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녁, 퇴근하고 미장원에 가는 길에 택시를 탔다.
택시에서는 성인나이트 또는 캬바레의 블루스 타임에나 틀 것 같은
부담스러울 만큼 끈적끈적한 노래가 차가 터질 것 같이 크게 울리고 있었다.

난 "죄송한데요...볼륨 좀 줄여주세요!" 하고 말하고 싶었지만
아저씨가 너무 심취해 있었기에 장거리도 아닌데 그냥 좀 참자... 생각을 바꾸고 멍하게 앉아 있었다.
일주일의 누적된 피로가 마구 몰려왔다.

차가 신호에 걸렸을 때,
아저씨가 고개를 뒤로 돌려 나를 쳐다 보며 말했다.
" 손님, 뭐 하나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

쌩뚱 맞은 질문에 당황한 난 말끝을 흐렸다.
"네? ............네....."

아저씨는 더욱 더 쌩뚱맞게 말했다.
"사는게 즐겁습니까?"

순간, 당황스러움과 짜증이 동시에 확~ 밀려 왔다.
내가 왜 모르는 사람의 이런 쌩뚱 맞은 질문에 대답을 해야하지?
그냥 묵비권을 행사할까?

난 잠시 망설이다 그냥 예의 바르게 "모범답안"을 말했다.
" 어쩔 땐 즐겁고, 어쩔 땐 힘들기도 하고...그렇죠 뭐."

내 무성의한 대답에 아저씨는 완곡하게 말했다.
" 그런 대답말고요! 그냥 딱 잘라 말해 주세요!
기면 기다, 아니면 아니다! "

마치 내가 "거짓 증언"이라도 한 것 같았다.
순간 기가 막혔지만, 아저씨의 완곡한 태도에 주눅이 들었다.

" 그러니까.......그게......네....즐거워요!"

아저씨는 볼륨까지 줄이고 놀란 목소리로 반문했다.
" 네? 사는 게 즐겁다고요?"

잠시 침묵 후, 아저씨는 말했다.
" 네....그래야죠! 사는 게 즐거워야죠. 긍정적으로 생각해야죠! 긍정적으로!
그런데.....저는요....사는게 고통이예요. 사는게 지옥 같아요."

갑자기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도대체 이럴 땐 뭐라고 대답을 해야하지?
한번 본적도 없는 사람에게 "사는 게 지.옥. 같다!" 고 말하는
초라한 중년 남자의 정체는 뭐지?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불편하게 앉아 있는데
사는 게 지옥 같다는 중년 남자의 말이 이어졌다.

"사는 게 정말...만만치 않아요.
밤에 잠도 못자고 12시간 계속 운전을 해봐요."

몇년 전 같으면 그 아저씨가 불쌍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동정, 연민, 측은지심......이런 걸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제의 난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스멀스멀 올라오는 짜증을 애써 통제했다.

모르는 사람의 신세한탄을 어쩔 수 없이 들어야 하는 상황도 싫었고,
하루 종일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사는게 즐겁습니까?" 하며 구질구질한 얘기를 하는 초라한 중년 남자의
"loser" 같은 태도에 화가 났다.

그 아저씨는 자신이 loser임을, 패배자임을 증명해야만 하는
"존재 증명"의 의무를 부여 받은 사람처럼
끊임 없이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그 아저씨가 바라는 건 도대체 뭘까?
위로? 응원? 한 마디의 따뜻한 말?
아님 그냥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하며 외치기?

3천 5백원을 내고 택시에서 내리며
얼굴에 부딪히는 서늘한 저녁 공기에 안도했다.

그 아저씨는 오늘도 누군가에게
"사는게 즐겁습니까? " 물어보고 있을까?

어쩜 어제 그렇게 화가 났던 건
그 아저씨의 질문이 불편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는게 즐겁습니까?"
질문 앞에 난 완.벽.하.게 당황했다.

"사는게 즐겁습니까?"

이 질문에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사람이 다가오면 자동문이 열리듯이
망설이지 않고 "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천번이라도 다시 태어나 살고 싶다! 라고 흔쾌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아니 이 질문이 최소한 불편하지 않은 사람은 얼마나 될까?

나는 왜.....그 질문이 불편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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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다예요 2006-09-16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이네요,
저는요 yes or no로 대답하라고 강요하는 게 제일 싫어요. 그런 사람들 은근히 폭력적이고 공포스러워요. ^^;

혜덕화 2006-09-16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처님 말씀에 따르면 삶은 고통이지요. 생노병사를 피할 수 없으니까요.
기사분의 질문은, 오늘은 즐겁습니까가 되어야하지 않을까 싶네요.
사는 것은 님의 말대로 힘들 때도 즐거울 때도 있는것이니까요.
지옥이라고 말하는 기사분은 그날 하루가 정말 힘들었나봐요. 수선님에게까지 짜증을 전염시키다니. ^^

다락방 2006-09-16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없어.'라는 대답 보다는 그 질문을 불편해 하는 쪽이 삶에 더 충실한것 처럼 느껴져요, 제게는.

마법천자문 2006-09-16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는 건 당연히 언제나 즐겁지요. 그런데 결제일에 카드대금 청구서를 보면 후회가 밀려오지요. 사는 걸 자제했어야 하는데... ㅠㅠ

비로그인 2006-09-16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절대적인 중도'인 저로서는 `아무 것도 아니에요'라고 대답했을 것 같아요. 그보다는 대답 자체를 안하는 편이겠지요. 하지만 보통은 즐겁지 않아요. 나머지 즐거운, 그 반짝 하는 순간들에 살아있는지도 모르겠어요.

kleinsusun 2006-09-17 0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게 다예요님, 네...."Yes" or "No"를 강요하는 사람들은 다분히 폭력적이죠. 근데...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도 그래요. 뭐든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하죠. 항상 선택을 해야만 하는.... ㅠㅠ "해야할 일"은 잘하고 계신가요?^^

혜덕화님, 네...그 아저씨는 어제 아주...침울해 보였어요. 더구나 그 끈적끈적한 노래를 듣고 있으면 싱숭생숭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았어요.
혜덕화님은 오늘 하루 어떠셨어요? 주말 즐겁게 보내세요!^^

다락방님, 삶에 충실하다......제가 삶에 충실한지 1분 넘게 생각해 봤어요.^^

나스랄라님, 안녕하세요! 첫인사 반갑습니당.^^
"나스랄라"는 어떤 뜻이예요? 궁금해요. 저는....다음달 카드값이 벌써 걱정되네요.

Jude님, 사실 저도...대답하기 싫었어요. 그런데 그 상황에서 대답 안할 수가 없었어요. ㅠㅠ 하루키의 <어둠의 저편>에서 읽었던 것 같은데...사람들은 행복한 기억의 연료 저장고를 태우며 산다고.... 그 부분을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던 기억이 나요.^^

드팀전 2006-09-17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은..즐겁죠..라고 답하시지 그러셨어요.단 "지금은"..을 강조하셔야됨...
삶 자체의 행복,불행을 물어보는 것은 폭력적이며 또 근본적인 질문일 수 도 있네요.
ㅆㅆ ..행복한 삶이 쪼개지는 건 한방이거든요... 미래를 보여주지 않는 삶의 가혹성은 생각보다 잔인하기도 합니다....제가 늘 두려운건 그런 거지요.어느 한방에 삶의 방향이 급변하는 그런 것들..그 알 수 없는 운명은 '지옥'에 빗댈 수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살아가면서 그런 일이 없으시길.물론 제게도.

2006-09-17 18: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법천자문 2006-09-17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스라엘군을 물리쳐서 좀 유명해졌는줄 알았는데. ㅠㅠ 저는 레바논 무장단체 헤즈볼라 지도자인 '하산 나스랄라' 라고 합니다. 한국인 대원들을 모집하기 위해 알라딘에서 얼마 전부터 암약을 시작했습니다.

로드무비 2006-09-18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는 읽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불편하고 뭔지 짠하네요.
초라한 중년남자의 루저 같은 태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