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치 1~2 세트 - 전2권 지식을만드는지식 도스토옙스키 4대 장편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정아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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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 4대 장편이래서 매우 기대했건만 실망스럽다 못해 화병이 날듯 하오나 이번 연도부터는 작고 소중한 나님의 고혈압을 생각하여 깔 때 까더라도 교양 있게 까주자는 선서를 해봅니다. 이 같은 결심이 얼마나 갈지는 모릅니다만 앞으로는 기존의 마당쇠 문체를 벗어나 양반 문체를 지향할 때가 됐다는 신내림을 받았다고나 할까요. 그런 심경 변화의 기념으로 이번 리뷰는 최대한 정중하게 즈려밟고 가겠습니다.


솔직히 얘기해서 이번 작품은 평을 쓰고 싶지도 않았거든요. 이렇다 할 줄거리도 없는 데다 재미까지 없으며 우리가 사랑하는 도스토옙스키의 매력이 온데간데없어서 적잖이 당황스러웠습니다. 하여 저로서는 퍽 좋은 말이 나갈 수가 없겠는데, 혹여 이 책을 읽지 않은 예비 독자들에게 감히 제가 심심한 상처를 드리지는 않을까 그것이 염려되더랍니다. 겨우 소설책 하나 갖고 웬 호들갑이냐 하실 수도 있는데, 그래도 명색이 도스토옙스키 아닙니까. 이분의 브랜드 파워를 고려하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모두들 입을 모아 제게 말해주면 좋겠습니다.


도스토옙스키는 자신의 여러 작품 중 <백치>를 가장 애정했다고 하네요. 이 작품이 기념비가 된 이유는 무엇인지, 저자의 애착했던 이유는 또 무엇인지를 발견하는 데에 중점을 두고 읽었습니다. 마침내 이유를 찾긴 찾았는데요, 그것들이 기대에 한참 못 미쳐서 억울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게, 분량이 폭력적이니까요. 뭐 오늘날의 감성과 맞지 않을 뿐, 당시 19세기에는 독자들의 배꼽과 눈물을 책임졌다 믿기로 했습니다.


이 작품이 말하는 백치는 우리가 정의하는 그 의미보다는 ‘호구‘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어요. 주인공 미시킨 공작은 사람 자체는 선하고 긍정적이지만, 막말로 착하기만 한 사람입니다. 장점이 없는 사람을 칭찬할 때 흔히들 ‘애는 착해‘라고 하잖아요? 그 정도로 주인공은 특성 없는 인간에 가까운 무매력의 표본이라 하겠습니다. 그런 이유로 이 친구에게 재미는커녕 어떤 볼거리를 기대하지는 마시길 바랍니다.


스토리가 부실하면 인물이라도 잘 잡아야겠죠. 반대로 캐릭터가 약하면 작품성으로 간극을 메꾸기도 하고요. 그런데 이 작품은 정말 이도 저도 아니라는 인상을 계속 주더군요. 예를 들어, 한 인물을 심도 있게 다뤘으면 나중에 가서 그 인물이 결정적 역할을 하리라는 예상을 안고서 읽어나가겠죠? 하지만 계속 읽어봐도 그 인물의 활약이나 복선 회수 같은 장면은 나오지 않아요. 게다가 등장인물 대부분이 아군과 적군, 주연과 조연의 역할을 수시로 바꿉니다. 내내 이런 식이라 내용이 어디로 튈지 감도 안 잡혀요. 예측 불허가 독자의 긴장감을 유발하는 장치라지만 이렇게 과유불급이면 좋은 소리는 듣기 힘들죠.


원래 도스토옙스키가 생계형 작가이긴 했어도 다른 작품들은 이 정도로 볼멘소리가 나오진 않았어요. 제가 다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좀 재미가 없네‘ 정도였었지, 이렇게까지 실망할 건 아니었단 말입죠. 개인적으로 크게 실망했던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조차도 메인 사건을 중심으로 흘러갔거든요. <백치>는 메인 사건이랄 게 없고 등장인물은 한가득에다 이내용 저 내용했다를 너무 반복합니다. 특히 주변에서 아이같이 투명한 공작을 좋아했다 싫어하는 장면이 가장 많아요. 공작이 말실수를 해서가 아니라 남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이해하는 데서 오는, 그러니까 맥락을 파악 못하고 분위기를 읽지 못하는 데서 오는 어벙함 때문인데요. 아마도 주인공이 지닌 ‘공작‘이라는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사회성이 그를 웃음거리로 만들었겠죠. 저도 지금은 그 이유를 알지만 읽는 도중에는 공작을 궁지로 몰아가는 모든 상황들이 영 이해가 안 되더군요. 덕분에 기가 많이 빨렸습니다.


챕터마다 등장하는 각종 사상과 주의에 관한 논쟁, 설파, 토론 등이 주인공과 이 작품에 무슨 관련이 있는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21세기의 한국인에게는 너무 지루하고 따분하기만 했네요. <안나 카레니나>도 주인공들의 내용보다는 농업, 정치, 사상 이야기가 더 많아서 힘들었거든요. <백치>도 거의 비슷해요. 아무튼 <죄와 벌>에 비하면 너무 형편없는 전개와 살 붙임이랄까요. 등장인물이 그렇게 많은데도 핵심 인물은 없으니 이건 뭐 산으로 가는 것도 아니고 아예 방향 자체가 없는 작품입니다. 사람들이 주인공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알아채지 못한다는 게 관전 포인트라면, 그로 인한 내적 갈등이나 심경 변화라도 있어야죠. 허나 공작은 너무나도 수동적이라서 어떤 사건을 발생시키는 법이 없고, 남들이 다가와 이러쿵저러쿵할 때까지 기다리기만 합니다. 그러다 보면 또 다른 상황으로 홀랑 넘어가버리며, 다음 상황은 앞의 일들과 퍽 연결점도 없어요. 내내 이런 식이라 숨이 턱턱 막혔네요. 도스토옙스키가 어지간히도 돈이 궁했나 보다 싶어지고.


러시아 문학이 진짜 골 때리는 게, 고작해야 중고등학생 나이밖에 안됐는데도 자기가 수치를 겪었다 싶으면 결투를 신청한다느니, 자기 명예를 더럽혔다느니, 콱 죽어버리겠다느니 식의 발언을 서슴지 않아요. 귀족도 아닌 일개 소시민이 이런 말들을 마구 내뱉는데, 대체 자기한테 무슨 체면이 있다고 저렇게나 욱하는 건지 알 수가 없던데요. 한국인들이 분노조절장애다 뭐다 해서 말이 많지만 러시아인들에 비할 바가 못됩니다. 기분 상해죄의 근원은 아마도 러시아가 확실하지 싶네요. 오늘날의 러시아 사람들이 도스토옙스키를 읽으면 웃고 넘길지, 저처럼 뜨악해할지 궁금하네요.


물론 이 기나긴 분량이 알쏭달쏭 한 사상만 운운하는 건 아닙니다. 이성 얘기도 했다가 가십거리도 나왔다가 돈 얘기도 오갔다 합니다. 그게 딱히 흥미 있지도 않은 데다 최소한의 일관성도 없어, 건너뛰며 읽어도 흐름에는 아무 지장이 없어요. 차라리 저자가 늘 다루던 ‘가난‘이나 좀 얘기해 줬으면 싶었네요. 그나마 일관된 거라면, 공작이 타인의 말을 곧이곧대로만 알아듣고 반응하여 바보 취급 당하고 내내 조리돌림을 당한다는 정도인데요. 이게 뭐랄까, 그래도 공작이기 때문에 다들 예의는 갖추고 있어, 제가 봐도 그들의 말속에 어떤 이중성이 담겨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날 현대사회에서는 어떤가요. 타인의 말을 괜히 넘겨짚거나 확대해석했다가 문제 된 경우가 더 많죠. 그래서 텍스트 그대로만 이해하고 그 안에서 최소한의 행간만 읽어야 한다는 지적도 있고요. 헌데 어느 쪽도 아닌 이 작품에서는 정말이지 대화다운 대화를 찾아볼 수가 없어서 속 터집디다. 얘기하다 말고 갑자기 샛길로 빠지기도 하고, 이유 모를 함박웃음과 극대노가 빈번하고, 방금 전까지 철천지원수였다가 볼 키스를 하는 등 혼돈 그 자체입죠. 이것이 바로 19세기 러시아의 야생 바이브인가 봅니다.


이 작품의 치명적인 결함은 4부 초입에 나옵니다. 앞서 말한 이도 저도 아닌 전개를 잠깐 멈추고, 작가가 직접 개입해서 평범한 사람들이 사실은 더 행복하다는 점을 미주알고주알 떠들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작가 본인 생각에도 부연 설명이 들어가질 않으면 전개가 매끄럽지 못하고, 독자들이 오해하거나 엉뚱한 길로 빠질 거란 걸 감지했다는 뜻이겠죠. 뒤늦게라도 개선해 보려는 노력은 가상하나, 오히려 안 하느니만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철저하게 해석을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놓는 게 차라리 나았어요.


‘내가 귀엽다는 사실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는 어떤 댓글을 보고 조언했던 어느 유튜버가 생각이 나네요. 귀여움을 설명해야 한다면 그건 귀여운 게 아니라고요. 말 그대로 귀여움은 애써서 척하거나 설명이 없이도 누구나 느껴지는 영역일 테니까요. 아기들이나 강아지, 고양이들이 이유가 있어서 귀여운 게 아니거든요. 마찬가지입니다. 저자가 창조한 백치의 ‘우수함‘은 철저히 설명되고 있어, 전혀 와닿지도 공감되지도 않는단 게 낭패라 하겠습니다. 오죽했으면 직접 개입했겠나요.


저는 흥미가 뚝 끊어지면 만회하더라도 일절 감흥이 없는 고질병 비슷한 게 있습니다. 김정아 대표님의 번역을 봐서라도 어찌어찌 완독은 했지만 내내 중도 하차가 마려웠던 작품이었네요. 횡설수설에 다름없는 이 작품도 완전 후반부로 접어들면 그럭저럭 내가 알고 있던 도스토옙스키의 폼이 나오긴 합디다. 그쯤 되니까 뭔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건지도 알 수 있었지만, 바람피운 애인을 용서할 마음이 없듯이 눈밖에 나버린 작품에게 줄만한 애정은 남아있지를 않아서요. 이렇게까지 악평을 남긴다는 자체가 애정이 없다곤 할 수 없으려나요.


저자가 시베리아에 유배될 동안 신약성경을 읽으며 그리스도의 생애에 깊이 매료되었다는 일화는 유명하죠. 그 영향으로 그리스도의 원형을 담은 <죄와 벌>이 탄생했고, 그 작품의 흥행에 힘입어 한층 더 심도 있는 작품을 만든 것이 <백치>로 보입니다. 이것저것 재고 따지고 보완하여 낸 작품일 테니 저자가 가장 사랑한 작품일 수밖에 없겠단 생각도 듭니다. 이럴 때 보면 작가와 작품은 역시 분리하는 게 아니다 싶어요. 어쨌거나 이 작품도 그리스도의 생애를 주축으로 한 포맷입니다. 저급하고, 무식하고, 난폭하고, 오만하고, 교만한 무리들이 만만하게 여겼던 이에게 찾아와 의지하고 조언을 구한다는, 전형적인 메시아의 구원 서사입니다. 그리스도 역시 주변의 온갖 병자들이 다가와 은총을 구하고 수군대고 소문내길 반복했죠. 여하튼 이 젊은 공작에게는 그리스도와 같은 인류애가 있었고, 답답하네 못 미덥네 해도 주변인들은 이 백치 선생을 찾아와 힘과 위로를 받아 갑니다. 제가 지금 좋게 포장해놨지만 지루해 죽을 뻔했어요.


분량이 방대한 고전을 만날 때마다 이렇게까지 길어야 할 이유가 없으며 과유불급은 역시 독이다 라는 생각이 지워지질 않습니다. <백치>는 어지러운 세상을 저항정신이 아닌 정화 운동으로 변화시켜야 하며, 그래서 메시아의 존재가 필요하다는 저자의 핵심 사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매 챕터마다 새로이 등장하는 일화들은 전혀 흥미를 유발하지 않을뿐더러 어느 메시지로 귀결되는 것도 아니었거든요. 그래서 세상을 정화할 선구자가 필요하다는 거창한 혁명의 구호를 보면서도 다소 뜬금없게만 느껴질 따름이죠. 공작의 열변을 지켜본 사교계 사람들의 반응과 제 반응은 비슷했습니다. 주인공을 쭉 지켜본 독자 입장에서도 ‘얘 뭐지?‘ 싶으면 말 다 한 거 아닌가요. 따라서 이 작품은 실패작이라고 봅니다.


저는 도스토옙스키가 작가주의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톨스토이 못지않은 사상가이자 철학자지만 좀 더 캐주얼한 스토리텔러에 가깝다 보거든요. 또 그래서 전 세계가 그를 좋아하는 걸 겁니다. 허나 <백치>는 그만의 강점이나 매력을 전혀 담아내지 못했어요. 한편으로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보려다 결국 놓친, 일종의 시험작으로 보였고요. 어쩌면 <죄와 벌>로 확장된 영적 세계관을 좀 더 시험해 보고 싶었던 게 아니었나 합니다. 아무튼 글이 길어져 이만하기로 하죠. 나름대로 최대한 교양을 유지했습니다. 여기까지 따라와 주신 분들께 감사하모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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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다르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3
헤르만 헤세 지음, 권혁준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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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제나 참여하는 쪽이 아니라 관람하는 쪽이었다. 감정과 의욕은 있었지만 다스리고 표현할 줄 몰라서 항상 울타리 밖을 맴돌았고,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직관이 발달한 케이스였다. 알다시피 직관적인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도 보이지 않는 것들에 관심을 쏟는 편이며, 버릇 같은 의미 부여와 습관적인 본질 파악으로 스스로를 학대하는 젠틀한 사디스트라고 볼 수 있다. 한창 성장기일 때만 해도 다들 나랑 똑같은 줄 알았는데, 말로만 들었던 잔잔한 돌아이가 나였다는 사실에 놀랐던 기억이 난다. 아무튼 나의 ‘남다름‘을 감추고 살아봤지만 정말이지 온통 나사 빠져있는 세상과 친구 하기가 너무나도 어려웠다. 하여 나는 심신의 평화를 찾아 여기저기에 정신과 시간을 쏟았고, 얼마간은 그것들에 위로와 평안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비대해진 자아는 매번 제자리에 돌아왔고, 그렇게 번민과 해탈, 좌절과 초월을 되풀이하며 고통 중에 살았다. 여전히 방황하는 산책자이지만 지금은 정답 따윈 없다는 것과 선악의 조화를 깨달아 무던히 살아가고 있다.


<싯다르타>를 읽으며 비슷한 고민들로 절망했던 내 과거를 꺼내놓는다. 사실 헤세의 작품이 다 그렇지만, 이 작품은 고통받는 데에 그치지 않고 원인을 해결하러 나섰다는 점에서 박수를 주고 싶다. 브라만의 아들 싯다르타는 힌두교 내에서 해소되지 않는 갈증 때문에, 브라만을 관두고 고행하는 승려인 사문의 길을 간다. 하지만 3년이나 사문으로 있으면서도 열반은커녕 이렇다 할 변화는 없었고, 고타마(부처)를 통하여 누군가의 가르침이 아니라 스스로가 자신의 스승이 되어야만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제 그는 틀에 박힌 형식을 내려놓고 속세를 경험하기 시작한다. 창부를 만나 관능의 세계를 탐험하고, 상인과 함께 일하며 물질의 세계에 마음을 뺏겨도 본다. 속세에서도 배울 점은 많았고, 사람들은 이 되다만 고행자에게 지혜를 구하였다. 뭐가 됐든 자기만 좋으면 다 그만인 것인가.


창부 카말라는 싯다르타에게, 우리 같은 사람은 ‘사랑‘을 할 수가 없다고 했다. 너무 많은 걸 알아버렸기에 순수한 사랑이 불가하다는 뜻일까. 그는 오직 어린아이만이 사랑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랑을 알고 싶다 해서 어린아이로 되돌아가고 싶다는 뜻은 아니었다. 이때의 주인공을 두고 하기엔 좀 이른 말이지만, 배움을 통한 진보와 성장에는 이처럼 아쉬움이 없어야 하는 것일 테다. 아무튼 그가 자랑스럽게 여겼던 재산인 단식, 사색, 인내까지 모두 잃고 나서야 자신이 그토록 업신여겼던 어린아이의 세계로 들어서게 된다. 배움의 경지에 이른다 해도 절대 이해불가한, 내 것이 될 수 없었기에 차라리 경멸했던 그 순수의 타이틀을 마침내 획득한 싯다르타. 진흙탕을 실컷 뒹굴고 마흔에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갔으니 그 기쁨의 충동은 말할 것도 없었겠지.


사람마다 자아를 인식하는 능력치가 판이하다. 똥인지 된장인지를 꼭 먹어봐야만 아는 사람이 있고, 딱 보면 모르냐며 경험 없이도 쉽게 구별하는 사람이 있다. 헌데 이 같은 지각 및 감각은 개인의 타고난 영적 수준과 크게 상관없어 보인다. 브라만, 사문, 구도자, 현인, 부처의 길을 쫓은 고차원의 주인공이 세속에 물들고 관능에 빠진 것은 그의 지능 때문이 아니었으니까. 헤세는 작품마다 ‘체험‘하는 인물의 어리숙함을 꼬집곤 한다. 물론 체험은 좋은 것이고 뭐든 경험해서 나쁠 건 없지만, 헤세처럼 직관이 뛰어난 사람이 왜 항상 체험하는 인물을 다루나 싶었다. 헤세가 그리는 체험의 세계도 결국 탐욕, 관능, 타락 등의 덧없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도 이 나이가 되고 보니 알 것도 같다. 생각만 하는 사람은 가시에 찔릴 게 무서워 다가가지 못하고 멀리서 장미를 바라만 본다. 허나 행동하는 사람은 가시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장미에 다가가 꽃향기를 맡는다. 내가 생각하는 헤세의 갈증은 그 차이에 있다고 생각한다. 아는 것만으로는 해소가 되지 않으니까.


헤세의 작품을 순서대로 읽었다면 되게 감명 깊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미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와 <황야의 이리>를 읽고서 본 싯다르타의 유리방황과 각성의 과정들은 너무 생략되었다는 인상을 준다. 갑자기 번뜩했다가 시들시들해지는, 괜히 이랬다저랬다 하는 기분파처럼 그려놨달까. 아무튼 인간은 결국 자기만의 진리보다도 행복의 근원을 찾으려고 해야 한다. 문제는 인간이란 게 서있으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은 법이라, 쾌락 가운데서 행복을 찾는다는 데에 있다. 하지만 많은 선각자들이 주장하듯 쾌락이 아닌 즐거움을 추구해야 하며, 그 즐거움이란 손해를 입더라도 넘어갈 만큼의 몰입이 가능한 ‘무언가‘여야 한다. 이제 독자들은 결과보다도 과정 자체가 기쁨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주인공은 깨달았을 때보다도 정답을 구하는 데서 활력이 돈다는 점을 자각하지 못했다.


빈 그릇일수록 더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다. 허나 인간은 삶의 만족을 비움보다도 채움에서 얻고자 한다. 돈을 버느라 건강을 갈아 넣고, 나중 되면 돈이 있어도 건강을 되찾지 못한다는 교훈을 숱하게 듣지만 그 누구도 주의하지 않는다. 역으로는 자기 관리라는 종교에 빠져 끝없이 채워 넣기에 바쁘다. 인간이란 비워져있는 것을 견딜 수 없어하고, 그렇게 본인의 ‘옳음‘을 수집하지만 결코 쾌락이 정당화될 수는 없는 법이다. 문득 걸어온 날들에 회한이 드는 것이 그 증거이다. 안타깝게도 인간은 채워보질 않으면 비움의 가치를 알 수가 없기 때문에, 끝없는 실수와 후회를 반복하게끔 되어있다. 왜 그런 노래 가사도 있었지.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았다던.


지혜의 왕 솔로몬이 남긴 말이 있다. 『내 아들아 또 경계를 받으라. 여러 책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케 하느니라(전12:12).』 싯다르타도 그리 말한다. 너무 많은 지식과 지나친 금욕, 행위, 노력이 오히려 방해였다고. 나 또한 지인들과 그런 말을 했었다. 아는 것이 힘이란 말보다 모르는 게 약이란 말이 더 좋다고. 다시 말해 알기만 해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으며, 다만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결론이다. 허나 결론을 안다 해서 누구나 실천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에 차라리 모르던 때가 좋았다는 얘기다. 그런고로 싯다르타의 말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야말로 참 사랑의 존재인 것이다.


하지만 순수하다는 것은 쉽게 악해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뱃사공으로 살아가던 싯다르타 앞에 창부 카말라와 아들이 나타난다. 뱀에 물려 죽은 창부의 아이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제공하는 주인공. 하지만 그의 헌신과 정성에 욕설과 불평으로 화답하는 아이였고, 자신을 떠나버린 아이를 보며 브라만이었던 부친과 여러 스승들을 떠나온 자신을 떠올린다. 비록 실망했으나 그는 어린아이의 투정, 원망, 욕심, 자랑, 탐욕, 허영심 등의 감정들이 밉다기보다 오히려 사랑해야 할 무언가로 느껴졌다. 그 강한 충동들이 심장을 뛰게 하며, 죽어있는 지식과 사상이 아니라 살아움직이는 불멸의 행위를 갖게 하였다. 결국 정답이라 생각되는 ‘도‘만을 좇는 것은 잘못되었으며, 조화로움과 정반합, 그리고 욕망을 흘려보낸다는 것이 중요했다. 강물은 끊임없이 흘러가지만 늘 그 자리에 존재한다. 감정도 시간도 생각도 그렇게 순환하는 법이었다.


싯다르타는 재회한 옛 친구에게 완전함의 균형을 설명한다. 하나의 돌멩이는 모든 것을 짊어진 브라만으로써 숭배할 가치가 있다고. 불교 신자가 아닌 나님의 해석은 이러하다. 모든 존재는 하나의 씨앗이다. 씨에 들어있는 dna에는 그 존재의 설계도가 담겨있으며, 다 성장한 후의 모습도 이미 새겨져 있다. 결국 씨는 과거부터 미래까지의 시간과, 존재를 발산하는 에너지가 압축된 형태로써, 그 잠재력이 깨어날 때마다 인간은 그 경이로움에 말을 잇지 못한다. 이처럼 가치와 의미는 내 주변에도 얼마든지 있으며, 그것을 발견해낼 줄 아는 감각을 길러야 한다. 더 나아가 그것들을 온전히 긍정하는 마음이 갈증을 지워준다. 따라서 우리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것만이 남다름과 불안함의 수렁에 빠진 나와 당신을 건져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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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 전2권
앤서니 도어 지음, 최세희 옮김 / 민음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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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날수록 좁혀져가는 인간관계란, 현실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었다. 온라인에서 만나 정들었던 분들도 어느샌가 소식이 끊어져, 어쩌다 한 번씩 생각날 때면 괜히 허전해진다. 블로그 활동 초기에, 이제 막 글쓰기의 매력을 알아가던 즈음에 종종 찾아와 말 걸어주셨던 몇몇 분들이 있었다. 지금보다도 훨씬 수준 낮았던 당시의 내 리뷰를 좋아해 준 분들에게서, 현실에서는 절대 느껴보지 못할 감사를 배웠다. 자존감이 바닥 치던 나를 일으켜준 그 은인들은 현재 전부 연락 두절 상태이다.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을 읽으면서, 한때 나의 빛이 돼주었던 분들이 스치듯 떠오른다. 제목처럼 ‘볼 수 없는 빛‘이 된 사람들. 잘들 지내시는지. 건강은 하신지.


제2차 세계대전의 배경이고, 독일 소년병과 프랑스 장님 소녀의 시점이 교차되며 진행된다. 여동생과 함께 고아원에서 지내던 소년은 기계 수리에 재능을 보였고, 이후 독일군의 특기병으로 입대한다. 그의 임무는 정보를 전파하는 송신기의 좌표를 찾아내는 일이었고, 팀원들은 그 현장의 저항군들을 섬멸하였다. 이건 뭔가 잘못됐다고 느끼지만 복종할 수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소년의 눈빛은 잿빛이 되어간다. 한편 공습을 피해 작은할아버지 네로 피난 온 소녀와 부친은, 독일군의 감시망을 피해 가며 죽은 듯 지낸다. 박물관의 관리자인 부친이 챙겨온 게 있는데, 전설의 다이아몬드인 ‘불꽃의 바다‘였다. 이 보석을 지니면 영생하는 대신 주변인들이 죽는다는 저주를 품고 있단다. 그래서 부친은 보석을 감춰둔 모형 집을 딸에게 선물한 뒤 수용소로 끌려간다. 저주의 시작이었다.


무난한 가독성에 비해 진도가 매우 더딘 작품이다. 게다가 두 남녀의 접촉은 후반부에 가야 나온다. 그전까지는 꽤나 루즈한 구간이 많은데, 소녀 쪽은 숨어지내는 내용이 많아서 그렇고, 소년 쪽은 직접 총질하기 보다 정찰하러 다녔기 때문이다. 그러다 폭격당한 건물에 갇혀 서서히 죽어가는데, 그제야 이 작품이 반전 소설임을 알게 되었다. 그만큼 반전의 요소가 미미했다는 말이다. 아무튼 두 사람의 접촉 전까지, 작품의 재미를 담당한 것은 보석을 찾아다니는 독일군 원사였다. 병마로 죽어가던 그는 영생의 돌을 쫓아서 소녀의 집까지 찾아왔다. 다 무너진 도시에서 홀로 멀쩡한 집 한 채가 곧 ‘좌표‘라는 증거였다. 하지만 보석은커녕 원사의 방문 의도조차 모르던 소녀는, 집 안에서 숨바꼭질을 해가며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한다.


후에 소년이 무너진 건물을 탈출하고, 원사에게서 소녀를 구해낸다는 내용이다. 그 뒤에도 더 있지만 이 정도로 하고, 두 인물의 설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앞 못 보는 소녀만큼이나 군에 복종한 소년도 눈이 멀어있다고 볼 수 있다. 소녀는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들이 위험했고, 소년은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들이 위험한 요소였다. 집안에 갇힌 소녀는 빛을 볼 수 없어 절망하고, 건물 아래 갇힌 소년은 빛이 차단되어 절망한다. 이렇듯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입장 속에서 대칭 구조를 이룬다. 그 가운데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지를 시사하고 있다. 평생을 장님으로 사는 것과 꼭두각시로 사는 것. 살아도 사는 게 아닌 건 마찬가지겠지만 육체로도 모자라 영혼까지 지옥에 밀어 넣을 필요가 있을까.


평화가 찾아온 지도 벌써 수십 년이 지났다. 헤어졌던 이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가 없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며 살아있기를 바랄 뿐. 생존자들의 사명은 최선을 다해 남은 생을 보전하는 일이다. 아픔을 잊기 위해서라도 현생에 충실하며 살아보지만 꼭 한 번씩 정신을 낚아채는 순간들이 찾아든다. 나에게 다정했던, 그래서 고마웠던 누군가의 부재를 느낄 때마다 온 신경이 마비된다. 나 같은 인간도 관심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준 옛 은인들이 오늘따라 많이 생각난다. 그 작은 응원 덕분에 여태껏 버틸 수 있었다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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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끝의 온실
김초엽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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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신잡>에서 김상욱 교수가 그러더라. 미래를 예측하고 싶으면 SF 소설들을 읽으라고. 과학기술의 진보가 인간의 설자리를 뺏는 것을 항상 못마땅해하던 나님은 SF 소설을 퍽 좋아하질 않았다. 과학의 발달이 인류를 위협한다는 사실을 과학자들도 잘 알지만, 그럼에도 과학에 대한 연구와 비전은 언제나 희망적이라는 김상욱 교수. 그래서 앞으로는 국내 SF 작가들을 좀 더 주목해 볼까 한다. 물론 SF 장르와 담쌓고 살지는 않았다. 또 그중에는 제법 재밌고 유익했던 작품들도 있었다. 하지만 계속 끌어당기는 매력적인 작가는 없었다. 그런데 김초엽 작가는 뭐랄까, 이제야 알게 된 게 후회가 되었다. <지구 끝의 온실>은 ‘내가 바라던 SF의 맛이 이런 게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게 했다.


대재앙 ‘더스트 폴‘이 종식된 2060년대의 이야기. 과거 한 연구소의 실패로 발생한 더스트가 자가증식하면서 전 지구를 강타했고, 항체가 없거나 생존게임에서 패한 자들은 전부 죽어버렸다. 과거 생존자들이 힘겹게 재건한 현대사회의 생태학자인 아영은, 국내 곳곳에서 무섭게 증식하는 덩굴 ‘모스바나‘를 조사한다. 그러다 에티오피아의 은퇴한 식물학자의 관련 글을 읽고서 곧장 만나러 간다. 더스트 시대의 산증인에게 전해 들은 모스바나는 복잡한 인류사와 맞물려있는 충격 그 자체였다.


말레이시아의 모 연구소 실험체였던 두 자매가 탈출하여 어느 마을에 도착한다. 더스트가 전 세계를 폐허로 바꾸었으나 이곳 프림 빌리지만은 파괴하질 않았다. 소규모의 인원이 작물을 재배하고 있었고, 마을 규칙을 세워 제법 평화롭게 돌아가는 낙원 아닌 낙원이었다. 이 마을을 꾸려온 두 사람, 기계 정비사인 지수와 사이보그 식물학자인 레이첼의 특이한 관계가 자매의 흥미를 돋우었다. 유리온실에서 실험만 하는 레이첼은, 지수의 요구에 따라 재배 작물 씨앗, 더스트 분해제 등을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지수는 침입자들을 물리치는 장치와 드론을 만들면서 마을을 지켜왔다. 한편 프림 빌리지를 향해 날아오는 더스트 폴이 관측되었고, 작물과 사람들을 지키기 위한 최종 수단으로 모스바나를 만들어 숲에 심는다. 죽은 나무들의 영양분을 먹고 무성해진 그 덩굴들이 방패가 돼준 덕분에 목숨을 건졌지만 마을은 극심한 피해를 입었고, 침략자들로 인해 마을 사람들은 전부 흩어지게 된다.


프림 빌리지의 엔딩도 똑같았다. 그저 다른 마을들보다 멸망이 좀 더 연장됐을 뿐이다. 진짜 이야기는 여기서부터인데, 프림 빌리지를 탈출한 두 자매가 챙겨온 모스바나를 마을마다 심었고, 그 식물이 넓게 분포하면서 더스트의 분해 작용을 해나갔다. 또한 지수에게 전수받은 분해제를 만들어 환자들을 살리는 데에도 힘썼다. 두 자매는 모두에게 프림 빌리지와 모스바나를 설명했지만 아무도 믿어주질 않았고, 더스트 협회의 대응기술과 더스트 종식으로 두 자매는 완전히 뒷전으로 밀려났던 것. 아영은 그들의 이야기를 뒷받침한 소설 ‘지구 끝의 온실‘을 출간한다.


내가 압축한 것보다 훨씬 더 풍부하고 입체적인 내용의 작품이다. 보다시피 디스토피아 소설이라서 시종일관 암울한데, 오히려 그래서 더 희망을 노래한다고 볼 수 있다. 김상욱 교수의 말대로, 과학은 언제나 희망적이라는 게 바로 이건가 싶다. 약탈과 폭력, 불신이 만연한 환경에서도 인간은 의존할 만한 누군가를 기다린다. 다만 그 대상은 꼭 인간이 아닐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 작품의 등장인물은 대다수가 여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려와 달리 성별이 문제 될만한 장면은 없었는데, 갑자기 퀴어 문학으로 전환됨에 따라 납득이 갔다. 여하튼 내가 질색했었던 ‘이과소설‘과는 여러모로 결이 많이 달라서 좋았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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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너와 이야기하고 싶어 해 오늘의 젊은 작가 27
은모든 지음 / 민음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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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어떤 형님은 정말 뜬금없이 자신의 일과를 나한테 보고한다. 보통은 잘 지내는지, 뭐 하고 있냐는지 따위의 안부가 오고 간 뒤에 나 오늘 이런저런 일이 있었다는 식의 대화로 이어지지 않나? 그런데 이 형님은 오늘 뭘 먹을 예정이고 어느 병원에 다녀왔다는, 궁금하지도 않은 제 얘기들을 아주 뻔뻔하게 투척한다. 사회성 만렙인 나님은 아무거나 던져도 맛있게 받아주는 편이지만, 속으로는 이런 걸 왜 얘기하는 거냐고 수십 번은 묻고 싶어진다. 아마 예전 같았으면 일부러 핀잔주어 무안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당신의 남다른 사고 회로와 방식들이 서로를 위해서도 좋은 게 아님을 각인시켜주고 싶은 한국인의 오지랖이 내게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다름을 받아들일 줄 알게 되었고, 그래서 뻔하지 않은 삶의 재미를 즐기게 되었다.


이번에 읽은 작품도 그런 식이었다. 낯선 사람들이 친근한 척 말을 걸어오고, 주인공에게 이러쿵저러쿵 자기 얘기를 쏟아내는 상황의 연속극. 개인주의가 팽배한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는 절대 일어날 가능성이 없는 일이지만, 내가 한 20대 시절까지만 해도 국민들의 이 같은 네트워크는 분명히 존재했었다. 나 역시 타인들의 친절을 적잖게 받았었고, 곤란한 처지에 있는 이에게는 호의를 베풀곤 했다. 그러나 지금 시대는 길을 묻는 정도의 짧은 접촉이 아닌 이상 경계하고 무시하고 심지어 깔보기까지 한다. 그것은 나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하여 극 내향인인 주인공에게 별별 사람들이 다가와 TMI를 꺼낼 때면, 이 얘기를 왜 나에게?라는 생각이 안 들 수가 없었다. 그중에는 본투비 오지라퍼도 있겠고, 괜히 뻘쭘해서 뭐라도 얘기해야겠다 싶은 이도 있었을 것이다. 뭐가 됐든지 주인공은 본인의 시간이 뺏기는데도 불구하고 묵묵히 남들의 말을 들어준다.


초반까지는 뭐 하러 저 얘기들을 가만히 들어주고 있는 건지 의아했다. 주인공이 막 사람을 좋아하는 성격도 아니고, 남들에게 피드백을 부탁받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 배경과 상황만 바뀔 뿐, 계속해서 누군가와의 일방적인 대화가 이어지다 보니 작품의 의도를 종잡을 수가 없어졌다. 딱히 기승전결도 없고, 어떤 메시지도 안 보이고, 어떤 독자의 말대로 소설이 아니라 에세이에 가까웠다는. 모름지기 글쟁이들은 자기가 할 말이 있어서 글을 쓰고 책을 낸다고 생각하기에 이런 정체 모를 작품에도 어떤 뜻이 있으리라 판단되나 아직도 파악이 안되므로 이해하기를 관두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종이가 아깝네, 시간만 버렸네 따위의 말은 하고 싶지 않다. 인간의 다양성만큼 소설도 온갖 유형이 존재할 테고, 그로 인해 인간의 사고 또한 똑같아지지 않을 수 있게 된다. 남들이 재미있다던 책이 내게는 꽝이고, 내가 극찬한 작품이 남들은 시큰둥할 때에 오히려 안심한다.


이 작품은 ‘들어주는‘ 행위의 다정함을 강조하는데, 사회의 때가 잔뜩 묻은 나로서는 퍽 강조가 느껴지지 않았다. 자기주장이 약한 주인공이 그런 상황들을 뿌리치지 못한 그림으로만 보였거든. 그래도 좋았던 점은, 본인이 적극적이지 않다 해서 타인의 다가감을 애써 밀어내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아무리 사회성이 높은 사람이라도 자신의 기준선을 넘었다 싶으면 거부반응이 일어나 그 상황을 벗어나려고 한다. 시대를 갈수록 그 거부반응은 너무 빨리, 또 너무 자주 일어나고, 하다 하다 기분상해죄라는 이름까지 붙여가며 우리 사회를 격리시키고 고립되게 만든다. 쓰다 보니 책 얘기는 안 하고 잡설만 가득했는데 아무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다정한 거라고 하니까, 누가 옆에서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하고,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하고, 개풀 뜯어먹다 체한 소리를 하더라도 으른의 마음으로 양껏 귀여워해 줍시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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