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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페미니즘
벨 훅스 지음, 박정애 옮김 / 큰나(시와시학사)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의 원제는 [Feminism is for Everybody : Passionate Politics]
이 책의 주제를 적확하게 한줄로 표현한 제목이다.
이 책의 주제는 제목 그대로다.
페미니즘은 모든 사람을 위한 거다.이 세상 모든 이들.
여자도, 남자도, 성적 소수자도, 어린이들도...
이 책의 저자 벨 훅스는 페미니즘을 이렇게 정의한다.
페미니즘은 성차별주의와 성차별주의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종식시키려는 운동이다.
페미니즘은 反남성주의가 아니다.
페미니즘은 남성에 의한 여성 차별만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성차별주의가 몸에 밴 사람이 여자인가 남자인가 어린애인가 어른인가에 상관없이 그 모든 성차별적 사고와 행동이 문제라는 점을 꼬집는다.
페미니즘의 F자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키는 남자들이 많다.
페미니스트는 드세고 공격적이고, 남자를 잡아 먹을라 그러는 무서운 여자라고 상상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회에서, 즉 남자들로 부터 제대로 대접 받지 못하는 못생긴 여자들이 멀쩡한 여자들을 선동하는 운동이라고 매도하는 사람들도 있다.
페미니즘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도 많다.
부끄럽지만 나 또한 그랬다.
학교 다닐 때,
난 여학생협의회,여성운동 이런건 못생긴 애들이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다닌 학교는 여학생들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드넓은 여자화장실은 여학생들의 한적한 휴식공간이었다.
화장실 한켠에 커다란 쇼파가 있었다.
여기서 잠을 자는 애들도 있었고, 수다를 떠는 애들도 있었다.
심지어 이 쇼파에서 운동을 하는 애들도 있었다.윗몸 일으키기 이런거...
내가 여성운동은 못생긴 애들이 하는거라는 선입견을 갖게 된건 이 쇼파에서였다.
시험기간, 아침에 도서관 화장실에 가면
부시시한 머리, 츄리닝 차림에 윗몸일으키기를 하고 있는 언니가 있었다. 츄리닝 주머니에는 88Light가 들어 있었는데, 윗몸 일으키기를 하면 주머니에서 필터 가루가 흐르곤 했었다.
같은 과는 아니었지만,그 언니는 여러가지 활동을 적극적으로 했기 때문에 얼굴을 알고 있었다. 똑똑하고 성실하고 본받을 점 많은 선배였다.
하지만....난 그 언니의 차림새가 너무 싫었다.
학교에 어떻게 츄리닝을 입고 오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츄리닝 주머니에 끼워진 구깃구깃한 88Light에서는 필터가 부서져서 흐르고,도서관에서 밤을 새웠는지 머리는 부시시...
여학생협의회 하면 그 언니가 떠올랐고, 왠지 반감이 생겼다.
그 언니가 준 선입견 보다 더 중요한건,
내가 페미니즘에 관심이 없었던 본질적인 이유는,
학생 때 별다른 차별을 경험하지 않았다는 거다.
즉, 내겐 문제의식이 없었다.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그것도 빡센 영업조직에 최초의 여자사원으로 등장하면서
나는 여러가지 벽에 부딪히기 시작했다.
내가 만약 졸업과 동시에 뜨리뜨리한 남자와 결혼을 해서
마나님이 되었다거나,
여자가 대부분인 교사,디자이너 이런 직업을 가졌다면
아직도 페미니즘을 딴세상 얘기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사회에 나와서 느낀건,
수도 없이 벽에 꽝꽝 부딪히면서 느낀건,
여자로서의 불리함, 여자에게 가해지는 가부장제의 폭력만이 아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가부장도,그러니까 남자도 불행하다는 것을, 힘에 겨워한다는 것을,울고 싶어도 여자처럼 엉엉 소리내서 울지도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런 부조리함이 "아빠, 힘내세요!" 춤추면서 노래한다고 없어질까?
출근하는 남편에게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울어" 캔디 노래불러 준다고 해결이 될까?
페미니즘으로 부터 해방을 얻을 수 있는건 여자 뿐만 아니다.
남자들도 허울 좋은 가부장제의 권력을 내려 놓고,
자유롭고 행복해질 수 있다.
페미니즘은 反남성주의가 아니다.
벨 훅수는 페미니즘은 모두를 위해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를 위해서 필요하다는 것을 간결하고 명쾌하게 설명한다.
기존 사회에서 여자들이 "남성지배"로 부터 얼마나 피해를 당하고 있는지, 피해자로서의 여자와 가해자로서의 남자를 분리하여 성토하는 그런 책이 아니다.아무런 대안 없이 그저 피해의식과 적대심을 부추기는 책도 아니다.
예를 들어 "가정폭력"에 대한 벨 훅스의 관점을 보자.
페미니즘 이론은 어린이에 대한 성인 여성의 폭력이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비판도,실천적인 개입도 제대로 이루어 내지 못했다.
...(중략)....
여성은 이러한 폭력을 남성들과 똑같이-더 많이는 아니라고 할지라도-영구화하고 있다.어린이에 대한 성인 여성의 폭력에 정면 대응하지 않은 것은, 페미니즘 사상과 실천 사이에 하나의 심각한 틈새를 벌여 놓았다.남성 지배만을 강조하는 것은,페미니스트 사상가까지 포함하여 여성들로 하여금 쉽사리 어린이를 학대하는 여성의 존재를 무시하게 만든다.그것은 우리 모두가 가부장제적 사고를 받아들이도록,힘있는 자는 힘없는 자를 지배할 권리가 있으며 힘없는 자를 복속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이든지 사용해도 된다는 지배의 윤리학을 수용하게끔 사회화되었기 때문이다.(p165~166)
즉, 페미니즘에서 비판의 대상은 남자에 의해서 여자에게 가해지는 폭력만이 아니다. 여자건,남자건,어린이건, 노인이건 가부장제적인 사고가 체화되어 일어나는 모든 폭력과 지배를 비판한다.
페미니즘을 "균형 잡힌 시각"으로 공부할 수 있는 좋은 교재다.
사족) 벨 훅스는 미국에 살고 있는 흑인 페미니스트이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상황들은 한국사회와 괴리된 경우가 꽤 있다. 한국에도 우리의 실정에 맞는 이런 명쾌한 페미니즘 개론서가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