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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 세트 - 전3권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그 유명하다던 <안나 카레니나>를 드디어 독파했다. 명성과는 달리 드럽게도 재미없었고, 마구마구 스킵 하면서 읽었는데도 한 달이 넘게 걸렸다. 아무래도 나는 교양 있는 톨스토이보다도 야만적인 도스토옙스키가 취향인가 보다. 일단 나님은 ‘이름‘이 제목인 작품들에 대한 어떤 편견이 있다. 그런 작품들은 대체로 노잼이거나 아님 난해하거나 둘 중 하나이다. 내가 좋아하는 <스토너>도 솔직히 노잼이 맞고, <데미안>도 심오하기 짝이 없다. 또한 나님의 인생책인 <돈키호테>도 굉장히 호불호 갈리는 작품이 아니던가. 그런고로 <안나 카레니나>도 별 기대 없이 읽긴 했지만 진짜 이 정도일 줄은 짐작도 못했다네.
나에게 크나큰 상처를 준 사람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까. 나는 속이 좁아서 그런지 가해자들을 결코 용서해 줄 마음이 없다. 가끔 학폭 연예인에게 사과받은 피해자들이 용서했단 소식을 듣는데,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도 안 가고 용납도 안된단 말이다. 가해자가 죄를 뉘우치고 갱생의 삶을 보낸다 한들 그건 그거고, 내 심정은 그가 평생 저주와 고통 중에 살아가길 바랄 뿐이다. 그것처럼 나는 주인공 안나의 용서받지 못할 죄와 허물을 죽어도 용서해 줄 수가 없음을 미리 밝혀둔다.
읽는 내내 안나가 진짜 미치도록 혐오스러웠다. 온갖 교양 있고 고상한 척은 다 해놓고, 불륜남의 애까지 가진 채 남편을 대놓고 상처 주고 욕보이는 그 꼬라지가, 정녕 사람이라면 이럴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런 안나 부부에게 이런저런 상황을 줘가면서 참회와 용서를 하는 것이 최고의 미덕인 양 연출하고 있는데, 아무리 시대와 정서가 다르대도 그렇지, 이건 진짜 아니잖냐는 말 밖에 안 나왔다. 나의 이 수준 낮은 감상이, 전 세계가 극찬하는 명작의 진정한 가치를 깎아내렸는지도 모른다. 그래, 지금 나는 작품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읽고 이상한 포인트에 꽂혀 헛소리를 하는 걸 수도 있다. 설령 그렇다 해도 지금으로썬 그럴듯한 작품성을 논하기가 어렵다. 근 몇 년간 읽은 것 중에 이토록 불쾌한 작품도 없었단 말이다.
키티가 레빈을 두고 훨씬 스펙 좋은 남편감을 골랐을 때는 내가 다 수치스러워서 혼났다. 곧이어 똥차를 골랐다는 걸 알고서 바로 태세 전환을 한 키티도 솔직히 밥맛이었고, 그녀에게 치욕과 모멸감을 받은 레빈이 그렇게 금방 헬렐레하는 것도 너무나 한심했다. 퇴짜 맞고 그렇게나 괴로워했으면서 레빈 네놈은 자존심도 없더냐는 말이 계속 올라왔더랬다. 결국 키티를 차지한 그에게는 ‘사랑 앞에 자존심 따위가 무슨 소용이냐‘는 말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심지어 그를 비교질했던 키티의 모친도 마지못해 기뻐해 주는데, 아주 그냥 역겨워서 미칠 지경이었다. 원래 사랑이란 게 지들만 좋으면 장땡이래도 이들의 내막을 아는 독자로써 절대 축복해 줄 수가 없었다.
작품 초반에 안나는 친오빠의 바람을 새언니가 용서하도록 설득한 데에서 자신의 성숙하고 고상함을 비췄으나, 정작 자신은 오빠보다도 더한 불륜으로 가족과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고도 뻔뻔하게 남편 탓으로 돌린다. 처음부터 양심도 없고 싹수도 노란 캐릭터라면 그러려니 할 텐데 온갖 고고한 척, 교양 있는 척은 다 해놓고 막상 불리하다 싶으면 회피하거나 합리화해대니 참 가증스럽기 짝이 없다. 심지어 뒤에 가서는 자기가 나쁜 X이고 남편은 선하다는 말로 호소하여 주변 모두의 연민과 동정을 끌어낸다. 그렇게 상황은 역전되어 남편은 죄인이 되고, 안나는 고통과 죄책감을 덜어낸다. 재차 말하지만, 이런 내용일 거라고는 진짜 상상도 못했다.
역겨움의 향연은 끝이 없다. 온 도시와 사교계가 안나와 이혼하려는 남편을 흉보고 욕하고 뜯어말린다. 안나가 혼외자까지 낳았음에도 다들 하나같이 그녀를 너그럽게 용서하고 봐달란다. 어쩜 단 한 명도 남편의 손을 들어주는 이가 없을까. 아무리 안나의 평판이 우수했다 한들 그 가면이 다 발가벗겨진 마당에서조차 남편이 대신 몰매를 맞아야 하냔 말이다. 기독교 문화가 지배적인 러시아 사회에서, 굳건하고 신실한 신앙인인 남편보다도 거의 탕자나 다름없는 안나가 더 높은 대우를 받는다는 게 이해가 가질 않는다. 진정 ‘트루먼쇼‘가 따로 없다.
새로운 안나 부부는 시골에서 그들만의 건축사업을 바탕으로 오손도손 살아간다. 본판이 총명했던 그녀는 새 남편 못지않게 지식을 익혀서 사업에 적극 보탬을 주었다. 하여 모든 게 순탄히 굴러가다 보니 새 남편은 점차 삶에 권태를 느끼고, 또 남자만의 독립성을 잃었다고 느꼈는지 지방자치 선거에 나가기로 한다. 여기에는 진짜 후보자의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미세하게 부딪히는 아내와의 거리감을 두기 위한 목적이었을 터. 안나는 그와 주변의 바람대로 전 남편과의 이혼을 추진하지 않는 데다가, 그녀의 능력이 자기 사업에 영향을 주는 게 내심 불편했을 것이다. 그러나 기싸움의 무의미함을 알기에 스리슬쩍 상황을 넘겨버릴 때가 잦아들고, 안나는 그이의 마음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걸 깨닫는다. 자신의 모든 걸 포기하고 사랑에만 매달렸던 그녀,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딸보다도 더 남편을 사랑한 안나에게, 새 남편의 애정이 식어버린 눈빛은 절망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둘 다 겉으로는 이상적인 부부의 역할과 책임을 다하는 중이었지만 이미 쇼윈도 부부나 다름없었다.
공직자였던 첫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했다고 느껴 불륜까지 저지르고 참 사랑을 쟁취한 그녀. 그러나 콩깍지가 벗어진 새 남편이 슬슬 사회생활에 전념하자, 안나는 그의 느슨해진 사랑에 전과 같은 외로움으로 고통을 받는다. 이제 자기랑 놀아줄 사람이라곤 현 남편 하나뿐인데, 별 영양가도 없는 수다나 떠는 것을 어느 남자도 좋아할 리 없다는 사실 때문에 그녀의 속은 곪아만 간다. 진정 사랑 말고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지만 이쯤 되니 사랑이 밥 먹여주는 게 아님을 깨닫는 중이었다. 결국 그녀는 전 남편에게서 느꼈던 불만과 권태를 똑같이 느끼며 그 불화의 과정을 되풀이하게 된다. 그리하여 가면 갈수록 안나의 사랑 타령은 막장 드라마를 찍는다. 의부증, 편집증, 신경증, 온갖 증상으로 남편을 몰아세워 싸우고 자책하기를 반복한다. 이렇게 안나가 미쳐 날뛰는 장면이 그나마 볼만했는데, 이 재밌는 구간도 오래 가진 못했다. 결국 그녀는 철도에 뛰어들어 자살함으로 생을 마감한다. 사실 작품 초반부터 안나의 외도와 그 말로는 이미 예견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결코 스포가 아니라는 나름의 합리적 변명을 해본다.
안나의 죽음 이후로도 약 100p의 분량이 남아있었다. 뒷 내용에서 안나에 대한 언급은 일절 없었으며, 키티의 남편인 레빈의 뜬금없는 종교적인 자아성찰 퍼레이드가 시작된다. 쭉 무신론자였던 레빈은 결혼 이후 존재와 삶의 이유 같은 거대한 의문들에 휩싸이고, 톨스토이는 레빈의 입술을 빌려 온갖 철학적인 방향과 대안들로 자문자답을 반복한다. 어쩌면 이 마지막 챕터의 질문과 대답들이, 납득하기 어려운 안나의 사상을 이해시켜줄 만한 단서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러거나 말거나 전혀 흥미가 없었던 나님은 열심히 스킵 해버렸다. 명성에 대한 기대 때문에 첫 장부터 끝 장까지 꼼꼼하게 읽을 필요는 없다는 말과 함께 이만 리뷰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