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의 이론과 비평] 주체의 죽음과 에이드리언 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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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이론과 비평 - 이론을 통해 현대 여성 소설 비평하기
수잔 왓킨스 지음, 김명주 옮김 / 충남대학교출판문화원 / 2020년 9월
평점 :
실은 나도 단발머리님과 같은 곳에 밑줄을 그었었다. (왜죠?) https://blog.aladin.co.kr/798187174/14310972 트랙백 걸어둔다.
어디보자, 1997년 imf(신자유주의) / 2001년 이 책의 질문 수준?! /2019 펜데믹 (나는 코로나19 이후 2년을 메타버스 혹은 NFT 담론이 삼켜버린 플랫폼 자본주의의 전면화라고 제법 힘주어 생각한다… 왜냐면 회사에서 정리되다 시피 정리하고 지낸 이 시기 플랫폼 없었으면 굶어 죽었음ㅋㅋㅋㅋ 플랫폼의 위력과 무서움, 개같음을 실제로 체감함ㅋㅋ 말이 좋아 메타버스지 싫지만 적응할 수 밖에 없었던 그런.)
“(278) 페미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한 많은 논쟁 중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 모든 논쟁이 제1세계에서만 해당되는 일이라는 사실이다. 주체의 죽음, 역사의 죽음, 형이상학의 죽음과 같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장은 서구 자본주의 사회에 살지 않는 사람들에게 별 의미가 없다. 자본주의 서구에 사는 여성들에게는 꽤 의미가 있지만 말이다.”
이 문장에 동의해서가 아니라 비동의해서(?)다. (여기에 대한 나의 물음표는 매우 거칠다. 그런데 물음표로 남겨두려고 일단 써둔다. ㅜㅜㅜ 엉망이라 미안하다. 자야함. 내일 일찍일어나야함. ㅜㅜㅜㅜ )
이 논쟁 페미니즘 읽는 한국 녀성에게 의미 없지 않다… 아니…!!!! 매우 의미있다. 논쟁 자체가 의미가 있다기 보다는. 포스트모더니즘 ‘과’ 페미니즘이 지금을 사는 내게 의미가 있어졌다. 이들의 작업에 *의미*가 있다고 느껴진다. (이건 진심 내가 페미 안됐음, 몰랐다. 이 무지막지하게 어려운 걸 왜 알아야하겠다고 생각했겠냐?) 그건 우리가 같은 위치나 같은 자리여서가 아니라 좋든 싫든 모두가 연결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운 나쁘면 이런 세상에서 60년을 더 살아야 함.
형이상학도 죽었고, 주체도 죽었고, 역사도 죽었는 데 서양백인남… (특별히 실리콘 밸리의 미백남…ㅋㅋㅋ)들이 만든 스마트폰 + 플랫폼 자본주의 때문에, 아주 본 적없는 여성혐오(N번방, 불법촬영)가 한국에서 비트코인 떡상과 더불어… 다크웹과 함께… 알고리즘으로 살아나 버려서 폐기해야 하는 형이상학도 죽었어야할 주체도(ㅋㅋㅋ) 좀비가 되어 돌아다니며 전세계 여성들을 혐오중이다.
그리고 전 세계 여성들이 연결되어 싸우고 있고. 근데 그걸 요즘 젊은 여자들 정말 왜 이렇게까지 이기적이며 남성을 혐오하냐고 해버리면 저는 항상 분노의 급발진 버튼이 눌리지만....요?
변해버린 세상을 더 민감하게 인식할 수 밖에 없는 위치성(2020년대의 여성들)의 목소리 말고 지금 한국에서 더 들을 필요가 있는 이야기가 있나? 윤석열? 이재명? 주식, 재테크? 자기계발?
앞으로 내가 살아나가야 할 현실은 미백남이 만들어버린 이상한 것(스마트 폰)을 어떻게 다루느냐의 문제라고 본다. 진짜, 만든 애들도 지들이 뭐 만들었는 지 모르는 것 같긴 한데… 기술은 되돌릴 수 없다. (여러분, 벌써 3년 전 것이긴 하지만 넷플릭스 <소셜 딜레마>꼭 보세요. 그리고 금욕 상자를 사요.) 그러므로. 포스트 모더니즘 난 잘 몰라도 일단 내게 온 페미니즘 너무 중요하고. 그거 계속 내 방식으로 공부할 건데… 알듯 말듯 뭔가 너무 어렵고. 요즘엔 사실 진짜 철학 책 봐야 하는 건가?하는 생각도 좀 들고... 흑흑....
아무튼 여러 모로 상황이 공교롭다.
전근대/근대/탈근대에 대한 문제 의식, 그러니까 어쩌면 자명하고 확실한 *주체(자아)*에 관한 질문일지도 모르는 것에 대해서 난 계속해서 ?????? 어떤 물음표를 가지고 있었다. 난 봉건(ㅋㅋㅋ거의 전근대적인 환경 군군신신부부자자한 가족ㅋㅋ)에서 자라 왔기 때문이다. 내가 제대로된 자아를 적립(?)하지 못하는 분열... 거기엔 젠더화된 공감이나 이해력을 교육 받아온 페미니즘적인 이유도 분명 있지만, 내가 나 스스로 나 자신을 주장할 필요를 거의 느끼지를 못했던 것은 분명 그런 대가족 중심의 양육 환경이 있다. 주체나 혹은 자아일 필요없이 맡은 역할 잘하고 밥만 먹으면 만고 땡이었던. 니가 좋은 게 내가 좋은 거고 내가 좋은 게 네가 좋은 것인 혼융의.
그러니까 내 안에 있긴 했지만 표면화되지는 못했던 어쩌면 내가 계속 혼란스러워했던 대부분의 문제는 ‘자아’가 필요해지기 시작하는 시점(서울 살이)에서 부터 전면화 되었다는 생각.
그걸 어떤 분리되기의 어려움이라고 적을 때도 있고, 자아를 찾아야합니까? 꼭? 이럴 때도 있고… 이제야 겨우 자아감이 생긴다… 는 말로 쓰기도 하고… 글을 쓰면서 나를 알아간다는 말로 표현하기도 하며… 나는 전근대적 인간이 탈근대의 시대에 떨어져 버려 생긴 버그다! 이렇게까지 표현하는 데 (이제야, 자아를 좀 찾아야하는 건가?했더니 현실은 주체가 죽었다 하네 하면서 투덜ㅋㅋㅋ) 걍 이것도 이 시점의 나고. 희미한 선을 계속 글쓰면서 만들어 나가고 있는 것도 나(자아)라서.
무튼 이 책이 좋았다기 보다는 이 책을 통해서 단발님과 댓글로 이야기 해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나는 이러한 시절을 친구와의 대화(댓글)로 풀어나가보마 싶어진 게 좀 있다. 주체와 타자의 성실한 왕복~ 나의 앎비앎(앎을 비워내는 앎) 친구 단발님은
- 완벽한 주체도 완벽한 타자도 완벽한 근대도 없지만, 그렇게 말하는 ‘너’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계속 물어야할 거 같아요.
라는 댓글을 남겨주셨다!
그러니까. 나는 당장 사람한테는 그렇게 할 수가 없으니.
책들에게라도 묻는다. ‘너’는 누구냐. 너는 어디에 서 있냐.
이런 생각이 좀 확실히 들었다. 그걸 잘 아는 사람과 책을 나는 좋아하는 구나. 자기가 어디에 서있는 지 알기 위해 힘쓰는 사람들. 남의 목소리를 되받아 말하는 게 아니라 자기 목소리를 알려고 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목소리도 오해 없이 잘 듣는 사람들이라는 걸 좀 알겠다.
그러니 나는 자아가.
주체가 되어야 하는 걸까?
해체되기 위해서?
흠. 공교롭네.
덧1. 앨리스 자딘이 라캉, 데리다, 들뢰즈, 가타리 등 포스트 모던 프랑스 남성이론가들 글에서 나타난 문제적 여성성 지적하는 책이라는 <가이네시스> 읽어보고 싶은 데 없음. (그런데 이 명단에 왜 푸코는 없냐면 이건 나의 추측인데 푸코는 너무나 남자를 사랑해서 여성 자체를 지워버린 듯?ㅋㅋㅋㅋ 이런 푸코 너는 어디에 서있는 지를 진실하게 아는 자ㅋㅋ)
덧2. 아침에 일어나서 읽어보니 페이퍼에 오타 비문 너무 많고 내가봐도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싶어서 수정(했는 데도 못 알아 먹겠음ㅋㅋㅋㅋ). 오늘부터 보부아르 <제2의 성> 읽으시는 분들 힘내고요. 애초에 타자로 자신 스스로를 적립(?)하는 여성이 느끼는 분열이 현시점에 와서는 더 유효해진 데다가, 이 책이 정말로 새로운 시대(페미니즘의 시대)를 열었다고 생각합니다. 전. 계속 읽을 거예요. <제2의 성>의 위치성을 철학적(?)으로 한번 느껴보고 싶으신 분 들께 쉽고 쉬운 김은주의 <페미니즘 철학 입문>을 추천드립니다.
덧3. 이 책은 챕터 4(정신분석)뒤에 5(포스트구조주의)배치하고 6(포스트 모더니즘'과' 페미니즘)까지 나아간 구성이 좋은 것 같다. 프로이트에서 이어지는 정신분석(무의식)이 구조주의의 영향을 받은 라캉에게 영향을 미치고 구조주의적 풍토에서 글을 쓰고 배운 포스트구조주의 페미니스트들(이리가레, 식수, 크리스테바)에게서 특히 여성과 언어와 관련해서 어떤 통찰을 주는지 설명되는 부분이 짜릿했다. 왜 담론이 중요한지 새로운 언어를 향해서 써야 하는 지 좀 알 것 같았다. 1세계에서 한계를 맞딱뜨린 논쟁이 나의 3세계에서는 더 절박해진다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는 연결되어버렸으므로.
<물질적 페미니즘(스테이시 앨러이모)>의 서문에서 페미니즘은 물질의 중요성을 강조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과학학, 환경 페미니즘, 신체 페미니즘, 환경정의, (포스트) 마르크시즘 페미니즘, 전지구화 연구, 문화 연구 등등, 모든 분야에서 물질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물질에 초점을 맞춰야만 *몸을 가진 존재*의 경험을 제대로 성찰할 수 있고, 이원론적 사고(자연/문화, 과학/인문학)를 극복할 수 있으며, 드디어 인간 너머를 생각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알라이모는 이를 "초-신체성"라고 부른다. 😦 다 읽고 나니 번역판 저자 서문에서 짚어주신게 확 눈에 들어오네요. 앞으로 이런 책들을 읽어나야할 모양입니다. 스테이시 앨러이모(Stacy Alaimo) 도나 해러웨이, 로지 브라이 도티, 물질적 페미니즘. 체크. 그리고. 나 이모중의 왕이모 앨러이모 책이 이미 있더라? 왜죠? ㅋㅋㅋ
세 번째, "프렌치 페미니즘"은 미국과 영국의 특정한 정치적/지적 아젠다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견해도 있다. 즉, 일종의 제국주의적 시도로서 영미 작가들에겐 좀 불편한 아이디어를 "프렌치"로 분류함으로써, 타자화 시키고, 동시에 이국적인 느낌이 들도록 만들고, 그럼으로써 역설적으로 수용가능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 식수(알제리) 이리가레(벨기에) 크리스테바(불가리아) 출신인데... 프렌치 페미니즘으로 불림 ㅋㅋㅋ 이 책에서는 이들을 포스트구조주의페미니즘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 P198
포스트구조주의자들에게는 모든 글쓰기가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어를 통해서만 뭔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언어가 인식과 경험을 항상 구성하는 것은 아닐 지라도, 항상 인식과 경험을 매개하긴 한다. 자크 라캉은 구조주의 언어학의 통찰을 정신분석학의 이론과 임상에 적용하면서, 식수,이리가라이, 크리스테바의 글쓰기를 위한 모델을 제공한다. 이 경우엔 데리다의 영향보다 라캉의 영향의 훨씬 더 직접적이다. 라캉의 주장인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성되어 있다*는 우리가 정체성과 의식을 획득하는 것은 말하기를 배우는 순간이고, 더불어 우리가 무의식을 획득하는 순간이라는 뜻이다. - P202
식수, 이리가라이, 크리스테바가 라캉의 통찰을 적용할 때, 그들은 젠더에 대한 라캉의 가정을 먼저 전면에 내세워 강조한 다음 의문을 제기한다. 데리다와 라캉 모두에게, 여성성은 ‘배제된 것’이고, 동시에 어떤 본질이다. 데리다는 여성성을 언어학적 불고정성에 대한 비유로 사용한다. 라캉은 여성을 상징계에 존재하지 않지만 타자(엄마)에 대한 욕망을 억압함으로써 무엇보다 상징계를 창조해낸 그 무엇으로 여긴다. 다시 말하면, 남성주체는 엄마를 부정함으로써 가부장제에서 특권적 지위를 갖게 된다는 말이다. (중략) 식수, 이리가레, 크리스테바는 여성 작가들이 언어와 상징계로부터 본질적으로 배제되어 있다면, 과연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를 질문한다. - 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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