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책 선물하기를 좋아한다.

나름 책 선물 할 때, 고민을 많이 한다.
선물할 사람을 떠올리며 한참을 생각한다.

예를 들면, 산을 좋아하는 회사 선배의 작년 생일에는
심산의 <마운틴 오딧세이>, 빌 브라이슨의 <나를 부르는 숲> 등
산에 대한 책 4~5권을 커다란 리본으로 묶어서 선물했다.

작년 연말에 정년 퇴직하신 거래선 이사님께는
장정일의 삼국지 10권 세트를 고급스런 포장지로 포장한 다음
들고 가시기 좋게 굵고 질긴 리본으로 묶어서 선물했다.
원래 역사서를 좋아하시는 분이고,
은퇴를 하면 당분간 등산과 독서를 하며 쉬겠다고 하셨기에 생각해 낸 선물이었다.
부피도 큰 것이 송별회 자리에서 뽀다구도 날 꺼라고 생각했다.
그 선물은 정말....대박이었다.

책을 선물 받고 엄청 기분이 좋았던 적도 많다.
예를 들면, 작년 내 생일에 회사 후배 남생이는
요시나가 후미의 <사랑해야 하는 딸들> 일본어 원판을 선물했다.
아....그 잔잔한 감동.
작년에 나는 요시나가 후미에 열광하고 있었고, 또 일본어를 배우고 있었다.

책을 선물하고, 책을 선물 받는 일은 참....행복하다.

여태까지 책을 선물한 많은 기억들 중,
가장 기억에 남고, 또 가장 기뻤던 기억 중 하나는
방콕에서 K상무님께 아사다 지로의 <장미 도둑>을 선물했을 때였다.

그 때가 아마...01년이었던 것 같다.
K 상무님은 前회사 태국법인 법인장이셨고,
난 태국 시장 담당자라 태국 출장을 자주 갔다.
가끔 법인장님이나 주재원들한테 책을 선물했다.
( LA나 Tokyo 같은 한국사람 많은 도시 아니면 한국책 사기 쉽지 않다.)

K상무님은 아주 감성적인 분이셨다.
물론...그게 아무에게나 보이는 건 아니었다.
K상무님이 뭐 "감성경영" 이런걸 하신 것도 아니고,
요즘 신문에 자주 나는 OO건설 사장처럼 직원들에게 시를 선물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언뜻 보기에는 무뚝뚝하고 무서운 전형적인 임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직원들과의 술자리에서
한마디씩 툭툭 던지는 상무님의 말 속에서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
또 법인장실 책장에는 잭웰치, 피터 드러커 이런 책들 사이 사이에 문학서들이 수줍게 꽂혀 있었다.
(회사 생활 10년차의 짠밥으로 볼 때, 임원실 책장에서 문학작품을 찾기란
낙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기 보다는 쉽지만, 쉬운 일만은 아니다.)

한 번은 K상무님께 아사다 지로의 <장미도둑>을 선물했다.
그 때, <장미도둑>을 읽고, 특히 단편 중 <나락>을 읽고 거의 신음을 흘리며 감탄했다.

아사다 지로는 언뜻 보기엔 잘 팔리는,
말랑말랑한 소설 써서 먹고 사는 구라쟁이 아저씨 같지만,
가끔씩 만나는 그의 단편들은 결코 녹록하지 않다.

<나락>은 조직생활의 僞惡과 "虛"를 여실히 보여 주는, 섬뜩하기 까지한 작품이다.
조직에 몸담은 개인은 항상 가해자가 되기도 하고,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
<나락>의 주인공 같이 심약하고 그저 좋기만 한 사람은,
그래서 "만만하다"고 소문난 사람은,
그래서 온갖 사람들한테 이리저리 이용 당하는 사람은,
소리 소문 없이 "out" 된다.
<나락>처럼 조직에서 한 개인이 어떻게 몰락해 가는가를 잘 보여주는 작품은 정말이지 드물다.

난 K상무님이 아사다 지로를 아는지도 몰랐다.
그저 내가 <장미도둑>을 읽으며 많이 공감했기에,
<나락> 외에도 읽으면 마음이 잠시나마 따뜻해 지는 단편들이 많기에 선택했다.

그런데...
"상무님, 책 한권 사왔어요." 하며 책을 내밀었을 때,
상무님은 화들짝 놀라셨다.

" 너 내가 이 책 읽고 싶어하는지 알았었니?"

K상무님은 바로 며칠 전에 <장미도둑>을 사러 방콕에 있는 일본 서점에 가셨었는데,
책이 없었다고 한다.(K상무님은 일본서적은 거의 일본어로 읽으신다.)

상무님은 웃으며 말씀하셨다.
" 작년엔 출장자들 마다 <누가 내 치즈를 옮겼나>를 사와서 도대체 몇권을 받았는지 몰라. "

그 날 저녁에 K상무님과 출장자들의 저녁 식사가 있었다.
술이 어느 정도 돌았을 때, K상무님이 웃음을 띄고 말씀하셨다.
" 넌 참...하는 짓도 이쁘구나."

책을 선물하고, 책을 선물 받는 일은 참...행복하고 기쁜 일이다.
그런데... 이 일이 가능하려면 서로간에 "애정"이 있어야 한다.
상대방의 취향을 고려하지 않고 슈퍼마켓 가듯이 서점에 가서
베스트셀러 중 하나를 집어서 선물하려면 차라리 문화상품권을 주는 게 낫다.

몇년 전인가?
중학교 동창회에서 아주아주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너무 반갑다며, 한번 둘이 만나자고 집요하게 계속 연락하기에
나중엔 자꾸 약속을 미루기가 미안해서 황금같은 일요일에 만난 적이 있다.
그런데...그 친구의 용건은 따로 있었다. 아뿔싸!

그 친구는 암웨이를 하고 있었다.
물건을 사라는 거면, 샴푸나 몇개 사고 말겠는데
자기 밑으로 들어오라고 권유하는 거였다.
순간 확~ 짜증이 밀려왔다.

힘들게 표정관리를 하고 있는데, 그 친구가 책 한 권을 내밀었다.<레밍 딜레마>.
다이아몬든지 뭔지 돈 많이 버는 대빵의 성공사례를 녹음했다는 테이프와 함께...
모질지 못한 나는 싫은 티도 내지 못했다.
그 때 처음 알았다. 책을 선물 받아도 기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오늘도 후배에게 책 한권을 선물했다.
<우리 사랑하는 거야 미워하는 거야>
얼마 전 헤어진 남친과 "성격 차이"로 디따 힘들어 했기에...
도움이 되지는 않더라도 재미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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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벌식자판 2006-04-06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락이 뜸~~~~하다가 누가 만나자고 하면 긴장하지요. 헐 헐 헐
저도 오래도록 연락이 뜸하다가 누구한테 연락을 하려면 머뭇거려집니다.
행여나... 아쉬운 소리를 하려는게 아닌가 하는 인상을 줄까봐요.
그러니깐 결론은... 평소에 자주 연락을 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
에구.. 행설 수설이다.

2006-04-06 23: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영엄마 2006-04-06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책선물 받는 거, 하는 거(다른 건 살줄을 모르니...^^;;) 참 좋아해요~ 누군가가 좋아할만한 책을 고르는 거, 정말 상대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없으면 힘든 일이죠. 수선님은 그래서 주위 사람들에게 사랑받으시는 걸거예요. 이쁜 짓~~ ^^

다락방 2006-04-06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선님은 그런분이셨군요. 하는짓도 이쁜 분 :)

플레져 2006-04-07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보기에도 수선님은 이쁜 사람이에요.
하는 '짓'도 이쁠 수밖에요 ^^

2006-04-07 00: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늘빵 2006-04-07 0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조선인 2006-04-07 0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 회사에 부업으로 암웨이하는 사람이 둘이나 있어요. 허걱.

2006-04-07 09: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kleinsusun 2006-04-08 1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판님, 오랜만에 누가 전화했을 때 드는 생각. "결혼하니?" ㅎㅎㅎ
맞아요, 소중한 사람들에겐 잊지 말고 안부전화를 하자구요!^^

속삭이신님, 3권 아닌가요?^^

아영엄마님, 네...책 선물은 상대방에 대한 애정이 없으면 고르기가 힘들어요.
또....모든 선물이 그렇겠죠? 넥타이 하나도. 아영엄마님은 책 말고는 어떤 선물을 좋아하세요?^^

kleinsusun 2006-04-08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부끄부끄....^^

플레져님, 제가 보기에 플레져님은....아름다운 사람이예요.^^

속삭이신님, 진심으로, 마음이 짜~안하게 감사드립니다.

아프락사스님, ^^ * 1,000

조선인님, 그분들은 회사 사람들한테도 영업활동(?)을 하나요? ㅠㅠ

속삭이신님, <장미도둑> 꼭 읽어보세요. 제가 정말 좋아하는 단편집이랍니다.^^

2006-04-09 01:0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