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과 파농
<파농>을 읽는다.
해설서를 읽는 일에는 장단점이 있다.
단점을 이야기한다면, 그건 어디까지나 저자가 안내해 주는 범위 안에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인데, <꿈의 해석을 읽다>는 양자오가 이해한 범위 안에서,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는 우치다 다쓰루, <현대사상입문>은 지바 마사야가 안내하고 설명한 범위 안에서 이해할 수 있다는 거다. 그런 경우, 당연히 저자에 대한 신뢰가 독서의 바탕이 되어야 할 것이다. 저자의 설명과 통찰이 번뜩이는 경우라면, 원래 만나려던 책이나 인물보다 그에게 빠지는 경우도 가능할 텐데, 최근에 읽은 슬라보예 지젝의 <How to Read 라캉>이 그런 경우였다. 그의 말에 현혹되어(?) 이미 품절되었다는 <헤겔 레스토랑>과 <라캉 카페>를 도서관 찬스를 이용해 서둘러 준비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해설서 읽기의 장점이라면, 프로이트와 푸코와 바르트와 라캉의 정수를 혹은 엑기스를 살짝 맛볼 수 있다는 것인데, <꿈의 해석>을 혹은 <감시와 처벌>을, <에크리>를 읽기 겁나는 경우에는, 이런 해설서는 친절하고 야무진 안내자가 되어 줄 것이다.
<파농>의 저자는 ‘이경원’이고, 그래서 이 해설서는 ‘이경원의 파농’이다.
저자는 후대인들이 파농을 기억하는 방식으로 고전적 파농주의와 비판적 파농주의가 있다고 말한다.
우선 고전적 파농주의는 (신)식민주의의 극복이라는 정치적 목표와 연계되어 있었기에 혁명적 실천성을 띠고 있었던 반면 비판적 파농주의는 파농 연구가 서구의 제도권 학계로 편입되면서 탄생한 것이기에 파농의 제3세계적 맥락과 급진적인 색채가 희석되어 버렸다. 또한 파농이 전유한 이론의 두 축이 정신분석학과 마르크스주의라고 할 때, 고전적 파농주의는 오직 '마르크스적 파농'만 부각해왔고 비판적 파농주의는 그동안 간과되었던 '프로이트적 파농'에만 주목하고 있다. (90/624)
고전적 파농주의의 대표작이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이고, 비판적 파농주의에서 관심을 기울이는 파농의 저작은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이다. 고전적 파농주의에서의 파농은 혁명가이고, 비판적 파농주의에서의 파농은 정신분석학자이다. 저자는 파농에 대한 이런 상반된 접근방식이 ‘진짜 파농’에 대한 논쟁으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파농을 정신분석학이나 탈구조주의의 틀로만 해석하는 것이 파농을 이해하기에 부족한 것처럼, 마르크스주의만으로 파농을 해석하는 것 역시 문제적이라고 주장한다. 저자가 예를 든다.
예를 들어, 페미니스트들은 어떤 급진적인 주장을 하기 위해 파농을 찾지 않는다. 그들이 파농에 눈길을 돌리는 이유는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문제에 무관심한 제3세계 민족주의의 맹점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인물이 파농이라고 생각하거나, 반대로 파농에게서 제3세계적 페미니즘, 즉 페미니즘과 탈식민주의의 연대 가능성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88/624)
나는 이 단락에서 놀라고 말았는데, 파농의 책을 딱 1권 읽은 사람으로서, 비판적 파농주의, 정신분석학 측면에서 높이 평가받는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을 읽고 정확히 위의 문단처럼 생각했기 때문이다. (추석과 파농: https://blog.aladin.co.kr/798187174/12050226)
내 영혼의 가장 검은 부분으로부터 [흑백] 줄무늬 지대를 가로질러 단번에 백인이 되려는 저 욕망이 솟아오른다.
나는 흑인으로 인정받고 싶지 않다. 백인으로 인정받고 싶다.
그런데-그리고 이 점이 헤겔이 기술하지 않았던 인정 형태인데-백인 여성이 아니라면 다른 누가 그렇게 해주겠는가? 그 여성은 나를 사랑함으로써 내가 백인의 사랑을 받을 가치가 있음을 증명해준다. 나는 백인 남성으로서 사랑받는다.
나는 백인 남성이다. (63쪽)
한 번밖에 읽지 않았으니 내 생각에 확신을 가질 수는 없지만, 흑인과 결혼하지 않으려는 물라토(백인과 흑인 간의 혼혈) 여성에 대한 적의와 백인 여성의 사랑을 쟁취해 백인 남성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이 한 명의 흑인 남성 안에 혼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인종 차별이라는 폭력 앞에서 백인 여성에 대한 숭배와 흑인 여성에 대한 멸시가 교차하고 있다. 더 하얘지기 위해 백인이 필요하고, 더 검게 되지 않기 위해 흑인을 피하고 싶은 건 남자든 여자든 마찬가지다. 두 번 버림당한, 혹은 버림당할 운명의 흑인 여성이 떠오른다.
그러니까, <검은 피부, 하얀 가면>에서 내가 발견한 파농은, 탈식민을 시도하는 지식인이되, 완벽한 인간 백인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백인 여성이 필요한 혹은 백인 여성을 ‘도구화’ 해야만 하는 유색인 남성이다. 오리엔탈리즘의 렌즈로 ‘니그로’로 규정된 남성이 똑같은 방식으로 ‘여성’을 타자화,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고, 페미니즘에 대한 이해 혹은 인식이 내 읽기 방식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는데, 적어도 내게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은 그렇게 읽혔다. 이 책의 저자는, 파농을 그렇게’만’ 읽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한다.
책의 후반부에는 <파농을 이해하기 위한 용어 해설>이라는 챕터가 있다. 여러 개념 중에 전략적 본질주의(Strategic Essentialism)가 눈에 띈다.
탈식민주의 비평가 스피박(Gayatri hakravorty Spivak)이 페미니즘의 여성주체 논쟁에서 본질주의의 모순을 피해가면서 동시에 본질주의를 전유하기 위해 제안한 개념이다. 가령 가부장제의 억압주체 '남성'을 데리다의 해체론을 이용하여 해체하면서 저항주체 '여성’을 구성하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요 이론적 허구이지만, 저항담론의 토대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여성'이라는 일종의 본질주의적인 범주를 상정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그렇지 않으면 '여성’이 주체가 된 저항담론이 아예 출발할 수 없기 때문이다. (595/624)
계급, 인종과 함께 사회적 분석 범주(category)로서 젠더가 작동하기에, 젠더에 대한 고려 없이 인간과 사회, 자연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사실(<다시 페미니즘의 도전>, 103쪽)이지만, 젠더가 성차별, 구체적으로는 ‘여성 집단’에 대한 억압으로 강력하게 작동하는 것 역시 피할 수 없는 우리네 현실이다. ‘여성’이 주체가 된 저항 담론으로서의 ‘파농 읽기’가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그런 측면에서 탈식민주의를 지향하는 지식인이었으되 백인 여성을 희구했던 파농의 한계 역시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자신의 온 삶을 불태우며 ‘흑인성’과 ‘식민주의’ 타파를 위해 고군분투했던 파농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더 읽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