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
정수일 지음 / 창비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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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인생의 여로에서 남겨놓은 족적은 천차만별이오. 그 족적은 저마다의 영욕을 입증하는 증좌이기도 하오. 나는 이 사실을 형상적으로나마 한번 체험해보고 싶어서 눈위에 여러가지 모양새의 발자국을 찍어보기로 했소.-83쪽

바른 걸음거리로 찍은 발자국은 걸음나비가 고르고 온당하며 걸음의 리듬을 다시 확인하기에도 자신이 있었소. 분수에 맞는 제걸음으로 땅에 든든히 발을 붙이고 '우보천리'하는 인생의 행보가 남긴 족적이 바로 이에 해당되겠소. 한마디로 바르고 온당한 족적이오.-83쪽

다음은 두 발을 비꼬면서 걸으니 몸이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면서 찍어놓은 자국은 헝클어만 지고, 얼마 가지도 못했소. 실타래 같은 인생은 순리대로 풀어가면서 살아야지, 역리로 비꼬아가면서 살면 그 인생의 행보는 늘 불안하고 뒤틀리며 단명일 수밖에 없다는 경고겠지. -83쪽

이어서는 종종걸음을 쳤더니 발자국이 겹쳐서 형체를 분간할 수 없음은 물론, 금세 숨이 차올랐소. 삶에서 지혜와 요령을 잃고 서두르다가 어느새 황황히 도착한 인생의 종착점에서 되돌아보면 어슴푸레한 흔적뿐, 허탈할 수밖에 없는 그 모습이겠지. 이를테면 비뚤어지고 허망한 족적이오.-83쪽

그 다음엔 걸어갔던 길에서 뒷걸음질쳐봤소. 발자국의 걸음나비나 방향이 맞을 리 없어 얼마쯤 남아 있던 발자국마저도 짓뭉개지고 말더군. 역사와 시대의 흐름에서 뒷걸음질치면 어렵사리 남겼던 족적마저도 가뭇없이 사라지고, 공들여 쌓았던 탑도 일시에 무너진다는 이치겠지. 그리고 이 걸음에서 멈춰서기만 해도 남들은 줄곧 앞을 향해 전진하기 때문에 그것은 곧 상대적으로 뒷걸음질이 되는 것이오. 그래서 인생에서의 후퇴나 답보는 자멸이라고들 하는 것이오. 요컨대 퇴보와 침체의 족적이오.-84쪽

마지막으로 뛰어서 발자국을 찍어봤소. 보폭이 넓고 빠르기는 하지만, 자국을 많이 남겨놓을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배열이 성기고 가?하지 않았소. 그리고 바닥이 밋밋한 신발이라서 미끄러져 실족할 뻔도 했소. 오기나 자기 비하에 찬 인생에서 이른바 '도약'이 독려되기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독려일 뿐, 실행에서는 튼튼한 도약대가 있어야 하는 것이오. 인생에서 무모와 과욕은 '실족'을 자초하오. 인생은 순간의 멀리뛰기나 높이뛰기가 아니라, 한발짝 한발짝 나아감이고 한계단 한계단 오름인 것이오. 뜀뛰기 발자국은 이것을 교훈으로 가르쳐주고 있소. 결국 이것은 허영과 무모의 족적이오.-84쪽

이렇게 나는 눈의 갠버스 위에 인생의 파노라마를 그려봤소. 그리곤 한켠에 서서 그것을 유심히 들여다봤소. 순간, 그 속에서 내 인생의 발자국이 서서히 현현되고 있었소. 내 발자국은 드라마의 얽음새처럼 얽히고 설켜 있었소. 바른걸음, 비꼰 걸음, 종종걸음, 뛰기 등 걸음새가 이것저것 뒤섞여 있었소. 단, 뒷걸음질만은 나와 인연이 멀더군. 그러다보니 족적의 모양새나 걸음나비, 걸음리듬이 각양각색이더군.
흔히들 행적이 묘연할 때를 '눈 속에 남겨진 기러기발자국'에 비유하오. 눈 위에 찍어놓은 기러기발자국은 눈이 더 오거나 녹으면 금세 없어져서 찾아볼 수 없다는 뜻이오. 마찬가지로 내일이면 그 눈의 캔버스는 자취를 감추고 내가 그려놓은 인생의 파노라마는 묘연해질 수밖에 없겠지. 그러나 나는 좀더 확연하고 영원할 인생의 족적을 인생의 캔버스에 그려넣기로 작정하고 바른 걸음으로 운동장을 다시 한번 돌면서 새롭게 발자국을 뛰어나갔소.-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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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반양장)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02년 7월
구판절판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본질적인 평범함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그 광기를 드러낸다. 그래서 방관자 자리에 선 사람들에게는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따분해 보인다. 방관자들은 묻는다. 저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한 인간 외에 무엇을 보는걸까?... 플롯은 없고 액션조차도 거의 없는 이야기, 동작이 거의 없는 이야기의 중심에 서 있는 중심인물에 대한 이야기일뿐이었다. 그러고 나서야 나는 사랑이 외로운 일이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기껏해야 다른 한 사람, 사랑하는 사람만이 이해해 줄 수 있는 일이었다.-137쪽

삶의 한 시기가 잔인한 방식으로 끝을 향해서 치닫고 있었다-234쪽

사랑의 보답을 받을 수 없게 되자 사랑을 받고 싶다는 오만이 생겨났다. 나는 내 욕망만 가지고 홀로 남았다. 무방비 상태에, 아무런 권리도 없이, 도덕률도 초월해서, 충격적일 정도로 어설픈 요구만 손에 든 모습으로.
나를 사랑해다오!
무슨 이유때문에? 나에게는 일반적이고 빈약한 이유밖에 없다.
내가 너를 사랑하니까......-242쪽

물리적 세계는 내가 잊는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인생은 예술보다 잔인하다. 예술로서는 보통 물리적 환경이 등장인물의 정신적 상태를 반영한다. 로르카의 연극에서 누군가가 하늘이 흐리고 어둡고 잿빛이라고 말하면, 그것은 순수한 기상학적 관찰이 아니라 심리적 상태의 상징이다.
인생은 우리에게 그런 손쉬운 표징들을 제공하지 않는다. 폭풍이 다가온다. 그러나 이것은 죽음과 붕괴의 전조와는 거리가 멀다. 비가 창문을 때려대는 동안에도 어떤 사람은 사랑과 진실, 아름다움과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따뜻하고 아름다운 여름 날에도 구불구불한 길에서 자동차가 순간적으로 통제력을 잃어서 나무를 들이박고 승객들은 치명적인 부상을 당할 수도 있다.-269쪽

복잡한 문제들을 파고들다 보면 가끔 도달하게 되는 순진한 상식으로 나는 가끔 묻곤 했다(마치 답을 봉투의 뒷면 정도에 다 적을 수 있는 것처럼)
"왜 우리는 그냥 서로 사랑할 수 없는 것일까?"-275쪽

문제를 파악하는 것과 문제를 해결하는 것, 지혜와 지혜로운 인생은 크게 다르다. 우리는 모두 능력 이상으로 똑똑하다. 그러나 사랑이 미친 짓임을 안다고 해서 그 병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는 없다. 어쩌면 지혜로운 또는 전혀 고통없는 사랑이라는 개념은 무혈 전투라는 개념과 마찬가지로 모순일지도 모른다. 제네바 조약 이야기를 꺼내지 않더라도, 그런 전투는 존재할 수가 없다.-281-2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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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5-06-22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카님두 드뎌 이 책을 보셨군요. ^^
 
열강의 소용돌이에서 살아남기 - 박노자, 허동현의 지상격론
박노자, 허동현 지음 / 푸른역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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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서술이라는 것은, 역사 학자가 아무리 '실증사학', '사실에 입각한 객관적 묘사'등을 내세워도 결국 서술 주체의 이해관계과 세계관등의 여러가지 현재적 욕망에 의해서 규정되는 내러티브, 즉 이야기지요. 그것이 고금동서 역사학의 '공공연한 비밀'입니다. 만약 과거가 현재의 문제들을 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이미 지나간 이야기를 왜 다시 꺼내야 합니까?
결국 현재적인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역사를 논하는게 아닙니까? 물론 '나'만의 현재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과거 사실을 왜곡하거나 뻔히 아는 사료를 일부러 빼버린다면 그것은 전문가다운 일도 아니고 타자의 존재와 그 욕망을 무시한다는 점에서 최악의 아집이 되겠지요. 따라서 사료에 충실한 태도를 취하고 남의 입장과 의견을 충분히 존중하고 참고한다면 서술자의입장에서 역사를 기술한다는 것이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 봅니다.-66쪽

그런 모범적인 사례로 하버드 진이라는 미국의 대표적인 진보학자가 쓴 <미국민중사>를 추천합니다. 이 책에는 사료 왜곡이나 의도적인 묵살등은 전혀 없지만, 오늘날 지구문명을 멸망케 하는 미국의 반환경적, 인종주의적, 제국주의적 오만의 기원이 어디 있는지가 '현재적으로' 설명돼 있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오늘날 고전으로 간주되는 박은식의 '한국통사'나 신채호의 '조선 상고사', 문일평의 '한미 50년사'등 식민지 시대의 사학서적들도 지극히 현재적으로 씌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이들 사서史書들은 일제 어용사관의 허구성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독립투쟁의 정당성, 조선인으로서의 긍지를 갖고 살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해주었습니다. 또 그만큼 전문가뿐만 아니라 수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았지요. 그게 진정한 역사 아닙니까?-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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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 동안의 고독 - 1982년 노벨문학상 수상작 문학사상 세계문학 6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안정효 옮김, 김욱동 해설 / 문학사상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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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없이 조용한 나날을 보내며, 집안에 넘쳐 흐르는 새로운 생명력에는 관심도 보이지 않고,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은 노년기를 훌륭하게 보내는 비결이란 고독과 영광스러운 조약의 체결뿐이라고 깨닫게 되었다. 그는 아침 다섯시에 얕은 잠에서 깨어나, 부엌으로 가서는 언제나 변함없는 씁쓰레한 커피르 ㄹ한 잔 마시고 하루종일 작업실에 들어앉아서 일을 하고, 오후 네시가 되면 의자를 끌고 테라스로 나가서는, 불타오르듯 강렬한 장미숲과 한낮의 밝은 태양과 끓는 주전자처럼 씩씩 소리를 내며 고집스레 우울을 짓씹는 아미란타는 의식하지도 않고, 어둠이 내리도록 그 자리에 앉아서 모기들의 성화에 못이겨 쫓겨 들어가 ㄹ때까지 줄곧 앉아 있었다.-227쪽

한 순간의 화해란 평생동안의 우정보다 훨씬 값진 것-315쪽

'이럴 줄 모르셨나요?' 그가 태연히 중얼거렸다.
'세월은 흐르게 마련입니다'
'그렇기야 하지' 우르슬라가 대꾸를 했다. '하지만 별로 흐르지도 않아'
이 말을 했을 때 우르슬라는 자기가 옛날 죽음의 골방에서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이 했던 대답을 그대로 되풀이 했음을 깨닫고는, 지금 자기가 말했듯이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커다란 원을 그리며 빙빙 돌고 있다는 생각에 몸을 떨었다.-370쪽

인생의 가을이 무르익는 과정에서 가난은 사랑의 노예라는 젊었을 적의 생각을 다시 새롭게 했다. 그래서 그들은 함께 지난날의 광폭한 탕진생활과, 으리으리 했던 부유함과, 걷잡을 수 없었던 음탕한 삶이 결국은 역겨움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달았고, 고독을 나눌 수 있는 천국을 찾기 위해서 그들이 인생을 그토록 많이 낭비했어야만 했다는 사실을 슬퍼했다. 여러 해 동안의 삭막한 생활끝에 미친듯이 사랑에 빠진 그들은 침대에서뿐만 아니라 식탁에 마주 앉아 있는 순간에도 사랑을 나눌 수 있다는 기적을 터득하고, 그들의 행복은 자꾸만 자라서 그들이 다 낡아빠진 두 늙은이가 되었을때도 어린아이들처럼 꽃피어났으며 강아지들처럼 정겹게 같이 놀았다.-374-3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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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15 16: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겨울 이야기 - Shakespeare's Complete Works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이윤기 외 옮김 / 달궁 / 2005년 4월
품절


겁쟁이는 솔직함을 불구로 만들어 진실로 향하지 못하게 만든다네-44쪽

제가 태만하고 어리석고 겁이 많은자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느 누구도 이런 약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사람의 태만함과 어리석음, 두려움은 셀 수 없이 많은 세상사 가운데 때때로 그 모습을 드러내기 마련입니다-44쪽

시간
사람들에게 기쁨을 안겨 주는 일이 더러 있기는 하나 누구에게든 시련을 안기는 나 시간은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고 그 실수를 바로잡기도 해서 선한 사람들이나 악한 사람들에게 두루 기쁨과 공포의 대상입니다.-115쪽

사랑으로부터 조언을 구하되, 나의 이성이 사랑에 복종하겠다고 한다면 이성을 따르겠지만, 복종하지 못하겠다면 나는 감정을 따라 차라리 광기를 택하고, 그 광기를 기꺼이 맞아들이겠소.-1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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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ka 2005-06-11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단은 읽으며 중학생 시절에 친구와 '사랑'과 '믿음(신뢰)'에 대해 논쟁을 벌였던 일을 떠오르게 한다. 나는 '오델로'를 꺼내들고 단칼에 내 의견을 내세웠는데...
어렸을때의 이야기였지.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