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교로움. 해체되어야 합니까?
내가 내게 일어난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전략적 본질주의(Strategic Essentialism)
내가 경계하게된 종류의 화법이 있다. 나 자신은 저들과 무관하다는 자기 인식이 드러나는. 너도 그래, 너도 똑같아라고 뱉어주려다가 참는다. 말해줘도 못 알아먹으니까. 어쨌든 나 자신은 무고하다고 항변하지만 이 구조 속에 있는 한 모두 한 비탈이라는 걸 그들은 알고 싶지 않은 것 같다. 정말로 무고하고, 그래서 대단하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다. 아니 어떤 부분에서는 그런 이들을 인정하고 있다. 헌데 그게 백인성이고 그게 근대성이고 그게 애석한 (가끔 흠씬 두들겨 패주고 싶은) 남성성이다. 바람을 피우지 않았으니 너를 때려도 되고, 성매매 업소에 출입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좋은 남성이 된다. 그들의 자긍심에 훼방을 놓고 비아냥을 투척하고 싶다. 당신의 무고함에 나의 피해는 상쇄되지 않으며. 집단으로서의 남성은 집단으로서의 여성을 억압해왔다. 그건 사실이다. 나는 전제를 질문하는 데, 너의 억울함이 고작 성 구매를 하지 않았다 일 때. 그게 억울해? 고작? 그렇게 치자면 나도 꽃뱀 아니야. 나도 김치녀 된장녀 김여사 아니야. 그게 억울하면 군대가.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감정적 불쾌함 말고 무슨 도움이 되는 거지?
내 입 말로 구조주의는 그런 질문과 반성에서 시작되었고(우리 모두가 어떤 시스템 안의 가담자라는), 포스트구조주의는 그렇다면 그 안에서 그걸 넘어설 수는 없단 말인가.로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발본색원을 위한 사유 방법을 제안한 거라는 생각이다. 구조 안에서 구조를 넘어서는 (서구 지식인들의) 반성, 반성문이다. 각자가 넘어선 방식은 다르지만. 조건은 치열해야 한다는 거. 그러려면 일단 먼저는 심각한 구조주의적 태도로 생각해 보아야 했던 것이 맞다. 요즘엔 치열하게 자신을 분석한 한 사상가의 정신분석/자서전을 읽고 있다. 인간의 내면이 얼마나 치밀하게 관계 속에서 연결되어 만들어지는지를 대목마다 발견한다. 벗어날 수 없구나. 선택할 수 없구나. 때로는 선택했다고 믿어야만 살 수 있었겠구나. (물론 이러한 사후 해석으로는 불충분한 우발성까지도 그는 이야기하겠지?ㅋㅋ)
노오력 하면 된다. 나는 그들과 다르다. 조건을 문제 삼지 않은 채로. 너와 나의 관계성을 부정하는 것. 코기토적 자아를 전제하는 것. 즉 대상화. 타자와의 연결을 끊고 외부를 만드는 것. 그러한 인식의 전면적 재생산이 자본주의(근대)의 시작이며 결과는 2차 대전과 인류세다. 물론 이전에도 폭력은 있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폭력이 (물리적 폭력 포함 언어, 제도, 인식과 시선까지도) 대량 생산되며 속속들이 개별 인간을 (셀프포함) 통치하지는 않았을 거다. 대상화의 시초는 잉게보르크 바흐만 전기 영화 속 그녀의 주장대로 여성에 대한 타자화에서부터였던 것으로 보인다. 여성 억압은 노예제보다 먼저 시작되었고, *근대적 주체성은 젠더화와 동시에 본격화되었다.* 때문에 근대적 주체 혹은 본질주의는 부지런히 해체되어야 하는 것이 맞다. (물론 사람들은 자기가 근대의 인식구조 안에서 말하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걸 위해 공부가 필요한 것 같은 데. 대체 누구라서? 나의 물음표는 그러한 공부의 조건을 겨냥한다.)
언젠가 스스로 물었던 적이 있다. 나는 주체가 되어야 합니까? 해체되기 위해서?
(https://blog.aladin.co.kr/jyang0202/14315328)
지금은 그렇다.라고 임의고정 해두겠다. *해체되기 위해서 주체가 되어야 한다.* 그들에게 규정당하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를 규정해야 한다. penis/pen을 들고 써야 한다. 구조 안에서 억압의 인식. 그것을 쓰는 데에 내가 본질주의자라는 혐의를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 억압이 없다고 생각하면 적응해 살면 된다. 못 살겠으면 내가 억압받고 있다는 걸 인식해야 한다. 명목상의 신분제가 사라진 사회에서 그건 꽤 어려운 일이다.
별수 없다. 읽고 써야 한다. 내 안에 있는 것들. 따로 떨어져 있지 않은 것들. 나는 감히 그렇게 느낀다. 크게는 문명에 역사에. 작게는 나 자신의 일기장에 나 스스로를 만들어야 한다. 이런 내가 있으니까. 나는 없지 않으니까. 여성의 목소리는 역사에 기입되지 못한 채로 오랫동안 수다 혹은 잔소리로 휘발시켜졌으니까. 자아를 만들지 못해서 타자를 매만지다가 클리셰가 되어버린 엄마들 또는 신경증으로 고통받았던 여성들. 마녀들. 역사(문자) 이후의 여성의 역사. 그들과 명확하게 선을 그으며 나타난 18세기의 일부 여성들. 다락방의 미친 여자들(글 쓰는 여자들. 명예 남성들.)이 탄생했고. 그리하여 애석하지만 페미니즘은 1세계의 것(부유함과 한가함을 일부 여성에게도 풍족히 나눠주었던)이 맞다.
“(29) 푸코는 글쓰기와 욕망의 대립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푸코는 *근대 욕망이 언어, 그중에서도 특히 글쓰기에 기대고 있다는 점*을 사유하도록 만든다. (30) 푸코의 주장에 따르면, 섹스가 지금까지 오해되어 왔기 때문에 제대로 알아야 할 어떤 것으로, 억압되어 왔기 때문에 해방되어야 할 어떤 것으로 재현하는 것은 그 자체로 성의 한 요소로 작용한다. 무엇보다 섹스에 대한 이런 재현들은 근대적 성에 특정한 정치적 의미를 부여한다. 그런데 *이는 특정한 형태의 성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한다*. 푸코가 말했듯이, 18세기와 19세기 동안 욕망이 개인의 내면에 숨겨져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은 그때까지 육체의 표면에 놓여 있던 에로티시즘을 효과적으로 대체하는 광범한 언어화 과정을 촉발시켰다. 성담론은 이런 유형의 쾌락을 더 근원적이고 자연적이지만 여전히 환상적인 욕망의 대체물로 보았다. (31) 억압되어 왔다고 가정되는 성의 형태를 언어화하려는 시도는, 인간의 본질적 본성과 문화에 의해 부여된 개별 정체성을 구별하는 행위를 반복한다. 하지만 이런 구별을 통해서는 문화와 자연을 상호 의존적 구성물로 다룰 수 없다. 이 상호 의존적 구성물은 문화가 수행하는 정치적 기능이다. 푸코만이 성의 연구를 욕망의 본성에서 욕망의 정치적 효용성으로 이동시켰다. 그는 근대 욕망이 글쓰기에 기대고 있다는 점을 주장하기 위해 욕망과 글쓰기의 대립을 거부한다. … 다시 말해 *푸코는 억압을 수사적 비유일 뿐 아니라 욕망의 생산수단으로 이해할 것을 요구*한다.
(33) 내가 주장하려는 논점은 근대문화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여성적 영역과 남성적 영역을 만들어 내기 위해 언어의 해체가 일어났다는 점, (34) 나는, 젠더화된 근대 주체성은 19세기 시와 심리이론에 기호학을 제공해 주기에 앞서 먼저 여성용 글쓰기에서 여성적 담론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다. *성담론이 사람들의 상식 속으로 들어가 사람들이 자기 자신과 자신들이 타인에게서 욕망하는 바를 이해하도록 만든 것은 18세기의 인식론적 논쟁이 아니라 젠더화된 담론*이었다.”
- 낸시 암스트롱 <소설의 정치사>
글쓰기(혹은 언어)와 자꾸 엮어서 생각하게 된다. 추측건대 스피박이 말하는 *전략적 본질주의*는 이런 의미일 것이다. 규정 당하지 않기 위해 규정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규정한다는 것은 본질주의라는 혐의를 벗어나지는 못한다. (셀프 규정도 마찬가지. 어쨌든 우리는 엮여 흐르고 있는 의미들을 끊어내 절단면을 만들어 냈을 때만 의미화 할 수 있지 않는가. 얼마나 날카롭게 잘 끊어냈느냐가 잘 쓴 글의 척도 아니겠는가.) 언어활동 자체에 내장되어 있는 것이 본질이니까. 그러나 그것은 아무리 정교하게 끊어낸다 한들 실재 일 수는 없다. 라캉. 결여. 언어. 그러니까 언어 자체에 내장된 결여. 언어로 다 포섭되지 않는 나머지(실재). 우리는 거기에 다다르고 싶어 하지만. 언어로는 실재를 완벽하게 잡아챌 수 없다. 언제나 의미의 여분이 남는다. 그래서. 현실에서 중요한 것은 시니피앙. 결국 그걸 가지고 하는 게임 아닌가. 그렇다면 누구의 언어로 게임에 참여할 것인가. 타자들의 언어? 아니라면… 그들의 목소리에서 가까스로 추출해낸 나의 언어.
나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해체되기를 언제나 염두에 두며. 내가 주체가 되어야 하는 까닭은 근대가 규정하는 타자로 남고 싶지 않기 때문이며. 때때로 나의 입장에서 잠시 같이 서줄 사람들의 시야와 공명하는 것이며. 그건.
“(52) 다시 한번 우리는 ‘본질주의’의 문제, 즉 모든 여성이 실제로 억압받는 공통의 위치와 단일한 공통의 입장을 공유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도나 해러웨이와 같은 포스트모던 페미니즘 인식론자들은 확실히 서로 중첩되는 여러 억압의 형태가 존재하며, 그래서 또한 수많은 ‘부분적 시각 partial perspectives’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이 시각 각각은 실재의 어떤 차원에 관해서는 통찰력이 있지만 다른 차원에 관해서는 왜곡되어 있다. 이에 대한 해러웨이의 은유는 *우리 모두가 각자의 타자의 피로 세공된 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의 어떤 양상을 보는 능력은 언제나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특정 타자에 대해 특권을 갖는 데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 앨리슨 스톤 <페미니즘 철학>
타자의 피로 세공된 눈을 가지는 것. 즉, 나는 점점 더 무고하지 않아질 테다. 언어를 가질 거니까. 나에게도 나의 죄를 고백할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아마 나는 아주 엉망으로 개념들을 활용/오용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여기까지가 나의 공부라고 생각하고 부끄러워하지 않기를 결단한다. 나에겐 내가 쓰는 것의 진위 여부를 보증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마도 없지만 부지런히 읽었다는 것으로 정당화하련다. 부끄러움마저 책임지고 감당하기로 한다. 해체를 염두에 둔다는 것은 허심해지기로 하는 것이다. 만약 내가 잘못 알고 있거나 잘못 떠들었다면 그건 기꺼이 고치면 된다. 다 허물어도 된다. 파도는 덮치고 모래는 쓸려간다. 자국은 남지 않게 될 것이다. 인간 자신이 구축한 판타지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아무리 어떤 성을 쌓고 그림을 그린 대도. 바람은 파도는 불가항력.
나는 내가 만든 것들이 폐기처분 되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들어 내는 과정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세계의 문제는 자신들이 주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건 세계에 속한 내게도 있다.
앎비앎 친구님의 글속(https://blog.aladin.co.kr/798187174/15259889) 아래 문장에 영향받아 썼다. 종종 탈식민주의/포스트구조주의 텍스트에서 등장하는 미소지니적 인식에 나는 분노와 같은 밀도의 긴장감을 느낄 때가 있다. 타자의 피로 세공된 눈.에 대해 더 알아가고 싶다.
“그러니까, <검은 피부, 하얀 가면>에서 내가 발견한 파농은, 탈식민을 시도하는 지식인이되, 완벽한 인간 백인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백인 여성이 필요한 혹은 백인 여성을 ‘도구화’ 해야만 하는 유색인 남성이다. 오리엔탈리즘의 렌즈로 ‘니그로’로 규정된 남성이 똑같은 방식으로 ‘여성’을 타자화,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고, 페미니즘에 대한 이해 혹은 인식이 내 읽기 방식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는데, 적어도 내게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은 그렇게 읽혔다. 이 책의 저자는, 파농을 그렇게’만’ 읽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한다.”
- 단발머리, <전략적 본질주의>
(덧, 또 민원들어오겠네. 알아먹게 쓰라는ㅋㅋ 아직은 공부가 부족해서 안되겠습니다. 10년 뒤에는 도전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