜 그런 말도 있었죠. 외눈박이 별에서는 양눈박이가 비정상이라고요. 나 자신이 지극히 정상임을 알고 있지만, 남들이 내게 보이는 반응에 그만 스스로를 의심하게 되는 그런 상황. 예. 지난 제 인생을 요약한다면 이 정도가 될 듯하네요.


다행히 문학 속에서는 저의 갈증을 작게나마 해소해 줄 때가 더러 있었습니다. 특히 고전을 읽다 보면 저와 같은 고민을 했던 누군가가 있었다는 사실에 큰 위안을 받곤 해요. 이번에 읽은 <외로운 남자>도 너무 제 얘기 같아서 별 다섯을 주었습니다. 소신 발언하자면, 부족함 없이 나고 자란 분들은 퍽 재미를 못 느끼실 겁니다. 그런 분들은 대개 문학은커녕 이런 글조차도 찾아볼 일이 잘 없죠. 아무튼 책 소개에 앞서 장광설을 늘어놓았는데, 그만큼 제 영혼과 공명했던 터라 생각이 많아져서 그랬습니다. 이제 작품 얘기를 해보죠. 이름 없는 이번 주인공은 서른다섯 나이에 먼 친척의 유산을 물려받아 다소 이른 은퇴생활에 들어갑니다. 그는 파리 외곽의 한 아파트를 구하고 가정부를 고용한 뒤 느긋하게 백수 생활을 즐기고 있죠. 술을 좋아한다는 것만 빼면 세상살이에 별 욕심이 없는 게 저랑 너무 닮았어서 좀 머쓱했습니다. 돈 걱정 없는 자유인이 된 기분도 잠시, 주인공은 따분한 일상에 온갖 잡생각이 밀려들어 온갖 철학 문제에 빠지게 됩니다. 또한 자신이 연극을 구경하는 사람처럼 거리를 두고 떨어져 더 이상 참여하지 않는 사람처럼 느껴졌습니다(48p). 어쩜, 제가 느꼈던 괴리감을 이토록 적확한 표현으로 정리하다니, 완전 반해버렸지 뭡니까.


남들은 모두 출근해서 일을 하고, 집에 돌아와 가정생활을 이어나갑니다. 반면에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는 주인공은 자신만이 유일하게 존재하며, 세상 모두는 존재하지 않는 쓸모없는 것들로 여깁니다. 이 말이 활자 그대로라면 앞뒤가 안 맞을 테지만, 이 작품에서의 존재란 매뉴얼대로 따르는 기계 같은 모습의 반대편에 있는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저는 만화 <진격의 거인>이 떠올랐어요. 주인공 에렌은 벽 안에서 살아가는 자신들이 우리 안에 갇힌 가축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벽 때문에 바깥 거인들로부터 보호받고 평화로이 살아간다 생각했죠. <외로운 남자>의 주인공이 느낀 것도 그와 동일합니다. 현실은 교묘히 짜여진 무대에서 각본대로 움직이고 있을 뿐, 그 누구도 무대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관심이 없었죠. 물론 사연 없는 사람이 없고 각자의 고민을 끌어안고 산다지만, 한낱 쾌락에 죽고 못 사는 인생들을 보노라면 정말 저것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을까 싶은 제 생각과 일치해서 놀랐습니다. 저는 종종 세상 사람들이 게임 속 NPC 같고 저 혼자만 플레이어로 느껴지곤 했는데요, 이오네스코 작가도 혹 저와 비슷한 감상이 아니었나 합니다.


각종 형이상학 질문에 대한 답을 얻지 못하자 주인공은 철학적 사고를 멈추기로 합니다. 이렇게 막다른 길에 놓이면 체념하는 심정으로 쾌락에 기대는 경우가 많은데요, 그것도 얼마 못 가서 자신과 맞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처럼 주인공도 단골 식당에 가서 술을 자주 마시고, 여종업원을 꼬셔서 동거까지 해보지만 그런 쾌락들이 복잡한 내면과 불완전한 세상을 연결해 주진 못했어요. 일상 속에서 반복되는 행동들에 무슨 가치를 지니는지, 무의미한 일들에 왜들 그리 아등바등 사는지를 설명도 못할 거면서 잘만 떵떵거리고 사는 무리들도 그렇지만, 배가 부를 대로 불러서 이토록 권태에 빠져 고통받고 있는 스스로가 저들과 다르면 뭐 얼마나 다를까 싶거든요. 맞습니다, 바로 제 얘기입니다. 그래봤자 나 역시 똑같은 사피엔스 중 하나이고, 좋든 싫든 이 사회에 적당히 물들어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되며, 잘 참고 살다 보면 스스로가 외눈박이처럼 생각되기도 하거든요. 본인의 남다름을 감출 줄 알거나, 자기만의 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경우는 차라리 나아요. 이도 저도 아닌 회색 지대, 즉 어느 쪽도 속하지 못하는 이들이야말로 외로운 법이니까요.


일종의 정신승리처럼 들리겠지만, 돌연변이 혹은 괴짜 취급을 받는 사람들은 세상이 그들의 역량을 감당치 못해서라고 생각해요. 시대를 너무 앞서간 패션이 환호성보다도 야유를 받는 것처럼요. 솔직히 먹고살기도 빠듯한 사람들에게 철학을 논한다는 자체가 잘못이기는 해요. 종교는 구원을 약속하고 삶을 위로해 준다지만, 철학은 엄밀히 말해서 별 쓸모가 없거든요. 철학은 깊이 파고들수록 나를 세상에서 격리시키고, 나의 소외를 정당화해줄 뿐입니다. 공부 좀 했다는 분들의 말을 들어보면, 배움으로 인해 더욱 자유롭거나 홀가분해졌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잘 없어요. 그렇듯 실존에 대한 문제들은 누군가의 명료한 논문 따위로 해결될 게 아니죠. 이 결괏값에 도달한 사람들은 그렇게 생겨먹은 시스템을 받아들이며 비로소 내려놓는 법을 터득해요. 물론 거기에는 어떤 납득도 만족도 없겠지만요.


세상 돌아가는 시스템까지 따지려 들다니, 참 할 짓 없다는 핀잔과 조롱이 들려오네요. 맞는 말일지도 모르죠. 전에도 했던 말이지만 저는 어떤 대단한 사명감을 갖고 태어나 살아가는 게 아니니까요. 그럼에도 저와 주인공의 자아는 무한히 증대되어 무대 뒤편으로 향하지 뭡니까. 무대 밖에서 수십억 인류의 고통을 마주한 사람은, 이내 그 고통이 전 인류에게 공평히 분배되지 않고 특정인에게 몰려있음을 깨닫습니다(86p). 그것을 안 이상 어떤 감동도 희열도 발견할 수 없으며, 자신을 포함한 모든 존재가 곧 부재를 증명하는 것만 같았죠. 내가 지닌 추억들이 과연 존재했었다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을까요? 단지 ‘있었던 일‘이라는 말로써, 그것이 존재를 증명한다고 볼 수 있을까요? 뭐, 좋습니다. 그렇다면 미래를 얘기하는 건 어떨까요? 멀쩡한 사람이 자꾸 죽음을 논한다면 이 또한 병자 취급을 받게 됩니다. 건실하게 사는 이들은 그런 대화가 마치 허무주의를 설파하는 것처럼 들릴 테고요. 순간에 충실하는 것과 순간을 살아가는 것은 엄연히 구분되어야 하나 우리 사회는 아무도 이 두 가지를 나누지 않아요. 따라서 무대 위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그런 사람들이 만든 추억들도 존재했다고 볼 수가 없는 겁니다. 제가 느낀 작품의 주제가 바로 이것이었죠.


후반부는 내란의 이야기로 진행됩니다. 혁명을 외치는 두 분파가 거리와 도시를 점령하면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합니다. 전쟁에 흥미 없는 주인공은 집에서 절대 나오지 않았고, 그렇게 시간은 몇 년이나 흘렀습니다. 다시 세상에 나온 그는 모든 게 바뀌었고 또 변해감을 목도하면서, 나 홀로 옛 세상에 멈춰있다는 사실을 깨닫죠. 또한 사는 방법을 몰라서 자신들을 지나쳐간 행위, 모험, 사랑에 대한 아쉬움으로 속상해합니다. 그러면서 과거 나에게 다가와 준 기회의 여신을 매번 뿌리쳤던 일들에도 후회막심이었고요. 누구라도 이런 후회를 할 테고, 그렇다면 지금 이 시간들도 기회일 텐데 어째서 우리는 오늘 하루를 아무렇지도 않게 흘려보내고 있을까요? 듣자 하니 주인공을 떠나간 동거녀는 어느새 아이가 넷인 누군가의 아내가 되어있었습니다. 이런 뼈아픈 소식을 듣고도 자신의 추억들이 살아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각본대로 살지 않는 것은 훌륭하지만 돌연변이라 해서 계속 숨어 다닌다면 정말 죽도 밥도 안되거든요. 아무튼 외로움의 최종 진화 형태는 자발적인 고독이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세상을 왕따시킬 것까진 없고요. 아무쪼록 무대 밖에 서계신 분들께서는 무거운 짐 내려놓고 편안히 공연을 관람하시길 바랍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마이클 K의 삶과 시대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6
J. M.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왜 한 번씩 그럴 때가 있죠. 내가 인생 설계를 잘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질 때 말이에요. 대개 일이 계속 잘 안 풀린다 싶을 때에 그런 부정적인 생각에 빠지곤 합니다. 아마도 빠르면 사춘기일 것이고, 늦어도 취업 준비를 할 때쯤에는 크고 작은 좌절과 후회를 만나리라 싶은데요. 사실 그걸 알아차렸을 때가 자신을 바꿀 수 있는 가장 빠른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미 늦어서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들 하죠. 차마 변화할 용기가 없는 우리들은 지금의 상황에서 어떻게든 적응하고 살길을 찾아낼 뿐입니다.

​
하지만 그저 그런 자신의 방식대로 계속 살아가다 보면, 세상에는 아주 다양한 삶의 가치들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는 삶을 앞서나가는 선두 주자가 아니었기에 항상 몇 걸음 뒤에서 삶의 무대를 지켜보았는데요. 어느 날 갑자기 알게 된 것이, 의외로 사람들은 물질만능주의의 신봉자가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각자 추구하는 관심사가 전부 다르고, 그 욕구가 얼마큼 충족되면 ‘그럭저럭‘ 지낼만한 삶으로 변모한다고나 할까요? 하여 겉 보기엔 그리 볼품없는 인생일지라도 그 자신은 제법 떳떳하게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었죠.

​
문학은 곧 영웅 서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영웅 중에는 성공한 영웅도 있지만 실패한 영웅, 즉 안티 히어로도 존재해요. 1등만 기억하는 이 세상은 성공 못하면 실패라는 결론이 지배적입니다만 문학 세계에서는 얘기가 다릅니다. 실패자들도 제 나름의 방식대로 세상에 저항하는 반反 영웅이기 때문에요. 따라서 사회가 요구하는 삶의 모델과 일치하지 않을수록 일종의 독립투사라고 봐도 되겠네요. 그와 같은 시선으로 <마이클 K의 삶과 시대>를 읽어 내려갔습니다. 쿳시의 작품은 이번이 처음인데 영 글맛은 없더군요. 개인적으로 코맥 매카시의 <로드>를 읽었을 때와 비슷한 인상이었습니다. 딱히 특별할 게 없는 서사와 건조한 문체의 조합이었죠.

​
이번 주인공은 입술이 달팽이처럼 말려 올라간 구순열을 안고 태어났습니다. 신체적 결함을 가진 자들이 다 그렇듯 K의 삶 또한 녹록지 않았죠. 훗날 정원사가 되었지만 전쟁의 여파로 해고되고 살 곳을 잃어 연로한 모친과 함께 떠나기로 합니다. 허나 모친은 사망하고 홀로 남겨진 K는 곧 자연인으로 살아가는데요, 세상은 결코 그를 가만 놔두지 않았어요. 경찰들에게 발각되어 수용소에 갇히고, 탈출했지만 후에 또다시 붙잡힙니다. 분명 그는 자유로웠지만 자유 신분까지는 아니었던 거죠. 강제로 끌려온 그는 수용소 내의 규범을 강요받으며 최하급 신분으로 강등됩니다. 아니, 잘난 구석이 하나 없다지만 그래도 멀쩡히 살아가던 개인이 한순간에 짐승 취급을 받는다는 게 말이 되나요? K는 그저 자기 삶을 살아가려 했을 뿐인데, 세상은 그것조차 눈엣가시였던지 자꾸만 그의 삶에 개입했습니다. 이렇듯 살려고 아무리 손발짓을 해도 고통의 궤도를 벗어날 수 없는 게 바로 우리네 삶이 아닐까 합니다.

​
수용소를 탈출하고 은거 중이던 그는 또다시 연행되지만 아사하기 직전의 영양실조 상태라서 병실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를 맡게 된 담당 군의관은 이 사회성 없고 소통불가한 환자에게 집착 아닌 집착을 하게 되고요. 무엇보다 K는 수용소의 음식을 절대 거부했어요. K의 그같은 고집은 침묵 시위나 묵언 수행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그 자신과 맞지 않는 음식물일 뿐이었어요. 그처럼 원치 않는 환경에 적응하지 않으려는, 자신을 실험용 쥐처럼 대하는 세상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K에게서 양가감정이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왜 저렇게 자신의 도덕과 신념과 원칙을 고수하지 못했을까. 무력하단 이유로 온갖 병폐들을 묵인해왔던 제 자신이 부끄러워졌습니다.

​
저는 다소 한심하고 자기주장 한 번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이 친구에게 많은 공감이 갔습니다. 저 역시도 법의 테두리 안에서 별문제 일으키지 않고 잘만 지내는 타입이거든요? 하지만 세상은 어떻게든 저 같은 사람도 문제 삼고 헐뜯고 싶어 한다는 걸 날마다 실감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세상에게 퍽 복종하지 않으려는, 세상과 짝하지 않으려는 사람일수록 더욱더 눈밖에 나는 겁니다. 뭣도 아닌 것들이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다니는 게 아니꼬워 보일 테죠. 잘난 사람을 시기하는 것도 모자라 못난 사람한테도 시기하다니, 정말 촌스럽지 않나요? 이래도 욕먹고 저래도 욕먹는 게 세상의 이치라면, 그냥 살고 싶은 대로 사는 게 정답이지 싶네요. 남들과 똑같은 삶을 산다는 건 안정성과 정체성을 맞바꾸는 일입니다. 반대로 남들과 다른 길을 가겠다면 고생한 만큼의 확신을 얻을 테고요.


​요즘 인기 절정인 <오디세이> 영화의 주인공은 전통적인 영웅이죠. 하지만 오늘날의 현대사회에서는 그런 영웅 서사를 각자의 삶으로 들여올 수가 없습니다. 영웅이 될 수 없다면 차라리 마이클 K처럼 안티 히어로가 되는 게 나아요. 이 말이 너무 극단적이라고 생각되시나요? 글쎄요. 세상에게 열심히 아부하고 굽신거려봤자 세상은 절대 우리 편이 아닙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던 말도 이제는 너무 낡아버렸죠. 우리 모두는 자기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는 게 아닌, 사회가 조종하는 꼭두각시로 살고 있음에 분노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다수가 옳다고 하는 것들이 각 시대의 이데올로기가 아닌지도 의심해 봐야 합니다. 진리는 언제나 좁은 문 너머에 있는 법이니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모모 - 출간 50주년 기념 개정판
미하엘 엔데 지음, 한미희 옮김 / 비룡소 / 202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생이란 참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젊어서는 새로움을 쫓다가 나이 들어서는 익숙함을 추구하게 됩니다. 하지만 익숙하다고 해서 그것이 나 자신과 꼭 가깝지만은 않거든요. 또 다른 익숙함을 발견하면 지금껏 동고동락했던 것들도 자연스레 뒷전이 되고 말아요. 사람이 ‘자아‘라는 복잡한 문제에 발을 담그게 되면 자신이 이러이러한 사람이라고 정의 내리는 무의식적인 습관이 만들어집니다. 수차례의 반복을 통해 제법 스스로를 파악했을 무렵부터 삶은 단순하게 흘러간 듯해요. 저의 경우는 그랬습니다. 그런데요, 자아성찰을 밥 먹듯이 했던 제 자신의 정의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변해간다는 점을 종종 느끼고 있어요. 예를 들어 저는 인간관계에 대한 긴긴 연구 끝에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라고 매듭지은 사람이에요. 헌데 지금은 생각이 좀 바뀌었습니다. 그러니까 제 생각이 틀렸다라기보다도 사람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존재라고 보고 있죠. 이것은 저만의 오래된 익숙함이자 확고부동한 정의였지만 특별한 계기도 없이 그렇게 바뀌었어요. 이래서 영원한 건 절대 없다고들 했던가 봅니다.
​

어른들의 환상동화라 불리는 <모모>를 이제서야 읽었어요. 재미도 있고 메시지도 좋았지만 갈수록 전개가 SF 장르로 바뀌는 게 제 스타일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SF에 그리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탓이기도 하고요. 작품의 줄거리는 간단합니다. 버려진 원형극장에서 홀로 살아가는 모모가 등장합니다. 동네 사람들은 이 꼬마 소녀에게 속마음을 다 털어놓거나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얻어 가는 등 다양한 활력과 위로를 받곤 했어요. 그러다가 이 마을에 회색 신사들이 나타나서 모두의 평화를 앗아갑니다. 그들은 시간저축은행의 영업사원들로, 낭비되는 시간들을 아껴야 한다며 모두를 설득했고, 그 말에 넘어간 사람들은 이내 여유를 잃고 매우 바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 후로 모모를 찾아오는 이는 아무도 없었고, 이 사태를 바로잡고자 하는 모모의 모험이 시작된다는 내용인데요. 다 읽고 보니 사태 해결이나 결말은 크게 중요하지 않은 작품입니다. 중요한 것은 현대인들의 바쁜 삶에 대한 풍자였으니까요.
​

인류는 최초의 농업 문화를 시작으로 해서 지금의 4차 산업혁명까지 많은 발전을 해왔습니다. 기술의 진보 덕분에 지금 우리는 너무도 편리한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그것이 우리 삶에 더 여유로움을 가져다주었느냐라고 묻는다면 쉽게 대답하기 어렵죠. 진보 사회에서 절대 만족이란 건 없으므로 현대인들은 이 편한 세상에서도 쉼을 얻지 못할 운명이라죠. AI 산업 쪽 분들에게 듣자 하니, AI가 일거리를 줄여준 게 아니라 또 다른 일거리를 만들어줘서 총체적으로 업무량이 대폭 늘어났다네요. 이렇듯 기술발전의 현대사회는, 회색 신사들에게 시간을 빼앗겨 여유와 행복을 잃어버린 모모의 마을 분위기와 매우 흡사합니다. 작중에서 회색 신사들은 개개인에게 당신이 허비한 시간들을 합치면 얼마나 되는지 아느냐며, 아주 그럴듯한 계산법과 말들로서 우리가 그동안 헛살았다는 듯한 인상을 심어줍니다. 들어보면 그게 꼭 틀린 말도 아니에요. 내가 시간을 좀 더 아껴 쓰고 잘 활용했더라면 원하는 학교나 직장과 스펙을 얻었을 수도 있을 텐데, 하는 후회를 누구나 하기 마련이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보내온 시간들과 자신의 행복이 비례한다는 사실을 간과해버리죠. 그래서 지금 큰 불만 없이 살아가는 이들도, 내 삶의 방식들이 어딘가 잘못됐다는 착각과 번민에 빠져버린다는 게 문제입니다. 요즘은 SNS가 그런 문제의 원인이 되겠죠. 다들 부자에다 맨날 놀고먹는 모습들뿐인데 그렇지 못한 나는 지금 잘못 살고 있다는 듯한 기분이 들거든요. 따라서 우리는 시간 낭비보다도 회색 신사들을 상대하지 않는 일에 더 주의를 기울어야 하겠습니다.

​
저는 살면서 총 세 번의 백수 생활을 겪었는데요, 바쁘게만 살다가 여유가 생겨나니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어서 참 좋았거든요. 직장인일 때에는 아침햇살도 달갑지 않고, 커피 맛을 음미할 새도 없고, 시원한 매미 울음소리도 그저 소음일 뿐이었습니다. 그런 것들이 백수가 되고 보니 한순간에 아름다워지지 뭐예요. 그래서 든 생각은요, 현대사회의 구조를 바꿀 수 없다면 내 스스로 여유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는 거였어요. 요즘 저는 독서를 줄이고 운동을 해서 근육량을 늘리고 일찍 취침하는 패턴으로 바꾸었습니다. 건강에 신경 쓴 만큼 확실히 여유도 생겨났어요. 근무시간에 졸리지도 않고, 체력이 늘어나니 집중력도 높아지고, 직원들한테 화도 잘 안 나요. 이런 과정 속에서 제가 줄곧 정의해왔던 익숙함 들은 점점 낯선 것들이 돼가더군요. 여러모로 나 하기 나름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모모>에서는 시간을 도둑맞은 일에 대해 논하고 있지만, 제가 보기에는 비교하는 삶에 대한 문제처럼 느껴졌어요. 유행의 민족인 한국은 남들이 하는 만큼 나도 하지 않으면 도태된 삶이라는 인식이 널리 깔려있는데요, 남들이 갓생을 산다 해서 나까지 그래야 할 이유도 없을뿐더러 ‘보여지는 삶‘에 충실할수록 여유와 행복은 창문 열고 밖으로 새나갈 겁니다. 이것은 남들을 의식하지 말고 온전히 나에게만 시간을 쏟으라는 말이 아니에요. 아무튼 진짜 유용한 시간들은 나뿐만 아니라 서로에게도 유용하다는 게 저의 결론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