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서술이라는 것은, 역사 학자가 아무리 '실증사학', '사실에 입각한 객관적 묘사'등을 내세워도 결국 서술 주체의 이해관계과 세계관등의 여러가지 현재적 욕망에 의해서 규정되는 내러티브, 즉 이야기지요. 그것이 고금동서 역사학의 '공공연한 비밀'입니다. 만약 과거가 현재의 문제들을 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이미 지나간 이야기를 왜 다시 꺼내야 합니까?
결국 현재적인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역사를 논하는게 아닙니까? 물론 '나'만의 현재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과거 사실을 왜곡하거나 뻔히 아는 사료를 일부러 빼버린다면 그것은 전문가다운 일도 아니고 타자의 존재와 그 욕망을 무시한다는 점에서 최악의 아집이 되겠지요. 따라서 사료에 충실한 태도를 취하고 남의 입장과 의견을 충분히 존중하고 참고한다면 서술자의입장에서 역사를 기술한다는 것이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 봅니다.-66쪽
그런 모범적인 사례로 하버드 진이라는 미국의 대표적인 진보학자가 쓴 <미국민중사>를 추천합니다. 이 책에는 사료 왜곡이나 의도적인 묵살등은 전혀 없지만, 오늘날 지구문명을 멸망케 하는 미국의 반환경적, 인종주의적, 제국주의적 오만의 기원이 어디 있는지가 '현재적으로' 설명돼 있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오늘날 고전으로 간주되는 박은식의 '한국통사'나 신채호의 '조선 상고사', 문일평의 '한미 50년사'등 식민지 시대의 사학서적들도 지극히 현재적으로 씌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이들 사서史書들은 일제 어용사관의 허구성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독립투쟁의 정당성, 조선인으로서의 긍지를 갖고 살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해주었습니다. 또 그만큼 전문가뿐만 아니라 수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았지요. 그게 진정한 역사 아닙니까?-6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